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아리랑 2
“H선생님, 퇴직하시면 해외로 나가신다면서요? 좋으시겠어요.
두 따님과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아저씨랑, 외국 나가시면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거네요.
정말로 부러워요.” “자자, 우리 모두 그동안 40여년 가까이 교단에서 수고하신
H선생의 정년퇴직을 축하는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교장을 비롯하여 전 교직원이 참석한 H의 송별식이 성대하게 열리고 있었다.
약간 상기된 얼굴의 H는 만감이 교차했다.
꿈 많던 처녀시절 시작한 교직생활이 초로의 여인이 되어 끝나는 길고 긴 인생 여정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 번의 실연을 겪으면서 남자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H는 형욱과 뒤 늦은 결혼을 하였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만도 서울 시내에 수천 명에 이를 것이다.
H는 자신이 서울시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제자들이 있고,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해 했다.
한 달 전 남편 명의의 물 좋은 동네에 있던 아파트와 땅을 처분하여 남편에게 보내고,
이틀 전에는 퇴직금을 일시불로 수령하여 남편에게 송금하였다.
잠시 살고 있는 월세 방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한 달 후면 H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행복한 꿈을 생각하면 잠시의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비록 교단을 떠나게 되었지만,
한 평생 바친 땀과 열정이 제 손을 거친 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발전과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 할 거라 굳게 믿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 정말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H선생, 마지막으로 H선생의 십팔 번지 좀 들어보고 싶은데요?”
“동감입니다. 부탁해요
.”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한 마지막 잔치일거라고 생각한 H는 목청을 가다듬
었다.
다른 선생들과 회식 후 2차를 가면 H는 구세대답게 늘 아리랑을 불렀다.
다른 젊은 선생들이 눈치를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 있게 독특한 창법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백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아
즉석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박수에 맞춰 아리랑을 부르는 H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갑자기 송별식이 숙연하게 변하자 평소 개그맨 흉내를 잘 내는 박선생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불렀다.
동료 교사들은 제 각기 준비한 선물을 H에게 전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제가 사회인이 되더라도 늘 선생님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인사말을 하는 H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발랄하고 똑부러지던 목소리
와 정반대였다.
간신히 송별식장에서 나온 H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여행을 준비해야 했다.
40년 넘게 헌신해 온 교단에서 떠나 홀로 그동안 가보지 못한 전국 유명 관광지를
여행해 볼 계획이었다. ‘내가 가면 남편과 아이들이 나를 영웅 대접하겠지?
내가 그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유학을 보냈으니 이제는 이 엄마를 떠받들어 주겠지.
남편은 우리가 살 집을 장만해 놓고 내가 오기만 기다릴 거고.
아아, 이제 모든 게 홀가분하고 자유의 몸이로다
.’집에 돌아 온 H는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즐거워하였다.
“여보세요?” “형욱씨, 저에요. 아침 일찍 웬일이세요?”
“응, 수지 이따 점심 때 우리 집에 오지.” “언제 안 갔나요?
매일 형욱씨네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데요.”
“수지가 혹시 오늘 점심 때 무슨 약속이라도 할까봐서.”
“형욱씨, 무슨 일 있어요?”
“와보면 알아. 12시 정각에 꼭와. 알았지.”
“네에. 알았어요.”
형욱의 집에는 전날부터 형욱의 누이가 와 있었다.
형욱의 누이는 형욱이 수지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로 외로운 처지이니 그냥 친구로 지내겠거니 하고 모른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동생의 집을 찾아오고 있는 수지를 보고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형욱아, 너 어쩌려고 그 여자를 매일 부르는 거니?”
“누님, 부른 게 아니고 수지가 알아서 오는 거에요.”
“한 달 후면 올케가 올 텐데. 그때는 너 그 여자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어떻게 하다니요? 그냥 지금처럼 친구로 지내는 거죠?”
“올케가 집에 있는데도 그 여자를 놀러오게 할 셈이니?”
“뭐 어때요? 이곳에 살면 이곳 풍속에 따라야지요?”
