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선조의 내력
삼국사기에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연도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 기원전 57년, 고구려 기원전 37년, 백제 기원전 18년순으로 건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백제는 고구려에서 유래한 나라들로 역사기록과 정황에서 건국연도가
비교적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건국연도가 앞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건국신화에만
의지되고 있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너무나 많다.
그런데..
기존에 목이 터지게 이야기하고 있는 신라가 흉노족국가라면 어떻게 해석이 될까?
우리나라 고대역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무나 완벽해서 도리어 의심될 정도의 역사적 사실들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무제(재위기간 BC 141-BC87)때인 기원전 121년에 혼야왕이 투항하고 김일제가족등 수만명의
흉노족이 포로가 되고 한나라는 정복한 하서지역에 4군을 두게 된다.
또한 기원전 109년에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하고 한반도 중북부에는 한사군이 설치되게 된다.
그래서, 수차에 걸친 한무제의 흉노정벌로 고조선이 망하기 전에 이미 한나라에는 십수만명 이상의
흉노족 포로들이 있었고 이들중 대다수가 한반도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한반도 가까이에서 고대 뱃길로 연결되어 있는 산동성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한나라 황제측근 흉노세력인 김일제 일족에 의해서 통제등 기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즉, 신라 건국이전에 이미 한반도와 일본까지 대규모의 흉노족과 흉노족에 포로가 되었던 한족과
유목민족의 거주지가 건설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신라의 건국연도는 기원전 57년보다 훨씬 이전인 고조선이 망하기 전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갈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건국연도가 기원전 57년으로 못박히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있다..
기원전 57년에 흉노족들이 분열되는 일이 일어난 년도 이기 때문이다.
즉, 기원전 57년에 그동안 1명의 선우에 의해 단일통치되던 흉노족이 최초로 분열하여 무려 5명의 선우가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후에 곧바로 동서 2개진영으로 흉노는 분열이 지속되는데, 동흉노는 질지선우가, 서흉노는 호한야선우가 통치하게 된다. 이 흉노간의 내전에서 호한야 선우가 패하여 중국 한나라에 투항하고 만다. 중국은 투항한 호한야 선우와 동맹하여 동흉노의 질지선우를 공격하여 결국 질지 선우가 죽고 동흉노중 일부는 서쪽으로 도망가게 된다. 중국 한나라와 동맹한 호한야 선우는 흉노땅을 되찾고 그 후로 호한야선우시대부터 흉노가 중국에 사대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어쨌든, 기원전 57년에 흉노들은 최초로 분열하게 되어 흉노는 1명의 선우에 의해 통치된다는 개념을 상실했고 바로 이런 흉노 분열의 혼란기에 신라흉노들이 대륙에 있던 흉노들과 심리적으로 결별되고 독립하게 되면서 자신들만의 왕을 선출하게 된 것이다.
흉노는 여러씨족들의 연합체로 알려져 있고 그중에서 흉노선우는 연제씨에서 왕비격인 알지들은 호연씨와 수복씨에서 배출하여 이들이 흉노족의 핵심씨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신라 김씨왕들의 선조라고 하는 김일제의 휴도왕은 흉노의 어느씨족이었을까?
흉노 휴도왕이 선우씨였던 연제씨족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영지가 중국과 경계가 맞닿아 있고 그 당시 흉노족의 중요근거지인 오르도스지역을 방어하는 흉노의 최전방이고 비단길의 중요한 요충지인 감숙성 무위(그당시 양주)였던 점과 혼야왕의 항복요구를 거부했던 점등에서 흉노족에게 중요한 실세였음을 알수가 있다.
