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용서
싱그러운 오월 연초록 나뭇잎 피어나는 숲길을 걷노라면
설레는 가슴으로 교직을 시작했던 총각 교사 시절이 생각난다.
며칠 후면 제29회 스승의 날이다. 3
7년 동안 외길 걸어온 교직을 정년한지도 벌써 8년이 되었다.
참으로 세월이 살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살아 온 길을 되돌아보니 후회되는 일과 보람된 일들이 흑백 영상처럼 스쳐간다.
5년 전 오월 스승의 날 50대 중년의 사업가 사장이
교육청 은사 찾아주기 인터넷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 찾아 왔다.
66년 대전에 모 중학교 다니던 제자 김 석훈(가명)입니다.
단둘이 만난 식당에서 큰절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생각이 났다.
“혹 자네 고향이 금산군 추부면이 아닌가?” 물었다.
“예! 선생님 맞습니다.”
“ 저를 기억 하시는 군요.”
“이렇게 찾아 주어 반갑네.”
“선생님 이제야 찾아 온 것을 용서해 주세요.”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마신 뒤 잔에 술을 딸아 주었다.
김 군이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총각교사로 기숙사에서 숙식하는 관계로
남자 사감이었다. 김 군은 늦게 학교를 다녀 나이가 많았다.
기독교 학교로 전교생 3학급 남녀 130여 명 교사 10여 명 되는
대전 변두리 작은 학교였다. 기숙사생이 남녀 30여명으로 기억한다.
김 군도 기숙사생이었다.
기숙사생들은 주로 방학이나 주말에 집으로 갈 수 있었다.
5월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로 기억된다.
남학생 3명 여학생 5명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 여자사감 선생님이 세면장에 벗어놓은
시계를 잃어 버렸다.
당시만 해도 시계가 비싸 시계를 차고 다니는 학생이 없었다.
나는 학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시계를 가져간 학생은
선생님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 외출했다가 오후에 기숙사에 들어 온 나는
교무실과 교실을 돌아보았다.
나의 책상 서랍에 종이에 싸인 시계가 있었다. 시계 포장지가 생물 노트였다.
노트 필적을 조사해 본 결과 이 영훈(가명)군의 노트였다.
김 군은 이 군과 같은 방을 썼다.
나는 직감에 김 군의 소행으로 짐작했다.
시계를 갖다놓은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친구에게 누명을 씌운 행위를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김 군을 저녁 식사 후 기숙사 뒷산으로 불러 ]
“네가 시계를 갖다 놓았지.”하며 다그쳤다.
“안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하고 딱 잡아떼었다.
화가 난 나는 종아리를 쳤다.
“비겁한 놈아 친구에게 누명을 씌워.”하며 호통을 쳤다.
극구 부인하던 김 군이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는 김 군을 끓어 안고 시계를 탐한 것도 나쁘지만 친구에 누명을 씌운 것이
더 나쁜 짓임을 타 일었다. 김 군도 울고 나도 울었다.
결국 김 군은 자책감에 몇 개월 후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학교를 그만 두었던 김 군이 김 사장으로 찾아와 그동안의 삶을 고백했다.
학교를 그만 둔 후 트럭 조수로 일을 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고입 검정고시 통신 강의록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월급은 저축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를 해 고입 대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제대 후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트럭 한 대를 샀다.
모래를 운반하는 사업으로 해마다 차량을 구입해 수십 대를 운행했다.
늦게야 야간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은 대전의 모 건설회사 대표가 되었다.
저를 용서해 주고 등을 두드려 사랑해주신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교직의 보람과 용서의 힘이 위대함을 깨달았다.
<소설가 김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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