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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In the Ravlne)4.

오늘의 쉼터 2011. 5. 13. 22:45

골짜기 (In the Ravlne)4.

 

해는 이미 저물었고, 작은 시냇물 위에도 교회의 구내에도
공장 주변의 공지에도 짙은 우유빛 안개가 뿌옇게 덮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왈칵 몰려와서 골짜기에 묻힌 마을에는 등불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안개 속에는 마치 바닥 모를 심연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순간적으로,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두려움에 떠는
상냥한 영혼만 제외하고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주면서,
평생 이대로 살아가리라 하고 생각하고 있는
리파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생각 -
이 광대무변하고 신비로운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는
수 없는 생활 속에서 자기들도 무언가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이 세상에는 자기들보다 못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쳐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높은 언덕에 앉아 있는 것이 더없이 유쾌했다.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옆과 가게 앞에는 밀을 베는 일꾼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클레예보 마을에 사는 농부로서
그리고리네 집에 일하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일꾼들은 다른 마을에서 데려와야만 했다.
그때 저녁 어스름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는 열려 있었고 구머거리 스테판이
어떤 아이를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문 밖에서 보였다.
일꾼들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하면,
큰소리로 전날치 품삯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고리네 집에서는 그날 밤에 돌아가 버리면
다음 날의 일이 곤란해지므로 그들에게 품삯을 지불하지 않았다.
프록의 저고리를 벗고 조끼만 입은 그리고리 노인은
악시냐와 함께 계단 옆의 자작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램프가 밝혀져 있었다.
  "할베요!" 밀 베는 일꾼 하나가 빈정대는 투로 문 밖에서 소리쳤다.
  "절반만이라도 좋으니 품삯을 주이소! 할배요!"
  이어서 곧 와 하는 함성이 들렸으나,
한참 있으니까 또 다시 겨우 들릴 정도의 낮은 소리만 들렸다.
목발은 차를 마시려고 자리에 앉았다.
  "뭐, 그래, 우리들은 장터에 갔다 왔지."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분좋게 놀다 왔지. 아이들도 무척 기분 좋아했지.
이게 모두 하느님 덕택이야. 한데 말이야.
딱 한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대장간의 사슈카가 담배를 사고는 말이야,
가게 주인한테 50코카이카 은화를 내주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50코카페이카짜리가 사전이었단 말이야."
목발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낮은 소리로 말한다는 게 마치 목이 졸려 죽어가는 것 같은
쉰 목소리가 되어버렸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들렸다.
"그 50코페이카짜리가 말이야, 사전이라는 것이 발각된 거야.
모두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까 말이야,
사슈카 녀석이 말하기를 아니심 그리고리한테 받았다,
요전에 결혼식에 갔을 때 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경찰을 불러서 녀석을 넘겨버린 거야..
그러니 그리고리, 당신도 관련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좋아.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할 테니 말이야..."

  "할배요!"아까처럼 빈정대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왓다
. "할배를 부르잖소!"  모두들 조용해졌다.
  "야아, 얘들아, 얘들아..."
목발이 재빨리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참을 수 없게 졸랐던 것이다.
  "차랑 설탕이랑 고마워요. 이제 슬슬 잘 시간이군.
내 몸은 이미 낡았어. 온몸의 사개가 모두 어긋나버렸으니. 하, 하, 하 !"
  그리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슬슬 저 세상으로 떠날 때가 온 것 같아!"
그러고는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리 노인은 마시던 차를 그대로 놓고 앉아서 갚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표정으로 보아 집에서 이미 멀리 떨어진 거리를 걷고 있을
목발의 발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대장간의 사슈카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거예요"
악시냐가 그의 마음 속을 헤아리고 말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꾸러미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가 꾸러미를 펴자 번쩍번쩍 빛나는 1루블짜리 새 은화가 여러 개 나왔다.
그는 그 중의 하나를 집어들어 이빨로 깨물기도 하고 쟁반 위에 굴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집어서 굴려보았다. 
  "역시 이 루블 은화도 모두 사전이야..."
그는 악시냐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이 은화는 그.... 아니심이 그때 가지고 온 선물이야.
얘, 아가, 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말이다..." 
그는 귓속말을 하면 그녀의 손에 은화 꾸러미를 들려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말이야, 우물 속에 던져버려라...
이런 돈은 보고 싶지도 않아! 조심해서,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게 해야한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주전자도 치우고 등불도 꺼라..."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창고 안에 앉아서
집 안의 등불이 하나씩 하나씩 꺼져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2층 바르바라의 방에만 파란색과 빨간색의 등불이 켜져 있었고,
그곳만이 무척 평화롭고 여유 있는 청정하나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플라스코비야는 자기 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온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이 집에  오면 매우 황송한 듯한 미소를 띠고
언제나 문간에서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곳으로 차와 설탕 같은 것들을 내오는 것이었다.
리파도 이 집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남편이 도시로 돌아간 뒤부터는 침대에서 자지 않고
부엌이나 창고 같은 데에서 자곤 했다.

