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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아리랑 3

오늘의 쉼터 2011. 5. 5. 21:29

 

홀로 아리랑(終)

 

장맛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형욱은 두 딸과 누이의 집에서 모처럼 만에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형욱의 누이가 조카들과 동생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든 자리였다.

누나의 입장으로서 동생의 가정이 잘못되리를 원하는 누나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평소에 자주 동생네 식구들을 불러 식사를 하고 싶었으나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애야, 많이 들어. 너희들도 많이 먹고.

  고모가 너희들 좋아하는 불고기와 파김치랑 깍두기를 새로 담았어.”


 “누님도 이리오세요.”


 “고모, 같이 들어요.”


 “아냐, 난 불고기 좀 더 굽고 갈 테니 어서들 들어.”


 “아빠,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응, 선영이가 ?  그래 따라보렴.”

 

 오랜 만에 딸이 따라 주는 술잔을 받으며 형욱은 두 딸 아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한 집안에 살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딸아이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더구나 요즘은 아내와 불화로 집을 나간 뒤부터 형욱은 가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희들도 한 잔씩 해라. 성인들인데 뭐 어떠니?”


 “저희들은 괜찮아요. 음료수나 마실게요. 아빠.”


 “괜찮아. 자 받아라.”

 

 형욱은 두 딸들에게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건배를 제의했다.


 “자,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건배하자.”


 “건배”


 형욱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란 말을 입에 올리고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홀로 내버려두고 누님 집에 와서 두 딸들과 마시는 술이 영 찝찝했다.

곁에 수지가 있었다면 분위기는 로맨틱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너희들 요즘 이 아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

오늘은 내가 너희들과 술잔을 마주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고 싶구나.

어디 선영이 먼저 아빠에게 할 이야기 있으면 해보렴.”


 “......”


 “언니, 어서 말씀드려.”


 “아빠, 엄마를 용서하고 집으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선영아 그런 이야기 말고 딴 이야기 하자꾸나.”


 “애야, 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봐.”

 

 “선영아, 지영아. 그저께 이 아빠랑 이야기 할 때 선영이는 아빠하고,

지영이는 엄마하고 살기로 했잖니? 그런데 생각이 바뀐 모양이구나?”


 “아빠가 불쌍해서 그래요.”


 “내가?”


 “네에.”


 “아빠가 왜 불쌍하다는 거니?”
 
 큰딸 선영은 형욱이 가장으로 가정 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만약 H를 버리고 수지와 결혼한다면 두 가정을 파탄 내는 파렴치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초로의 인생접어들면서 어디 마음 붙일 데가 없어 방황하고 있는 아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고 하였다.

형욱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수지와 결혼 할 경우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한창 나이의 새 엄마인 수지와 과연 심신으로 조화로울 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수지가 남편과 이혼할 경우 수지의 아이들이 수지를 따를 경우

수지의 두 아이들을 형욱의 호적에 입적 시켜야 하며,

아직 어린 수지의 두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이 큰 부담이 될 거라고 하였다.

큰 딸의 말에 모두 속으로 수긍하면서도 형욱은 절대 수지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하였다.

 

 “선영아, 고맙구나. 방금 네가 말한 내용을 내가 홀로 있을 때 생각 해보마.

 지영이도 아빠에게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아빠, 저는 아빠의 딸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딸이기도 해요.”


 형욱은 둘째 딸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불안했다.

언니보다 매사가 합리적이고 빈틈이 없는 것은 아내 H를 닮았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언니보다 영악한데 있으서도 인정도 많았다.

형욱은 그런 둘째 딸이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 지영아, 무슨 이야기든 해봐라. 부녀지간에 못 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니?”


 지영이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형욱은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영아, 어서 말해보렴.”

 

 “아빠, 엄마에게 아빠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반을 주세요.

어떻게 보면 엄마 아빠가 결혼해서 일궈 온 재산은 명의는 비록 아빠로 되어있다고 하지만

실은 두 분이 만든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재테크에는 엄마가 더 재주가 있으셨고요.

만약 저희들이 제안 한 대로 아빠와 엄마가 별거상태로 들어간다면

엄마나 아빠나 경제적으로 동등해야 한다고 봐요.

