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04) 투옥 46회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와요”
“음- 엄마가 정말 너무했군”
“너무한 정도가 아니라구요. 그 뒤 내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갑자기 고아 신세가 되어 가지고 울고만 있으니까 친척들이...”
월미는 어느덧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변해 가지고 자기의 서러웠던
지난날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친척집을 이집 저집 부엌강아지처럼 전전하다가 열네 살 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마침 친정에 와 있던 먼 친척아주머니뻘 되는 손설아 마님이 알고서 불쌍히 여겨
자기를 거두어 가지고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얘기를 듣고 내왕이는,
“그렇게 됐었구먼. 그래서 손설아 마님이 자기가 월미의 은인이라고 했군”
이제 자세한 것을 알았다는 듯이 누워서도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마님이 그런 말을 해요?”
“응, 자세한 얘긴 안하고, 그저 팔려가는 것을 자기가 거두어서 지금까지 데리고 있으니
은인이지 뭐냐는 말을 얼핏 하더군”
“은인이고말고요. 그때 만약 마님이 나를 거두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내 신세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구요”
그러면서 월미는 그만 내왕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복받치는 설움을
어쩌지 못하겠는 듯 흐느끼기 시작한다.
내왕이도 처연한 기분이 되어 잠시 가만히 그녀를 안고 있다가 등을 도닥거려 주며 입을 연다.
“됐어, 이제 그만 울라구. 다 지나간 일 아냐”
흐느낌을 멈추고 월미는 약간 목이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나간 일이지만,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절대로 안 잊는다구요.
세상에 도대체 그런 어머니가 어디 있어요.
아무리 남자가 좋다지만,
자기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는 여자가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
그게 사람이에요? 짐승보다도 못하지”
“그만해. 됐다구”
그러자 월미는 그만 서슴없이,
“그런 년은 죽여야 돼요”
하고 내뱉고 만다.
그리고 또 뿌드득 이까지 간다.
정나미가 떨어져서 내왕이는 얼른 안았던 팔을 풀고,
그녀의 몸뚱어리를 밀어내 버린다.
밀려난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굳어져 있던 월미는
잠시 후 현저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내가 나쁜 년인지도 몰라요.
그래도 엄마는 엄만데, 죽여야 된다는 말까지 했으니 말이에요.
말을 하다가 보니 감정이 복받쳐서 그런 말까지 나왔지 뭐예요.
좌우간 나는 앞으로 만약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줄 거라구요.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아요”
투옥 47회
“인제 보니까 월미 지독하다구.
그런 일도 세월이 지나면 감정이 누그러지고 나이가 들수록 생각도 달라지는 법인데
조금도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야”
“그건 안 당해본 사람의 말이라구요.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그 심정을 몰라요.
얼마나 뼈에 사무쳤으면 글쎄 딸의 입에서 그런 말까지 나오겠어요”
“알았다구. 이제 그 얘기 그만하라구”
내왕이가 싫어하는 기색인데도 월미는 입을 다물질 않는다.
“그래서 얘길 꺼내기 전에 미리 흉보자 말라고 했잖아요.
그 얘길 꺼내게 된 것도 송혜련 아줌마 때문이고요.
내가 그 아줌마를 미워하는 심정 이제 알겠죠?”
“응, 알겠어”
“우리 아버지처럼 아저씨가 아니 당신이 가엾다구요.
그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
“왜 대답이 없어요? 솔직하게 어디 대답해봐요”
싫으면서도 마지 못하는 듯 내왕이는 입을 연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처음 그년이
나를 배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죽이고 싶더라구”
“봐요, 바로 그거예요. 사람의 심정은 다 마찬가지라구요”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자자구”
“어머, 자다뇨. 약속을 했잖아요”
“무슨 약속?”
내왕이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묻는다.
“어머나, 정말 잊어버렸어요?
얘길 하면 한 번 더 사랑을 해준다 그랬잖아요.
이번에는 아주 기분이 그만일 거라고까지 해놓고서...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말한 것을 잊어버리다니 순 엉터리야”
그러면서 월미는 그만 한 손으로 내왕이의 허벅지를 꽉 꼬집어 준다.
“아야야. 알았다구. 그럼 약속을 지키는 수밖에 없지. 흐흐흐...”
아직 자질 않고 엿듣고 있던 옆집 아낙네 혜상은 바짝 더 귀를 곤두세운다.
