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뿌리찿기

성한왕 김알지 해설

오늘의 쉼터 2010. 3. 7. 16:47

 

성한왕 김알지 해설

 

삼국사기의 김알지 부분과 관련하여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리즈는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 당시 고려의 국제적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요-글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유목민족제국사-룩 콴텐. 송기중옮김>에 의거 서술중인데

약 4/5를 진행하였는바 잔여부분은 잠시 미루고 지금 떠오른 생각을 적는다.

나의 생각의 요체는 <김알지의 출현에 관하여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김알지는 계림에서

출현했다'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의 출생에 관하여는 그 이외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삼국사기가 저술된지 약 일세기 후 승 일연에 의해 저술된 삼국유사 탈해왕시대에 

 '영평3년 경신(60) 8월4일

 

사내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동리로 갔더니 시림에 환하게 밝은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보라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우고 구름 속에는 황금궤짝으로부터 빛을 뿜고

흰닭이 나무 아래서 울므로 이 사연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숲으로 거동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아이가 들어 있어 누웠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옛 사적과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알지라고 지으니 알지는 우리나라 말로

어린아이를 불러 하는말이다.

그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뒤를 따르면서 기뻐서 뛰며 너울너울 춤을 췄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뒤에 그는 파사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니 알지가 열한을 낳고 열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부를 낳고 욱부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는바 신라의 김씨가 알지로부터 시작된다.'라는 전문의 내용,으로부터

이 미스테리 즉 문무왕비등의 명백한 물적증빙의 성한왕기록과 김알지설화와의 괴리의 실상을

규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더듬어 볼 수 있다>라는 것이다.

나는 최근 도서관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집필 당시의 상황을 찾아보았는데 국정의 중심에서

국사를 총괄하면서 국내의 난사 즉 묘청의 난 중원의 요.금 전확기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원의

발흥까지 약 일세기동안 고려조 유일의 대외적 안정기의 기틀을 잡아 놓았던 정치가 김부식의

은퇴에 즈음 국왕 인종이 그의 헌신과 은퇴 후의 배려로 수명의 관료를 붙혀 삼국사기를 집필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 또는 요. 금 전환기의 고려의 대외정책 기조에 대해서는 계속 시리즈의 진행으로 서술할

것이나 우선 여기에서 김부식이 모종의 동기로 문무왕비의 역사기록을 도말하거나 김알지신화를

창작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다만 그 당시 이 문제가 혼선의 상태임으로 인해 윤리적 가치관이

뚜렸한 학자이기도한 김부식이 양심상 이 데리케이트한 문제를 무책임하게 기록할 수 없어

이를 건너뛰어 우회해서 간단히 '신라 김씨왕조 시조 김알지가 계림에서 출현했다' 라고만 적은

것으로 보여지고 도말과 창작은 김부식시대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이로 인해

당시에는 이 문제가 혼선을 이루고 있었는바,

그 실상은 무었이며 어디에서 기인되었을까를 추적해 보면서 나의 가설을 교정 보완하고자 한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왕국이 건립된 이래 박.석.김의 3씨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차지

하다가 내물왕 이후 미추왕 때에 처음 왕위에 진출한 경주김씨 단독 세습왕통으로 변환되어

경순왕의 고려 왕건에 귀순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이어나갔다.

그런데 먼저 진출한 박.석씨와 뒤늦게 합류한 그러나 세습왕통의 단독왕권 획득에 성공한 김씨와는

성격상 뚜렸한 차별성이 존재하는바, 이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 건국까지 지구에는 두개의 극명하게 구별되는 민족그룹이 있었으니 한 그룹은 고도의 문화가

이미 성숙단계에 도달되어 있었고 또 하나는 이들의 영향으로 서서히 문화의 여명기를 맞고 있는

후진 그룹인 것이다. 

자는 지성적 그리고 후자는 야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후자는 문화적으로는

훨씬 뒤 떨어졌으나 뛰어난 전투기술과 험악한 자연환경에의 적응능력을 가진 그룹인 것이다.

인류가 최초에 그들의 생존을 위한 식량을 채취하는 즉 수렵 어로 또는 야생과일을 따먹는 단계에서

식량생산 단계로 발전할 때 두갈래로 진전되는바 농경과 유목이며 전자는 방대한 농경지가 제공되는

큰강 유역이 주근거지이고 후자는 중앙아시아 스텦의 광활한 대초원지등 이였던 것이다.

이들 두개의 그룹은 위의 문화적 선진 또는 후진 그룹에 해당되는데 그들의 생래의 성품이나 민족적

자질의 우열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처한 환경의 극명한 차이에서 소위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통해서 이와 같은 분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전자가 소위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라 하는 나일강 유프라데스 간지스 그리고 중국 황하유역의

문명인데 특히 동양권에서는 황하문명이 이에 해당된다.

큰강 유역에서 정착하여 농경하는 그룹에 대한 도전의 대표적인 것이 농사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홍수이었으며 우임금이 치수를 잘해서 왕위에 올랐다는 얘기로부터 그 당시의 매년 범람하는 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라는 문제의 막중한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에의 대처에는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수반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밀집된

공동체 즉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유목그룹이 부족단위의 공동체와 이들의 느슨한 연대에 의한 상위공동체를 형성함에 비하여 많은

부족단위의 소공동체를 하나의 단위로 강력히 묶는 대공동체를 형성해서 대강범람 방지 대규모

토목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된다.

이렇게 형성된 대공동체에는 지배층이 형성되어 국가의 운영 질서의 확립 사업의 계획 추진의

담당하여 공동체내의 강자 상위그룹이 되고 이들은 하위그룹이 주로 육체노동을 담당하데 비해

사업계획등 정신활동에 종사 이들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흥되기 시작한다.

더우기 대강 유역의 광활하고 비옥한 농경지로부터 생산되는 풍부한 식량은 이들에게 많은

여가 시간을 갖도록 하고 이 여가시간을 통해서 깊은 정신활동이 가능토록 하게 한다.

년중 내내 목축을 관리해야하는 유목과는 달리 긴시간의 농한기가 있어 이러한 정신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더욱 조성한다.

그리고 정착된 수많은 인간들 상호간에 갈등과 충돌등은 이를 해결하기위한 완충지대의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법적 문화적 형이상학 시스탬이 구축되어 문명이 개화하게 된다.

중국의 경우 공자가 이상국가라 칭했던 주시대에 문화가 크게 융성되었고 춘추시대에는

유가 도가 법가 겸애등 제자백가들에 의해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문화가 만개하기도 하고

또 춘추필법의 사서 발간등 역사편찬 사업도 온전히 이루어 지며 한대에 이르러 문명은

더욱 꽃을 피운다.

이상의 문화권을 전자 즉 선진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데 한편 스텦의 기마유목민등은

계절에 따라 분주히 목초를 쫒아 이동하면서 지속적으로 목축을 관리하는 부족단위의

공동체 생활이었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전투 야성쪽은 발달하나

정신활동등에 의한 문화적 발전의 여지는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문화적 후진그룹이라 할 수 있고 전자가 역사시대의 범주에 속한다면

후자는 신화시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신라왕조 박. 석 계열은 후자 그룹으로 부터

김씨 계열은 전자 역사시대 그룹으로 부터 유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박.석계열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알과 관련된 신화이며,

김씨계열은 신화가 아닌 문무왕비문의 온전한 역사기록이 유래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큰강유역에서 발흥한 선진문명국가 자체내에서도 계층별로 문명심화도는 크게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력의 핵이라 할수 있는 황실 주변은 당시의 문명의 진수가 되었을 것인 반면 농경사회의

변두리 하부층에서는 문명의 심화도가 미미했을것으로 보인다.

전한 시대만 하더라도 수 많은 동중서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운집하여 국가통치 내부질서의

원칙등에 격론을 벌리는가 하면 도가와 유가가 자기의 학설을 내세워 대 토론을 벌리는 등

고도의 문화적 모습이 전개 되기도 한다.