“너 참으로 큰일이구나.
이곳 사람들은 남녀가 유별하지 않아서 그런다 치지만 너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풍습에 따라 살아야하는 사람이야. 생활과 먹고 마시는 것이 이곳 사람들과 같다고 하여
네 정신까지 이곳 사람들과 같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형욱의 누이는 가까이 살고 있는 남동생의 가정에 풍파가 일까 걱정이 되었다.
수지라는 여인이 매일같이 놀러오다 시피 하니 무슨 사단이 나도 벌써 났을 거란
추측을 하게 되었다.
남동생이 최근에는 새로이 집까지 장만하고 친구들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형욱은 파티에서 수지를 연인으로 소개하면서 곧 인생을 함께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누님,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할게요. 누님은 너무 제일에 깊이 관여하지 마세요.”
“관여하지 말라니. 그럼 올케는 어찌되는 거니?”
“그건 그 여자가 알아서 판단하겠지요.”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 여자에게도 서울에 남편이 있다고 들었다. 그 남자가 알면 가만있겠니?”
“누님, 글쎄 너무 깊게 상관하지 말래두요.”
“너, 수지를 내일 불러라. 내가 그 애하고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봐야겠다.
내가 그 여자에게 장차 너와 무엇을 어찌할 것인지 직접 물어볼 거야.
이제는 결론을 내야겠어.”
“알았어요. 내일 수지를 오라고 부를게요. 그런데 누이, 수지에게 너무 다그치
거나 상처받을 수 있는 말씀은 삼가해 주세요. 누님도 수지를 예뻐하시잖아요?”
“......”
다음날 오전 형욱은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 청소를 한 뒤 수지가 오기만 기다렸다.
혹시나 누나가 수지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까봐 수지에게 물어 볼 사항까지 한정
하면서 누나에게 다짐을 받기도 했다.
형욱의 누이는 어려서부터 형욱에게 어머니나 같은 존재였다.
70세의 형욱 누이는 가끔 수지가 놀러왔을 때 수지의 언행을 눈여겨 봐왔었다.
여자답고 매력적인 수지도 형욱의 누이에게 마치 시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대했다.
형욱 누이는 그런 수지가 마음에 들었지만 서울에 있는 올케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제는 한 달 후면 올케가 올 것이고 수지로 인한 가정의 풍파는 불 보듯 뻔한 것 이었다.
정확히 12시에 수지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와 수지.”
“어머나, 여사님께서도 와 계셨군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
“누님이 자기랑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데.”
여느 때 같으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형욱 누이가 수지를 보고도 본체만체 하였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수지는 괜히 기가 죽었다.
“자, 누이 식탁으로 가세요. 수지도 가지? 오늘은 내가 특별 메뉴로 바닷가재를 마련했거든.”
“그래요?”
수지는 형욱의 누이 눈치를 보았다.
아무 말도 없는 형욱의 누이가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예전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같이 보였다.
“수지씨 오랜 만이에요.”
긴 침묵을 깨고 형욱의 누이가 입을 열었다.
“내 수지씨에게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네에.” “우리 형욱이를 좋아해요?”
“형욱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형욱의 누이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수지가 유학 온 두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한국에서 건너 온
유부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형욱의 누이는 수지의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아, 큰일이구나. 두 사람의 애정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수지씨는 서울에 남편이 있다고 들었어요.내 동생을 사랑한다면 장차 어떻게 할 셈이지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이혼하려고 해요.”
“그럼 다음 달에 형욱이 처가 서울서 온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네. 형욱씨한데 들었어요.”
“나는 동생에 가정이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올케는 서울서 돈 벌어 아이들 유학 보내고 이제 교단에서
정년퇴직하고 이곳으로 올 텐데. 그땐 어떻게 할 셈이지요?”
“형욱씨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형욱의 누이가 형욱을 쳐다보자 형욱은 시선을 피했다.
“너,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거니?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보거라.”
“누이, 전 그 사람하고 안 살 겁니다. 방금 들으셨잖아요.
전 수지랑 남은 인생을 함께 할 거예요.