내왕이가 월미의 몸뚱어리를 다시 범하기 시작하는 기척이 어렴풋이 느껴지더니
곧 둘이서 내지르는 야릇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차츰 거세어지자 아낙네는 자기도 모르게
“후유-”
못 견디겠는 듯 후끈한 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옆에 누워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려고 흔든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요. 예? 일어나보라니까요”
“으 응-”
“저 소리 좀 들어보라구요. 어서...”
“왜 이래. 귀찮게”
잠을 깨는 듯하던 남편은 그만 홱 뿌리치고 돌아누워 다시 쿨쿨 잠이 들어버린다.
“아이고 저런 돼지 같은 인간,
잠자는 것 밖에 모르니 내가 무슨 재미로 사느냐 말이야. 후유-”
이번에는 길게 탄식이다.
투옥 48회
이튿날 아침나절이었다.
손설아가 주방으로 점심준비 때문에 가보았더니 마침 혜상이 혼자서 만두를 빚고 있었다.
“다른 아줌마들은 아직 안 나왔어?”
“예”
“점심에 만두를 내놓을려고?”
“어제 저녁에 반죽을 했던 밀가루가 좀 남아있어서요”
“그래, 다 빚어버리라구”
“예”
혜상은 잠시 후,
“마님”
하고 일손을 멈춘다.
“응?”
“저...”
그녀는 손설아 곁으로 다가간다.
무슨 은밀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손설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속으로 약간 긴장이 된다.
도둑이 제발이 절인다는 격으로, 혹시 자기와 내왕이의 관계가 밖으로 알려져서
그것을 귀띔해 주려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혹시 요새 월미의 눈치가 이상하지 않았나요?”
“아니”
가슴이 철렁 한다.
월미가 자기의 비밀을 알아채서 발설했다는 말 같질 않은가.
그러나 손설아는 애써 예사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 계집애가 말이에요,
어젯밤에 글쎄 내왕이한테 찾아와서 같이 잤지 뭐예요”
“뭐라구?”
너무나 뜻밖의 말에 손설아는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놀란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놀라는 것도 혜상이가 이상하게 여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애써 자연스럽게 말한다.
“아니,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라구요. 내가 이 귀로 똑똑히 들었지 뭐예요.
내왕이네 집이 바로 우리 옆집이어서 벽 하나 사이거든요”
“월미 고것도 제 딴은 계집이라고 앙큼한 데가 있었네. 기가 막혀서...”
“글쎄 말이에요”
“곰보에다가 사팔뜨긴데, 뭐가 좋아서 데리고 자지.
내왕이 그녀석도 눈이 멀었다니까”
“마누라를 잃어버리고 나니 곰보면 어떻고 사팔뜨기면 어떠냐 싶었던 거죠.
흉년에 쌀밥 보리밥 가리겠어요?”
“빌어먹을 놈... 두 연놈이 다 똑같다니까”
손설아는 애써 예사롭게 말하지만,
절로 견딜 수 없는 질투의 감정이 내비친다.
혜상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떠올리며 도로 만두를 빚던 곳으로 간다.
주방을 나선 손설아는 곧바로 월미를 찾아갔다.
월미는 자기 방에서 자수(刺繡)를 하고 있었다.
낯수건인 듯한 베의 가장자리에 꽃과 나비를 수놓고 있는 것이었다.
“야,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손설아는 대뜸 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투옥 49회
월미는 놀라 얼른 수놓던 일손을 멈추며,
“마님, 왜 그러세요?”
하고 쳐다본다.
“그거 뭐냐 말이야?”
“수놓는 거잖아요”
“수놓아서 뭐 할려 그래? 누구한테 주려고 그러는 거지?”
월미는 마님의 말투가 이상하다 싶어서 그 기색을 힐끗 살피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한다.
“누구한테 주긴요. 그저 심심해서 수를 놓고 있는 거죠”
“거짓말 말어. 내가 다 알고 있다구”
“뭘 알고 있다는 거예요?”
“계집애가 능청스럽기는... 꽃하고 나비를 수놓을 때는 다 뜻이 있는 거 아냐.
누구한테 주려고 그러는지 실토하라구”
“하하하...”
월미는 정말 능청스럽게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내왕이에게 선물을 주려고 오늘 아침부터 수를 놓기 시작했으면서도 말이다.
“마님도 참 왜 그러세요? 별안간...”
“왜 그러다니, 이년아, 내가 다 알고 있는데도 시치미를 뗄거야?
