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도동 삼성혈의 신화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주산(主山)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동시(同時)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양(良), 고(高), 부(夫) 삼신인(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하여 삼성혈(三姓穴)이라 하며 3개의 지혈(地穴)이 있다. 이 신인(神人)들을 이름하여 을나(乙那)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옥함(玉函)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고 자색(姿色)이 출중하고 품질(稟質)이 단아(端雅)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정제(整齊)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사자(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 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자소각(紫宵閣)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신인(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삼신인(三神人)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공주(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그래서 자주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흔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연흔포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
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 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했다.
혼인지
그 활 쏘은 지역을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삼사석(三射石)이라 하
는데 조선조 영조 11년(서기1735) 김정목사가 삼신인의 활 솜씨를 경탄하여 기념코자 『삼사석(三射石)』이란 비를 세우고 비면에 시를 지어 추모하니 기념물로 지정 보
호하고 있다.
사시장올악
그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를 받았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고 소규모나마 물물을 교환하는 해상교역 활동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후 수천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 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
삼사석
그래서 이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삼을나(三乙那)왕께서 용출(湧出)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 또한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오거나 빗물이 수없이 내려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면면이 이어온 수백년된 고목들도 모두 다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들을 팔벌려 감싸 안고 있다.
삼성혈에 처음 설단하여 치제한 때에는 서기 1526년(중종21) 이수동목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제주목사가 홍문과 표단을 설치하여 봉향하였으며 특히 유교국시의 조선조에 와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존숭치적으로 더욱 신성시하였다. 1785년에는 정조대왕이 “삼성사(三姓祠)”라는 편액을 친히 하사하시어서 왕(王)에 대한 예우로써 국제(國祭)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 삼을나(三乙那); 고을나(高乙那) 제주고씨(濟州高氏), 양을나(良乙那) 제주양씨(濟州良氏, 신라시대에 梁으로 바꿈), 부을나(夫乙那) 제주부씨(濟州夫氏)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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