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餘恨歌***
~ 1 ~
쇠락하는 양반 댁의 맏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도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찍혀
열 여덟 살 꽃 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 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 2 ~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 3 ~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 박아 제일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 일 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 4 ~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한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 절구질 해 연기로 삶아 건져
밥 짓고 국도 끓여 두번 세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근처럼 무거웠네.
~ 5 ~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을 갈라 늘여 베틀 위에 걸어놓고,
눈물 한숨 졸음 섞어 씨줄을 다져 넣어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에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 6 ~
하품 한 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올려 뜨고 한 뜸 두 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톱 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 7 ~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 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고,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 8 ~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가득
차 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녀석 세워 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 엄두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난다.
~ 9 ~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는 여나무번 족히 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상전 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 10 ~
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큰 아들이 장가들면 이 고생을 면할 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 신세가 나아질까?
이 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 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 11 ~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어느 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쌍 같이 영감하고 둘만 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 12 ~
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 하니 넓은 집에
가문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 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 13 ~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 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주어 한이로다.
~ 14 ~
손톱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 한거드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 한거드냐?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고목 나무 껍질 같은 두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걱정 때문일세.
~ 15 ~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색 든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 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 16 ~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 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 17 ~
내 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상에 미련 없다.
서산마루 해 지듯이 새벽 별빛 바래듯이
잦아들 듯 스러지듯 흔적없이 지고싶다.
-<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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