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Prestuplenie i nakazanie:1866)1
7월 초의 무섭게 더운 어느 날 해질 무렵
한 젊은 사나이가 C골목의 어느 셋방에서 나와 방향없이 K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운좋게 계단에서 하숙집 주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을 모면했다.
그의 방은 높은 5층의 다락방인데 그 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벽장 같았다.
주인 여자는 그의 아래층에 살고 있었으므로 거리에 나갈 때는 항상
계단 쪽으로 열려 있는 주인집의 부엌 곁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젊은 사나이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으레 병적인 불안을 느꼈으며
그런 기분에 휘말리는 것이 스스로 창피하게 생각되어 상을 찌푸리곤 하였다.
하숙비가 상당히 밀려 있었으므로 주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겁이 많고 배짱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인데
얼마 전부터 그는 우울증에 잠겨 불안스러운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자신 안에 틀어박혀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었으므로
주인 여자뿐 아니라 어느 누구하고 만나는 것을 피해 왔던 것이다.
그는 가난해서 꼼짝 못할 지경에 처해 있었으나
그것도 요즘에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꼭 해야만 할 일감도 그는 내던져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하숙집주인 여자 따위가 자기에 대하여
어떠한 일을 생각해 낼지라도 겁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계단 위에서 붙잡혀 그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저분한 헛소리나 귀찮은 독촉이나 넋두리를 대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고양이처럼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와 몰래 슬쩍 달아나는 편이 나왔던 것이다
거리에 나와 보니 자신이 빚이 있는
한 여자를 만나는 일을 두려워하였다는 데 어이가 없었다.
그는 묘한 미소를 띄우면서 생각했다.
'어떠한 일이든 실행하려고 생각하면서 이런 하찮은 일에 겁을 먹다니!
흥 그렇다... 무엇이든지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는데도
그저 겁 많은 탓으로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이건 확실한 논리이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새로운 독자적인 말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좀 말이 많다.
말만 떠벌리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거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
이건 내가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저 방 속을 뒹굴면서...
꿈같은 것을 생각하는 동안에 떠버리 노릇을 배워 버린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지금 무얼하려고 걷고 있는 걸까?
정말 내가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그게 진심에서 나온 생각일까?
천만에 천만에 진심에서라니! 그저 공상으로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것뿐이다.
장난이다! 진짜 장난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 이라스콜리니코프는 무엇하러 어디를 가는 것일까?
그리고 아까 그가 중얼거리던 '그 짓'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달 전쯤에 그는 고리 대금업과 전당포를 하는 한 노파를 알게 되었다.
노파 아료나 이바노브나는 어떤 대학 교수의 미망인으로
백치인 누이 동생 리자베타를 부리면서
심술 사나운 욕심으로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 짓을 공상하게 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 공상은 몸서리치도록 잔인한 것이었으나 퍽 유혹적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그 짓을 해도 괜찮다는 충분한 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결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무기력을 오히려 조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실행함에 있어서 전혀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 그 계획의 장소인 노파의 집을 탐색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는 죽은 아버지가 남긴 시계를 가지고 나왔다
"무엇하러 왔지?"
"저당잡힐 걸 가져 왔어요"
"하지만 지난 번 것이 벌써 기한을 넘겼어 어제로 꼭 한 달이야"
"그럼 한 달 동안 이자를 드리지요.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하지만 기다리건 팔아치우건 내 마음대로야"
"아무튼 이 은시계로 좀 많이 쳐 주십시오"
"어디서 이런 지저분한 것만 들고 온담 요전에도 당신에게 반지에 두 장이나 내줬지
그것도 보석상에 가면 새 것을 한 장 반이면 살 수 있단 말이야"
"한 4루블쯤 빌려 주세요. 꼭 찾아가겠어요. 아버지의 유품이거든요.
곧 집에서 돈을 부칠 것이라니까요"
"1루블 반이야. 이자는 미리 제하고"
"1루블 반이라구요! 어림도 없어요"
"좋을 대로 하시지"
노파는 시계를 도로 내밀었다.
그는 약이 올라서 그대로 돌아서려 하였으나 다른 데라곤 갈 데도 없고
여기 온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마음을 돌렸다.
