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뿌리찿기

유방백세(流芳百世)

오늘의 쉼터 2011. 5. 4. 21:28

유방백세(流芳百世)

 

고려 왕조의 유신(遺臣) 김충유(金冲裕). 김충한(金冲漢). 김충보(金冲保)

김충익(金冲益) 사형제 일가족이 남원 두곡(杜谷)에 은거하여. 망국의 신하로서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자제 교육에 전심 하였다.

 

비록자신은 고려왕조를 섬겼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지만. 그 자손들까지

조선왕조에 저항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학문을 닦아 새시대의 조정에 출사(出仕) 하도록 허용 하였다.

 

태종14년(1414) 갑오(甲午) 식년(式年) 문과(文科)에서 33명의 급제자가 선발되었는데. 이 과거에서 제1의 급제자는 영의정에 이른 정인지(鄭麟趾) 였고. 수은(樹隱) 김충한(金冲漢)의 셋째아들 김작(金綽)이 제2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형제. 종형제 모두 조선 왕조에 등용되었으니. 두계처사(杜溪處士) 김충유(金冲裕)장자 규(규)는 청백리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내고. 차자 영(纓)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랐으며. 삼자 선(선)은 중량장(中량將)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은(樹隱) 김충한(金冲漢)의 장자 자(滋)는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내고. 차자 승(繩)은 담양부사(潭陽府使)이며. 삼자 작(綽)은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김충보(金冲保)의 장자 경(經)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오.

김충익(金冲益)의 장자 명준(鳴준)은 태사령(太史令)이며. 차자 석준(錫준)은

내급사(內給事) 였다.

 

조선 왕조 개국의 현실을 긍정하고 자제들을 출사시켜 진충보국(盡忠報國)하도록 허용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결단 이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고려 임금을 섬겼던 고려 신하로서의 도리를 끝까지 묵수(墨守)했다.

마침내,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자제들을 불러 엄하게 유계(遺戒)를 내리셨다.

“나는 고려 왕조의 미망 유신(未亡遺臣)이니. 내가 죽거든 장례를 간소하게하고 명정(銘旌)에는 관작(官爵)을 쓰지 말 것이며. 무덤에 석물(石物)을 세우지 말라.” 고. 하였다.

 

전조 봉익대부 이의판서(前朝奉翊大夫 吏議判書) 김충유(金冲裕)와 전조 봉익대부 예의판서(前朝奉翊大夫 禮儀判書) 김충한(金冲漢)의 장례는 고결한 시골 선비의 예로서 남원(南原) 두곡(杜谷)의 백룡동(白龍洞)에 안장(安葬)되었는데.

이 두분의 생졸연대(生卒年代)는 기록이 없어 상고 할수 없다.

 

고려 충신 형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 조선 조정에서는 그 분의 지조를 가상히 여겨 김충유(金冲裕)에게는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김충한(金冲漢)에게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增)하여 문민공(文敏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자손들이 유계(遺戒)와 유지(遺志)를 거역 할수없다 하여 증직과 증시를 받지 않았다.

 

영분공 휘:명종 후손 입니다.

휘:충유.....두계공파           휘:충한.....수은공파

휘:충보.....시어사공파        휘:충익.....참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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