그리고 날마다 마룻바닥을 닦거나 빨래를 하면서,
날품팔이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지냈다.
오늘도 교회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부엌에서 식모와 함께 차를  마신 다음 창고로 가서 
썰매와 벽 사이의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창고 안은 깜깜하고 마구의 냄새가 났다.
집 주위의 등불이 꺼지고,
이윽고 귀머거리 스테판이 가게를 닫는 소리가 들렸다.
밀 베는 일꾼들이 안뜰로 가 각자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드러눕는 기척이 났다.
저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플뤼민 아우네 집에서는
값비싼 아코디언을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라스코비아와 라파는 곧 잠들어버렸다.
두 사람이 무슨 발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밖은 이미 밝은 달밤이었다.
창고문 앞에 악사냐가 두 팔에 침구를 안고 서 있었다.
"여기가 서늘할지도 몰라..."그녀는 혼자말을 했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와  달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문턱 바로옆에 누웠다.
그녀는 잠이 잘 안 오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더위를 못이겨 입은 것을 거의 전부 벗어던진 채 괴로운 듯 한숨을 쉬었다.
매혹적인 달빛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자랑스럽고 생동감이 있어 보였는지!
조금 있으니까 또 발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새하얗게 보이는 그리고리 노인이 문 앞에 나타났다.
  "악시냐!" 그가 말했다.
"너 여기 있니?"
  "왜요?" 그녀는 부아가 난 듯이 말했다.
  "아까 너한테 돈을 우물 속에 던져버리라고 일렀는데, 버렸니?" 
"아니, 보물을 우물 속에 버리다니!
그건 밀 베는 일꾼들에게 주었어요..."
"뭐,  뭐라구!" 노인은 기겁을 해서  말했다.
"넌 정말 형편없이 닳아빠진 계집이구나...아아, 이거 큰일을 저질렀구나!"
 
그는 부지중에 손뼉을 딱 지고 나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걸어가면서도 뭐라고 자꾸만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악시냐는  일어나 앉아서
부아가 끓어오르는 듯이 휴유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 침구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쩌자고 이런 집에 시집 보냈어요!"리파가 말했다.
  "하지만 얘야, 여자는 시집을 가야만 되지 않니.
우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위안받을 길 없는 슬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들은 저 높은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저 푸른 세계에서 누군가가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우쿨레에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세계에아무리 큰 죄악이 범람하고 있어도, 밤은 역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역시 이 밤과 같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달빛이 밤과 융합되듯이,
스스로 정의와 진리에 융합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모녀는 다시 편안한 심정이 되어서 서로 몸을 기댄 채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아니심이 사전을 만들어 사용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뒤로 몇 달이 지나고 어느새 반년이 넘는 세월이 흘렸다.
기나긴 겨울도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그 무렵에는 집안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아니심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밤중에 이 집 옆이나 가게 앞을 지나게 되면
문득 아니심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낼 정도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종이 울리면 아무 까닭도 없이 아니심이 감옥 속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는게 고작이었다.

그리고리네 저택에는 그 어떤 그림자가 뒤덮고 있는 듯했다.
집안은 어두워지고, 지붕은 녹이 슬고,
초록색 칠을 한 가게의 육중한 철문은 빛이 바래고-
귀머거리 스테판의  말투를 빌리면,  '바삭바삭해져'버렸다.
그리고리 노인도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머리와 수염에
가위를 대는 일을 그만 두고 자라는 대로 그냥 놓아두고 있었다.
율동적인 동작으로 마차에 뛰어오르거나,
거지에게 '하느님한테 받아라!'하고 호통치는 일도 없어졌다.
모든 일에 근력이 쇠약해진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젠 사람들도 예전같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마을의 순경은 그전처럼  뇌물을 받아먹으면서도 가게에 와서는 조서를 작성했다.
노인은 주류밀매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서 세 번이나 시내로 소환되었다.
증인이 출두하지 않아서 사건은 미적미적 연기되어 노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노인은 이따금 아들을 면회하러 가기도 한고, 변호사를 사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탄원서를 내기도 하고, 교회에 성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아니심이 갇혀 있는 교도소의 소장에게는
'영혼은 절도를 안다'라는 금언을
에나멜로 새긴 은제 컵받침에 긴 숟가락을 곁들여 선물했다.
  "내 일처럼 힘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라고 바르바라는 말했다.
"저어... 누구든 똑똑한 사람에게 부탁해서,
세도 있는 장관님께 편지라도 내보면 어떨까요...
하다 못해 보석이라도 해 주십사 하고 말예요!
그 아이를 그렇게 고생시키서 어떻게 하나!"
 
