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뿌리찿기

경주 김씨(慶州金氏) 대표 파조(派祖)들

오늘의 쉼터 2010. 3. 7. 14:36

 

경주 김씨(慶州金氏)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원조(遠祖)인 김알지(金閼智)는 서기 65년(신라 탈해왕 9년) 3월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脫解王)은 '하늘이 내려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사성(賜姓)하였고, 또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기록하고 있다.

서기 262년 그의 7세손인 미추(味鄒)가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로부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ㆍ김알지의 28세손)까지 38명이 신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 경주 김씨 족보.

김해 김씨계와 더불어 김씨의 2대 주류를 이루는 대보공(大甫公) 알지계(閼智系) 가운데서도 그 대종을 이루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경순왕의 셋째 아들 명종(鳴種)과 넷째 아들 은열(殷說)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후에 후손들 중에 출세한 인물이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파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종(鳴種)의 후손인 영분공파(永芬公派)와 은열의 후손인 대안군파(大安君派)ㆍ병판공파(兵判公派)ㆍ백촌공파(白村公派)ㆍ정백공파(正伯公派)ㆍ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ㆍ태사공파(太師公派)ㆍ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역대에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열공파(殷說公派)와 태사공파(太師公派)로, 경주 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 파에서 나왔다.

 

▲ 경주시 도지동 형제산 능곡에 자리한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의 묘.


영분공파(永芬公派) 파조(派祖)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은 경순왕의 셋째 아들로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군되었으며, 6세손 예겸(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公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손자 의진(義珍ㆍ?∼1070)은 고려 초기의 문신으로 사학(私學)을 세워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다. 문종 초기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고, 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ㆍ지공거(知貢擧)ㆍ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등을 역임하고,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시호는 양신(良愼).

의진(義珍)의 증손자인 영고(永固)는 일찍이 흥교도관역사(興郊道館驛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크게 얻었다. 명종 3년(1173년)에 구주에서 재임중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영주(寧州) 옥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흥교의 이민(吏民)들이 처치사(處置使)에게 애원하여 처형을 면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뒤, 친분이 있던 승선 이준의(李俊儀)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며, 그 뒤에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祗候)에까지 이르렀다.

영고(永固)의 아들 인경(仁鏡ㆍ?∼1235)은 초명(初名)은 양경(良鏡)이며, 명종 때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하여 직사관(直史官)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 초에 조충(趙沖)이 강동성(江東城)의 거란을 토벌할 때 판관으로 보내졌는데, 이때 몽골과 동진(東晉)도 거란을 공격하며 고려에 병량(兵糧)을 청하자, 그는 사신으로 들어가 손오병법(孫吳兵法)을 역이용하여 거란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이 된 뒤 문무의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고종 14년(1227년)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撰修)하였다. , 시사(詩詞)가 청신하고 당대에 유행하는 시부를 잘하여 세상에서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칭송하였고, 서체는 예서에 뛰어났다. 시호는 정숙(貞肅).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자리한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과 태사공(太師公) 김인관(金仁琯)의 영단(靈壇).


▲ 1784년 개성에서 발굴된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묘지석 탁본.

 

 

은열공파(殷說公派) 파조(派祖)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ㆍ937~1028)은 경순왕과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王后)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 사이의 넷째 아들로 김알지의 29세손이 된다. 관직은 공부시랑(工部侍郞ㆍ6조의 하나로 공조의 정4품 벼슬)을 거쳐 평장사(平章事ㆍ정2품)을 지내고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다.

정조 8년(1784년)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에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高麗平章事 輔國大安君 金公殷說墓誌銘)을 발견하였다. 그 지석 한쪽 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 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 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라고 하였다.

