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32대 우왕(禑王, 1365년~1389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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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우왕(禑王, 1365년~1389년)

 

 우왕(禑王, 1365년~1389년)은 고려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1388년)이다. 우왕인 휘인 우(禑)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른 명칭으로, 시호는 없다. 이는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폐위하면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며 "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고 주장하여 신돈의 자손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나 근거는 희박하다. 조선 멸망 후 여흥왕(驪興王)이라는 시호를 붙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귀양지가 경기도 여흥인 것에서

기인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에도 여흥왕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다.

 

 

우왕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이다. 부왕은 공민왕(恭愍王)이고, 모친은 신돈(辛旽)의 시녀였던 반야(盤若)이다. 신돈은 그의 시녀들을 공민왕에게 바쳤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반야였다. 뒷날 우왕을 폐위한 이성계 일파는 그의 생부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이라는 설을 지어냈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입궐하여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 왕실에서는 그의 혈통이 미천하여 등위에서 대신들의 방해를 받을까하여 이미 사망한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포고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게 되었다. 즉위한 우왕은 궁인 한씨의 3대를 추증하였다.

 

그의 치세 초기에는 흠잡을 일이 없었다. 꾸준히 학식을 연마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와 군관(群官),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태후가 승하한 다음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의 국력과 명운을 쇠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우왕의 근신(近臣)인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횡행하다가 당시,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이성계의 눈밖에 나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왕은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1388년(우왕 15년) 6월에 위화도 회군으로 권신이 된 이성계는 우왕이 공민왕의 태자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강제로 퇴위시키고, 강릉으로 유배시킨 뒤 아들인 창(昌)을 왕위에 올렸다. 이듬해에는 창왕(昌王)도 정적인 이성계에 의해 폐위된 뒤 부자가 모두 이성계에 의해 살해당했다.

 

공민왕과 고려 왕실에서는 '우(禑)'를 공민왕의 아들로 여기고 있었으나,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은 신돈의 아들로 몰아세웠다. 그 결과, 태종 때부터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우왕(禑王)을 신우(辛禑)로 낮추어 적고있다.

그러나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