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23) 나그넷길 <16~20회>

오늘의 쉼터 2014. 6. 30. 20:04

금병매 (123)

 

 

 

나그넷길 16회 

 

 

 

 서문경은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한 가닥 미심쩍은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설마 월미나 춘매가 사람을 죽이는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어서 덮어두려 했는데,

 

무당까지 타살인 것 같다고 하더라는 말에 바짝 또 의심이 고개를 쳐들어서

 

앞뒤 생각하질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월랑이 오히려 발 벗고 나서서 사실을 밝히려고 드니 뜻밖이었다.

 

평소의 그녀의 성품으로 보아서는 되도록 집안이 조용하도록 일을 다독거리고

 

가라앉히는 그런 쪽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정반대이니 말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직접 자기가 춘매를 다그치겠다고 까지 나서질 않는가.

 




서문경은 그러라고 승낙을 했으니,

그녀가 하는 대로 내맡겨두어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싶어서 좀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셨다.

오월랑은 곧 옥소를 불러서 춘매를 데리고 오도록 일렀다.

그리고 서문경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 방에 좀 가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같이 있으면 마음대로 춘매를 다그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알았어. 잘 해보라구"

씁쓰레하게 웃으며 서문경은 자기 거처로 돌아갔고,

잠시 후 춘매가 옥소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마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냉랭하게 대답하고서 오월랑은 옥소를 내보냈다.

그리고 다짜고짜,

"꿇어앉아!"

하고 내뱉으며 춘매를 쏘아본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춘매는 어리둥절해지면서 머뭇거린다.

"꿇어앉으라는데 뭘 하는 거야! 귀가 먹었어?"

그제야 춘매는 그 자리에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러나 고개는 빳빳하게 쳐들고서 오월랑 마님을 똑바로 바라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만에 찬 표정이다.

오월랑은 의자를 한 개 끌어다가 춘매 앞에 놓고 털썩 궁둥이를 내린다.

"춘매 너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을 해야 된다구.

거짓말을 하면 용서 없어. 알겠지?"

"예"

대답을 하고서 춘매는 되묻는다.

"마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가리 닥쳐!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을 들어보면 알 것 아냐"

"어서 물어보시라구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구요"

"이년이 아가리 닥치라는데도... 묻는 말에만 대답하란 말이야!"

"예" 그제야 춘매는 좀 수긋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는 불만이 남아있다.

 

 

 

나그넷길 17회 

 

 

 

 "송혜련이를 네가 죽였지?"

오월랑은 거두절미하고 대뜸 이렇게 콱 들이대듯이 묻는다.

 




"예? 뭐라고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너무나 뜻밖의 말에 그만 춘매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시치미 떼지 말라구"

"도대체 마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송혜련이가 목매어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구.

그 범인이 너란 말이야. 안 그래?"

"누가 그래요? 도대체... 예? 나 참 기가 막혀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춘매는 온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며 바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기가 막히다니, 이년아, 사람을 죽여 놓고서 기가 막혀?"

"난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구요. 정말이에요.

내가 뭣 때문에 송혜련 아줌마를 죽인단 말이에요. 말도 안돼요"

"질투 때문에 죽였지 뭐야. 다 알고 있다구. 그렇게 능청 떨지 말라구"

"질투 때문이라뇨?"

"이년아, 몰라서 묻는 거야? 네가 이집의 일곱 번째 부인으로 들어앉을 작정을 했다면서?

그런데 송혜련이한테 밀려나게 되는 바람에 질투를 못 이겨서 죽인 게 아니고 뭐야"

"하하하..." 그만 춘매의 입에서 웃음이 나와 버린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다.

"왜 웃어? 이년이..."

오월랑은 바르르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오른다.

후닥닥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밖으로 달려 나간다.

곧 한쪽 손에 매를 들고 뛰어 들어온다.

"너 이년! 누구 앞에서 웃는 거야? 앙?"

가죽으로 된 회초리로 꿇어앉아 있는 춘매를 냅다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으악-"

"이년! 이년! 맛 좀 봐라. 이년!"

마구 갈겨댄다.

"아이고매- 아이고-"

비명을 내지르며 춘매는 방바닥에 나가 뒹굴고 만다.

