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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序詩) /에반제린 -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오늘의 쉼터 2011. 5. 14. 21:06

 

에반제린 -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Evangelne - Henry Wadsworth Longfellow


서시 ( 序詩)

-아카디의 이야기-

이곳은 태고의 원시림.
소슬대는 소나무와 독당근나무들이

푸른 이끼에 싸여 황혼녘에 아련하게 서 있다.
마치 슬픈 예언자의 목소리를 지닌
옛 드루이드의 성자(聖者)처럼,
가슴까지 턱수염 나풀거리는
은발의 하프 연주자처럼.
바위 동굴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드높고 장중한 소리는
이 태고의 원시림이 구슬픈 음조로 울부짖는 비명에 화답하는 듯하다.

이곳은 태고의 원시림.
하지만 사냥꾼의 발소리에 놀란 사슴같이
이 숲속에서 가슴 설레이던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상의 생활에서도 천국의 모습처럼 보이던,
숲속을 여울져 흐르는
강물처럼 덧없이 생애를 흘러 보내고 있던
아카디 농부들의 고향이었던
그 초가 마을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름답던 농장들은 황폐해지고,
농부들은 영영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월의 세찬 바람이 먼지와 나무잎들을
휘몰아 하늘 높이 끌고 올라가 멀리 바다 위에 뿌리듯이,
그들은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다만 아름다운 그랑쁘레 마을의
전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 견딤으로
소망이 이루어짐을 믿는 사람들이여,
여인의 정절이 지닌 강인함과 그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 숲속의 소나무들이 지금도 노래하는
저 애달픈 전설에
귀를 기울여라,
이 행복한 고향,

아카디의 사랑 이야기에.

[1]



아카디 지방, 마이나스 포구의 바닷가,
멀리 떨어져 조용하고 작은 그랑쁘레 마을은
아름다운 골짜기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큰 초원이 뻗어 있었다.
그것에서 이 마을의 이름이 유래 되었다.
그곳에는 많은 양들의 목장이 있었다.
농부들의 끊임없는 수고로 쌓아올려진 둑은
거센 파도를 막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철따라 열리는 수문을 통해
바다물이 초원을 적시게 하였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삼밭과 과수원과 옥수수 밭들이
울타리도 없이 멀리 평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북쪽으로는
블로미던 산과 옛 숲이 솟아 있었고,
그 산 위 높은 곳에는 구름과 안개가 서로 엉키고,
대서양에서 떠오른 안개가 가라앉는 기색도 없이
아름다운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농토에 둘러싸여
아카디 마을이 잠자고 있었다.

헨리 시대의 노르망디 농가들처럼,
집들은 참나무와 밤나무로 튼튼히 지어진 것들이었다.
짚으로 이엉 얹은 지붕에 들창문이 달리고
지하실 위에 내밀고 있는 차양이 문간을 감싸서 햇빛을 가렸다.
기우는 찬란한 햇살이 빛나 마을 길을 밝히고
굴뚝 위 바람개비들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조용한 여름날 오후면
아낙네와 처녀들은 눈같이 흰 모자를 쓰고,
붉은빛 푸른빛 초록빛 드레스를 입고,
베틀에 마주 앉아 옷감을 짤
금빛 삼실을 물레로 수다스럽게 뽑고 있다.
집안에서 들려오는 베틀의 북소리는 물레 소리와
처녀들의 노랫소리에 어울려 요란하게 들렸다.
점잖은 휘리시앙 신부님이 거리를 걸어 내려오면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잊은 채
자기들을 축복하는 손길에 입을 맞춘다.
신부님이 아이들 사이를 근엄하게 걸어가면
아낙네와 처녀들은 일어서 다가오는 그를 다정한 인사말로 맞았다.
이윽고 들에서 일꾼들이 돌아오면,
태양은 고요히 잠자리에 들고
황혼은 퍼져나간다.
종각에서는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의 집집마다 지붕에서는
평화와 행복에 잠긴
파르스름한 연기가 향이라도 피운듯이
여기저기에서 줄줄이 피어오른다.
순박한 아카디의 농부들은 이렇게 사랑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폭군이 다스리는 공포와 공화정치의
폐단인 질투를 알지 못한 채,
문에는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고,
창에 고리도 없이,

한결같이 집들은 개방되어 있고,
주인들의 마음도 그랬었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구별도 없었다.

마을에서 좀 떠어진 마이나스 포구 가까이에
그랑쁘레 제일의 부자 베네딕트 벨레폰테인이
넓은 밭을 갈며 살고 있었다.
그 집 살림을 마을의 자랑인
그의 딸,

사랑스러운 에반제린이 돌보고 있었다.
일흔 번의 겨울을 지낸 노인은
눈 속의 참나무처럼 크고, 건장하고, 정정하였고,
그의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고
볼은 참나무잎처럼 갈색이었다.
열 일곱 번의 여름을 지낸
그의 딸은 볼수록 아름다운 처녀였다.
두 눈은 길 옆 덤불 속에 반짝이는 딸기처럼 새까맣고,
그 눈동자는 금발머리 밑에 부드럽게 빛났다.
그녀의 숨결은 들에서 풀을 뜯는
암소의 숨결처럼 부드럽고 향기로왔다.
추수할 때면 집에서 담근 맥주 항아리를
일꾼들에게 날라다주던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일요일 아침에
성당의 종소리가 거룩한 음향으로 대기에 젖어들 때면
신부님이 히조프를 뿌리며 신도들에게 축복을 베풀듯이
그녀는 묵주와 성경책을 들고,

노르망 모자를 쓰고,
푸른 드레스를 입고,

옛 프랑스에서 가져왔던 이래로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로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귀걸이를 달고
긴 거리를 걸어 갔을 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하늘의 빛이라고 할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그녀의 얼굴에 빛나고
그 모습을 감싸는 것은그녀가 참회를 마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사라지고 나면
마치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이 멎은듯 서운하였다.
참나무 서까래로 튼튼히 지은
에반제린의 집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중턱에 있었고,
입구에는 덩굴이 감겨져 있는 뽕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던지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꾸며진 현관에는
걸상들이 놓여 있었고,
널따란 과수원을 지나는 좁은 길은
목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뽕나무 밑에 놓여있던 벌통들 위에는
처마가 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길 가는 나그네가 흔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자선상자나
마리아 상 위에 씌운 것과 같이 보였다.
멀리 저쪽 고갯길에는 이끼 푸른 두레박이
줄에 매달려 있는 우물이 있었다.
집 뒤에는 폭풍을 피하기 위한 헛간과 마당이 있었고,
거기 마당에는 양을 치는 울타리가 있었고,
칠면조가 화려한 나래를 펴고 뽐내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수탉이 그 옛날에
베드로를 깨우쳐 주던 그런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건초가 쌓여 있는 헛간들은 모여서 한마을을 이루고,
이엉 얹은 지붕과
층층이 늘어선 처마 위엔 보릿짚 지붕이 내밀고 있고,
그늘진 처마 밑 계단은 향기로운 곡식창고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에 비둘기 집이 있어,
순한 비둘기들이 지칠줄 모르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지붕 위에는 정처없이 부는 바람에
수없는 풍차가 덜거덕거리며
세월의 덧없음을 새겨 주고 있었다.

하나님과 친하고 인간 세상과 화목한
이 그랑쁘레 농부는
다양한 농원에서 살면서
딸 에반제린에게 살림을 맡기고 있었다.
성당에 모여 무릎을 꿇고 성경책을 읽던 많은 젊은이들은,
마치 가장 신앙이 깊은 성자를 대하듯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 처녀의 손이나 옷자락에 스치는 것을
더없는 행복으로 여겼다.
해가 지면 적지않은 젊은 구혼자들은
그녀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문을 두드리고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릴 때면
그들 심장의 고동과
문 두드리는 소리 중 어느 소리가 더 높은지 몰랐다.
혹은 마을 수호신의 즐거운 축제날이면
그녀와 춤을 추는 젊은이는
저절로 용기가 나서 춤을 추며
손을 굳게 잡고
노랫소리인 양 사랑의 말을 서둘러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 중에서 환영을 받는 것은 오직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 라쥬네스는 대장장이 바씰의 아들이었다.
바씰은 마을에서 유지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태고 이래로 어떤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대장간은 사람들에게서 호평을 받는 직업이었다.
바실은 베네딕트의 친구였고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사이좋게 자랐다.
마을의 선생이자 신부인 휘리시앙으로부터
같은 책으로 글을 배우고,
교회의 찬송가나 쉬운 노래도 함께 배웠다.
그러나 찬송가 연습과 일과가 끝나면
둘이는 손을 마주 잡고 바씰의 대장간으로 뛰어갔다.
문간에 서서 놀란 눈초리로
바씰이 말발굽을 가죽 앞치마에 올려놓고
말 편자를 익숙하게 박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곁에는 수레바퀴 쇠가 사리를 튼 불뱀처럼
둥근 불덩이가 되어 풀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때때로 밖에는 가을 저녁의 어두움이 더 짙어가고,
대장간의 문과 창 사이로 불빛이 어둠속으로 새어나올 때면,
안에서 그들은 용광로 곁에 앉아 불을 쬐며
풀무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풀무가 멎고 불꽃이 꺼져 재가 되는 것을 보고는
성당에 들어가는 수녀와 같다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기도 했다.



이제 밤은 점점 추워지고 길어만 가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쇠약해 가는 태양이 열 두 개의 궁의 여덟 번째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철새들은 무거운 대기속을 날아서
열대의 섬,

그곳의 바닷가로 찾아간다.
추수도 끝나고 숲속의 나무들이
옛날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듯이
9월의 가을 바람과 맞서면,
모든 징조는 다가오는 긴 엄동(嚴冬)을 예고한다.
유달리 계절에 민감한 꿀벌들은 예지적 본능으로 그것을 알고
벌집이 넘치도록 꿀을 저축하고,
인디언 사냥꾼들도
길어진 여우 털을 보고 엄동이 다가옴을 단정한다.
이러한 것이 초가을의 모습이었다.
이제부터 아카디 농부들이 경건한 할로윈(萬聖節)이라고 부르는 계절이다.
꿈꾸는 듯한 대기는 신비스런 빛으로 가득하고
풍경은 어린아이와 같이 새로 창조된듯 새롭기만 하다.
지상은 평화로 충만하여
어지러운 대양의 가슴도
한때나마 조용하고, 모든 음향들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뜨락에서 우는 수탉의 울음소리,
조린 대기 속에서 들리는 새들의 나래소리,
산비둘기의 울음소리,
모두가 사랑의 속삭임인 양 조용히 들려오고
황금빛 태양은 주위의 금빛 안개를 통해서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있다.
숲속의 나무들은 갈색과 주홍색과 노란색 옷으로 단장하고
이슬 속에 빛나고 있어서 보석과 예복으로 장식한
페르시아의 쥐방울나무처럼 찬란했다.

