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참고집

경천사십층석탑의 이력

오늘의 쉼터 2011. 1. 21. 19:02

 

명   칭   경천사십층석탑(국보86호)              

전   시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

시   대   고려(1348년)

출토지   경천사 터

 

1. 경천사십층석탑의 이전, 복원 개요

1348년 고려 충목왕 4년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    에 세워짐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끼(田中光顯)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됨

1907년 배설(E.베델), 'Korea Daily News'등에 경천사십층석탑 약탈 기사 기고

1908년 H.헐버트, 일본 신문 'Japan Mail', Japan Chronicle'등에 부당성 기고

1918년 반환되어 경복궁 회랑에 40여년 동안 보관(방치)

1959년 경복궁내 전통공예관 앞에 시멘트를 이용해 부분 보수한뒤 세워짐

1962년12월20일 국보86호로 지정

1995년05월 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해 보존상의 문제점이 드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해체되어 보존처리(10년 동안 210군데 보존처리작업)

2005년 03월~05월 3차례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로부터 142개 부재 인수

2005년 03월28일~08월09일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에 이전, 복원

2005년 08월15일 낙성식

 

2. 경천사십층석탑의 양식과 사상

 경천사십층석탑은 건축사적으로는 고려 다포양식 건물 가운데 유일한 것이며,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재료가 된다. 미술사 적으로는 14세기 조각양식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불화 도상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재료가 된다. 비록 조각 양식은 다르지만 쌍둥이 탑이라 할 만큼 비슷한 탑인 원각사圓覺寺 십층석탑이 119년 후인 조선 세조 13년(1467)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1층 탑신에 새겨진 명문銘文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이 탑이 원나라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4층부터 10층까지의 사각형 평면과 목조지붕 등은 당시 원나라 탑에는 없던 형식이라는 점, 탑신에 새겨진 불상이 고려 후기 조각양식을 보이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탑은 비록 원나라 장인이 직접 관여했다고 하나 우리 나름대로 재창조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이 탑의 층수가 홀수가 아니라 십층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경천사가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1층 탑신에 새겨진 명문에 "대화엄경천大華嚴敬天..."이라는 구절에서 그 근거가 확인된다.

『華嚴經』에서는 십十을 '화엄의 완성', '완전한 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아자亞字형 평면도 십十의 형태로 볼 수 있어 평면까지도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계획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3. 경천사십층석탑의 장엄한 세계

 대리석을 재료로한 최초의 탑으로, 기단부는 사면이 튀어나온 아亞자형으로 3단을 이루고 있으며, 사자, 서유기 장면등이 조각되어 있다.

난간과 탑신 그리고 지붕으로 이루어지고, 탑신부는 목조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탑의 평면은 기단부와 같이 1층(탑신 남쪽면에 삼세불회三世佛會)부터 3층(기단의 나한상)까지는 4면이 튀어 나온 아亞자형을 이루었고, 그 위의 4층부터 10층까지는 네모난 형태를 보인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같이 불교에서 중요시 되는 여러 장면을 묘사한 16회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에는 각각이 어떤 장면인지를 알려 주는 현판懸板이 달려 있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다섯분 혹은 세분의 부처를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원래 탑의 상륜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공 형태의 지붕만을 복원하였다. 

 

4.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까(田中光顯)

 전등사지傳燈寺志에 의하면 1924년경 서양인들이 이 탑에 대하여 '900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 하였다고 한다. 당시 900만원이라면 엄청난 거액이다. 그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았던 탑이었던 것이다. 눈독을 들이던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까(田中光顯)가 서울에 왔을 때 일본군과 상인 등 50여명을 시켜 야밤에 이 탑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경천사 탑은 도쿄의 우에노(上野)공원에 세워져 있다가 지진으로 무너져 조선기술자를 데려다 다시 세우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5. 고려의 강융(姜融)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천사는 『원元나라의 승상인 탈탈脫脫의 원찰願刹이었고, 이 탑도 탈탈 승상을 위하여 세운 탑이라고 나온다. 경천사 탑을 건립할때 공사를 진두 지휘한 사람은 고려의 강륭(姜融: ?~1349)이었는데, 강융은 원나라에서 직접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공사를 하였다. 경천사가 원나라 승상의 원찰이었으므로 그 탑도 당시 최고급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융은 그의 할아버지가 진주의 관노였으며, 누이동생은 송악사松岳祠의 무당이었다. 고려 충렬왕과 충선왕을 둘러싼 파워게임이 치열할때, 강융은 충선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웠다. 이 후로 고속승진을 하였고, 충숙왕 15년에는 『만호』를 거쳐서 『좌정승』이라는 높은 직위에 올랐다. 나중에는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이 같은 출세의 배경에는 강융의 딸이 탈탈 승상의 소실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원나라의 정승인 탈탈이 뒤에서 강융을 지원하였을 것이고, 강융은 정치적 후원자인 탈탈에 대한 보답으로 경천사 석탑을 최대한 고급스럽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6. 베델과 헐버트

 이 석탑은 일본의 영향력이 거세었던 1907년 당시 세자이던 순종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여한 일본 궁내宮內 대신 다나까 미스야끼가 욕심을 내어 밤중에 뜯어 일본으로 옮겨갔던 것을 한국을 사랑하는 두 외국인 언론인의 투쟁으로 일본이 되돌려 놓은 문화재다. 곧, 문화재 외적外的인 정신가치가 부가된 석탑으로 그것을 되뇔 필요를 절감케 한다.

 개성 인근 페사에 있던 이 석탑은, 이 탑에 빌면 만병이 통치된다는 약황탑藥皇塔으로 팔도에서 사람이 모여들었기에 하룻밤 사이의 증발에 소문이 퍼졌고, 이에 격분한 영국 언론인 베델(한국명 배설裵說)이 그가 간행하던 영자 신문'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이 사실을 확인, 폭로했다. 이에 당시 통감부계 영자지인 '서울 프레스'와 일본 정부 대변 영자지인 '재팬 메일지'는 허위, 모략 보도라고 반박했고, 갖은 압력과 협박, 회유를 박차고 사실을 배경으로 대 논쟁을 벌였었다. 이 와중에 당시 헤이그 밀사 사겅네 깊이 관여했던 미국 언론인 헐버트가 일본 고베에서 발행하는 최대 부수의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에 '누가 석탑을 훔쳐 갔는가'를 비롯, 여섯 차례에 걸쳐 석탑 도적질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가서도 당지 신문'쿠리에 드 라 콘페란스'에 일본의 석탑 약탈 사실을 기고했고, 미국의 유력지 '뉴욕포스트'도 이를 받아 대서 특필하자 일본의 일간지 '만조보' '고베신문' '도쿄저널' 등지에서 이를 받아 보도하여 당시 조선 통치를 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곤욕에 빠뜨렸다. "일본이 내세운 한국의 보호통치의 상징"이라고, 이 석탑 약탈사건이 국제 여론으로 파급되자 감당할 수 없었던 데라우치(寺內) 일본 총독은 이를 반환, 경복궁 회랑에 방치해 둔채 광복을 맞은 것이다.   

 

7. 영원불멸의 석탑이여!

 비운의 탑인 경천사십층석탑은 96년만에 유랑의 세월을 끝내고 새 보금자리에 안착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 새 박물관 전시실(역사의길)에 옮기고 석탑 3층의 빈공간에 이건기(移建記 ,옮겨 세우게 된 경위)를 안치했다. 앞으로는 절대 다른곳으로 옮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금판에 새겨졌으며, 티타늄으로 만든 합에 담겨 진공상태로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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