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27) 나그넷길 <36~40회>

오늘의 쉼터 2014. 6. 30. 21:07

금병매 (127)

 

 

 

나그넷길 36회 

 

 

 

 여인숙을 나선 월미는 양가구를 향해 걸음을 제촉했다.

 

양가구라는 곳이 여기서 얼마나 되느냐고 주인 아낙네에게 물어봤더니,

 

한나절쯤 걸리는 거리라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돈 닷 냥을 놓고 아침 일찍 혼자 떠나버린 무정한 그 남정네가 양가구까지 간다고 했으니,

 

빨리 뒤쫓아 가면 어쩌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양가구까지 가는 동안에 월미는 그 남정네를 만나지 못했다.

 

이미 먼저 그곳에 당도해서 자기 갈 데로 찾아들어가 버린 게 틀림없었다.

 




양가구라는 곳은 청하와는 비교가 안 되었으나, 꽤 넓은 읍촌(邑村)이었다.

월미는 거리를 누비듯 돌아다니며 남정네를 찾아보기까지 했으나 허사였다.

생각한 끝에 월미는 남정네를 단념하고, 애초의 결심대로 내왕이를 찾아 맹주 땅까지

가기로 다시 마음을 다져먹었다.

설령 남정네를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이제 자기를 받아들여줄 가망은 전혀 없다싶었던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떼내버리려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 살짝 몰래 도망을 치듯

떠나버렸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내왕이를 찾아가도록 하라고 간밤에 그처럼 타이르던 그의 외숙으로서의

그 간곡한 권유와 보나마나 처지가 어려운 게 뻔했는데도 맹주 땅까지 가는 노자에 보태라고

닷 냥의 돈을 높아두고 떠난 그 마음이 묘하게 가슴을 건드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떠날 바에야 지체알 것이 없다 싶어서 월미는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꽤나 기울었는데도

맹주 쪽으로 가는 길을 물어서 양가구를 뒤로 했다.

불과 이삼일동안의 우연한 정분이었지만, 월미로서는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어서

그 남정네가 어딘가에 있을 양가구를 떠나려니 목이 메이는 듯 몇 차례나 뒤돌아보고

울먹이기도 하면서 멀어져 갔다.

그날 밤은 공묘(孔廟)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노변에 주막도 촌락도 없어서 날이 저물자

도리 없이 산기슭에 있는 공묘를 찾아들었던 것이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데, 언제부터 사람의 손길이 끊어졌는지

거의 폐옥처럼 되어 있었다.

낡은 돗자리가 하나 깔려 있고, 밥을 끓여먹은 듯

불에 그을은 돌덩이가 몇 개 그 곁에 굴러 있기도 했다.

그 돗자리에 앉아서 월미는 양가구에서 마련해 가지고 떠난 만두와 전병 따위로

끼니를 때우기는 했다.

그러나 도깨비가 나오기에 십상인 그런 낡을 대로 낡은 덜렁한 건물 속이어서

 좀처럼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천장에서 달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지붕 한쪽이 온통 허물어져 있었던 것이다.

새우처럼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서 달빛을 바라보며 월미는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연히 또 남정네 생각이 떠오르며,

지난 이삼일 동안의 일이 마치 아득한 추억처럼 그립기만 했다.

 

 

 

나그넷길 37회 

 

 

 

 내왕이의 외숙이라는 그 남정네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헤어져버린 게 월미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프기까지 했다.

 

 어디 사는 누구라는 것을 모르니, 보고 싶어도 이제 다시는 찾아갈 수가 없질 않은가.

 

그처럼 자고 있는 동안에 떠나버리지만 않았다면 헤어질 떄 주소와 성명을 물어 두었을

 

 터인데 말이다.

월미는 그 남정네가 내왕이에 이어 두 번째로 살을 섞은 남자여서 그립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하더라도 마음이 끌릴 것 같았다.

 

어쩐지 무척 좋은 사람같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비록 자기를 떼어버릴려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 도망치듯 혼자서 떠나버리기는 했지만,

 

남달리 인정이 있고, 세상을 너그럽게 보는 믿음직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도둑들을 두둔하는 듯한 말까지 했으니 말이다.

 




생각할 수 록 희한한 일이었다.

