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삼국을 통일한다
후백제, 고려, 신라 중에서 초기 주도권은 후백제에 있었다.
당시 고려는 후백제에 비해 군사력이 열세였으며 경상도 일대의 조그만 소국으로
전락한 신라는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잔명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후백제는 우선 신라를 통합한 다음 고려와 대결하여 이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920년 10월 후백제군은 신라의 대야성(합천) 구사성(경주 부근)을 점령하고
진례성(김해)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고려는 신라의 요청으로 구원을 파견하여 공산(팔공산)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925년 고려군은 조물성(경북 의성부근)에서 후백제군에 첫 공세를 가하였으나 쌍방은
격전 끝에 볼모를 교환하고 일시 강화를 맺었다.
927년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신라의 수도 경주로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운후 많은 재물, 무기와 함께 왕족과 대신들, 수공업자를 납치하여 데리고 왔다.
보복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왕건이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공산의 동수(대구 지방)에서 격렬하게
싸웠으나 후백제군의 포위에 빠져 신숭겸 이하 많은 병사가 죽고 왕건 자신도 겨우 탈출하는
커다란 패배를 당하였다.
928년 7월 왕건은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하였으나 이 때에도 고려군은 패하였다.
그러나 930년 1월의 고창군(안동) 병산 전투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병산 전투에서 고려군은 8000명의 후백제군을 살상, 포로로 잡고 일대의 30여 성을 장악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병산 전투의 승리 후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동요하던 많은 지방 세력들이 고려에 복속하였다.
고려의 우세가 점점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후백제 지배층에 내분이 발생하였고,
급기야935년 6월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견훤이 10명의 아들 중 넷째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첫째 신검,
둘째 양검, 셋째 용검 등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어 버렸다.
견훤이 투항을 요청하자 왕건은 그를 '상보'라 부르고 많은 노비와 함께 양주를 식읍으로
주는 등 극진히 환대하였다.
견훤의 투항 이후 신라도 자진하여 투항을 결정하였다.
935년 11월 경순왕은 그 대열이 30리에 달하는 수래에 금은 보화를 싣고 귀족 관리들과
함께 정식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조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최후 결전은 936년 9월 일리천(경북 선산)에서 있었는데,
10만에 달하는 고려군은 후백제군 8900여명을 물리치고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신검은 양검, 용검 등 자신의 아우들과 함께 문무 관료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에 이어 후백제도 무너지고 고려는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후백제, 신라의 영토와 주민은 물론이고 발해 유민, 나아가 일부이기는 하지만
대동강과 청천강 유역의 고구려 옛 영토를 회복한 고려의 통일 국가 수립이었다.
통일 국가 고려의 출현은 나라의 통일적 발전과 함께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루어진 민족의 단합은 나라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강화되는 중앙 집권 통치
고려의 건국자 왕건은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정식 왕비만도 6명, 후궁은 24명이나 되었다.
그러면 왕건은 왜 이처럼 많은 부인들을 거느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호족들의 연합에 기초한 고려 성립과정의 특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려 건국의 주도 세력은 지방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경제적 토대와 군사력을 지닌 채 각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권의 지방 침투는 매우 어려웠다.
중앙 정부는 여러 공신들을 각자 출신 지방의 사심으로 삼아 이들에게 부호장 이하의
향직에 대한 임명권을 주고 그 지방에 대한 통치를 위임하는 사심관 제도, 유력한 호족의
자제를 수도로 불러들여 그 지방의 이를 논의하며 고문 겸 볼모로 머물게 한는 其人 제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은 유력한 호족 세력들을 적극 끌어들이고 포섭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사용한 수단이 바로 혼인 정책,
즉 정략 결혼을 통한 호족 포섭 정책이었다.
따라서 왕건이 거느린 많은 부인들은 역설적이게도 고려 초기의 왕권이 그리 강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사실 왕건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혜종이 외척 세력의 암살 음모 속에서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뒤를 이은 정종 역시 왕위에 오른지 4년 만에 죽는 등 고려 초기의 왕권은 상당히 허약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의 수립은 매우
절박한 과제였다.
중앙 집권 체제의 수립을 위한 고려의 노력은 광종(945-975)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광종은 우선 개별 봉건 세력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양인 농민의 신분을 되찾아 주기 위한
노비 안검법(956)을 실시하였다.
노비 안검법은 이른바 개국 공신들과 대관료들의 경제적 토대를 약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제정 토대를 튼튼히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종은 또 관리들의 공복을 제정하고(960) 958년부터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 역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과거 제도를 실시한 이후에도 개국 공신이나 왕족의 후예, 고위 관리의 자제들에게
시험없이 벼슬을 주는 蔭敍-문음이라고도 함-제도가 여전히 존속하였기 때문에,
왕권 강화의 견지에서 볼 때 과거 제도의 실시의 의미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한 광종은 961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궁과 수도를 크게 건설하였다.
나아가 광종은 960년대 이후 왕권을 위협하는 일부 개국 공신들과 외척 세력들을 대거 숙청
하였다.
<고려사>는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개경과 서경의 고위 관료들 중 절반이 처형되었으며
오랜 대관료들 가운데서 살아 남은 자가 40여 명에 불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광종 연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착수된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 수립 노력은
성종(981-997)대에 일단 결실을 맺어 그 기본 골격이 마련되었다.
그 후 거란과의 전쟁 시기인 목종(997-1009)연간을 거쳐 문종(1046-1083)대에 이르러
고려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는 완성되었다.
고려의 정치. 군사. 토지 제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련된 고려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고려의 중앙 통치 기구는 3성 육부제에 기초하였다.
3성은 중서성, 문화성, 상서성인데 중서성과 문화성은 밀접히 결합되어 하나의 기구처럼
활동했으므로 합쳐서 중서 문화성이라고도 불렀다.
중서 문화성은 최고의 정치기관이었으며 그 책임자는 문하시중이었다.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로 구성된 6부는 상서성 소속으로서 실제 행정을 분담하여
집행하였다.
이 밖에도 왕명의 출납과 군사 기밀을 맡아 보는 중추원, 풍기 단속과 감찰을 담당한 어사대,
화폐와 곡식의 출납 및 회계를 맡아 보는 삼사 등이 있었다.
국가의 최고 회의 기관으로는 중서 문화성과 중추원의 고관으로 구성되는 도병마사가 있어
국방 문제 등 국가의 중요 정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임면, 법제의 개폐와 관련하여 언관이 서경하고 간행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지방의 할거 세력들이 여전히 각 지역을 장악.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의 지방 통치
제도는중앙 통치 기구보다 훨씬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비되었다.
고려 중앙정부는 성종 2년(983)에 최초로 본격적인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 때 중앙 정부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각 목에 절도사와 함께 2-3명의 관리를 배치하였다.
그 후 고려의 지방 통치 제도는 수차례의 개편 과정을 거쳐 12세기 초 5도 양계 체제로 확립
되었다.
동계와 북계의 양계는 북방의 외침을 막기 위한 군사 행정 구역으로서, 양계에 병마사를 두었다.
그리고 도에는 안찰사를 두었으며 그 밑에 주, 군, 현을 설치하여, 주와 군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고 또한 현 밑에는 촌이 있었다.
현까지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현도 많았다.
지방관이 파견된 현을 주현, 파견되지 않은 현을 속현이라 하였다.
고려 중기까지는 속현의 수가 주현보다 많았는데, 중앙의 행정 명령은 주현으로 내려가고
속현은 주현을 통하여 명령과 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주현이든 속현이든 지방 행정의 실무는 그 지역에서 우월한 경제 기반을 가진
유력 가문 토착 세력(향리)이 담당하였다.