이제 또 다시 안식과 사랑과 고요의 계절이 시작 되었다.
무덥던 나날은 사라지고 황혼이 몰려올 무렵이면
하늘엔 초저녁 별들이 나타나고,

소떼는 집으로 향한다.
소들은 천천히 걸어가며 서로 목을 올리고
신선한 저녁 공기를 마시려고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맨앞 방울을 단 에반제린의 예쁜 송아지는
눈과 같은 흰 털과 목걸이와 리본을 뽐내며
마치 인간의 정을 알기나 하는듯 조용히 걸어간다.
바닷가 목장에서는
양치기가 양떼를 몰아오고
그 뒤에는 목장에서 목동이 돌아온다.
개는 지치지도 않고
자기의 예민한 본능을 뽐내며
의젓한 태도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텁수룩한 꼬리를 저으며 낙오한 양을 몰고 간다.
목동이 잠을 잘 때는
개가 양의 지배자였고,
밤에 별들의 반짝이는 고요를 깨고 숲에서
이리가 울 때면 그들의 보호자였다.
떠오르는 달을 이고
바닷내 나는 마른 풀을 실은 마차가
대기속에 냄새를 풍기면서
습지로부터 돌아온다.
목덜미와 다리의 털이 밤이슬에 젖은 말들은
즐거운 울음 소리를 내고,
그들의 등에 얹힌 안장들은
화려한 무늬와 주홍빛 술 장식으로 꾸며져
마치 우거진 접시꽃처럼 찬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암소들은 젖 짜는 아가씨들의 손에
젖을 맡긴 채
참을성 있게 서 있으면
젖의 흐름은 소리높이 규칙적인 음조로써
거품을 내며 젖통 속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소의 울음 소리,
사람의 웃음소리가
곡간의 벽에 되울려 농장 안에 퍼졌다.
또다시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곳간 문은 소리를 내며 무겁게 닫히고
나무빗장소리가 들리고 나면 잠시 고요해진다.

방안에서는 아궁이 넓은 난로 옆에

부농 베네딕트가 한가롭게
안락 의자에 앉아
맴도는 불길과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불타는 도시에서 원수들의 피투성이 되어
싸우는 것 같았다
등뒤 벽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일렁이기도 하면서 변덕스럽게
벽에 비쳐 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안락의자 뒤에는 서투르게 새겨진 참나무 얼굴들이
흔들리는 불빛 속에 웃고 있다.
선반 위에 놓인 백합 무늬 접시들은
마치 햇빛에 번뜩이는 무사의 방패처럼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노인은 몇 귀절의 노래와 크리스마스 송가를 불렀다.
그건 그의 조상들이 엣 노르망디공국의 과수원이나
버건디의 포도원에서 부르던 노래들이었다.
어진 에반제린은 아버지 곁에 자리잡고,
뒤의 구석에 놓인 베틀에 쓰일 삼실을 물레질하고 있었다.
베틀의 소리가 잠시 조용해지고 분주하던 북도 멎으니,
물레의 단조로운 소리가 퉁소소리같이 들려와
노인의 노랫소리의 뒤를 이어 마디마디 어울린다.
성당에서 성가대의 찬송소리가 그칠 때마다
복도의 발소리와 제단에서 신부님이 중얼거리는 말소리처럼
성단(聖壇)에서 들려오듯이
노인의 노래가 끝날 적마다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두 부녀가 앉아 있을 때,
발소리가 들리고,
빗장 소리가 갑자기 나고 문이 활짝 열렸다.
베네딕트는 구두의 징소리로
대장장이 바씰임을 알아채고,
에반제린도 함께 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소리가 문간에서 멎었을 때,

노인은 큰 소리로 반겨 맞이한다.
'어서 오게, 바씰, 이 난로 곁에 앉게나.
그 의자는 자네가 오지 않으면 않을 사람이 없네.
저 선반 위에서 파이프와 담배함을 가져오게.
담배 파이프나 풀무에서 피어오르는 자네의 정답고 즐거운 얼굴이
늪의 안개 속에 떠 있는 가을 달처럼
이글거려 보일 때가 가장 자네답단 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듣고 있던 바씰은
난로가의 의자에 앉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베네딕트 자네는 언제나 농담과 노래를 잘 하거든!
다른 사람들은 운수 사나운 일이나 파멸이 있지 않나하고
우울한 얼굴상을 하고 있는데도,
언제나 자네는 즐거운 기분으로 있고,

 매일같이 말 편자를 주운듯이 즐겁게만 보이거든.'
에반제린이 선반에서 내려
석탄 불의 부스러기에 불을 붙인 파이프를 받느라고

잠시 말을 멈춘 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영국배가 닻을 내리고 대포를 이곳으로 향하고 가스페로 강입구에
정박해 있는 지도 벌써 나흘째요.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내일 모두들 성당으로 모이라는 포고가 내렸네,

영국 왕의 명령이
이곳에 법률로써 공포된다고 하네.
그러나 모두들
불길한 억측을 하고 있어 인심이 아주 흉흉하네.'
베네딕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여러 척의 배들이 온 것은
좀 더 친해져 보려는 것일 것이네
아마 영국의 농사가
때아닌 비나 때아닌 한발로 올해에 흉년이 들어
우리의 곳간에 넘치도록 쌓인 곡식을 가져다가
그들의 가축과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겠지'
그러나 바씰은 고개를 저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지 않던데.'
말하고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루이스 버어그의 일은 잊지 못하지.
보우 세쥬르와 포트 로얄에서의 일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외진 숲속으로 도망치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운명에 가슴 두근거리며
숲가에 숨어 있지.
무기는 모두 몰수당하고 싸움에 쓸만한 것은 모두 빼앗겨서
남은 것이라곤 대장간의 망치와 풀베는 낫뿐일세.'
빙긋이 웃으면서 쾌활한 농부는 대답했다.
'무장 안 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가축들과 농토의 한가운데,
바다에 둘러싸여 평화로운 방축 속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지.
적의 대포에 둘러 쌓여 보루 속에 갇혀 있던
우리 조상들보다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오늘밤 이집의 난로가에는
슬픔의 그림자는 드리워지지 않을 걸세.
즐거운 약혼하는 밤이 아닌가.
두 사람이 살 집과 곳간은
마을 젊은이들이 튼튼하게 지어놓았고,
근처의 땅도 잘 일구었으며
곳간에는 건초가 가득 넘치고
집에는 일 년치 식량도 가득 차 있네.
르네 르블랑이 곧 종이와 잉크를 가지고 올 걸세.
우리도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 아니할 수 있는가?'
딸은 저만큼 떨어져 창가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맡기고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얼굴 붉히고 있다.
아버지의 말이 끝날 무렵에 훌륭한 공증인이 들어섰다.



공증인은 나이들어 허리는 굽었어도
대양을 저어가는 노와 같이
아직도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체구를 지녔다.
황금빛의 틀어진 머리는 옥수수 비단결 수염처럼
어깨 위까지 덮고 있다.
이마는 넓고 코 위에는 뿔테안경을 쓰고 있어
세상에 드문 현인같아 보였다.
스무 자녀의 아버지요,
백 명이 넘는 손자들이
무릎에 올라타고 그의 큼직한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즐겨 듣는다.
전쟁 때 4년이라는 긴 시간을 영국 편이라 하여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낡은 플아스의 보루속에서 괴로움을 겪었다.
조심성은 더해 가지만,
간교하거나 의구심은 전혀 없었고,
지혜는 원숙해지고,

인내심은 강하고,

 아들처럼 순진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했다.
그럴 것이 그는 아이들에게 숲속의 요술장이 이야기,
한밤중에 나타나 말에게 물을 주는 요정 이야기,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가
여기저기 아이들 방에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나는 레티시의 흰 유령 이야기,
또는 크리스마스 전날밤에 암소들이 외양간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옛 이야기,
거미를 호두껍질 속에 넣어 가슴에 걸고 다니면
열병이 낫는다는 전설,
네잎 크로버와 말편자가 신기한 힘을 가졌다는 이야기 등등,
마을의 전설집에 들어있는 모든 전설들을 들려주었다.
대장장이 바씰은 난로 옆의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파이프의 담뱃재를 털고 오른팔을 내밀면서,
'르블랑 선생, 마을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저 배들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면 말해주시오.'
큰 소리로 묻자,

공증인은 겸손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나로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는 나도 남들보다 더 알지 못하지만,
나쁜 의도로 왔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아요.
평화로운 우리를 건드릴 아무 이유가 없어요?
성급한 대장장이는 소리를 쳤다.
'도대체, 우리는 모든 일에 꼭 이치니, 까닭이니,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날로 옳지 못한 일이 행해지고,
힘이 강한 자가 정의가 되는 세상에.'
공증인은 이 격한 소리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은 의롭지 않아도 신은 의로우십니다.
결국엔 정의가 이깁니다.
내가 포트 로얄의 프랑스 감옥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여러 번 위안을 받은 전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언제나 즐겨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이 공증인이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이름은 잊었지만,

옛날 어느 도시의 광장 한가운데에 기둥이 서 있고,
그 우에 정의의 신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왼손에는 저울이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의 법률이나 백성들의 마음과 가정에
정의가 군림하고 있다는 표시였지요.
새들도 저울의 접시에 둥지를 마련했었고
햇빛에 번쩍이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 나라의 법률이 문란해지고
힘은 정의를 대신하여 약한 자는 학대를 받고
강한 자가 철퇴를 휘둘렀지요.
그 무렵,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진주 목걸이가 없어졌는데,
오래지 않아 그 혐의가 그 집의 하녀였던 고아 소녀에게 쏠렸지요.
재판 결과는 이 소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은 정의의 동상 밑에서 집행되었소.
그녀의 결백한 영혼이 하늘에 계신 신에게 오르자
그 도시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고,
우뢰와 번개가 무서운 기세로
동상 위에 떨어져 왼손에서 저울이 떨어져
돌바닥 위에 내동댕이 쳐졌어요.
그 저울 접시 속에
까치가 둥우리를 틀고 있었는데
진흙을 이겨바른 둥우리 벽속에
진주 목걸이가 박혀 있더라는 거요.'
이야기가 끝나자 대장장이 바씰은 말이 없었지만 승복하지 않고
말을 하고는 싶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마치 겨울날 유리창에 수증기가 이상한 모양으로 얼어붙듯이
그의 온갖 생각은
얼굴의 주름살 하나하나에 응결되어 있었네.
그때 에반제린은
식탁에 놓일 유기 등에 불을 밝히고
백랍의 큰 잔에 가득히 넘치도록
그랑쁘레 마을에서 독하기로 이름난 집에서 담근
호두빛의 예일 주(酒)를 따라놓았다.
한편 공증인은 호주머니에서 종이와 잉크를 꺼내어
침착하게 날짜와 두 사람의 나이를 쓰고
신부가 지참할 양이 몇 마리이고
소가 몇 마리인지 기록하였다.
모든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서류가 적당하게 잘 끝나고,
여백에 공증인의 도장이 태양같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런 다음에 농부 베네딕트는 가죽 지갑에서 은화를 꺼내어
식탁에 놓고,
세 곱이나 되는 공증료를 치렀다.
공증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부와 신랑에게 축복하며 큰 예일 주 술잔을 높이 쳐들어
그들의 행복을 빌며 마셨다.
그리고는 입술의 거품을 닦은 후
근엄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앉아 생각에 잠기자
이윽고 에반제린은 방 한 구석에서 체스판을 가져왔다.
곧 체스가 시작되었다.
노인들은 의좋은 내기에서
잘 둘 때나 실수를 할 때나 한결같이 웃기만 하고,
한 사람이 장군을 부를 때나, 포진이 틀릴 때도 웃기만 했다.
한편 좀 떨어진 곳에서
사랑하는 두 젊은이는 황혼의 어둠 속에 창가에 앉아서
파리한 바다와 목장의 은빛 안개 위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하늘의 무한한 목장에는 천사들의 물망초인
아름다운 별들이
고요 속에 하나 둘씩 꽃피기 시작했다.