월미는 스무살이 되는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도둑들을 그런 식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 남정네가 바로 양산박에 본거를 둔 송강이라는 호걸의 부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맹주 땅을 찾아가서 내왕이를 만나게 되면 그 외숙이 어디 사는 누군지 꼭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월미는 곧 씁쓰레하게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왕이를 만난 뒤에 그 외숙의 주소와 이름을 알아서 뭐 어쩔 것인가 싶어서였다.

그 때는 그 외숙에 대한 그리움도 애써 가슴 속에서 지워버려야 할 터인데 말이다.

흘러드는 달빛 아래 웅크리고 누워서 그런 저런 생각에 젖으며 잠을 이루려고 하던 월미는,

"어머나"

깜짝 놀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던 것이다.

한두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두런두런 주고받는 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곧 어지럽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월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 출입문 쪽을 휘둥그fp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모르겠는 듯 곧 도로 그 자리에 새우처럼 바짝 옆으로

웅크리고 누우며 그만 입고 있는 치마를 훌렁 뒤집어서 얼굴을 덮어 버린다.

겨울철에 포수에 쫓긴 산꿩이 도망가다가 안 되면 대가리만 눈 속에 처박는다더니,

흡사 그런 꼴이었다.

가뜩이나 삐딱하게 이지러져 간신히 붙어있는 문짝을 발길로 냅다 밀어버려 와장창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시꺼먼 사람들이 공묘 안으로 몰려 들어온다.

 

 

 

나그넷길 38회 

 

 

 

 틀림없는 도둑떼로구나 싶으며 월미는 숨도 제대로 쉬질 못하고 바짝 굳어져 있다.

"아니, 저게 뭐지?"

 




"사람인 것 같은데..."

"사람 중에서도 암놈 같다구. 허허허..."

사내들의 목소리가 다가오자,

월미는 오금이 얼어붙는 느낌이어서 부지중에 몸을 더욱 웅크리느라 꿈틀거렸다.

"이거 치마를 뒤집어쓰고 있네. 히히히..."

한 사내가 사정없이 훌렁 그만 치마를 들추는 바람에 월미는,

"어마야!"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린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술자리를 안 만들고..."

좀 뒤처져서 천천히 다가온, 두목으로 보이는 시커먼 사내가 버럭 목소리를 높인다.

"암놈이 한 마리 제 발로 굴러들어와 있지 뭡니까"

"뭐라구? 암놈?"

그러면서 그 사내는 월미 곁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허허허..."

우선 걸걸하게 웃는다.

이게 웬 횡재냐는 그런 웃음이다.

그리고 한 발로 툭 건드리며,

"야, 일어나!"

하고 내뱉는다.

그 목소리가 다른 사내들의 목소리보다 어쩐지 더 굵고 위압적이어서

월미는 버르르 떨면서 얼른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힐끗 쳐다보니 모두 넷이다.

그 두목은 얼굴의 구레나룻이 달빛을 받아 시커멓다.

온통 얼굴이 검정털에 싸여 있다.

그 털보가 묻는다.

"너 뭐야?"

월미는 무얼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얼른 뭐라고 대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두려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다.

"이거 벙어리 아냐?"

그러자 한 사내가,

"글쎄요"

한다.

그제야 월미는 얼른 입을 연다.

"벙어리 아니라구요"

"그래? 허허허..."

털보는 웃고나서,

"그런데 왜 대답을 안해? 왜 여기서 자고 있느냐 말이야?"

이번에는 좀 구체적으로 묻는다.

"잘 데가 없어서요"

"집이 없단 말인가"

"예"

 

 

 

나그넷길 39회 

 

 

 

 "그럼 거지라 그건가?"

"아니예요. 맹주 땅을 찾아가는 길이라구요"

 




월미는 남정네가 일러주던 말이 생각나서 재빨리 '맹주'를 들먹인다.

"맹주 땅을? 무엇하러?"

"저... 오라버니를 만나려고요"

애인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라버니를 만나러 간다는 편이 어쩐지 유리할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렇게 대답해 버린다.

"오래비가 거기서 뭘 하는데?"

"귀양살이를 갔어요"

"귀양살이? 무슨 죄를 지었지?"