또한, 그 후에도 흉노족 정벌에 모든 역량을 쏟았던 한무제가 김일제가 흉노족출심에도 특히 총애한 점, 김일제가 자신의 봉국인 투후국에 흉노족을 3만에서 5만정도를 데리고 왔다는 점, 더구나, 중국 사서에 유일하게 휴도왕이 모시던 금인 상이 있었다는 정황등에서 흉노족에서 강력한 세력이라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즉, 그 당시는 제정일치의 시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는 것도 바로 권력이었다. 휴도왕이 금인을 모셔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호화롭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 선우가 인정했다는 뜻으로 흉노족내에서 선우였던 연제씨 만큼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
선우를 배출하던 연제씨만큼 힘이 있었던 흉노씨족은 항상 선우의 알지를 차지하던 호연씨였다. 흉노족의 알지들은 주로 언지산근처 즉, 연지곤지하는 그 언지산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바로 그곳이 휴도왕의 영지인 것이다.
물론, 휴도왕이 호연씨유래의 씨가 아니라 흉노족씨족중에서 독립적인 씨족일 수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라왕가에서 여왕이 나온 정황등에서 보듯 흉노족 내에서도 여성들의 힘이 가장 막강했던 씨족이었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씨족은 흉노역사기록상 흉노의 호연씨 밖에 없다..
어쨌든, 흉노족이 분열될 때 김일제 일족은 한나라에서 황제의 측근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산동성에 있던 김일제의 투후국은 전성기에 있었던 시기였다. 즉, 이들은 중국의 흉노족에 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위치였다.
예를 들어, 흉노가 동서로 갈렸을때 동흉노나 서흉노 모두 중국과 관계를 맺기를 원했으나 중국은 사대하던 서흉노의 호한야선우에게 모든 지원을 해주어 동흉노의 질지선우를 멸망시켰다. 또한 서흉노에 대해서 매우 유화적인 조치를 취한다. 호한야 선우에게 흉노의 땅뿐 아니라 많은 재물, 거기에다 그 유명한 왕소군이라는 후궁까지 준다.
이런 정책결정에 황제의 측근인 흉노족 김일제 일족의 입김이 어느정도 존재했을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 호한야 선우도 마찬가지로 호연씨에서 알지를 들이는데 호연씨의 자매 알지들이 서로 아들을 낳았는데, 언니 알지가 자기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알지의 아들에게 선우자리를 양보할 정도로 외척이었던 호연씨족간 유대가 매우 강했다.
즉, 중국이 흉노선우들을 선택할 때 김일제 일족과 가까운 친중국파 흉노족씨족들을 선호했을 것이다.
김일제 일족들은 왕망의 신나라가 망할때까지 대흉노정책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또한, 교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김일제 일족은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임으로써 포로가 된 것이므로 흉노족에게 배신자이기 보다 한나라에서 출세한 흉노가문으로 인식되어 졌을 것이고 그 친족들은 흉노족에서 많이들 살아 남아서 씨족적 유대감을 가지고 김일제 일족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건국후에도 김씨왕조의 성립에 이런 중국의 흉노족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신라 김씨왕조를 확립한 사람은 356년에서 402년에 재위했던 내물왕이다. 즉, 이때부터 김씨들, 즉, 문무왕이 자신의 선조라고 했던 김일제 후손이 신라의 왕들이 된다. 또한, 이때부터 갑자기 왕이 칸이 되고 적석목곽분이라는 흉노식 매장문화가 나타나고 금관과 동복이 출토된다.
신라에 김씨왕조가 수립될 당시 중국은 5호16국이라는 혼란기였다.
내물왕 당시에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가야와 왜의 침입으로 신라가 위기에 처하고 고구려가 구원하러 내려와서 가야와 왜를 격파한 후에 신라를 속국화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내물왕은 중국의 전진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전진(351-394)은 그 당시에 중국 서쪽에 있던 나라로 저족이 세운나라다. 즉, 바다건너, 중국동해안을 지나 내륙가장 깊숙한 곳, 김일제 일파의 발원지인 중국 감숙성 무위(양주)가 전진의 땅이었다.
동쪽 끝 신라가 바다건너 대륙 수천킬로 안의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전진과 교류했다는것은 필연적 연관이 없다면 선뜻 납득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다시 중국역사를 살펴보자..