이 묘지명은  2매의 탁본(拓本)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크기는 92.3 x 31.5 cm로 제1매는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라는 제호(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제2매는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은열(殷說)의 후손이라 일컫는 김씨는 경주 김씨 말고도 청풍 김씨(淸風金氏), 김녕 김씨(金寧金氏),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ㆍ上洛金氏), 도강 김씨(道康金氏), 영광 김씨(靈光金氏), 영산 김씨(靈山金氏), 연주 김씨(燕州金氏), 양근 김씨(楊根金氏), 수원 김씨(水原金氏) 등과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일파로 김렴(金濂)의 후손 등이 있었다.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 의하면 경주 김씨 중 은열공(殷說公)의 후손이라 일컬은 계파가 두 파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고려 때 장군 순웅(順雄)을 중시조(中始祖)로 삼는 계파만을 다루기로 한다.

순웅(順雄)의 12대손인 균(梱ㆍ1341∼1398)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지윤(智允)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9년(1360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했으나 과거에는 실패했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친구인 조준(趙浚)의 천거로 전법판서(典法判書)에까지 승진하였다. 조선 개국 후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 계림군(鷄林君)에 책봉되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보국숭록 좌찬성(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그 자신이 공신이면서 아우 온(穩), 당숙 의(義) 등이 또한 개국원종공신이었다. 시호는 제숙(齊肅).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편리에 자리한 제숙공(齊肅公) 김균(金梱)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105호.

균(梱)의 후손은 계림군파(鷄林君派)로 대표적인 일문을 이루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정승 3명과 많은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균(梱)의 손자 종순(從舜ㆍ恭胡公)은 세조(世祖)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는데, 그의 자손에서 대대로 양상현신(良相賢臣)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의 아들 치운(致運)은 이조참판(吏曹參判), 치운(致運)의 아들 천령(千齡)은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천령(千齡)의 아들 만균(萬鈞)은 중종(中宗) 때 문과에 장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와서 예조(禮曹)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명종(明宗) 때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그의 아들 명원(命元)이 선조(宣祖) 때의 좌의정(左議政)이었다.

 ▲ 충익공(忠翼公) 김명원(金命元)의 아버지 대사헌 김만균(金萬均)의 묘. 1975년 파주서 천묘하였다.

명원(命元ㆍ1534∼1602)은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으로 대사헌 만균(萬均)의 아들이다. 명종 16년(1561년) 문과에 급제해 종성부사(鐘城府使)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을 때 정여립(鄭汝立)을 탄핵하여 그 공으로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서 서울과 임진강을 지키다 실패했으나, 평양이 적에게 함락되자 순안(順安)에 주둔하면서 왕의 행궁(行宮)을 잘 지켰다. 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 4조의 판서를 역임한 뒤 선조 30년(1597년) 왜병이 재침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공을 세웠고, 선조 33년(1600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병서와 궁마에도 능했다. 시호는 충익(忠翼).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자리한 충익공(忠翼公) 김명원(金命元)의 묘. 고양시향토문화재 제10호.

명원(命元)의 손자 남중(南重ㆍ1596∼1663)은 자는 백진(白珍), 호는 야당(野塘)으로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假注書)로서 입시(入侍)하였고, 그 후 병조좌랑ㆍ수찬(修撰)ㆍ장령(掌令)ㆍ부수찬ㆍ사간을 거쳐 1632년 집의(執義)가 되고 추숭도감도청(追嵩都監都廳)을 겸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강화도의 수장(守將)을 처단하기를 상소하고, 척화신(斥和臣)들을 문책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효종 9년(1658년)에는 공조판서가 되고, 현종 2년(1661년) 형조판서ㆍ예조판서ㆍ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역대인감(歷代人監)’이 있다.

 

 
▲ 야당(野塘) 김남중(金南重)의 유묵.

남중(南重)의 손자인 주신(柱臣ㆍ1661~1721)은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ㆍ세심재(洗心齋)로 숙종의 장인이며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숙종 12년(168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 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 있을 때는 명판으로 이름이 높았다. 1702년에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ㆍ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ㆍ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당대의 문사 최석정(崔錫鼎)ㆍ김창협(金昌協)ㆍ서종태(徐宗泰)들과 가까웠으며,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숙종이 승하하자 슬퍼한 끝에 병들어 사망하였으며, 저서로 ‘거가기문(居家紀門)’ㆍ‘산언(散言)’ 등이 있다. 시호 효간(孝簡).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자리한 효간공(孝簡公) 김주신(金柱臣)의 묘.