역사편찬 부문만 하더라도 태사령이라는고위 전담직책이 있어 사마천부자가 이 지위에 있었고

과거의 춘추필법에 의거 공정하고 객관적인 증빙에 의해 역사가 편찬기록 되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삼황오제 때는 객관적인 증빙이 결여되어 사서에서 제외시킨 사실만 보더라도

얼마나 역사기술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지배층 문화에 스며들어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경주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일제는 비록 흉노출신이나 젊었을 때 포로로 잡혀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이 핵중 핵에서 황제의 최측근과 공신으로 보냈으며 무제 사후에 각광에 이어 랭킹 두번째의

탁고지신이 될 만큼 중용되어서 그의 가치관등 정신영역은 이미 한화 문명권에 속한 성향을

가졌으리라 보여진다.

그후 그들은 약 1세기이상 한제국의 산동지방에서 투국이라는 제후 왕국의 형태로 번성해오다

왕망의 사건에 연루 신라땅으로 망명되어 왔기 때문에 원래의 혈통이 흉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선진문명권에서 유래된 외래그룹이라고 경주김씨의 연원을 간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무왕비의 내용을 이러한 시각에서 접근하여야 하며 환상적 건국신화에 혼선이 되어

엄격한 공정성의 확실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을 국학소경이라는 직함을 가진 대학자 한눌뉴에 의해

그가 섬긴 대군주의 업적을 자손만대에 전해줄 막중한 의무감으로 정성을 다하여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찬사가 포함된 수려한 문장이긴하나. 엄격한 고증에 의한 공정하고 객관적일 내용일 것이

확실시 되는  당대의 비문기록을 자의적으로 추상화 한다거나 확대해석을 하기보다 마치 이조실록과

같은 온전하고 하자없는 正史적 사료임을 전제하고 이를 평가해야함이 당연하다는 것이 나의 강조하는

주장이다.

한편 박.석계열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확보된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알과 관련된 건국신화 기록에 의해

외부로 부터 도래한 세력임은 추정 할 수 있으나 그 원천이 어딘지는 알길이 없고 다만 기마민족

영역으로 부터 직접 또는 농경사회 영역의 변두리로 부터 도래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들에 대한 기록은

역사기록이 아닌 신화기록이라는 김씨계열과는 극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선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이들과 관련된 설화등을 자세히 기술코자 한다.

삼국유사의 김알지 기록은 이 시리즈에서 기재했으므로 박. 석의 이책 내용을 옮긴다.

 

삼국유사 박혁거세왕 기록

-진한 땅에는 예날 여섯마을이 있었다.

 

1은 알천 양산촌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이다.

마을 어른은 알평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에서내여왔었다.

이가 급량부 이씨의 조상으로 되었다. 노혜왕 9년에 부를 두어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으니

태조 천복5년 경자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라 하였다. 파잠 동산 피상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2는 돌산 고허촌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라 하여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으로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남산부라 하니 구량벌 마등오 도북 희덕등 남쪽 마을들이 여기에 속한다.

 

현재 이 시리즈에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개국신화부분 기술중이나 여기에서 잠시 벗어나

문무왕비문에 대해 새로운 나의 생각을 적고자 한다.

문무왕비문 투侯祭天之胤傳七葉에서의 제천이라는 어휘에 대해 KBS역사추적에서의 교수님들의

설명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등으로 다소 추상적이고 애매한 것같은 느낌을 받았었는데 최근 입수한

주채혁저 순록유목제국론에 이 문제에의 해답이 되는 내용이 실려있어 이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론적으로 말하면 이 제천 이라는 말은 김일제의 흉노식 호칭으로서 가령 '황제' '왕' 같이 구체적이고

명로한 뜻을 가진 어휘인 것이다.

비문에서 경주김씨 시조 김일제를 지칭함에 있어 앞부분에는 투후 즉 무제로 부터 책봉받은 한제국

제후칭호를 적고 이어서 혈통적으로 그들의 연원인 흉노식 호칭을 제천으로 병기한 것이라 보여진다.

김일제의 흉노식 호칭이 제천임을 추정케 하는 상기서의 내용을 옮긴다.

<휴도왕의 제천금인이란 BC 121년 봄에 표기장군 과거병이 하서주랑에 진을 친 흉노군을 쳐부수고

빼았은 것으로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옹곤(神像)이다.

한서 권94상의 제천금인에 붙인 맹강(曺魏 때)의 주를 보면 이는 본래 흉노의 지성소인 운양현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BC215년에 몽염의 30만 진군에게 그 곳을 빼았기자 그 서북쪽에 자리 잡은 휴도왕의

오른쪽 땅으로 옮겨오게 되어 그가 이 제천금인상을 모시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휴도왕은 흉노제국의 4대 선우인 이치사(BC126-114)때에 무위군(현재의 감숙성 장액 서북)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혼사왕과 함께 흉노제국의 서부 요충지인 하서지역을 관장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한서 권94상 흉노전 제64 상에 의하면 하서전에서 패전하고 선우에게 문책을 당하게 되자 이들 두왕은

한 제국에 투항할 것을 모의하다가 주저하던 휴도왕이 혼사왕에게 살해되었던 터였다.

(이부분 한무제 드라마와 일치함)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휴도왕이 혹시 사제직을 겸직했을지도 모르는 그의 전력과 관련해서

혹은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 때문이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한서 권28 지리지 제8상 좌빙익 운양현

조에 보면 그를 죽이고 혼사왕을 따라 한제국에 투항한 부중이 그를 무신으로 신격화하여 제사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에 한무제가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에게 거기장군을 제수하고 동시에 흉노제국 휴도왕이

모셨던 '제천금인'을 상기시키는 김씨 성을 내린 사실은~~>

이상의 내용을 근거하여 진시황의 몽염대군에 밀려 휴도왕 영역으로 흉노족의 제천금인이 옮겨졌고

이로 인해 휴도왕이 흉노족의 민속신앙 제천행사를 담당하여 사제직을 겸했으며 이 사제직은 그의

태자에 세습되어 비록 한황실 신하의 신분이긴 하지만 투후 김일제는 흉노족 투항그룹에 의해 형성된

산동성 소재 투후국 내부에서는 그들에 의해 한의 공식 제후 명칭에 그들 민족 고유의 명칭

 

즉 흉노족 제천행사 주관하는 사제 직분의 호칭 '제천'을  덛붇쳐 이 행사를 이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문무왕비의 제천의 어휘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등 형용사가 아닌 명료히 사제의

흉노식 호칭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주목되는 것은 흉노 귀화 한인들의 호칭倂記 방식이다.

가령 미국 교민의 이름이 허버트 강과 같이 현국가명과 조국명을 병기하는 방식과 같은 문무왕 비문

투후제천으로 부터 유추되는 방식에서 김알지에 대한 주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바 이와 관련

동서내용을 인용하면 <삼국유사 권1 탈해왕대 기사에 나오는 '김알지'의 알지가

몽골-투르크어계 -Alt=황금(gold)에서 비롯되어 '박혁거세'의 赫과 '박'처럼 '김'은 한자로

'알지(Alt)는 투르크-몽골말로 표기되었으며 아시아 북방민족의 경우에 징기스칸의 혈족을 일컫는

Altan(황금) Urug(씨족) 곧 -김씨-는 고유명사이기보다는 임금씨족 곧 天孫族-황금용손족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다.>

이상의 내용은  내가 역사산책 시리즈에서 이미 제시하였던 김알지의 고유명사 아닌 보통명사라는

가설과 일치하며 구전등 모종의 근거에 담겨진 김알지 (즉 김씨 성을 가지신)성한왕의 단일 인물에

대한 호칭이 역사에서 신화로의 인위적인 역류 과정에서 김알지와 세한(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열한)의

父子간 두명의 각각 호칭으로 변질 되었다는 유력한 가설이 성립된다 할 것이다. 

 

삼국유사 박 혁거세 설화 계속-

3은 무산 대수촌이니 마을 어른은 구례마라고 하여 처음에는 이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으로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라고 하니 박곡촌 같은 서쪽 마을들이 여기에 속한다.

