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울지않는 새 / 여강 최재효

오늘의 쉼터 2011. 6. 21. 01:40

울지않는 새  / 여강 최재효

 

 

 태초에 조물주는 새에게 울 수 있는 기능을 부여했다.

세상에는 수 천 종류의 새가 있다.

인간의 상상 속에 사는 봉황새, 난(鸞)새와 현실 세계에서 날아다니

꿩, 메추리, 공작, 비둘기, 제비 등 수 많은 새들이 자신들의 희로애락을

리로 나타낸다.

물론 소나 돼지 등 인간과 가까이 사는 짐승들은 더 많은 의사 표현을

나타내며 사람들의 각별한 정을 받기도 한다.

 

 부화(孵化)하여 날개를 펼쳐 창공을 날아보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울지도

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사람이나 새나 살아가는 과정은 다를 게 없다. 

암수가 만나 사랑을 속삭이고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일정기간 알을 품어 새끼가

화되면 그 새끼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 때 까지 어미로써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자칫 의무를 게을리 했다가는 어떤 귀신에게 잡혀 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귀신들은 매정하지 않았다.

흔히 우리가 여름철 TV 납량특집(納凉特輯)에서 보는 처녀 귀신도 인정은 남아 있었다.

원수를 갚으려다 마지막에 복수심을 거두고 회개하거나 인정을 베푼다. 

한 포기 난초처럼 또는 청산에 고고한 학(鶴)처럼 그녀는 늘 혼자였다.

김인희 실장은 처음 그녀가 입원하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는 지난해 봄 병원에 들어섰다.

첫눈에도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떠서 병색(病色)이 완연하거나 혹은 어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번에 병자(病者)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종합적인 검진결과 그녀는 특이한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김인실장은

그녀의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불렀다.

 

 그녀의 두 아들들은 김 실장에게 선뜻 명함을 내밀었다. 큰 아들 명함에는

점잖은 글씨로 ‘xx대학교 교수’라고 쓰여 있었고 둘째 아들 명함에는 xx기업

대표이사‘라고 박혀 있는데 명함 테두리에도 금박이 입혀져 있었다.

두 며느리들은 패션쇼에 출전하는 모델로 착각할 정도였다.

진한 색조화장에 명품으로 몸을 감싼 두 여인을 보자 김 실장은 은근히 부아가 났다.


 “저어, 실장님, 실은 저희 어머니가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병원에 좀 모시고 싶어서요.

이 근처 여러 병원을 다녀봤지만 이 병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약간 대머리가 벗겨진 40중반의 큰 아들은 김 실장을 바라보지도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태도로 자신의 말만 하였다.


 “교수님, 저희 병원은 요양소가 아니랍니다.

환자들이 병 치료를 위하여 단기 혹은 길어야 한 달 정도 기간으로 머무는 병원이에요.”

김인희 실장의 말에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 끼어들었다.


 “아, 물론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 어머님께서 실버타운이나 요양원 같은 시설은 절대로 안 가시겠다고 하여

이리로 모시고 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누런 금테안경을 뒤집어 써 형보다 더 늙어 보이는 둘째 아들은 약간 거만하면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김인희 실장은 병원의 규약을 들이 밀면서 난처한 입장을 보였지만 두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두 아들과 입원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김 실장은 원장의 전화를 받고

원 수속을 허락하였다.


 S, 78세, 키 162cm,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20년 전 홀로됨. 두 아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였는지 병원 규약이 무색해졌다.

병원장의 특별지시에 의해 S에게 10평정도 되는 독실(獨室)이 배정되었다.

10평이면 일반 입원환자 6명이 충분히 입원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일반 병실 한 칸을 그녀를 위하여 특별히 개조하였다.

병원 직원들과 간호사들은 병원 측에서 병실까지 개조해 가며 S에게 독실을 제공하자

S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간호사, 1501호실 환자 말이야. 그 할머니 대단한 분이라며?”
 “어머? 박 간호사도 알고 있었어?”
 “두 아들들이 고위층과 아주 긴밀한 사이라며? 둘째 아들 처가가 K그룹이
라는데......”


 “재벌 사위라면 외국이나 다른 곳으로 할머니를 모시던지 왜 도심 한복판있는

우리병원에 모시려고 할까?”
 “그건, 그 할머니 고집이 보통이 아니래. 그 할머니가 우리병원을 직접 선
였대.”

휴게실에서 두 간호사가 커피를 홀짝이며 속삭였다.


 S의 두 아들로 인해 기분이 상한 김인희 실장은 며칠 동안 유심히 S의 상태살폈다.

