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대단한 수확이 있었다.
오늘 아침은 대단한 수확이 있었다. 사실 기마민족이라고 이름은 걸었으나 워낙 광범위하고 내 입장 즉 완전 문외한으로서는 또한 완전 처녀지인 이 영역을 어떻게 접근하느냐 막막할 따름이었었는데 마침 아들의 서가에 유목민족제국사(룩 콴텐.송기중 옮김)의 책이 있어 이제까지 이 책을 주로 인용하면서 진행해 왔으나 유라시아 스텦 지역 제국사이므로 딱 우리민족 뿌리와는 직접 연결된다기 보다 언저리를 더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난번의 알타이어족관련 내용에서 알타이 어가 터퀴시 몽골 퉁구스 3지파로 분류되나 유력한 학파에서 한국어를 제4의 지파로 추가 분류 주장이 있어 크게 흥미를 느껴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소상히 검토해 보면 뭔가 우리민족의 뿌리에 대한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여 기회봐서 이 방면의 자료를 살펴볼까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산장에서 김문경박사님께서 책 한권을 건내주셨는데 제목이 순록유목제국론-고조선 고구려 몽골제국의 기원연구인 논문집으로서 저자 주채혁이란 분이다.
<시베리아는 스텦-타이가-툰드라지대로 이루어진 거대한 벌판이다. 아시아대륙의 1/4이고 지구육지의1/10이나 된다. 침엽수림 위주로 구성된, 지구상에서 가장 드넓은 타이가라는 '숲의 바다'는 수많은 짐승들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태권은 한편으로는 대서양까지 이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북아메리카지역에 이른다. 여기에서 '시베리아의 황금'이라는 모피(Fur)가 주산품으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고원지대 "모피의 길"을 따른 이동루트는 당연히 백두대간과 접목되게 된다. 아울러 강해루트로 태평양, 북극해와 대서양으로도 그 권역이 이어지는 시베리아는 수산자원도 모피이상으로 풍요로운데 특히 3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오랜 기간에 걸쳐 이동해온 주류중이 하나가 강해를 기반으로 생활해오던 사람들일 수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16-7세기 대항해시대에 이러러 옛 몽골제국 수도 칸발릭(오늘날의 배이징)을 지향해 가던 서구 각국왕실 후원하의 밴처기업가 그룹들이 찾아낸 것이 신대륙이라면 차르러시아의 시베리아 경략 또한 이런 시대조류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베리아가 우리에게는 겨레의 역사적 태반을 찾아가는 어마어마한 '사료의 보고'로 떠오르고 있다. 조선, 발조선의 發, 단군의 檀, 부여,예, 맥, 고구려, 선비, 백제, 발해, 글란, 여진, 몽골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시베리아의 주산품인 모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과 고려가 순록, 貊(고구려)이 너구리 부여가 부이르(숫수달) 몽골(貊槁離)아 엘벵키-너구리, 발해가 늑대 또는 이리, 檀과 타타르가 水獺 山獺 솔롱고스가 '무지개'가 아닌 족재비과에 속하는 솔롱고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근래까지도 사람이 모이면 모피의 유무를 묻고 어떤 모피인가를 확인하면서 모피거래를 시작하곤 한다. 그리고 어떤 모피를 주산품으로 하는가에 따라 그 동네사람들을 곰족 너구리족 늑대족 수달족 호랑이 등으로 호칭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관행에서 생겨난 부족이름이 대부분인 것이다. 우랄산맥중에 '고미 공화국'(고대 원주민은 황인종)이 있고 물론 대통령도 있어 짐승이름의 나라가 있음이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貊국이라는 나라고 춘천에 있었고 濊국이라는 "(숫)수달나라가 강릉에 있다는 사실이 전혀 괴이할 이유가 없다. 시베리아-몽골은 사람보다 자작나무나 붉은 가지 버드나무 등의 나무와 곰 호랑이 이리 너구리 수달이나 소롱고 등의 짐승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땅임을 주목해야 한다.>
주채혁님 저서(이후 책) -다만 이런 濊국이나 貊국, 또는 熊국(곰나라)이나 虎국(범나라)이 있다는 것은 각론적인 사실이라면 순록-양유목국이 있다는 점은 총론적인 사실일 수 있다. 백두산 호랑이가 생태유전학적으로 시베리아 호랑이라면 백두산 조선족의 주류 또한 생태유전학적으로 시베리아 조선족일 수 있다고 보아, 고려와 신라를 내포하는 原조선겨레의 주된 생업이 순유목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시베리아에 식량채집단계에 속하는 수렵어로와 식량생산단계에 속하는 순록유목 내지는 양유목이 신석기시대 이래로 각 시대에 따라 그 비중을 달리하며 혼재해 왔다. 그러나 식량 생산단계를 거치지 않고 고대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순록이나 양 유목을 핵심문제로 삼게된다. 