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20) 제15장
나그넷길 1회
"그 유령도 송혜련이지 누구겠어요.
그년이 제가 죽고 싶어 죽어놓고서 뭣 때문에 귀신이 되어 나타나
우리 집안을 어수선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나참 더러워서..."
오월랑은 죽은 뒤에도 속을 썩이는 송혜련이가 생각할수록 얄밉다는 듯이 투덜거린다.
그리고 일어나 거실을 나가버린다.
바깥 공기라도 좀 쐬야 심란한 속이 가라앉겠는 모양이다.
서문경은 결코 기분이 좋지가 않다.
죽어서 비록 유령이 되어 나타나기는 하지만,
오월랑이 송혜련을 욕해대고서 훌쩍 나가버리니 말이다.
잠시 뚱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있던 서문경이
월미에게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불쑥 입을 연다.
"월미 너 송혜련이를 미워했었다면서? 왜 그랬었지?"
월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것이다.
얼른 뭐라고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왜 대답이 없어? 왜 미워했었나? 응?"
"별로 많이 미워하지 않았다구요"
"그래? 허허"
그 말투에 그만 서문경은 웃음이 나온다.
월미는 살짝 고개를 떨군다.
"별로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미워했었단 말이구나. 맞지?"
"예"
"왜 조금은 미워했지?"
서문경의 말씨가 한결 부드럽자,
월미는 흐흑 하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 쉰다.
그러나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조심스레 대답한다.
"저... 다름이 아니라, 저의 어머니 생각이 나서 미워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 생각이 나서 미워하다니..."
"저의 어머니가 말이죠
아버지를 배반하고 딴 남자하고 좋아했지 뭐예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남자하고 달아나 버렸다구요.
저는 내버리고서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송혜련 아줌마도 남편을 배반하고서..."
월미는 그 다음 말이 입밖에 나오지가 않아 어물거리며 두려운 듯한
눈길로 서문경을 힐끗 바라본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구"
서문경의 입이 한쪽으로 삐딱하게 이지러진다.
좀 재미있기도 하지만, 같잖다는 그런 표정이다.
문득 춘매가 하던 말이 머리에 떠올라,
"그래서 혹시 네가 송혜련이를 죽인 게 아냐?"
하고 불쑥 들이대듯이 묻는다.
"죽이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송혜련 아줌마는 목을 매어 자살했잖아요"
깜찍하게도 월미는 너무나 의외의 말이라는 듯이
놀라는 시늉까지 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한다.
그러나 안색은 도리 없이 하얗게 질린다.
나그넷길 2회
"겉으로 보기에는 자살을 한 것 같지만, 죽여서 그렇게 꾸며놓을 수도 있거든.
네가 한 짓 아니냔 말이야"
"주인어른도 참... 제가 뭣 때문에 송혜련 아줌마를 죽이겠어요.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해요.
사람을 죽이고서 제가 살 것 같아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어요.
절대로 안그랬다구요"
"그런 말이 있던데..."
"누가 그래요? 누가 도대체 생사람을 잡으려고 그런 말을 해요?"
서문경은 춘매가 그러더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턱이 없잖아"
하고 말한다.
월미는 속으로 이거 안되겠구나 싶어서 발끈 아랫배에 힘을 주며
억울해서 못 견디겠다는 투로 서슴없이 지껄여댄다"
"춘매가 그랬겠죠 뭐. 뻔하다구요.
그 애가 글쎄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지 찾아와서 그런 소릴 하지 않겠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제 생각에는 말이에요,
오히려 춘매 제가 죽이지 않았나 싶다구요"
"뭐? 춘매가 송혜련이를 죽였다고?"
서문경은 뜻밖의 말에 약간 놀란다.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은 못하지만, 혹시 싶다니까요. 만약 자살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지? 어디 말해 보라구"
서문경은 이거 참 얘기가 희한하구나 싶은 듯 은근히 재미있는 듯한 그런 표정이다.
"송혜련 아줌마에 대해서 가장 질투를 느꼈던 사람이 춘매였거든요"
"질투를?"
"예"
"왜?"
