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55)
제9장 재혼(再婚) 1회
화자허가 죽자,
이병아는 마음속으로 서문경을 자기의 세 번째 남자로 점을 찍게 되었다.
이십대 중반에 벌써 세 번째 남자에게로 옮겨가려 하다니,
운명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어쨌든 이번에야 말로 남자다운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것 같아
그녀는 가슴이 벅찼다.
첫 번째 남자인 양세걸은 높은 벼슬아치여서 생활이 윤택하기는 했으나,
소실의 처지였기 때문에 늘 정실의 눈치를 봐야 했고,
때로는 노골적인 구박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바야흐로 피어오르는 실팔구세의 욕망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었다.
양세걸은 이미 오십이 가까운 초로의 남자여서 젊은 소실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 주질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 남자인 화자허는 총각의 몸으로 정식 혼례를 올린 남편이어서
이미 남의 소실이었던 그녀로서는 과분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천성이 일하기를 싫어하고 빈둥빈둥 놀기만을 좋아하는 건달형의 사람인데다가,
화태감의 유산을 물려받은 뒤로는 노상 바깥으로 돌며 주색잡기에만 빠지고
집안을 잘 돌보지 않아 독수공방을 하는 밤이 많아서 결코 아내로서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앞뒤가 막힌 듯한 욕심 때문에 형제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 수모를 겪더니, 재산까지 홀랑 날리고, 젊은 아내를 미망인으로 남겨둔 채
덧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양세걸은 결과적으로 보물상자나마 그녀의 손에 남겼으나
화자허는 있던 재산까지 날려버리고 떠나서 더욱 무정하고 허망한 사내가 돼버린 셈이다.
그런 두 남자에 비하면 서문경은 어느 모로나 월등히 위였다.
청하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섭섭할 정도의 부호일 뿐 아니라,
남자 구실에 있어서도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터이니 말이다.
이미 아내가 다섯이나 있고, 그 역시 주색잡기를 즐기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러나 화자허와는 달리 사업수완도 남다르고, 관원 교제도 그만이니,
그만하면 가히 장부 중의 장부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병아이니 그런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세 번째 시집을 가게 되는 셈인 그녀로서는 어느 모로나 과분해서 가슴 벅차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병아가 화자허의 생전에 남편을 버리고 서문경에게 옮겨갔으면 하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록 어쩌다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어 밀회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남편은 어디까지나 남편이라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보물상자를 서문경에게 맡길 때도 집이 경매에 부쳐진다는 바람에 당황하여
우선 자기만이 알고서 비밀히 간직하고 있는 보물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야겠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재혼(再婚) 2회
경매에 부친 집이 안 팔릴 때 이병아가 자기의 보물 일부를 나중에 처분해서 갚을테니
우선 당신의 돈으로 은밀히 집을 매입해 달라는 부탁을 서문경에게 한 것
역시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 초췌한 남편의 몰골이 보기에 가슴 아파서
그런 방법으로라도 속히 청산을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하면 결국 화자허 몰래 집이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밝히든지 어떻게 하든지 후일의 문제이고,
우선 결과적으로 집이나마 남의 손에 넘기질 않고 건지게 되는 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결코 집을 그런 식으로 자기가 차지해서 남편을 버리고 서문경에게로
옮겨 가야겠다는 음흉하고 비정한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화자허가 덧없이 병사하고 말자,
마치 그런 일을 염두에 두고서 미리 수작을 부린것만 같이 되어 버렸다.
이병아는 비록 미망인이 되어 서문경을 세 번째 남자로 마음속에 점 찍었고,
가슴이 벅차기도 했지만, 자기가 한 일을 미리 복선(伏線)을 깔고서의 행위였다고
그가 생각할까봐 그 점이 괴롭기도 했다.
결코 자기는 그런 나쁜 여자는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변명하듯 새삼스럽게 꺼내어 얘기한다는 것도 우습고,
서문경이 납득을 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그녀는 괴롭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서문경 역시 화자허가 죽자,
당연히 이제 이병아는 자기의 여섯 번째 아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하늘이 그녀를 자기에게 옮겨주려고 화자허에게 액운을 안겨 마침내
데리고 가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하며 혼자서 감사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화자허가 영영 가버렸으니,
이제 서문경은 이병아를 마음 놓고 찾아가도 무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무상출입을 삼갔다.