특이한 증상도 없는 환자 아닌 환자를 입원 시킨 원장의 의도에 간의 실망을

느끼면서도 김 실장은 애써 불쾌한 감정을 감췄다. S는 아침 6시쯤 일어나 세수를 하고

곱게 화장을 하며 아침 식사가 제공 될 때 까지 성경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

 

 원장의 특별지시로 김 실장은 S의 식사와 병실 안 집기며 기타 사항들을 꼼꼼히 챙겼다.

S는 김 실장이 아침 8시면 자신의 병실에 들리는 것을 처음에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김 실장은 주치의가 다녀간 뒤 S의 이런 저런 것들을 살피고 잠시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지만

마음은 썩 내키지 않았다.

 

 고령(高齡)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단정한 자세를 보이며 타인에게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S가 측은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김인희 실장의 말에 S는 간신히 대답대신 고개를 앞뒤로

끄덕이거나  좌우로 가로 젓는 게 다였다.

원장은 김 실장에게 매일 아침 S의 상태에 대하여 보고를 받았다.

원장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S가 병원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병원 시설 이용에 불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김 실장, 나하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S가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인터폰을 통해 S가 김 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늘 고고한 매화나 난초처럼 청초해 보이는 S에게 김인희 실장은 질투심이 일 정도였다. 


 ‘웬일일까? 나에게 손을 다 벌리고?’
 “김 실장님, 어서 오세요. 바쁘신데 오시라고 해서 미안해요.”

S는 환한 미소까지 지어가며 김 실장을 맞았다.
 “할머니,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시죠?”


 “네에, 없어요. 그런데 할머니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우울해지네요.”
 “아,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해요.”

김 실장은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김 실장의 두 뺨이 빨갛게 물들자 S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김 실장의 손을 잡았다.


 “당황하지 마세요.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만.”
 “......” S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꺼내 김 실장에게 건넸다.
 “김 실장님, 요즘 저를 이상하게 보고 계시지요?”

S는 뜬금없이 김 실장게 말을 걸었다.

김 실장은 S의 말을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말뜻을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사님, 이상하게 보고 있다니요?” 김 실장이 두 눈을 크게 뜨고 S를 바라보았다.
 “혹시 병원에서 우리 자식들이 면회를 오지 않는다고 나에게 손가락질 하
는 건 아니죠?”

S를 억지로 입원시킨 S의 두 아들과 며느리들은 한 달이 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병원에서 S는 수수께끼 같은 노파였다.  

 

“여사님, 누가 손가락질을 해요? 전혀 그런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여사님우리병원 최고 VIP입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전그렇지 않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김 실장은 S가 툭 던진 말 한마디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호호 호호호......,아니면 되었어요. 난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할까봐 걱정돼서요.”

S의 장난기에 김 실장은 혼란스러웠다. 늘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난초처럼 고고하던

S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여사님, 그런데 여사님 저희 병원에 입원할 때 오셨던 두 아드님과 며느리 그리고 딸,

사위들은 모두 국내에 안 계세요?”

김 실장은 혹시 자신의 질문에

S가 기분상해 할까봐 걱정이 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S는 김 실장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 잠시 김 실장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가 우리 아들 며느리를 욕하나요? 그 아이들이 안 온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고, 연로하신 어머님이 병원에 계시는데 입원한 이후 한 번
도 병원에

안 오신 것 같아서요.”

김 실장은 이야기를 꺼내 놓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S는 잠시 주저거리더니 결심을 한 듯 했다.


 “김 실장님,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실래요?

그 아이들은 지금 이 나라의 발전과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불철주야 산업전선과

강단에 서서 땀을 흘리고 있어요.

그러니 그 아이들이 나에게 올 시간이 없다고요.

나는 그 아이들이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일 할 시간에 나를 찾아오는 것을 반대하거든요.”

S의 두 눈에 살기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S는 이혼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S는 임신하지 못했다.

전국에서 용하다는 산부인과를 모두 찾아 다녀도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이를 갖기 위하여 S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기 않기로 하였다.

민간요법도 써보고 점쟁이에게서 점을 보았지만 S는 끝내 수태를 하지 못하자

모든 책임이 S에게 가해졌다.

시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S는 조용히 이혼하는 길을 택했다.

 

 S는 머리 깎고 여승(女僧)이 되려고 해보았지만 속세의 흔적이 너무도 많아

1년 만에 하산하고 말았다. 