그 여자가 오면 정식으로 이혼을 요구할거구요.”
“올케가 이혼을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니?”
“그렇게는 안 될 걸요. 그 여자는 빈털터리에요.
이곳에서 빈털터리로 얼마나 버티겠어요. 결국은 서울로 돌아가겠지요.”
“올케는 두 아이와 네가 전부인데. 어디로 간단 말이니?”
“그건 그 여자가 알아서 하겠지요.”
“너 참으로 잔인하다. 나 같으면 널 절대 그냥두지 않을 거다.”
“그냥두지 않으면요?”
“소송이나 싸워서라도 그동안 너와 아이들에게 희생한 것을
되찾아야지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니?”
“누이는 모르셔서 그래요. 그 동안 당하고 산건 저에요.
그 여자가 정 나와 이혼하지 않겠다면 위자료로 얼마 주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죠.
아이들 눈이 있으니 그냥 놔둘 수는 없고요.”
“형욱아, 너 꼭 가정을 깨가면서 그렇게 해야겠니?”
“가정을 깨는 것이 아니에요.
가정을 새롭게 만드는 거지요.
그리고 애들도 제 엄마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아이들도 내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있어요.”
“올케만 불쌍하게 되었구나.”
“그 여잔 스스로 판 무덤에 들어가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그 여자를 아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돈 벌레 같았어요.”
형욱의 누이는 형욱의 마음을 되돌려 놓기에는 틀렸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이왕 동생이 마음을 굳힌 이상 누이로서 동생의 편을 들어야 했다.
마음이 떠난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이며
무의미한 시간의 낭비이고 곁에서 바라봐야 하는 입장에서도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졸업반이 되어 곧 자신들의 세계를 펼쳐 갈 두 조카들이 염려가 되긴 했지만
10년 넘게 엄마와 떨어져 살아서인지 서울에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이 문제 였다.
동생이 한 달 후 이혼을 하면 수지의 두 아이들이 대학 입학할 때 까지 형욱은
수지와 이상한 관계를 지속해야 하고
언제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수지를 위하여 이혼한 형욱만 우습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지씨의 두 아이들은 수지씨와 동생과의 관계를 알고 있어요?”
“전혀 모르고 있어요.
알아서도 안 되고요.
그 아이들이 대학교 들어가면 전 곧바로 서울에 있는 남편과 이혼할 계획입니다.”
“사람의 앞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형욱의 누이가 수지의 의중을 떠보았다.
“만약에 남편이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거나 제가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바로 이혼할 생각입니다.”
수지의 말은 단호해서 감히 누구도 그의 말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을 한다거나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았다.
옆에서 수지의 이야기를 듣던 형욱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난 모르겠다. 너희들의 인생이니 너희 두 사람이 잘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그러나 너와 수지씨 네 아이들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니?”
형욱과 수지의 의지가 워낙 강하고 두 사람의 사이가 이미 부부관계 이상의
형국이라 형욱의 누이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한 달 후, H는 남편과 두 딸들이 있는 C나라 Q시로 왔다.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H는 모두 바빠서 못나왔겠지 생각하고 홀로 집을 찾아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무료하게 기다리던 H는 깜빡 잠이 들었다.
밤10시가 넘어서 큰딸이 들어와 H를 깨웠다.
“선영아,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니?
엄마 너희들 하고 이곳에서 함께 살려고 왔어.”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아빠하고 지영이는 어디 갔니?”
“아빠는 여행 가셨고, 지영이는 학교에서 현장 수업 때문에 며칠 있다 올거에요.”
“그, 그래? 아빠는 어디로 여행을 갔는데?”
“멕시코로요.”
“그래?”
오랜만에 엄마를 만난 큰딸의 태도나 집안 분위기로 봐서 H는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남편과 두 딸들이 자신을 열렬하게 환영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H는 이방인처럼 변한 딸아이에게 몇 가지 더 물어 보았으나
딸아이는 귀찮다는 듯 대충 대충 대답하였다.