이 밖에 양계의 군사적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으며, 천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향, 소, 부곡과 같은 특별 행정 구역도 있었다.
지배 체제 유지의 기본 수단이자 외적 방어의 무력 수단인 군사제도는 10세기 말-11세기 초,
대체로 거란과의 전쟁 시기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고려의 군제는 중앙군과 5도 양계의 지방군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중앙 군은 2군 6위로 구성 되었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서 국왕의 친위군이었고,
좌우위, 신호위, 홍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의 6위는 수도 방어가 그 기본 업무였다.
고려는 16살 이상 60살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가 병역을 지는 부병제를 실시하였다.
고려는 중앙 집권력이 가장 강하였던 시기에 약 10만명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였고
유사시 30만 명 정도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병제하에서 병역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병역 대상자 본인들이 부담하여야 했기
때문에 양인 농민들에게 병역은 매우 고통스럽고 가혹한 것이었다
[고려는3-4명의 양인 장정으로 하나의 군戶를 조직하고 한 사람에게 도랑가며 병역에
복무하게 하였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병역 수행자의 복무에 따른 비용을 부담하였다].
한편, 고려는 토지 제도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의
수립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농업이 주된 산업이고 토지가 기본 생산 수단인 당시의 상황에서 국가가 어느
정도로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가 하는 것은 봉건 국가의 경제적 힘과 공고성을
판가름하는 일이었고, 더욱이 지방 봉건 세력들이 독자적인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의 토지에 대해 국가적 지배권을 확립하는 것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의 수립 여부를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려 봉건 국가는 토지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田柴科-전은 농지시는
땔나무를 하는 산림, 과는 관직의 등급을 말한다-제도를 만들어 냈다.
전시과 제도는 경종 원년(976)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몇 변의 개정 과정을 거친 후
1076년 문종 대에 최종 확립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전시과 제도는 전국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지배권을 전제로 관료들에게
그 등급에 따라 차별을 두어 일정한 토지의 수조권을 넘겨 주는 제도였다.
1076년 최종 확정된 전시과에 따르면 모든 관리를 18등급으로 나누어 최고의 관리인
1과에서는전 100결 시50결을 제일 낮은 18과에서는 전만 17결을 주었다.
전시과에 의한 수조권은 원칙적으로 관직에 있는 본인이 죽으면 국가에 반환하게 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의 양인 농민은 원칙적으로 수확의 10분의1, 혹은 4분의 1을 조세로 내야 했다).
976년 이후 고려가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중앙 권력이 전국의 많은
토지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대부분의 지방 봉건 세력들을 관료 체제에
편입시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전시과 제도의 실시는 고려의 중앙 집권 체제가 그만큼 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중앙 통치 기구, 지방 통치 제도, 군사 제도, 토지 제도 등의 정비를 통해 고려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는 점차 강화되었다.
고려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는 10년 후반 성종 대에 기본적 골격이 마련된 후 11세기
문종 대에 완성되었다.
거란을 물리치다-거란과의 전쟁이야기
긴장이 고조되는 북방 후삼국 통일 후 고려에는 평화가 왔다.
전쟁에 나갔던 병사는 돌아오고 묵어던 농경지는 다시 개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고려의 서북방 정세는
여전히 긴장되어 있었다.
916년 나라를 세운 후 발해를 멸망시켜 중국 동북 지방 일대를 장악하고
또 북중국 일대까지 차지함으로써 강대해진 거란의 위협이 서서히 미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거란은 946년 나라 이름을 '요'로 고쳤다).
내부 체제를 아직 충분히 정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대비 태세도 잘 갖추지 못한
초기의 고려은 거란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연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거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고려는 거란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해 거란의 동향을 파악하였으며 발해 유민 포섭, 서경 건설,
서북 지방의 축성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려는 건국 이후 980년대까지 대동강 이북 지역에 50개의 성을 쌓거나 증축 혹은 보수하였다.
나아가 고려는 거란과 대립 관계에 있던 북중국의 후진과 반거란 동맹을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고려는 939년 944년 두 차례에 걸쳐 후진에 함께 거란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이러한 제의는 후진 지배층의 소극적 입장,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후진의 멸망(946)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942년 거란은 고려에 30여 명의 사절단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내면서 화평을 제의하였다.
당시 거란은 후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배후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후진에게 거란에 대한 공동 공격을 제의하고 있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왕건은 국교 단절을 선언하는 한편 사신들을 귀양 보내고 낙타들은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입장을 표시하였다.
고려의 단호한 입장에 직면한 거란은 후진을 멸망시킨 후 고려에 대한 침략 준비를 본격화하였다.
이 때 거란에 가 있던 고려 사람 최광윤은 비밀 편지로 거란의 침공 계획을 고려에 알려 주었다.
소식에 접한 고려는 거란의 침략에 맞설 준비를 가속화하였다.
고려는 광군사를 설치하고((947) 30만에 달하는 광군을 조직하였다.
고려는 또한 서경 건설을 서두르고 서북 지방에서의 축성 사업을 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고려의 완강한 대응에 부딪힌 거란은 부득이 자신의 침략계획을 일단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980년대 이후 거란의 침략 기도는 또다시 노골화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송(960년 건국)이 등장하여 점차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는데, 송과 대치한
거란은 고려를 정복함으로써 배후의 안정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983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여진족 정벌을 단행한 거란은 991년 마침내 압록강 북쪽
기슭에까지 진출하여 위구. 진화. 내원 등 3개의 성을 쌓고 여기에 90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하여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려와 거란은 직접 대치하게 되었다.
고려는 거란의 침략 위협에 적극 대처하였다.
고려는 우선 축성과 군대 증강을 통해 서북 지방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거란 방어의 제1선인 서북면(평안도)과 동북면(강원도 북부와 함경도 지방)에 병마사를
파견하여 군대의 지휘 계통을 정비하였다.
또 2군 6위의 중앙군을 정비 강화하여 수도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다.
나아가 고려는 서북 여진, 송 등 거란과 대치하고 있는 세력과 연합을 모색하였다.
안웅진 전투와 서희의 담판
마침내 993년 10월 거란은 고려에 대규모 침공을 강행하였다(제1차 침입).
적장 소손녕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땅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고려는 상군사 박양유, 중군사 서희, 하군사 최량을 지휘관으로 하는 방어군을 편성하여
서북 지방에 배치하였다.
고려군의 주방서선은 청천강 북쪽 대안에 설치되었다.
거란군과 벌인 본격적인 첫 전투는 봉산성(귀주 서남쪽 30리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봉산성에 배치되어 있던 고려군 선봉 부대와 성민들은 적의 주력 부대를 맞아 거듭되는
포위 공격을 물리치면서 용감하게 항전하였다.
그러나 워낙 중과 부적인지라 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하지만 봉산성 전투는 적에게 일정한 타격을 주고 적군 주력 부대의 진격 속도를 늦춤으로써
고려군 주력 부대가 방어 태세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봉산성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들은 중군사 서희는 고려군 주력 부대의 일부를 이끌고
봉산성 탈환을 위한 작전에 나섰다.
고려군의 반격에 직면한 소손녕은 일단 전진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 후계자를 자처하며 "80만 군사가 집결되어 있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도륙하겠다"라면서 고구려 옛 영토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적의 위협 앞에서 왕(성종)을 비롯한 고려의 일부 지배층은 투항적 자세를 드러냈었다.
