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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매듭

오늘의 쉼터 2010. 4. 21. 07:36

    삶의 매듭 며칠 전 저녁상을 마주한 식탁에서 아내가 정색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손자 이야기 말고는 별것 아니리라 생각되어 건성으로 눈을 마주했다. “여보! 나 조금 전에 둘째 딸 만나고 왔어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기에 만나지 못하는 날은 전화를 자주 한다. 그래서 나는 “아! 그랬어요.” 하고 밥술을 뜨며 대꾸 했다. 그런데 아내는 심각한 얼굴로 큰일을 한 것처럼 한숨으로 말의 매듭을 푼다. “오래전부터 당신이 둘째 종아리 흉터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고 했지요.” “응,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음 말이 궁금했다. 아내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동안 생활비를 쪼개 적금을 들어 만기 된 목돈을 들고 다리 흉터 성형 수술하라 갖다 주었어요.” 나는 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멍 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여보! 고맙소. 수고했어요.” 격려를 했다. “그런데 엄마! 다 잊고 살았는데... 하며 돈을 안 받겠다고 웁디다.” 가슴 깊이 박힌 못이 빠지는 듯 목울대가 올라오며 아내와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아내나 아이들이 이 글을 읽으면 집안의 부끄러운 이야기로 나를 원망하겠지만 누구에게나 삶의 한을 풀지 못한 매듭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소개한다. 지금부터 41년 전 1969년 2월 둘째 딸이 태어났다. 결혼 3년째 되는 해였다. 맏형의 건축 사업 부도로 천석지기 전답 빚으로 넘어가 가세가 어려웠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내를 맞아 서울 을지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대전 변두리 학교 앞 주택에서 단칸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많지 않은 봉급이지만 두 딸을 키우며 행복한 생활로 안정이 되었다. 학교 운동장 확장 공사로 산에 나무를 베어 내는 개간 공사를 했다. 그래서 베어낸 나무를 화목으로 쓸 수가 있었다. 재래식 온돌로 아궁이에 나무를 때 난방 취사를 했다. 퇴근 후 시간이 나는 대로 나무를 베어 장작을 추녀 밑에 쌓았다. 그런데 큰딸 3살 작은 딸 1살 백일 지날 무렵 아궁이에 불을 너무 집혀 잠을 자던 둘째 딸 종아리가 맨 장판에 화상을 입었다. 당시에는 불그스레해 대단치 않은 것으로 생각해 화상 연고만 발라 주었다. 귀저기를 갈아 줄때마다 말 못할 아픔이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흉터이지만 무보의 실수로 가슴이 아팠다. 누구보다도 내가 10살 때 세 차례 우측 다리 수술로 생긴 정강이 흉터 때문에 난 평생 한여름 무더위에도 반바지를 입어 보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한 흠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딸의 종아리 흉터에 대해 더욱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좀 더 의술이 좋아지고 형편이 나아지면 성형 수술을 해 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여자의 미모 중에 예쁜 다리는 아름다움의 생명과 같은데 자라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생각할 때마다 한이 되었다. 아내가 돈을 갖다 주었더니 “엄마 아빠가 염려하는 것처럼 난 걱정하지 안했어요.” 하고 위로 하는 말에 하늘이 누르는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 결혼 전 압구정동 회사에 근무할 때 성형외과에 찾아가 의사와 상담한 결과 별로 표가나지 않으니 수술하지 말라고 했단다. 오히려 수술 후 더 나쁘게 될 확률이 높다고 해서 하지 안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돈을 받지 않겠다고 엄마 아빠 여행비로 쓰라고 .... 아내는 네가 꼭 필요할 때 비상금으로 쓰라고 놓고 왔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저녁 식사 후 베란다 창문을 열고 손에 잡힐 듯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가슴을 열어 깊은 심호흡으로 가슴에 맺힌 한의 매듭을 풀어 날려버렸다. <소설가, 시인 김용복> **************************************** 가족 여러분... 부모와 자식 사이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기에, 우리는 서로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호흡하고 있지 않을까요? 다가오는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정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가족에게 전화하는 화요일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