S의 친정아버지는 이혼당한 딸로 인하여 화병을 얻었고, 어머니는 남들 보기 창피하다며

S를 나이 많은 홀아비에게 재취(再娶)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빠들의 강력한 반대와 S의 거부로 S는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S는 큰 오빠의 소개로 법률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잠시나마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법률회사에 다니던 어느 날, 같은 회사 소속으로 일하던 이 변호사가

S에게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였다. S는 업무적인 일이거니 생각하였다.


 “S씨, 나와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S씨가 우리 회사에 입사하는 날부터 줄곧 지켜봐왔어요.”
 “......”

뜻 밖에 말을 들은 S는 당황하였지만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계기로 S는 이 변호사와 금방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이 변호사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둔 이혼남이었다.

이 변호사의 입장을 알게 된 S는 아이 딸린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빠져들었다.

훤칠한 외모, 신뢰감을 주는 말과 태도에 S는 자신도 모르게 이 변호사를 사모하게

되었다.

사모하는 정은 갈수록 깊어져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남몰래 밀애를 즐기는사이로 발전했다.

S는 결혼에 한번 실패한 상처를 이 변호사를 통해 치유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나이 많은 총각이나 아이가 없는 이혼남에게 시집을 가도 충분했지만

S는 이 변호사와 마치 천생연분인 듯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변호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S가 재혼하자 전 남편도 재혼하였다는 소문이 들렸다.

S는 자신에게 이상이 없다는 듯 임신을 하였고 곧 아들을 낳았다.

 

 이듬해 딸을 낳으면서 S는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오명을 씻고 남편의

랑을 듬뿍 받게 되었고 주변에서는 침이 마르도록 천생연분이라고 칭찬이

자했다.

늘 딸로인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친정어머니는 입이 함지박만해졌고,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도 외손자를 안아보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하여 S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오로지 남편의 자식과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을 양육하는데 S는 온 정성을 쏟았다.

S는 이 변호사에게 복덩어리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동료 변호사 두 명과 서울 S동에 법무법인을 설립하였다.


 김인희 실장은 S의 기나긴 결혼 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S의 입장이 된 듯 

웃기도 하고 가슴이 찡해 금방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아 S에게 무안해 하기도 하였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S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감정을 섞어 자신의 이력(履歷)을

펼쳐 보였다.

 

 자신의 발자취를 그려내는 S의 말솜씨에 김 실장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실장은 S가 친정어머니 같다고 생각했다. 

친정어머니도 한번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시간제한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볼 때 마다 김 실장은 어머니 가슴에 수백 권의 소설책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보, 이제 돌아갑시다.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어요. 병원 계신 어머님 소식이 궁금해요.”

사업을 핑계로 스웨덴으로 온 S의 둘째 아들 태균은 병도 없는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아내와 이국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외국기업과 합작을 위한 현지 조사와 국제시장 분석등 그럴듯한 이유를 달았다.


 “귀국하려면 당신이나 하세요. 난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더 있다 갈 테니…….”
 “여보, 당신 너무하는 거 아니오?”
 “너무하다니요? 그럼 내가 어머니 수발들며 간병인이라도 돼야한단 말이에
요?”

까칠해진 아내의 심기를 태균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

태균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아내를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장인의 막강한 배경이 없었더라면 태균은 벌써 수차례 부도를 맞고도 남았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태균은 마지못해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부품의 대부분을 장인에게 납품해야 하는 태균 입장에서 장인과 아내는 자신의 숨통을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장인은 늘 사위를 못 마땅한 태도롤 대했다.

자신이 바라던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위를 점점 신뢰하지 않자 태균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아내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인생에 큰 풍파를 의미했다.

편이 사업차 외국에 나갈 일이 생기면 남편의 사업체를 자신의 남동생이 전무이사로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3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물 쓰듯 하며 귀족 같은 생활에 푹 젖은 태균 부부는

안락함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태균은 아내를 아나콘다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대한 아나콘다가 순한 양이나 사슴을 칭칭 감고 있어서 감히 빠져 나간다

거나 다른 환상을 그리면 순식간에 숨통을 끊어 버릴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태균은 철저히 아내의 종물(從物)로 있어야 했다.

태균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태균을 통채로 삼키려 들었다.

사면초가에 처한 태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아내의 시종 노릇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 어쩌다 저런 여편네의 수족(手足)이 되었단 말인가.

건 도대체 남편을 남편으로 대하는 게 아니고 마치 하인 부리듯 드니 원.

머니는 병원에서 잘 알아서 간호해 드리겠지. 아니지, 아프지도 않은 분이시

차라리 병원에 계신 것이 더 편하실 거야. 나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자.’

황금 앞에서 태균은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어갔다.


