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참고집

남양주 덕능고개 덕흥대원군묘

오늘의 쉼터 2011. 4. 29. 00:28

 

남양주 덕능고개 덕흥대원군묘 (德興大院君墓) 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덕능고개 에 있는 조선 왕조 제14대 선조의
사친 으로, 대원군 제도가 처음 시작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과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1567)의 묘 전경 입니다 
















묘역 입구에 있는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河原君) 신도비 입니다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 묘소 입니다 









뒤편에서 바라본 하원군(河原君) 묘소 입니다 





덕흥대원군 신도비 입니다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 묘소 전경 입니다



























후면에서 내려다 본 덕흥대원군 묘소 전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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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55호(1980년 6월 2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3
-제작시기 조선
-소유자 전주이씨 덕흥대원군파 종중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는 조선 왕조 제14대 선조의 사친으로, 대원군 제도가 처음 시작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와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1567)의 묘이다.덕흥대원군는 휘는 초(岹)이며, 자는 경앙(景仰)이다. 부왕(父王)은 제11대 중종(中宗)이며, 어머니는 창빈 안씨(昌嬪 安氏)이다. 중종의 제7남으로 경인 1530년(중종 25) 3월 5일에 탄강하였다. 9세 때 덕흥군(德興君)으로 책봉되고, 13세 때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 정씨(河東 鄭氏)하고 길례를 올렸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고, 부실 양녀 순단(順單)에서 1녀를 두고, 기미 1559년(명종 14) 5월 9일에 향년 30세 일기로 별세하니 그 해 9월 17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언덕에 예장하였다.

 

배위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로 1522년(중종 17) 9월 4일 탄강하였다. 덕흥군과 가례를 올리고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제수되었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고, 정묘 1567년(명종 22) 5월 18일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하니 이 해 8월 9일 대원군 곁 이실(異室)에 예장하였다.

 

이 해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이 제13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생부와 생모를 1569(선조 2)년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는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고하려면 황백부모(皇伯父母)를 칭하기로 하였다.

 

그의 사자(嗣子) 하원군(河原君) 정(鋥)에게는 작위 1급을 가하고, 잠저(도정궁)에 가묘(家廟, 德興宮)를 세워 신위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것으로 정하였다. 정축 1577년(선조10)에 선조께서 친히 대원군 사당에 제향을 모시고, 4대 이후 사손(嗣孫)에게는 당사관(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마련하여 세습하도록 하며, 노비와 토지를 주고, 매년 관아에서 사시제물을 마련하게 하여 제향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 후로도 계속 선조(宣祖) 이하 역대 임금도 친히 전배와 제향(작헌례)을 모셨다.


▶도정궁(都正宮)

 

도정궁(都正宮)은 덕흥대원군 사저(私邸)이자 선조의 잠저(潛邸)이다. 조선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왕실(王室)의 본궁(本宮)으로 도성(都城)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 현재의 서울 종로구(鍾路區) 사직동(社稷洞) 262번지 일대, 즉 사직단(社稷壇)의 남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던 궁(宮)이다.


- 역사

 

도정궁은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7남이자 제14대 선조(宣祖)의 사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저(私邸)이자 선조의 잠저(潛邸)이고, 대원군의 역대 사손(嗣孫)들의 사저(私邸)이자 종택(宗宅)이기도 하다.본궁 후원에는 불천신위 6위를 모신 덕흥궁(德興宮)이 자리 잡고 있었다. 1538년(중종 33) 덕흥군 사저로 50칸으로 창건되었으며, 제13대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고, 1569년(선조 2) 생부 덕흥군을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 고사를 따라 생부와 생모를 각각 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숭하고, 잠저 후원에 가묘(家廟, 德興宮)를 건립하게 하였다. 그리고 4대까지 대군(大君)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가 다시 순조조에 와서 순조의 명으로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1588년(선조 21) 도정궁이 화마로 소실되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대원군의 사손들이 대대로 당상관 정3품 돈녕부 도정(都正) 벼슬을 받고 살아 내려오다가 제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李澧)이 자기 호를 딴 매은정(梅隱亭)과 담연정(澹然亭)을 건립하였고, 중건과 보수를 거듭해오다가 1865년(고종 2)에 문조의 비인 신정익황후 조씨가 말하기를 "도정궁의 사손이 영체(零替)됨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를 하지 못해서 장차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집의 소중함이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호조의 경비가 아직도 구차한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단지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 냥을 특별히 획하(劃下)하여 호조에서 속히 수리하라"라며 복원 명령을 내렸다.