 

 4는취산 진지촌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라 하여 처음에 화산에서 내려왔다.

이가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통선부라고 하니 시파와 같은 동남쪽 마을들이 여기에 속하였다.

최치원은 즉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 남쪽 미탄사 앞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씨의 옛집이라고 이르는바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5는 금산 가리촌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 배씨의 조상으로 되었다.

지금은 일어서 가덕부라고 하니 아래위 서지내아 같은 동쪽 마을들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  고야촌이니 마을어른은 호진이라하여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 설씨의 조상으로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임천부라고 하니 물이촌 잉구진촌 궐곡 같은 동북쪽 마을들이 여기에 속한다.

 

 위에 쓴 글을 보건데 이 6부의 조상들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모양이다.

노례왕 9년(32)에 처음으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여섯 가지 성을 주었으니

지금 풍속에서 중흥부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를 아버지로 삼고 임천부를 아들로 삼고

가덕부를 딸로 삼으니 그 까닭은 자세치 않다.

 

 전한지절 원년 임자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를 데리고 다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으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을 가지지 못하고 보매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째서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이 때에야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나정 우물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왠 흰 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라빛 알 한개가 있고 말은 사람이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뿜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밝았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 하고 왕위의 칭호를 거실한 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가면서 치하를 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님이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있는 여자임금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 날 사량리 알영우물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계집아이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입부리 같은지라 월성 북쪽 냇물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입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내이름도 따라서 발천이라 하였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지라 알은 바가지 같이 생겼고

우리 사람들이 바가지를 박이라 하므로 따라서 성을 박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이름으로써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오봉 원년 갑자에 남자는 위에 올라 왕이되고

이어 여자로써 왕후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였다.

더러는 사라라 또는 사로라고도 하며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났으므로

혹은 일러서 계림국이라고도 하니 계룡이 상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에 김알지를 얻으면서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쳤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는 드디어 신라라고 이름을 정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린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이로 난 몸뚱이를

다섯능으로 각각 장사하고 역시 이름을 사릉이라 하니 담어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유사 4대 탈행왕-탈해 이사금이다.

남해왕 때에 가락국 바다 가운데 웬 배가 정박하였으므로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울리면서 맞아서 머물도록 하려 하였더니 배는 그만 나는 듯이 달아나서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닿았다.

 

이 때에 갯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이라 하니 곧 혁거세왕 배꾼의 어머니였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에는 원래 바윗돌이 없는데 웬 까닭으로 까치들이 몰려서 울꼬? 하고는 배를 저어가서

찾아보니 웬 배에 까치들이 몰려 있었다.

배 가운데는 궤짝이 한 개 있는데 길이가 20척이요 너비가13척이다.

그는 배를 끌어다가 어떤 나무 숲 아래 가져다 두고 좋은 일인지 언짢은 일인지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하여 맹세를 하고 조금 있다가 궤짝을 열어보니

단정하게 생긴 웬 사내아이가 들어 있고 겸하여 가지각색 보물과 노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는 이래 동안 바라지를 하였더니

그 때야 말하기를

 "나는 원래 龍城국사람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28용왕이 있어 사람의 태로부터 나서 다섯 살 여섯 살 적부터 왕위를 계승하여

만백성들에게 천품을 닦도록 교화하였으며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가 임금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나의 부왕인 함달파가 적녀국 왕녀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 없어서

자식 낳기를 기도하였더니 7년 후에 한개의 커다란 알을 낳았다.

이에 부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으고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다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아마도 좋은 일이 아닌가 보다'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겸하여 가지각색 보물과 노비들을

배에 싣고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인연이 닿는 땅에 네 마음대로 닿아 나라를 세우고 가문을 만들라' 하였다.

 때마침 붉은 용이 있어 배를 호위하여 이 곳까지 왔노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그 사내아이는 지팡이를 끌면서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서 돌무덤을 만들고

이레 동안 머물렀다.

그는 성 안에 살 만한 땅을 찾아 초승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있음을 바라보고 

그 지세가 오래 살 만한 자리인지라 곧 내려가 알아보았더니 호공의 댁 이었다.

그는 곧 꾀를 써서 남몰래  그 집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는 이튿날 아침에 그 집 문앞에 와서

말하기를"이 집은 우리 할아버지 집이다"하니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결판을 못내고 필경은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리가 말하기를 무슨 증거가 있기에 이 집을 너희 집이라고 하느냐? 하니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우리집은 본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이웃 지방으로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여기 살았습니다.

땅을 파서 사실해 주소서하여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곧 빼앗아 살았다.

 

 때에 남해왕이 탈해가 지혜 있는 사람인 줄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바로 아니부인으로 되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 물을 구하여

마시는데 심부름하는 자가 물을 길어 가지고 오던 도중에 먼저 마시고 드리려 하니

물그릇이 입에 늘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랐더니 심부름하던 자가 맹세를 하여 말하기를

"다음에는 설혹 가깝고 멀고 간에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소이다"하니

그 때야 그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는 심부름하는 자가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도 동악 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어 속칭 요내우물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 중원2년 정사6월에 탈해가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이것이 옛날(昔)우리집이요' 하면서 남의 집을 빼앗았다 하여 성을 옛 昔자로 하였다.

 혹은 까치 때문에 궤짝을 열었으므로 '까치 鵲'글자에 새 조를 때어 버리고 석씨로 하엿다

하기도 하며 궤짝을 풀(解)고 알을 벗(脫)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도 한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가 23년 동안이요.건초4년 기묘에 죽어서 소천둔덕 가운데 장사하였다.

 뒤에 탈해신령이 명령이 있어 "내 뼈를 조심해 묻으라"고 하였다.

그의 해골 둘레가 3자 2척이요. 몸뚱이 뼈 길이가 9자7척이요

이빨이 일매지고 뼈마디가 연달려 소위 천하에 적수가 없을 장사의 뼈였다.

그 뼈를 부수어 빚어 그의 형상을 만들어 대궐안에 모셨다.

 탈해의 신령이 또 이를기를 "내 뼈를 동악에 두라"하였으므로 여기에 모셨다.

 

방금 구성도서관엘 다녀왔는데 지난번 쓴 내용중 내가 간과하여 착오한 것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내용중 김알지의 계림신화는 삼국유사에만 있고 삼국사기에는

그냥 계림에서 얻었다라고 적혀 있다고 했는데 다시한번 삼국사기의 신라건국신화를

정밀하게 살펴보니 지난번에 내가 유일한 김알지 기록으로 알았던 미추왕대 기록외에

탈해왕 기록에서 삼국유사와 유사한 내용의 신화가 기록되어 있어 지난번에 간과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간과하여 잘못 인식하였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상이를 통해

뭔가 나의 역사역류 가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었는데

아뭏든 신라건국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 내용이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다른 신라역사책을 열람했는데 특히 삼국사기와 관련하여 김부식이 역사역류의

추진 주인공으로 볼 만한 근거도 없어 제반 상황을 미루어 짐작컨데 이 작위는 삼국사기 전에

이루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김부식 시대는 북방 중국의 요.금 교체기로서 특히 종전의 요보다 송을 압박하여

남쪽으로 밀어내기 까지 하는 더욱 강한 금제국을 상대하면서 고려를 과거 고구려 계승에서

신라계승으로 실리적 대변환하여 대외적 안정기조를 구축하는 활동에 김부식이 중심에 섰으며

삼국사기의 편찬동기가 이와 관련될 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궁예 왕건의 국호 고려나 견훤의 백제(후백제라 함은 이전 백제와 구별하기 위한 칭호임)는

신라와의 차별성을 표현하여 과거 백제나 고구려 지역의 민심을 얻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특히 궁예는 신라왕족의 혈통을 받고 신라로 부터 버림받은 원한으로 신라를 멸망시키겠다는

복수의 감정이 스며있는 국호인 것이며 옛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기 보다

궁예의 나라를 이어받은 왕건에 의해 국체의 지속에 따른 결과의 성격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요의 침입시 소손녕과 서희와의 외교담판에서 소측이 우리 요는 고구려 옛땅에서 일어난

제국이며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 났다는 주장에 대해 서희가 우리의 국호를 보드라도

우리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주장 영역확장 양해를 얻어낸 외교적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고려가 옛고구려 만주벌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숙원이나 의지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금제국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 후삼국시대의 신라와의 차별화 의미가 살아진 상당기간의

통일 국가시대를 경과한 당시에 옛 고구려 고토에 군림하고 있는 강대국과의 껄끄로운 외교적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고구려 계승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신라계승으로 방향 전환 금과의 외교적

친교를 통해 국가 안정을 기하고자 하는 목적의 국체의 대전환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고

또 그가 국왕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삼국사기가 이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김일제 성한왕 김알지에 대해 총체적 정리를 하여 나의 가설을 결론짓고자 한다.