그것이 대규모 생산으로 나아가려면 짐승을 타고 기동력을 이용해야 되는데 타이가-툰드라를 생존무대로 삼는 순록은 순해서 재갈이 없이도 탈 수 있지만 개방공간인 스탶을 주무대로 삼는 양유목을 위한 말은 재갈이 필요하여 청동기 이후에나 그것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새베리아의 생태환경으로 보아 시원적인 유목은 순록유목이고 조선이나 고려 구르간 이라는 이름자체가 또한 순록유목과 직관된다. 요컨대 조선의 순록유목 기원설이라 함은 수렵이나 어로 또는 채집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하던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 그 주된 생업이 농업과 목축업이 되든가 둘 중 하나가 부업이 되는 가운데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식량생산자들 중에서도 특히 타이가와 툰드라나 스텦 등의 고원 건조지대를 목축생산의 주무대로 삼는 순록유목생산자 출신계열들이 우리민족의 고대정복국가를 세우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데 기초한 견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리민족의 기원지가 순록유목생산의 기원지와 밀접히 연관돼 있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진행해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朝鮮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침의 나라와 겨래'라는 말이 전혀 아니고 '순록유목민'을 뜻하는 것임을 전제로 하여, 조선상고사 연구시각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문제로 제기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고대국가의 형성지 중심이 아니라 그 형성주체의 유래처 또는 기원지 곧 역사적 태반을 추구하려는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주류조선은 농경기원이 아니고 순록유목기원이며 오늘날의 장백산 언저리의 이른바 大山이 주무대가 아니고 그 건너편의 대.소.외흥안령으로 이어지는 시배리아의 스탶-타이가 -툰드라 지대의 小山 -순록의 겨울 주식인 蘚이 나는 <蘚(Conka>주무대라는 것이다. 濊국과 貊국에 관한 해석은 이런 기본 틀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국의 濊는 몽고말 부이르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고 貊은 몽골말 엘뱅키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부이르는 숫수달이라는 뜻이고 엘빙키는 너구리라는 뜻이다. 한인들은 (숫)수달을 水獺이라 하고 너구리를 山獺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濊는 수달이고 貊은 산달이라는 말이다. 알타이 사얀산맥의 소안(鮮)족은 시얀산이라는 산이름에 기원되고 퉁구스 족은 시얀산에서 흘러내리는 예니세이강의 지류인 퉁그스하에서 기원된 이름이라는 견해에 기초하여 소욘 부라이드 몽골 고(구)려는 맥국의 맥에 속하고, 퉁그스-에왱키-함니간-나니아-만주족은 예국의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이에 맥국을 주제로 실마리를 잡아가려 한다. 貊의 common name은 Racoon dog이고 학명은 Nyctereutes procyonoides Mori이다. 貊은 개과의 너구리이다.
한민족의 기원설에는 대별하여 북방기원설과 남방기원설이 있고, 남북방혼용기원설이 있다. 북방기원설은 다시 스키도-시베리아기원설과 오르도스기원설이 있지만 앞의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몽골학계의 그것도 대동소이하다. 앞의 설은 북극해의 습기가 천산산맥 등의 고지대에 부딪혀 형성된 녹지대인 천산북로라는 스탶-타이가-툰드라 로드를 위주로 이루어진 민족의 형성 및 이동을 전제로 한 것이고, 뒤의 것은 그 지역을 넘어서 몽골고원 과 몽골고원 고비사막의 연장선상에 있는 황하상류의 만곡부를 중심으로 이를 추정해 본 것이다. 한반도가 연륙된 2만년 전에 많은 남방인 들이 이 땅에 왔을 수 있어서, 현재 한민족의 얼굴형을 남방형과 북방형으로 크게 갈라본다. 이 경우에 물론 북방형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알타이-사얀지역으로 다가가면서 여기서 남방형으로 분류되는 얼굴들이 거기에도 많이 혼재돼 있는 것을 보고 또 다른 시각에서의 조명도 함께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지역과 우랄산맥일대에는 소욘(鮮)족 등의 문화와 인간들의 서아시아 유래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키토-시베리아기원설의 구체적 확인과정에서 부딫힌 한 충격이었다. 지금은 교통이 열려 이분야에 관심이 있는이는 누구나, 몽골고원과 시베리아의 물이 거의 모두 북류해 북극해로 흘러들고 몽골고원 동부를 내포하는 외흥안령 이남의 대 만주권의 물은 남류하거나 남류하다가 북동류하기도 하면서 태평양으로 흘러든다는 것을 안다. 