저녁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이윽고 종루(鐘樓)에서
마을의 취침 시간인 아홉시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손님들은 일어나서 집을 떠나가고
고요만이 집안을 에워쌌다.
문간에서 주고 받은 잘자라는 작별 인사는
에반제린의 가슴 속에 여운을 남겨 기쁨으로 가슴 설레이었다.
난로 속에서 붉게 빛나는 불에 조심스럽게 재를 덮고,
참나무 층계를 소리내어 올라가자
에반제린도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 뒤를 따랐다.
이층의 어둠속으로 빛나는 그림자가 움직이며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램프에서 빛나고 있기 보다는
처녀의 붉은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검소한 방으로 흰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크고 높은 옷장이 놓여 있는데 그것의 넓은 시렁에는
에반제린이 손수 짠
린넨과 양털 옷감들이
고이고이 개어져 들어 있었다.
이것은 주부로서의 솜씨좋은 증거로써
양이나 소보다 더 좋은
결혼 때 그녀의 신랑에게 가지고 갈 훌륭한 혼수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램프의 불을 껐다.
부드럽게 빛나는 달빛이
창으로 흘러들어와 방안을 밝히자,
넘실대는 대양의 물결처럼
처녀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
달빛어린 방안에
백설같이 흰 발로 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과수원의 나무 그늘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이 램프의 빛과
그녀의 그림자를 고대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녀 또한 애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빛을 가리는 구름의 그림자가
방 마루 위를 스쳐가면서 잠시동안 방안을 어둡게 할 땐
슬픈 생각이 어느덧 그녀의 마음을 스쳐지나 간다.
창 밖을 내다보면,
마치 아브라함의 천막에서 쫓겨난
어린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정처없이 떠나듯이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자
별 하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태양은 그랑쁘레 마을에 상쾌하게 솟아올랐고,
마이나스 포구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대기 속에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 여러 척의 배들이
물위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던지며 정박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마을은 생기가 돌고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생활의 소란이 아침의 황금문을 요란스럽게 두들기고 있었다.
이웃과 농장에서, 근처 조그만 마을에서
쾌활한 아카디의 농부들은 나들이 옷차림으로
몰려들었다.
수레바퀴 자국이외는 인적이 없는 풀밭 위로
여러 목장에서 떼를 지어 나타나
한데 모여서
큰 길로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주고 받는 아침 인사와 즐거운 웃음 소리는
밝은 대기를 한층 더 밝게 했다.
한낮이 되기도 전에
마을에서 일하는 모든 소음은 잠잠해진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문간에는 떼를 지어모여
즐거운 햇빛 속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집집마다 손님이 넘치고
반가이 맞이하여 대접한다.
이 순박한 마을의 사람들은 형제처럼 지내고 있어서
모든 것을 내 것 네 것 없이 나눠 갖고 살고 있었다.
베네딕트 집에서는 더욱 풍성히 대접한다.
에반제린이 아버지 손님들 사이에 서 있을 때면
미소 띈 얼굴은 더욱 빛나고
고운 입술에서 환영의 말이 새어나오고
대접하는 잔에는 축복이 가득 찼다.

광활한 하늘 밑에
황금빛 과일이 무겁게 달려 있는 과수원의
향기로운 대기 속에 결혼 잔치는 벌어진다.
저쪽의 그늘진 현관에는 신부와 공증인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마음 착한 베네딕트와
건장한 바씰이 있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사이다 제조기와
벌통 옆에는
화려한 조끼차림의 명랑한
바이올린 켜는 미카엘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눈같이 흰 머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나뭇잎의 그림자와 그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아롱거렸다.
그의 명랑한 얼굴은 타다 남은
그루터기에서 재를 털었을 때
새롭게 피어 오른 석탄 불같이 벌겋게 빛났다.
바이올린의 떨리는 음률에 맞추어 늙은 그는
‘샤아뜨르의 주민’ 과 ‘던케르크의 종소리’를 노래 부르고,
나막신 신은 발로 마루를 두들기며
노래의 박자 맞추기도 했다.
과수원 나무 그늘과 목장 가는 길가에는
원무(圓舞)가 맴돌고 있었다.
처녀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는 베네딕트의 딸
에반제린,
젊은이 가운데
가장 점잖은 사나이는
대장장이의 아들 가브리엘이었다.

이렇듯 한낮이 지나갔다.
바로 그때 종루에서는 모임을 알리는
종소리 울리고
초원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남자들은
성당에 모이고,
바깥 정원에는 여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묘옆에 서서
숲에서 꺾어온 가을 나뭇잎이며 사철나무 가지로 화환을 만들어
묘석 위에 놓았다.
그때 함대에서 온 병사들이 뽐내며
지나서
성당의 문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들의 쇠북소리가
천장과 창너머로 요란히 울려 퍼졌다.
그 메아리 소리도 일순간에 그치고
육중한 문이 조용히 닫히었다.
군중들은 침묵 속에
군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때 사령관이 일어나 성단의 층대 위에 올라가
봉인된 국왕의 위임장을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이 모이게 된 것은
폐하의 명령에 의한 것이오.
폐하의 인자함과 친절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했는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나의 성격과 기질로써는
내가 하려는 일은 괴롭고,
여러분들에게는 슬픈 일인 줄 아오.
그러나 나는 폐하의 뜻을 받들고
복종하여 이를 전하지 않을 수 없소.
그대들의 토지와 집과 모든 재산을
국왕께서 몰수하고,
그대들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어명이오.
이주한 뒤에도
그 곳에서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백성으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폐하의 뜻에 따라 오늘부터 그대들은 포로라고 선언하는 바이오! ‘
무더운 한 여름날, 조용하고 청명하게 개인 날인데,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밭의 곡식들을 두드리고,

창의 유리들을 산산이 부수고,
태양을 가리고,
지붕에서 짚을 몰아가 땅위에 흩어지게 하고,
가축들이 울부짖으며 달아나 울타리를 부수려고 하듯이
사령관의 그 말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엄청난 놀라움을 주었다.
놀란 나머지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마침내 다시 제 정신이 들어
슬픔과 분노의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드높아 갔다.
이윽고 모두가 같은 충동에 미친듯이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망가려는 생각은 헛된 일
다만 울음소리와 불길 같은 저주의 외침만이
성당 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의 머리위에 우뚝하게
양손을 높이 치켜든 대장장이 바씰의 모습이
마치 성난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돛대처럼 나타났다.
‘횡포한 영국놈들을 타도하자.
우리는 그들에게 충성을 다짐한 일이 없다.
우리의 집과 곡식을 약탈하는 외국군을 죽여라!’
그는 더 외치려 했으나 무자비한 병사들의 손이 무참히도
그의 입을 내리쳐 쓰러뜨렸다.

노여움의 싸움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성단 쪽 문이 열리더니
휘리시앙 신부가 근엄한 얼굴을 하고 들어와서
서서히 성단 위로 올라가
성스러운 손을 들어 손짓하여 소란을 진정시키고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비장한어조로 시계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듯 말하였다.
‘그대들은 무엇을 하는가?
내 생애의 사십 년 동안 그대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써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왔거늘,
나의 수고, 자지 않고 밤새워 어버이를 뵈오러 가는 여행 같은

기도와 고행의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벌써
사랑과 용서의 교훈을 모조리 잊어 버렸는가?
이 집은 평화의 왕의 집인데
그대들은 난폭한 행동과 마음으로
이 집을 모독하려 하는가?
보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을!
저 슬픔이 가득 찬 눈에는
자비와 거룩한 연민들이 얼마나 있는가를!
들을지어다, 그의 입술이 ‘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는 기도를!
악인들에게 습격을 당한 우리도 지금 그 기도를 반복합시다.
‘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를 반복합시다.’
그의 훈계를 목소리는 작았지만
듣는 이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
그들에게 감정의 폭발에 뒤를 이어 회오의 울음을 울게 했다.
‘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그들은 신부의 기도를 따라 하였다.

이윽고 저녁 예배시간이 왔다.
촛불이 성단에서 빛나고 있다.
신부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침통하였고,
회중은 입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호응하였다.
그들은 아베마리아를 부르며,
무릎을 꿇고 앉아,
믿음으로 황홀해진 그들의 영혼은
마치 하늘로 오르는 엘리야와 같이
열렬히 기도를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
불행한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고,
여인과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이 집 저 집으로 갈팡질팡 했다.
해질 무렵,
마을의 거리를 신비스런 광휘로 비치고
농부들의 집들을 하나하나 금빛의 지붕으로 이어주고
창문들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기우는 햇빛이 눈에 비치는 것을
오른손으로 가리면서 에반제린은 문간에 서 있었다.
식탁에는 이미 새하얀 테이블보가 펼쳐져 있고
밀빵과 들꽃들의 향기 그윽한 꿀이 놓여 있었다.
큰 잔의 예일주가 있었고 목장에서 금방 가져온 치즈도 있었다.
그 식탁 윗 자리엔
아버지의 큰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에반제린은
향기로운 넓은 풀밭 위에서
나무가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아, 그녀의 가슴에는
그것보다 한층 더 짙은 그림자 어리어 있었다.
그 마음의 들녘에서는
자애와 자비와 사랑과 희망,
관용과 인내하고 하는 훈훈한 하늘의 향기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을의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안 일을 걱정하고,
아이들과 피곤한 다리를 달래며,
저무는 들길을 허전한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여인들의
수심어린 마음은 에반제린의 안색과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
시나이 산을 내려오는 예언자처럼
크고 붉은 태양은 그 빛나는 얼굴을
황금 빛으로 가물거리는 안개로 가리었고
성당의 저녁 종소리는
은은히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 무렵, 에반제린은
황혼 속에 성당 옆을 서성이었다.
성당안은 고요하기만 했고
그녀는 문 옆과 창가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들여다 보았으나 허사였다.
감정에 북받쳐 떨리는 목소리로
‘가브리엘!’
하고 외쳤으나,
죽은 자의 무덤이나 산 자의 무덤과 같은
성당에서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난로에는 불이 가물거리고
식탁에는 손대지 않은 식사가 놓여 있는 채
방마다 비어 공포의 그림자가 감돌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니
자기 침실의 마루를 밟는 소리도 슬프게 메아리쳤다.
한밤중에 그녀에게는 울적하고 슬픈 빗소리만 들려오고
창가에서는 뽕나무의
마른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만이 요란하다.
번갯불 날카롭게 빛나고 메아리치는 천둥소리는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들은 적이 있는 하늘의 정의를 되새기며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아침까지 평화스런 잠을 잤다.