‘마누라가 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여행을 갔다고? 참으로 이상한 일일세.
딸년도 이상해졌고.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큰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을 마치 손님 취급하는데 은근히 성질이 났다
“선영아, 엄마다. 잠시 거실에 나와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
“......”
“얘, 엄마야.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
“저 내일 시험 있어요.”
“잠깐이면 돼. 시간 좀 내다오.”
큰딸은 마지못해 거실로 나오면서 시큰둥한 얼굴로 TV만 쳐다보았다.
분명 자신의 몸속에서 나온 딸이 분명한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H는 자신과 오래 떨어져 있다 보니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얘, 넌 엄마가 왔는데 전혀 반가운 기색이 없니?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거야?”
“Oh, No, No. I'm very busy"
"얘, 엄마는 영어 몰라. 한국말로 해.“
“난, 아메리카 랭귀지가 더 좋아요.”
“그래도 넌 엄마가 왔는데 그러면 쓰니? 아무리 내일 시험이 있다고 해도 난 네 어미야.”
“I See, You're my mother. and I'm your daughter."
"얘, 난 영어 잘 몰라. 한국말로 해.“
H의 큰 딸은 계속해서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 쓰면서 H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H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모녀지간에 마치 철의 장막이 쳐진 느낌이 들었다.
지난봄에 서울에 왔을 때만해도 지금처럼 자신에게 무뚝뚝하지 않았다.
원래 큰 딸은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거나 정감 있게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어미에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H는 TV만 바라보고 있는 큰 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역력했다.
엄마의 손이 한창 필요한 때에 두 딸을 유학 보내놓고 H는 많이 울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음식 낯선 나라의 언어 낯선 얼굴들이 아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품을 떠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물론 큰 고모가 돌봐주고 있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소통도 잘 안 되는 나라에서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두 딸들을 유학 보내 놓고 H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두 딸들을 속박하는 게 아닌가 하는,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늘 가슴을 억눌렀다.
“선영아, 난, 너를 낳은 엄마야. 네 엄마라고. 넌 왜 엄마를 자꾸만 멀리하려고 하니?”
“Oh, no, no. I have something to solve through tonight."
"이 계집애, 너 정말 자꾸 이렇게 나올 거야?“
H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탁자 위에 있던 컵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유리컵이 산산 조각이 나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엄마의 행동에 겁을 잔뜩 집어 먹은 큰 딸은 벌벌 떨면서 H의 눈치를 살폈다.
“너희들 지금 이 엄마에게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어. 어서 말해봐.
이 엄마에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응?”
“Oh, No. we have nothing for deceiving you."
"이년, 너 끝까지 어미를 우습게 만들려고 해?“
H는 큰 딸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아악-
큰 딸은 비명을 질러대며 H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지만
H는 더욱 힘을 주어 딸아이의 머리채를 단단히 감아쥐고 윽박지르기 시작 했다.
“말해봐. 너 왜 엄마를 멀리하는 이유가 뭐야?
뼈 빠지게 일해서 네 년들 유학 보냈더니 겨우 엄마한테 한다는 짓거리가 영어나 씨부렁대?
내 그동안 네년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흘린 땀과 피 눈물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H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큰 딸아이에게 그간의 서글펐던 감정을 폭파했다.
그러나 큰 딸은 그런 엄마가 이상하게 보였다.
서로의 활동영역이 분명한 외국에서의 생활이 한국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엄마와 딸은 다정다감하면서 모녀 또는 자매같은 분위기여야 한국적일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기대했던 H는 당황하고 있었다.
“너, 말해봐. 아빠, 누구하고 어디간거야?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너 혼날 줄 알어?”
“Oh, No. 정말이에요. 아빠는 여행 갔어요.”
“누구하고 간 거야? 네가 알고 있는데 까지만 말해봐.”
“몰라요. 어제 멕시코 다녀오신다는 전화 메시지만 남기고 떠나셨어요. 정말이에요.”
H의 큰딸은 오버 액션을 취해가며 어설픈 발음으로 한국말로 대답하였다.
