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21)
나그넷길 6회
조그맣고 새하얀 여자의 발바닥 두 개가 그 틈서리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발과 발목이 나타나고, 장딴지가 힐끗 보이더니,
치맛자락이 흐늘흐늘 흔들리며 여자의 하체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쑥 상체가 나타났다.
하얀 얼굴을 보니 틀림없는 송혜련이었다.
"으악-"
월미의 목구멍에 턱 걸려있던 비명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밧줄에 목이 묶인 송혜련의 몸뚱어리가 천장에 덜렁 매달려
바로 눈앞에서 건들건들 흔들리고 있질 않은가.
지난해 가을 어느 날 밤,
석실에서 목 졸라 죽인 다음 자살을 한 것처럼 대들보에 매달아 놓았던
그때의 시체와 똑같은 형용이다.
"사람 살려-"
냅다 비명을 내지르며 월미는 후닥닥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유령으로부터 도망을 치듯이 정신없이 마구 회랑을 달린다.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아이고- 귀신 나왔네- 귀신 귀신..."
소리를 지르며 달리던 월미는
"익크! 아이고매-"
또 화들짝 놀라며 우뚝 멈추어 선다.
방안 천장 위에서 나타나 덜렁 매달려 있던 유령이 언제 옮아왔는지
앞을 가로막듯이 회랑의 서까래에 목을 매고 축 늘어져서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겁을하고 월미는 얼른 돌아서서 왔던 쪽으로 다시 정신없이 내달린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또 유령이 불쑥 나타나
바로 눈앞에 덜렁 매달려 있질 않은가.
노려보는 송혜련의 하얀 얼굴이 한결 선명하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유령을 피하려고 돌아서던 윌미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회랑의 난간으로 쓰러진다.
난간이 낮기 때문에 윌미의 몸뚱어리는 보기 좋게 아래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비명 소리에 잠이 깬 손설아가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바깥은 어둡고, 밤바람 불어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잠결에 무슨 소리를 헛들었나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손설아는 문을 도로 닫아 버린다.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월미가 정신이 돌아온 것은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온몸이 실컷 얻어맞은 것처럼 뻑적지근하면서 무거웠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니 한쪽 팔이 욱신욱신 쑤셨다.
땅에 떨어지면서 접질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거의 기다시피 하여 자기 방으로 돌아온 월미는 침상의 이부자리 위에
아무렇게나 몸을 내던졌다.
천장이 희끄무레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간밤의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와들와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한기와 함께 공포감에 휩싸여 월미는 끙얼끙얼 앓아댔다.
나그넷길 7회
아침이 되자, 손설아는 주방에 나가서 부엌아낙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했다.
그리고 방에 돌아왔으나, 어찌된 셈인지 월미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창문을 열어놓고 거실이랑 침실의 청소를 하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계집애가 웬 늦잠을... 싶으며 월미의 방으로 가보았다.
월미는 침상의 이부자리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 한쪽이 온통 벌겋게 상처가 나있는 것이 아닌가.
땅바닥에라도 심하게 갈아 뭉갠 것 같았다.
손설아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월미야, 월미야"
흔들어 깨운다.
찌뿌듯이 눈을 뜨며 월미는 끙-하고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얼굴은 왜 이랬지?"
"아아, 아이고-"
하면서 월미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니?"
"예"
"무슨 일?"
"귀신이 또 나타났지 뭐예요"
"어머나, 또 귀신이? 웬일일까... 왜 귀신이 너한테 자꾸 나타나지? 귀신이 송혜련이 맞더니?"
"아니요. 잘 모르겠던데요"
월미는 얼른 거짓말을 해 버린다.
사실대로 송혜련이의 유령이었다는 말을 하기가 왠지 두려웠던 것이다.
"어디 자세히 얘길 해보라구. 얼굴은 왜 그렇게 다쳤지?"
"난간에서 떨어졌지 뭐예요. 어떻게 됐는가 하면 말이죠..."
월미는 간밤에 있었던 끔찍한 유령 소동의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유령이 방안의 천장과 회랑의 서까래에 목을 매고 늘어져 있었다고는 하질 않고,
그저 눈앞에 나타났었다고만 얘기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손설아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내가 자다가 말이야 무슨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잠을 깼었다구.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내다보기까지 했지 뭐야.