태양이 네 번 떴다가, 네 번 졌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날
닭이 낭낭하게 울어
농가 처녀들의 잠을 깨웠다.
이윽고 황금빛 들판을 지나
침묵의 슬픈 행렬을 지어
이웃의 마을과 농장에서 나온 아카디 여인들은
무거운 수레에 가재 도구를 싣고
바닷가로 향했다.
구부러진 길과 숲을 돌아갈 때면,
보이지 않기 전에,
살던 집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옆에는 아이들이 손에 부서진 장난감을 들고
소 뒤를 쫓아가며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가스페로강 입구까지 그들은 서둘러 갔다.
그 해변에 농부들의 가재 도구는 아무렇게나 쌓아 놓여졌다.
해변과 본선들 사이를
작은 배들이 종일 왕래했다.
오후 늦게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어져 갈 무렵에
들판을 지나 저 멀리 성당에서
종소리가 메아리쳤네.
여인들과 아이들은 성당으로 몰려갔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파수병들이 나타났고 그 뒤를 따라
오래 갇혀 있던 아카디 농부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행렬을 지어 나왔다.
마치 자기 집과 고향을 뒤에 두고 떠나는
순례자(巡禮者)들이
노래를 부르며
나그네 길의 피로와 괴로움을 잊어버리듯이
농부들은 입을 모아 노래 부르면서
아내와 아이들 사이를 지나
성당에서 해변쪽으로 걸어내려갔다.
젊은이들이 맨 앞에 서서 목소리를 드높여
가톨릭 성가를 떨리는 입술로 불렀네.
‘구세주, 거룩하신 마음이여!
오, 끊임없는 생명의 샘이여!
우리들 가슴을 힘과 순종과 인내로써 채워주소서.!
걸어나가던 노인들과 길가에 서 있던 여인들이
이 성가에 따라 합창하니
위에서 빛나는 햇빛을 받고 있던 새들도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목소리와 같은 음조로써
화합했다.

에반제린은 해변으로 가는 길중간에서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고난 속에서 한층 더 튼튼한
자세로
묵묵히 기다리고 서 있었다.
고요하게
쓸쓸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행렬이 가까이 다가오자
감정으로 창백해진 가브리엘의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득하고
열렬히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달려가
그의 손을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가브리엘 ! 기운을 내세요.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이 굳으면
어떤 불운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 일이 없을거예요.’
미소를 띄며 이렇게 말했을 때
천천히 걸어오는 아버지를 보고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아 ! 너무도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
그의 볼에는 핏기가 가시고,
눈에는 광채가 사라지고,
발걸음은 가슴 속에 깃든
무거운 마음의 무게로써 한층 더 무겁게만 보였다.
미소와 한숨으로
그녀는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얼싸안고
위안의 말로는 못다하여
애정어린 말로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슬픔의 행렬은
가스페로 하구를 향하여 갔다.

거기에는 배에 오르느라 법석이었고
소란스러웠다.
짐을 실은 종선이 바삐 왕래하고, 그런 북새통에서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고,
어머니가 미처 모르고
육지에 남겨놓고 온 걸 알고
팔을 내밀고 울부짖고 있었다.
바씰과 가브리엘은 각각 다른 배에 나뉘어 타게 되었고,
에반제린은 실망에 싸여
아버지와 함께 해안에 서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는 일은 절반도 끝나지 않았고
황혼은 짙어져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빠져나가는 바닷물은 황급히 해변에서 물러나 모래밭에는
미역과 감태 미끈미끈한 해초들이 파도에 밀려나와 널려 있었다.
멀리 뒤에는 가재 도구와 마차들의 한가운데
집 잃은 아카디 농부들이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뒤에는 보초들이 지키어
도망칠 길도 없이 집시의 노숙처럼
하루밤을 새기 위하여 천막을 치고
잠을 자게 되었다.
울부짖는 파도 소리가 저 멀리 아래쪽 동굴 속으로 울려나오며
바닷가의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자갈을 굴리며 이끌고 나가면
멀리 바다 언덕 위에는 수병들의 배들만이 남아 있었다.
해가 저물고 소들이 목장을 떠나
돌아갈 때
습기어린 고요한 대기는 젖꼭지에서 흐른 젖냄새가 향기로왔다.
소들은
음매하며 울면서 낯 익은 앞마당의 말뚝 곁에서 오래오래 기다렸지만,
젖 짜는 아가씨의 손도 목소리도 찾을 길이 없었다.
마을은 고요 속에 잠겨 있을 뿐,
성당에서는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지붕에서는 연기가 오르지 않았으며,
창문에는 불빛이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해변에서는 폭풍에 난파된 배에서 떠내려와
모래밭에 밀려올라온 나무들로
여러 화톳 불이
여기저기 피워졌다.
그 주위에는 침울하고 슬픈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여자와 남자들의 이야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황량한 멜리타 해변에서 난파한
사도 바울처럼
충실한 신부는 자기 교구의 신자들 집집마다 방문하고 다니던 때처럼
모닥불에서 모닥불로 위로하며, 축복하며, 원기를 북돋우며,
돌아다녔다.
에반제린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곳까지 왔을 때 그녀는
펄럭이는 불빛 속에 여위고 바늘을 떼낸 시계처럼
생각도 감정도 잃은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에반제린은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말도 하지 않고
시중을 들어도
음식을 권해도 허사였다.
움직이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고
정신나간 눈초리로 오로지
흔들리는 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축복이 있으시길’
하고 신부는 중얼거렸다.
좀더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메어
마치 문턱에 발이 걸린 아이처럼
말이 입술에 걸린 채 나오지 않았고
눈 앞에 벌어진 정경과
엄숙한 슬픔의 존재 앞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다만 그는 말없이 처녀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고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 인간들의 죄악과 슬픔에도 흩어지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고 있는 별들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곁에 주저앉아 말없이 함께 울고 있었다.

갑자기 남쪽에서부터 한가닥의 빛이 솟아 올랐다.
그것은 가을에 핏빛의 달이
지평선 위에서 하늘의 수정벽을 기어올라
타이탄처럼 풀밭 위에
백 개의 손을 펼쳐서
바위와 시내를 휘어잡고
커다란 그림자를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은 점점 더 넓게넓게 빛나서
마을의 지붕을 비치고,
하늘과 바다를 비치고,
항구 밖에 정박한 배들을 비추었다.
빛나는 연기 기둥들이 솟아서 화염의 섬광은
순교자의 손과도 같이
떨며 겹친 연기 사이로 보였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불덩어리와
불타는 지붕을 집어올려서
허공에 높이 휘둘러
삽시간에 지붕 꼭대기에서는
화염의 섬광과 어울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떠올랐다.
이 광경을 보고
해변과 배 위의 사람들은 실망했다.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비통 속에 큰 소리로 울었다.
‘그랑쁘레 마을, 우리 집은
다시 볼 수 없게 됐구나!’
날이 밝은 것으로 알았는지
농장 안의 닭은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들의 우는 소리가 저녁 바람결에 들려와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섞였다.
그때 무시무시한 소리가 일어났다.
그것은 야생마들이 질풍같이 스쳐지나가고
물소의 무리가 소리소리 지르며 강가로 돌진할 때 놀라
저 멀리 서쪽의 초원 또는 네브라스카 강 기슭의 숲에서
야영하던 병사들의 잠을 깨게 한 소리와도 같았고
한밤중에 소와 말들이 우리와 담장을 부수고 뛰쳐나와
미친듯이 목장으로 돌진할 때 일어나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 광경에 압도되어
신부와 처녀는 말도 없이
빨갛게 퍼져나가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묵묵히 앉아있는 노인에게 말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
아, 노인은 자리에서 넘어져
바닷가에 길게 뻗어 움직이지도 않고
그 몸은 누워 있었고,

영혼은 이미 몸에서 떠나가 버렸다.
신부가 조용히 시체의 머리를 안아 일으키니
에반제린은 아버지 곁에 무릎을 꿇고,
공포 속에서 큰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더니 에반제린은 기절하여 아버지의 가슴에 묻고 넘어졌다.
그녀는 긴 하룻밤 동안을 혼미한 잠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의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눈물에 젖은 눈과 동정하는 슬픈 표정을 한
파리한 모습으로 구슬프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불타는 마을의 화염이 모든 정경을 밝게 비추고
머리 위에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주위의 얼굴들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희미한 정신으로는
그것은 혼미한 그녀의 감각엔 최후의 심판날인듯 싶었다.
그때 사람들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바닷가에 바닷가에 묻기로 합시다.
즐거운 시절이 다시 찾아와
유랑의 낯선 땅에서
우리들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의 성스런 유해를 성당묘지로 정중하게 다시 옮기도록 합시다.’
이것은 신부의 말이었다.

재빨리 바닷가에
불타는 마을의 빛나는 화염을 장래의 횃불로 삼아,
종도, 성경도 없이
그랑쁘레 농부를 매장했다.
신부의 목소리가 슬픔의 조사(弔詞)를 외자
많은 신자들의 목소리인 양 구슬픈 음조로 장엄하게 바닷가에서

화합하여 파도소리와 만가가 뒤섞였다.
다시 들어오는 밀물은 멀리 황량한 넓은 대양으로부터
날이 밝아옴에 따라서 육지로 향해 몰려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또 다시
승선의 소음과 소란은 일기 시작하여,
다시 썰물이 되었을 때에는
죽은 사람과 황폐한 마을을 뒤에 남기고

배들은 서서히 항구를 떠나갔다.

[2]