 

-건국대 캠퍼스 내로 이건한 도정궁 경원당

 

1913년 12월에 도정궁이 화마로 이때까지 150칸이나 되었던 궁이 20~30칸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1920년 도정궁 장행랑은 서울의 5대 명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 장행랑은 현재는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다.현재 도정궁은 화마와 도시 개발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현재 사직동 도정궁터에 개보수된 현대그룹회장가와 고 운경이재형가(운경재단) 안채[연비려천(鳶飛戾天)]와 사랑채[긍구당(肯構堂)]가 개보수된 채 남아있으며,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이전한 도정궁 경원당(예전 사직동 정재문가)은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문화재 지정 및 보호되고 있다.

 

- 도정궁 역대 주인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1559년)
제1대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1597년)
제2대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1562년~1615년)
제3대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 1579년~1617년)
제4대 동지돈녕부사 이정한(李挺漢, 1601년~1671년)
제5대 동지돈녕부사 이홍일(李弘逸, 1640년~1718년)
제6대 증 참판 이세정(李世禎, 1661년~1721년)
제6.5대 진사 이명좌(李明佐, 1681년~1722년)
제7대 증 이조판서 이명회(李明會, 1685년~1727년)
제8대 증 좌찬성 이형종(李亨宗, 1706년~1759년)
제9대 판돈녕부사 이풍(李灃, 1727년~1795년)
제10대 진안군 이언식(晋安君 李彦植, 1752년~1819년)
제11대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 1771년~1830년)
제12대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 1805년~1843년)
제13대 증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년~1862년)
제14대 창산군 이해창(昌山君 李海昌, 1865년~1945년)
제15대 승지 이덕주(李德柱, 1887년~1962년)

 


▶하동부대부인

 
-출생 1522년 9월 4일(조선)
-사망 1567년 5월 18일
-거주지 도정궁
-국적 조선
-배우자 덕흥대원군
-자녀 하원군,하릉군, 하성군(선조), 이명순
-부모 정세호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 1567년)는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이자 덕흥대원군의 부인이다.하동부대부인은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로 1522년(중종 17) 9월 4일에 태어났다. 덕흥군과 가례를 올리고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제수되었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고, 1567년(명종 22) 5월 18일 46세 일기로 별세하니 왕비 부모를 장사지내는 예로 장사지냈으며, 같은 해 8월 9일 신주를 대원군 옆 이실(異室)에 모셨다.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이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 선조로 즉위하였다.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하동부대부인의 가족


아버지: 정세호(鄭世虎, 1486년 - 1563년)
어머니: 문의박씨 1485년 ~ 1530년
외할아버지: 박열 1455년 ~ 1545년
남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 1559년)
장남: 하원군(河原君, 1545년 - 1597년)
차남: 하릉군(河陵君, 1546년 - 1592년)
삼남: 선조(宣祖, 1552년 - 1608년)
일녀: 이명순(李明順, 1548년 - ?), 광주인 안황(安滉)에게 출가.


▶덕흥궁(德興宮)
 
덕흥궁(德興宮)은 도성(都城) 서부(西部) 인달방(仁達坊)의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사직동(社稷洞) 262번지 일대에 즉 사직단(社稷壇)의 남쪽 바로 옆 도정궁(都正宮) 내 후원에 있었으며, 불천지위 6위를 모시는 신궁이다.
덕흥궁(德興宮)은 선조의 조모와 생부모 및 백형 내외 분의 불천지위 6위를 모신 신궁으로 불천지위 6위는 창빈 안씨(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 덕흥대원군(선조의 사친), 하동부대부인 정씨(선조의 사친), 하원군 의헌공 이정(선조의 백형), 남양군부인 홍씨(하원군 정배), 신안군부인 이씨(하원군 계배) 6분을 모셨다.

 

1569년 선조의 명으로 잠저에 창건되었다. 창건 할때는 가묘(家廟)라고 하였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터 사묘(私廟), 덕흥사(德興祠), 대원군묘(大院君廟), 대원군 사우(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 사우(德興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廟),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리다가 고종조에 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 또는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렸다.4대까지 대군(大君)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세습 및 노비와 토지를 마련하게 하였으며, 관아에서는 사시제물을 보내주게 하였다. 다시 순조조에 와서 순조의 명으로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마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명으로 다시 복원하였으며, 선조 이하 역대 임금이 친히 전배와 제향(작헌례)을 행했다.덕흥궁 건물 구성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정당이 있었으며, 정당 앞쪽에는 임금이 친행할 때 배례공간인 배각이 있었고, 배각 좌우로 전사청 및 이안청이 있었다.현재는 도시 개발 및 도정궁 화마로 소실되어 사진으로마 볼 수 있으며, 불천지위 6위를 1950년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339번지 덕릉마을 내 덕릉재실(德陵齋室, 水落山房)로 이전하여 영년봉묘하고, 각 기신일에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고 있다.덕흥궁 제향의를 보면 왕릉 제향하고, 흡사하며, 현재 칠궁 제향하고 비슷하다. 덕흥궁 제향 의례는 국조속오례의, 춘관통고, 의주속등록, 대한예전, 덕흥대원군궁급묘의 등 예서에 잘 나와 있다.