한천의 하류로 갈수록 습도가 높아 져서 혹한기만 피한다면 생산하기가 편하고 생물의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상식이다. 한여름의 알타이산의 기온이 영상30-40도에 이르고 일조시간이 18시간여나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의 역사산책의 시발동기가 된 문무왕 비문에 대한 KBS 역사추적 김일제 성한왕에 관련된다. 문무왕 비문의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이라는 비문내용이 이 태마의 포커스인데 투후는 김일제임이 명백하나 이어 祭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교수님들의 설명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 '투후과 동일한 의미'등으로 다소 명확하지 못한 점을 느꼈었는데 마침 순록유목제국론-고조선 고구려 몽골제국의 기원연구 주채혁저 책에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있어 옮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제천이라는 단어가 휴도왕이 사제직을 겸했을 가능성이 있고 . 이를 지칭하는 어휘 가령 캐토릭에서의 추기경과 같은, 지위명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즉 투후는 김일제의 한제국 지위를 그리고 흉노식 지위로 제천을 병기한 것같고 인터냇등재된 내용에 투후라는 비문이 크게 마모된데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의견이 있으나 제천을 포함한 여러가지 사항을 종합할 때 비문의 시조 김일제의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동서 <황금 '엘' 신상과 김씨네의 祭天金人'-황금의 '엘' 신상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의 다마스커스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BC2000년 경 서아시아 유프라테스강 언저리에 살던 사람들이 수배하던 신상의 일종이다. 또한 사기 권111 위장군표기열전 제51 한서 권55 위청곽거병전제25 휴도왕의 제천금인이란 BC121년 봄에 표기장군 곽거병이 하서주랑에서 진을 친 흉노군을 쳐부수고 빼았은 것으로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옹곤(신상)이다. 한서 권94 흉노전 제64상의 '제천금인'에 붙인 맹강의 주를 보면, 이는 본래 흉노의 지성소인 운양현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BC215년에 몽염의 30만 진군에게 그곳을 빼았기게 되자, 그 서북쪽에 자리잡은 휴도왕의 오른쪽 땅으로 옮겨오게 되어 그가 이 '제천금인상'을 모시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석을 단 曺魏 때의 맹강과 동시대인인 위소가 사기색은에서 '금인을 만들어 하느님께 제사지내는 주신상으로 삼았다.고 한 것이나 여정이 사기 위장군표기열전에서 하느님께 제사지내는 주신상으로 삼았다'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제사지내는데 금인으로 주된 신상을 삼았다. <祭天以金人爲主也>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제천금인'이 바로 샤먼의 제천신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각 시기를 전후하여 그들 지역에 널리 분포돼 왔을 수 있는 이 유물들은 거리나 시기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 크기도 엘신상은 2cm가량의 작은 마스코트 같은 것이고 제천금인은 기록만 있어서 그 크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마스코트류의 불상이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출토되고 또 불상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크기와 상관없이 신상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황금 '엘'신상과 제천금인은 시대상으로나 거리상으로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천용이라는 점에서 유사함. 또 사막과 스탶-타이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비교적 야산인 소산-鮮으로 이어지는 고원지대 즉, 몰골리안 루트상에서 찾아지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친연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기마민족과 관련된 우리나라 상고사 정리는 삼국유사, 한단고기, 그리고 홍산문화를 근거로 하고자 하여 생소했던 한단고기를 전산검색하였다. 