그랑쁘레 마을이 불타버리고,
한민족의 전부를 그들의 전설과 함께 싣고서
정처없고 유례없는 유랑의 길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짐은 실은 배들이 썰물에 실려 떠나가버린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아카디 사람들은 산산이 흩어져
먼 해안에 상륙했다.
마치 동북풍이 뉴우펀들랜드 해안을 어둡게 하는 안개 사이를
헤쳐 나갈 때의 눈송이와 같이 산산이 흩어졌다.
친구도 잃고, 가정도 잃고, 희망도 잃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추운 북쪽의 호숫가에서 무더운 남쪽의 들판까지,
황량한 바닷가에서 미시시피강이 양 손에
언덕을 잡고 바다로 끌고 가는 곳,
모래 벌판 여기저기에 맘모스의 뼈가 묻혀 있는
내륙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정처없이 유랑하였다.
친구와 가정을 찾던 그들은
거의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채,
더 이상 친구와 가정을 찾지 못하고
단지 묘비석에 그들의 경력만을 남기고
무덤만을 찾아 사라져 갔다.
그들 가운데 겸손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애인을 기다리며 나날을 보내는 한 처녀가 있었다.
아름답고 젊은 그녀,
아, 그녀 앞에 전개되는 것은
황량하고 넓은 소리 없는 인생의 사막일 뿐,
그곳엔 옛날에 슬픔과 고통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무덤이
보이고
오랫동안 정열이 식어버리고 희망도 오랫동안 식어버린 곳,
마치 오랫동안 타던 모닥불과 태양 속에 표백된
뼈다귀를 볼 수 있는
서부의 사막을 지나가는 이민의 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에는
미완성에다 불완전한 것이 있었으니
마치 유월의 아침이
새소리와 햇빛과 더불어 밝았다가 갑자기 중천에 멎더니,
서서히 색이 희미해지면서 방금 솟아오른
동녘으로 슬며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때로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방황하다가
이윽고 그녀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열정,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의 그리움, 굶주림, 그리고 목마름에 들떠서
그녀는 다시 끝없는 유랑의 길 떠났다.
때로는 묘지를 찾아가
십자가와 묘지의 비석을 바라보기도 하고,
이름 없는 무덤 앞에 앉아서
이것을 자기 애인이 영면하고 있는 묘지로 생각하고
그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
때로는 들리는 소문과 덧없는 속삭임에 이끌려
그녀는 안타까이 지향없는 길을 떠나기도 했다.
때로는 애인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잊어버린 옛날의 일이며 먼 곳이었다.
‘가브리엘 라쥬네스?’ 그들은 말했다.
‘오, 그렇지! 만난 적이 있어요.
대장장이 바씰과 일행이 되어 둘다 고원지방으로 가서
지금은 숲길 안내자며 이름난 포수가 되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가브리엘 라쥬네스!
오, 그래, 만난 적이 있어요.
지금쯤 루이지애나 지방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에반제린,
왜 한없이 기다리고만 있는거야
가브리엘같이 훌륭한 젊은이가 없어서 그래?
상냥하고 진실한 마음과 공손한 마음을 가진 상대자가 없어서 그래?
공증인의아들, 밥티스트 르블랑도
에반제린을 사랑하고 있으니
그에게로 가서 행복하게 살지 그래!
너무 아름다워서
성 카타리나의 머리를 땋고 지내기는 너무 아까와.’
에반제린은 슬픈듯 하나 침착한 목소리로 늘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의 몸은 따라가는 거예요.
마음이 등불과 같이 가는 방향을 비춰줄 때는
모든 것이 어둠에서 벗어나 밝아진답니다.’
그 말에 에반제린과 친밀한 고해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반제린!
그것이 마음속에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이지!
헛된 애정이란 말해선 안돼.
애정이란 결코 헛되지 않아.
애정의 흐름이 남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해도
빗물되어 샘으로 되돌아와 샘을 신선히 흐르게 하는 것이지.
샘은 증발되었다. 다시 샘으로 돌아오는 법이지.
슬픔과 침묵은 강하고 인내는 황금 같은 것이니
참고, 노력해서 그대 사랑을 성취해야지 !
마음이 황금같이 순화되고 강해지고, 완전하여져셔,
하나님같이 성화되도록 그대의 사랑을 성취해야지!’
이 같은 신부의 말에 더욱 힘을 얻은
에반제린은 참고 견디며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바다의 만가가 들려오고
그 소리 속엔
‘절망하지 말라’는 속삭임이 섞여 있었다.
이처럼 가련한 에반제린은
돌자갈과 가시덤불 위에서
맨발로 피를 흘리는 부자연스런 인고(忍苦)가 계속 되었다.
시의 신이여!
우리들로 하여금 이 유랑자의 발자취를 쫓게 하소서!
그녀가 방황하며 걸어온 길
그녀가 살아온 나날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산골짜기를 냇물을 따라 걸어가는 나그네처럼
때로는 물가에서 떨어져 들판 여기저기서
물빛을 바라보다
이윽고 물가에 다다르면 울창한 숲에 가려
비록 시냇물의 흐름은 보이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그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마침내 냇물의 어귀를 찾아내는
그러한 기쁨을 누리게 해주소서.



때는 오월, 아름다운 강의 훨씬 하류,
오하이오 강을 지나고 워배시 강을 지나,
넓고 빠른 미시시피강의 황금빛 물결 따라
저어가는 한 척의 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카디인들의 배였다.
그들은 유랑인들 무리였다.
말하자면 조난으로 해안 여기저기를 표류하던 파편들이
지금은 함께 연결된
뗏목과 같은 무리였다.
오직 희망과 소문에 의지하면서
아카디 해안과 오펠루스 고원에서 소작농을 하던
농부들 속에서 일가 친척을 찾는 남녀노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에반제린과 그녀의 보호자 휘리시앙 신부도 있었다.
그들은 얕은 사주(砂洲)를 지나 우거진 황야를 거쳐서
낮이면 파도치는 물결 따라 내려가고,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강가에서 노숙했다.
때로는 흰 솜털 같은 목화송이가 핀
푸른 섬들 사이의 급류를 지나 넓은 호반으로 나오면
은빛 사주들의 여기저기 눈같이 하얀 것을 반짝이며
수많은 펠리컨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지세는 평탄해지고 강 양쪽에 연하여
백단나무가 우거진 정원들 가운데
흑인의 집과 비둘기집이 있는 경작자들의 집이 있었다.
사시사철 여름인 열대 지방에 접근하고 있었던
골든 코스트를 지나고 오렌지와 시트론의 과수림을 지나서
장엄한 미시시피 강이 동쪽으로 구부러져 흐르는
지방에 가까이 갔다.
진로를 바꾸어 플레크민 만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거미줄처럼 얽히어져 있어서
우회하는 흐름의 미로 속에 빠져 버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키 큰 삼나무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어
어두컴컴한 동굴을 이루고,
그 삼나무 밑의 이끼들이 마치
오랜 성당 벽에 걸려 있는 깃발처럼 하늘거렸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해질 무렵 둥우리로 돌아오는
해오라기의 날개 소리나,
흉측한 웃음소리로 달을 맞이하는
올빼미 소리뿐이어서 사방은 죽은 듯 고요했다.
달빛은 물 위를 아름답게 비추고,
컴컴한 동굴 이루는 삼나무들을 비추고,
낡은 집 틈새로 나오는 빛과도 같이
녹음의 동굴을 비추었다.
사방은 오로지 꿈속같이 어렴풋하고 신기한 것뿐,
그들의 마음 속엔 경이와 슬픔이 감돌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불길한 징조뿐이었다.
들판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멀리 앞에 있는 풀잎들이 자지러지듯이
운명의 말굽 소리 듣고
불행의 징조 예감하여
운명이 닥치기도 전에 사람들의 마음은 자지러졌다.
그러나 에반제린의 마음은 달빛을 통하여 자기를 부르며
어른거리는 눈 앞의 환영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것은 환영의 형태를 확신하려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의 바람이었다.
그러한 어두침침한 통로를 통해
가브리엘의 방황하는 모습이
노를 저을 적마다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환영 대신에
뱃머리의 한 뱃사공 청년이 일어서서
이같이 음울한 밤중에 노를 저어 지나가는 배가 없나하고
그 신호로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는 어둠에 싸인 기둥과
나뭇가지 사이에 울리어
정적의 고요함을 개고 말이라도 하듯이
숲에 메아리쳤다.
머리 위에선 소리없이
이끼의 덩굴들이 피리소리에 떨기 시작했다.
메아리는 여러 갈래로 일어나 물길을 따라서
또 울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사라져 갔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아리가 그쳤을 때
아픔의 아픔이 느져져서 침묵은 더해만 갔다.
그 뒤에 에반제린은 잠들었지만,
뱃사공은 밤새워 배를 저었다.
때로는 침묵을 지키다가,
때로는 그 옛날 아카디 강에서 부르던
‘캐나다의 노래’를 부르면서 배를 저었다.
그때 밤의 어두움을 통하여 광야의 신비로운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파도 소리인지 숲속의 바람 소리인지
분간 할 수 없는 소리가
학의 울음소리와
사나운 악어의 으르렁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이튿날 낮이 되자,
그들은 숲속을 빠져 나와 눈앞에
황금빛 애처펄라이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저어가는 노로 그려지는 파문에는
수많은 수련이
출렁이고,
뱃사공의 머리 위에 아름답게 빛나는 연꽃이
황금화관을 이루고 있었다.
수련의 향기와 한낮의 열기로
공기는 희박해지고 숲이 무성한 섬들은
향기로운 장미의 울타리로 둘러싸여
그 곁을 지나는 뱃사공들은
졸음의 유혹을 받았다.
마침내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섬에 닿았다.
물가의 푸른 버드나무가지 아래 안전하게 배를 대어놓고,
밤새 지친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잔디밭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머리 위에는
넓고 큰 삼나무가지가 퍼져있고
그 굵은 가지에서 능소화와 포도덩굴들이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처럼
늘어져 있었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바쁘게 날아다니는 벌새(蜂鳥)는
늘어진 층계를 오르내리는 천사와도 같아 보였다.
이와 같이
에반제린은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꿈을 꾸었다.
그녀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고 있었고,
밝아오는 천국의 새벽은
잠들었던 그녀의 영혼을 천국의 영광으로 비추었다.

그들이 잠자는 동안
총과 함정으로 사냥하는 사냥꾼들이
근육에 불거진 팔로 노를 저어서
강물따라 질주하던 가볍고 경쾌한 배 한 척이
많은 섬 사이를 뚫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리고
물소와 물개들이 서식하는 육지로 향하고 있었다.
키를 잡고 있는 한 젊은이가
깊은 생각과 수심에 빠져 있었다.
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이마를 덮고,
나이보다 겉늙은 표정엔
어딘지 슬픈 빛이 어리어 있었다.
바로 그가 가브리엘이었다.
기다림과 불행에 지쳐
자신과 슬픔을 잊어버리고
서쪽의 황야로 급히 향해가고 있었다.
배는 섬 가까이 바람받이 쪽으로 질주해 갔으나,
반대쪽 강가 종려나무 숲이 방해를 해서
버드나무 그늘에 가리어있던
에반제린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잠자던 뱃사공들은
노젓는 소리를 듣고도 깨어나지 못했다.
에반제린을 깨울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고원 위에 떠도는 구름과도 같이
배는 빠르게 지나갔다.
노젓는 소리가 멀리 사라질 즈음에
사람들은 곤한 잠에서 깨었고
아가씨는 탄식을 하며 신부에게 말했다.
‘오, 신부님!
어쩐지 가브리엘이 가까이 있는 것만 같아요.
어리석은 꿈일까요, 허황된 미신일까요 ?
아니면 천사가 지나다가 저의 마음속에
진실을 알려주고 간 걸까요?’

에반제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계속했다.
‘아, 어리석은 나의 공상이지!
신부님의 귀에는 이런 말이 무의미하게 들리겠지요?’
그러나 신부는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너의 말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야.
나에겐 의미있는 말이야.
감정이란 깊고 고요한 것이며
곁에 나타나는 말은
숨겨진 닻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부표와 같은 것이지.
그러니 마음을 굳게 믿고
세상 사람들이 꿈이라고 부르는 것도 믿어야지.
가브리엘은 필시 너와 가까운 곳에 있어.
남쪽으로 멀지않은
테시 강가에 성 마우르와 성 마르틴이란 두 마을이 있지.
그곳은 오랜 동안 유랑하던 신부가 신랑의 품에 안기는 곳으로
목자가 오랫동안 잃었던
양을 다시 찾게 되는 곳이지.
아름다운 그곳엔 고원이 펼쳐지고 과수의 숲이 우거진 곳
밤 아래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롭고 새파란 하늘이 퍼져서
무성한 숲이 벽을 이루고 있지.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루이지애나의 에덴 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단다.

