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세상사는이야기

내 고향 시골 5일장

오늘의 쉼터 2010. 5. 10. 08:09

    내 고향 시골 5일장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 기억 속엔 지금도 추억의 5일 장터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던 고향에도 매 5일마다 병영장이라는 5일장이 열렸었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장삿꾼들과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는데 면 소재지 중심부를 유유히 흐르는 실개천 상단을 가로질러 세류교 다리가 있었고 다리를 바로 건너, 경사진 내리막 길을 내려가면 여기서 부터가 장터였다. 장터 내리막 입구엔 당시, 나무장사들이 평소 산에서 나무를 해 두었다가 장이 서는 날에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모여 나무를 내다 팔았다. 이 나무전에는 당시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주로 이용했던 나무지게에다 나무를 한 짐씩 가지런히 묶어 얹어 놓고, 길 양쪽에서 구입 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터 어귀를 들어서서 우측으로 약 5m쯤 꺾어 돌면, 군부대 연병장만큼 넓이의 공터가 있었는데 이 공터를 고향 사람들은 "가축전 머리" 라고 불렀다. 이 가축전에는 소, 개, 돼지, 염소, 토끼등, 집에서 기른 가축들을 내다 팔기 위해서 목이나 다리에 새끼줄로 꽁꽁 묶어 나와 가축들의 우짖는 소리에 온 장터바닥이 시끌벅쩍 하였다. 장터 크기는, 면단위 장터치고는 다소 큰 편에 속했는데 장이 서는 날이면, 다른 인근지역의 5일장들과 마찬가지로 널따란 차일밑에 생선, 과일, 신발, 옷가지등 어지럽게 벌려놓은 전들이 시골 5일장 풍경의 생동감을 물씬 풍겨 주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5일장은, 꼭, 필요한 물건만을 내다 파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주변 이웃마을 사람들과 매 5일만에 장터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살피고, 경조사도 알아보는 등 상호간의 친교와 정보 나눔터의 기능까지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장터에서 구경꺼리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장터 한쪽 모퉁이 공터에서 마당놀이로 벌어졌던 약장수들의 판소리 즉석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흡사 호랑이 탈을 방불케 하는 짙은 분장에 신명난 굿거리 장구가락에 맞추워서 허스키한 고성으로 춘향가, 흥부놀부가, 심청가 등으로 흥을 돋구었는데 그 중에서도,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간 효녀딸 심청이를 목놓아 부르며 찾는 대목에선 장터 공연장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로 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께 앵콜이 계속 터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마트나 할인매장의 풍경은 어떠한가? 수레가 차고 넘치도록 많은 물건을 싣고, 계산대 앞에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삶의 생동감 넘치는 느낌은 들지 않고, 냉엄하고 각박한 느낌만 드는것은 무슨 까닭일까? 또한, 대형마트나 할인매장의 기세에 밀려 그 자취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내고향 시골5일장 추억을 생각하면 소중한 우리 고유의 것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어 아쉽고 서글프기만 하다. <수필가 김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