 

 

▶하원군(河原君)


 
-출생 1545년 1월 23일
-조선 한성 도정궁
-사망 1597년 10월 3일
-수안군(遂安郡)
-거주지 도정궁
-국적 조선
-별칭 자는 백강(伯剛)
-직업 왕손, 종실
-배우자 남양군부인 홍씨, 신안군부인 이씨
-자녀 당은군, 익성군, 영제군, 성해부정, 장림도정, 연성수, 진산군, 진성군, 진양군
-부모 덕흥대원군, 하동부대부인 정씨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 ~ 1597년)은 조선 중기 왕손(王孫)으로 덕흥대원군의 사자(嗣子)이며, 제14대 선조(宣祖)의 백형(伯兄)이다.휘(諱)는 정(鋥), 자(字)는 백강(伯剛)이다. 1545년(인종 1) 1월 23일에 한성 서부 인달방 도정궁(都正宮)에서 탄생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하원정(河原正)에 책봉되었고, 1559년(명종 14) 외간(外艱)를 만나 1561년(명종 16)에 복기(服期)를 마치고, 승헌대부(承憲大夫) 하원군(河原君)에 봉작되었다.

 

이해 남양인 영의정 홍섬(洪暹)의 딸인 남양군부인 홍씨와 길례를 올렸다. 슬하에 자녀 3남 1녀를 두었다. 남양군부인 홍씨가 죽자 선전관 증 이조판서 이의로(李義老)의 딸인 신안군부인 이씨와 재혼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하였고, 부실 4명에서 6남 5녀를 두었다.

1567년(명조 22) 내우(內憂)을 만났고, 이해 6월에 동생이자 대원군 3남인 하성군이 제13대 명종의 뒤를 이어 입승 대통을하고, 1569년(선조 2)에 사친 내외를 추존하고, 작위 1품에 가자하였다. 선조의 잠저(도정궁)에 가묘(家廟, 덕흥궁)를 세워 봉사(奉祀)하도록 하였다.

1577년(선조 10) 선조(宣祖)가 친히 대원군 가묘(덕흥궁)에 제향을 모시고, 현록대부(顯錄大夫)에 봉하고, 종친들을 초대하여 1등주와 1등악을 내려 태평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1581년(선조 14) 문소전, 연은전, 종부사옹, 시원 등의 총책의 명을 받았고,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을 맞자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로 피난갔다. 1593년(선조 26) 상소를 올려 "종실자손 중에서도 유능한 자는 문무 양과에 응시하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1596년(선조 29) "왕은 위로는 조종(朝宗)의 위대한 치적을 항상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의 피나는 정성을 존중하면서 다수의 의견을 좇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국토를 유린한 왜군과 투쟁하기 위하여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에 가담하기도 하였다.1597년(선조 30) 가을에는 내전(內殿)이 수안군(遂安郡)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사옹제조로서 따라 갔다. 이해 10월 3일에 그곳에서 죽어 이듬해 12월 29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기슭 선영 곁에 즉 대원군묘 계하 신좌에 예장하였다.1605년(선조 38) 호성원종2등공신(扈聖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1758년(영조 34) 시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시호는 의헌(懿獻)이라 하였고, 온유현선(溫柔賢善)은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어질고 착하다"를 의(懿)라하고, 향충내덕(嚮忠內德)은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다"를 헌(獻)이라 하였다.1771년(영조 47) 영조의 명으로 덕흥궁(德興宮)에 신주는 불천지위로 향사되었다. 현재 묘역과 신도비는 덕흥대원군묘에 포함 되어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보호받고 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 1559년)
어머니 :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 1567년), 하동인(河東人) 판중추부사 정세호(鄭世虎, 1486년 - 1563년)의 딸.
동생 : 하릉군(河陵君, 1546년 - 1592년)
동생 : 선조(宣祖, 1552년 - 1608년)
여동생 : 이명순(李明順, 1548년 - ?년), 광주인 안황(安滉, ?년 - 1593년)에게 출가.
후실(父) : 양녀 순단(順單)
여동생 : 이혜옥(李惠玉, 1558년 - ?년), 고성인 남충원(南忠元)에게 출가.
1정부인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544년 - 1569년), 남양인(南陽人) 영의정 강녕군 홍섬(江寧君 洪暹, 1504년 - 1585년)의 딸.
장남 :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1562년 - 1615년)
2남 : 익성군 이향령(益城君 李享齡, 1566년 - 1614년)
3남 :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 1568년 - 1623년), 숙부 하릉군(河陵君)에게 출계.
장녀 : 이희령(李稀齡, 1563년 - ?년), 행주인(幸州人) 영의정 덕평부원군 기자헌(德平府院君 奇自獻, 1562년 - 1624년)에게 출가.
2정부인 : 신안군부인 이씨(新安郡夫人 李氏, 1556년 - 1616년), 성주인(星州人) 선전관 증 이조판서 이의로(李義老)의 딸.
1후실 : 풍천현부인 임씨(豐川縣夫人 任氏), 풍천인(豐川人)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 임중신(任重臣, 1517년 - 1580년)의 딸.
4남 : 성해부정 이종령(成海副正 李宗齡, 1573년 - ?년)
3녀 : 이계령(李繼齡, 1572년 - ?년), 풍산인(豊山人) 사과 김극가(金克家)에게 출가.
2후실 : 장월당(長月堂) 수원현부인 백씨(水原縣夫人 白氏), 수원인(水原人) 생원 백관(白琯)의 딸.
5남 : 장림도정 이덕령(長臨都正 李德齡, 1575년 - 1638년)
2녀 : 이경령(李慶齡, 1571년 - ?년), 진주인(晉州人) 현감 강극유(姜克裕)에게 출가.
4녀 : 이숙령(李淑齡, 1572년 - ?년), 함창인(咸昌人) 찰방 김정립(金廷立)에게 출가.
5녀 : 이영령(李永齡, 1574년 - ?년), 백천인(白川人) 유철(兪轍)에게 출가.
3후실 : 안산현부인 안씨(安山縣夫人 安氏), 안산인(安山人).
6남 : 연성수 이복령(蓮城守 李福齡, 1578년 - 1613년)
4후실 : 진산현부인 이씨(珍山縣夫人 李氏), 진산인(珍山人) 참판 이영의 딸.
7남 : 진산군 이유령(珍山君 李有齡, 1584년 - 1643년)
8남 : 진성군 이해령(珍城君 李海齡, 1595년 - 1655년)
9남 : 진양군 이담령(珍陽君 李聃齡, 1598년 - 1662년)
6녀 : 이옥령(李玉齡, 1583년 - ?년), 의령인(宜寧人) 봉사 남영립(南英立)에게 출가.

