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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만 이아기

오늘의 쉼터 2011. 4. 13. 22:22

 "박지만 EG 회장은 재산 규모 583억원으로 360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중은 구속과 선처 등 2000년대 초반까지도 사회 적응이 힘들었던

 박 회장이 어떻게 신흥갑부로 떠올랐는지 궁금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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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이 뜨겁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장밋빛이다.

덕분에 증시 활황기에 보유주식을 처분해 막대한 차익을 챙기는 이들도 늘고 있다.

최근에는 오너가(家) 대주주와 그 자녀들이 보유주식을 처분해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대중에게 낯익은 이름도 포함돼 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 박지만 EG 회장이다.

이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동생이란 사실이 더 친숙해진 박 회장은 11월 들어 ㈜EG 주식

30만 주(4.0%)를 매각했다.

시가로 40억원어치다. EG가 밝힌 보고사유는 ‘주식담보 대출금 일부 상환’. 매각 후 공시된 보유주식은

252만323주(33.6%)로 여전히 EG의 최대주주다.

그의 이름은 한 달 전에도 언론에 오르내렸다.

매년 10월26일이면 국립현충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하며 모습을 드러낸다지만

이번엔 기업인으로 ‘신흥갑부’ 대열에 이름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지난 10월 초 재계 정보 제공업체인 재벌닷컴이 집계한 ‘올해 한국 400대 부자’에는 그 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54명의 새로운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개인 재산 규모가 1조5406억원으로 평가되며 일약 12위에 오른 이민주 에이티넘파트너스 회장,

19위에 이름을 올린 김준일 락앤락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여동생 최기원 행복나눔재단 이사장(36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게임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위메이드 박관호 대표이사(144위),

영화배우 신영균씨의 아들인 신언식 한주에이엠씨 대표(360위) 등

과거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인물군 중 박지만 EG 회장은 재산 규모 583억원으로

360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중은 구속과 선처 등 2000년대 초반까지도 사회 적응이 힘들었던 박 회장이 어떻게 신흥갑부로

떠올랐는지 궁금해 한다.

“어떤 질문에도 답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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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으로서 박지만 회장을 취재하기 위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신평리에 위치한 ㈜EG와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EG 서울사무소에 연락을 취했다. 청담동에 거주하고 있는 박 회장은 평소 서울사무소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오랫동안 그의 수족이 돼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는 정용희 실장은 “지금은 언론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도움 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며 필요한 자료는 충남 금산의 본사로 연락을 취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본사의 입장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관련 부서 담당자는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듯 통화 내내 “알아보고 전화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같은 부서 여직원이 알려온 소식은 “자료를 비롯해 요청한 무엇에도 응해줄 수 없다”는 것.

박 회장의 언론 기피증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혼 후에는 간혹 부모님과 누나 이야기로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으나 그 외에는 좀처럼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

박 회장은 이미 알려진 대로 중앙고등학교 1학년 재학 당시 어머니의 죽음을, 육군사관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1986년 육군 대위로 전역했지만 사회 적응이 쉽지 않았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친구의 말에 빠져든 코카인 흡입으로 1989년 처음 불구속 입건된 이후 10년간 5차례(4차례 구속)나 적발, 선처, 재적발이 이어졌다. 2000년에도 히로뽕 복용이 뒤늦게 적발돼 2002년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마지막 구속이 그에게 큰 자극을 줬다”고 말한다. 당시 그가 구속된 뒤 가족은 물론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선처를 부탁하는 전화가 검찰과 청와대에 잇따르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김유후 변호사와 이건개 의원이 다녀갔을 뿐 연락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변에 사람이 많았던 그에게 이러한 상황이 충격적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재기를 도운 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박 명예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스승과 제자로 관계가 각별했다. 세계적인 철강업체 포항제철의 탄생도 이러한 관계가 배경이 된다.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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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교회 집사인 박태준 명예회장은 방황하던 박 회장을 교회로 인도한다. 박 회장의 지인들은 “그가 소망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전했다. 이른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박 명예회장은 경제적인 면도 챙기기 시작했다. 현재 박 회장이 EG 회장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박 명예회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1987년 설립된 EG(당시 삼양산업)는 포항제철의 냉연강판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폐산을 독점해 전자용 산화철을 만드는 곳이다. 산화철 가공 부문에 수입 대체 기술을 갖고 있어 신기술 개발 벤처기업으로 지정돼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89년 마약 혐의로 구속됐다 석방된 직후 박 회장은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회장의 도움으로 이 회사의 부사장이 된다. 이후 1990년 2월 대표이사가 된 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도움을 받아 8억원을 출자해 대주주가 됐다. 당시 총자본금 36억원의 EG는 박 회장이 전체 지분의 74.3%를, 박 회장의 둘째누나 서영씨가 8.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2000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며 박 회장을 벤처사업가로 탈바꿈시킨 EG는 당시 삼양산업이었던 사명을 1999년 9월 ㈜EG로 바꾼다. 그 시기 박 회장은 “EG는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뜻을 담은 영문 이니셜”이라고만 소개했다. 1998년까지 삼양산업의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았던 박 회장은 이듬해 대표이사직을 이광형씨에게 넘기고 회장을 맡았다. KBS 청주지국장 출신인 이광형 사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부속실에서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다.