무뚝뚝하게 그는 말했다.
"좋습니다"
노파는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으며 커튼 쪽으로 가서 장롱을 열고 돈을 꺼냈다.
그는 온 신경을 귀로 집중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노파가 돌아왔다.
지난 달의 이자와 요번의 이자를 미리 제하여
그가 받은 돈은 겨우 1루블 15카레치카에 불과했다.
그는 돈을 받은 후 돌아갈 생각을 않고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주저하였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아료나 이바노브나, 곧 다른 물건을 가져 오려는데...
은으로 만든...훌륭한... 담배갑인데요..."
"그건 그 때 얘기하지"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 참 그런데 할머니는 언제든지 혼자 계시는 것 같군요.
누이 동생은 어디 나갔나요?"
"내 동생에게 볼 일이 있나?"
"아니오. 별로... 그저 한 번 물어 본 것 뿐입니다.
그걸 할머닌 그렇게 말씀하시긴...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료나 이바노브나!"
라스콜리니코프는 계단을 뛰어내려와서 이렇게 외쳤다
"아아 참! 더러운 생각이다!
정말 나는... 그것은 터무니없이 바보 같은 생각이다! ...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내 마음은
어쩌면 그렇게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할까!
무엇보다도... 이 추잡하고 더러운 생각이 아아 싫다!
정말 싫다! 나는 온통 한 달 동안이나..."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어느 선술집에 들어갔다.
맥주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하였다
이 술집은 지저분했고 손님들도 후즐근하게 보였다.
그들 속에서 50세쯤 보이는 늙고 초라한 관리인 듯한 사나이가 미친 듯이
그러나 빛나는 눈초리로 머리칼을 쥐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나이는 라스콜리니프를 보자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는 마르메라도프라는 사람으로 이전에는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던 관리였으나
술 때문에 몇 차례나 지위를 잃었음에 또 다시 술에 빠져 버리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는 좀 우습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한 태도로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라스콜리니프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침대에 꼬꾸라져 있었습죠. 지독하게 곤드레가 되어서 말이지요...
그 때 문득 딸의 목소리가 들렸지요... 소냐는 순진하고 얌전한 애에요.
목소리도 퍽이나 부드럽죠... 머리는 금발이고 얼굴은 좀 파리하지만 품위가 있지요...
그 애가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겠소.
'어머니 내가 꼭 그런 일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라고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다알리아 프란츠오브나라는
악독한 포주 노파가 내 처를 통해 벌써 서너 번이나 유혹해 왔기 때문이죠.
그러자 '그게 어떻단 말이냐' 하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코웃음 치며 대답하지 않겠소.
'무엇이 그리 소중히 모셔 둘 물건이냐? 무슨 큰 보배도 아니겠고'라고요.
하지만 아내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네 비난하지 마십시오.
네 비난하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 제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병은 나빠지고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울고불고하니
가슴을 쥐어 뜯고 싶은 기분이 되어 마구 쏘아붙인 말이지요.
화풀이로 그런 소리가 나온 것이지요...
원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성질이 그래서
아이들이 비록 배가 고파서 울어도 곧 때려 주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 날 다섯 시가 넘자 소네치카(소냐의 애칭)는 일어나서
목도리를 감고 모자가 달린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가더니 여덟 시 넘어서 돌아왔어요.
돌아오자 그대로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곁으로 가서
그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아무말 없이 1루블 짜리 은화를 서른 개 올려 놓지 않겠소?
그리고 말 한 마디 않고 집 안의 커다란 초록빛 목도리를 들고
그것은 식구들이 공동으로 쓰고 있는 목도리지요.
그것으로 머리를 푹 뒤집어 쓰고 벽쪽을 향해 몸을 돌려 침대에 쓰러져 버리지 않겠소.
가냘픈 어깨하고 조그마한 몸이 언제까지나 떨고 있을 뿐...
그런데 나는 그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누워 있었지요...
술에 취해 있어도 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젊은 선생님 얼마 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마찬가지로
말 한 마디 없이 소냐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밤새 그 아이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그 애의 발에 입을 맞추고 좀처럼 일어서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러다 두 사람은 그대로 같이 잠이 들어버렸지요. 껴안은 채 말이지요...