이럴 때는 또 주저 없이 서문경이를 들먹이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월미는

거침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막집에서 남정네와 주모에게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내왕이가

억울한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서문경에게 아내를 빼앗기게 되자 분에 못 이겨 복수를 하려고 방화 살인 미수,

 그리고 보물주머니를 훔쳐가지고 달아나다가 붙잡혀 결국 맹주 땅으로

귀양을 갔다고 얘기했다.

그 내왕이가 자기 오라비라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해야 자기 오라비의 죄가 이 도둑들의 비위에 들어맞아서

한 통속으로 여기게 되어 동정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나자 털보는,

"너거 오래비 배짱 좋은데. 한꺼번에 세 가지 일을 해치우려 들다니,

사내가 그 정도는 돼야 쓰지"하고는

"서문경이란 놈이 색골인 모양이지?"

히죽이 웃으며 묻는다.

이미 청하현을 멀리 벗어난 고장이어서 서문경이가 어떤 사람인지 도둑들도 모르는 것이었다.

"색골이라도 보통 색골이 아니라구요.

여편네가 여섯이나 되지 뭐예요.

그런데도 또 송혜련이를... 아니, 우리 올케를 일곱 번째 마누라로 삼으려고 빼앗았다구요.

그것뿐이 아니예요.

 집안의 하녀들을 건드리는 건 예사고,

 바깥에서 오입질을 밥먹듣이 하고 돌아다닌다구요. 술도 고래고..."

"허, 그래? 그놈 참 난놈인데...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려면 그 정도로는 태어나야 되는 건데..."

뜻밖에도 털보는 몹시 부러운 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월미는 너무 의외여서 멀뚱히 털보를 쳐다본다.

마구 욕을 해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난놈'이라니...

그렇다면 이거 내가 말을 잘못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도둑들이란 좋고 나쁘고는 상관하지 않고,

그저 유별난 사람은 다 좋게 생각하는 것인지... 뭐가 뭔지 알 수 가 없었다.

 

 

 

나그넷길 40회 

 

 

 

 오라비가 귀양 가게 된 까닭을 말하니 사내가 배짱이 그 정도는 돼야 쓴다고 했고,

 

서문경이 얼마나 색골인가를 얘기하니까 이번에도 역시 난놈이라고 부러운 듯이 추켜세웠으니

 

그렇다면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건지... 월미는 도무지 털보의 심중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월미는

 

그저 조금 전보다는 약간 두려움이 가신 듯한 눈길로 털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제 심문은 끝났다는 듯이 털보는,

"자, 출출한데 술이나 마시자구"

하고 내뱉는다.

그러자 한 사내가,

"저리 비켜!"

꽥 소리를 지른다.

월미는 후닥닥 일어나 보따리를 들고 신을 신는다.

"보따리는 이리 내!"

다른 한 사내가 얼른 그 보따리를 낚아채 버린다.

"아이고, 안됩니다요. 이리 주세요. 예? 아이고-"

월미가 보따리를 잡고 울부짖듯 늘어지자, 털보가 불쑥 내뱉는다.

"안 뺏을테니 걱정말어"

그 말에 월미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우두머리의 언질인지라 슬그머니 손을 놓고 물러선다.

도둑들은 돗자리 위에 자리 잡고 앉아서 곧 술판을 벌였다.

이 공묘가 아마도 그들의 본거인 듯 건물 정면에 있는 제단(祭壇)의 한쪽 옆구리에서

술통을 비롯한 온갖 것이 다 쏟아져 나왔다.

방금 가지고 돌아온 오늘의 노획물 가운데서 당장 먹어치울 것 외는 그 속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제단 밑이 도둑질한 물건들을 간직해두는 창고인 셈이었다.

초도 있어서 술자리에 불까지 켜졌다.

그 광경을 월미는 저만큼 떨어져 서서 그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도둑들의 살림살이와 술자리를 처음 보는 터이라 얼떨떨하면서도 꽤나 신기했다.

"야, 이 계집애야, 그렇게 멀뚱히 서있지 말고 이리 와서 우리 두령님 잔에 술이나 따러"

한 사내가 뇌까린다.

월미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망설이며 털보의 눈치를 본다.

우두머리의 말대로 좇으리라 싶은 것이다.

털보가 힐끗 바라보며,

"안 들리나?"

한다.

그제야 월미는,

"예"

하고 얼른 술자리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