그들 중에는 항복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화친할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이 때 서희를 비롯한 애국적 관료들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은 가히 지킬 수 있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전쟁의 승패는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적의 허약한 틈을 노려 용병하는 데 달려 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겠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대해 보인다 해서, 서경 이북의 땅을 갈라 주고 화친을 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또한 삼각산 이북의 땅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인데, 거란은 욕심이 많은 자들이므로,
생떼를 써 삼각산 이북의 땅도 달라고 하면 그대로 또 내줄 것인가?
더구나 땅을 갈라 준다는 것은 참으로 자손 만대의 치욕이다>
결국 고려 조정의 논의는 서희의 주도 아래 '항전'으로 모아졌고
고려군은 군사 태세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고려 조정의 논의가 분분한 틈을 타 청천강 대안까지 쉽게 진출한 거란군은
고려가 자신들의 요구에 불응하자 새로운 공세를 취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주방어선이 청천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거란군은
가장 약한 지점이라고 판단되는 청천강 하류 안융진을 공격해 왔다.
사실 안융진은 조그만 토성으로서 수비군도 수백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80만이라 호언 장담하며 허장 성세를 부리던 거란군은 안융진에서
쓰라린 패배를 맞보아야 했다.
안융진의 군민들은 중낭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의 지휘 아래 일치 단결하여 성을 고수하고
적군의 청천강 도하를 저지하였다.
안융진의 패배로 말미암아 청천강 방어선 돌파가 어려워진 소손녕은 담판을 제기하였다.
군사력 방법으로 얻지 못한 것을 외교적 방법으로 이뤄 보자는 속샘이었다.
담판이 시작되자 소손녕은 "당신의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하는가?"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
송과 국교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홀홀 다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담판에 임한 서희는
"그렇지 않다. 우리 고려는 바로 고구려의 후신이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약 경계를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인데,
어째서 이것을 침략이라고 하겠는가? 라고 반박하였다.
7일간에 걸친 담판에서 서희는 시종 정연한 논리로 적을 압도하였으며
적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쳤다.
결국 거란은 압록강 일대가 고구려의 옛 영토로서 고려의 영유권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에서도 실패한 거란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거란군의 제1차 침입은 고려의 승리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을 물리친 후 고려는 강동 6주-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흥화진-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강감찬의 청야 전술
제1차 전쟁 후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국교가 맺어지고 평화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거란의 재침을 예상한 고려는 경계을 늦추지 않고 방비 태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고려는 우선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여러 개의 성을 쌓고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방어 태세를 굳건히 하였다.
고려는 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는가 하면, 압록강 하류의 석성(의주)에 구당사라는
관리를 배치하고 관리들을 투항자로 위장시켜 거란에 들여보내는 등 거란의 침략기도와
군사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아가 고려는 송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반거란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란의 위세에 겁먹은 송나라 지배층의 소극적 입장, 투항적 자세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먼저 송을 공약하여 '전주 맹약'(1004)으로 이를 굴복시킨 거란은 이후 고려에 대한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
그리하여 1010년 11월 마침내 거란왕 성종은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속전 속결 전략으로
제2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거란이 이 때에 와서 고려 침공을 단행한 것은 전 해에 있었던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 내정이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고 계산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거란의 오산이었다.
고려는 강조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30만의 방어군을 편성하여 강력히 대처하였다.
거란군 주력부대와 고려군은 고려의 중요한 전초성인 흥화진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거란군은 전병력을 동원해 흥화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순검사 양규와 흥화진사 정성의 지휘 밑에 성의 군민들은 완강히 방어 전투를
수행하면서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수십배에 달하는 병력으로 7일간이나 총공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거란군은 어쩔 수 없이 20만의 대군을 남겨 둔 채 나머지 20만의 병력으로 통주에 접근하였다.
당시 통주는 고려군의 주방어선으로서 고려군의 주력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강조가
총지휘를 맡고 있었다.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은 전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용감하게 싸워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초반 승리에 자만한 강조는 진중에서 바둑을 두는 등 적을 얕보고 지휘를 소홀히 하였다.
그리하여 거란군의 기습으로 통주 방어선은 무너지고 강조는 포로가 되었다.
통주 전투에서의 패배는고려군에게는 중대한 손실이었다.
하지만 통주성에 남아 있던 고려의 군민들은 중낭장 최질의 지휘 밑에 완강히 성을 고수하였다.
통주 방어선을 돌파했다고는 하지만 통주성 점령에 실패한 거란군은 통주성을 비롯한 고려의
여러 성들을 비켜서 서경으로 밀려들었다.
서경에서 양측은 치열한 접전을 계속하였다.
통주의 패배 이후 고려군은 서경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고 서경 방어선을 강화하고 있었다.
서경 방어군은 적의 유인 전술에 걸려 일시적으로 곤란을 겪기도 하였지만 강력한 타격을
가하면서 완강히 방어 전투를 수행하였다.
서경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거란 침략군의 배후를 치기 위한 고려군의 공세가
본격화 되었다.
1010년 12월 16일 흥화진의 양규는 적이 점령하고 있던 곽주성을 불시에 기습하여 수천 명의
적군을 섬멸하였다.
서경성도 점령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군의 배후 공격이 본격화되자 거란군은 개경 전투에
마지막 희망를 걸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란군은 서경에 대한 포위를 풀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향하였다.
거란군이 개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려 지배층의 일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때 항전 고수의 입장에 선 강감찬은 개경을 일시적으로 비우고 청야 전술을 써서 시간을
번다음 반격으로 넘어갈 것을 주장하였다
(거란군은 점령 지역에서 군량과 말 먹이를 약탈하는 방식으로 식량을 보급하였다).
고려군의 주력이 서북 지방에 배치되어 있고 개경 방어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에서 강감찬의 제안은 올바른 것이었다.
마침내 1011년 1월1일 성종을 위시한 거란군은 개경에 들이닥쳤다.
개경에 진입한 거란군은 왕궁과 가옥들을 불태우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개경은 텅 비어 있었다.
고려 왕경의 행방은 묘연하고 청야 전술에 의해 군량과 말 먹이는 구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바라던 고려의 수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형세는 오히려 고려군에 의해 거란군이
역으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거란군은 10일 만에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퇴각로에는 고려군의 반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격을 피해 보기 위해 이제까지의 진격로를 피하고 산간지대로
방향을 잡아 도망쳐 갔지만 고려군의 매복과 기습, 포위 등의 전술로 귀주, 무로대, 선주,
통주, 이수, 석령 등지에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1월 29일 승리를 장담하며 기세 좋게 밀고 들어왔던 거란군은 패잔병 신세가 되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흥화진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은 압록강 도하 작전에 나선 거란군에게 최종 공세를
퍼부었다.
마침내 거란군은 쫓겨 가고 고려는 거란과의 제2차 전쟁도 승리로 마무리 하게 되었다.
귀주 대첩
1.2차 전쟁에서 연거푸 패배한 거란은 그 후 외교적 방법으로 자신의 야마을 실현시켜 보고자
하였다.
거란은 '국왕친조', 즉 고려왕이 거란을 방문할 거과 고려가 청천강 이북에 설치한 강동6주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거란은 군사적 침공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요구를 실현시키려 하였다.
거란은 1013-1017년 사이에 7차례나 대소규모의 침공을 해왔으며, 1014년 말에는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보주성(의주)과 정원성(위화도)을 쌓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침공은 번번히 고려에게 격퇴되었다.