"이년, 네가 일곱 번째 부인이 되겠다고? 분수도 모르고 이년이 까불어대고 있어.

너 이년 오늘 맛 좀 단단히 봐라. 단단히! 단단히!..."

오월랑은 무슨 분풀이라도 하듯이 숨을 헐떡 거려가며 계속 매를 휘둘러댄다.

오월랑이 이렇게까지 집안 노비들에게 화를 내기는 처음이었다.

춘매를 자기가 다그치겠다고 나선 것도 실은 속이 상해서였지,

결코 송혜련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가 아니었다.

제까짓 게 서문경의 귀염을 좀 받는다고 분수도 모르고 일곱 번째 부인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니, 얄밉고 분통이 터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송혜련의 죽음은 자살이 틀림없다고 오월랑은 믿고 있었다.

 

 

 

나그넷길 18회 

 

 

 

 춘매를 실컷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고 나니 오월랑은 속에 맺혀있던

 

무슨 응어리 같은 것이 쑥 내려간 듯 후련했다.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면서도 외도를 밥 먹듯이 하는 남자의 정실로서 그동안

 

속을 썩여 알게 모르게 가슴속에 쌓여온 울화가 툭 터져서 씻겨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춘매를 두들겨 패준 것이 곧 서문경에 대한 화풀이도 좀 된 것 같아서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오월랑은 앞으로는 속상하는 일이 있으면 그냥 참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오늘처럼 이렇게 만만한 년을 골라 화끈하게 화풀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게 옳겠구나 싶으며

 

혼자서 고소를 머금기도 했다.

 

말하자면 매질이 주는 묘한 쾌감을 처음으로 맛보았고,

 

울화를 씻어내는 방법을 터득한 셈이었다.

 




기분이 개운해진 오월랑은 잠시 앉아 차 한잔으로 고래고래 호통을 치느라

카랑카랑해진 목을 축였다.

그리고 서문경을 찾아갔다.

거실 창변에 앉아 꽃들이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우거진 뜰의 화단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던 서문경은 오월랑이 들어오자 여전히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잘 다그쳐 봤소? 뭐라 그래?"

"딱 잡아떼지 뭐예요.

그년 설령 제가 죽였다 하더라도 내가 죽였어요 하고 실토를 하겠어요"

서문경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오월랑은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내 생각에는 말이에요,

송혜련이가 제 손으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한 게 틀림없다구요.

왜 그랬는지 그 이유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좌우간 누가 죽인 건 아니예요.

더구나 춘매나 월미 따위 계집애가 죽여서 매달아 놓다니 말도 안돼요.

그리고 무당도 내가 목을 매어 죽었는데요 하니까 자살도 결국 억울한 죽음이 아니냐고

하면서 말을 흐려버리더라니까요"

"아, 그래?"

그제야 서문경도 자기의 의심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드는 듯

두어 번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이제 그일에 대해서는 더 얘길 안하기로 하고...

무당이 시키는 일이나 서둘도록 하지"

하고 말한다.

"그게 좋겠어요. 그럼 내일 당장 굿을 하고, 무덤을 파서 화장을 하도록 해요.

재는 강물에 뿌리고..."

"그러자구. 그 일을 당신이 맡아서 처리하구려"

"예, 알았다구요"

집안의 궂은일까지 뒤처리는 언제나 자기 몫이어서 오월랑은

좀 못마땅한 기색이지만 선뜻 받아들이고 가벼운 걸음으로 거실을 걸어 나간다.

이튿날 무당이 와서 굿을 벌인 다름 동산에 묻혀있는 송혜련의 시신을 파내어 화장했다.

그리고 그 재는 강물에 갖다가 뿌렸다.

그런 뒤로는 신통하게도 밤으로 유령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나그넷길 19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길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자,

 

월미는 어느 쪽이 맹주 땅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어서 노변에 있는 주막집으로 들어섰다.

 




"주인 아주머니, 말씀 좀 물읍시다"

"응, 물어보라구"

오십이 가까워 보이는 늙수그레한 주모(酒母)가 걸상에 앉은 채 멀뚱히 바라본다.

"저... 맹주 땅으로 가려면 어느 쪽 길로 가야 되나요"

"맹주 땅?"