"몰라서 물으세요? 주인어른도 참... 호호호..."
"응, 짐작하겠어"
"아시겠죠? 춘매가 말이에요,
속으로 은근히 제가 주인어른의 일곱 번째 부인이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구요.
그런데 송혜련 아줌마한테 밀려났으니까 질투를 느낄 수밖에요"
"헛허허..."
그만 서문경은 커다랗게 웃음이 터져 나와 버린다.
주인어른이 웃자,
월미는 적이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듯이 말한다.
"여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세요?
질투를 견딜 수가 없게 되면 살인을 하고도 남는다구요.
그런 점으로 미루어봐서 만약 송혜련 아줌마가 자살을 한 게 아니라면
범인은 춘매라고 밖에 볼 수가 없어요.
달리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겠어요. 안 그래요? 주인어른"
월미는 두 눈을 반질거리면서 서문경의 동의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빤히 바라본다.
나그넷길 3회
"알았다구. 이제 그만"
서문경은 딱 자르듯이 말한다.
자살한 걸 가지고 공연히 얘기가 엉뚱하게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싶었던 것이다.
그저께 밤에 춘매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월미가 혼자서 그와 같은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춘매도 아무리 질투를 느꼈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러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도 없는 일을 가지고 몸종인 계집애들을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지껄인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체통에 관한 문제 같기도 했다.
그래서 서문경은,
"됐으니 이제 가보라구"
하고 월미에게 이른다.
그 말이 떨어지자,
월미는 후유- 안도의 큰 숨이 내쉬어지려 한다.
그러나 꾹 눌러 참고 얼른 일어나 정말 감사하다는 듯이 머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는 거실을 나가 버린다.
회랑을 자기 방 쪽으로 걸어가던 월미는 뜰의 화단에 철쭉꽃이 화사하게 핀 것이 눈에 띄자,
"어머나"
하면서 그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철쭉꽃 덤불 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어머, 정말 곱기도 해라"
하고 마치 철쭉꽃을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감탄을 한다.
말하자면 서문경의 심문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난 터이라,
마냥 기분이 좋아서 꽃까지가 경이롭기만 한 것이다.
앉아서 꽃을 바라보고 있던 월미는 조금 전 서문경이
'알았다구. 이제 그만'하고 내뱉던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알았다'는 말은 춘매가 범인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인데,
'이제 그만'하고 잘라버린 걸 보면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뜻인 것같이 여겨진다.
어찌 됐던 좌우간 자기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고,
대신 그 의심이 춘매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만은 틀림없다.
"흥, 고년..."
속으로 고소하다. 문제를 삼아서 서문경이 춘매를 불러다가 문초를 하듯이
좀 두들겨 패 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날 밤 월미는 술을 한 잔도 안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술에 만취가 되어서 유령이 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이제 서문경의 의심에서 벗어났으니 술을 마시고 불안을 달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방문을 안으로 단단히 걸었다.
어젯밤에 보니까 자기가 춘매방에 갔다 올 때 앞서 걷던 유령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었으니,
그렇다면 문을 걸어 잠그면 어쩌면 못 들어올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촛불을 끌까 하다가 우선 그대로 두었다.
불안해서였다.
어젯밤에 불을 끄니까 유령이 나타나 보이지 않던가 말이다.
월미는 벽에 걸려있는 옷에 시선이 가자 기분이 안좋았다.
걷어 버리는게 옳겠다 싶어서 부스스 일어났다.
나그넷길 4회
옷을 걷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월미는 쉬 잠이 오지가 않았다.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가는 숨이 답답해서 도로 얼굴을 내놓곤 했다.
그러면서 월미는 왜 유령이 서문경과 자기에게만 나타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서문경이 유령을 보고 놀라 기절을 했을 때 춘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어젯밤에 자기에게 나타났을 때는 다른 사람은 없었으니,
있었다면 어떠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유령을 보았다는 말이 없질 않은가.
아마도 죽은 송혜련이 복수를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젯밤에 자기에게 나타난 유령이 송혜련인지 누군지 알 수는 없었으나,
서문경에게 나타난 유령이 송혜련이었다면 자기에게 나타났던 유령도
필경 같은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송혜련을 목 졸라 죽인 장본인이니 원수를 갚으려고 드는 게
당연하겠는데, 서문경에게 먼저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싶었다.