 

이제까지의 문무왕비 김일제 태마건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후 김일제의 식읍 산동성 투국은 상상 이상으로 막강하고 번영된 제후국이었을 것이다.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으로서 제후에 봉해질 때 일반적인 제후 수준의 부와 권력이 부여 되었겠으나

김일제의 손부가 전한 말 권력자 왕망과 이종사촌간(한서기록)이고 작위계승자 증손 김당이

그와 6촌의 근친으로서 왕망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던 전한 말이나 황위를 찬탈 건국한 신제국

1십수년간 최고 전제권력자의 근친의 위치에 있었던 투후와 그의 식읍 투국위상은 당연히 막강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넘치는 힘은 밖으로 뻗어 신안앞바다 김해 일본을 잇는 무역로를 통한 활발한 대외 교역을

개척하고 운용하는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주 김해 제주에서 발굴된 왕망의 신의 짧은

기간에만 통용되었다는 화폐 화천이 어쩌면 투성 제후국 왕 금고에서 흘러나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역로 중간기착지 김해(옛날면구야 한국)에는 무역업무 담당직원등 상당수의 투성 관리들이

상주했을 것이며 이들은 멀지 않는 거리에 있는 사로국등의 내륙쪽의 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2;망의 멸망과 후한의 탄생으로 인한 투국 지배자 그룹의 정치적 망명루트는 그들의 앞 마당 같은

해로를 따라 김해 그리고 한반도 동남단 부산 울산 경유 포항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석탈해 신라 입국 기록 내용에 의거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석탈해의 신라진입 경위는 석탈해의 배가 가락국 김해에 왔길래 김수로왕이

크게 환영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피하여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으로 경주로 왔다고 되었있다.

그리고 그는 용성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 한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구야한국이라 하는 김해로 부터 부산 울산 경유 포항으로 진행하는 항로가

있었다는 예기고 유사의 하서지촌은 지금의 포항이거나 그 인근의 포구일 것이며 계림 동쪽

즉 경주 동쪽 포항방향 동해안이 된다.

그리고 그 배에 노비등이 실렸다고하므로 이 항로는 해류를 따라 또는 풍력으로 그리고 인력등으로

항해했을 것으로 보여지며, 원래의 목적지가 신라이며 김해에는 잠시 기착하고자 하였으나

김수로왕의 지나친 환대가 부담이 되어 잽싸게 피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용성국이 지금의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동남해변 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도서지역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뭏든 석탈해 그룹은 신라로 오기전 사전에 이곳 지리적 기타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의 목적지는 분명한 사로국이어서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 유형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투후국은 절대군주 왕망이 빽업하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중국 동남쪽 한반도 일본등

무역루트를 완전 장악하여 군림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아 그들의 안방 같은 그리고 그들의 하부

세력이 이미 김해 사로국등에서 일부 뿌리 내려어 거점을 구축하였던 이 행상루트를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불의의 정치적 수난을 피해 그들의 제이의 야망과 꿈을 펼칠 한반도 동남쪽 이미 박혁거세

석탈해가 지배 세력으로 되어 있는 사로국으로 액소더스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이주그룹 리더는 투후 김일제 증손이며 한서 기록상 최후의 작위 승계자 김당의 직계적손,

제후 승계자 성한왕(김일제의 7대손)이었을 것이다.

신라 김씨계열 왕능에서 발굴된 유적중 가장 주목을 받는 서봉총의 화려한 금관 그리고 말 뒤에

동복이 얹혀있는 기마인상은 그 제작 연대가 언제쯤일가?

 물론 신라시대 때 이 물건이 제작되어서 왕릉의 부장품이 되었을 것으로 당연히 간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 된 적이 없었으나 지금 다음과 같은 추정은 불가능할 것인가? 

어쩌면 그 화려한 왕관이 황제의 근친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휘둘렀을 전한 말기와 왕망제국시 

중국 동부 한반도 일본등 아세아 극동지역 일대를 주름잡던 제후투국 제후왕 김일제 직계 후손 김당등이

승계해서 사용했던 국왕관이었고 이를 그들의 직계 적손 신라왕이 물려받은 것일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

 그리고 특히 기마인상은 이 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 휴도왕의 제천행사에 금인과 함께 제기 용품의 하나로 부수되어 사용되었던 것을 휴도왕 태자 김일제가 직접 보관했거나 또는 혼사왕을 따라 한에 투항한

그룹이 김일제에게 바쳐 그의 적손계열로 전수 신라 땅으로 그들의 이사짐에 포함되어 옮겨져 온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신라 왕실에서 세삼 그 옛날 선조들의 모습 특히 말뒤의 동복등을 회상헤서 정교하게

제작 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보다는 오히려 위의 이주그룹이 가져온 물품이라는 추정이 보다

자연스럽지 않을까? 라는 등의 생각이 든다.

최근 기술 탄소측정 등을 활용하면 물품 제작연대를 밣혀질 수는 혹시 없을까?

 

문무왕비문에는 <투후제천전칠엽 15대조성한왕~>이라 기록되어 있고

또 문무왕 동생 김인문비에 <태조한왕>이라고,

그리고 문무왕의 9대손 흥덕왕의 비문에 <성한왕>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추사김정희가 김알지가 즉 성한왕이라고 결론내린 이 인물에 붙어 있는 <왕>의 칭호는

그가 제후국의 우두머리임을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확실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제국 제후 투후인 동시에 흉노귀순그룹대표이며 고유 민속신앙 제천행사 주관자 사제인

김일제의 7대후손으로서 왕의 칭호를 받을수 있는 자는 투후국의 국왕 말고 누가 있겠는가?

너무나도 자명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억측이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비문의 역사성을 경시하는 옛날 사람들은

뭔가 현재보다 비 합리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으로 인한 것으로 유래된다고 생각된다.

이 선입견은 춘추필법등 이미 성숙된, 역사 기록은 추호의 허구성도 허용될 수 없는 공정성,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역사 문화권의 핵심영역인 황제 최측근 투후와 100여년의 한제국 융성

투국으로 부터 유입된 역사시대의 김씨왕조그룹을 북방 기마민족등 상대적 문명 외각지역으로 부터

직접 도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혁거세 석탈해의 신화시대그룹과 차별성을 인지하지 못한 혼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5;김인문의 비는 성한왕의 신분을 더욱 명료히 밝혀준다.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비에는 태조 한왕으로 기록되었는데 KBS역사 추적에서 교수님이 비문은

될 수 있는 데로 축약하여 기록하므로 이는 문무왕비문의 성한왕이나 후대 흥덕왕 비문의 태조

성한왕이나 같은 내용이고 경주김씨 족보상의 김알지의 아들로 되어있는 세한을 가르킨다고 설명한다.

나는 여기서 달리 이렇게 생각 해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이 漢王은 글자 그대로 한제국의

즉 투성국 제후왕을 지칭하는 뜻으로 액면 그대로 해석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문무왕비등 건립은 당시 통치자의 업적을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하는 국가의 대사업이고 그 비문은

당대의 최고 학자등 지성그룹이 모든 정성을 쏟아 내용을 고증하고 또 점검하고 토의하고 국왕의

승락을 득해서 탄생된 금쪽같은 작품인데 그리고 공정과 객관적 사실을 생명같이 소중히 하는

역사의식을 면면히 이어받아 스며들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그래서 투후제천 전칠엽이라는 명료하고

깔끔한 어휘에 이어진  그 비문에 <왕>이라는 칭호를 속된 말로 폼으로 붙였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만약 제후왕이 아닌 인명을 지칭하였다면 아무리 비문이라 한들 그들의 위대한 선조의 이름을 반으로

뚝 잘라서 기록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漢제국의 왕 조금 구체적으로 광무제에 복원된 새로운 한제국 後漢-新漢-星漢이였으므로

김인문의 비문에 漢王이라고 축약하여 기록 될 수가 있을 것이 아닌가?