저는 두 분이 별거나 이혼을 원치 않아요.

그러나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으니 아빠는 쉽게 엄마에게 돌아오시지 않으실 테지요.

그러나 엄마도 아빠와 저희들을 키우느라고 한 평생 고생하셨잖아요.

그러니 아빠가 가지고 계신 것의 반을 엄마에게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봐요.”

 

 ‘아아, 딸애들이 어린 아이들이 아니구나. 이제 다 컸구나.

둘째는 분명 제 엄마를 두둔하고 있어. 큰 애와는 분명히 틀리구나.’


 “지영아,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아빠의 재산의 반은 절대로 줄 수 없다.

네 엄마가 보내 온 퇴직금은 모두 돌려주지 그러나 그 이상은 줄 수없어.”


 “아빠, 그럼 아빠가 갑자기 잘 못되는 날이면 아빠의 재산은 누가 관리하죠?

 누구에게 물려주실 건데요? 혹시 수지 아줌마에게 주시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그, 그야......”


둘째 딸의 날카로운 말에 형욱은 숨이 턱 막히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곁에서 부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형욱의 누이가 거들고 나섰다.

 

 “애, 지영아.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아빠가 만약에 수지라는 여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아빠가 그 여자에게 재산을 전부 넘겨주겠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모, 요즘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 간 재산 다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모르세요?”


 “그래도 아빠가 너희들 몫은 남겨 두시겠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부부가 서로 좋은 관계있을 때 아내가 남편에게 무슨 달콤한 말을 못하겠어요?

아빠가 취중이라고 그 여자에게 전권을 넘겨주고

아빠몰래 그 여자가 아빠 재산을 모두 자신이나 그 아이들한테 넘기면 그때는 어쩌게요?”


 “지영아, 상상이 너무 확장된 것 같구나. 아무려면 아빠가 그렇게 하겠니?”

 

 “그래. 지영아, 너무 너희 자매가 과민 반응하는 것 같구나.

아빠는 너희를 만든 분이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너희들을 보호하고

자수성가나 결혼 할 때 까지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잘 아시고 계셔.

너무 걱정들 하는 것 같다.

이 고모는 내 동생인 너희 아빠를 잘 알아.

고모가 네 아빠 어린 때 엄마 노릇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네 아빠 절대 그런 분 아니다.”

 

 “아빠 좀 전에 제가 아빠에게 드린 말씀 들어주세요.

엄마에게 아빠의 재산 반을 나눠주시면 나중에 그 재산은 저희들이 상속을 받게 되겠지만

아빠는 만약 수지 아줌마랑 다시 가정을 꾸민다면 아빠 명의의 재산은 나중에 저희들에게 올까요?

절대로 아빠 명의의 재산은 한 푼도 저희 자매에게 오지 않아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죠.”


 “지영아, 너 말이 너무 거칠구나.”


 “죄송해요. 그러나 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을 거 에요.”


  “알았다. 아빠가 생각을 다시 해 보마.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

 

 부녀지간의 진지한 대화는 긴 시간 지속되었다.

형욱이 자신이 아내와의 결별을 정당화 하고 딸들에게 이해를 구하려던 애초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그래, 딸애들이 보통이 아니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예측을 하고 있다니.’


 파티는 저녁 늦게 끝났고 부녀는 다시 이산가족이 되었다.

형욱의 누이는 아이들하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권했지만, 

형욱은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했다. 

딸들과 진지한 대화가 있던 다음날부터 형욱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다.

 

 수지의 아이들까지 자신이 책임진다는 것은 형욱에게 있어서 굉장한 부담이었다.

수지 한 사람이라면 벌써 가정을 꾸몄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며칠후 형욱은 오후에 수지로부터 서울에 급히볼 일이 있어 다녀오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남편으로부터 빨리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 다.

 

 “수지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인데 남편이 빨리 왔다가라고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 할 테니 무조건 빨리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래? 그럼 다녀와야지? 혹시 당신 남편이 우리사이를 눈치 챈 것은 아니겠지?”

 

 “서울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사이를 알겠어요?”


 “모르지. 아이들이 아빠한테 일러 바쳤는지도.”