 “여보, 우리 오후에 스톡홀름으로 나가요. 이 호텔은 너무 산 속 깊이 있어서 밤에는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요.”

태균의 처는 금방 한 마리 구미호가 되어 태균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자고. 나도 이 호텔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 말대로 오늘밤은 스
톡홀름에서

보내고 내일은 오전에 노르웨이로 넘어 가자고.”


 “태균씨, 그 나라 말고 덴마크나 네덜란드로 가요.

지난해 우리가 묵었던 덴마크 그 호텔이 너무 마음에 들었었어요.

그 호텔 특실에 있으면 내가 마치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에요."

 "당신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북국의 여신이야. 수 많은 남자하인들을 거느리

하고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여신이라고."

 "호호호호호......, 당신 나 놀리시는거에요?"

전라(全裸)의 여인은 한 마리 거대한 아나콘다가 되어 태균을 칭칭 감았다.


 “그래? 그럼 그리로 가지.”

구미호는 빨간 혀를 내밀어 순양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오로지 쾌락을 위하여 태어난 여인이었으며, 태균도 깊이 쾌락에 길들여

그 깊은 쾌락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장인의 거대한 황금성 앞에서 뜻을 접어야 했다.


 “고마워, 역시 당신은 나의 남자야. 호호호호…….”

객실은 다시 서서히 덥혀지기 시작하였다.

아내의 육탄(肉彈) 공격을 받으며 태균은 자신을 위하여 늘 지신명께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

자신을 위하여 한 평생 모든 것을 바쳐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희생하였지만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끔 마지 못해 전화를 걸어 어머니 S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전부였다.


 ‘아아, 어머니는 이 순간에도 이 탕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실 테지.

내가 조국의 수출역군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온 몸을 받쳐 노력하고

있는 줄 아실 테지. 젠장, 돈 많은 집안 사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존심 상하고

사내로써 못할 짓인지 누가 이 사정을 알아준단 말인가?

나는 여자네 집에서 기르고 있는 주구(走狗)야, 주구.

 

 내가 어디 병이 나거나 몸이 쇠약해지면 이 여자는 자신의 쾌락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를 헌신 버리듯 할 테지. 나 같이 한심한 놈이 또 있을까?’

태균은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온 몸으로 아내의 끈적끈적한 육공(肉攻)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내에게 철저히 길들여진 태균은 오로지 아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 있었다.


 “여보, 어머님에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는데......”
 “괜찮아. 어머님에게 한 두어 달 일정으로 미국하고 유럽으로 학술연구차

당신하고 같이 다녀온다고 말씀드렸거든.

그리고 당신이 10달 동안 배 아파서 낳은 태균이도 있는데 뭐?

그 녀석은 재벌가 사위잖아?

 나는 꼴랑 봉급쟁이 교수 신분이고.

 어머니에게 병문안을 그 녀석이 아마 삼사일에 한번 정도는 다녀갈 거야.

그러니 우리는 크게 신경 쓸 거 없어.”

 S의 큰아들 태성은 S를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집에 있었다.


 태성은 유명대학교 정교수로 있으면서 늘 세미나, 학술연구회, 현지답사 등을 이유로

항상 집에 붙어있기 힘들다고 버릇처럼 말해왔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지성인 중에 지으로 자부하며

주변으로부터 이 시대의 살아있는 양심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비록 S의 몸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S가 지성으로 키운 덕분에 S에게 깍듯하

아들 노릇을 해오고 있었다.

욕심이 많은 태성은 이복(異腹)동생 태균을 보면 히스테리컬하게 변하고 만다.  

자신보다 대학도 시원찮고 외모도 별로인데

재벌가의 사위가 된 것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질 정도였다.

태성은 동생에게 늘 라이벌 의식을 가지며 결혼 전까지 월등히 자신이 동생 태균보다

모든 면에서 한수 위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재벌가의 사위, 미모의 제수(弟嫂), 중소기업체 대표이사 등, 총체적 외적 수치에서

태성은 동생이 물 좋은 가문의 여인을 만나 보기 좋게 당했다고 이를 갈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입장에서 동생을 따라 잡을 수 없다는데

태성은 절망하고 있었다.


 “여보, 내일이라도 우리 한번 어머님에게 다녀와요.”
 “허허, 그 사람 참. 어머니는 우리가 학술연구차 미국에 가 있는 줄 알고
계시다고.

그런데 내일 불쑥 병원에 나타나면 나는 어찌되나?”

태성은 시가를 피우다말고 상기된 얼굴로 아내를 꾸짖었다.


 “여보, 전 어머님이 궁금해 죽겠어요.

멀쩡한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짓도 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봐요.”