구구한 억측이 아닌 자명한 뜻의 칭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 아닌가?

다만 성한왕의 성자는 교수님의 말씀데로 新 勢 星의 이두식 혼용으로 붙여졌는바 이 점에 대해서도

 星漢王의 칭호가 新의 뜻을 의미하는 광무제 유수에 의해 복원된 後漢 즉 새로운 漢의 제후왕을

의미 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김일제의 7대손의 신라땅으로의 액소더스는 후한 광무제 시대였으므로~~~~.

 

6;성한왕과 김알지는 동일인이고 성한왕은 그의 공적 직위 즉 투후제천과 같이

그리고 김알지는 김일제와 같이 인명의 칭호일 가능성이 있다.

문무왕비문에는 김일제에 대해 투후제천이라고 기록하며 그가 제천금인으로 인해 황제로부터

金씨 성을 사성받아 명명된 김일제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도 각종 모임등에서 상대편을 호칭할 때 이름대신 그의 과거직위 가령 장군님 사장님 등으로

불러 경칭으로 사용하기도 한 것과 같이 그들의 존경하는 시조를 외람되히 이름 석자로 부를 수 없고

한제국의 신분 투후와 흉노 고유 제사직 호칭 제천을 병기하여 김일제 이름 대신 경칭으로 기록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연이어 나오는 성한왕 역시 그의 원거주지 한제국에서의 신분 즉 제후왕을 표시하여

그의 이름 대신 경칭성호칭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사람 성한왕의 이름은 김일제 김당의 후손 김알지 였으며 이는 비록 비문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당시의 다른 기록등에 표시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투후제천 김일제

방식으로 성한왕 김알지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김알지가 김의 한자식 알지의 흉노식 병기 방식의 황금(gold)의

보통명사 일 수도 있지만 보통명사를 고유명사 인명으로 사용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성한왕 김알지는 후대의 인위적 역사역류 행위에 의해 김알지, 세한의 부자 두사람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지만~.

아뭏든 시조에 대해서는 외람되어 이름을 거명할 수 없어 직위의 경칭을 사용하면서

또 다른 존경하는 중시조에 대해서는 경칭아닌 이름을 호칭할 리가 없을 것 같고

따라서 같은 톤으로 성한왕이라는 제후왕의 경칭을 사용했으며 비문외의 자료로 김일제를

알 수 있듯이 비문외의 자료에 김알지라는 이름이 표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추정된다.

 

삼국사기등에서의 신라땅 주민유입은 다섯단계가 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 노역을 피해 진백성 상당수가 한반도로 옮겨왔는데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에

이미 존립하던 마한이 동쪽 지역을 할애하여 정착토록 했으며 따라서 한반도 동남쪽일대의 지역을

진나라의 명칭에 따라 진한이라 하였고 언어도 마한지역과는 달랐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있으니 

첫단계. 조선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자 그 유민들이 남하하여 정착한 것이다.

두번째 단계( 삼국사기에기록된  박혁거세 국왕추대 세력인 이 손 정 최 설 배의 모두가 특정 산으로

부터 각각내려왔다는 육촌 화백 그룹), 그리고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가 수십년정도의 간격으로 

순차적 도래하며 이가 3,4, 5단계인데 첫단계이전 순수 토착민 존재 여부에 대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 과정에서 신구세력간에 일체의 전쟁등 무력적 갈등이나 마찰이 표출되어 기록된바 없고 오히려

'손에 손잡고'식의 화기가 넘치는 우정의 향연을 연상케 하니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외부세력들의 참혹한 원주민 소탕침공등과 비교할 때 희한한 일같이 느껴진다.

박혁거세는 기존세력이 왕으로 추대 석탈해는 박혁거세의 손부로서 4대 왕으로 취임

그리고 김알지는 탈해왕의 태자로 봉해졌다가 왕위를 파사에게 사양 5대 후손 미추왕때 왕위로

진출 하는등 이들 수개로 나뉘는 도래 세력간의 평화적 공존관계는 기이한 느낌을 줄 정도인바

원래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하는 수준높은 문화민족성을 가진 때문이었을까~.

 

8-성한왕의 신라땅 도래는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정지작업을 완료한 후 실행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크고 작은 조직에서도 텃세라는게 존재하는데 한나라의 기존 정착세력과 외부도래

세력간에 긴장상태가 발생하지 않고 쉽게 평화적 공존관계가 형성된 배경은 무었일까?

이는 외부도래 세력 진입이전 기존세력과의 사전 충분한 협의와 조율이 사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이 아닐까? 

투성제후국이 전성기에 극동 무역로를 장악하고 무역을 통한 막대한 부를 창조해 나갈 때

그들의 활동거점 김해 등지에는 상당규모의 현지거류단 그룹이 이미 형성되었을 것이며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사로국과에는 얼마간의 소통 왕래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한서에 투후가 김일제의 증손 김당까지만 승계되었다 기록되어 있고 한서기록에는 없으나

그로부터 직계적손으로 제후왕의 위상이 내부적으로 계속 승계되었을 4대 후손의

성한왕 김알지까지는 상당한 시간간격이 존재하는바,

왕망의 멸망 광무제의 정치보복을 피해 신라땅에의 엑소더스는 짧은 기간이 아닌

수십년 이상에 기간동안 산동성 해변쪽 김해 그리고 신라를 향하는 행로를 따라 점진적으로

치밀하게 실행되었을 것이며 김해에서 체류하는 동안 사로국과의 기존 소통루트를 통해

기 청착세력과의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친후 만전을 기하여 새로운 그들의 보금자리 신라

땅으로 진입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 할 것 같다.

 

KBS역사추적에서는 왕망의 멸망후 흩어졌던 김일제 후손들이 다시모여 족보를 편찬하였고

이를 화면에 크로즈 업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왕망의 멸망후 산동쪽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투성에서 정치보복을 피해 산동 해변쪽으로 이주 한후 정세를 관망 하다가 다시 김해쪽으로

옮긴 후 그들의 상당한 하부세력이 형성된 그곳에서 상당기간 머물다가 최종 종착지를

신라땅으로 결정 기존 소통 루트를 통해 기존세력과 협의를 거쳐 완벽한 정지작업 후 화려하게

사로국으로 진입하였을 것 같다. 당연하지 않는가?

그들의 운명이 달린 액소더스를 였을 테니까? 

중국 한족들은 민족적 우월감으로 천하에는 자기들이 중심이라고 우쭐대며  변방 민족들은 

동이 북저 서융 남만 등의 명명하면서 경시하는데 이는 서양에서 로마인들이 게르만 족등에 대해

바바리언이라 하면서 으시대든 것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그들은 일찍이 황하유역의 대홍수를 막기위해 국가체재를 구축하고 강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정착하면서 넘치는 소출과 많은 여가시간으로 유구한 세월을 통해 고도의 문화를 꽃 피워서 선진

문화가 동양 전체로 파급되어 아시아 범한자 문화권이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또 하나의 영역 스탶 초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북방기마 유목민족은 비록

문화적으로는 이들 보다 후진이나 그들의 황야의 이리같은 야성은 번개 같이 덮치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막강한 전투력으로 이들 한족을 때론 압도하고(전한 전반기) 때론 한제국을 멸망시켜

중원을 점령(글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고의 원 여진의 청등 제국)하면서 중국대륙을 문화가 아닌

무로서 군림하여 왔으며 중국의 마지막 대제국은 한족이 아닌 한반도와 연결된 만주의 여진족의

청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주김씨왕조 원천 투성국의 뿌리 전한제국 때의 흉노족은 막강한 군사력 뿐만아니라

그들의 서쪽 영역에 군림했던 스키타이 제국등으로 부터 유입된 빼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금속 제련 및 금 세공기술 이었다. 