전진이 망한후에 그 지역에 후량이 들어서는데 이 후량에서 북량(397-439)을 건국한 몽손의 큰아버지 서평태수 나구를 죽인다. 열받은 몽손이 일어나서 북량을 세워 북량은 439년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바로 몽손이 흉노계란 것이다. 그것도 저거씨라고 하는 중국 감숙성 양주에서 발원한 흉노씨족이란 것이다. 흉노의 저거씨는 전한시대 휴도왕때부터 있었던 씨족으로 감숙성 양주가 바로 휴도왕의 본거지였다. 저거는 흉노의 벼슬이름으로 추정되는데, 그 벼슬이름이 바로 씨족이 된 것이다. 즉, 저거씨족은 휴도씨족, 즉, 김일제일족에서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휴도왕이 있을 때부터 있었던 씨족이라면 씨족사회인 흉노족에서 저거씨는 휴도왕의 일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저거씨는 그 후로로 계속 휴도왕영지였던 감숙성 양주에 남았던 흉노일족이었던 것이다.
몽손의 할아버지는 왕으로 아버지는 전진의 태수로 기록되어있어 전진에는 흉노족 저거씨의 유력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내물왕은 김일제의 본거지였던 중국 감숙성 양주의 인척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힘을 빌려 신라의 왕이 되고, 또한, 북량이 망한 후에 그 일족들 일부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이것으로 고구려을 몰아내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4,5세기의 신라 왕릉들이 적석목곽분과 금관으로 장식된 것도 바로 이런 중국의 인척들에게서 오는 부에 연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진과 북량에서 들어온 인적자원과 부와 지식등으로 릉를 장식하고 주변국에 힘을 떨쳤을 것이다.
김씨는 한무제에게서 받은 성씨로 중국문화권에서 통용되는 것이고 흉노에서는 다른 성씨로 있었을 것이다. 김일제와 그 동생들 후손들이나 김일제 조상들의 성씨들은 흉노에선 호연 또는 휴도 그리고 저거씨, 기타 다른 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라는 통일후에도 계속 중국 서부지역과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비단길상의 나라였던 사마르칸트에서인가의 벽화에서 통일신라시기의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역사에서 보면 신라는 무수한 유학생과 승려들이 중국에 갔다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때는 신라방이라는 거점들이 중국에 있었을 정도로 많은 교류를 했다.
즉, 신라인들은 휴도왕의 원근거지인 감숙성 양주뿐 아니라 신라흉노들중의 박씨, 석씨등의 씨족들도 관련근거지등과 교류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승려로, 유학생으로 또는 상인으로 무수한 인적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신라가 발전해 간 것이다.
흉노의 힘이 중국 한나라에 밀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혼야와 휴도일족을 데리고 중국에 복속한 이후이다. 이 사건으로 흉노는 혼야왕과 휴도왕의영지였고 자신들의 성지인 기련산과 언지산을 읺고 몽골내륙으로 쫓겨났다. 또한, 전투력에서도 심한 손실을 입어서 그 이후론 전성기의 흉노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쇠퇴해 간다.
그런데, 신라의 선조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에서 도(屠)자는 죽일도다..
즉, 중국인에게 휴도는 죽일놈이란 뜻이다.
중국인에게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냥 오랑캐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일놈이란 한자를 쓸까? 그것도 왕이름에..
즉, 휴도왕은 흉노족중에 가장 전투적이면서 악질적인 씨족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중국 한나라의 최전방를 맞고 싸울때는 선봉에 서서 중국인들에 대한 약탈도 가장 극심하게 했을 것이다.
이런 휴도의 태자였던 김일제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확실한 잘생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제의 용모를 보고 흉노가 투르크계가 아닐까 하는 역사가가 많이 있다.
어쨌든 흉노족중에서 투르크피가 많이 섞였서, 용모가 빼어나면서 등치 큰 종족이면서, 쌈 잘하고 잔인한 씨족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한무제도 가장 흉노다운 휴도족일족인 김일제가 자신의 측근이 되어 무한한 충성을 보이자 감복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잔인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아시아인종중에서 가장 스포츠에 능한 몸짱이고, 성실하고 잘 생기고 미인많고 머리좋고 한 것은 아닌지..
고대 역사를 들추다 보면 현대 한국인들의 결과물들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弼 祆 金 珔 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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