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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백세, 행복한 소리인생’서도소리 배뱅이굿 이은관 보유자

오늘의 쉼터 2011. 9. 11. 10:07

 

늙지 않는 소리꾼, 낭월(朗月) 이은관 보유자
“왔구나~왔소이다” 두 음절만으로도 연상되는 반가운 소리꾼 서도소리(배뱅이굿) 이은관 보유자. ‘배뱅이굿하면 이은관, 이은관하면 배뱅이굿’이라는 등식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배뱅이굿은 무녀들이 하는 굿이 아니라 창극(唱劇)입니다. 배뱅이라는 처녀가 혼인 전에 죽게 되자 혼을 달래주기 위해서 굿을 하지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게 바로 배뱅이굿입니다.”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꼽이 빠질 듯한 웃음을 안겨 온 70여 년. 오랜 세월을 한 분야에만 매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는 것도 어렵기는 매 한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소리꾼’, ‘서도소리의 지존’ 등 수많은 수식어가 여전히 그를 따라 다니고 있으니,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소리를 들려주는 까닭이다.

 

아흔다섯의 세월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을 터인데, 높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맑은 음색과 익살스러운 표정이 여전한 이은관 보유자. 그에게 ‘늙지 않는 소리꾼’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보태어 드리고 싶다.

 

 

배뱅이굿, 눈물과 웃음의 넘나듦
남도소리에 비해 청이 높고 중간 음에서 격렬하게 떨려 하강(下降)하는 창법이 특징인 서도소리(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소리). 이은관 보유자의 서도소리는 김관준 명창이 창작한 소리로 최순경, 김종조, 이인수 선생을 거쳐 그에게 이어져 왔다.
 


“옛날에 이정승 김정승이 명산대찰에 가서 불공을 드려 세집에서 애를 하나씩 낳았는데…” 배뱅이굿에 대한 소개를 청하자 보유자는 어느새 배뱅이굿을 들려준다. 이런 기회가 없다 싶어 넋 놓고 아예 관객이 되기로 했다. “아니 무슨 이름을 배뱅이라 짓습니까? 왜 그런고 하니 태몽에 하얀 백발노인한테서 달비(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 위로 둥글게 틀어 얹는 장식) 한 쌍을 받아 치마폭에다 배배 틀은 꿈을 꾸었다고 해서 배뱅이라 지었죠.”  


세월이 배어나는 표정과 몸짓 하나 하나에서 전해지는 전율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듣노라면 ‘애간장이 끊어질 듯, 웃음보가 터질 듯’ 하다고 했나 보다. 두 눈을 내려뜨고 우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배뱅이굿으로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었을지 짐작해 본다. 

 

배뱅이의 넋과 함께 한 행복한 소리인생
스무 살이 되던 1937년. 일본이 한창 황민화를 내세우는 통에 민요를 부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제가 소리로 일찍 출셋길을 만나지 못한 것은 당시 가요를 부르지 않고 민요를 불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저 민요가 좋아서 불렀을 뿐, 민요를 고집한 데에 무슨 곡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두 음계에 이도를 더한 만큼의 넓은 음폭과, 높은 소리도 맑게 낼 수 있는 그에게 테너가수를 권유하는 지인들도 여럿 있었다. 그는 황해도 황주에 살던 당대 최고의 소리꾼 이인수 선생을 찾아가 서도소리를 빠짐없이 익혔다. 소리 공부를 마치고 ‘조선 가무단’과 인연을 맺으면서 무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만담을 하던 신불출과 김윤심, 박초월 명창 등 조선 가무단은 쟁쟁한 사람들로 꾸려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는 곳마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배뱅이굿 이은관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 제일극장에서 열린 민속경진대회를 통해서였다. 배뱅이굿으로 객석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어 인기를 얻었던 황해도 출신 김계춘과 나란히 섰던 무대. “김계춘 그 양반이 관객들을 온통 울려 놓으면 내가 나서서 실컷 웃겨 놓았죠. 내 소리의 폭이 본래 넓고, 또 높은 소리가 맑고 간드러지게 나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배뱅이 이름도 한번 못 부르고 내려올 뻔했어요.” 사실 웃는 사람을 울리려면 구성지게 소리를 하면 된다지만, 우는 사람을 웃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첫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타고난 목청과 끝없는 재담으로 전국을 누볐으니,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쌓였을까.

 

 

테너가수 대신, 최고의 명창을 얻다
서도소리 중에서도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소리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숱한 서양악기에도 능숙한 그는 오래도록 우리 음악과 서양음악의 만남을 선도해 왔다. 서양음악에만 매료되어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양악과 국악을 접목시켜 더욱 흥겨운 가락을 선사해왔으니, 그는 퓨전음악의 창시자라 할만하다. 여전히 작곡과 작사에 시간을 투자하는가 하면, 전국 각 도의 잊혀져가는 민요를 채보하고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온지 오래다. 
 


배뱅이도 어느덧 고령이 되었을 세월이건만 그는 편하게 제자들의 소리공양만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관리로도 유명한 그는 소식(小食)하는 식습관과 규칙적인 생활로도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상대의 조언에 경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과 자상한 성품은 그 자체로 소리하는 이들에게 가르침이 되어 왔다.  


“여러분 이은관이가 이때까지 나이 먹도록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관심 덕분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제 소리를 내지 못할 날이 오겠지요. 배뱅이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제자를 부지런히 양성하고 무대에도 열심히 오르려 합니다. 사랑해 주시면 더욱 힘이 나겠습니다.” 70여 년간 소리로 삶을 채워 온 행복한 소리꾼 이은관 보유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속 깊은 인사말이다. 출세의 길을 가고자 그가 서양음악을 배웠다면 배뱅이굿은 가요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집스럽게 우리의 소리로 인생을 채워 온 그가 있어 테너가수 대신 위대한 명창을 얻게 되었다. 

 

글ㆍ황경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ㆍ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