"아하, 그렇겠구나"
누워서 혼자 중얼거리며 월미는 무슨 어려운 수수께끼라도 푼 것처럼 히죽 웃었다.
송혜련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시초는 서문경의 유혹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서문경이 유혹의 손길을 뻗지 않았었다면 송혜련은 내왕이의 아내로서 아무 탈 없이
지금도 살고 있을게 아닌가.
내왕이가 귀양을 가는 일도 물론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송혜련의 넋이 아마도 서문경을 원망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서문경을 원망하고, 자기는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유령이 먼저 서문경에게 나타나고,
다음에 자기에게 나타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 유령이 저주하는 자기에게 집요하게 나타나 복수를 하려 들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월미는 그만 왈칵 두려워지며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내놓고 있던 얼굴을 다시 이불속에 푹 묻었다.
숨을 죽이고, 새우처럼 옆으로 몸을 오그라 붙이고서 월미는 유령이 복수를 하려 드는 게
사실이라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르니,
미리 도망을 쳐버리는 게 옳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도망을 쳐버리면 어쩌면 집안사람들이 자기가 송혜련을 죽인 범인이라고
의심을 할지도 모르고, 또 서문경이 자기를 잡으려고 관가에 알려 수배를 할지도 모르니,
다른 무슨 핑계를 대어 집을 나가버리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월미는 부스스 이불을 들추고 일어났다.
아랫배가 팽팽하도록 소변이 차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월미는 조심스럽기만 했다.
혹시 유령이 바깥 어디에 서 있지나 않은가 싶어서였다.
나그넷길 5회
달이 좀 있는 밤이었으나, 구름에 가린 듯 바깥은 어두웠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있었다.
월미는 어쩐지 으스스해서 변소까지 갈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유령이 변소에서 불쑥 나타날지도 모르지 않은가 말이다.
회랑에서 곧바로 정원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화단가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찍- 물줄기를 내뽑으면서 월미는 가만히 회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젯밤처럼 혹시 또 유령이 나타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지나 않는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볼일을 마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정원의 나뭇가지들을 흔들며 불어가는 밤바람 소리가 으스스할 따름이었다.
용무를 마친 월미는 목을 움츠리고, 혹시나 유령이...
싶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후닥닥 회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서며
쾅!하고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거칠게 문을 여닫는 순간 바깥에서 불어든 바람과 문짝이 일으킨 진동에
그만 방안에 켜져있던 촛불이 팔락 꺼지고 말았다.
"어머나, 어쩌지..."
깜깜한 방안의 어둠 속에서 월미는 약간 당황하며 다시 불을 켤까 하다가,
어차피 이제 불을 끄고 잠을 이루어야 할 판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더듬더듬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삐그그극 삐그그극... 어디선지 널빤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머리 위였다.
천장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놀라 월미는 얼른 고개를 젖히고 위를 쳐다보았다.
깜깜한 어둠 속인데, 천장은 널빤지가 갈라지는 게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널빤지와 널빤지를 잇대어 놓은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삐그그극, 삐그그극... 틈서리가 제법 넓게 벌어지더니,
천장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얀 여자의 얼굴이었다.
월미는 질겁을 하고 비명을 내지르려고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너무 놀라서 소리가 목구멍에 턱 걸려버린 듯 튀어 나오지가 않았다.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그대로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 하얀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전체가 보이는 게 아니라,
눈과 코 입 부분만 보여서 누군지 확실히는 알 수가 없었으나,
어쩐지 송혜련 같은 느낌이었다.
매섭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포감에 숨 막히는 듯한 그 순간에도 월미는 지난해 언젠가 자기가
손설아 마님과 내왕이가 정사를 나누는 광경을 여러 차례 침실의 천장위에서
엿보고 엿듣고 했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하얀 얼굴이 홀연히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그 틈서리로 뭔지 희끄무레한 것이 두 개 나타났다.
가만히 보니 발바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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