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부산무형문화재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불화장(佛畵匠)

오늘의 쉼터 2011. 3. 4. 18:12

 


종 목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명 칭 불화장(佛畵匠)
분 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 
수량/면적

개인

지정(등록)일 2008.12.16
소 재 지 부산 북구  구포2동
시 대

대한민국

소유자(소유단체)권영관
관리자(관리단체)권영관
상 세 문 의 부산광역시 북구 문화공보과 051-309-4062

설명

 

불화(佛畵)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예배용·교화용 탱화 제작을 주로 하고 있다. 권영관 불화장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야기부터 끄집어내야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불화를 그리는 불모(佛母) 집안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인 권정두 선생 어릴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사라졌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3~4일 동안 계속 반복됐다. 이상한 느낌이 든 아버지(용성 스님)는 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기림사에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을 모신 전각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들이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이었다. 일단 모른 척했다. 그런데 얼마 뒤 아들이 산에서 파온 황토로 건칠보살좌상을 꼭 빼닮은 불상을 조성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이 가르칠 재목이 아님을 짐작한 아버지는 지인이었던 완호 스님에게 불상을 선보였다. 불상을 본 완호 스님은 당장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고, 아이는 그길로 완호 스님 밑으로 갔다. 아이가 오기 1주일 전 불화를 배우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덕문 스님(홍점석 단청장의 스승)이었다. 두 사람이 완호 스님 밑에서 동문수학하게 된 계기였다.
할아버지의 핏속에서 꿈틀대던 불모의 기운은 아들 4명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맏아들인 권정두 선생을 비롯해 정학, 정진, 정환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걸었다. 서울 관문사 옥불전의 옥불을 조성한 사람이 둘째 삼촌(정학)이고,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상을 조성한 사람이 막내 삼촌(정환)이다. 권정두 선생은 평창 월정사 적광전 석가모니불을 조성했다.
“평소에는 굉장히 온화하신데 작업을 할 때는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셨지요. 선 하나도 헛되이 놓치지 않으셨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정확하게 하시다 보니까…더 오래 사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를 회상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닮으려 했던 건 아니었다. 만화를 좋아해 아버지가 쓰다 버린 붓으로 만화를 그렸다. 핏줄은 못 속인다고 초등학생이 그려서 보낸 만화가 연거푸 세 번 특상에 당선됐다. 선물로 당시 귀하디귀한 파일롯트 만년필이 왔다. 제자로 받아 줄 테니 서울로 올라오라는 편지도 함께였다. 언감생심 혼자 서울에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재미있던 만화가 시들해졌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불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아버님은 불화를 해라, 마라, 이런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니 한번 그리볼래’하면 불화의 기본인 주색(朱色)을 넣어보고 그랬지예. 그라다 한번씩 ‘니가 보기에 결점이 뭐고. 한번 찾아봐라’ 그러시기도 하고. 어린 마음에 처음에는 똑같은 걸 반복해 그리는 것 같아서 ‘이걸 그림이라고 그립니까’라고 하니까 씩 웃으시고 아무 말씀 안하시다가 ‘그럼 니가 한번 그리봐라’라고 하시기도 했지예.”
불화 자체가 생활이었던 그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다. 삼촌들의 권유로 불교미술대전에 작품을 출품해 우수상, 최고상을 받다가 74년 ‘석가모니 후불탱화 영산회상도’로 덜컥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나이 22살 때 일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집안에서 불교미술대전 대상은 별 것 아니었다. 둘째 삼촌이 1회 대상을 수상한 이래 막내 삼촌이 3회와 4회 연거푸 대상을 받았고, 그가 5회 대상을 받았다. 즉 권씨 가문이 불교미술대전 1회에서 5회까지 한차례만 빼고 대상을 휩쓴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 오사카 금강사 괘불 조성, 김제 금산사 미륵삼존 대불 개금불사, 부산 범어사 아미타후불탱화 조성, 단양 구인사 삼존불 개금 및 목탱화 채색, 부산 삼광사 지장전 시왕상 조성, 봉화 축서사 석채후불탱화 조성 등을 했다.