마침내 1018년 12월 거란은 또다시 대규모 침공을 개시하였다(제3차 침입).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의 거란 침입군은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에 침입하였다.
제3차 침입에 나선 거란군의 전력은 고려군의 중간 방어 지점들에서의 전투를 최대한
피하면서 개경을 직접 공격하고자 하는 속전 속결 전략이었다.
거란의 침략 기도를 간파하고 있던 고려는 상원수 강감찬, 부원수 강민첨을 지휘관으로 하는
20만 8300여 명의 방어군을 편성하여 주력 부대를 영주(안주)와 그 이북 지대에 배치하였다.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물막이를 만들어 흥화진성 동쪽 강물을 막게 하고, 거란군이 접근하자
이를 터뜨려 침략군에 물벼락을 가한 후 적이 혼란에 빠지자 매복시킨 1만 2000명의 기병을
동원해 강력한 타격을 가하였다.
처음 접전에서부터 막대한 손실을 당한 거란군은 산간 지대를 택해 고려군과 접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개경을 향해 밀고 내려갔다.
고려군은 추격전과 매복전을 전개하면서 청야 전술을 사용해 적을 피로하게 하고 약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 기병대는 자주 내구산에서 불의의 기습을 가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서경 방어군은 마탄에서 강을 건너는 거란군을 불시에 들이쳐 적병 1만여 명을
죽이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계속되는 타격으로 전투력이 심히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계속
내려갔다.
거란군이 개경에 접근하자 고려군은 개경의 방어 테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동시에 청여 전술을 써서 개경 주변 100리 안팍의 주민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한편
모든 식량과 가축 먹이를 치우고 우물을 매워 버렸다.
1019년 1월 3일 거란군은 개경 북방 100리 지점에 있는 신은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사기는 저하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거란군은 도저히 개경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진퇴 양난의 위기에 빠진 거란군은 고려군이 야음을 이용해 기습을 감행하자 개경 공격은
시도해 보지도 못한 채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추격전으로 전환하여 연주(개천), 위주(영변) 등지에서 적에게 타격을 가한 고려군은 귀주에서
대포위 작전에 돌입하였다.
적군이 귀주에 이르자 이곳에 집결해 있던 고려군 주력 부대와 서북지방 여러 성의 고려군들은
일시에 공격을 가하였다.
사지에 빠진 적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리하여 양군 사이에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배후 공격을 받은 거란군은 혼란에 빠지고 총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귀주의 들판은 적병의 시체로 뒤덮이고 고려군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승리를 기록하였다. (귀주 대첩).
10만의 거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수천에 불과하였다.
마침내 고려는 제3차 전쟁에서도 커다란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거란은 패배를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거란은 먼저 사신을 보내 고려와 화친을 맺고(1019)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고려의 군민들은 당시 강대함을 자랑하던 거란과의 3차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족사에 자랑스런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물론 거란과의 전쟁은, 적군이 대규모 침략군을 동원하였고 근 30년에 걸친 장기 전쟁이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막대한 피해를 가져 왔다.
하지만 고려의 군민들은 열렬한 조국애와 꺾이지 않는 투지, 서희, 강감찬을 비롯한 애국적
지휘관들의 능숙한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려는 국토와 나라의 자주권을 훌륭히 지켜 냈을 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유리한 평화적 조건을 마련하였다.
이는 고려가 전후의 11세기 기간에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되었다.
또한 고려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내외에 유감없이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였다.
전후 고려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높아진 결과, 11세기 고려의 대외 무역은 예전에 비해 크게
발전하였다.
고려는 송, 거란, 여진, 일본 등과 무역을 하였는데, 특히 송과의 무역이 활발하였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고려가 활발한 대외 무역을 전개하자 당시 송과 교역하던 아랍 상인들까지 고려에 진출하여
자신들이 가져온 향료, 물감, 조미료, 수은 등을 고려의 비단과 바꿔 가는 등 교역활동을 벌렸다.
그리하여 이들을 통해 고려(Corea)라는 이름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12세기 후반 13세기 초의 농민.천민 항쟁)
"우리도 왕후 장상이 될 수 있다"
고려사회는 삼국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분 사회요, 계급 사회였다.
따라서 억눌림에 저항하는 민중의 투쟁 역시 끊임 없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2세기 말에 이르러 그것은 고력 사회를 뿌리체 뒤흔드는 커다란 양상으로 변화였다.
다음은 1198년 5월 당시 집권자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개경 송악산에 동료 노비를 모아
놓고 외친 말이다.
<경계의 난(庚癸-1170년 무신 정변과 1173년 김보당의 반란을 함께 일컫는말)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가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닥치게 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노비들은 모진 매질 밑에서 일만 하라는 법이 있는가...
우리가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땅의 천민을 없에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고려사 권129 열전 최충헌전>
만적의 외침은 당시 비인간적인 처지에서 신음하던 노비들이 지배층에 대하여 갖고 있던 뿌리
깊은 증오심, 울분과 분노, 그리고 신분 해방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이에 대하여 지배층은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다.
배신자의 밀고로 만적 등의 계획을 눈치 챈 최충헌은 즉시 만적을 비롯한 100여 명의 노비를
잡아들여 예성강에 수장하였다.
그러나 가혹한 탄압애도 불구하고 억압의 현실에 저항하는 민중의 투쟁은 꼬리를 몰고
이어졌으며 그것은 '12세기 후반-13세기 초 농민. 천민의 대항쟁'으로 폭발하였다.
그러면 이 시기 농민. 천민의 항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경과,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의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깊어지는 민중과 지배층의 갈등
고려는 건국 이후 10세기-11세기의 시기에 상대적으로 순조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를 생산력의 측면에서 보면, 농업의 경우 압록강 연안까지 영토을 확대하여 이를 농경지로
개간하였고, 저수지와 보 등 관개 시설을 확충하였으며, 우경에 의한 깊이갈이의 일반화, 2년
3작의 윤작법, 비료 사용등 기술상의 발전을 이루었다. 관청 수공업, 민간 전업 수공업, 가내
수공업으로 나뉘어 있던 수공업 역시 관청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금속 세공품, 도자기,
종이, 비단, 농기구, 무기 등 질 좋은 수공업 제품을 만들었다.
농업, 수공업의 발전에 힘입어 상업, 무역도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은 고려 청자,
금속 활자, 대장경 등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화 유산을 낳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적어도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다).
이처럼 고려 사회가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부지런한 고려의 민중이 피땀
흘려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만, 당시의 여러 가지 대내외적 조건 역시 크게 작용하였다.
우선 고려의 건국은 신라 말 파탄에 이르렀던 봉건 체제의 재정비를 가져 왔으므로 이를
고려 봉건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 대거란 전쟁의 승리 이후 대외적으로도 고려. 송. 거란(요) 등 삼국 사이에 상호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면서 평화의 시기가 계속되었는데, 이 역시 전쟁 피해의 복구와 산업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그런데 11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 사회 내부 모순은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틈과 간격이 확대되어 적대적 긴장감의 농도가 날로 짙어졌다.
이규보(1168-1241)의 다음과 같은 시(나라에서 농사꾼이 맑은 술과 쌀밥 먹는 것을
금하는 영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동국이상국집)는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 준다.
한평생 일해서 벼슬아치 섬기는
이것이 바로 농사꾼이다.