그런데 그때는 아무 인기척도 없더라니까.
네가 난간에서 떨어져 기절을 한 뒤였던 모양이지.
얼굴 말고 다른 데는 다치지 않았니?"
"이쪽 팔이 좀..."
월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쪽 팔을 가만히 들어 올려 보인다.
"뼈가 부러졌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욱신욱신 쑤시지 뭐예요"
"뼈만, 상하지 않았으면 괜찮아. 약을 바르면 곧 가라 앉는다구.
안 일어나 길래 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일어나 아침이나 먹고 누워 있거라"
그리고 손설아가 방에서 나가려 하자, 월미는 불쑥 내뱉듯이 말한다.
"마님, 나 고향에 갔다 올래요"
나그넷길 8회
"뭐? 고향에?"
"예"
"하하하..."
손설아는 웃음이 나와 버린다.
월미의 입에서 '고향'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너무나 뜻밖이었고,
또 얼굴 한쪽을 벌겋게 갈아 뭉갠 그런 꼬락서니를 하고 별안간
고향에 갔다 오겠다니 우스웠던 것이다.
아버지와 사별(死別)을 하고, 어머니에게는 버림을 받은 월미는
손설아를 따라서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온 뒤로 한번도 '고향'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아니, 고향에 누가 있는데 갔다 오겠다는 거야? 더구나 얼굴을 그렇게 갈아 뭉개 가지고..."
"좌우간 갔다 올 거예요"
"언제 간단 말이야?"
"오늘요"
"뭐? 하하하..."
어이가 없는 듯 손설아는 또 웃는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서 꾸짖듯이 말한다.
"너 지금 정신이 있니 없니?
팔도 한쪽을 다쳤다면서 그런 몸으로 도대체 어떻게 고향에 간다는 거야?
가더라도 팔이 낫고, 얼굴 갈아 뭉갠 것도 없어진 다음에 가야지"
"아니예요. 오늘 가겠어요. 무서워서 못 있겠다구요.
틀림없이 귀신이 오늘밤에도 또 나타날 거란 말이에요.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죽을 것 같다니까요"
그 말에는 손설아도 더 만류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갈려고... 그렇다면 도리가 없지. 네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마님, 저... 내가 귀신 때문에 고향에 간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떠날 때까지만이라도요"
"왜?"
"창피하단 말이에요"
"하하하... 창피하긴..."
"좌우간 그래 주세요"
"알았어. 그런데 오늘 갔다가 언제 돌아올 건데?"
"가보고요"
"귀신이 안 나타나게 된 다음에 돌아와야 될 거 아냐"
"물론이죠"
"고향에 가서 있을 데나 있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가봐야죠"
손설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월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말투나 표정으로 봐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거 썩 잘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난해 내왕이와의 삼각관계 때문에 속이 상한 뒤로는 늘 속으로 못마땅해서
어디 적당한 데가 있으면 시집을 보내버리려고 해도 도무지 나서는
남자가 없어서 골칫거리였는데, 이제 제 발로 떠나줄 모양이니
얼마나 속 시원한 일인가 말이다.
그날 오후, 월미는 보따리를 싸들고 급한 볼일이 있어서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집을 떠났다.
나그넷길 9회
대문을 나선 월미는 마치 유령의 집으로부터 도망을 치기라도 하듯 잰걸음을 쳤다.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유령을 피해서 달아나는 셈이지만,
한편 사람을 목 졸라 죽였던 그 두려운 현장에서 벗어나는 터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월미는 고향을 향해 가지는 않았다.
죄인들의 유배지인 맹주 땅이 있다는 그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말로는 고향에 갔다 온다고 했지만, 애당초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고향을 찾아간들 반겨줄 사람이 누가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내왕이가 귀양을 간 맹주 땅으로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과연 그곳까지 갈 수 가 있는 것인지,
가면 그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알 수 가 없는 일이지만,
좌우간 가다가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묻고 물어서 그곳을 한번 찾아가 보리라 하고 월미는
조금 가슴을 울렁거리기도 하면서 성내를 벗어나 아득한 들길로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월미가 집을 떠나자, 곧 집안에 소문이 퍼졌다.