그녀는 슬퍼하기 했으나,
그래도 요즈음에는 약간 살이 찌고 피부새도 희어졌다.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자기 방에 등불을 켜놓기도 하고,
방 안 구석구석을 청결하게 치우기도 하고,
손님에게 잼과 사과과자를 대접하기도 했다.
귀머거리 스테판과 악시냐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부초키노의 벽돌공장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악시냐는 거의 매일같이 마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몸소 고삐를 쥐고,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호밀밭에서 밖을 엿보는 뱀같이 목을 빼고는
수수께끼 같은 앳된 미소를 던지곤 했다.
리파는 언제나 사순절전에 낳은 아기를 데리고 놀았다.
가엾은 생각이 우러날 만큼 조그맣고 여위어빠진 아기였다.
이 아기가 울기도 하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받아 니키폴이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기는 요람 속에서 자고 있었다.
리파는 문 앞까지 걸어가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니키폴님!"
  그러고는 허둥지둥 아기한테로 달려가서 키스했다.
그리고 또 문 앞으로 가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니키폴님!"
  그러면 갓난아기는 조그만 빨간 발을 동당거리면서,
목수 에리자로프처럼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재판날이 결정되었다.
노인은 그 닷새쯤 전에  도시로 떠났다.
그 뒤 증인으로 소환된 농부들이 마을에서 불려 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집에서 고용하고 있던 늙은이도 역시 소환되었다.
 
재판은 목요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요일이 자나도 노인은 돌아오지않았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화요일 저녁 때에 바르바라는 열어놓은 창가에 앉아서
어쩌면 영감님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옆방에서는 리파가 아기와 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기를 어르며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너는 금방 자랄 거야, 아주 크게 자라구말구!
자라서 넌 농부가 될 거야.
그러면 나랑 날품팔이 가자! 날품팔이 가자, 응!"
  "얘야," 바르바라는 기분이 언짢아 말했다. "
날품팔이를 가다니, 해괴한 소리도 다 하는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그애는 상인이 될 거라구..."
리파는 조그만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 뒤에는 언제 그런 말을 들었는가 싶게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는 곧 자랄 거야. 아주 크게 자라구말구.
너는 농부가 될 거야. 그러면 나랑 날품팔이 가자, 응!"
  "저런! 또 저런 소리를 하다니!"
  리파는 니키폴을 안고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어머님, 저는 어째서 이렇게도 애가 귀여울까요?
어째서 이렇게도 가엾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빛났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요? 어떤 인간일까요?
마치 새털이나 빵부스러기 같이 가볍지만,
저는 이 얘가 진짜 귀여워서 죽겠어요.
이 애는 아직 아무것도 못하고 입도 떼지 못하지만,
저는 이 애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빛으로 척 알 수 있어요." 

바르바라는 문득 귀를 기울였다.
저녁 기차가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님은 돌아왔을까?
그녀는 이미 리파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미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공포라기보다는 강한 호기심에서 시간 가는 것도 잊고
그저 부들 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농부들을 가득 실은 짐마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이었다.
도시로 갔던 증인들이 정거장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마차가 가게 앞을 지나칠 때, 이 집의 늙은 고용인이 뛰어내려서 안뜰로 들어왔다.
그가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살내구요..." 그는 큰소리로 지껄였다.
"시베리아로 보낸대요. 6년 유형이래요."
가게 뒷문으로 악시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석유를 팔고 있었던 모양으로 한쪽 손에 병을 들고
한 쪽 손에는 깔때기를 든 채 입에는 은화 몇 닢을 물고 있었다.
  "아버님은요?" 그녀는 입을 오믈오믈하면서 물었다.
  "정거장에 계십니다."고용인이 대답하였다.
"이제 좀 있으면 어두워지니까, 어두워지면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니심이 유형의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온 집안에 퍼졌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식모가 마치 초상이나 난 것처럼
목을 놓아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심님, 독수리처럼 훌륭하신 젊은 서방님.
이제부터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요,
서방님이 버리고 가신 우리들은 말이에요, 아니심님..."
개들이 깜짝 놀라서 짖어댔다.
바르바라는 창가로 달려가서,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 식모를 꾸짖었다.
  "그만 해. 스테파니다.그만 해! 우리를 괴롭히지 마라, 제발!"
모두들 사모바르를 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파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아기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노인이 정거장에서 돌아왓을 때,
식구들은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귀가 인사를 마치고는 온 집안의 방이란 방은 죄다 돌아다녔다.
저녁도 먹지 않았다.
  "힘써주는 사람이 없었군요..."
바르바라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누구 높은 살함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제가 말했잖아요...
그때 제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더니만... 하다 못해 탄원서라도 보냈더라면..." 
"여러 모로 힘썼어!" 노인은 말하면서 한 손을 저었다.
"아니심이 판결을 받은 뒤에 나는 그 애를 변호해준 나으리네 집에 갔었지.
그랬더니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 늦었어요'라고 말하더군.
아니심 녀석도 역시 '늦었어요'하고 말했어.
그래도 나는 재판소에서 나오는 길로 어느  변호사에게 줄을 대서 손을 써뒀어...
앞으로 일주일후에 다시 나가봐야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니까."
노인은 또 다시 입을 다문 채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바르바라의 방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