이 말에 위로를 받은
일행은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조용한 석양이 찾아왔다.
서쪽 수평선에서 태양이
마술사처럼 금빛 광채로 사방의 산과 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면으로부터 황금빛 아지랑이가 올라와서
하늘과 물과 숲이 그것을 접해서 모두
한데 어우러진 듯 보였다.
에반제린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술에 걸린 듯 투명한
감정의 샘은 주위에 있는 하늘과 물과도 같이
사랑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이웃 숲속에서 거칠게 노래하던 앵무새가
물 위로 늘어진 버들가지에 올라 앉아 그네를 타며
그 조그만 목소리로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마치 하늘과 숲과 물이 숨을 죽이고 듣는 듯 조용했다.
처음엔 그 노래는 슬픈 가락이었으나
어느 새 미친 듯이 드높아져
술의 여신 버캔디즈를 섬기는 교도들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마치 소리가 한데 모이더니, 소나기 후에 부는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지나치며 빗방울을 흔들어 떨어뜨리듯
그 새는 조롱하는 노래가락을 내던졌다.
이 같은 전주곡을 들으며 감개무량한 가운데,
일행은 서서히 푸른 오펠루사스 벌판을 흐르는
테시 강으로 들어갔다.
이때, 호박빛 하늘 저편, 숲 언덕 위의
인가에서 오르는 연기줄기가 보이고,
피리소리와 멀리서 우는 가축의 소리가 들려 왔다.



강둑 근처, 참나무 그늘로 뒤덮인 곳에
외따로 조용한 목자의 집이
한 채 서 있었네.
그 참나무 가지에는
옛날 드루이드 신부들이 크리스마스에 쓰려고 금도끼로 잘라낸 나무처럼
스페인 이끼와 신비스러운 겨우살이 인동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집 주위 꽃밭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로 대기를 채우고,
집은 알뜰하게 다듬어진 참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지붕은 드넓고 낮았으며,
주위에는 널따란 베란다가 있고,
그것의 가느다란 기둥에는 장미와 포도덩굴이 뻗어있고,
벌새와 꿀벌들이 그 주위를 날아다녔다.
집 양쪽 모퉁이에는 꽃밭이 있고, 그 가운데는 비둘기집이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상징,
끝없는 구혼과 끝없는 사랑의 싸움터였다.
사방은 고요했고,
양지와 응달의 선이 숲꼭대기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나,
집은 그늘 속에 잠겨 굴뚝에서는 가늘고 파란 연기가 솟아
서서히 저녁하늘에서 사방으로 사라져갔다.
집 뒤에는 정원입구에서부터 오솔길이 하나 무정한 참나무 싶을 지나
끝없는 평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꽃들의 바다 속으로 해는 지고 있었다.
이 석양빛을 담뿍 받으며, 열대지방의 잔잔한 파도를 달리는 배가
돛폭에 그림자를 받고 있듯이
이 숲속의 나무들에는 포도 덩굴이 엉키어 있었다.

고원의 풀꽃들 물결치는 숲 언저리에는
스페인식 안장과 등자(?子)를 얹은 말이
각반 두르고 녹비(鹿皮) 승마복을 입은
목자가 앉아 있었다.
다갈색의 큼직한 얼굴에 챙이 없는 스페인 모자를 쓴
그는 위엄있는 시선으로 평화스러운 경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암소들이
조용히 풀을 뜯고,
강물에서 오른 신선한 수증기를
숨쉬면서 산야를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는 옆구리에 찬 피리를 빼어들고
한 번 세게 불자,
그 소리는
습기찬 저녁의 대기를 뚫고 멀리 울려퍼졌다.
그러자 숲속에서는 갑자기 소들의 희고 긴 뿔이
밀려드는 흰 거품과도 같이 나타났다.
소들은 잠시 바라다보고는 울면서 들판을 달리어
구름 떼처럼 목장으로 몰려갔다.
목자가 집으로 돌아오니, 정원의 문간에서
신부와 처녀가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두 팔을 벌리고 환성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얼굴을 보자, 그가 바로 대장장이 바씰임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바씰은 손님들을 정원으로 안내하면서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장미꽃 만발한 정자에서 끝없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으며, 서로 정에 넘쳐 얼싸안고
웃고 울기도 하다가
서로 잠잠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분명 가브리엘은 이곳에 없었으니,
에반제린의 마음에 새로운 의문과 불안이 맴돌았다.
당황하듯 바씰은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만일 애처펄라이어 호수 쪽에서 왔더라면
도중 어디에선가 가브리엘을 만났을텐데.’
바씰의 이 말을 듣자, 에반제린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기에는 없다고요? 가브리엘이?’
바씰의 어깨에 얼굴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바씰이 이렇게 말했다.
‘에반제린, 기운을 차려,
그가 떠난 것은 오늘 아침이야.
미련한 녀석 ! 내게 가축을 맡겨두고 떠나버렸지.
늘 마음이 불안에 지치고 안정을 얻지 못해
이같이 변화없는 조용한 생활을 참지 못한거야.
늘 너를 생각하고 말없이 괴로와하면서
너와 자기의 고민만을 이야기하다가,
마침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치고 싫증이 나고
나마저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과 노새 장사나 하라고
어데이예스로 보냈지
거기서 인디언의 발자취를 따라
오자크 산맥으로 들어가
숲속에서 야수를 잡아 털가죽을 얻고,
물에서는 물개를 잡을거야.
그러니 낙심 말아,
이제 우리들이 함께 그 녀석을 쫓아가면 될 테니.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운명과 강물은 반대로 흐르니,
내일 아침 동이 틀 무렵 아침 이슬 헤치며
뒤를 쫓아 가면
그를 도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즐거운 목소리 들리더니
강 위쪽에서
친구들의 팔에 부축되어
바이올린 켜는 미카엘이 왔다.
추방 후, 오랫동안 바씰의 신세를 지며
음악을 들려주면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지내고 있었다.
올림포스 산의 신과 같이
그는 은빛 백발과 바이올린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다.
‘미카엘 만세!’
사람들은 외쳤다.
‘용감한 아카디의 음악가 만세!’
친구들은 개선행렬을 이루고 그의 몸을 치켜 올렸다.
휘리시앙 신부와 에반제린은 이 노인을 맞아
옛날을 회상하며 기뻐했다.
그때 바씰은 소리를 높여
친구들과 이야기에 흥을 돋구었다.
그리고 크게 웃으면서 어머니와 딸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날의 대장장이가 부유해져서
넓은 땅과 많은 소들을 소유하고,
의젓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또한 이 지방의 토지와 기후 이야기를 듣고 새삼 놀랐다.
그리고 대초원의 마소들은
먼저 잡는 자가 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저마다
자신도 이 고장에 정착하여 목축업을 하려했다.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 베란다를 거쳐
집안으로 들어서니 잔칫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일동은 잠시 쉰 다음 즐거운 만찬을 들었다.
만찬이 한창일 때, 어느 새 주위에 어둠이 깔리었다.
주위는 고요해지고
이슬 머금은 달과 무수한 별들이
모든 정경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이보다 더 밝은 불빛에 얼굴들이 빛나고 있었다.
식탁 상좌에 앉았던 바씰은
포도주와 마음을 가득히 부어 권하기도 하고
맛좋은 내키토쉬 담배를 담은 파이프를 피우면서
손님들에게 이야기 하자 그들은 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오랜 동안 친구도 가정도 없이
헤매던 친구들을 만나니 정말 기쁩니다.
전에 살던 집보다 나은 곳에서 여러분들을 맞이 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이곳의 겨울은 강물을 얼게 하는 추위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이곳의 토지는 농민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자갈밭이 없소.
뱃전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쟁기는 부드럽게 흙을 헤쳐줍니다.
사철 오렌지 나무에 꽃이 피며,
풀은 캐나다의 한여름보다 하룻밤 사이 더 길게 자란다오.
임자없이 많은 소들은 추원에서 뛰어 놀고,
땅도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숲의 나무들은
얼마든지 벌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오.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밭에 곡식이 누렇게 익어도
영국의 조지왕이 우리를 추방할 염려도 없는 곳이오.’
이렇게 말하며 바씰은 노기에 찬 담배 연기를 뿜으며,
다갈색 커다란 손으로 힘껏 탁자를 두드리자,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휘리시앙신부도 놀라
피우던 담배를 멈추고 멍히 바라보았다.
용감한 바씰은 다시 부드럽고 유쾌하게 말했다.
‘여러분들,
이곳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열병이요!
추운 아카디와는 달라 이곳에서 유행하는 열병은
목에 거는 호두 속에 거미를 넣어도 예방되지 않소.’
그때, 문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더니
층계를 지나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것은 목자 바씰의 초대를 받은
이웃에 사는 크리올인과 아카디 농부들이었다.
옛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의 모임은 즐거웠다.
유랑 끝에 만난 친구들은
서로 손을 잡고 흉금을 털어놓았다.
그때, 옆방에서 미카엘의 미묘한 바이올린 소리 들려오자,
사람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어린아기같이 즐거워하며
지난 일을 모두 잊어버린 채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흥에 취하여 옷자락을 휘저으며
미친듯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춤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었다.

이 동안 신부와 바씰은 멀리 떨어져 앉아서
과거,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편 에반제린은 넋잃은 사람처럼 서서
모든 추억을 누를 길 없어
그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도
바닷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쩔 수 없는 슬픔에 마음이 사로잡혀 남모르게
정원으로 빠져 나갔다.
아름다운 밤,
숲의 검은 장벽 저쪽 뒤에서는
맑고, 밝은 은빛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율적인 달빛은
여기저기 나뭇가지 사이로 강물을 비추었다.
마치 즐거웠던 사랑의 추억이
어둡고 슬픈 영혼을 비추듯이
그녀의 둘레 핀 온갖 꽃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향기로 쏟았고
침묵하는 카투지언 교도처럼
말없는 밤을 향하여 꽃의 기도와 참회를 드렸다.
에반제린은 꽃보다 향기로웠고
그녀의 마음은 밤이슬같이 무거웠다.
정원의 문을 통해서 참나무 그늘을 지나
멀리 끝없는 평원을 향해서 걷고 있을 때,
밤의 정적과 매력적인 달빛은
그녀의 가슴 속에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을 퍼붓는 것 같았다.
평원은 고요했다.
은빛 안개는 들판을 덮고,
수없는 반딧불은 날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하나님의 뜻인 별들이
이미 놀라와 하고
기도를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위에 빛났다.
인간은 마치 천사가 나타나
‘멸망’이라는 글자를 쓰기라도 한듯이
빛나는 혜성이 성전의 벽에 나타났을 때만
하나님께 경배를 하지.
그녀의 마음은 다만 홀로 별들과 반딧불 사이를
방황하며 외쳤다.
‘오, 가브리엘!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가까이 계시다면서 어찌 볼 수 없나요?
가까이 계시다면서 어찌 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나요?
아 ! 당신의 발은 이 길을 수없이 밟으셨겠죠!
아 ! 당신의 눈은 이 숲을 수없이 바라보셨겠죠!
아 !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 참나무 밑에 찾아와 저를 생각하면서 쉬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죠!
언제나 나의 눈은 그대를 보게 되고,
나의 팔은 그대를 안게 되나요? ‘
이때 갑자기 이웃에서 요란하게 솔개의 울음 소리가 숲속의 피리처럼 들리더니
이윽고 옆의 숲을 지나 멀리멀리 울려퍼져,

다시 고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참아라’

하고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참나무는 속삭이고
달빛에 빛나는 풀밭은
‘내일!’

하고 탄식으로 대답하였다.