 “암튼 내일 갔다가 빨리 돌아올게요.”


 “빨리 와야해 . 내가 당신 하루라도 못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에. 알았어요. 일 마치면 곧 바로 올게요.”

 폭풍 전야처럼 조용하게 시간이 흘렀다.

 H는 몇 달 사이에 노인이 되어 있었다.

밤이면 술을 마셔야 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알코올 기운을 빌려서라도 현실속의 자신의 존재를 잊고 싶었다.

마치 길고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 악몽이 어서 끝나기를 바랐지만 그 결론이 두려웠다. 

한국에 갔던 수지가 보름 만에 돌아왔다.

수지는 돌아 온 뒤에도 며칠 동안 집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저에요. 형욱씨.”


 “아, 수지. 언제 온 거야?”


 형욱은 보름이 넘어도 소식이 없자 수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저녁 때 두 사람이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수지. 그래 서울 갔던 일은 잘 된 거야?”

 

 “네에.”


 “무슨 일인데 수지 남편이 빨리 오라고 한 거야?”

 

 “......”


 “서울서 무슨 일 있었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거 같네?”


 “남편과 제가 빌딩을 증여 받았어요.”


 “응? 빌딩? “

 

 “네에.”


 “얼마나 큰 빌딩인데, 그리고 누구한테 증여를 받았다는 거야?”


 “실은 아버님이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에요.”


 “그래? 그럼 얼마 못사시겠군. 그런데 얼마나 나가는 빌딩이야?”


 “남편은 남매에요. 아래로 여동생이 있는데 영국에 살고 있어요.

이번에 시누이도 왔더라구요.

남편은 서울시내에 있는 30층 규모의 인텔리전트 빌딩을, 

시누이도 역시 서울에 있는 10층 규모의 상가 빌딩이에요.


 ‘30층 규모면 꽤 큰 돈인데......’


 "거 잘 되었군. 수지도 빌딩의 지분 반을 얻었다면 재벌이 되었군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우울해 보여? “


 “요즘 저는 잠을 통 못 잤어요.”


 “왜?”


 “형욱씨랑 저, 그리고 나의 미래, 또 두 아이들의 장래 등등으로 전혀 잠을 못 잤어요.”

 

 형욱은 서울에 다녀온 수지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감지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남편과 친인척 등을 만나 마음에 변화가 있었겠거니 하고

생각하려 하였으나 두 사람 사이에 전에 없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가려져 있음을 보았다.

 

 형욱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자주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고 약간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형욱이 이야기 할 때 형욱의 두 눈동자 속에 빠질 듯 했던

수지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수지,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내가 수지의 두 아이들을 책임지면 되잖아.

수지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난 무엇이든 다 할수 있어. 내가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 알잖아. ”

 

 “형욱씨.”


 “응, 그래 말해봐.”


 “한국에 다녀오면서 전 많은 것을 생각해 봤어요.

 그동안 제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로 산 것 같기도 하고요.”


 수지는 설티독(Salty Dog)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잠시 공허한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눈에 물기가 살짝 비쳤다.

 “수지, 무슨 생각들을 했는데 그래?”


 “제가 형욱씨 부인과 두 딸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때 TV에서 부부간 갈등을 다룬 드라마를 본적이 있었어요.

그 내용을 보고 저는 저의 실체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어요.”


 “무슨 내용이었는데?”

 

 “기러기 아빠를 다룬 내용이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불륜을 다룬 드라마보고 저도 모르게 분노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작 분노의 대상은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아냐, 수지는 지극히 정상이야. 잘못 된 거 하나도 없어.”


 “도덕이라는 것은 단지 교과서 속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인생은 전쟁이야.

내가 원하는 사랑을 찾고 내가 원하는 물건 손에 넣으면 되는 거야.

도덕이라는 어쭙잖은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가 청운 꿈을 모두 날려 버린

내 지나간 이력을 생각해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인생은 성취하는 데 그 의의가 있어.

진시황이나 한무제는 광활한 영토를 취하는데 인생을 걸었고,

돈 쥬안은 여인들의 사랑을 얻는데 인생을 걸었어.

샤카모니나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인류의 구원과 사랑이라는 큰 사명감을 느끼고

이승을 떠나면서 대의를 세웠고 말이야.

