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부부애

오늘의 쉼터 2009. 7. 31. 19:35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부부애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으로 충혜왕의 동생이었다.

그가 열두살이었을 때 고국을 떠나 원에 가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어릴적부터 문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후대인들도 격찬을 하였고,

당대 원 순제도 그의 재주를 상당히 아꼈다.

그래서 원 순제의 동생 패라첩목리의 딸 노국대장공주 보탑실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민왕은 이런 정략적인 결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노국공주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공주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혜로우며 성품도 고와 공민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달콤한 신혼생활을 하였다.

 공주는 항상 공민왕의 곁에서 그의 예술활동을 독려하여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고려 왕족이며 고려를 잊지말라고 환기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민왕이 어린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국왕으로 책봉되나 원 연경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려 개경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려로 와서도 곧홍건적이 고려로 침입 해와서 왕과 공주는 몽진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을때에도
공민왕과 공주는 서로 의지하며 힘든 위기를 잘 헤쳐나갔다.
그리고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추진하며 친원세력들을 제거할때도,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정책을 지지하여 주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났는데도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지 않았다.
 조정대신들은 종묘사직의 안위를 들며 새 왕비를 들일 것을 왕에게 간곡히 청하엿다.
공민왕은 이를 듣지 않았으나, 대신들의 압력이 점점 거세어졌고 공주까지도 이를 청하여
결국 이제현의 딸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공주에게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헛구역질을 할뿐 영 구미가 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신한 것이 분명했다.
공민왕은 뛸 듯이 기뻐했고, 자신이 새 비를 맞아들인 것을 후회하였다.
 공민왕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공주의 곁에서 떠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로 어렵게 임신한 공주는 출산할 때가 되었을 때 이슬이 보이고
크나큰 진통을 겪으며 앉지도 눕지도 못하엿다.
이렇게 난산의 고통에 시달린 산모를 지켜보는 공민왕은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 했고
내원전 불당에서 아들도 딸도 필요없으니 공주의 목숨만 살려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렸다.
결국 공주는 며칠을 진통하다가 공민왕14년 숨을 거두었다.
 공민왕은 공주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슬픔에 잠겼다.
요승 신돈이 반혼법을 스면 죽은 공주를 다시 볼 수 있다고 하자,
 공민왕은 기뻐하며 그렇게 해달라고 하였다.
몇번 반혼법으로 공주의 영혼을 만나게 해준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이후 정사도 뒤로 하고 남색에 빠져사는 공민왕을 모후 공원왕후 홍씨가 불러 궁궐안에
 좋은 왕비들과 후궁이 많으니 마음을 잡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공주만한 여자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은 노국공주가 죽어서도 공민왕이 잊지못하고 방황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고려시대의 정사나 야사 모두에서 너무나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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