 

▶이하전(李夏銓)
 
-출생 1842년 2월 15일
-조선 한성
-사망 1862년 8월 20일
-조선 제주도 제주목
-사인 사형(사사, 독살)
-거주지 도정궁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치홍(致弘), 아명은 인손(仁孫), 도정궁, 증 경원군
-직업 문신, 왕족, 정치
-배우자 달성군부인 서씨
-자녀 이해창
-부모 완창군 이시인, 모 남원군부인 남원윤씨, 계모 경주군부인 경주김씨
-친척 이복형 이우용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년 2월 15일 - 1862년 8월 20일)은 무옥(誣獄)으로 희생된 조선후기의 문신·왕족이며, 도정궁(都正宮) 사손(嗣孫)으로 헌종조와 철종조에 왕위 계승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도정궁에 거주하였다 하여 보통 도정궁으로 불린다.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였으나 무옥(誣獄)으로 사사받았다. 사후 1863년 복권되고 1908년 순종 즉위 후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한성부 출신.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하전(夏銓), 아명은 인손(仁孫), 자는 치홍(致弘)이다. 덕흥대원군의 13대 사손(嗣孫)이며, 아버지는 완창군 이시인(李時仁)이며, 생모는 부사(府使) 남원인(南原人) 윤이현(尹彜鉉)의 딸로 남원군부인 윤씨(南原郡夫人 尹氏)이며, 계모는 경주인(慶州人) 김성곡(金星轂)의 딸로 경주군부인 김씨(慶州郡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참봉(參奉) 달성인(達城人) 서음순(徐音淳)의 딸로 달성군부인 서씨(達城郡夫人 徐氏) 대혜(大慧)이다.완창군 이시인의 차남으로 1842년(헌종 8) 2월 15일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8세이던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왕위 계승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집권 세력이던 안동 김씨가 강화도에 있던 은언군의 서손 이원범을 철종으로 옹립하면서 감시를 받게 되었다. 당시 이하전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을 때 풍양 조씨계열의 지지를 받았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음직으로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부(典簿)를 역임하고, 승진하여 도정(都正) 등을 지냈다. 그러나 유력 왕위계승자로 주목받게 되었다.1862년(철종 13) 김순성(金順性)·이극선(李兢善)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모반했다는 오위장(五衛將) 이재두(李載斗) 등의 무고로 이해 7월 19일부터 7월 23일까지 체포,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7월 19일의 공초에서 김순성은 양평군 양근에 사는 이항로, 이하전의 서족(庶族)인 이돈 등과 모의하여 이하전을 추대하려 하였으며, 그 장소는 이항로의 집이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뒤에 9월 22일에 의금부도사 조성교(趙性敎)가 이항로를 압송하여 추국하였으나 이항로는 혐의를 부인하였고, 뒤에 이항로는 고령인데다가 이돈이 실존인물인가 여부가 불확실하다 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이돈(李燉)은 실존인물로 그의 9촌숙의 아들이자 50대 가량이었으며 이하전과 10촌간이었으나 서얼이었다. 또한 김순성은 자신과 같이 역모를 한 인물로 이하전의 종형제인 이사규(李士圭)를 지목하기도 했다.