저녁식사를 하던 태성 부부는 S의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큰 며느리로서 도저히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태성의 처는 한숨만 푹푹 내쉬며

남편의 도덕 불감증에 대하여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리킨단 말인가?

정말 이 사람이 대학교수가 맞는가?

이 나라 교육이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참으로 한심스럽구나.

아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정말로 암담하구나.’

태성의 처는 우울심사를 술로 달래야 했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곁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

렇지 않으면 태성은 자식들에게 공격을 받고도 남을 것이 뻔했다.

태성은 와인그라스를 빙빙 돌려가며 이태리산 포트와인을 음미하였다.


 “여보, 장모님에게 한번 가봐야 하잖아?”
 “흥, 그 잘난 두 올케가 있는데 우리가 뭐하러가요?

우리가 가면 오히려 어머니에게 부담만 된다고요.

당신이 두 오라버니들처럼 제법 이 나라에서 알아주는 위치가 된다면

나도 어머니를 자주 찾아가겠지만 당신이 그 잘나가던 회사를 말아 먹고

이렇게 구차하게 사니 내가 어디 얼굴 들고 다닐 수 있어야지요?”

S의 친딸 태희는 제과점을 운영하는 남편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어때서? 당신, 우리 아이들 밥 안 굶기고

큰 아파트에서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는데 뭐가 어떻다는 거야?

내가 처갓집에서 돈을 빌어다 당신 밥을 먹여

아니면 어디서 구걸을 해서 아이들 교육을 시켜?

나는 당신네 집안의 당당한 사위라고.

비록 얼마전에 IMF로 운영하던 사업체를 말아먹긴 했지만 날이야.

멀쩡하게 살아있어. 법적으로 당당한 당신 남편이라고."

아내의 말에 심기가 틀어진 사내는 침을 튀겼다.  


 “당신은 우리가 무슨 소, 돼지에요? 밥만 먹고 살게요?

사람이란 여가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요.

 내 동창들은 모두 BMW나 벤츠를 타고 다니며 상류사회에서 알아주는

여류인사로 지내고 있다고요.

그런데. 난, 난 뭐죠?

싸구려 국산 차나 몰고 다니며 겨우 집 근처 골프장에 가서

하루 일과 보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태희는 입에 거품을 물며 남편에게 대들었으나 태희의 남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담배만 꾸역꾸역 피워댔다.


 “김 실장님, 우리 큰 아이는 이 나라 교단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에요.

아마 그 아이가 외국 유명대학교에서 오라고 하는 걸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큰 인물을 잃을 뻔 했어요.

지금쯤 미국이나 유럽에서 우리나라 발전을 위하여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을 거 못 먹으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 큰 아들이 얼마나 대견해요. 

난, 늘 그 아이에게 미안해요.

제 어미 품에서 커야하는데 계모의 눈칫밥을 먹고 컸으니

그 아이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어요?

큰애는 자나 깨나 오로지 자신의 영달이 아닌 나라와 이 사회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조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르까 노심초사하는 아이에요.

그런 애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나는 고맙고 행복해요.

 

S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큰 아들 태성을 걱정하였다.


 “여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큰 아드님은 우리나라 교육계에 거목이 될 거에요.

그리고 둘째 아드님은 곧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계의 큰 별이 될 거구요.

두 아드님들이 여사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늘 미안하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정말이지 여사님은 두 아드님을 잘 키우셨어요.”

 

김인희 실장의 칭찬에 S는 아이들처럼 환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 실장님, 내가 정말 아들들은 잘 키웠죠?”
 “그럼요. 여사님에게 이 나라는 훈장을 드려야 해요.

지금 여사님이 병원에 계신 것은 두 아드님들에게 일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심적 부담을 주지않기 위한 여사님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반영된 행동이라고 봐요.

저도 여사님 처럼 든든한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여사님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워요."

김인희 실장말에 S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생글생글 웃어가며 아이처럼 박수를 치기도 했다. 
 
 
“어머니, 저에요. 정신차려보세요. 둘째 태균이가 왔어요. 어머니, 흐흐흐흐...”
 “어머니, 첫째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엄마, 이게 웬일이세요?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정신을 놓으시다니요?

엄마, 정신 차리세요. 엄마, 죄송해요. 엄마, 으흐흐 흐흐......”


 “어머니, 저에요. 어머니, 큰며느리가 왔어요. 죄송해요.

아범하고 미국에 나가 다가 어제 어머니 소식 듣고 달려오는 길이에요.

죄송해요 어머니. 진작 왔어는 건데.”

