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54) 보물상자 <21~26회>

오늘의 쉼터 2014. 6. 26. 20:00

 

금병매 (54) 보물상자 21회 

 

 

 

 “아무도 무르게 감추어둔 보물상자가 있다구요”

“아, 그래? 어디다가 감추어두었는데 아무도 모를까. 화자허도 모른단 말인가?”

 

 

 

 

“예, 그이도 모른다구요”

“흠- 그것 참, 남편도 모르게 보물상자를 감추어두다니, 마치 무슨 옛날 이야기 같군”

서문경은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들어 쭉 기울인다.

“그 보물상자를 말이에요, 당신 집에 좀 갖다 숨겨놓았으면 해서요.

이집이 경매에 부쳐져 남의 손에 넘어갈테니 미리 옮겨놓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알겠다구”

“당신이 잘 보관해 줄 수 있죠?”

“있고 말고”

다른 것도 아닌 보물상자를 보관해 달라니,

입장 곤란한 일로 부담감을 느끼는 게 보통일터인데, 서문경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 부탁이라면 오히려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남의 것이지만 보물이 든 상자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흐뭇한 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돈이나 보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니,

물욕이 남달리 강한 사람은 절로 군침이 돌게 마련인 듯했다.

“보물상자가 어디 있는데, 좀 보자구”

벌써 군침이 입안에 확 도는 모양이다.

“땅 속에 묻어놨지 뭐예요”

이병아는 살짝 눈으로 웃는다.

“영락없는 옛날 얘기 같다니까. 땅속 어디에?”

“정원의 숲 속이라구요”

“정원의 숲 속이면 지난 가을의 주연 때 당신하고 처음으로 입맞춤을 했던 거긴가?”

“예. 맞아요”

“그 숲 속에 보물상자가 묻혀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나. 그것 참. 허허허...”

공연히 기분이 좋은 듯 서문경은 살짝 코를 쳐들며 껄껄거린다.

웃고 나서 재촉을 하듯 말한다.

“어디 당장 가서 캐내 보자구”

“급하기도 하셔”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좋은 일은 서둘러야 되는 법이거든”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이에요? 집이 경매에 부쳐지기 때문에 딴 곳으로 옮기는데...”

“좌우간 그 보물상자를 무사히 딴 곳으로 옮겨 잘 보관하는 일도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잖어?”

“예, 좋아요. 가자구요”

이병아가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문경은 잔에 남은 술을 홀짝 마저 마시고,

안주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따라 일어선다.

내실을 나선 이병아는 가만가만 걸음을 옮기며 뒤따라 오는 서문경에게도

 손짓으로 발자국 소리를  내지 말도록 한다.

혹시 수춘이가 아직 잠들지 않아 무슨 일인가 하고 내다볼까 싶어서였다.

 

 

 

보물상자 22회 

 

 

 

 눈은 그치고, 갈라진 구름 사이로 차가운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얗고 싸늘한 밤이었다.

이병아는 얼른 뛰어가서 집 모퉁이에 세워둔 괭이를 들고 왔다.

 

 

 

 

눈이 내려 미끄러운 숲 속 오솔길을 앞장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던

이병아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 돌 밑이에요”

뒤를 따르던 서문경도 멈춰선다.

 제법 큼직한 돌덩이었다.

“흠, 단단히 숨겨놓았군”

“천복이를 불러올까요?”

“그만두라구”

“당신이 힘드시지 않겠어요?”

“이정도야 뭐...”

서문경은 눈이 희끗희끗하게 묻은 큼직한 돌을 두 손으로 불끈 들어서 한쪽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이병아로부터 괭이를 받아 그 자리의 흙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곧 궤짝의 한쪽 모서리가 나타났다.

“이거군”

“맞아요. 그거예요”

“궤짝이 꽤 큰 모양인데...”

“별로 크지 않아요”

서문경은 궤짝 둘레의 흙을 대충 파낸 다음,

괭이를 던지고 두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린다.

 제법 무겁다. 얼른 달려들어 이병아도 거든다.

보물상자를 꺼내놓고, 서문경은 손가락이 시려운 듯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훅훅 몇 번 입김을 분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도대체 이속에 무슨 보물이 들었을까? 꽤 무거운데...”

이병아는 말없이 웃기만 한다.

“뭐가 들었소?”

“방에 가서 열어 보여 드릴게요”

“자, 그럼 들고 가야지”

“혼자 드시겠어요?”

“문제 없다구”

서문경은 보물상자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서 불끈 두 손으로 들고 걸음을 떼놓는다.

“조심하시라구요. 미끄러져요. 아이 추워”

이병아는 괭이를 주워들고 목을 잔뜩 움츠리며 뒤따른다.

거실로 돌아가자,

이병아는 보물상자에 묻은 흙을 걸레로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그 상자를 탁자 위에 갖다 놓았다.

상자에는 손바닥만한 큼직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이병아는 장롱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와서 그중의 한 개를 골라 자물쇠를 땄다.

그리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야-”

곁에 서서 보고 있던 서문경은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황금으로 빚은 갖가지 패물과 진귀한 보석들이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다.

