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인천기념물

시도기념물 제56호 (강화군) 정제두묘(정제두묘)

오늘의 쉼터 2010. 10. 14. 10:46

 

 

종 목 시도기념물  제56호 (강화군)
명 칭 정제두묘(정제두묘)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수량/면적 3900㎡
지정(등록)일 2007.02.2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정시종
관리자(관리단체) 정시종
상 세 문 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일반설명
 

정제두(鄭齊斗)(1649∼1736)(인조27∼영조12). 조선 중기의 유학자. 강화학파의 비조.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정상징(鄭商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서울 반석방에서 출생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 이상익문하에서 처음으로 글을 배웠다. 어려서 이상익(李商翼)에게 배웠고, 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다. 윤증(尹拯)에게도 배웠으며, 최규서(崔奎瑞)·최석정(崔錫鼎) 등과 사귀었다. 1668년(현종 9)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무렵부터 공소(空疎)에 빠진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陽明學)에 심취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4년 공조정랑을 잠시 지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자 중신들이 다투어 천거하여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1689년 안산(安山)에 옮겨 살았는데, 이때 양명학(陽明學)에 더욱 몰두했다. 이 시기에 저술된 학변(學辨), 존언(存言)에는 양명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심성학(心性學)이 심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1709년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 살았으며, 숙종 때 호조참의·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성균좨주에 임명되었다. 1726년 이정박(李廷撲)이 그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우참찬,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設), 존언(存言), 서(書), 성학설(聖學說), 대학설(大學說), 중용해(中庸解) 등이 있다. 묘비는 순조3년(1803)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신대우가 짓고  서영보가 썼으며, 정제두(鄭齊斗)의 조부 도촌(陶村) 정유성(鄭維城) 선생의 묘와 아버지인 정상징(鄭商徵)과 그의 부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의 합장묘가 있다.

 
 
 

 정제두묘

정제두묘

 

 정제두묘

 

 정제두묘

 

정제두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