둘이서... 둘이서... 그래요... 그런데도 나는 곤드레가 되어 누워 있었다오"
그의 부인인 카테리나는 귀족의 자녀가 다니는 여학교를 나왔으며 지체 있는 집 출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폐병으로 병약해져 언제나 기침을 콜록이며 신경질적이며
남편을 증오하고 자신의 삶을 증오하는 여인이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마르메라도프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미칠 듯한 마음으로 한 푼이라도 가져오기를 기대하며
마르메라도프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르메라도프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양말을 팔다 못해 딸이 매춘을 해서 번 돈으로
값싼 술을 마시면서 그날그날을 술 없이는 못 사는 것이었다.
소냐는 전처가 낳은 딸인데 순진하고 온순한 처녀였다.
그러나 이제는 황색 감찰을 가진 매춘부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마르메라도프는 괴로워하면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묵묵히 그의 비참한 이야기를 듣고
이 가엾은 주정뱅이를 위로하며 친히 부축하여 그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마르메라도프가 사는 집은 페테르부르크 지저분한 뒷골목에 있었다.
커다란 건물의 내부는 어둠침침했고 4층 구석에 통로로 되어 있는 형편 없는 방이었다.
카테리나는 문턱에 무릎을 꿇은 남편의 모양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아아! 돌아왔군! 짐승! 짐승! 돈은 어디 있어요! 호주머니를 뒤집어 봐요.
어머나 옷도 달라졌어! 그 옷은 어떻게 했어요? 돈은 어디 있어요?
어서 말해요! 돈은 어디다 두었을까? 아아 또 들이마셨나 봐!
상자 속에 은화가 열둘이나 남아 있었는데!"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분에 못 이겨 남편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아 방 안으로 끌어넣었다.
마르메라도프는 온순하게 아내가 끄는 대로 제 무릎 걸음을 걸어 아내의 힘을 덜 들이게 했다
"내게는 이게 쾌락입죠! 고통은 아닙니다. 쾌락입니다. 서... 선생님"
그는 머리채를 끌리면서 땅바닥에다 이마를 박으며 외쳤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무말 없이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살그머니 창가에 놔두고 나왔다.
그 돈은 그의 허기진 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전당포의 노파에게 꾸어온 돈 중에서 술값을 치른 나머지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마르메라도프의 비참한 가족의 실상을 보고
가난이 가져 오는 타락의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신의 타락이 놓여 있어서
순진하고 티없는 사람들의 성질을 파괴하고 부식시킨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이튿날 아침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깨었다.
하숙집 주인은 그가 몇 달 치의 하숙비를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밥을 안 준 지 벌써 보름이 되었고 이제는 그를 경찰에다 고소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그가 나가고 없는 동안 편지가 와 있었다.
하녀가 갖다 주는 편지를 보자 그의 안색은 갑자기 달라졌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고향의 그리운 어머니에게서 온 긴 편지였다
편지 속에 녹아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애정은 읽는 동안 사뭇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러나 누이동생 두냐의 결혼에 대한 소식은 그의 마음을 몹시 어둡게 하였다.
상대자는 나이가 45세나 되고 사업도 하는 돈 많은 변호사인 루딘인데
이 사나이는 외모는 점잖게 보이나 전형적인 속물이었다.
누이동생이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소식은 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결혼하는 것을 무슨 큰 은혜나 베풀어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기적인 놈의 아내가 되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그 동안 두냐는 어려운 일을 겪었다.
오빠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지방 귀족의 집에서 가정 교사를 했다.
그 집의 소유자인 마르파는 두냐를 신뢰하고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마르파의 남편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인데 그는 선악의 경계도 모르고
오로지 악마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어떠한 장애도 짓밟고 넘어가는 사나이였다.
이러한 그에게도 뜻밖에 한줄기 선량한 일면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두냐에게 반해서 여러 번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유혹한 방탕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갖은 간계를 다하여 두냐를 밀실에 유인하여 처녀를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었으나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 문 열쇠를 두냐에게 내어 주어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돌려 보낸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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