대정복자 한무제 유철이 평생을 두고 고심했던 것이 뛰어난 성능의 흉노 무기 칼이었는바

흉노의 칼과 한군의 칼이 부딧치면 한군의 칼은 무우 잘리듯이 잘려나갔던 것이었는데

결국 흉노 서역을 거쳐 13년 만에 귀환한 박망후 장건이 갖고온 제작 노하우 합금 재료로

이문제를 해결 전투의 주도권을 한무제군으로 옮겨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선진기술 흉노민족 제후국 투성국민들은 초창기의 황제의 생명의 은인으로서

수혜받은 부와 특권뿐만아니라 왕망이라는 절대권력자의 최측근 혈족으로서의 막강한

배경과 함께 했으나 그들은 어차피 이민족 한제국에 귀순그룹이라는 성격으로 인해

정치적 또는 군사적으로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몰아 넣는 대신 상업 무역등 경제적

향상을 기하는 쪽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마치 고려멸망 후 개성사람들이 자기들과는 운명적으로 인연이 먼 정치적 출세가 아닌

부를 추구 조선의 상권을 장악한 것과 같이~.

이와 같은 연고로 투성 주류세력이 바다 건너 한반도 동남부로 엑소더스 하였을 때

그들의 대열은 황금제품으로 상징되는 찬란한 고급기술 과 그들이 극동 무역루트를 통해

정치적 잡념없이 오직 외길로 축적한 막대한 부를 앞세워 과시하였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19세기의 서양강대국의 식민지 점령시 대포와 함대를 맨 앞에 세우고

뒤에 과학과 의술을 따르게 했던것과는 판이하게 비정치적 비군사적 이러한 그들의 이주는

당연히 기존세력과의 마찰이나 긴장없이 오히려 호기심과 잔치 분위기의 도래세력과

기존세력이 함께 어울러 지는 손에 손잡고의 한마당이 펼쳐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하여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평화적 우호적 박 석 김의 순환 왕통의 전통이

사로국에 뿌리 내려지게 되었으니 김일제로부터 성한왕까지 한편의 긴 드라마의 여정같다.

중간 중간에 서사시를 삽입하여 장식할 만 한 대목을 가진 중국 산동반도 일원은

춘추 전국시대 齊국이었다.

은을 타도하고 신생국을 건설한 주는 황실 직할 영토 이외의 국토의 상당부분을 분할 할애

그들의 측근 혈족들에 의한 봉건국가 체재를 확립한다.

그런데 그들의 혈족외에 예외적으로 건국 최일등공신 흔히 강태공이라고 불리워지는 여상에게

산동지역을 분봉하여 제국이 탄생하는바 후일 전국 7웅중의 하나가 될 정도로 수도 임치를

중심으로 융성하였고 진시황의 통일 전쟁에 최후로 남아서 각축을 벌렸던 국가였었다.

아마 왕망이 광무제 유수에게 멸망되지 않고 신제국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춘추전국시대

동일한 지역에서 군림했던 강국 齊국과  황태자 선발에서 밀린 황자에게 주로 번왕으로 봉해지는

분봉국과 상이한 사례인 공신 분봉의 공통점을 가진 투국은 지속적인 번영을 구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망이 타도되어 천하역적이 되고 그의 근친관계에 있었던 김일제의 증손 투후 김당의

일족에게 정치보복 일족 몰살의 칼날이 닥아올 시점 이들은 중국에서 종적을 감춘다(한서).

 

그들은 목숨을 보전코자 그 때까지 공들여 쌓아왔던 근거지 투성을 버리고 망명을 시작하는데

TV화면에 비친 그 옛날 투성 유적지는 유행가 가사 같이 <황성 옛터의 잡초만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인 벌판 옛 투성유적지라는 안내판만이 덩그러이 서있다.

이들 망명그룹이 신라 땅으로 진입 할 때는 김당의 4대손 성한왕인데 이들의 출발에서 정착까지는

상당한 시간 간격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중간에 머물렀던 곳중에 유력히 추정되는 곳으로 종전 무역활동 거점이었기도 했을

김해(당시명 구야한국)이었을 것이며 이곳에서 신라땅으로 오는 루트는 울산 포항의 해상로

또는 양산 언양 울산쪽 진행중 좌회전의 내륙경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 구주에 하카다(博多)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지명은 한반도 선진 문화권으로 부터

항로를 따라 무역선이 입항했을 때 황홀한 선진국의 진귀한 물품이 마치 박람회 같이 펼져진

장소라는 뜻의 명칭이라 한다. 

아마 먼 옛날 김해의 모습이 었지 않았을까?

이곳에 머물면서 최종 정착지를 탐색하던중 당시 진한의 일개 소국이었던 사로국으로 부터

자기 나라로의 입국로비를 기존 교류루트를 통해 받지는 않았을까?

당시 소국의 지배세력들은 국력의 비약적 신장을 위해 이 선진 기술강국 경제강국 망명그룹을 

적극 유치코자 하지는 않았을까?

이와 같은 사전 조율을 완벽히 거친후에 비로소 이 망명그룹은 보무도 당당히 기존 지배세력과

또 기정착 주민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면서 조그만 소국 사로국으로 입성 그들의 투국 국가 경영경험,

감은사 사리탑의 금불경의 정교함이 보여주는  뛰어난 기술, 막대한 부, 산동성 일원과 극동지역에

널리 펼쳐진 인적자원등을 집중하여 국력을 급격히 강화 진한 전지역을 석권하고 금관가야 백제

고구려 병탄당 간섭 세력의 축출의 일련 과정을 거쳐 한반도 최초통일 독립국가 천년사직을 성취 

가장 후발 왕통 이면서 단독 계승의 주도 왕통을 장악한 경주김씨 계열의 문무왕의 비문중 金輿등

어휘를 보면서 위와 같은 성한왕 입성 경위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 할 수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무왕 비문에는 성한왕과 관련하여 '園宮' 祥林''金輿'라는 단어가 있다 한다.

이는 KBS역사추적 푸로그램에서 성한왕과 김알지는 동일한 인물이다 라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교수님이 출연, 위의 내용과 삼국사기의 '하늘'에서 '계림'숲의 '금궤'에서 나왔다는 김알지의 기록이

유사하여 동일한 인물일 것이라는 설이 조심스래 학계에서 대두된다 라고 말씀하셨다.

말씀하신대로 이들 둘의 기록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은 확실한 것 같은데 다만 전자는 누누히 강조한

대로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역사기록이고 후자는 이와 깊은 연관이 있긴 하지만 온전한 환상적

신화라는 극명한 차이가 있기도 한 것이다. 

무왕 비문은 광개토대왕비문과 같이 당대의 절대 권력자 통치자의 업적을 기려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당대의 석학이 총집결하여 수많은 검토와 교정을 거쳐 왕의 승락을 얻어 확정되었을

가히 국가적 사업으로 건립된 비문의 내용인대 어찌 추호의 허황한 허구성 미사여구 내용이 삽입될

수 있겠는가?

투후 김일제라는 명약관화한 실제 인물의 7대 후손과 관련하여 '원궁에서'라는 말을 '하늘에서'라는

말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하면 넌센스일 것임은 하늘에서 출현한 성한왕의 7대 선조 투후 김일제를

생각하면 자명하다.

즉 문무왕 비문의 원궁에서로는 from palace이며 삼국사기의 하늘은 from sky가 되어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다.

명작 한무제 드라마에는 황실 전용 사냥터를 상림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따라서 귀인과 관련된 서술에서의 숲을 상림이라고 보편적으로 사용했을 개연성이 높다.

금여 즉 금수래는 말과 수래에 거의 도배를 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금에 관한한 넘치고 넘쳤을

성한왕의 입성 그룹, 전혀 비사실적인 내용이 없지않는가? 