불화(佛畵)란 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당시에도 불화가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불화는 불교의 이동경로에 따라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 쿠처의 키질 석굴, 둔황의 막고굴, 난주의 병령사 석굴, 천수의 맥적산 석굴 등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 한국으로 건너온 불화는 현재 18~19세기에 조성된 것이 주로 남아있다.
불화는 용도에 따라 장엄용ㆍ교화용ㆍ예배용으로 나뉜다. 장엄용은 주로 사찰을 장엄하기 위한 것으로 단청도 여기에 해당된다. 교화용 불화의 대표적인 것으로 경변상도(經變相圖)가 있고, 야외 법회 때 걸어두는 괘불은 예배용 불화라고 할 수 있다.
불화를 주제에 따라 영산회상도, 석가팔상도, 비로자나불화, 아미타불화, 약사불화, 지옥계 불화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이외에도 53불화ㆍ천불화ㆍ관음보살화ㆍ칠성도ㆍ산신도ㆍ나한도ㆍ조사도 등이 있다.
불화는 밑그림(초본) 그리기→바탕재료 만들기(견 잇기, 배접하기, 교반수 올리기)→등 긋기(상초)→채색하기(착색하기, 바림질하기, 문양그리기, 금박 입히기, 윤곽선 그리기)→쟁틀 짜기 등의 순으로 제작된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상호지예. 사람도 첫인상이 중요하다 아입니까. 상호는 그냥 사람 인상으로 그려서 되는 게 아이고, 32상 80종호에 맞차 그리야 됩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탱화를 봤을 때 뭔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최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예. 그런데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못 그린 거 같습니다.”
불화를 그릴 때 바탕감인 천을 비롯해 종이, 안료, 교착제, 붓 등이 필요하다. 요즈음은 화학안료를 많이 쓰지만 그는 천연 석채(石彩)를 고집한다.
“왜 석채를 쓰느냐. 부처님을 장엄하는데 최고의 재료를 써야 될 거 아입니까.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작업을 해도 내구성이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면 반감되는 거니까. 불화를 통해서 우리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남기는 건데, 재료 하나라도 쉽게 써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채색을 할 때는 불화에서 가장 많이 들어가는 색깔부터 칠한다. 탱화의 경우 주홍색이 가장 많이 들어간다. 그는 원석을 쇠 절구통에 넣고 곱게 빻은 후 수비(水飛)해 채색안료로 사용하는 석채기법으로 채색한다. 바탕칠이 끝나면 붓과 물로 안료의 농도를 조절(바림질)해 평면을 입체화하는 등 연출을 극대화하고 색선으로 문양을 그린다. 필요한 부분에 금박을 입히고, 먹으로 윤곽선을 그려 마무리한다.
천연 석채가 좋은 줄 알지만 문제는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불화를 그릴 때만해도 국내에서도 나오는 곳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경주 감포쪽에 뇌성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거기에 은은한 초록색이 도는 뇌록색(磊綠色) 돌이 있었다. 예전에는 단청을 하면 그것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채색을 했다.
“구십 몇 년인가 중국 베이징미술학원에 제자가 있어서 거기 노교수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거 가니까 원석 작업도 하고 그러더라고예. 그래서 석채를 좀 팔아라고 그랬는데 안파는 거지예.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없는 돈에 빌리가 석채를 많이 구입해놨습니다. 그 뒤에 중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사람한테 부탁해 석채를 구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없데예. ‘왜 없나’ 그라니까 ‘원석이 떨어져서 없다’ 그래예. 지금 고비입니다. 옛날에 구해놨던 그거 가지고 사용을 하긴 해야 되는데.”
“처음에 했던 게 습이 배이가지고 기도하는 마음 그게 지속되는 것 같애요. 그래서 대충대충 이런 건 절대 없고, 끝까지 하나하나 한부분도 놓치면 안 된다 이런 거.”
이런 습이 배인 동기가 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쓱 지나가면서 ‘시시하게 얄궂게 그릴라하거든 함부로 이런 일 하지마라’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작품을 해가지고 점안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모셔노면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공을 들이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한부분이라도 헛되이 그릴 수 있겠습니까. 정신을 듬뿍 담아가 해야지예.”
그는 요즘도 한 번씩 아버지의 작품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그야말로 정성이 듬뿍 담겨진 게 보인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번쩍번쩍 든다. 엎드려서 하는 작업이다 보니 오래 하면 어깨부터 허리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러면 자연 방심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작품을 보고 정신을 차린다.
동국대 불교예술대학원 불교미술 최고지도자 과정을 수료한 그는, 1998년부터 일주일에 한번 동방불교대학에 출강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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