이튿날 태양은 밝게 솟아오르고 정원의 꽃들은
이슬의 눈물로 태양빛을 적시고,

수정화관 속에 간직한 향기로
태양의 기다란 머리를 적시었다.
‘잘 다녀오시오!’
신부님이 응달진 문간에서 말했다.
절식하고 굶주린 당신의 탕아를 데려오시고,
신랑이 올 때 잠들고 있던 어리석은 처녀도 데리고 오시오.’
에반제린은 대답하고 미소지으면서
바씰과 함께 강가로 내려갔다.
뱃사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아침과 햇빛과 기쁨으로 길을 떠나
마치 사막에서 운명의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도 같이
앞서 가버린 가브리엘의 행적을 뒤쫓았다.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호수에서, 숲속에서, 강가에서도

그들은 가브리엘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분명치 않은 풍문에 이끌리어 황야의 고적한 산길을 헤매었다.
이윽고 어데이예스라는 스페인의 마을에 있는
조그만 여인숙에서 지친 몸을 쉬면서
수다스런 주인의 말을 들으니
바로 전날 말과 안내인들과 동료들과 함께

이 마을을 떠나 인적 드문 고원을 찾아 갔다고 한다.



서쪽 아득한 먼 곳에
황야가 있는데, 거기에 산들이 솟아 있고
노을이 빛나는 산봉우리는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아래 험하고 깊은 절벽의 골짜기에는
출입문과도 같이
이민의 마차도 지나가기 곤란한 산길이 있었다.
오레곤 강이며 델라웨어, 오와이히 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동족에는 네브라스카 강이 윈드리버 산맥 속에
스위트워터 계곡을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남쪽에는 폰텐 퀴브 강이 스패니시 산맥에서 흘러나와
강물은 모래와 바위를 침식하면서
황야의 바람에 쫓기고
무수한 폭포가 되어 하프의 굵은 줄과도 같이
장엄하고 큰 소리를 내며
끊임없는 주악 속에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강물 사이로
사뭇 아름다운 고원이 펼쳐져
양지와 응달에 걸쳐서 물결치는 풀덤불이 보이고,
장미와 자주빛 콩꽃이 풍성하게 엉켜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 평야에는 들소며 큰 사슴이며 애기 사슴들이 뛰놀고
이리와 야생마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산불이 일고 길손들을 괴롭히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들판에는
이스마엘 후손들이 정처없이 유랑하다
피로써 사막을 물들인 싸움터에는
독수리와 매가 마치
싸우다 쓰러진 추장의 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층계를 올라가 공중을 향해 달리듯이
근엄한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떠돌고 있었다.
여기저기 난폭한 야만인들의 움막집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급류로 흐르는 냇가에는 우거진 숲이 있었다.
사막의 군자인 근엄한 말없는 곰은
냇가의 나무 뿌리를 캐러 골짜기 어두운 곳을 내려가고
이 모든 것 위에 수정 하늘이
신의 가호의 손길인 양 뒤덮고 있었다.
오자크 산 기슭에 있는 이상한 곳으로 깊숙이
가브리엘은 사냥꾼과 덫꾼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한편, 에반제린과 바씰은
인디언 안내자와 함께
가브리엘을 만날 것 같은 생각에
날마다 그의 행적을 따라 갔었다.
때로는 먼 평야의 아침 하늘에
연기를 보고는
그의 모닥불 연기로 착각하고,

날이 저물어 거기에 당도하면 거기 있는 것이라곤 타다남은 나무와 재뿐이었다.
때로는 서글프고 피곤하여도,
마법사 파타 모르가나가 광명의 호수 나타냈다가
금방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신기루 같은 희망이 그들을 여전히 인도하였다.

어느 날 저녁,
모닥불을 쬐고 있을 때,

한 인디언 여인이 소리도 없이 움막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엔
슬픔과 그 슬픔만큼이나 깊은 인고(忍苦)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숲속의 안내인인 캐나다인 남편을
저 잔인한 카만치족들의 먼 사냥터에서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셔니족 여인이었다.
그녀를 성의껏 환영하고 위로하였고
모닥불에 쇠고기와 사슴고기를 구워서 대접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바씰과 다른 사람들은 긴 하루의 여행과 사슴과 들소의 추적에
지친 몸을 땅바닥에 누이고 잠시 후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일렁이는 불빛이
담요에 싸여 누워 있는 그들의 검은 얼굴을 불꽃이 비추고 있었고
인디언 여인은
에반제린의 천막 어귀에 앉아서
또박또박 부드럽고 나직한 어조의 인디언 사투리로
자신의 즐거웠던 사랑과 불행했던 일들을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듣고 에반제린은
한없이 울었고,
자기와 비슷한 불운과 슬픈 사랑에
우는 여인도 있음을 알고,
측은한 생각과 여자다운 연민의 정이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사랑과
그 재난을 모두 털어놓았다.
셔니족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앉아 듣고 있더니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침묵만을 지키다가
이윽고 신비스런 공포가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올랐던지 다시 입을 열어
전설의 ‘모위스’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위스라는 눈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 처녀와 결혼했으나
날이 밝아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햇빛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신부는 그를 찾아 숲속으로 쫓아갔으나
끝내 애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인디언 여인은 그 부드럽고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듯이
아름다운 ‘릴리노우’ 이야기를 하였다.
릴리노우는 유령에게 구애를 받았다.
그 유령은 황혼이 깃드는 고요한 어느 날,
아버지의 집 위에 우거진 소나무 저쪽으로부터
저녁 바람과 같은 말소리로 릴리노우에게
사랑을 속삭이었다.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남편의 녹색 모자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상스런 놀라움에 에반제린은 아무 말 없이
요술 같은 인디언 여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때 그녀의 주위도
요술에 싸인 듯 했고,
인디언 여인까지도 요술장이 같이 보였다.
오자크 산맥 정사에서 달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 신비스런 달빛은 조그만 천막을 비추고
그늘진 잎을 비추면서 숲을 빛으로 포옹하고 있었다.
냇물은 졸졸 흘러가고,
나뭇가지들은 들릴까말까하는 속삭임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반제린의 마음은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으나,
독사가 제비 둥우리를 기어들 듯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한없는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 속에 기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두려움이 아니었고
유령의 나라에서 풍기는 입김이
밤 공기 속에 떠도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에반제린은 자기가
그 인디언 여인이 말한 그 처녀처럼 유령을 쫓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녀는 잠이 들어 두려움도 유령도 사라져 갔다.

이튿날 아침 일직 북쪽으로 계속 행진했는데 떠날 때
셔니족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 서쪽 기슭의 조그만 마을에 제수이트라고 부르는
검은 옷 입은 전도단의 신부가 살고 계십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를 가르치시고
사람들은 그 얘기에
웃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어 울기도 한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에반제린은 말했다.
‘그 신부에게 가 봅시다.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니!’
그래서 그들은 말머리를 그곳으로 돌렸다.
해가 서산에 질 무렵
그들은 돌출한 산 기슭에서 마을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넓고 푸른 초원을 흐르는 강 언덕 가까이에
기독교도의 천막, 예수회 전도단의 천막들이 보였다.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큰 참나무 아래
검은 옷의 전도단장이 아이들과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나무 줄기 높이 매달아 놓은 십자가상은
포도 덩굴에 감기어
괴로운 얼굴로 아래에 꿇어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성당이었다.
나뭇가지들이 엇갈려
하늘 높이 이룬 푸른 천정에는 저녁 기도의 찬미가 메아리 쳤고
그 곡조에 맞추어 나뭇잎과 가지들은 속삭이고 있었다.
그 일행들은 모자를 벗고 말없이 가까이 가서
잔디에 엎드려 그들과 함께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가 끝나고, 축도가 농부의 손으로 씨뿌리듯이
신부의 손으로 회중들 위에 주어진 후
신부는 그들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반가이 맞았다.
그들의 답례를 받자,
신부는 숲속에서 반가운 모국어를 듣고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상냥한 말로
그들을 자기 집으로 안내하였다.
돗자리와 털가죽 위에 앉아 쉬면서
수수 과자 대접을 받고
신부의 표주박에서 물을 얻어 목마름을 해갈하였다.
이윽고 그들의 사연이 이야기 되었고,
신부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가브리엘이 지금 내 곁의 자리, 아가씨가 앉은 바로 이 돗자리에서
떠난 지 엿새째가 됩니다.
지금 말씀과 똑 같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소.
그리고 그는 쓸쓸한 여행을 떠난거죠!’
신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친절한 어조였지만,
에반제린의 마음에는 그 말들이
마치 철새가 떠나버린 외로운 둥우리에
차가운 겨울 눈송이가 내리듯 들렸다.
‘가브리엘은 멀리 북쪽으로 갔소’
신부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사냥이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오.’
이말을 듣고 에반제린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겸손했다.
‘신부님과 함께 기다리겠어요.
저의 마음은 수심과 슬픔으로 못견디겠어요.’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모두가 찬성하였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바씰은 인디언 안내자들과 함께 일행을 데리고
멕시코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에반제린은 그 마을에 남게 되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하루, 하루가 뒤를 이어 지나가고
며칠,
몇 주일,
몇 달이 지나갔다.
처음 나그네로 왔을 때 파릇파릇하던 옥수수 잎이
이제는 밭에서 푸른 물결치며
키가 높아지고, 옥수수의 그 가는 줄기에 우거진 잎 사이에
들새가 쉬고 다람쥐들이 곡식을 찾아 모여드는 계절이 되었다.
황금빛 물결치는 가을,
옥수수 껍질을 벗길 때,

빨간 옥수수알이 나타나면 처녀들은
사랑하는 임이 오시는 징조라 하여 얼굴 붉히었다.
그러나 찌그러진 알이 나오면 그것은
밭도둑놈이라고 깔깔대었다.
빨간 옥수수알이 나와도
에반제린의 애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으시오!’
하고 신부가 달랬다.
‘믿음을 가지시오.
그대의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오.
초원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 연약한 식물들을 보시오.
그 잎사귀들이 자석같이
똑바로 북쪽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다와 같이 길도 없고 끝도 없는 황야를 헤매는
나그네의 여행을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이 정처없는 이곳에 심으신 ‘자석풀’이라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랍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정열의 꽃들은
향기도 한층 더하지만
그 냄새는 사람을 매혹시켜 길을 잃게 하고 죽게 하지요.
이 보잘것없는 식물은
나그네의 안내자가 되고
저 세상에서도 영약인 망우약(忘憂藥)의 이슬에 젖은
아스포델로스꽃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준답니다.