 

7월 25일 이하전은 제주도 제주목(濟州牧)에 유배한 뒤 이해 8월 11일에 철종이 사약을 내리자 향년 21세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사사의 원인으로는 철종을 찾아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하는 항의 때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출처 필요] 일부러 미치광이를 가장한 이하응은 살아남고 그는 사사당하였다. 출중한 왕족이라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 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한다.

 

한편 이하전을 역모로 몬 것은 병약한 철종의 사후를 대비하여 유력한 왕위계승자를 제거하려는 김흥근과 김좌근 등의 책략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풍양 조씨 계열은 이 사건의 여파가 자파의 지지세력인 이하전과 이항로에게 미치지 않다록 노력한 반면 안동김씨는 풍양조씨 외곽지지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사태의 확대를 기도하였다.

 

-사후

 

1864년(고종 1) 7월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 신원되었고, 이해 8월 29일 종친부에서 흥선대원군에게 덕흥대원군의 뒤를 잇는 문제를 아뢰자 전교하길 “완창군이 덕흥대원군의 종손(宗孫)으로서 그 자신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된 후에 자기의 아들에게 연루되어 신주(神主)가 사당에서 내쳐졌으니, 본디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아들이 이미 죄를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만 그대로 내쳐져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억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완창군의 사판(祀版)을 도로 사당에 봉안하고, 이익주(李益周)는 완성군(完城君)의 둘째 아들로 순서를 정하여 조상의 제사를 대신 받들게 하다가 손자가 생기면 이하전의 후사로 삼아서 종부(宗府)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잘 알고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1872년(고종 9) 7월 25일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이하전을 다시 정하고, 전교하길 "이하전(李夏銓)의 일은 죄명과 누명을 벗었으니 이제는 문제되는 바가 없다. 완성군(完城君)의 차양자(次養子)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섭사손(攝祀孫)이 된 것은 그때로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사손을 대신한 이재익(李載益)은 본가에 돌려보내고 이하전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1872년(고종 9) 7월 30일 이하전(李夏銓)의 후사를 세우는 일로 각파(各派)의 문장(門長)들을 모아서 의논을 하니,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증손이자 밀산군(密山君)의 10대손이며 유학(幼學) 이경용(李慶鎔)의 아들인 8살 난 이봉길(李鳳吉)을 양자로 삼았다.

1908년(융희 2) 양5월 30일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되었다. 이후 이하전의 집은 도정궁(都正宮)으로 불렸다.

 

- 기타


김순성에 의하면 이항로는 이하전의 10촌 서종형(庶從兄) 이돈에게 '이하전은 비범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하였으며, 이하전의 사주를 보고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 가족 관계

 

조부 :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 1771년 - 1830년)
생조부 : 이옥(李火+玉, 1773년 - 1820년)
고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 - ?)
고모부 : 여흥인(驪興人) 민치구(閔致久, 1795년 - 1874년)
고종사촌 : 여흥대원비 민씨, 고종의 사친이자 흥선대원왕의 부인.
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 1805년 - 1843년), 이옥(李火+玉)의 차남 -> 백부(伯父) 완성군 이희에게 출계.
어머니(생모) : 남원군부인 윤씨(南原郡夫人 尹氏, 1803년 - 1835년), 부사(府使) 남원인(南原人) 윤이현(尹彜鉉)의 딸.
어머니(계모) : 경주군부인 김씨(慶州郡夫人 金氏, 1816년 - 1863년), 경주인(慶州人) 김성곡(金星轂)의 딸.
후실
서형 : 감찰 이우용(李愚鎔, 1827년 - ?년)
부인 : 달성군부인 서씨(達城郡夫人 徐氏, 1842년 - 1924년), 이름은 대혜(大慧), 참봉(參奉) 달성인(達城人) 서음순(徐音淳)의 딸.
아들(양자) : 창산군 이해창(昌山君 李海昌, 1865년 - 1945년), 증 비서감승(秘書監丞) 이경용(李慶鎔, 1848년 - 1919년)의 아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증손 밀산군(密山君)의 10대손.
사촌형제: 이사규(李士圭)
10촌 서형: 이돈(李燉)


▶도정궁 경원당(都正宮 慶原堂) 서울특별시의 시도민속자료 

-지정번호 시도민속자료 제9호(1977년 3월 17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445 건국대학교 내
-제작시기 1872년 전후로 추정
-소유자 건국대학교