효간공(孝簡公)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숙종의 계비(繼妃)가 된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감회의 글을 적은 책.

주신(柱臣)의 딸로 숙종의 계비(繼妃)가 된 인원왕후(仁元王后)는 영조 33년(1757년) 경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에 대한 감회의 글을 짓고 그 제목을 ‘선군유사’와 ‘선비유사’로 붙였다. 인원왕후는 ‘선군유사’에서 아버지 주신(柱臣)을 일컬어 “궁궐을 출입할 때마다 근신하여 나막신의 앞 부분만 보고 다녀 10년이나 아버지를 모신 나인도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딸인 자신에게조차 신하의 예를 다해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사목(思穆ㆍ1740~1829)은 자는 백심(伯深), 호는 운소(雲巢)로 음보(蔭補)로 기용된 뒤 특지(特旨)로 김제군수가 되었다. 영조 48년(177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ㆍ부승지를 거쳐, 1774년 승지(庭試文科)가 되었다. 정조 7년(1783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ㆍ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1788년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우택(雨澤)에 대한 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고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800년 순조(純祖)가 즉위한 뒤 병조ㆍ예조의 판서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 등을 거쳐 1808년 우의정, 1819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1828년 중추부영사 겸 군자감도제조를 역임하였다. 천부적으로 영민ㆍ성실하여 낮은 관직이라도 성심껏 봉사하였다. 공직생활 70년 동안 영조ㆍ정조ㆍ순조 세 임금을 섬겼으며, 원로정승이 되어 회방(回榜ㆍ登科回甲)으로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검약을 생활신조로 삼았으며, 안일한 생활을 구하지 않는 교훈을 실천에 옮겼다. 시호 경헌(敬獻).

효대(孝大ㆍ1721∼17815)는 자는 여원(汝原)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 후연(後衍)의 아들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金柱臣)의 손자이다. 영조 13년(1737년) 음보(蔭補)로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이 되고 영조 24년(1748년) 고양군수(高陽郡守)로 재직할 때 향교(鄕校)의 제위(祭位)를 양무(兩黛)로 하도록 왕에게 직접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다. 영조 29년(1753년)에는 낭관(郞官)으로 숙종(肅宗)의 존호(尊號)를 올리는데 참여하였으며, 1756년에는 선천부사(宣川府使)를 지내고 영조 34년(1758년)에는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역임하였다. 그뒤 승지ㆍ공조참판ㆍ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정조 2년(1778년)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1780년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1781년에는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

창희(昌熙ㆍ1844~1890)는 자는 수경(壽敬), 호는 석릉(石菱)ㆍ둔재(鈍齋)로 예조판서 정집(鼎集)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명릉참봉(明陵參奉)이 되었으며, 고종 1년(1864년)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내외직을 거쳐 공조ㆍ이조ㆍ병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우승지ㆍ대사성 등을 거쳐 1876년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냈다. 이어 이조ㆍ병조의 참판과 대사헌 등을 역임, 1880년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청나라에서 온 마건충(馬建忠)ㆍ정여창(丁汝昌)의 영접관으로 일하고, 1884년 공조판서에 이어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시호 문헌(文憲).


▲ (좌)충헌공(忠獻公) 김홍집(金弘集) 초상. (우)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84년 6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복동에 세워진 김홍집 영세불망비.