아직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비밀로 되어 있어서
그것이 하루아침에 깨어지는 것을 꺼려해서였다.
그녀의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긴 했지만, 친구의 아내였기 때문에
주변의 눈길이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화자허가 죽은 뒤에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두 사람이 접근한 것처럼
알려지는 게 바람직하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심장에 털이 숭숭 돋아난 양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서문경에게도
한 조각의 염치는 남아있었던 것이다.
화자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서문경이 이병아를 처음으로 찾아간 것은 닷새 뒤의 일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기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모르게 발걸음을 사자가로 돌려
이병아와 수춘이가 단 둘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은밀히 찾아들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서문경을 상복 차림의 이병아는 무척 반가우면서도
겉으로는 약간 씁쓸한 듯한 그런 표정을 지으며 맞았다.
재혼(再婚) 3회
이병아의 뒤를 따라 큰방으로 들어가려던 서문경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화자허의 위패는 어디에?”
“저쪽 방이에요”
이병아는 그 말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그 방으로 가서 초에 불을 켰다.
서문경은 고인이 된 친구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고 배례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앉아 잠시 인생무상(人生無常)에라도 잠기는 듯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한쪽 골방에서 잠들려던 수춘이도 인기척에 일어나 문밖에 와서
가만히 멈추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눈을 뜬 서문경이 이병아에게 불쑥 묻는다.
“밤으로 무섭지 않소?”
잠시나마 인생무상을 생각했던 사람의 질문치고는 시시하다.
“무서울 때가 많아요”
이병아가 대답하자, 수춘이도 얼른 입을 연다.
“지붕 위에 밤여우가 나타나지 뭐예요”
“뭐, 밤여우?”
뜻밖의 말에 서문경은 약간 놀라는 듯이 수춘이를 바라본다.
“예, 밤에 나타나니까 밤여우죠. 정말이라구요.
밤여우가 지붕 위에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기왓장을 두둘기기도 하고, 킁킁 울기도 해요”
“웬 여울까?”
그러자 이병아가 설명을 해준다.
“바로 가까운 곳에 야산이 있거든요. 산은 높지 않지만 숲이 아주 깊다구요.
대나무 숲도 있고요. 그 속에 사는 여운가봐요”
“허, 그것 참. 여우가 지붕위에 올라가서 설쳐대다니... 별일도 다 있군.
매일 밤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매일밤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무서워서...”
“천복이를 데려다가 함께 있도록 하는 게 좋겠는데?”
“그럼 그 집은 어떻게 하고요?”
“그 집은 우리 하인 중에서 누구 하나를 시켜 지키도록 하면 되지 뭐”
천복이는 표면상 서문경이 산 것으로 되어 있는
그 전의 집을 혼자 남아서 지키고 있는 터였다.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 뭐 여우가 밤마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천복이 까지 오면 방이 더 없어서 도리없이 이 방을 써야 될텐데,
위패를 모신 방에 사람이 기거한다는 것도 뭣하고...”
“그것도 그렇군”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병아를 가급적 빨리 이곳에서
자기 집으로 옮기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큰방으로 가서 이병아와 마주앉은 서문경은,
“보자... 당신을 못 만난 지가 벌써 몇 달 째지?”
하고 묻는다. ‘못 만났다’는 말은 대면을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는 뜻이다.
재혼(再婚) 4회
동경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로 화자허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외박을 한 적이 없었다.
몸이 쇠약해졌을 뿐아니라 , 정신적으로도 이미 지칠대로 지쳐 실의에 빠져서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오입질을 즐기는 그런 일에서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그러니 집이 표면상 서문경의 손에 넘어갈 때까지 이병아는 한 번도 호두나무에 등불을
달아본 적이 없었고, 이곳 사자가의 어염집으로 이사한 뒤로는 더더구나
서문경과의 밀회의 기회가 있을 수 없었다.
이사를 한 뒤 두어 번 서문경이 친구들과 술병을 들고 화자허를 위로하려 찾아오기는 했으나,
서로 얼굴을 대했을 뿐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좁은 집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그들은 서너 달을 말하자면 뜨겁게 만나지를 못하고 있는 터였다.
서문경은 이병아 아니라도 얼마든지 여자가 있었으나,
이병아는 남편이 시들시들해져 버려서 그동안 거의 생과부처럼 지냈다.