누더기로 겨우 살을 가리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밭을 가노라
벼가 파릇파릇 자랄 때부터
몇 번을 가꾸어 이삭이 맺었건만
아무리 많아야 헛배만 불렀지
가을이면 관청에서 앗아 가는 것
남김없이 몽땅 빼앗기고 나니
내 것이라고는 한 알도 없어
풀뿌리 캐어 목숨을 이어 가다가
굶주려 마침내 쓰러지고 마누나
서울에서 호강스래 잘사는 집엔
보배가 산더미로 쌓여 있도다
구슬같이 흰 쌀밥을
개나 돼지가 먹기도 하고
기름같이 맛있는 맑은 술을
심부름꾼 아이들도 마음대로 마시는구나
이것은 모두 다 농사꾼이 이룩한 것
그들이야 본래 무엇이 있었으랴
농민들의 피땀을 빨리 모아선
제 팔자 좋아서 부자가 되었다네
한편. 11세기 말 이후 고려는 그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우리는 약화된 고려의 모습을 윤관의 여진 정벌(1107)과 그 이후 전개된 여진과의 관계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만주와 연해주, 고려의 북부 국경 지대에 흩어져 살던 여진은 본래 발전 단계가 낮은
북방 종족으로서 발해의 지배 아래 있다가 고려 건국 이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그런데 11세기 후반 동북 만주의 완안부 여진이 주변 세력을 통합, 큰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완안부 여진은 12세기 초 두만강 이남으로 진출, 천리장성을 경계로 오늘날의 함흥 일대에서
고려와 맞섰으며 고려 북방을 자주 침범하였다
(고려는 거란과 전쟁이후 북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천리장성의 축조는 1033년부터 1044년까지 12년 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 후 고려의 북부 국경선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려는 1107년 12월 윤관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17만명의 원정군으로
여진 정벌을 단행하고, 점령 지역에 함주(함흥), 영주, 복주, 길주, 공험진 등 9개의 성을 쌓아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쫓겨 간 여진이 끈질기게 군사적 침공을 가하면서 9성 지방을 돌려줄 것을 간청하자
고려 정부는 2년 만에 이를 되돌려 주고 말았다.
고려 정부가 힘들여 개척한 9성 지방을 포기한 것은 당시 고려 지배층의 나약함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이제까지 군대 모집에서 제외시켰던 관리, 중, 서리, 상인, 수공업자,
노비까지 원정군으로 끌어 모은 점, 9성 방어 전투을 위한 충분한 인적. 물적 자원을
준비하지 못한 점에서 드러나듯 이 시기에 이르러 고려 봉건 국가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9성 반환 이후 고려와 여진 사이에는 일시적인 화평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1115년 金을 세운 여진은 요(거란)를 멸망시키고 송을 양자강 이남으로
축출(1127)하는 등 크게 강성해지자 1126년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을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이자겸이 반란(1126)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 유지만을 생각하고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고려 지배층은 이자겸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금에 대한 사대 외교를 계속하였다.
그러면 11세기 말 이후 민중의 처지를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지배층과 민중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고려 봉건 국가의 힘을 약화시킨 요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첫째,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였다.
토지가 기본적인 생산 수단이자 가장 중요한 재산 증식의 방법인 상황에서 지배층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를 늘려 나갔다. 그래서 11세기 말 이후에는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대두하였다.
귀족, 관료 들은 전시과 제도에 의한 수조지 이외에도 왕이 특별히 주는 별사전, 공음전. 식읍
등을 차지하였으며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땅을 빼앗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토지를 늘렸다.
불교 국가라 할 만큼 불교를 숭상한 국가 정책에 힘입어 절 역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귀족들은 생전의 건강과 장수, 사후의 명복을 빌면서 개인 사찰을 짓거나 많은 땅을 절에
기부하였고, 왕실도 1020년 헌종이 1240결의 땅을 현화사에 기증한 데서 보듯 자신들의 안녕을
기원해 많은 토지를 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정부는 중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그 벼슬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였으며,
절은 불명경보, 광학보 등 고리대 기관을 통해서도 토지를 늘렸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고려 때 절들은 다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많으면 백, 천에 이르고 주지의 생활은 공경 장상을 능가하였다."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의 확대는 전시과 제도를 문란에 빠뜨리고 아울러 봉건 국가의
물적 토대를 약화시켰으며, 농민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즉, 귀족, 관료, 절 등은 공전을 사전으로 만들어 이를 차지하고 그 토지를 경작하던
양인 농민을 노비와 전호로 삼았는데, 이는 농민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나아가 공전의 私전화,
공미의 사민화(양인의 노비화)를 가져 와 봉건 국가의 물적 토대를 약화시켰던 것이다.
더우기 재정난에 처한 봉건 국가는 그 부족분을 남아 있는 양인 농민의 어깨에 추가로 지웠고,
이 과정에서 지방 관리들과 토호들은 협잡과 농간, 중간 수탈을 일삼았으므로 농민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 졌다.
[지금 여러 도의 주와 군의 수령 가운데 청렴한 자는 열에 한 두명도 없고, 대개 이익을 쫓고
명성을 얻고자만 해 나라의 일의 근본을 해치고 있다.
뇌물을 받고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여 백성을 침해함에 백성들이 줄지어 도망하여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니 짐은 심히 가슴이 아프다.<고려사 -권 11 예종 원년 1105]
둘째, 대토지 소유의 확대와 함께 막대한 토지와 노비, 권세를 장악한 문벌귀족들이 등장하였는데,
이 역시 11세기 말 이후 고려 사회를 혼란과 위기로 몰아넣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는 문종-인종 시기 왕실의 외척으로서 약 80년 간 실권을 장악한
경원 이씨를 필두로 안산 김씨, 경주 김씨, 해주 최씨, 파평 윤씨, 평산 박씨, 강릉 김씨, 광양
김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상호간의 혼인 관계를 통해 특권적 지위를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음서 제도등을 통해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였다.
또한 왕실과 혼인을 통해 외척이 됨으로써 권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자겸은 그의 친척을 요직에 두루 앉히고, 벼슬자리를 팔아 그의 일당을 조정에 많이
심었으며, 스스로 국공이 되어 그에 대한 대우를 왕태자와 대등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고 전국에서 축하하는 것을 전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자겸의 여러 아들이 경쟁적으로 큰 집을 지으니 그 집들이 거리에 이어졌다.
그 세력이 더욱 성하게 됨에 따라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서 사방에서 바치는 음식 선물이
넘치게 들어오니 썩어서 버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시켜 수래와 말을 빼았아 자기의 물건을 실어 날랐으므로
가난한 백성들이 모두 수레를 부수어 버리고 말을 팔아 버리니 도로가 소란하였다.
(고려사 권 127, 열전 이자겸전)]
위의 이자겸(경원 이씨)의 예에서 보듯 문벌 귀족의 권세는 왕권을 위협할 정도였다.
이들은 1095년 이자의의 반란 기도 1112년 왕정의 반란 음모, 1126년 이자겸의 반란,
1135년 묘청의 난 등 끊임없이 권력 다툼을 벌였으며 이는 왕권과 중앙 집권 체제를
악화시키고 통치 질서을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무신이 권력을 잡다.
11세기 말 이후 문벌 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지배층의 갈등과 권력 다툼은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문신과 무신의 대립과 갈등으로 전개되었다.
고려는 태조의 호족 견제 정책 이래로 군사력을 가진 셀겨을 견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문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991년 고려 정부가 군사 통수 기능을 문관으로 구성된 중추원에 넘긴 사실은 그 단적인 예다.
고려의 문존 무비의 경향은 부화 방탕으로 이름 높던 의종(1146-1170)대에 극에 달하였다.
