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인천기념물

시도기념물 제58호 (서구) 허암 정희량 유허지(虛庵 鄭希良 遺虛址)

오늘의 쉼터 2010. 10. 14. 19:16

 

종 목 시도기념물  제58호 (서구)
명 칭 허암 정희량 유허지(虛庵 鄭希良 遺虛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생활유적
수량/면적 1,168㎡
지정(등록)일 2009.03.02
소 재 지 인천 서구  검암동 산61-5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해주정씨종중
관리자(관리단체) 정웅섭
상 세 문 의 인천광역시 서구 문화공보실 032-560-4343
 
일반설명
 

조선 연산조때 학자이고 문신인 정희량(鄭希良)이 일시 은거하던 옛암자터 인데, 검암동 허암산(庵山)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에는 겨우 터전만이 확인될 따름이다. 정희량(鄭希良)의 본관은 해주(), 자는 순부(), 호는 허암(). 1492년(성종 23)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후 검열()이 되고, 1497년 대교() 때 왕에게 경연()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이듬해 사가독서()하였으나 이해 무오사화()로 의주()에 유배, 다시 김해로 이배()된 뒤 1501년 풀려났다. 모친상으로 수묘()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갑자년()에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밝았으며, 문집에는 <허암유집>이 있다. <부평부읍지>고적조에 <허암구지는 모월곶면 허암산 밑에 있는데 한림학사 정희량(鄭希良)이 복거하면서 호를 허암()이라 하였으나 뒤에 자취를 감추어 끝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에 정희량(鄭希良)의 호 허암()은 허암산(庵山)에서 취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는 글을 잘 지어 명성을 날렸고 특히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성종이 돌아 가셨는데 허암()은 복을 입고 성균관 유생들을 거느리고 '성종을 위하여 불사를 한다'고 글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이 문제가 되어 귀양보내 졌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정희량(鄭希良)은 심성이 강직하고 영달하는 마음이 없었고 문장과 시에 능하고 음양학에도 밝았다. 정희량(鄭希良)이 김포 강변에서 자취를 감출때 감긴 시가 전하여지고 있다. 그시에 적혀있기를 "해저믄 강상에 찬 물결 절로 이는데 쪽배는 이미 강가에 대어 있으되 밤사이 풍랑은 사납겠구나." 하였다. 그는 또 가천 원벽에다 써 놓기를 "새는 무너진 담구멍으로 보고 중운 석양에 샘물을 길네. 산과 물을 집으로 삼는 손님의 천지는 어디가 끝인고." 하였다. "어제 분 비바람에 놀라, 문명한 이때를 저버렸네. 괴로울지라도 간에서 놀고 있으니 시끄러움이 싫어도 시조차 짓지 않으련다." 이행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시를 보고 허암의 시임에 틀림없다고 물으니 헌누더기를 입은 중이 조금전에 이곳을 지나갔다고 대답하였다. 일찍이 음양학에 정통한 그는 장안에 소문난 점쟁이들을 찾아가 점도치고 대화를 나누어 본 뒤 주부 오순형을 빼고는 전부 엉터리라 했다. 그는 또한 축지법에 능하여 어릴 때 그의 부친이 강원도에서 고을살이를 했는데 그 어느날 저녁을 먹고 나서 어머니 보고 "아버지 좀 뵙고 오겠습니다."하고 떠났는데 불과 몇 시간 후에 부친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와서 그 어머니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지금 검암동에 많이 살고 있는 해주정씨는 허암() 정희량(鄭希良)의 아우 정희신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정희량(鄭希良)의 후손들이 함경도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것으로 보아 그때 허암()이 함경도 두메산골에 은둔하여 지낸 것으로 여겨 진다.

 

 

 
 허암 정희량 유허지

 

 허암 정희량 유허지

 

허암 정희량 유허지

 

 

허암 정희량 유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