홍집(弘集ㆍ1842∼1896)은 초명은 굉집(宏集),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ㆍ이정학재(以政學齋)이다. 고종 4년(1867년) 경과정시(慶科庭式)로 문과에 급제, 흥양현감(興陽縣監)을 거쳐 1880년 예조참의로 있을 때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하여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소개하고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한 공으로 예조참판에 승진했으나 유학자들의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사직하였다. 고종 19년(1882년) 구미열강의 통상요구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 복잡한 국제 문제에 부딪히자 다시 기용되어 한미(韓美)ㆍ한영(韓英)ㆍ한독(韓獨) 등 수호조약 체결의 부사(副使), 제물포조약 체결의 부관(副官)으로서 외교수완을 발휘,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예조판서ㆍ한성부 판윤을 지내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의정ㆍ좌의정 등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후 사임, 한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패하자 친일세력의 대두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 대신이 되었다. 1896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강력한 친일세력인 제2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으로서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세우고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ㆍ서광범(徐光範)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이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들어섰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죽인 뒤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을미사변 및 단발령의 강행 등으로 대일(對日)감정이 극도로 악화,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전국이 혼란함을 틈타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파[親露派]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다. 이로써 많은 대신들이 피살되었으며, 자신도 광화문에서 친러파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순종 때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자리한 충헌공(忠獻公) 김홍집(金弘集)의 묘. 고양시향토유적 제24호.

 

태사공파(太師公派) 파조(派祖) 태사공 인관(仁琯)은 제56대 경순왕의 후손, 혹은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7대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고려 예종 19년(936년) 요(遼)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했으나 여진의 병란으로 길이 막혀 회행했다. 족보와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예종(睿宗)은 전년에 대비(大妃) 국상을 당하여 요(遼)나라 왕이 조문사로 왕경(王儆)을 보내와 조문하고 아울러 낙기복(落起復)을 칙명으로 허락했다. 왕은 이에 대한 사은사를 요(遼)에 파견했는데, 이때 사신이 바로 낭중(郎中) 인관(仁琯)인 것이다. 낙기복(落起復)이란 상중에 있는 자를 탈상하게 하고 평상생활을 하게 하며 관직에도 복귀함을 뜻하는 것으로, 3년 탈상을 당겨 탈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상서도성(尙書都省) 좌사랑중(左司郞中) 재임시 발영시(拔英詩ㆍ3품 이상의 조관이 응시하는 과거)에 괴탁과(魁擢科)에 등과했으며, 그후 문하시랑 평장사 주국 개국자 경조현에 녹작되고 검교태자 태사(檢校太子太師)로 치사하였다.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세워진 태사공 김인관(金仁琯)의 영단비(靈壇碑).

인관(仁琯)의 8대손
자수(子自)는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으로 공민왕 23년(1374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고,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해 회교(回敎)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侍事)에 이르렀고, 공양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ㆍ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 천변이 자주 일어나자 숭불(崇佛)의 잘못을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주장했다. 뒤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좌상시(左常侍)ㆍ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뒤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로써 충절을 지켰다.


▲ (上)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에 자리한 상촌(桑村) 김자수(金子自)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98호. (下)김자수의 묘 옆의 세우지 못한 비석. 8세손 김홍욱(金弘郁)이 눞혀 묻어 두었으나 1928년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 상촌(桑村) 김자수(金子自)와 손자 김영년이 살던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선지당(先志堂). 김영년은 문종 때 강릉판관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자수(子自)의 8세손 홍욱(弘郁ㆍ1602∼1654)은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州)로 인조 13년(16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검열(檢閱)로서 설서(說書)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송했고, 전적(典籍)ㆍ지평(持平)ㆍ수찬(修撰) 등 3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인조 22년(1645년) 이조좌랑(吏曹佐郎) 때 권신(權臣) 김자점(金自點)의 뜻에 거슬려 사직하였다가 인조 25년(1648년) 복직하여 응교(應敎)로 있을 때 관기숙청(官紀肅淸)과 민생고의 해결책을 상소하였다. 효종 초에 사인(舍人)ㆍ승지(承旨)ㆍ충청도 관찰사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5년(1654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앞서 인조 23년(1646년)에 사사(賜死)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와 그 뒤에 유배되어 죽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즉위 초부터 이 문제에 대한 발언을 금지했던 효종(孝宗)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냄에 격노하여 그를 투옥시키고 친국(親鞠)하였는데, 계속된 고문으로 장사(杖死)하였다. 뒤에 이를 후회한 효종은 그를 신원(伸寃)하였으며, 숙종 44년(1718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上)문정공(文貞公) 김홍욱(金弘郁) 유묵과 충남 서산시 대산면 묵수지에 자리한 신도비각. (下)김홍욱(金弘郁)을 제향하기 위해 1719년 창건되었고, 1721년 사액된 충남 서산시 읍내동 성암서원(聖巖書院)은 1871년 훼철되었다가 1924년 재건하였다.