"결혼이 가져온 삶의 여유일까. 박 회장 부부는 제3세계 어린이 입양단체인 한국컴패션의 후원자로 나서기도 했다. 컴패션을 알게 된 건 탤런트 차인표, 신애라 부부의 영향이라고 알려졌다"

결혼이 가져온 삶의 여유

박 회장에게 2004년 겨울은 인생의 분수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12월, 16살 아래인 변호사 서향희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오랜 친구로 알려진 오명식 EG 상임고문은 “두 사람이 두 달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나 최근 양가의 허락을 얻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며 소식을 알렸다. 대중의 관심도 만만치 않아 결혼식 시간과 장소가 비밀에 부쳐지기도 했다. 쉐라톤 워커힐 호텔 비스토홀에서 진행된 예식은 이미 1시간 전부터 만원이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몰리면서 미처 입장하지 못한 하객은 별도의 그랜드볼룸에서 스크린으로 예식을 지켜봐야 했다. 주례는 소망교회의 곽선희 목사가 섰다. 박 회장은 사회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곽 목사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돌아가신 부모님도 하늘나라에서 더없이 기뻐하실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당시 식장 앞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김성진 전 문공부장관, 박승규 전 민정수석, 민관식 전 문교부장관, 정서영 전 경제수석 등 3공화국 당시 내각과 청와대 핵심인사들이 총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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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은 결혼식 직후 아내 서 변호사와 함께 국립묘지를 찾아 부모님을 참배하고 폐백의 예로 축문을 일었다. 그는 “불효자 지만이가 한 가정의 지아비가 되어 이렇게 찾아왔다”며 “근혜, 서영 두 누님과 박태준 회장님 내외분 등 수많은 어르신들이 참석하셔서 축하해주셨다. 그분들의 뜻을 잘 받들며 사는 것이 곧 아버님 어머님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 생각하고 꿋꿋하고 의연하게 살아가겠다”고 덧붙였다.

박 회장은 결혼 후 이듬해 3.58㎏의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지금도 주말이면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과 함께 소망교회를 찾아 마음을 다스린다고 한다. 아내 서 변호사는 결혼 전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나 박 회장이 전도해 함께 교회에 나가고 있다.

결혼이 가져온 삶의 여유일까. 박 회장 부부는 제3세계 어린이 입양단체인 한국컴패션의 후원자로 나서기도 했다. 컴패션을 알게 된 건 탤런트 차인표, 신애라 부부의 영향이라고 알려졌다. 서울 청담동에 신혼집을 차린 박 회장 부부가 이웃인 차씨와 자연스럽게 신앙을 나누다 컴패션 후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서향희 변호사는 결혼 후 미국 뉴욕과 바하마를 여행하며 남편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여행서 <정말 좋았어―아줌마가 된 향희의 뉴욕·바하마 첫 여행기>를 펴내기도 했다. 부산지역에서 200권 한정 비매품으로 발간된 책에는 가족에 대한 소회와 에피소드 등을 담았다. 서문에서 “결혼하고 아들 낳고, 그렇게 아줌마가 된 후 간땡이가 커진 나머지 남편과 아들을 내팽개치고(?) 친구 핑계를 대며 훌쩍 떠난 이야기”라고 소개한 여행서는 간간히 남편에 대한 자신의 느낌, 박 회장의 최근 관심사 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 직업은 전직 대통령 아들이 아니라 사업가 입니다.