결국 문무왕 비문은 차분하고 공정하게 모종의 거처로 부터 지금의 계림숲에서 start하여 금마차를

타고 국왕의 출영과 수많은 연도의 백성의 환호속에서 왕궁으로 퍼래이드 입성을 했음을 비문은

말해 주고 있다고 추정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원궁은 무었일까?

 투국 옛왕궁? 김해에 머물렀던 그곳의 별궁? 아니면 신라 탈해왕의 계림숲 인근의 영빈관?

또는 투국 혹은 금관가야의 사로국 주재 대사관류의 외교용 건물?

이중에 하나일 것으로 또한 추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2000년 전 경주 땅 계림에서 펼쳐졋을 법한 퍼래이드 황금빛이 찬란한 금마차를

타고 의기 양양히 입성하여 국왕과 포옹한 후 함께 좌우에 도열한 수만은 백성들의 열열한 환호속에

함께 왕성을 향해 가는 장엄하고 화려한 퍼래이드 모습을 상상만 해도 덩달아 기분이 업되네~~.

삼국사기는 이를 신화로 표현 금궤의 김알지를 안은 일행들 뒤로 짐승과 새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췃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고 보니 이렇게 아름답고 시적으로 표현한 김알지 신화의 창작자는 예술적 뛰어난 소질의

소유자 인가 보다~

 

한서등 중국역사기록 그리고 문무완비문 김인문 비문 흥덕왕비문등에 의거 정리 또는 추정된 역사적

사실기록은 후일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에 느닷없이 선사시대적 환상적 허구내용으로 뒤바뀌게

되어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등 사서에 기록된다.

인류역사의 자연적인 진행방향인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가 아닌 역사시대가 거꾸로 선사시대로

역류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은, 하늘에 보라빛 구름이 드리우고 시림

나무가지에 금궤가 걸려있어 빛을 뿜어내어 그 아래 흰닭이 울고 있어 왕이 거동하여 금궤를 내려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누워있다가 일어나 이를 안고 왕궁으로 돌아올때 새와 짐승이 따라오며 기뻐서

너훌 너훌 춤추었다는 출현과정과 이후 그의 행적과 자손에 대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김알지가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어서 그의 5대손 미추왕 전까지의 내용을 4대 탈해왕 대의

열거된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의 김알지 출현과정과 그 이후의 행적 그리고 마지막 그의 미추왕까지의 혈통의

세부분으로 구성된바, 첫번째 출현과정과 마지막 혈통 내용중 앞부분 김알지와 그 아들 세한(열한)

내용이 의도적 창작 픽션이고 그외 김알지의 행적 세한 이후의 혈통은 진정성을 가진 역사적 내용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신화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문무왕비의 내용을 픽션화 하여 환상적인

신화를 만들어 낸 것으로 추정된다.

 KBS역사추적에서의 교수님 설명과 같이 비문의 원궁에서 보라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드리웠다로

빛을 내 뿜는 금괘는 역시 비문의 황금 수래 금여를 소재로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신화의 시림

김알지 출현이후 계림으로 불리워 지는 경주외각의 숲은 비문의 성한왕 출현기록중 상림과 동일한

수풀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짐승과 새가 너훌 너훌 춤추었다라고 표현된 신화내용은 성한왕 김알지의 경주 입성 퍼래이드의

환영 무드를 시사하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김해에서 잠정적으로 머물면서 최종 목적지를 탐색하고 있는 성한왕 그룹을 소국의 비약적

발전을 위해 적극 유치하고 이에 호응한 성한왕 일행을 왕이 직접 출영하여 극진히 환영하고 백성들의

열열한 환호속에서 왕궁으로 입성하는 그 모습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시적으로 왕이 거동 김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올때 짐승과 새들이 딸아오면서 춤을 추었다고,

그것도 근사한 표현을 써서 너훌 너훌의 의태어를  동원하여, 꿈같이 아름다운 장면으로 묘사 창작한

것은 아닐런지~.

아뭏든 이렇게 하여 한반도 동남부 경주지역의 진한의 수많은 소국중에 하나에 불과하였던 사로국의

한반도 최초 자주독립국가, 일본서기에서 일본인들이 금의 나라로 기록하기도 했던 금빛 찬란한

오늘날 우리 조국의 원형인 통일 신라 천년사직의 파란만장한 대 장정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그 꿈같은 퍼래이드. 우정과 평화의 박혁거세의 손녀사위 사로국 4대왕 탈해왕과 성한왕이 금마차를 

타고  열열한 백성들의 환호에 좌우에서 만면의 미소를 지어 손을 흔들어 응답하면서~  

우리 선인 모습이었을런지 모르는 아름다운 광경을 상상하니 나에게 앤돌핀이 저절로 샘솟아 퍼지네

 

삼국사기에서의 픽션 창작부분중 앞에서 서술한 것외에 그의 출현과 관련하여 흰닭,

즉 빛을 내뿜는 황금궤짝이 달린 나무가지 밑에서 울고 있었다는, 그리하여 종전의 시림이라고

불리워 졌던 숲이 계림으로 개칭되기도 하는 닭에 관한 내용과 김알지기록중 마지막 혈통기록중

앞 부문 즉 김알지가 세한을 낳았다는 내용이 픽숀창작이겠는데 여기에서 왜 명료한 역사기록이

 환상적 신화로 바뀌게 되어 졋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는 실마리가 감촉된다.

현재 우리세대에 남겨진 성한왕의 역사기록에 대한 최종유물은 8세기 후반 건립되었을

흥덕왕 비문 조각이며 김알지 신화의 최초의 문헌은 12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사기인바

이 사이의 약 3-4백년 사이에 역사역류의 작위가 이루워 졌을 것이며 그 배경이나 동기는

역사의 미스테리라 하겟는데 나는 당초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당시의 혹종의 대외관계등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을까 하여 자료를 정밀 검토하였으나 별무 성과였었다.

이에 나는 앞의 흰닭의 신화등에 힌트를 얻어 다음과 같이 그 미스테리의 해답을 추측해 보고자 한다.

영웅 묵특선우의 활약으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했던 중앙아시아 스탶 초원의 기마민족 흉노족, 

그들은 한고조 유방의 대군을 격파하고 한제국을 압도하면서 군림하는 전성기를 누리다가 대정복자

한무제 유철의 끈질진 집념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선우 휘하의 흉노 대번왕이면서 금인제천의 사제인 휴도왕과 혼사왕국의 수많은 백성들은 한제국에

귀순하여 패전 국민 신세가 되는데 그들에게 행운이 따라 휴도왕 태자 김일제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

되는 사건이 발생, 산동지역 투국이라는 제후국을 형성하고 비록 대초원은 아니나 중국 동부 극동

지역을 무대로 과거의 초원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금상첨화로 제후국 왕실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 왕망의 최근친이 되어 이를 배경으로 꿈의 실현은

거의 확실시 되는 찰라 청천벽력같이 천하역적 왕망의 혈족이 되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들은 눈물을 먹어면서 이국 땅에서 혼신의 노력으로 일군 투성국의 모든것을 뒤로하고 보물등 짐을

싸서 망명의 길로 올라 오랜 여정 끝에 한반도 동남쪽 석탈해왕이 통치하던 사로국에 열열한 환영속에

입성하여 그들의 못다 이룬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갈 터전을 갖게 된다.

 박혁거세 석탈해그룹이 주류였던 소국 사로국은 이들 기술강국 황금 경제강국의 막강한 힘이 유입

되면서 기존세력과 신입세력의 협동 일약 강국이 되어 진한 다수의 소국을 병탄하는 것을 시작으로

금관가야 병탄 삼국통일 당세력 축출등의 과정으로 드디어 수갈래 나뉘어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몸살을 알았던 한반도에 통일 자주국을 성취하여 이 땅에 살았던 백성들에게 모처럼의 긴 시간의

전쟁없는 평화시대를 안겨준다.