"예"

"죄인들 귀양 가는 곳 말인가?"

"예"

"보아하니 처녀 같은데, 처녀가 그곳에 가려고 그러나?"

"예"

"하하하..."

주모는 놀라운 일이라는 듯이 웃고나서,

"거긴 뭣 하러?" 하고 묻는다.

"저..." 월미는 월른 대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아버지가 그곳에 귀양이라도 가셨나?"

"아니요"

"그럼 오라비가?"

"아니요. 히히" 월미는 좀 쑥스럽게 웃는다.

"알겠다구. 오라비도 아니라면 뻔하지 뭐. 좋아하는 남자겠지. 맞지?"

"히히" 월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버린다.

그러자 가게 한쪽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중년의 남정네가 불쑥 입을 연다.

"아니, 맹주 땅이 어디라고 처녀가 혼자 찾아간다는 건가?"

"글쎄 말이요" 주모가 맞장구를 친다.

"처녀가 보니까 퍽 순진하군 그래. 좋아하는 남자를 찾아가는 심정은 알겠는데,

어리석은 짓이라구. 거기까지 가기도 어렵지만, 간다 한들 만날 수도 없다 그거야"

"맞아요. 그곳을 이세상의 지옥이라고 그러잖아.

지옥에 보통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애? 어림도 없다구"

"처녀, 내 말을 잘 들으라구.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라 하더라도 일단 맹주 땅에

귀양을 갔으면 그것으로 그 사람은 끝장이니까, 단념을 하는 게 옳다 그거야"

"그렇다구. 기다려도 소용이 없지만, 찾아간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지.

거기까지 무사히 가기도 어렵고..."

주모와 남정네가 번갈아가며 타이르듯 하는 말을 월미는 가만히 듣고 서있다.

"거기 좀 앉으라구. 날도 저물었는데..."

주모가 앉기를 권하자,

월미는 보따리를 먼저 걸상에 놓고 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궁둥이를 내린다.

 

 

 

나그넷길 20회 

 

 

 

 "처녀, 시장하지 않우? 만두도 있고, 전병(煎餠)도 있지"

주모가 은근히 뭘 좀 사먹으라고 유인한다.

 




그 말에는 응답을 안하고, 월미는 술을 마시고 있는 남정네에게 묻는다.

"아저씨, 여기서 맹주 땅까지가 몇 리나 되나요?"

남정네는 그런 질문까지가 어쩐지 순박하기만 하다는 듯이 히죽이 웃으며 말한다.

"너무 멀어서 몇 린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구.

오천리라는 말도 있고, 만리가 넘는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 말을 받아서 주모가 덧붙인다.

"처녀가 무사히 잘 가면 아마 가을에는 도착할 거야"

"어머, 그래요? 그렇게 머나요?"

"그렇다구. 그것도 아무 일없이 빨리 갔을 경우지"

어림짐작으로 허황하게 지껄여대는 말이었다.

남정네도 주모도 머나먼 맹주 땅엘 가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처녀, 어디 살지? 고향이 어디야?"

남정네가 묻는다.

"성내에 살아요"

아직 성하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가 고향인가?"

"아니요"

"고향은 어딘데?"

월미는 좀 망설이다가,

"잘 몰라요"

하고 대답해 버린다.

꼬치꼬치 캐묻는게 귀찮았던 것이다.

"하하하...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다니..."

주모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부모님은 살아계시나?"

또 남정네가 묻는다.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부모가 살아있겠어요. 내 말이 맞지?"

"예"

들릴듯 말듯 대답하고는 얼른 고개를 떨구어 버린다.

그제야 남정네는 대고 고개를 끄덕인다.

월미가 어떤 신분의 계집애라는 것을 짐작하겠다는 듯이.

이번에는 주모가 묻는다.

"그런데 처녀, 좋아하는 남자가 무슨 죄를 지어서 맹주 땅으로 귀양을 갔나?

설마 국사범은 아니겠지?"

월미는 고개를 들고 약간 두려운듯한 눈길로 주모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국사범이 뭔데요?"

그러자 남정네가 얼른 대답해 준다.

"국사범이란 말이야, 나라에 반역한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하는 거라구.

거창한 죄지. 보통사람은 못짓는 죄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