당시 무신 관료들은 정3품 이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며 같은 벼슬 등급이라 해도 문신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노상 상견례'라 해서 문신과 무신이 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경우 문신은 자신보다
한 등급 높은 무신에게 대등하게 대할수 있었다.
전시과 제도에 따라 주어지는 수조권의 양도 무신이 문신에 비해 적었다.
무신들은 의종이 문신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길 때 경비를 서는 존재로 전락하였으며 문신들은
무신에 대한 모독 행위를 일삼았다.
무신 관료만이 아니라 일반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도 심해서 직업 군인들에게 군사 복무의
대가로 죽 되어 있는 군인 전시가 정부와 문신 관료들의 횡령으로 지급되지 않았다.
무신 관료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문신들은 의기 양양해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배부르게 음식을 먹는데, 문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피로해졌으니 이래서야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고려사 절요 권11-의종24(1169)
무신들의 불만은 1170년 마침내 무신 정변으로 폭발하였다.
무신 정변의 직접적 계기는 문신의 무관 모독 사건이었다.
1170년 8월 보현원으로 행차하던 의종은 도중에 무관들을 불러내어 경기를 시키고
이를 보면서 즐겼다.
이 때 종5품의 문관이었던 한뢰는 자신보다 높은 종3품 무관으로서 60세가 다 된 이소웅이
젊은 군졸과 싸름을 해서 졌다고 뺨을 때리고 밀쳐 넘어뜨리는 등 모독 행위를 하였다.
임금과 다른 문신들도 손뼉을 치면서 이소우을 비웃었다.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폭발 직전에 달해 있던 무관들의 불만과 분노에 불을 지르는 도화선이
되었다.
정중부, 이고, 이의방 등 격분한 무신 관료들은 왕이 보현원에 이르자 한뢰를 비롯한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그 길로 개경에 돌아가 평소 원한을 샀던 문신들을 모조리 처단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 고나료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인종의 아우 호(명종)를 왕위에 앉힌 후
정부의 주요 요직을 모두 차지하였다.
무신 집권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무신 정권이 들어선 후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반란,
1174년 9월 서경 유수 조위총의 반란, 또 1174년 1월에는 개경 부근의 귀법사, 증광사,
흥화사 등 여러 절의 중 2000여 명이 개경에 쳐들어가 무신 집권자들을 공격하는 등
무신 정권에 반대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모두 진압되고, 무신 정권은 1270년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1170-정중부(중방)-1179 -경대승(도방)-1183-이의민(중방)-1196-최충헌(도방)-
1219-최우-1249-최항1257-최의-1258-김인준-1268-임연-1270(2)-임유무-
1270(5) (최우~임유무-교정도방.정방) *김인준은 김준이라고도 한다.
무신 집권층의 성격은 종래 집권 관료층의 성격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무신 정변의 핵심 세력인 정중부는 해주 지방의 군졸 출신이었고 이의민의 경우도
그의 아버지는 소금 장수, 어머니는 절의 노비였다.
그 외에도 무신 정권에서 고위직을 차지한 무관들 가운데는 양인,
신량역천인(身良役賤人-시눈은 양인이지만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무신정권 역시 봉건적이며 반민중적이며, 오히려 이들의 가혹한 수탈은
고려 사회의 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우선, 무신 정권하에서 통치 질서는 더욱 문란해졌다.
무신 집권 초기 이고가 정권탈취 음모를 꾸미다가 이의방의 쇠몽둥이에 맞아 죽고,
이의방은 제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내 권력을 잡으려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처단되었는가 하면. 정중부는 다시 경대승에 의해 꺼꾸러졌다.
이와 같은 무신 집권자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은 통치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
또 무신 집권자들은 정부의 공식적인 통치 기구와는 별도로 중방, 도방, 정방, 교정도감 등의
기구를 만들어 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이 역시 통치 질서를 혼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민중에 대한 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신 집권자들이 상호간의 정권 쟁탈전에서 살아 남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육성한 많은 수의
사병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였다.
중방. 도방. 정방. 교정도감 등의 유지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위해서도 무신 집권자들은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결국 막대한 재원을 확보해야 했던 무신 집권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토지를
늘렸으며 농민의 고혈을 짜냈다.
무신 집권자들은 문신의 토지와 노비를 빼았는가 하면 국가 수조지인 공전을 차지하였으며
자기들끼리도 토지와 노비, 재물을 놓고 서로 먹고 먹히는 쟁탈전을 벌였다.
또 壓良爲賤-양인을 눌러 천민으로 만든다 이라 해서 많은 양인 농민을 노비, 천호로 만들고
자신이 차지한 땅을 경작케 하였다.
그 결과 도처에 무신 집권자들의 대농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관료이자 문인이었던 이인로(1152~1220)는 그의 시 <세상살이 어려워라>에서
무신 집권시기의 사회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모진 짐승 날뛰어도
쫓는 사람 전혀 없으니
세상살이 어려워라
나의 노래는 구슬퍼라
칼집에 든 두 자루 칼
분에 떨며 울기만 하네
마음 착한 사람들은
팔을 베개 삼아 도시락을 먹건만
마음 모진 부자들
사람의 간을 말리어 먹네
농민. 천민의 항쟁
억눌리고 빼앗기면서 쌓여 온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무신 집권 시기에 이르러 대중적이고
전국적인, 그리고 대규모적이고 장기적인 대항쟁으로 폭발하였다.
1172년 북계의 창주, 성주, 철주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는 대항쟁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일단 불이 붙은 민중의 투쟁은 조위총의 반란을 계기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1174년 9월 서경 유수 조위총은 무신 정권 전보글 목표로 서경에서 발란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서경의 군대와 주민은 물론, 서북 지방 40여 개성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다.
그리하여 반란의 지휘부의 의도와는 달리 반봉건 항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수만 명으로 늘어난 농민군은 개경을 통하여 절령(황해도 자비령)을 차단하고
탐관 오리와 토호들을 축출 처단하였다. 10월에는 절령에서 관군을 맞아 이를 격파하였다.
농민군의 기세가 강성해지자 무신 정권은 개경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진압에 나섰다.
1174년 말 윤린첨을 총대장으로 한 3군이 편성되어 서북 지방에 파견되고
관군은 1175년 3월 농민군이 장악한 연주성(개천)을 포위하였다.
연주성의 농민군은 그 해 6월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성을 방어하였지만 결국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성을 내주고 말았다.
그 후 농민군은 서경에서 다시 관군과 대치하였다.
서경에 집결한 농민군은 1176년 6월까지 1년 간이나 성을 지켜 냈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위총의 발란을 계기로 한 서북 지방 농민군의 투쟁은 1년 3개월여 만에 일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서북 지방의 농민군이 서경성에서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1176년초 서남 지방의
농민들도 투쟁에 나섰다.
1176년 1월 공주 명학소의 농민들은 망이를 산행 병마사로하는 전투부대를 조직, 투쟁에
돌입하였다.
뒤이어 1176년 8월 손청이 이끄는 농민군이 가야산(충남 예산)을 중심으로,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오늘날의 충부 지방에서 이광이 지휘하는 농민군이,
전북 지방에서는 미륵산(익산)을 중심으로 농민군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망이의 농민군이었다.
망이, 망소이의 지휘하에 투쟁에 나선 공주 명학소의 농민군들은 당시 큰 고을이었던
공주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악질 관료와 토호들을 처단하였다.