그러나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오면서 그림자 같은 인생을 살았지.

참으로 한심한 세월이었어. 난, 난 지나간 허무한 세월에 대하여 보상을 받고 싶어.

그것도 수지하고 함께하면서 내 지나간 허망한 세월에 다시 기름을 치고 싶다고.”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형욱은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무엇에 홀렸는지 수지는 형욱을 말이 귀에 와 닿지 않았다.

형욱은 서서히 목이 타기 시작했다.

20년간 지속해온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깨지고 새롭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서 상대인 수지가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형욱씨, 저 자꾸만 자신이 없어져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당신이 그런 말 하면 난, 난 어떻게 하라고?”


 “죄송해요.”


 수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았다.

 

 ‘아아,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더니.

그 말이 꼭 맞나보다.

분명 이 여자가 서울다녀오더니 변했어.

어찌하나, 난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형욱은 독한 술 넉 잔을 연거푸 마셔댔다.

입안이 타기 시작하였다.

수지와 다정했던 지난날들이 활동사진처럼 뇌를 스쳐지나갔다.

형욱은 믿고 싶지않은 수지의 변화에 대하여 당황하면서 도대체 여자들이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영원히 그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였다.

 

 “수지, 우리의 사랑이 이제 끝을 봐야 한단 말인가?

 난, 난 절대로 당신을 놓을 수 없어. 절대로 놓을 수 없어.

내 목숨이 필요하면 죽게. 아니 내 전 재산이 필요하다

당장 당신에게 줄게. 제발 우리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바래 수지.”

 

  수지는 연거푸 마신 술이 오르는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면서

두 눈을 꼭 감고 마치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석고상 같았다.

서울서 만난 남편의 얼굴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은 수지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모습이었다. 

자신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욱 역시 자신에게 여생을 걸려고 하는 것에 수지는 부담감을 느꼈다.

물론 수지는 경제적으로 전혀 불편한 것이 없었다.

단지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 형욱과 내연의 관계를 맺었던 것 뿐이었다.

 

 “형욱씨, 저 너무 취한 것 같아요. 오늘 집에 일찍 가고 싶어요. 저 좀 보내 주세요.”


 ‘뭐라고? 보내 달라고? 이 여자가 아주 변했구먼.

  예전 같으면 늦은 밤 까지 같이 있어주길 바래던 여자가.’


 “수지, 왜 그래?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


 “저, 너무 피곤해요. 아직 여독이 안 풀렸나 봐요. 죄송해요 형욱씨.”

 

 ‘아아,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형욱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불과 보름 사이에 너무 달라진 수지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형욱은 수지가 얄밉기도 하였지만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신사도를 버릴 수 없었다.

수지를 택시 태워 집으로 보낸 형욱은 다른 바(Bar)를 찾아 나섰다.

손아귀에 있던 파랑새가 창공으로 날아간 느낌이었다. 거짓말처럼 여름날이 무의미하게 흘렀다.

 

 한 여름의 태양이 따가운 햇살을 무자비하게 퍼부어 대는 오후였다.

형욱은 새로 구입한 집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수지의 변심에 충격을 받아 방황하고 있던 형욱은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하루에 겨우 밥 한 끼 먹으면 다행 일 정도로 술이 형욱의 모든 혈관을 꽉 채우고 있었다.

 

 딩동, 딩동 -
 누구도 찾아 올 사람이 없는 집이었다.

형욱이 새로 구입한 집은 아우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런데 한가한 오후에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형욱이 푸석푸석한 얼굴로 간신히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앗? 다, 당신은?”


 형욱의 아내 H였다.

쌀쌀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H는 형욱을 쳐다보았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결자해지(結者解之)하러 왔어요.

 우리 두 사람이 매듭진 일을 풀어야지요.

난 법적으로 당신의 아내이고 당신은 나의 남편이에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초췌한 형욱은 당당한 태도의 H와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과 내가 풀어야 할 일이 있어왔으니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당신에게 저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이 없어 왔어요.”


 형욱은 담배를 피우면서 H와 눈을 마주 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주지. 당신이 평생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인데 그걸 내가 몽땅 먹는다면 내가

도둑놈이 되겠지.