우선 이 책 집필자 계연수에 대해 궁금하여 알아보는 과정에서 한단고기 삼성기 상편을 썻다는 신라시대 고승 안함로의 책이 고성이씨 집에 보전되어 왔다는 내용과 관련 조선 세조 예종 때 고서수거령이 내려져 민간이 보관하고 있던 고서를 제출하면 상이 주어지고 숨기면 참형의 형벌을 내렸다는 이조실록 부분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조선시대의 국시는 억불숭유의 이상적 성리국가이었고 개국후 세종조의 황금기를 거쳐 다져진 주로 왕실 중심 상위계급 층에서 꽃피웠던 문화가 세조 성종 제이의 융성기를 통해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경국대전 완비와 함께 성리학 이데오르기 이상국가의 총체적 완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이데오르기와 상반되는 그리고 또하나의 외교적 원칙 사대교린 노선에 저해되는 이념이나 역사관련 일체의 문서를 말살하는 국가적 켐페인이 전국적으로 휩쓸었던 것 같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전제국가에서의 기존문화의 파괴등 작위적인 행위는 가끔 있었는바 예를 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 그리고 근래에는 홍위병의 문화혁명등이 있으며 공자의 유교경전은 진시황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위반하여 벽 속에 숨긴 고서적 에 의하여 후대로 전수될 수 있었다 하는바, 한단고기의 삼성기는 이 경우와 유사한 듯한 즉 세조시대의 고서수거령을 위반하여 참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후대에 전해졌던 서책을 이십세기 초반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계연수라는 분이 다른 책과 함께 묶어서 한단고기로 편찬했다 한다. 물론 이상의 내용에 대해 위작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지만 여러 개의 성립가능한 가설중 우선 되어야 하는 진실이다라는 가설을 취하여~~. 이와 같은 전제권력에 의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작위적 행위의 또 하나의 유력한 예가 지난 김일제 산책때 내가 가설의 하나로 제시한 김부식등에 의한 신라 경주김씨왕조 투후 관련기록 도말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산 검색에 의하여 신라흥덕왕 재위 기간이 829-836 그리고 김부식의 생존기간이 1075-1151 간격이 3백년 정도의 길지 않는 기간이라는 점, 그리고 역사추적에서 제시한 흥덕왕비 파편에서의 태조 성한왕의 기록, 김부식이 신라왕족 경주김씨 후예인 점, 근래 발견된 백제무녕왕(462-523) 지석에서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 삼국사기에는 투후, 성한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등을 종합해볼 때 고려 국가차원의 작위적인 기록 도말켐페인의 개연성이 매우 높다 고 느껴진다. 역사학에서는 자연과학과 달리 이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에 준하여 정설 내지 통설 그 이전 단계인 가설 그리고 가설에 접근 가능한 유력한 관찰단계의 의견의 세 부류로 나누어 본다면 나의 의견으로서는 신라경주김씨 시조가 한 무제 때 흉노족 출신 최고위 신하 김일제 그 7대손 성한왕이고 이는 김알지와 동일인이라는 내용은 통설에 귀속시킬 수 있고 문무왕 비문의 한문필체의 수려함, 비문작성자가 국학소경이라는 직책을 가진 대학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한눌유라는 사실, 신라시대는 중국에서 고도의 성숙 단계 이백 두보 백거이의 당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상당수준 문화가 개화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점, 원궁 상림 금여 등 문무왕 비문의 단어가 실체를 가진 사물을 지칭하여 미화는 다소 되었겠지만 엄연한 역사적 기록이라는 사실 따라서 역사추적에서 성한왕과 김알지가 동일인이라는 설이 대두된다는 설명에서 문무왕비의 설화와 삼국사기에서의 김알지의 설화가 유사하다는 설명중 문무왕 부분에서는 설화가 아닌 기록으로 더 나아가 역사기록으로 표현해야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 되기도 한점, 따라서 도말 켐패인중의 김알지 설화 창작은 문무왕의 비문중의 위 단어를 근거로 하여 창작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성한왕에서 김알지로는 능동적 작위적 역류(신화에서 역사의 일반적 흐름과는 꺼꾸로)라는 나의 의견으로 제시한 내용은 유력한 가설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문무왕 비문에 김일제라는 표현은 없고 투후라는 작위명을 표시한 점으로 보아 성한왕이라는 왕의 칭호가 붙어있는 문무왕의 십오대 선조는 김당의 직계적손으로서 투후국의 최고 지도자 즉 국왕이었으며 이를 지칭하여 한왕 또는 새한(후한)왕이었을 것이라는 내용은 관찰단계이지만 가설에 접근하는 유력의견으로 분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우리들은 먼 옛날 사람은 뭔가 덜 합리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쉬운 경향이 있어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천 삼사백년전이지만 신라시대 때 국가적 노력을 집중하여 한반도 통일 자주 국가를 성취한 자랑스러운 업적을 자자손손 기리고자 하는 사천왕사의 문무왕 공적비를 세우면서 국학소경이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가 작성한 비문이 어찌 엄격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며. 