문무왕이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여 대업을 이루던 당시나 그후 상당기간 동안 중국은 한

그리고 대제국 당의 번성기에 있었고 통일신라의 최치원등 유능한 인재 의상 혜초등 승려등이 당에

유학하면서 그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와 통일신라를 문화를 업그래이드 시켰던 것이다.

특히 당제국에는 이백 두보 백거이등 뛰어난 시인이 있어 통일 신라의 서라벌 골목 이곳 저곳에서는

백거이의 비파행의 수려한 시구절을 읊는 소리가 들려 로맨틱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만 하여도 중국은 선진대국이였고 왕통의 뿌리가 그 곳 제후국이었으며 원천이 황제 최측근

신하 투후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긍지로 내 세울 내용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이 멸망하면서 중국은 오대십국의 단명의 소국들이 물거품같이 발생 소멸을 반복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며 더이상 중원으로부터 도래했다는 사실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게 되었고

박혁거세나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에 비하여 그들이 중국 번국의 망명정권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숨기고 싶은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었을 것이다.

국의 한서 사기등 김일제관련 기록 문무왕비 김인문비 흥덕왕비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국내사서 중

위의 창작가공 부분을 제외한 잔여부분 등은 흠결없는 진정성 역사기록으로 보아진다.

나는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신라의 화랑제도가 먼 옛날 중앙아시아 스텦 초원지대를 누볐던 기마

유목민족의 정예궁수 부대가 그 원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흉노족을 비롯한 기마유목민족의 막강한 전투력은 그들의 독특한 전술에 따르는 것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일반 기마병의 대군단과는 별도로 엄격한 선발을 거친 최정예 황제직할 궁수부대가 있어

전투가 절정에 달할쯤 바람같이 나타나 싸움에 지친 적부대를 단숨에 휩쓸어 버리는 방식이라 하는데

이 전쟁기법은 후일 몽고의 징기스칸에게 채용되어 인류역사상 최대의 제국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 효과적 전술로 인구나 영토면에서 열배가 되는 한제국이 군사적으로 압도를 당해 굴욕적

친화관계에서 때론 희롱성 모욕(목특선우의 여태후에 대한 프로포즈)을 감내 해야만 했으나 발군의

영웅 한무제 유철의 집념으로 흉노의 이와 똑같은 절묘한 전술을 모방 역이용 곽거병의 정예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바람같이 넓은 초원지대를 휩쓸어 한흉전쟁의 주도권을 한쪽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곽거병 거의 청소년을 조금 지난 새파란, 마치 알랙산더가 연상되는, 그러나 아쉽게도 일찍 죽고

그의 동생 곽광이 김일제와 무제의 탁고지신이 되기도 한, 전쟁영웅의 모습에서 연상되는 한반도

산천을 누비면서 활쏘기 말타기를 단련하며 원강의 세속오계를 닦아 신라왕국의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화랑, 김유신등을 배출하고 황산벌 전투의 영웅 관창등 청소년 장군을 키워낸 화랑제도가 어쩌면

어느 맑고 개인날 휘황찬란한 금마차를 탈해왕과 나눠 타고 기뻐서 너훌 너훌 춤을 추면서 열열히

환호하는 군중사이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사로국으로 입성했던 성한왕 김알지 그룹들의 먼 옛날

그들의 선조 대초원의 주인 기마유목민족의 전투방식으로부터 이어받아 꽃을 피운것일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원화 제도도 마찬가지 일런지고 모르고~. 

삼국사기는 김알지의 혈통에 관하여 정식 왕통으로 기록되는 미추왕 이전부분에 대하여 탈해왕대

김알지 기록의 끝에 서술하며 내용은 김알지 세한(열한)아도 수류 욱부 구도 미추인데 김알지와 세한의

부자는 성한왕 김알지 한사람의 픽숀창작이고 뒷부분은 지금의 김씨 족보와 일치하는 진정성 역사기록

일 것이다.

비록 투후 김일제 부분기록의 도말과 박.석 수준의 환상적 건국신화 창작이 목적이었을 것임에 따라

그들의 일족을 이끌고 사로국에 온  문무왕으로 부터 15대 조였던 그들이 태조라 칭하던 성한왕

김알지의 뿌리를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속의 가공인물을 창작하고 그를 성한왕의 인명 즉 투후제천

김일제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김알지라 명명하고 당사자는 성한왕과 이두문상 혼용하는 세한으로

가공하여 정교히 환상적 신화를 창작했으나 그 이후의 혈통은 사실 내용되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이미 탄탄한 역사시대, 특히 깊이 한화된 투성그룹들에게는, 이어서 조상들의 혈통기록은

소홀함이 없었을 것임으로 삼국유사에는 이 부분은 신화가 아닌 진정성을 가진 역사기록으로 추정되는

<이 좋은 날을 받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뒤에 그는 파사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미루어 짐작컨데 사로국 탈해왕이 외래의 성한왕 김알지에게 태자를 책봉했다는 사실은 사로국

기존세력이 얼마나 극진한 마음으로 이 외래세력을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므로 어쩌면 그들이 김해에

머물렀슬지 모를 성한왕 이주 세력의 사로국에로의 적극 유치를 했을런지 모른다는 추측과 일맥상통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성한왕 김알지는 겸양지덕을 발휘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고 신하의 위치에서 국가 발전에

헌신하는 태도를 취하였는바 오늘날 갈등과 마찰에 영일이 없는 세태를 바라보면서 선인들의 훌륭한

자세를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고 느껴진다.

지금 계림비각에 있는 대보공이라는 호칭은 그가 왕위를 사양하고 신하로서 국가에 봉사할 때 지녔던

호칭일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KBS 역사추적(이하 추적)과 관련,

나의 생각하나를 덛부치면서 이 테마의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추적에서는 문무왕 비문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박 석의 기존의 신라건국의 역사를 부인하고 먼 흉노족

출신의 투후를 내 세웠을까? 라면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다른 견해를 가지는데 문무왕 비문은 너무나도 명백한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 그리고 석탈해를 결코 부인한 적은 없으며 이 비문은 신라 왕통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왕통중 경주김씨계열의 기록일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추적이 그와 같은 시각을 갖게된 동기는 필시 그 비문에 투후제천 전칠엽 XX 십오대조 성한왕이라는

내용중 성한왕이라는 전혀 처음 접하는 어휘 때문인 것 같다.

즉 성한왕은 박혁거세 등이 있었을 법한 자리에 등장하여 왕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마치 그를 신라의

시조로 주장한 것같이 인식하게 되고 또 김인문 흥덕왕 비문에서의 태조 한왕(성한왕)이라는

내용 등에도 근거하여 추적이 이와 같은 인식을 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비문의 일반적 경향인 선조에 대한 기록은 혈연적 기록에 국한되며, 여기서의 성한왕은 신라의

국왕의 지위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중국 투성제후국이 왕이라는 호칭이라는 사실 투후제천 김일제의

칠대손 성한왕 김알지의 내용을 김일제 김알지의 인명을 우르러 받드는 선조의 이름석자를 거명할 수

없어 생략하였을 것이라는 사실, 태조라는 의미는 성한왕 김알지가 사로국에 김씨 그룹이 이주할 당시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사로국의 새로운 그들의 민족사에 첫머리에 붙혀진 상징적인 어휘로 볼수 있다는

점등을 감안하면 문무왕 비문의 내용 해석에 전혀 걸림이 없을 뿐더러 하물며 확고부동한 박혁거세

신라건국의 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라고 사료된다.

이제 내 나름데로 마음을 모아 관찰하고 또 추측하여 정리한 김알지-성한왕 테마의 글을 마무리 한다.

언젠가 신라 김씨왕족의 연원에 대해 통설이 정립될 것이고 또 미스테리로 느껴지는 김알지신화 창작

배경도 그중에 포함될 것이다.

언제쯤일지 또 그 내용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의 이상의 글은 많은 억측이 포함되었을런지 모르겠으나 혹여 유력한 가설로 평가 될만한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자화자찬의 지나친 기대가 될까?

 계림의 눈부신 퍼래이드 장면을 상상했었던 것 만으로도 이 글을 쓴 보람과 이득이 내게는 있었던

것 같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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