능청스럽게... 너 어젯밤에 어디 갔었지? 어디 가서 잤느냐 말이야”
“..........”
“왜 대답을 못해. 앙?”
바락 악을 쓰듯 쏘아붙이며 노려보자,
월미는 저도 그만 발칵 핏대가 솟구치는 듯 거침없이 내뱉는다.
“어디 가서 잤으면 왜요? 마님이 상관할 일 아니잖아요”
“뭐라고? 이년이 인제 보니까 간뎅이가 부었어”
“난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열아홉 살이라구요. 알겠어요?”
“아니, 열아홉 살이니까 그래 간뎅이가 부어도 상관없다 그거야?”
“간뎅이가 붓긴요. 열아홉 살이나 됐으니까 연애도 할 수 있고, 시집도 갈 수 있다 그거예요.
나보다 나이가 적어도 다 그러잖아요.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딨어요. 안 그래요? 내 말이 틀렸나요?”
손설아는 화가 그만 머리끝까지 뻗쳐올라서 도저히 그냥 가만히 못 있겠는 듯
냅다 달려들어 월미의 손에서 수틀을 빼앗아 방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 버린다.
“어머나, 별꼴이야. 왜 이래요? 수틀이 무슨 죄가 있나요?”
“이년, 인제 보니까 네년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드는 아주 나쁜 년이라구”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내가 마님에게 뭘 어떻게 했는데요?”
“그래도 곧 아가리를 놀릴 거야?”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러잖아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 주시라구요.
그래야 잘못했으면 반성을 하죠”
말하자면 월미가 손설아보다 한층 단수 높게 맞서고 있는 셈이다.
투옥 50회
손설아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솟구치는 질투를 못 이겨 너무 성급하게 지껄여댄 것 같질 않은가.
월미의 말하는 투로 보아서 자기와 내왕이와의 관계는 모르는 듯 하니 말이다.
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단수 높게 지껄이고 있는 터인데...
“글쎄, 연애를 해도 좋고, 시집을 가도 상관없지만,
일단 나한테 상의를 해야 될 게 아니야.
내가 팔려가는 너를 거두어서 지금까지 데리고 있으니,
부모와 다를 게 없지 않으냐 말이야.
너의 어머니에 비하면 내가 백배 천배 고맙지 뭐야. 안 그래?”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손설아는 이렇게 자기변명을 하듯 말한다.
“그렇고말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마님을 친부모 이상으로 받들어 왔잖아요.
뭐 한 가지 시키는 대로 내가 안 한 적이 잇나요?
그렇지만 마님, 생각해 보시라구요.
시집을 가게 되면 물론 말씀을 드리지만,
연애를 하면서 어떻게 상의를 한단 말이에요.
부모한테 상의를 하고서 연애를 하는 계집애도 있나요?
그러다간 혼찌검만 나게요.
연애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하는 게 원칙이잖아요. 안 그래요?”
손설아는 말문이 막힌다.
이제 보니 계집애가 여간내기가 아니질 않는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님으로서 몸종을 당해내지 못하고 밀리다니,
무안하고 분하기도 해서 손설아는
또 앞뒤 생각 없이 입에서 튀어 나오는 대로 내뱉는다.
“내왕이하고 연예를 한다면서? 그게 정말이야?”
“예, 정말이에요”
월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 태도가 또 콧대를 빳빳하게 해가지고 맞서려는 것이 아닌가.
“이년아 , 내왕이하고 연애를 하다니 말이 돼?”
“왜요? 왜 말이 안 되나요?
그이는 홀아비이고, 나는 처녀니까 됐지 뭐예요”
“내왕이가 어째서 홀아비야? 송혜련이가 있잖아”
“송혜련은 이미 주인어른의 것이 됐잖아요”
“아직 어떻게 될지 결말이 안 났잖느냐 말이야”
“결말이고 뭐고 뻔하잖아요”
“이년아, 네가 어떻게 알아. 앙?”
냅다 악을 쓰듯 내뱉자,
월미는 약간 사팔뜨기인 눈으로 마님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일부러 복장을 박 긁듯이 말한다.
“안단 말이에요. 난 그이하고 결혼할 거예요. 알겠어요?”
“결혼을 해?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요”
“안 돼”
“왜 안돼요?”
“좌우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헤헤헤 헤헤헤...”
“이년이 웃기는...”
그만 손설아는 냅다 월미의 뺨을 한 대 갈겨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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