 회사가 커지면 그동안 사회에 진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을 수 있을 겁니다."

EG 20년, 꾸준한 수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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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안정이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일. 박 회장이 이끄는 ㈜EG는 올 상반기에만 매출액 129억원. 당기순이익 18억원을 올렸다. 지난해 매출액 193억원, 당기순이익 21억원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실적이다. 그만큼 지난해가 힘들었다는 방증일수도 있다.

EG는 현재 전자기기의 주요부품인 페라이트 코어의 주원료인 자성 재료용 산화철을 수거해 재판매하거나 이를 활용해 복합 재료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영상·정보통신·전자·전력기기 등 전기를 이용하는 모든 기기에 적용되는 부품 분야의 핵심소재다. LCD와 가전제품, 휴대전화 등의 통신용 코어, EMI 코어 등에 쓰이며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EG는 포항제철소의 산화수 설비, 스테인리스 수처리 설비 등을 운영해 재료의 안정적인 조달이 가능하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EG는 실제 국내 산화철 시장의 56%, 복합재료 부문은 75%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또 2008년부터 석유화학 공정 중 발생하는 탈황 폐촉매를 재처리해 희소금속인 바나듐과 몰리브덴을 추출하는 사업을 진행하며 수익이 늘고 있다. EG의 폐촉매 처리량은 연간 1만2000톤 규모로 공장 가동 1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에 수출하며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계열회사는 총 4곳. 우선 ‘EG테크’는 산회수 공정을 통해 산화철을 생산하는 회사로, 원자재 조달업무와 산화철 연구 개발을 진행 중이다. ‘EG 포텍’은 포항제철의 산회수 설비 5기(1냉연 1기, 2냉연 1기, 전기강판 1기, 스테인리스 2기)와 스테인리스 수처리 설비 4기(중화설비 3기, 생물학적 수처리설비 1기)를 전문 운영하고 있다. ‘EG 메탈’은 울산국가산업단지 내에 위치해 석유화학 공정 중 발생되는 탈황폐촉매의 재처리, 희소금속인 바나듐과 몰리브덴을 추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EG HT’는 주거·문화 사업 및 웰빙 사업과 관련한 반신욕 상품을 중심으로 한 욕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 요인에도 EG에 대한 증권가의 관심이 결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우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차기유력 대권주자의 동생이 회장인 탓에 이른바 ‘정치 테마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실제로 선거 시기마다 주가가 높아지기도 했다. 2007년 대선에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입지가 높아지자 주가도 덩달아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해 두 달 사이 두 배 이상 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한 드라마 <대물>이 방영되자 박 전 대표의 입지 상승과 함께 주가가 치솟기도 했다.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 자연히 EG에도 수혜가 있을 것이라 예상한 투자자들이 몰린 것이다.

증권가의 궁금증은 이따금 이어지는 박 회장의 주식 매각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 회장은 2007년 보유주식 206만 주(46.83%) 중 26만 주를 팔아 80억원을 현금화했다. 지난 8월에는 22만9677주를 시간외 매매로 팔아 40억원가량을 현금화했다. 앞서 말한 최근 매각까지 합하면 20년 전 처음 대표이사에 오를 당시 74.3%였던 지분이 33.6%까지 떨어졌다.

이 모든 궁금증에도 EG의 사업성에 대해선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 최근 일본과 중국의 희소금속 전쟁을 지켜본 뒤 희소금속을 생산하는 기업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회사를 이끈 지 20년 만에 한국 400대 부자로 떠오른 박지만 회장. 10년 전 EG의 코스닥 등록예비심사를 청구하며 그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 말이 새삼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제 직업은 전직 대통령 아들이 아니라 사업가입니다. 회사가 커지면 그동안 사회에 진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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