가을이 왔다 가고 또 겨울이 왔으나
가브리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봄이 오고 꽃은 피었고
물새와 파랑새들이 아름답게 숲속에서 우짖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여름의 미풍이 불 무렵,

새들의 노래보다 즐겁고 꽃들의 향기보다도 더 반가운 풍문이 전해졌다.
동북쪽 먼 미시간주 숲이 우거진 세지노 강가에
가브리엘이 오두막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었다.
에반제린은 전도단과 슬픈 이별을 고하고,
성 로렌스 호반을 찾아 안내자들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길고 험한 늪지대를 지나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미시간의 숲속에 이르러
깊이 숲속을 헤매었으나
사냥꾼의 집에는 인적도 없고
이미 폐가가 되어 있었다.
길고 슬픈 세월은 이렇게 흘렀다.
에반제린은 바뀌는 계절따라
여기저기 멀고도 먼 곳을 방황하였다.
때로는 온순한 모라비아 전도단 천막안에서
때로는 군대의 야영지나 싸움터에서,
때로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혹은 시끄러운 도시의 거리에
유령처럼 나타나 남모르게 떠나버려도 아무도 아는 이 없었다.
희망을 안고 긴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젊고 아리따왔지만,
이제 실망에 지친 그녀의 얼굴은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그녀의 아름다움은 빼앗기고

그 자리에 슬픔의 그림자만이 짙게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이른 아침의 동녘 햇살과도 같이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나타나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세상의 지평선을 넘어서 나타나는
저 세상의 서광이다.



델라웨어 강물이 씻고 지나가는 기름진 땅에
아직도 숲의 그늘이
전도자 펜의 이름을 지키고 있는 곳,
그 아름답게 흐르는 강의 언덕에
그 시조가 세워놓은 도시가 있었다.
거리의 공기는 향기롭고
복숭아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주님들을 괴롭힌 ‘숲의 요정’을 달래주려는 듯
그 도시의 거리들은
숲속의 나무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 같았다.
괴로움의 바다를 처음 벗어난 에반제린은
이 도시에 머물렀다.
그리고 시조 펜의 후예들에게서

몸을 의지할 집을 찾게 되었다.
이곳은 르네 르블랑이 죽은 곳으로,
그가 임종시에는
백명의 자손들 가운데서
한 사람만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웬지 그녀는 이 도시의거리가
친근한 마음이 들었고
웬지 자기 마음속에 속삭이는 것이 있어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형제 자매여!’
하고 외치는 퀘이커 교도가 반가왔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형제 자매였던 그 옛날
아카디의 그랑쁘레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헛된 탐색도, 실망만을 안겨준 노력도 끝내고
이 세상에서는 그런 노력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때,
아무런 불평도 없이 풀잎이 햇빛을 향하듯
생각과 발걸음이 이 도시로 향했다.
산꼭대기에서 비를 머금은 아침 안개가 사라져 갈 때
멀리 밑을 바라보면 강과 도시와 마을들이 빛나고

모든 경치는 햇빛 속에 밝아지듯이
에반제린의 마음도
안개가 사라지고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어둠이 걷히고 사랑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올라온 언덕 길도
저 멀리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결코 그녀는 가브리엘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은 서로 헤어질 때처럼
사랑과 젊음의 아름다움에 싸여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더구나 죽음 같은 침묵 속에 더욱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다.
가브리엘을 생각하는 마음은 시간이 변하여도
아무런 변함이 없었고 세월도 무력하였고
그 모습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가 비록 죽었다 해도
그녀의 마음에는
그가 영원히 살아 있었을 것이다.
인내와 자기 극복과 그리고 남을 위한 헌신만이
슬픔과 고난의 생애가

그녀에게 가져다 준 교훈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향기와도 같아
대기 중에 향기를 풍기면서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인생에 대한 희망도 소원도 없었으나
오직 경건한 걸음으로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를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여러 해 동안 ‘자비의 자매’ 중 한 사람이 되어
붐비는 도시 뒷골목의 가난한 외로운 집들을 찾아 다녔다.
거기에는 고생과 결핍으로 햇빛이 가리어 있고
거기에는 질병과 슬픔이
다락방 속에 내버려져 있었다.
밤마다 사람들이 잠든 바람부는 거리, 거리를
야경꾼이 큰 소리로 ‘안전무사’라고 외치고 지나노라면
어느 쓸쓸한 높은 창에
그녀의 촛불빛이 보였다.
날마다 아침이면
꽃이며 과일을 장에서 팔려고 들어오는 농부들이
밤새 사람들을 간호하다 돌아오는
창백해진 그녀를 만나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지방에
페스트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상한 징조의 재앙이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것은 산비둘기들이
상수리 열매를 입에 물고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때마침 9월 들어 바다의 조수가 일어
은빛 물결이 범람하더니
이윽고 초원에 호수를 이루듯이
죽음이 생명을 침범하여 자연의 둑을 넘어
생존의 맑은 흐름을 혼탁한 호수로 만들어 버렸다.
돈도 이 억압자를 매수할 힘이 없었고,
아름다움도 매력을 잃어
많은 사람들은 그 노여움의 채찍 아래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아아!
친구나 돌보는 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은
집없는 사람들의 집인 요양소에 기어들어가 운명하는 것이었다.
이 요양소는 초원과 숲 사이에 있었으나
지금은 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그 건물 한복판의 통로와 문쪽에는
‘가난한 자는 항상 나와 함께 있나니’라는
성구(聖句)가 보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비의 자매가 이곳을 드나들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녀의 이마 주위에
천국의 빛이 서리고 있어
마치 화가가 성자나 사도의 얼굴을
그릴 때의 후광이나
멀리 바라보이는 도시의 밤하늘에 멀리 걸려 있는
광채와도 같았다.
병자들의 눈에는 에반제린의 얼굴이
마치 빛나는 문을 통해서
머지않아 가게 될 천국의 등불과도 같이 보였다.

어느 안식일 아침,
에반제린은 인적이 끊어진 침묵의 거리를 지나
조용히 걸어서 요양소로 들어갔다.
정원의 꽃들은 여름 바람에 향기를 피우고,
에반제린은 잠시 발을 멈추고
꽃밭에 들어가 꽃을 꺾어서
한 번 더 이 아름다운 향기로
환자들을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때 계단을 올라 동녘 바람 시원한 복도를 나왔을 때,
교회의 종루에서 부드러운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그것과 어울려서 들판 저쪽 위카코의 스웨덴 교회에서
스웨덴인들이 부르는 시편의 노래가 들려왔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래가 부드럽게 내려오는 듯한
시간의 정적이 깃들었고
그대의 시련은 이제 끝났도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굴에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병실에 들어섰다.
열에 탄 입술을 축여 주고,
아픈 이마를 쓸어주고
그 얼굴에 면포를 덮어주는
간호자들의 주위를 소리없이 돌아다녔다.
거기에는 거적 위에
많은 환자들이 길가의 눈처럼 쓰러져 있었다.
에반제린이 나타나자
많은 환자들이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녀의 우아한 모습은
감방에 비치는 햇빛과 같이 환자들에게 비쳤다.
그녀가 사방을 살펴보니
위로하는 죽음의 신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있었다.
밤 사이에
낯익은 많은 환자들이 사라져갔고
그 자리는 비기도 하고
낯선 환자들이 채우고 있기도 했다.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힌 듯이
갑자기 에반제린은 입술에 핏기를 잃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에반제린은 이상한 전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꽃다발을 떨어뜨렸고
그녀의 눈과 볼에서는
아침 햇빛과 같은 광채가 사라졌다.
그녀의 입에서 불안의 외침이 터져나오자
죽어가는 환자들은 깜짝 놀라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녀 바로 앞자리에
한 늙은 병자가 누워 있었는데,
키가 크고 수척한 그 노인은 백발이엇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을
잠시 동안이나마
씩씩했던 젊었을 때 모습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누구나 죽어갈 때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그 노인의 입술을 빨갛게 열에 타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죽음의 신이 보게 되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표지로서
히브리인이 문간에 양피를 칠한 것 같았다.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도 잃은 채 죽어가는 노인은
겨우 누워 정신은 지쳐버렸고
한없이 깊은 졸음과 죽음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노인은 희미한 생사의 경지에서
점점 울려퍼지는
에반제린의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 소리에 이어
고요 속에서 부드럽고 성스러운 어진 음성의 속삭임을 들었다.
‘가브리엘!
오,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그 목소리는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노인은 꿈꾸듯이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고향을 꿈속에 보았다.
푸른 아카디의 초원,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강물,
그리고 마을과 산과 숲이 보이고 그 모든 그늘 밑을 걸어서
지나가던 어린 시절의
에바제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눈을 가만히 떴을 때, 꿈은 사라졌으나
에반제린이 자기 곁에 꿇어 앉아 있었다.
가브리엘은 에반제린의 이름을 부르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음성은 들리지 않고 표정만이 뜻을 나타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옆에 있던 에반제린은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그의 얼굴을 자기 가슴에 안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름답게 빛났으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등잔불이 꺼지듯이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희망도,
공포도,
슬픔도,
가슴 아파하던 것도,
마음의 번뇌도,
안타깝던 그리움도, 심한 고통도
오래 참고 견디어 온 고뇌도 모두 사라졌다!
에반제린은 차디찬 애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가슴에 껴안으면서
조용히 고개 숙여
기도 드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감사하나이다.’

지금도 여전히 태고의 숲은 서 있고, 그 나무 그늘 멀리 떠나
이름없는 무덤 속에
사랑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다.
이 도시의 중심가 어느 조그만 성당의 마당 밑에
아는 이 없고
찾아오는 이 없는 그들은 누워 있다.

날마다 생명의 조수만이
그들 곁을 밀려오고 밀려갈 뿐,
그들의 가슴은 영원히 쉬고 있지만
뭇사람의 가슴은 고동치고
그들의 두뇌는 쉬고 있지만
뭇사람의 두뇌는 번뇌하고 있다.
그들의 손은 움직이지 않으나
뭇사람의 손은 쉬지 않고
그들의 발은 여행을 끝냈지만
뭇사람의 발은 지금도 피로에 지쳐있다.

지금도 여전히 태고의 숲은 서 있고
그 나뭇가지에는
풍속과 언어가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
다만 구슬프고 안개 낀 대서양의 해변을 따라
유랑 끝에 돌아온 아카디 농부들의 후예들은
뼈나마 조상들의 땅에 묻히려고 살고 있을 뿐,
어부의 오두막집에서도
지금의 물레와 베틀 소리가 들려오고,
소녀들은 지금도
옛날 노르망디 모자를 쓰고, 수직물의 드레스를 입고,
저녁이면 벽난로가에서
에반제린의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동굴 바위에 부딪치는 드높은 파도소리에,
숲속의 바람 소리가
서글프게 화답하고 있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미국의 시인. 보든대학 졸업 후 약 3년 동안 유럽에 유학하고,

    귀국 후 모교의 근대어학 교수가 되었다(1829∼35).
    18년간 하버드대학 교수직에 있었으며, 그 동안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많은 시작(詩作)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식민지

    전쟁을 배경으로 한 비련의 이야기 《에반젤린》(1847),

    핀란드의 《칼레발라》의 영향을 받고서 쓴 인디언의

    신화적 영웅 이야기 시 《하이어워사의 노래》(55),

    퓨리턴 군인의 연애 이야기 《마일즈 스탠디시의 구혼》(58) 등의

    장시(長詩)가 유명하다. 이것 외에도 《인생찬가》를 포함한

    《밤의 소리》(39), 《마을의 대장간》을 포함한 《민요》(42),

    《화살과 노래》를 포함한 《블루주의 종루(鐘樓)》(45)

    《길가 여인숙 이야기》(63∼74), 단테의 《신곡》의 번역(65∼67),

    《황금 전설》(51) 《뉴잉글랜드의 비극》(68) 《신성(神聖) 비극》

    (71)으로 된 시극 《크리스터스》(7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