화자허도 동경에서 막 돌아왔을 무렵에는 감격스러운 듯 쇠약해진 몸으로나마 몇 차례
아내를 안았다.
그러나 그것도 영 전과는 달리 기력이 없어서 이병아로서는 오히려 안타깝고 갈증이
더할 뿐이었다.
그런 이병아이니 서문경과 호젓이 마주앉게 되자 절로 가슴이 야릇하게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달 만이냐는 서문경의 물음에 살짝 수줍은 듯한 기색을 떠올리며
눈으로 곱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서너 달 된 것 같은데... 맞지?”
서문경은 싱겁게 재차 묻는다.
“맞아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별일 없었소?”
“별일이라니요?”
이병아는 그말의 뜻이 묘하게 들려서 서문경을 빤히 바라본다.
“뭐 다른 일 없었느냐 그 말이지”
“당신은 여자가 시글시글하니까 별일이 많았겠지만, 나는 아무 별일 없었다구요”
“허허허...”
그 말투가 톡 쏘는 맛이 있으면서도 듣기가 괜찮아서 서문경은 껄걸 웃는다.
웃고나서 묻는다.
“국화주가 아직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당신도 참... 작년 가을에 담근 술이 지금까지 남아있겠어요.
지난 겨울 내내 당신이 와서 얼마나 마셨는데요”
“그랬던가...”
“좀 취하신 것 같은데, 또 술 생각나세요?”
“아직 안 취했다구. 무슨 술이라도 좋으니까 가져오라구”
“내가 먹다 남은게 있는데, 별로 좋은 술이 아니예요. 그거라도 가져올까요?”
“물론이지.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한잔 나눈 다음에... 안그래?”
“호호호...”
일어나 주방으로 가는 그녀의 엉덩이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재혼(再婚) 5회
오래간만에 서문경은 이병아가 따라주는 술잔을 기분 좋게 기울인다.
이병아 역시 홀짝홀짝 곧잘 마신다.
어쩐지 그녀가 그전보다 술이 는 것 같아 보여서 서문경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이병아는 전답과 가옥을 경매에 부치게 된 뒤로 심기가 울적해서 곧잘 술을 입에 댔고,
이사를 한 뒤 화자허가 몸져 눕게되자 밤이면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거의 매일밤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잠들곤 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 언저리가 발그레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서문경은 공연히 기분이 좋은 듯
싱그레 웃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불쑥 묻는다.
“여보, 보물 상자를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다뇨?”
“내가 계속 보관하고 있을까, 아니면 당신한테 돌려줄까? 어떻게 하는게 좋지?”
이병아는 대답 없이 가만히 서문경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얼른 알 수가 없다.
혹시 이이가 집값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동안 한 번도 단둘이 만나질 못했기 때문에 이병아는 서문경이 자기가 사는 것처럼
우선 자기 돈을 지불한 집값에 대해 얘기를 꺼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서문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꽤 많은 돈이 집값으로 빠져나가긴 했지만,
사업이나 가사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또 그녀로부터 동경에 보낼 뇌물로 받았던 삼천냥 중에서 이천냥을
뚝 떼어 삼킨 일도 있기 때문에 서둘러 보물 일부를 처분해서 갚아주도록
이병아에게 요청할 것 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물상자가 자기 수중에 있으니,
말하자면 담보물로서도 더없이 든든한 것이어서 더욱 안심이었다.
서문경이 보물상자 얘기를 꺼낸 것은 집 대금을 염두에 두고서가 아니라,
미망인이 된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 속마음이 궁금해서 문득 그렇게 물어보았던 것이다.
자기는 그녀를 여섯 번째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인데,
그녀는 혹시 딴 생각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지 싶어서 말이다.
“집값 때문에 하시는 말인가요?”
이병아가 묻는다.
“집값?”
이번에는 서문경이 멀뚱한 표정이다.
“당신이 대신 지불한 집값을 아직 못 갚았잖아요.
보물 일부를 처분해서 갚아드려야죠”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이야 보물상자를 내가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건지 어떤지,
당신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구.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알겠다구요. 여보, 그런 뜻이라면 물을 필요가 없잖아요?
당신이 계속 가지고 계셔야지, 달리 뭘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안그래요? 당연한 얘기를 왜 묻죠?”
“그래? 허허허... 좋아 내가 계속 가지고 있도록 하지.
당신이 나한테로 오면 그때는 돌려줘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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