추호라도 미사여구일 뿐인 허황된 내용없는 환상을 그 중차대한 비문에 포함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 함께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그 비문내용의 진정성에 대해 왈가왈부 하기보다 신뢰하여 확연한 역사적 기록임을 전제하고 그 후대에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국가적 강력한 작위에 의해 도말된 역사흐름의 역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 아닐까 .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찰 단계에서의 의견으로 그 정치적 목적이라 함은 고려가 전반기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국시에서 중국 금나라등과 외교노선과 관련 묘청의 반란등 국내적 격동기를 거쳐 신라쪽으로 방향을 옮기는 과정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국론의 통일 또는 외교 정치적인 동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김부식 단독이 아닌 많은 학자들 당대의 대표적 학자 최산보등 공동 작품이고 김부식은 그 대표에 위상에 있었으며 내용중 신라고기 백제고기등 수많은 책을 근거 또는 참조하였다 기록되어 있으나 그 책은 하나도 전달되지 않고 유일하게 삼국사기내용 확인이 가능한 책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성왕부분일부인 점을 감안해보면 묘청의 난 북방 금나라등 격동의 시기에 국론을 통일 정립하고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으며 많은 사료를 한데 묶어 삼국사기로 통합 정리한 후 그 때까지의 많은 사료를 파훼하였을 가능성이 많이 보인다. 일차 의도적 작위행위인 신라김씨왕조 투후 관련 사료 유적 도말행위와 함께~. 그렇다면 한단고기의 삼성기는 당연히 당시의 멸절 대상 고서적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이후 조선조 세조, 예종 조때 또한번 고서 수거령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고성이씨 분의 목숨을 건 용기로 20세기 초까지 숨겨져 전해 왔다면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두번이나 넘겨온 귀중 힌 역사사료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미스터리란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 역사를 포함하여 인류역사에는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깨기 있다. 나는 문무왕비와 삼국사기의 수수깨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흥미가 느껴진다. 그래서 역사산책을 기마민족을 새태마로 선택하여 시작하고자 하였으나 기마민족주제 산책과 함께 이 미스터리 태마산책도 병행 복수태마 산책을 하고자 한다. 왔다 갔다 하면서~~. 이 미스태리란 다음과 같다. 역사추적에서 제시된 성한왕에 대한 유물, 즉 문무왕 사후 약 천사백년후의 현대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문무왕 비, 문무왕 동생 김인문비, 그리고 흥덕왕비 파편, 3개이다. 그리고 약 2백년전 추사 김정희 그리고 실학자 유득공에게 이중 문무왕비문 관련 부분이 포착되어 진지한 연구 태마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흥덕왕으로 부터 불과 3백년 후의 김부식시대에 많은 학자들이 힘을 모아 편찬한 국가적 사업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에 이 성한왕 관련 내용이 깜쪽같이 증발되었을까? 그리고 김부식은 신라 왕족 후예로서 신라김씨 왕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자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으로부터 약 2백년전의 백제 무녕왕의 기록에는 하루의 오차도 허용치 않았던 완벽성을 자랑하는 그 삼국사기가~. 그래서 나는 분명한 모종의 동기로 인한 인위적 역사역류현상이라고 가설을 설정한 뒤 이 명료한 투후, 성한왕의 역사 기록이 어떻게 금상자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어 그 상자를 내려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환상적 김알지 신화로 전환, 신화가 역사로 흐르는 순류와 반대방향의 역류가 생겨나게된 저간의 사정은 무었인가? 