월미가 고향에 급한 볼일이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유령이 무서워서 피신을 갔다고 말이다.
물론 손설아의 입을 통해서 그 말이 퍼졌다.
그 얘기를 듣고 서문경은,
"유령을 피해서 고향에 갔다고? 허허허..."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그리고
"갈 때 나한테 인사를 하러 왔으면 노자라도 좀 쥐어주었을 건데... 쯧쯧쯧..."
측은하다는 듯이 혀를 차기도 했다.
둘이만이 유령을 겪은 터이라,
같은 처지에서의 동정인 셈이었다.
집안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춘매만이 월미가 유령을 피해서 고향에 간 데 대하여
속으로 아무래도 이상한테... 싶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뚜렷한 근거도 없이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죽은 송혜련이가 살아있는 월미를 집안에서 쫓아낸 셈이네,
무슨 감정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이렇게 지껄이고는 공연히 기분이 좋은 듯 헤죽헤죽 웃었다.
월미가 집을 떠나고 나자,
며칠 동안은 유령이 아무한테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러다가 삼사일이 지난 뒤부터 집안에 다시 유령에 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누구한테 뚜렷하게 유령이 나타난 게 아니라 유령인지 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가 없으나,
좌우간 한밤중에 이상한 일을 겪었다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다가 바깥에서 여자 우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내다보아도 아무데도 여자는 없었다고도 했고,
어떤 아낙네는 한밤중에 주방에서 식칼로 뭘 쓰는 소리가 쓱싹쓱싹...
계속 들리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달이 밝은 심야(深夜)에 동산의 숲길을 누군지 여자가 혼자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먼발치로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그넷길 10회
그런 소문들 때문에 집안사람들은 묘하게 불안하면서도 한편 호기심에 조금씩 들뜨기도 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오늘밤에는 또 누가 어떤 괴이한 일을 겪을 것인지 궁금해지고,
더러는 정말 귀신이 있는 것인지 한번 직접 겪어 봤으면 싶기도 했다.
오월랑은 심기(心氣)가 매우 언짢았다.
그런 얘기들을 들어도 조금도 호기심 같은 것은 동하질 않고,
죽은 송혜련이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언제까지나 우리 집안을 뒤숭숭하게 휘저어댈 것인지,
무얼 바라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한번 무당을 찾아가 물어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 발등의 불은 사그라든 셈이어서 차일피일하고 있었다.
서문경이 자기 거처로 와서 지내게 된 뒤로는 유령이 더는 남편에게 얼씬거리지 않을 뿐 아니라,
남편도 복약을 하며 하루하루 눈에 띄게 사람이 싱싱해져 가는 터이니 말이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오월랑은 삼경이 가까워져 가는데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또 불면증이 시작되려나보다 싶으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고 있었다.
그녀는 독수공방이 너무 길어질 경우 때때로 잠을 못 이루는 증세에 시달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남편과 늘 같이 지낼 뿐 아니라,
오늘밤에도 뜨겁고 싱싱한 그의 사랑을 만끽한 터이어서 잠이 안 올 까닭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서문경은 코까지 골아가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월랑은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갔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면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그녀도 특급주를 두어 잔 마시는 게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촛불을 켜고서 술병과 마른안주를 꺼내어 들고 탁자 쪽으로 가 앉아서
혼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두 잔째 입을 대고 있을 때였다.
둥둥둥 둥둥둥... 삼경을 알리는 현청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술이 약한 그녀는 한잔을 마셨는데도 벌써 꽤 혼혼해져서
그 소리가 마치 어디 먼 세상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귓전에 가물거렸다.
둥둥둥 여운을 남기며 북소리가 멎었다.
술잔을 놓고 어포를 집어 잘근잘근 씹고 있던 오월랑은 문득 시선이 창문으로 갔다.
창문의 한지에 어렴풋이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듯했던 것이다.
여자였다.
지나가다가 창문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서있는 것 같았다.
방안에 불이 켜져 있고, 바깥은 어두운데,
여자의 그림자가 창문에 비치다니......
그러나 오월랑은 술기운 때문인지 미처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예사로,
"누구야?"
하고 묻는다.
아무 대답이 없다.
"바깥에 누구지? 이 밤중에..."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자,
오월랑은 슬그머니 화가 치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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