순간 H는
지나간 10년이 자신과 딸아이들 사이에 건너다닐 수 없는 큰 강이 생겼음을 감지했다.
‘아아, 내가, 내가 지난 10년간 바보짓을 하였구나.
이런 꼴을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왜 딸아이와 말다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야, 이건 분명히 내가 꿈꿨던 것이 아니야. 뭔가 잘못되었어.’
H는 정신을 가다듬고 큰 딸아이를 안심시킨 후 깨진 유리잔 잔해를 치웠다.
그리고
다시 큰 딸아이와 이야기를 시도 하였다.
“선영아, 미안하다.
내가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다보니 너무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
엄마가 잘못했다. 미안해. 모녀가 오랜만에 만나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내가 저질렀구나.
용서해다오. 엄마가 이렇게 사과하마.”
“......”
“선영아, 너하고 나하고 가슴속에 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 놔보자. 응 ?”
“......”
“괜찮아. 난 너를 낳은 엄마야. 무엇이든지 말해도 돼.”
H의 갑작스런 행위에 충격을 받은 선영이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늘 자상할거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유리잔을 집어던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영아, 아까는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나이가 스무 살도 넘은 애가 엄마한테
대하는 태도도 잘 한 게 없다고 봐.
지금부터 네가 엄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봐. 그동안 이 엄마에게 쌓인 감정이 얼마나 많겠니?”
선영은 주스 한잔을 마시더니 H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굴에 독기가 서린 것 같아 보였다.
“어머니, 전 어머니가 미워요.”
“내가, 내가 밉다고?"
H는 큰 딸아이의 자신이 밉다는 한마디에 정신이 아득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 잠깐. 엄마 정신 좀 차리자.”
선영은 H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버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언젠가 만나면
따지고 싶은 게 많았던 엄마였다.그러나 자신이 방금 한 말 한마디에 나약해진 엄마의 모습을 보자 한편으로는 엄마가 측은하기도 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H는 한숨을 몇 번 쉬더니 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선영아, 이 어미가 왜, 얼마나 미운지 천천히 이야기 해보렴. 넌 내 딸이야.
내가 열 달 동안 배 아파 낳은 내 딸이라구.”
“엄마, 전 그동안 엄마를 증오해 왔어요. 그건 지영이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들은요. 유학 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는 그동안 엄마의 강아지들이었어요.”
“강아지?”
“그래요.
엄마가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엄마의 뜻대로 공부 잘하는 엄마의 화려한 장식품이었다고요.
아니 엄마 장난감이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죠.
나나 지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이곳에 와서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아세요?
말이 통하나 글이 통하나 친구가 있나. 어린 소녀들의 소박한 꿈이 어느 날 몽땅 사라졌다고요.
언어를 구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어요.
이 땅에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하다고요.
우리가 왜 어린 나이에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죠?
나는 엄마가 요구하는 법학도가 아니라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지영이는 엄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꿈이었고요.
그러나 그런 꿈은 이제 추억이 되었고 지금은 마지못해 마음에도 없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전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에 가서 한국 전통 문양을 공부하고
전통 문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적인 것을 화폭에 담고 싶어요.
제가 하는 법학 공부는 아무리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요.
정말이지 이 나라에서 사는게 흥미가 없어요.”
큰 딸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듣는 내내 H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코 앞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딸이 정말로 자신의 몸에서 나온 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아아, 선영아. 이 어미가 잘 못한 거 같구나.
내 진즉에 너희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좋았을 것을.엄마가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정말로 잘못한 거 같구나.
그러나 이제 어쩌겠니?
많은 세월이 흐르고 너희들과 이 엄마 사이에 건너 갈 수 없는 강이 놓인 것을
이제 와서 어찌하겠니. 이 엄마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전, 전 엄마가 불쌍해요.”
“내가?”
“엄마의 욕심에 저희들뿐만 아니라 아빠도 희생양이 되었어요.”
“아빠도 희생양이라?”
H는 ‘아빠’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영아, 엄마는 너희 두 딸들이 외국에 유학 가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법학박사가
되어 돌아오기를 바랬어.