자연과학에서 앤트로피 법칙에 따라 무질서를 향한 순류는 자연적인 경향임에 비해 이와 반대방향의 흐름은 에너지의 투입없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역사에서 신화에로 꺼꾸로의 역류가 가능하게 한 에너지의 원천과 실상은 무었일까? 내가 미스태리라고 하는 내용이다. 어쩌면 고려 김부식 전후의 국내외 정치상황이나 고려초 요나라와 고려가 누가 고구려를 계승한 적자이냐 라고 논쟁을 벌였다는 기록등 북방 국과와의 관계등을 검토해 보면 어렴풋이 이 미스태리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 도서관을 찾아 고려사책을 찾아볼 생각이다. 중앙아시아는 4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된다. 가장 북쪽에는 흔히 툰드라(tundra)라고 하는 광막하고 동결된 늪지대가 있고 그 남쪽으로 타이가(taiga)라 부르는 삼림지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삼림지대는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북쪽은 주로 침엽수가 자라고 남쪽에는 주로 낙엽수가 자란다. 타이가 지대의 최남단 부분에는 영농이 가능한데, 이 지역을 보통 흑토지대(black earth belt)라고 부른다. 타이가지대와 스텦지대 중간에는 수림스텦(wooden steppe)이라는 과도기적 지역이 있다. 스텦은 광막하고 거대한 대초원의 연속으로, 홍가리의 평야로부터 중국의 만리장성까지 연속하여 오직 초류만이 성장하기에 적합하다. 스탶지대는 남쪽으로 사막지대에 연결되는데 이 지대 내에서는 오아시스가 있는 소수의 지방에서만이 영농이 가능하다. 이상 4개 지역 툰드라 타이가 스텦 사막은 地帶를 형성하며 홍가리로 부터 중국까지, 북극권에서 페르시아 고원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 연하여 있다. 스텦지대는 몇몇 인류문명의 발상지이지만 그 문명의 주역들이 유목적인 성격 때문에 정착국가들과 같은 사적이나 기록을 많이 남겨 놓지 못했을 뿐 군사적 정치적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현대이전까지 유라시아 대륙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가장 큰 세력은 항상 잘 조직된 유목제국이었다. 중앙아시아 4개지역 툰드라 타이가 스탶 사막 이 모든 지역에는 한가지 공통적인 자연조건이 존재한다. 즉, 기후는 한냉건조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기온의 변화가 극심하여, 1년중 결빙이 되지 않는 기간이 6개월 미만이다. 과거 툰드라 타이가지역에서 거주하였던 소수의 부족들은 수렵과, 생존을 위한 최저한도의 영농과, 그리고 가장 북쪽에서는 馴鹿 목축으로 생활하였다. 이 지역의 생태학(ecology)적 조건때문에 인구는 항상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고 스텦 남쪽 사막지역 역시 오아시스를 제외하곤 당연히 인간 존립조건이 아니므로 오직 스텦지역만이 조직적인 인간사회와 국가가 발달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며 여기에 타이가와 스탶의 과도기 지역인 수림스탶(wooded steppe) 일부가 포함된다. 기마민족의 근거지는 광활한 목초지인 스텦지역이어서 모두 유목에 의존하였고 언저리 지역에서만 수렵과 영농이 어느 정도 행해 졌었다. 사막지대 내의 오사시스를 중심으로 발달되었던 소수의 정착(sedentary)국가들은 스텦지대와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공존하여 영농정착민들은 유목민에게 농산물을 공급하였고 유목민들은 축산물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스텦지역이야 말로 기마민족의 근거지로서 한때 한제국을 압도하였던 신라김씨왕조 시조 김일제의 모국이기도 한 흉노 후일 인류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징기스칸의 몽고제국 등 수많은 민족들이 각축하면서 흥망성쇠의 파노라마를 연출하였던 광활한 무대이었다. 그런데 제일 북쪽 툰드라 지역은 먼 옛날 인류가 발원했다고들 말하는 아프리카에서 빙하기 이후 기온관계로 영농이 불능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먹거리 순록 수렵의 여정을 쫓아 이동하였던 유럽 북구 중앙아시아 툰드라 그리고 당시 대륙간 연결로 아라스카 그리고 북미 남미를 아마존 지역까지 내려가는 도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코스는 험한 산맥과 야수등이 없어 이동이 용이 하였을 법 하기도 하고~~. 언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DNA검사등 과학적인 기법으로 이러한 인류의 이동결로를 추적한 푸로를 본적이 있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서 삼성기 즉 환인 환웅 단군의 나라중 환인의 기원국가가 이 툰드라 동쪽 부분 어디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점점 남하하여 환웅배달국 단군의 아사달나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홍산문화의 뿌리인~.라고 생각해 본다. 