 S가 병원 생활 석 달 만에 졸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무더운 초여름, S는 아침 식사를 하고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고 들어와

잠시 낮즐기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간호사들이 S의 혈압을 재기 위하여 들어왔다가

S가 의식불명 상태를 확인하고 즉시 김인희 실장에게 보고 하였다.

김인희 실장은 조금 전 까지도 멀쩡했던 S가 의식이 없는 것을 보고 다급히 원장에게

보고하였고 놀란 원장은 주치의와 함께 허겁지겁 S에게로 달려왔다.


 “의식불명은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병리도 복잡한 것이지만 우리가 일상 흔보는

의식불명은 격렬한 싸움이나 어떤 충격을 받았을 때 혹은 히스테리 발작의 일종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환자를 조용히 눕혀 사관 혈에 침을 꽂아 두었습니다.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이삼십분 쯤 기다리면 금의식이 돌아 올 겁니다.

의식이 돌아온 뒤에도 바로 침을 뽑지 말고 한두 시간 을 재우는 것이 좋습니다.


 사관 침이 의식을 각성시키는 원리는 사지혈관의 긴장을 높여 심장박동을 촉진 시키고

반사적으로 뇌혈관 순환을 촉진시켜주는 혈관운동 반사와 함께 뇌 중추의 각종 핵 세포

집단으로부터 뇌신경 활성을 촉진 시키는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아드레날린 등의

내생분비(內生分泌)를 촉진하는 메커니즘에 의한 것입니다. 

평소에도 건강상태가 좋았으니까 금방 깨어날 겁니다.

원장님, 크게 신경 쓰지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주치의의 한방 응급처치를 받은 S는 오후 1시깨어났다.


 S는 깨어나자마자 두 아들을 찾았다.

김 실장은 긴급하게 두 아들들에게 전화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난감해진 김 실장은 두 딸에게도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네 사람 휴대전화에 ‘어머니 위독,

즉시 연락 요망’이란 내용의 문자를 띄웠다.

김실장이 문자를 보내고 밤이 깊어도 누구 한사람으로 부터도 연락이 없었다.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군. 연로하신 어머니를 병원에 반강제로 입원시켜 놓고

긴급한 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다니. 하기야 그 사람들 탓할 일도 없지.

나 역시 떳떳한 입장이 아니니......'

김 실장은 퇴근도 포기한 채 밤새 S의 곁에서 병간호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S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S 곁에서 새우잠을 자며 김 실장은 한잠도 자지 못했다.

S가 마치 친정 어머니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 실장의 어머니 역시 형제들 사이에서 탁구공 신세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안양에 사는 둘째 딸이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김 실장은 S의 상태를 야기 해주고 급히 병원으로 오라고 하였다.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태희는 두 오빠들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올케들에게 어머니의 상태를 빨리 오빠들에게 알리고 병원으로 오라고 하였다.


 네 명의 자식들이 모두 모이는데 이틀이 소요되었다.

다음 날 점심 때 쯤 둘째 아들이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왔다.

태균에 이어 큰 아들 태성 부부가 나타났S의 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음씨 착한 큰 딸 태진이 남편과 나타났다.

곧이어째 딸 태희도 남편과 달려왔다.

S는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었다.

 

 주치의는 S가 많이 쇠약해져 있어 또 다시 의식을 잃을 수도 있으니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며 자식들에게 대략적인 S의 상태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워있는 노모(老母)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균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머니, 으흐흐 흐흐......, 죄송합니다. 이놈이 못난 놈입니다.

멀쩡한 어머니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저희들만 자유롭게 뛰어 다녔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머니.”

태균은 어머니 S가 아버지와 재혼하여 낳은 첫 번째 자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이복형인 태성 보다 많은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S는 남편과 재혼하여 보란 듯 세상을 향해 자신은 ‘애를 못 낳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태균을 낳음으로써 만천하에 고할 수 있었다.


 ‘아니, 저이가 정말. 멀쩡하다니, 뭐가 멀쩡하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어머니가 벌써 부터 노망기가 있어 보이는 거 같던데.

노인네가 괜히 나만 보면 실실 웃으면서 쓸데없는 거에 참견을 하지 않나,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하며 말 꼬리를 잡고 늘어지질 않나, 분명 뭔가 이상이 있었어.’

 

 태균의 처는 시어머니 S의 손을 잡고 흐느끼는 남편을 못 마땅한 시선으로

바라 보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S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평안한 모습으로 누워있는데 자식들은 빙 둘러 서서

잠든 S를 내려다보며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얘들아, 우리 어디 가서 가족회의 좀 하자.

