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세상사는이야기

노합생주(老蛤生珠)

오늘의 쉼터 2011. 5. 15. 17:42

    노합생주(老蛤生珠) 출근은 언제나 분초를 다툰다. 다툰다는 의미에서 출근전쟁이라고도 한다. 초겨울 출근길은 더욱 많은 신경전이 펼쳐진다. 피곤한 퇴근길에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기 싫어 지상에 세워 둔 차에는 성에가 끼어 앞뒤 분간이 어렵다. 집이 불암산 근처인지라 도심보다 많은 서리가 내린다. 차 문을 열고 앉으면 차가운 핸들 잡기가 꺼려진다. 그나마 몇 분을 달리다 보면 차 안 공기는 이내 다사로워지고 차창 앞엔 아침 햇살에 비친 삼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와, 산옹(山翁)이 구름 모자 대신에 서설(瑞雪) 모자 썼구나. 간밤에 약간의 첫눈이 내렸나 보다. 눈이 내리니 눈부시다. 순간 빨간 신호등이다. 잠시 차내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슬쩍 훔쳐본다. 내 머리 위에도 여지없이 눈이 제법 내렸다. 닮았구나. 내 인생의 계절도 초겨울로 접어드는가 보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외로움과 추위를 달래려는 듯 어깨를 겨루며 다정하게 삼각을 이루고 있다. 상대적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아니야, 저 산은 셋이 아니야. 하나야. 반백의 늙은이가 먼 길을 가다가 행장을 풀고 하늘을 쳐다보며 홀로 드러누워 쉬는 모습이야. 늙어감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털빛이 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자 老(늙은이 로) 자는 毛(털 모) 자에 化(변할 화) 자가 붙어 있는 모양이다. 化 자의 亻이 생략된 꼴이다. 곧, 늙은이란 털 색깔이 변한 사람이다. 왜, 머리카락의 빛깔이 변할까. 그것도 하필 하얗게. 한눈에 첫눈에서 해답을 얻었다. 눈 내린 산길은 조심조심 다녀야 하듯이, 머리카락이 희뿌연 사람을 만나면 부딪치지 말고 조심스레 피해 다니라는 비표다. 아니면 아예 바짝 붙어 한 몸 되어 함께 걸어가 주든지. 몇 낱되지 않는 머리카락은 백학처럼 고상하다. 비굴하게 늙은 노인보다 더 보기 싫은 것도 없지만, 백학처럼 고고하게 늙은 노인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정한 노인의 모습은 어떤가. 생각이 깊은 만큼 주름 골도 깊다. 근력이 줄어드는 만큼 머리숱도 줄어든다. 그러나 그 주름 속에는 켜켜이 지혜의 보석이 박혀 있다. 노합생주(老蛤生珠). 늙은 조개가 진주를 낳는다는 뜻이다. 새파란 조개, 젊은 조개는 진주가 없다. 아픔을 겪지 않은 늙은 조개도 진주가 없다. 조개 처지에서 보면 진주는 암 덩어리이다. 조개는 몸에 들어온 뜻밖의 이물질을 녹여 없애려고 한평생 아픔의 체액을 분비한다. 그 분비물이 겹겹이 쌓여 진주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노인의 주름살 속에는 진주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하루의 변화는 ‘아침 -> 점심 -> 저녁 -> 밤 -> 잠’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변화는 ‘소년 -> 청년 -> 장년 -> 노년 ->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잠=죽음’이다. 그래 자다가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거야. 그래서 죽음을 다른 말로 영면(永眠)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원히 잠드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는 죽는 연습을 하리라. 매일 하리라. 내일 낮에도 짧게나마 죽는 연습을 하리라. 내 고향은 경북 예천 지보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어머님에게서 떨어져, 비싼 하숙(下宿) 대신에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 자취(自炊)를 하면서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주말이면 돈을 아끼려고 쌀, 김치, 고추장 등을 들고 삼십 리 길을 걸어 다니기도 했다. 일요일 낮, 고향집을 나서 읍내로 갈 때, 아버지 몰래 주머니에 용돈을 챙겨 주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때마다 하시는 말씀, 머슴아든 지지바든 집 밖을 나서려면 비상금이 있어야 한데이. 그 당시만 해도 출타 시에 비상금 한 가지만 있어도 든든했다. 그러나, 지금은 5대 필수요소가 필요하다. 휴대 전화, 키, 머니, 카드, 안경. 매일 아침 주문을 외며 출근한다. 가장 최근에 필수요소로 들어간 것은 안경이다. 정시안에서 원시안으로 바뀐 것이다. 싸구려 돋보기를 너덧 개 사서 여기저기 던져두고 살아간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키 작고 빵빵한 나로서는 휘어지고 부러지고 흠집나기 쉬운 돋보기를 몸속에 챙기고 다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자의 뒷다리를 붙잡고 살아가야만 하는 팔자이기에 돋보기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과 타협에 들어갔다. 나이 들어 원시안이 된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럼 그렇지, 이제는 가까운 이익보다 먼 곳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일 거야.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자연, 곧 저 앞산이 집보다 더 잘 보임은 지극히 자연스런 이치야. 그래, 원시가 됨은 즐거운 일이다. 다행히 가까이 있는 지저분한 것은 잘 보이지 않고, 육신의 영원한 고향인 대자연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때문이야. 한창 때는 산보다 도심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도심보다 산을 더 좋아한다. 등산을 즐기게 됨도 바로 이 때문일 거야. 올레~, 나이 들어 원시가 됨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노인은 노을에 서 있는 사람이다. 늙은이는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황혼녘 정원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하는 황홀한 장관을 떠올려 보라.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는 도연명의 원시안이 정겹게 다가온다. 마음은 이미 뜰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서예가/ 수원대 교수 권상호>

'종합상식 > 세상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일러 수리공  (0) 2011.05.17
성년의 날  (0) 2011.05.16
밀림의 성자  (0) 2011.05.15
스승의 사랑과 은혜  (0) 2011.05.15
마음을 곪는 아이들  (0) 201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