 

도정궁 경원당(都正宮 慶原堂)는 원래 종로구 사직동 252-82번지에 있었던 도정궁 일부 건물이다. 이 가옥은 조선 철종 13년 김순성·이경선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사사된 도정 이하전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로 도정궁으로도 불렸다. 이하전은 고종이 즉위하며 곧바로 신원되었고, 관작도 회복되었다. 후에 경원군(慶原君)으로 증직되었다.이 가옥은 후사가 없이 사사된 이하전의 제사와 덕흥궁(德興宮, 불천지위 6위) 제사를 받들기 위한 1872년 이후 봉사손을 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덕흥궁 교육홍보해야  
 
덕흥궁(德興宮)은 선조의 조모와 생부모 및 백형 내외 분의 불천지위 6위를 모신 신궁으로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262번지 도정궁(都正宮) 내 후원에 있었으며 불천지위 6위는 창빈 안씨(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 덕흥대원군(선조의 사친), 하동부대부인 정씨(선조의 사친), 하원군 의헌공 이정(선조의 백형), 남양군부인 홍씨(하원군 정배), 신안군부인 이씨(하원군 계배) 6분을 모셨다.1569년 선조의 명으로 잠저에 창건되었다. 창건 할때는 가묘(家廟)라고 하였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터 사묘(私廟), 덕흥사(德興祠), 대원군묘(大院君廟), 대원군 사우(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 사우(德興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廟),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리다가 고조 대에 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 또는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렸다.

 

4대까지 대군(大君)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세습 및 노비와 토지를 마련하게 하였으며, 관아에서는 사시제물을 보내주게 하였다. 다시 순조 대에 와서 순조의 명으로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임진왜란 때 화마로 소실되었다가 광조의 명으로 다시 복원하였으며, 선조 이하 역대 임금이 친히 전배와 제향(작헌례)을 행했다.덕흥궁 건물 구성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 정당이 있었으며, 정당 앞에 임금이 친행할 때 배례공간 배각이 있었고, 배각 좌우로 전사청 및 이안청이 있었으나 소실되어 불천지위 6위를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339번지 덕릉재실(德陵齋室)로 이전하여 영년봉묘하고, 각 기신일에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고 있다.

김민수 기자

 

▶안산시 단원구 - 안탄대의 묘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에 있는 조선시대 안탄대(安坦大)의 묘.1985년 9월 20일 경기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안탄대의 묘역에는 안탄대 부부묘와 풍해군 이잠의 묘가 있으며 묘소 부설물로서 비석 2, 장군석 4, 망주석 4, 상석 3, 향석 3개가 있다. 비석은 금석문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묘비 후면의 비문에 따르면, 그의 묘역은 선조 때는 묘소에 나무와 석물로 단장하고 수직원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묘역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자 사람들이 멋대로 나무를 베고 이 곳에 몰래 장사 지내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효종이 왕명으로 능원대군, 안평대군 등을 비롯한 그의 외손들에게 묘를 보호하게 하고 새로운 석물을 갖추게 하였다. 효종 7년 외손 계열인 신최가 찬(撰)하고, 신승이 글을 쓴 묘비가 건립되었다.안탄대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장인이며 제14대 선조의 진외증조부이다. 안탄대 의 딸 창빈안씨는 1507년(중종 2)에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2남 1녀를 출산하였가. 장남은 영양군이고, 2남은 덕흥대원군이며, 딸은 정신옹주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선조 이후 16대 왕은 창빈의 혈손이 되니 안탄대의 외손으로 계승되었다.


생존시 종7품인 유순부위(油順府尉)의 벼슬을 지냈으며 사실상 부원군의 위치에 있었는 데도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검소와 겸손으로 생애를 바쳤으며 사후에 조정에서 우의정을 추서하였다.안탄대는 집안이 몹시 가난한 데도 자기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결코 눈을 돌리는 일이 없었다 한다. 창빈이 아들을 낳은 후에는 문밖 출입을 삼가하였는데 그것은 처신에 더욱 조심함이요, 왕자의 외가됨이 송구스러워서였다.그의 묘비문에 따르면 효종 때 왕명으로 비문을 지으면서도 안산안씨 만을 밝히고 그의 선조와 가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의 자나 호를 알 길이 없고 출생일과 사망일조차 전하지 않는다.

