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유와 아내 강씨
▶ 공민왕10년 10월, 홍건적이 고려로 침입해왔다. 홍건적은 개경으로 입성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이며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횡포가 극심하였다.
당시 이조 고지기라는 창고관리를 하는 하급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보기 드문 미색이었다. 그의 아내 강씨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으나, 마음과 행실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편 하상유가 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가정은 그런대로 평온을 유지하였다.
▶ 그런데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자 이 가정의 평온도 곧 깨졌다. 하상유의 동료중에 난봉꾼 김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하상유의 아내에게 음흉한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강씨가 약만 올리고 있어 속이 뒤틀려 있었다. 그런데, 김씨는 홍건적에게 아부하며 일신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홍건적의 우두머리인 장해림에게 강씨가 개경 제일의 미인이니 그녀를 취하라고 부추겼다.
장해림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절에 들어가 사미승으로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홍건적에 가담하여 지금은 그중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절에 있었을 때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런데 그는 다른 동료들처럼 술독에 빠져 살거나거 거칠게 행동하지도 않았지만 여색을 밝혔기 때문에 김씨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장해림의 부하들이 끌고 온 여자는 숯검정을 묻힌 더러운 여자였다. 장해림은 실망하여 김씨를 나무랬지만, 얼굴을 씻긴 후 진짜 모습을 보니 상당한 미인이엇던 것이다. 장해림은 김씨에게 상을 후히 주고 그 여인을 값진 물건과 부드러운 태도로 달래어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
▶ 고려군의 반격이 거세지고 포위망이 좁혀오자, 홍건적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전리품들은 챙겨갓다. 장해림도 강씨를 데려갔다. 강씨는 머나먼 북국으로 가서 장해림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녀는 처음엔 고향땅을 생각하며 눈물 짓곤 하였는데, 차차 빠듯하고 궁핍한 개경에서의 생활보다 괴수의 아내 삶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고려인의 행색을 한 낯선 남자가 홍건적 본거지로 찾아와 강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강씨는 이 소식을 정찰대에게서 듣고는 죽이라고 하였으나 부하들은 멋대로 일을 처리하엿다가 우두머리에게 책임추궁을 당하는 것을 꺼려 그를 장해림의 앞으로 끌고 갔다. 장해림은 그를 보며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하상유는 자신을 소개하고 부인을 찾아 그 머나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장해림은 부하를 시켜 강씨를 그 현장으로 데려오게 하였지만, 강씨는 핑계를 대며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끌려나오다 시피한 강씨는 그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쌀쌀맞게 대했다.
장해림은 강씨에게 의향을 물었지만, 강씨는 냉정하게 옛지아비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은 하상유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해림은 일어나 장검을 뽑았고, 하상유에게 이제 사태 파악이 되었을 것이니 마지막 말은 없는지 물었다. 하상유는 고요히 눈을 감으며 죽음을 기다렸는데, 장해림의 칼은 예상외로 강씨를 찌르고 하상유를 묶은 끈을 끊었다.
▶ 장해림은 “ 내 비록 그렇게 많이 배우지는 못했고 거침없이 살아왔으나 사람의 도리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환란을 당해 어쩌다 당신 아내가 내 계집이 되긴 했으되 사람인 이상 옛 남편에 대한 정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할 터... 그런데 목숨걸고 이 머나먼 길을 찾아온 사람에게 감동하기는커녕 죽이라고 하는 저 악독한 계집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소.
내일이면 또 다른 사람을 위해 내죽음을 바라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까. 이런 여자는 살아있어도 해악만 끼칠 뿐이니 내 생각해서 처치하였소. 그러니 마음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 새삶을 사시오.”
그리고는 하상유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