황금 패물들은 누우런 빛으로 번쩍거리고,

형형색색의 보석들은 영롱한 빛깔로 반짝거린다.

마치 나무궤짝 속에서 무지개가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보물상자 23회 

 

 

 

 “이렇게 많은 보물이 어디서 났을까?”

서문경이 신기한 일이라는 듯이 이병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눈웃음을 지을 뿐 말이 없다.

 

 

 

 

 

“화자허도 모르는 보물을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럴 거예요. 나도 이렇게 많은 보물이 나한테 있다는 게 꿈만 같다구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얘기를 좀 해보라구”

이병아는 잠시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더니,

가만히 의자에 궁둥이를 내리며 입을 연다.

보물상자의 뚜껑까지 열어 보였으니 얘기를 안 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얘기를 할게요. 그런데 얘기를 듣고나서 나를 욕하시면 안돼요”

서문경도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웃으며 말한다.

“욕하기는 내가 왜 당신을 욕해. 어디서 훔친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말하는 투가”

“맞아요. 훔쳤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 웬 보물이 이렇게 많이 있겠어요”

“호, 그래?”

서문경의 두 눈이 절로 약간 휘둥그래진다.

“벌써 놀라시는군요. 그러나 얘기를 들어 보시라구요.

훔쳤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런 경우엔 누구나 그럴 거니까요”

그렇게 말해놓고 이병아는 또 잠시 망설인다.

입을 떼기가 무척 힘이 드는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순히 보물상자를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가 하는

 얘기만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지금까지 비밀로 해온 자신의 과거를 들먹여야 하니 말이다.

“여보, 이 보물 얘기도 얘기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내 과거 얘기부터 털어놓아야겠어요.

물론 화자허도 모르는 얘기예요”

“아, 그래? 무슨 얘긴데?”

서문경은 바짝 호기심이 고개를 쳐드는 모양이다.

무척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니 말이다.

“이 얘기를 들으시면 아마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볼 것 같은데,

어쩌죠? 아이 싫어. 생각만 해도 창피해”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는 살짝 울상을 짓는다.

“무슨 얘긴데 그래? 당신의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어서 얘기해 보라구”

“얘기하겠어요. 화자허와 결혼하기 전에 나는 이미 처녀의 몸이 아니었어요.

양세걸이라는 분의 소실로 몇 해 살았지 뭐예요”

에라 모르겠다는 듯이 이병아는 내뱉아 버린다. 

 

 

 

보물상자 24회 

 

 

 

 지금까지 이병아가 화자허와 처녀총각으로 만나 결혼을 한 사이로만 알고 있었던

 

서문경은 그녀가 양세걸이라는 높은 벼슬아치의 소실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적지않이 놀랐다. 그런 사실을 화자허도 모른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결혼 전에 이미 남의 소실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대번에 그녀가 여자로서 한 등급 격하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보통 가정에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면 처녀의 몸으로 남의 소실이 되어 갔을 리가 없고,

천민으로 태어났거나 아주 곤궁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소실로 팔려간 게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서문경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양세걸이라는 이가 이규라는 자의 원한을 사서 그의 손에 의해 가족들이

몰살을 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을 때 양세걸은 본처와 도망가고,

이병아는 집안에 비장해 둔 금붙이와 보석들을 몽땅 보자기에 싸들고 줄행랑을 놓는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것 참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늘이 준 복이었군. 그 복을 당신이 잘 자기것으로 만들었다구.

하늘이 복을 던져주어도 그것을 받아서 자기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거든.

가족들이 온통 몰살을 당하는 그 난리 속에서 도망쳐 나오기도 바쁠텐데,

숨겨놓은 보물을 모조리 보자기에 쌀만한 여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대단한 용기라구.

그런 용기가 없었더라면 하늘이 준 복도 놓치고 말았지 뭐야. 안그래?”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이병아는 새삼스럽게 흠모의 빛이 가득 담긴 그런 눈길로 서문경을 바라본다.

“고마울게 뭐 있어. 사실이 그런데... 말하자면 그게 바로 당신의 타고난 복이라구”

오히려 서문경이 더 대견하고 놀라운 듯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럽게

그녀를 가만히 눈여겨 본다.

“여보,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뭔데?”

“내가 한 얘기를 절대로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이에요.

이 보물에 관한 얘기는 물론이고, 화자허와 결혼하기 전에

내가 양세걸의 소실이었다는 사실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마셔야 해요”

“걱정 말라구. 당신의 비밀을 남한테 얘기해서 내게 덕이 될게 뭐 있겠어”

“화자허가 돌아오면 다시 어울리게 될텐데,

혹시 술자리에서 취중에 그런말이 나올까 걱정이라구요”

“알겠어. 명심할테니 염려 말라구”

그날 밤 서문경은 그곳에서 자고,

이튿날 새벽 일찍 보자기에 싼 그 보물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꽤 무거웠으나 누가 알면 안되니까,

손수 들고 자기 방으로 가서 우선 벽장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보물상자 25회 

 

 

 

 서문경은 그 보물상자에 관한 얘기를 오월랑에게만은 털어놓을까 어쩔까 생각해 보았다.