당신이 요구한 돈은 이미 당신 계좌로 송금했어.

그리고 지영이가 당신에게 내 재산의 반을 주라고 요구하더군.

그래서 내 재산의 반을 덤으로 해서 당신에게 보냈어.

지금 당장 은행에 조회 해 보면 알거야.”

 

 “고맙군요. 그럼 내가 당신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 볼 일이 없어졌네요.

난 이만 가겠어요. 오늘밤 10시 한국행 비행기를 탈거에요.

부디, 그 수지라는 여자와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아이들을 통해서 들었을 거라 믿어요.

오래 오래 천년만년 그 여자와 행복하게 사세요.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세요.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치고 잘 되는 거 못 봤어요.”


 “......”

 

 형욱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아내가 귀신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딸들한테 휴대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형욱은 순간 자신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될 줄 알았던 수지와의 관계가 불투명하게 변해 버렸고,

딸아이들과의 관계도 깊은 상처로 얼룩이 지고 말았다.

 

 

 “아주머니, 그래서 그 이후에는 어찌 되었어요?”


 지구대 소속 경찰관이 H에게 커피 한잔을 뽑아 앞에 놓고 담배 한 가치를 건넸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가슴속 이야기를 물 흐르듯 토해 낸 H는 두 시간 전보다

얼굴이 밝아졌다.

H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경찰관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며

 H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궁금해요.

아저씨한테 돌려받은 돈도 있으신데

어째서 공원에서 노숙자 처럼 주무세요? 비도 내리는데…….”


 인정 많아 보이는 중년의 경찰관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H를 졸랐다.

변심한 남편 두 딸들은 이국에 남겨둔 채 H는 서울로 돌아왔다.

남편은 H를 속이지 않았다.

자신이 송금했던 퇴직금과 퇴직금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 자신의 계좌에 입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H는 서울로 돌아온 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혼자 살만한 아파트를 구입해서 편히 지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싶었다.

 

  마치 노숙자처럼 헐렁한 복장과 초췌한 얼굴로 낮이면 수도권에 있는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학교를 찾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밤이면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주변을 어슬렁 거렸다.

이전에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던 노숙자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셔댔고,

어떤 때는 마음에 맞지 않는 노숙자와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안면이 있는 노숙자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갑자기 무슨 영감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가 둘째 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엄마? 엄마야?”


 “그래, 엄마다. 지영아, 그 동안 잘 있었니?”


 “엄마 왜 휴대폰도 안 가지고 다녀?”


 둘째 딸은 H의 목소리를 듣자 훌쩍거렸다.

 

 “지영아,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그러니?”

 “아빠가”


 “아빠가 왜?”


 “흐흐흐 흐흑-”


 수화기에서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애, 지영아. 울지 말고 말해봐. 아빠가 어찌되었다는 거야?”


 “아빠가, 아빠가 지난주에 돌아가셨어요.”

 

 “뭐, 뭐라고? 돌아가셨다고?”


 “네에.”


 “아니 아빠가 왜 돌아가셨다는 거니? 자세히 말해봐.”


 “아빠가 엄마 한국으로 떠난 다음날 음독 자살하셨어요. 흐흐흐 흐흑-”

 

  H는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빈 백지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H는 역 구내 공중전화기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아리랑을 부르기도 하고 깔깔거리며

큰소리로 웃기도 하다 엉엉 울기도 하였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런 H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천 원짜리 지폐를 던져 주기도 하였다.


 동료 노숙자들이 거의 실신상태의 h가 안돼보였던지 H에게 몇 번 술을 얻어 마신

남자 노숙자 들이 H를 업고 근처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데리고 가서 H를 벤치에 눕히고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뒤, 주민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H는 인근 경찰 지구대로 옮겨졌다.

 

 이야기를 다 마친 H는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갑자기 조용하던 지구대 안이 초상집이 된 것 같았다. '

한 여인의 기구한 삶에 지구대 안 경찰관들도 콧날이 시큰했는지 헛기침을 해대며

애꿎은 담배만 축내고 있었다.

 

 


                                      - 끝 -


         2008년9월21일 22시45분
         인천 소래포구에서   여강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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