개경 정부는 선유사를 보내 회유하려다가 실패하자 정황재가 이끄는 관군 3000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망이 농민군은 1176년 3월 초 공주에서 정황재의 관군을 격파하였다.
진압 작전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당시 서경 전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개경 정부는 양보,
조치를 들고 나왔다.
즉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으로 현령과 현위를 파견하겠다는 것이었다
(명학소는 천민 거주 지역인 '소'의 하나인데 충순현으로 승격시티는 것은 일반 현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곧 명학소의 주민들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1177년 1월 망이 농민군은 개경 정부와 회의를 맺었다.
하지만 개경에 갔다가 공주에 돌아온 망이는 곧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다.
망이가 개경에 가 있는 사이 충청 좌도 병마사 정세유가 이끄는 관군이 명학소를 공격하고
망이의 어머니와 처를 납치해 갔던 것이다. 격분한 망이 농민군은 1177년 2월 재차 봉기하였다.
재기한 망이 농민군은 급속히 그 세를 늘려 그 해 4월 오늘날의 충북 일부 지역을 제외한
충남북 전지역, 경기도 일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장악하였다.
망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개경 집권자에게 보냈다.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하게 하고 나서
그 길로 군대를 내어 토벌하고 내 어머니와 처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칼날 아래 죽을지언정 결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에
이르러 복수한 뒤에야 그치겠다. -고려사권19 명종7년3월>
그러나 1176년 6월 서북 지방 농민군의 진압 이후 다음해 2-3월경에 이르러 손청 농민군,
이광 농민군, 미륵산 농민군까지 진압한 개경 정부는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격하시키고
망이 농민군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망이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다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즉, 개경 정부에 화평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거부되었으며 1177년 6월 왕을 만나러 갔던 망이가 체포된후 농민군의 대열은
점차 흩어졌다.
1177년 5월에 이르러 서북 지방 농민군의 투쟁이 다시 활발해졌다.
광수. 김보. 사진 등이 이끈 농민군, 김관 강축 조충 등이 각각 이끈 농민군,
우방전이 지휘한 농민군 등 여러 농민군이 이 시기 서북 지방을 무대로 다시 활동에 돌입하였다.
그중에서도 광수 등이 이끈 농민군이 가장 강력하였다.
광수 등의 농민군은 지난번 서경성 전투에 참가했던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177년 5월 서경성을 다시 장악하고 그 대열을 급속히 확대하였다.
농민군은 이의민을 총대장으로 한 대규모의 관군에 맞서 4개월 이상 성을 방어하다가
9월에 이르러 전술적으로 유리한 묘향산으로 그 거점을 옮겼다.
묘향산으로 거점을 옮긴 농민군은 지역 주민의 지지. 지원하에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관군을 번번히 격파하고 악질 관료와 토호들을 처단하였으며
창고를 풀어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고려사-박제겸 전>는 당시 농민군의 활약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도적(농민군)들은 산림에 의거하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았고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그들의 귀가 되고 눈이 되었으므로 관군의 동정을 번번이 미리 알아냈다.
그리하여 싸움이 시작되면 관군은 매번 졌고 병사들은 사기가 덜어져 머뭇 거리기만 하고
좀처럼 진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1178년 10월에 이르러 광수 등의 농민군은 그 대열이 흩어지고 말았다.
관군의 공격이 거듭되고 개경 정부가 농민군 지도부를 식량과 벼슬로 회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북 지방 농민군의 투쟁은 그 후에도 이어져 1179년 2월 우방전의 지휘하에 다시
투쟁이 시작되었다.
농민들이 다시 투쟁에 나서자 관군은 당시 농민군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던 사정을
이용하여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서북면 지병마사 이부는 '아무 날 어느 곳에서 식량을 받아 가라'고 농민군이 있는 지역에
소문을 낸 후 농민군이 성안에 들어오자 성문을 닫고 이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1179년 4월 가주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농민군 100여 명이 식량 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관가에 어렇게 속을 줄을 몰랐다. 자살할지언정 너희 손에 죽기는 않겠다"며
창고에 불을 질러 10여만 섬의 곡식과 함께 산화하였다.
1179년대의 결렬했던 농민 투쟁은 80년대에 들어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투쟁으로는 1182년 2월의 관성현(충북 옥천) 투쟁, 부성현(충남 서산)투쟁,
1182년 3월의 전주 군인 봉기, 1187년 9월 순주(평남 순천) 농민 투쟁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전주의 군인 봉기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전주 지방 군인들은 배를 만드는 작업에 동원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록 진대유, 상호장 이택민 등이 군인들을 짐승처럼 부리고 혹사하였다.
격분한 군인들은 죽동의 지휘로 봉기하여 농민, 관노, 중 들과 힘을 합쳐 진대유를 비롯한
악질 관료들을 내쫓고 이택민을 비롯한 부호의 집 10여 채를 불태워 버린 후 전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군인들은 안찰사 박유보의 회유 공작에도 불구하고 40일 동안 관군과 싸우면서 성을 지켰다.
그런데 사태의 원인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성에 들어온 개경 관료들이 봉기 대열을 교란.
와해시킴으로써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전주의 군인 봉기는 군인만 아니라 농민, 관노, 중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함으로써
이전의 투쟁에 비해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190년대에 들어와서 오늘날의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투쟁이 다시 고조되었다.
1193년경부터 활동을 개시한 운문산(청도)의 김사미 농민군과 초전(울산)의 효심 농민군은
이 때의 대표적인 농민군이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군은 여러 고을의 관아와 절을 공격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지방 관리,
토호, 중 들을 처단하고 재물과 곡식을 빼았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193년 2월에는 동남로 안찰부사 김광재가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이를 맞받아 쳐 격파하였다.
농민군의 활동이 거세지자 개경의 무신 집권자들은 1193년 7월 대장군 전존걸, 장군 이지순
(이의민의 아들)을 지휘관으로 하여 개경의 군대를 직접 파견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정부군내의 압력과 대립을 이용해 번번이 정부군을 격파하였다.
당시 무신 정권의 실력자였던 이의민은 왕 자리를 탐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를 위해 농민군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의민은 농민군에 대한 공격을 일부러 태만히 하고 이지순으로 하여금 농민군과 내통케 했다.
농민군은 고을 관아나 부호의 집에서 노획한 금은 보좌로 이지순을 매수하고 식량, 신발, 의복등
중요 물자와 함께 군사 정보를 얻어냈다.
따라서 농민군이 정부군과 맞선 전투에서 매번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군의 패전이 거듭되고 이지순이 농민군과 내통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어쩌지 못한
진압군 총사령관 전존걸은 마침내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개경 정부로서는 다시 진압군을 편성하여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194년 2월 김사미가 관군의 회유 공작에 속아 관군의 병영에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김사미가 이끌던 농민군은 효심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계속 완강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명주(강릉)일대에서 활동하던 농민군은 좌도 병마사 최인이 이끈느 수천명의 관군을
명주 부근에서 격파하였다
(이들은 그 후 1199년 다시 봉기, 경주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경상도 동해안 일대의 넓은
지역에서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194년 4월 효심이 이끄는 농민군은 밀성(경남 밀양) 저전촌에서 관군과 대규모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관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농민군은 전사자 7000여명 엄청난 손실을 입고 말았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약화되었고 효심은 그 해 12월 관군에 체포되어 회생되었다.
경상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어느 정도 진정된 1196년 4월, 이의민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봉사 10조'라는 시정 방침을 내놓았다.
