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자 사망으로 지정 해제
분청은 조선 전기(15~16세기)에 상감청자 장식기법의 전통을 계승하여 회청색의 태토(胎土)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상감하거나 분장(粉粧)한 자기(磁器)로 조선 전기에는 청자라고 불렀지만 20세기 전반에 와서 고유섭(高裕燮:1905~44)이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에서 분청사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여기서 사기(沙器)는 19, 20세기 전반에 일반인이 쓰던 백자들 중에서 비교적 조질(粗質)을 가리키는 '상사기'(常沙器)에서 따온 것으로서 분청사기가 청자에 비하여 조질이 많았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유태(釉胎)나 장식기법에서 14세기의 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이지만, 15세기 중기에 이르면 상감청자의 조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모를 하면서 수요자층이 확대되어 다량생산체계에 들어섰다. 즉 고려 말기에 상감청자 요지는 20여 개소에 불과했지만 조선 전기에 분청사지 요지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2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질적으로도 양질과 조질 등 다양해졌으며, 기종(器種)·시문(施紋)·기법·문양소재 등 다종다량(多種多量) 생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백자란 정제된 백색의 태토(胎土)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長石質)의 투명유를 입혀 1,25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還元燔造)한 자기(磁器)로 사용되는 백토와 유약, 구울 때의 온도와 기타 여건 등에 따라 회백(灰白)·유백(乳白)·설백(雪白)·청백(靑白) 등 발색에 차이를 보인다. 백토를 이용해 기물(器物)을 만드는 것은 이미 중국의 은대(殷代)부터 시작되어 백자는 육조시대(六朝時代) 이후 수대(隋代)를 거쳐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도자생산에 있어서 청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것은 당대(唐代) 형주요(邢州窯) 이후이다. 송의 정요(定窯)를 비롯해 원대(元代)에 이르러 경덕진요(景德鎭窯)가 크게 융성하면서 백자의 생산은 가속화되었고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명(明)·청(淸) 대에는 다양한 채색(彩色) 자기와 함께 백자 중에서도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유명해 우리나라·일본·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 각국에 전래되어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