조선이라는 어원이 순록을 쫓는 다는 의미가 있다는 설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것과도 연관이 되는 것 같기도 해서~. 순록이야 말로 먼 옛날 빙하기 이후 한냉한 지구환경하에서 인류와 가장 밀접한 그리고 유일한 에너지 공급원 creature이며 산타크로스, 에스키모의 순록 썰매가 그 상징적인 모습이 아닐까? 아뭏든 이 동북툰드라 남쪽 우리 조상 조선 부여 고구려 근거지 서쪽변경과 연결된 가장 기마민족이 융성했던 중앙아시아 지역 흉노등 흥망성쇠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던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조상인 동북아시아 기마민족의 지나왔던 여정이었런지도 모를 중앙 툰트라 빙하 밸트 타이가지역 아래 중앙 아시아 스텦지역의 파노라마를 산책의 기점으로 하고자 한다. 이 스텦이야 말로 막북(고비사막 이북)으로 지칭되는 김일제 흉노족의 발원지이다. 이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란 요 여진 금으로 이어질 테고 어쩌면 그 때 김일제의 성한왕 김알지 역사역류 미스테리의 단서가 혹시 잡힐지~ 한국어는 중앙아시아 민족의 제언어 -주로 튀르크어와 몽고어-와 언어학적으로 동일한 부류(어족)에 속하므로 우리민족의 주류가 북방기마민족으로 임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우리민족의 연원을 추적해 나간다는 것은 지난한 일인데 가장 큰 이유는 기마민족 특성상 사료나 유적을 거의 남기지 않기 때문에 주로 중국의 사서에 의할 수 밖에 없고 이도 충분하지 못한 현실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뭏든 가장 확실한 언어학적 결론에 의하여 중앙및 동북 아시아 스텦제국의 민족들과 깊은 연결이 되어 있음은 명백한 만큼 이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전반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한단고기등 기원 수천년전의 신석기시대 우리 민족의 환인 환웅 단군의 기록이 있으나 그 진위를 둘러싸고 논난이 있고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한 합목적적 위작이거나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어 이 내용을 전적으로 채택할 수도 없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 사료의 진정 개연성도 높지만~. 그래서 꼭 우리민족의 연원을 찾고자 하는 추적의 범위를 넓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중국 서북부 지역까지 포함하는 전체 기마민족을 대상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스텦지대의 가장 주요한 산물은 말이었다. 서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의 종자들에 비하면 스텦의 말들은 외모가 별로 잘 생기지는 못하였다. 서구의 말보다 훨씬 작고 당차게 보이며, 목과 다리는 굵고 피부는 더부룩한 털로 덮혀 있고, 머리는 몸통에 어울리지 않게 크다. 이렇게 외모는 볼품 없지만 강인성과 지구력은 대단하다. 극심한 추위에 잘 견디어 내고, 스텦에서 흔히 일어나는 급격한 온도변화에 잘 적응하며, 어떤 말 종자보다도 수명이 길며, 거의 모든 식물종을 먹고 생존할 수 있으며, 심지어 눈 속을 파해치고 스스로 먹이를 찾기도 한다. 스텦 말의 우수성은 이미 고대로부터 인정 받아왔으니, 해로도투스는 다리우스1세(B.C521-486)의 원정을 기술하는 중에 스키티안의 말들은 항상 적군의 말들을 놀라 도망가게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말은 스텦 유목민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었다. 스텦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승마에 능하였고 기병전에 숙달하였기 때문에 유목민족의 무기와 전술은 말을 타고 기동하며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도록 발전되었다. 따라서 스텦 기병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궁술의 소지자들이 었다. 헤로도투스 후에 근 1700년이 지나서, 명나라 사가들은 몽고민족의 정복이 성공한 이유를 설명하여 <원은 북박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천성으로 승마와 궁술에 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말과 활을 잘 이용하는 이점으로 세계를 소유하였다>고 기술하였다, 13세기 아르메니아의 사가 <아칸츠>의 그리고르는 몽고의 아르메니아 침략사를 저술하고 그 제목을 <궁술의 나라의 역사>라고 붙였다. 우수한 기마술과 궁술은 또한 독특한 전술과 더불어 스텦유목민이 영농정착 국가의 군사들과 전쟁을 수행함에 군사적 이점이 되었다. 기마유목민은 전투에 임하는데 필요한 제반 준비에 항상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술의 가장 큰 특징은 예측불허성과 기동성이었다. 유목민들의 수렵기술은 확실히 전법에 기본이 되었다. 