 

 

▶덕릉고개와 덕흥대원군묘

 


-위치: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승리 산5-13


서울의 상계동과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을 경계하는 수락산과 불암산의 가운데 산령에는 아버지를 향한 효성이 가득 담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고개가 있다. 지금은 송추에서 중부고속도로를 있는 수락산과 불암산 터널이 관통하는 고가도로 밑으로 2차선 자동차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단숨에 오르내리는 길로 변했으나, 이 길은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임금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의 묘소에 이르는 길인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묘소를 덕릉이라 불러, 이 길을 모두들 "덕릉 고개"라 후세 사람들이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고개 마루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고 담을 끼고 돌아 별내면 쪽으로 산마루에서 한 10분 쯤 내려가면 좌측으로 오솔길이 있는데 그곳에 덕흥대원군의 묘와 그의 부인 정씨 묘가 문 무인석의 호의를 받으며 남쪽을 향해 양지 바른 곳에 안장되어 있다. 이 묘가 경기도 기념물 제 55호이다.선조 임금은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으로, 명종 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본래 왕위는 명종 임금과 인후왕후 사이에 태어난 순회세자가 계승해야 되나 열 세살에 숨을 거두어 그가 왕위에 오르니 선조이시다.덕흥대원군은 중종 임금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나 생전에 임금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셋째 아들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덕흥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1559년 (명종14년) 5월에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에 예장되었다. 그의 묘소가 덕릉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아들 선조 임금의 효성이 넘치는 애틋한 뜻이 숨어 있어 효성이 메말라 가는 오늘날의 세태에서 볼때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선조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상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아버지 덕흥군의 묘를 능의 수준으로 높이고 싶었으나 신하들은 끝내 불가하다는 대답 뿐이었다.그리하여 선조 임금은 할수 없이 이를 단념하고 대신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믿을 만한 내시를 동문밖에 있는 가게로 내보내어, 별내면에서 나무와 숯을 실은 수레를 끌고 오는 장사꾼에게 어디를 지나서 이곳까지 왔느냐 물어서 그가 "덕흥대원군의 묘를 지나서 왔다"고 하면 장사를 못하게 돌려보내고, 만일 "덕흥 대원군의 능을 지나서 왔다"고 하면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나무와 숯을 후한 값으로 쳐 모두 사들였다.이 소문은 한 사람 두 사람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불길처럼 퍼졌갔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나무와 숯을 끌고 온 장사꾼들이 모두 덕흥 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떠들어 대니 자연히 덕흥대원군의 묘소는 정식으로 능이라 반포한 것보다 효과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저절로 덕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아버지의 묘소를 능이라 부르지 못해 한을 품고 기어이 능으로 불리도록 애를 쓴 선조 임금의 효성과 지혜가 지금도 고개를 굽이굽이 도는 길에서 느껴져 덕능고개가 더욱 정겹다. 시간을 내 고갯길을 천천히 걸으며 길옆의 개망초와 산딸기의 맛을 음미하고, 묘역에 도열하고 있는 쪽동백 그늘의 참맛을 느껴봄도 좋을 듯 하다.

 

-찾아오시는 길

 

33번 마을버스->흥국사 입구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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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 묘(경기도 기념물 55호)

 


남양주에 있는 많은 묘역들은 강변역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하나 유독, 덕흥대원군 묘는 당고개역 방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33번 마을버스를 타고 덕릉고개를 넘어서면 언덕을 내려가는 중간에 좌측으로 덕흥대원군묘 표지판이 보입니다. 그러나 버스는 언덕을 다 내려가서 흥국사 입구에서 섭니다. 당고개역에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것 같더군요. 당고개역에서 걸어가도 30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버스 정류장 건너, 구멍가게에서 흥국사 방향으로 덕흥대원군 묘를 올라 갈 수 없냐고 물어보니 그냥 큰 도로를 따라서 가는 것이 찾기가 수월하다고 해서 버스로 내려 온 도로를 다시 되돌아 올라갔습니다. 한 5분여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면 입구에 표지판이 보입니다.
표지판 있는 곳에서 길을 따라서 50여미터 올라가면, 좌측에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의 중간쯤 우측에는 신도비가 하나 서 있더군요. 저는 덕흥대원군 신도비인줄 알았는데, 뒤에 자료를 정리하며 비문의 내용을 보니 하원군(河原君)의 신도비였습니다.


☞ 묘역 입구에 올라서면 안내판이 있고, 바로 앞에 쌍분의 묘지가 하원군의 묘소입니다. 하원군은 도대체 누구인가? 아래의 자료를 보니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더군요.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따르면... "덕흥대원군 초(岹)는 중종대왕의 7남으로 1530년(중종 25) 음력 3월 5일 창빈안씨에게서 탄생, 휘는 "초"요 자는 "경앙"이다. 덕흥대원군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하원군이고, 차남은 하릉군이다. 하릉군은 숙부 금원군에 출계하였고. 3남은 하성군으로 명종대왕에 이어 입승대통하니 곧 14대왕 선조대왕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를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첫째 하원군은 덕흥대원군파를 계승했고, 둘째 하릉군은 금원군에게 양자 입적하여 금원군의 가계를 계승하였으며, 셋째 하성군은 인순왕후에게 양자 입적하여 명종의 대통을 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부인입니다.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는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13살에 죽음으로써. 하성군 균이 선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네이버의 지식인에서 발췌 -