어머니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어디 휴게실이라도 가서 이야기 좀 나누자.”

태성의 말에 S의 아들, 딸 들은 우르르 몰려 나갔다.

병원 지하실에 있는 휴게실에 네 쌍의 부부가 모여 원탁사이에 두고 앉았다.

 

 모두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나자 태성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모두들 집안의 장남 입에서 어떠한 말이 나올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예로부터 경로효친 사상이 존중되고 특히 집안에 연로한 분이 계시면

굳이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따지지 않고 모든 정성을 다해 어르신을 모셔왔다.

특히 우리 K 이씨 가문은 효도에 대하여 각별하여 부모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을

잘 모셔오기로 소문이 났고 옛날에는 나라님이 칭찬을 하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아버님에게 시집오셨서 4남매를 분골쇄신(粉骨碎身)할 정도로 우리를

이 만큼 밥 먹고 살도록 했어.

나는 동생들이 잘 알다시피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일 년 중 거의 반 이상을

해외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 보니 어머님을 편히 모신다는 게 쉽지 않다.

오늘 나병상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한걸 참느라

혼이 났단다.

이제는 우리 4남매가 어머니를 병원에 저리 방치시키지 말고 우리들이 돌봐야 할 거 같다.

또한 네 형수는 알다시피 몇 년 전 디스크 수술을 받아서 자신의 몸도 돌보기 힘들 정도란다.

내 생각에는 태균이 네가 어머니를 좀 모셨으면 좋겠다.

너도 물론 사업이 바빠서 해외 출장이 잦은 것은 잘 안다.

제수씨는 집안에 계시니 가능할거야.

냥 어머니를 모시라는 게 아니다. 

매월 백만 원 정도를 어머니 모시는 대가로 보내 주마.

 

태성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균의 처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을 튀겼다. 금방이라도 시아주버니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안됩니다.

우리는 사업이 너무 바빠 일 년 중 대부분을 해외 영업장 관리하느

시간을 쏟아 붙고 있어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고요.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저도 한마디 하겠어요.

지금 저 이가 하는 사업체가 몇 번이나 부도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실은 잘들 아시잖아요.

저희 친정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 이가 지금 처럼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겠어요?

 아주버님은 아버님으로부터 빌딩 두 채나 상속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저이는 겨우 땅 천여 평 물려받은 거 밖에 더 있어요? 

아주버님 소유 빌딩 두채는 시가로 쳐도 천억을 훨씬 넘을 거예요.

저희는 그 잘난 땅덩이 팔아보았자 백억 정도 밖에 안 나간다고요.

인품도 있으시고 재산도 많으신 아주버님이 당연히 장자(長子)로서

어머님을 돌보는 게 도리이지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과연 누가 어머님을 모셔야 하는 건지요.

형님, 입 다물고 앉아만 있지 마시고 대답 좀 해보셔요.“

 

태균 처가 속사포 처럼 쏘아대는 말에 아무도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여보,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많이 도와주셨잖아.”

태균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뭐에요? 언제 아버님이 당신에게 도움을 주셨단 말이에요?

난 모르는 일이에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요.”

태균의 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숨소리가 가빠졌다.

태성의 처는 찬스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건, 동서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서방님과 동서가 결혼하기 전 일이니까

는 게 당연하지. 아버님에게는 서방님이 제일이었었다고.

저이는 서방님에 비하면 구박덩어리 밖에 안 되었어.

어찌나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서방님만 위해 주셨는지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어. 그러니 동서는 잘 모르면 가만이있어."

태성의 처가 보기 좋게 아랫 동서의 입을 막으려 하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가 인천에 자동차 부품공장을 처음 설립할 때

아버님이 백억 가까운 사업자금을 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백억이면 지금의 시세로 환산하면 천억 원의 가치가 된다.

그러니 너도 당연히 어머니를 모실 자격이 충분하지.

 

 제수씨, 안 그렇습니까?

동생이 그 자금을 밑바탕으로 오늘의 기업을 일으킨 거 아닙니까?

물론 중간에 어려움이 있어 처가에서 약간의 도움이 있었지만

결국은 아버님의 재산이 기초가 된 겁니다.

부모를 모시는 일에 큰 아들, 작은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여유가 되면 아무나 모셔도 되지요.


 제수씨, 제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빌딩 시가 사백억 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제수씨가 잘 못 알고 있어요.

제수씨는 재벌가의 딸이니 우리 서민들 처럼 백억이니 이백 억이니

하는 숫자가 가소롭게 보일 겁니다.

재벌가에서는 최소 몇 조 단위로 숫자를 말하잖아요.