그들은 승리가 확실하지 않는 한 전투에 임하지 않았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만나면 -사실 유목민의 군사들은 대개 수적으로 열세이었다-가능한 한 정면전투를 회피하고 적군을 함정으로 유인하는 계교를 썼다. 가장 잘 알려진 유목민의 전술의 한가지는, 소규모의 선봉부대가 계속 패주하는 듯이 가장하여, 적군을 장기간 추격하여 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적군이 곤핍하였을 때, 유목민의 주력부대가 등장하여 소탕하는 것이었다. 중국 페르시아 기타 여러나라 역사상 장군들은 스텦 기마인들의 교활하고 비신사적인 진행방법, 즉 소위 문명국가라고 자처하는 정착민족 국가들이 설정하여 놓은 전쟁 원칙을 무시하는 스텦 군에 대하여 불평을 토로하여 왔다. 스텦세력이 강성할 때 정착국가의 군사작전은 오직 기습적인 공격에 의해서만 간간히 승리를 흭득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를 위한 자료로서는 문헌 유물및 유적 언어 외형(체형 및 피부색) 그리고 최근에는 DNA 가 있는데 그 중에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이에 대한 탐구에 흥미가 느껴진다. 근대 이전에 스텦지대의 거주인들은 거의 전체가 몽골로이드(mongoloid)황인종이었고 Altai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알타이어족-19세기 말 이후 서구의 학자들에 의하여 선정된 소위 우랄 알타이 어족을 1928년 Gustaf John Ramstedt가 우라 Ural어족과 알타이 어족으로 구분하였다. 후자 알타이어족에는 1.튀르크어군 2.몽고어군 3.만주퉁구스어군이 포함되며 Ramstedt 와 그의 후계자들은 제4의 지파로서 한국어를 포함시켜 왔다.>-이 부분에서 매우 흥미를 느낀다. 즉 알타이 어군은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터키 중부의 몽고 그리고 동부의 만주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듯 3분 되는데 제 4지파로서 한국어가 별도로 분류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어를 별개의 지파로 분류하는 근거등를 통해 우리민족의 독자성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혹시 발견할 수 없을까 도 생각되어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알아봐야겠다. 오직 툰드라지대, 사막지대의 오아시스 그리고 기타 몇몇 고립된 소규모 지역에서만 다른 인종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대체로 툰드라 지대에서는 고아시아어족, 오아시스에는 인도-유럽어족 그리고 몇몇 고립된 지역에는 우랄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을 이용하는 인종들이 거주하였다. <고아시아어족(Paleoasiatic) 또는 고시배리아어족(Paleosiberian)은 소련의 예니세이강 유역, 시배리야 최동부지방, 캄차카반도 및 사하린도 북부지방등에 산재하는 민족들의 언어들로 Gilyak Yukaghir Chukchi Koryak Kamchadal Ket 등이다. 이들 언어들은 상호관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은 현재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언어등과 사라져 버린 고대어 몇몇을 포함하는 어족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Alvanian 2.Balto-Slavic3.Celtic4.Germanic(Teutonic)5.Greek6.Armenian7.Hittite8.Illyian 9.Indo-Iranian 10.Italic11.Thraco-Phrygian 12.Tokharian 우랄 Ural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은 피노.우그리어군과 사모예드어군으로 구분되어, 전자는 핀란드어.홍가리어,에스토니아가 속한다. 핀란드어와 홍가리어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소련내의 소수민족의 언어이다.> 스텦 지대 거주인들의 언어는 대부분 튀르크어족에 속하였고 몽고어족(Mongol)과 퉁구스어족(Tungusic)-주로 오늘날의 만주지역-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 튀르크어는 오랫동안 스텦지대의 국제 공용어이었다. 그러나 스텦 거주민 전체가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단일하지 않았다. 각 부족간에는 상당한 문화적 차이점이 존재하였고,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차이에 가세되어 잦은 전쟁을 유발하였다. 사실 부족간의 무력 충돌과 대영농정착국가 전쟁은 스텦인의 일상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일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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