하원군의 묘역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으며, 쌍분의 중간에는 묘비와 상석 그리고 향로석이 있습니다. 봉분에는 한 단의 호석이 둘려져 있습니다. 대부부의 호석은 4각이거나 6각, 많게는 8각인데 비해서 하성군 봉분의 호석은 10개도 넘는 짧은 호석들을 이어서 둘렀습니다.하원군 묘역에서부터 길게 잔디가 덮혀 있으며, 100여 미터 위로 덕흥대원군의 묘역이 보입니다. 덕흥대원군의 묘역 중간 쯤 오르면 사초지 중간에 귀부 위에 올려진 신도비가 있습니다.


☞ 덕흥대원군의 묘역을 가기 위해서는 덕릉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런데 평범한 고개 이름에 능(陵)자가     들어 있어서 자못 궁금했었습니다. 신문 자료를 찾아보니 "[채희묵의 산행기] 불암산-수락산 이어 가기     [서울경제 2003-12-08 12:55]"에 덕릉 이야기가 있어서 옮겨 봅니다.

 

"조선 중종의 막내이자 제9자(子)인 덕흥대원군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선조가 즉위하였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위하여 묘소만이라도 능으로 추존하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고 설득하여도 신하들이 이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하교하기를 「아버님되시는 중종께서도 등극하시었고 또 인군(人君)인 아들을 두셨는데 덕흥대원군이 설혹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능자시행(陵字施行)이 그렇게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하며 신하들의 의견을 다시 물어도 역시 불가하다는 대답 뿐이었다.

 

 이에 선조는 능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한가지 방법을 꾀하였다. 즉 동문 밖에서 시탄상(柴炭商)을 하는 한 사람을 불러서 명하기를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수레와 숯수레를 불러들여 어디를 지나서 이 곳으로 왔느냐고 물어 그 장사꾼이 덕흥대원군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고 만일에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 장사꾼의 나무와 숯을 고가로 사들이라」 고 하였다.

 

 이 명을 받은 시탄상은 이후 한번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행하니, 이 소문이 한 사람 두 사람 거쳐 동편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오강시상(五江柴商)까지도 동편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을 일부러 찾아와서 덕릉경과(德陵經過)를 빙자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탄상들이 너무 밀려오는 바람에 이 제도는 중단되었으나 이후부터 덕릉은 정식 반포된 묘소보다 더욱 우세를 점하게 되어 저절로 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양주군지편찬위원회 《양주군지》 1978 pp.1051-1052 에서)"

 

조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1530∼1559)은 자는 경패(景패)이며 중종의 아들로 이름은 초(초)이다. 중종 33년(1538)에 덕흥군에 봉해지고 명종 14년(1559), 30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덕흥대원군의 형이 13대 임금인 명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1567년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鈞)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다. 선조 2년(1569)에 덕흥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이때부터 대원군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가 있다.

 

 

덕흥대원군의 묘역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사초지가 길게 뻗어 있으며, 전망이 좋습니다. 그리고 멀리는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입니다. 덕흥대원군 묘소도 쌍분으로 1단의 호석을 6각으로 둘렀습니다. 그런데 호석이 일자가 아니고 한쪽 부분은 옆으로 꺽어져서 다른 호석과 맞물려 있더군요. 아마도 일자 호석보다는 봉분을 보호하는 측면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쌍분 앞의 중앙에는 묘비가 있습니다. 그 바로 앞에는 상석이 족석없이 1단의 장대석 위에 올려져 있으며, 향로석이 있습니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장명등의 옥개석 부분은 다른 장명등에 비해서 조금 뭉뚱한 편입니다.묘역 좌우에는 망주석이 있으며, 망주석 옆에는 무인석이 양쪽에 서 있습니다. 무인석은 왕릉에만 세우는데, 왕릉으로 추존하고자하는 선조의 뜻으로 문인석 대신 무인석을 세운 것 같습니다. 무인석에 새겨진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편입니다.


흥국사(興國寺)는 덕흥대원군의 원찰로 버스 정류장에서 한 몇 백미터 올라가야 합니다. 묘역에서는 하원군 묘 좌측 내리막길로 내려 왔더니 언덕 밑의 마을에서 개를 사육하는지, 개들이 합창소리가 너무 크더군요. 마을로 접어들어 조금 올라가다 보니 좌측에 기와집이 있는데,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입구의 계단을 올라서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열리더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건물 앞으로 가 보니 덕흥사(德興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덕흥대원군의 사당이 맞더군요. 그런데 사당이 일반 사람이 거주하는 가옥 형태라서 영...<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