물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한 것에 대하여는 정말로 미안하구나.
그러나 난 우리 두 딸들만큼은 화려하고 멋지게 인생을 살아주기를 바랬어.”
“아니죠. 엄마의 인생을 한층 빛나게 해 주는 장식품에 불과했겠지요.
세상은 꼭 법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멋진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지금 현실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여 판검사나 대학교수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그 사람들의 일생은 보장된 거 아니니?”
“대한민국의 그 많은 판,검사와가 법학교수들이 자신이 스스로 법학 전문가가 되겠다고
공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 분들 상당수도 가문이나 부모의 강요에 의해 마음에 없는 공부를 했을 겁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세요?”
“그래. 이 엄마도 본래 학교 선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란다.
단지 먹고 사는 호구지책으로 교사가 된 것이었지.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네 아빠를 만나 가정을 꾸몄고 너희 자매를 낳았단다.”
“아무튼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엄마는 자식들의 인생 설계도를 잘못 그리신 거예요.
이제는 나나 지영이 엄마의 의도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라고요.
공부는 엄마가 원했던 것이니 자식 된 입장에서 끝마쳐야 겠지요.”
“선영아, 내가 너희들에게 차라리 없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나보다.”
‘흥, 이미 우리는 당신에게서 멀리 떠났어요.
우리를 강아지로 만들고 아빠를 바보로 만든 엄마, 당신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고요.’
선영은 차마 엄마에게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털어 놓은 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도
자신들을 위해서 헌신 한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흐흐흐흑-
H는 울고 있었다.
딸의 입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말이 나오리라고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딸 아이들은 철저히 길들여진 강아지 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딸과 서먹한 관계가 당분간 지속되었다.
일주일이 되자 남편이 집에 돌아오고 둘째 딸 지영이도 돌아왔다.
그런데 멕시코 여행 갔다 돌아온 남편 곁에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H는 그 여인이 남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여인일거라 직감하였다.
아직 법적으로 버젓이 자신이 아내이고 아이들 엄마인데 남편은 무슨 생각인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수지를 데리고 집으로 온 것이다.
“여보, 저 여자는 누구에요?”
“응, 친구야. 사업상 만나고 있지.”
“수지, 인사해요. 내가 말한 애 엄마에요.”
“안녕하세요?”
수지는 형욱의 강요로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형욱의 집에 들렸다.
신혼여행이나 다름없는 둘 만의 호젓한 여행이었지만
형욱의 아내가 한국에서 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 당신이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거예요? 평생 회사 생활만 하던 분이?
그리고 왜 하필이면 여자하고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거예요?”
“왜, 여자하고 사업하면 안 돼는 법이라도 있나?”
형욱의 답변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H는 남편이 예전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 하였다.
갑자기 자신이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었다는 알고 H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신, 그리고 저 여자 나하고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이야기?”
“당신 나를 속이려들지마. 난 다 알아. 여자에게는 남자들이 모르는 직감이라는
저 여자 당신하고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 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당신 저 여자 일부러 데리고 온 거지?
아니 그동안 멕시코로 여행 갔다고 하더니 저 여자랑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온 게로군?”
“맞아. 나 저 여자하고 신혼여행 다녀왔어.
당신하고 지금가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꿈같은 시간이었어.
이왕 말이 나왔으니 솔직하게 털어놓지 나 저 여자랑 곧 결혼할 거야.”
“뭐? 겨, 결혼?”
“그래. 당신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저 여자랑 제2의 인생을 시작할거야.
그러니 당신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H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정신이 혼미하여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거리며 거실에 쓰러졌다.
큰 딸이 진정제를 갖다 주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남편과 여자는 없었다.
‘아,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말년에 내 인생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다니.
안 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그동안 내가 제 놈을 믿고 피땀을 흘렸건만 나를 우습게 만들다니 절대 연놈들을 용서할 수 없어.’
H는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폭풍 전야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이삼일 지나면 들어오겠거니 생각했던 형욱은 십여 일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