여러분, 지금까지의 내말이 틀렸습니까?

내 말에 이의가 있으신 분 있으면 어디 말 좀 해보세요.

태진이도 말 좀 해보거라.

이 오빠 말이 틀리니?

아니면 태희야, 너도 무슨 말 좀 해보거라.”

 

태성이 점잖게 타이르는 조로 태균이 S를 모시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고

분위기를 아갔다.


 “오빠 말씀이 백번 지당하세요. 나는 아버지에게 시집 갈 때 강남에 60평짜

리 아파트 두 채하고 외제차 한대 그리고 지참금으로 십억 원 밖은 거 밖에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너무 짜게 행동 하셨어요. 거기에 비하면

오빠와 태균이는 우리 딸들에 비하면 큰 혜택을 입은 거지. 특히 태균이 너는

경제적으로 우리 누구 못지 않게 풍요하잖니?

 

 큰딸 태진은 동복(同腹) 오빠인 태성을 은근히 지원하고 있었다. 태진이 말

을 마치자 둘째 딸 태희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한 기세였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태희는 좀 더 두고 보겠다는 눈치였다.


 “아가씨는 모르시는 말씀마세요.

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이이가 IMF 이후로 서너 번의 부도 위기가 있었어요.

그때 마다 친정아버지가 지원해준 돈이 오백억 원은  넘을 거예요.

오백 원억이 껌 값은 아니잖아요.

설렁 제가 어머니를 모신다고 마음 먹으면 충분히 모실 수 있지요.

 

 그러나 이이가 해외에 나갈 때 저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이이도 외국말을 좀 할 줄 알지만 저 처럼 영어, 불어, 독일어, 아랍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이가 그렇지 못하고 또한 한번 해외에 나갔다하면 보통

삼개월 이상인데 그럼 저는 매일 독수공방(獨守空房)하란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태균의 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니, 나도 한마디 하죠. 언니는 어머니는 단 한 달이라도 집에 모셔보았어요?

우리 이씨 가문에 시집와서 단 하루도 어머니를 집에 모셔본 적이 없잖아요.

어머니가 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큰오빠와 내가 번갈아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사실은

알고 계시죠?

내가 언니라면 죄송해서라도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할 거에요.

 

 지금은 큰 아들 작은 아들 구분이 어디 있어요.

아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들을 내려다보시고 기가 막혀 하실 거예요.

또 어머니가 이런 우리들의 속사정을 아신다면 어머니는 삶의 의욕을 잃으실 거라고요.


 제 생각에도 이번에는 언니 네가 모시는 것도 좋다고 봐요.

언니 네는 집도 수백 평이나 되고 집안일 도우미도 서너 명씩 두고 있잖아요.

어머님을 모시면 언니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어머니를 모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굳이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뭐에요?

재벌가 사람들은 서민들을 사람같이 보지 않는다면서요? 그런가요?“

 

 태균의 처는 태희가 동복인 오빠를 지지해줄 줄 알았다가 허를 찔리자

크게 당황해 했다.

태희의 말에 태성 부부와 태진부부는 속으로 통쾌해 했다.


 “좋아요. 저도 이씨 가문의 며느리이니까 당연히 어머니를 모실 자격이 되죠.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저희 집은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서 얼마든지 어머니를 모실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이를 따라서 늘 해외 업무에 동행해야하니까

제가 어머니 곁에 붙어있지 않는다고 다른 소리들 하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태균의 처가 체념한 듯 하자 옆에 있던 태희가 소리를 질러댔다.


“언니, 정말 너무하시네요. 그럼, 엄마를 강아지 취급하겠다는 거 에요?

집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아무 상관도 없는 아주머니들이 주는 밥이나 들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네요?

어머니가 무슨 집 지키는 똥개에요?

언니가 우리 엄마를 정 모시기 싫다면 내가 모시지요.

 

 난 시집갈 때 아빠한테 태진이 언니랑 비승하게 재산을 받았어요.

내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니 내가 우리 엄마를 모실게요.

그러니, 잘난 오라버니들과 언니들은 실컷 인생을 즐기라고요.

으흐흐 흐흐......, 불쌍한 우리 엄마,

아이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아이고. 아이고......”


 여동생의 말에 두 오빠들은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태희가 한바탕 꺼이꺼이 울고 나자 태성이 다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태성은 양심상 도저히 막내 여동생에게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두 시간 이상 심도 있는 토론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태성은 나중에 다시 이 문제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고 서둘러 가족회의를 마치고 말았다.

S의 자식들이 가족회를 마치고 일어날 무렵 김 실장이 급히 휴게소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