 

그 얘기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오월랑이 이병아와 자기 사이를 의심하게 될게 뻔했다.

 

그저 친구의 아내요,

 

남편의 친구인 그런 사이에 불과하다면

 

그처럼 많은 금붙이와 보석이 든 상자를 보관해 달라고 선뜻 내맡길 턱이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오월랑이 삼천냥의 돈을 받아 가지고 왔을 때 아마도 그녀가 당신에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친구의 아내와 깊은 관계가 되면 큰일이니

 

조심하라고까지 말했는데, 그런 눈치를 챌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 보물 얘기를 하자면 도리없이 이병아가 화자허와 결혼하기 전에

 

양세걸이라는 사람의 소실이었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일 뿐 아니라,

이병아의 그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오월랑의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로 퍼져나갈게 뻔했다.

아무리 다짐을 받는다 해도 사람의 입이란 결코 믿을게 못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서문경은 정실인 오월랑에게까지도 이번 보물상자에 대해서만은

비밀에 부쳐두기로 마음먹었다.

바깥에서의 여자관계 외는 정실에게만은 비밀이 없는 서문경이었으나

그 일만은 도리가 없었다.

재판의 판결이 나서 화자허가 석방되어 동경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양제독이 미리 기별을 해준대로 전재산을 경매하여 네 형제가 분배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그런데 피고인 화자허는 형제의 의를 저버려 고소를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벌로 재산의 십분의 일만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장남인 화대가 절반을,

그리고 이복동생인 화삼 화사가 그 밖의 것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되었다.

현청에서는 곧 화자허의 집과 전답을 경매에 부쳤다.

전답은 쉬이 낙찰되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으나,

집은 사려는 사람이 나서질 않았다.

서문경의 대저택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인 듯 했다.

화자허는 도리가 없어서 서문경에게 집을 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서문경은 당장 그만한 돈이 수중에 없다는 핑계로 사려고 들질 않았다.

기왕에 닥친 액운이니 하루 속히 청산을 해서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려는

화자허는 긴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추운 겨울을 내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화자허는 몸이 무척 쇠약해지고

얼굴도 보기에 딱할 지경으로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그가 내쉬는 긴 한숨은 이병아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도 남았다.

생각한 끝에 이병아는 남편 몰래 붓을 들어 서문경에게 서찰을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춘이게게 시켜 아무도 모르게 서문경에게 전하도록 했다.

 

 

보물상자 26회 

 

 

 

 이병아의 서찰을 받아본 서문경은 처음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코언저리에 히죽이 웃음을 떠올리며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서찰에는 자기가 맡긴 보물상자 속의 금붙이와 보석을 일부 처분해서 대금을 청산할 터이니,

 

우선 당신의 돈으로 화자허의 집을 매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부탁의 말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화자허의 집을 내밀히 이병아 자신이 차지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은밀한 수작을 자기에게 부탁하다니,

아마도 장차 화자허를 따돌리고 자기 쪽으로 옮겨올 생각이 있는게 틀림없는 듯해서

서문경은 히죽이 웃음이 떠울랐던 것이다.

화자허도 모르는 보물상자를 자기에게 맡긴 것만 보아도

이미 그녀의 속마음을 짐작한 수가 있는 터였는데 말이다.

비록 손바닥만한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는 그녀가 간직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복잡하고 음흉한 구석도 지니고 있는 여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나,

지금까지 겪은 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밀고 당기는 맛이 있고, 외모도 그만일 뿐 아니라,

육체도 나무랄 데가 없는 터여서 그녀를 장차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부탁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서문경은 자기가 사는 양하고

화자허의 집을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전답과 가옥까지 처분이 되자,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을 가까스로 손아귀에 쥐게 된 화자허는

그 돈으로 사자가(獅子街)에 있는 어염집 한 채를 사서 이사를 했다.

기왕에 닥친 액운이니 하루 속히 청산을 해서 두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

새출발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막상 전답과 가옥을 남의 손에 넘기고 조그마한 어염집에 이사를 하게 되고 보니

화자허는 도무지 살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겨울 내내 동경의 옥에서 고생을 하느라

쇠약해진 몸이 한층 더 기력을 잃어 날로 흐늘흐늘해져 갔다.

친구들이라는 것도 자기 수중에 돈이 있을 때 말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결국 아무 소용없는 타인에 불과한 법이다.

화자허가 그처럼 영락(零落)해 버리자,

서문경을 위시한 몇몇 친구들이 위로차 술병을 사들고 두어번 방문을 하더니,

그나마 걸음을 끊고 말았다.

서문십걸의 모임에서도 화자허는 자연히 탈락이 되어,

 십걸이 구걸(九傑)로 줄어들었다.

날로 흐늘흐늘해져 가던 화자허는 마침내 병을 얻어 자리에 드러눕더니,

끝내 일어나질 못하고 두어 달 후에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화자허가 죽자,

이병아는 서럽게 목놓아 울었다.

죽은 남편이 가엾어서 우는 것인지,

자기의 신세가 한탄이 되어 우는 건지,

아무튼 보는 사람이 절로 눈물이 날 지경으로 슬피 울음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