봉사 10조의 주요 내용은 농민에게 빼았은 토지를 되돌려줄 것, 탐관 오리를 징벌하고
선량한 관리를 임명할 것, 관리의 사치를 금지할 것, 절의 고리대를 금지할 것 등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시인하고 이를 어느 정도 개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의 투쟁을 막아 보려는 기만적인 술책일 뿐이었다.
최충헌 자신은 농장과 노비를 늘여 왕실을 능가하는 재산을 모았고 막대한 수의 사병을 육성했다.
따라서 봉사 10조는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고 민중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한편, 1190년대 후반에는 노비와 천민들의 신분 해방 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1190년대의 민중 투쟁을 특징 짓는 한 요소로서 당시의 사회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즉, 앞서 보았듯이 무신 정변 이후 다수의 양인, 천민 출신자들이 권력을 잡거나 고위직에 오르는 등 이른바 출세를 하였는데, 이는 고려 봉건 사회의 신분 질서를 흩뜨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노비와 천민들을 각성시켰던 것이다.
이 때 벌어진 주요한 노비와 천민들의 투쟁에는 1198년 만적의 투쟁 1200년 4월 진주 노비들의 봉기, 같은 해 5월 밀성 관노의 봉기, 같은 해 8월 합부 노을 부곡민 봉기 등이 있다.
13세기에 들어와서도 민중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이 때는 운문산, 울진, 초전, 경주 일대에서 활동한 농민군과 태백산을 거점으로 한 아지의
농민군 투쟁이 중심을 이루었다.
운문산의 농민군은 1202년 10월 경주의 벌초군(別抄軍-특별히 모집한 군대라는 뜻),
그리고 부인사와 동화사의 중들과 함께 영주(경북 영천)를 공격하였다.
이에 개경 정부는 김척후, 최광의, 강순의를 지휘관으로 하는 3군을 편성하여 경상도에
파견하였다.
운문산, 울진, 초전 등 여러 지역의 농민군은 경주에 집결, 운문산 농민군 지도자인 발좌를
총지휘관으로 삼고 3군을 편성하여 관군과 대응하였다.
1203년 1월 헌양현(경남 울주)일대에서 관군과 맞붙은 농민군은 일대 격전을 벌려 관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이 시기 아지가 이끄는 태백산의 농민군 관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맹열히 활동하였다.
그런데 1203년 7월 발좌가 부하의 변절로 죽음을 당하고 8월에는 아지도 관군에 체포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경상도 농민군은 김순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세워 투쟁을 계속하였다.
김순은 여러 지역의 농민군을 끌어 모아 1204년 3월 경주 북쪽 모량역에서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의 농민군은 그 해 5월 경주 남쪽의 이천 일대에서 관군과 벌린 전투에서
지휘자 20여 명이 체포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고 점차 그 대열이 무느졌다.
그 후 민중의 투쟁은 1217년 1월 진위현(경기 평택) 농민군의 투쟁, 1217년 6월 서경 군인들의
봉기, 1219-1220년 의주 농민군의 투쟁 등으로 이어져 1220년까지 계속되었다.
농민. 천민의 항쟁이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2세기 후반-13세기 초 농민. 천민의 항쟁은 근 반세기에 걸친
장기전인 투쟁이었으며 유래를 차직 힘들 정도로 치열하게, 전국적으로 그리고 대규모적으로
전개된 항쟁이었다.
따라서 농민 전쟁 형태로 전개된 농민. 천민의 대항쟁이 고려의 봉건 통치 체계에 가한 타격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실패하였다. 무수한 농민. 천민 들의 투쟁은 진압되었고 횡포한 무신 집권자들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첫째, 농민들이 자신들을 짓누르는 사회 현실과 사회 구조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농민들은 왕과 중앙 정부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 집권 세력이야말로 농민에게 고통과 억업을 주는 근본 원인이고
지방 관리나 토호는 그 수족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의 어진 정치가 행해지면
자신들의 처지가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탐관 오리나 토호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공격을 가한 반면 왕이나 중앙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탐관 오리가 쫓겨나면 쉽게 투쟁을 중지하였고 왕과 중앙 관리들의 회유 공작에
번번이 속아 넘어갔다.
이처럼 농민들이 사회 구조에 대해여 가진 인식의 한계는 그들의 투쟁이 실패로 끝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둘째, 각지 농민군의 투쟁이 고립 분산적이고, 산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후기로 올수록 나아지기는 했지만 농민군 사이의 연계는 대체로 강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각지에 분산된 농민군은 관군의 각개 격파 전술에 의해 상대적으로 손쉽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과연 농민. 천민의 대항쟁이 '실패'한 것이었을까?
과연 농민. 천민의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만 하나의 사건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농민. 천민의 항쟁이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고.
그것은 우리 역사를 발전시키는 힘찬 추동력이 되었다.
먼저 농민. 천민의 항쟁은 지배층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양보를 하게 함으로써
민중의 처지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항쟁 이후 고려 사회에서 나타난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향, 소, 부곡등 천민 거주 지역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노비와 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천민들이 투쟁을 통해 양인 신분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또 항쟁을 전후하여 적지 않은 수의 솔거 노비들이 외거 조비로 전환되었는데, 이 역시 노예적
존재가 농노적 존재로 된 것으로서 그들의 처지가 약간이나마 나아졌음을 뜻한다.
이러한 항쟁의 결과 민중의 처지가 얼마간 개선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봉건제가 안고 있던
고대적. 노예제적 잔재가 역시 상당히 불식되었다.
또한 농민. 천민의 항쟁은 만적의 외침에서 보듯 민중의 사회적 각서을 촉진하였고,
그들의 투쟁 역량을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이는 곧 닥쳐오게 될 몽고 침략군의 말발굽 아래서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조선의 역사를 전.후반기로 나눈다면 그 분기점이 병자호란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대륙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구속되어 있고 병자호란은 사대정책을 기본으로 하였던 조선왕조가 한족 제국 '명'으로부터 여진족 제국 '청'의 영향으로 진입하게 되는 갈림길이며 굳이 인위적으로 조선 오백년 역사를 반분한다면 이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료된다.
그렇다면 고려왕조는? 기간적으로는 꼭 반반이 아니라도 그 분기점을 느닷없이 이 지구를
강타한 쓰나미에 휩쓸리기 시작한 시기를 기준하여 후반으로 잡아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쓰나미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등장한 후일 징기스칸이라 명명된 테무진이라는 사나이를
진앙지로 하고 있다.
이 상상을 초월한 탁월한 전략가와 이에 버금가는 탁월한 정치가 그의 손자 쿠빌라이는 세계의
절반 이상을, 즉 서구를 제외한 구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전후 무후의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고
특히 후일 나폴레온이나 히틀러등도 무시무시한 동장군의 위력에 무릅꿇은 러시아 모스코바를
역사상 유일하게 정복하여 지배하였던 이 초원의 무법자 몽고 제국의 쓰나미가 극동의 한반도로 밀어닥쳤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대몽 항쟁시기. 원간섭기, 몽고제국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제국
등장으로 친명파의 이성계의 구테타,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를 그 후반으로
잡아서 고찰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까지 기술한 고려 전반부는 중앙집권 체제의 구축, 대거란전쟁 및 여진과의 갈등, 무신정변, 농민.천민의 반란 등이 역사적 이슈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대 몽고가 주 이슈일 후반기 역사는 적절한 시기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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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 창왕(昌王, 1380년~1389년) (0) | 2009.07.30 |
제32대 우왕(禑王, 1365년~1389년) (0) | 2009.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