홍욱(弘郁)의 후손에서는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은열공파(殷說公派) 명원(命元)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영의정 흥경(興慶)을 비롯하여 예조판서 이주(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노경(魯敬), 노경의 아들이 서예가 정희(正喜)다.
그외 판서 노응(魯應)과 좌의정 도희(道喜) 부자, 영조(英祖)의 국구(國舅)로 어영대장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중된 한구(漢耉), 우의정을 역임한 관주(觀柱)가 모두 홍욱(弘郁)의 후손이며, 또한 노론(老論)의 거두 유경(有慶)은 그의 종증손이 된다.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1809년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종자를 필통에 넣어 가지고 와서 고조부인 김흥경(金興慶)의 묘 옆에 심은 백송(천연기념물 제6호). 백송 뒤로 정헌공(靖獻公) 김흥경의 묘가 보인다.

홍욱(弘郁)의 손자 흥경(興慶ㆍ1677~1750)은 자는 자유(子有)ㆍ숙기(叔起), 호는 급류정(急流亭)으로 아버지는 두성(斗星)이다. 숙종 25년(169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뒤, 검열(検閲)ㆍ주서(注書)ㆍ정언(正言)ㆍ승지ㆍ대사간 등을 두루 지냈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중 경종 1년(1721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당했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에 다녀왔으며, 영조 3년(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이광좌(李光佐) 등이 집권하자 한성부 판윤에서 밀려났다.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복직되었으나,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 다시 파직되었다. 1730년 좌참찬으로 복직된 뒤 이조판서ㆍ우의정을 거쳐 1735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정헌(靖獻).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자리한  정헌공(靖獻公) 김흥경(金興慶)의 묘.

유경(有慶ㆍ1669∼1748)은 자는 덕유(德裕), 호는 용주(龍州)로 진사 두징(斗徵)의 아들이다. 슥종 36년(17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ㆍ대사간ㆍ대사헌ㆍ동지경연(同知經筵)을 지내고, 다시 참판ㆍ도승지ㆍ한성판윤ㆍ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바른 말을 잘하며 불의를 참지 못했다. 숙종 때 처음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가 통신사(通信使) 조태억(趙泰億)이 국위를 손상시킨 죄를 탄핵하고, 영조 때 구신(舊臣)을 모두 몰아낸 실정을 맹렬히 논하다가 제주도의 대정(大靜)에 귀양갔고, 영광(靈光)으로 옮겨졌다. 영조 6년(1730년) 형조참판으로서 김일경(金一鏡) 일파의 남은 무리 제거와 탕평론(蕩平論)의 폐를 혹평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으며, 영조 9년(1733년) 부제학(副提學)이 되어서도 계속 탕평의 해를 극언하여 결국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영조 20년(1744년) 대사헌이 되었고, 영조 22년(1746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영조 24년(1748년) 숭록(崇祿)에 특진되었으며 그 해에 사망했다. 시호는 효정(孝貞).                  

   
▲ 효정공(孝貞公) 김유경(金有慶)의 간찰.             
  
한신(漢藎ㆍ1720~1758)은 자는 유보(幼輔), 호는 정미와(靜美窩)로 영의정 흥경(興慶)의 둘째 아들이다. 1732년 그가 13세에 영조(英祖)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월관동(月官洞ㆍ지금의 종로구 적선동)에 살았다.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ㆍ제용감 제조(濟用監提調)에 이르렀으나,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았다. 인물이 준수했고 키가 컸으며, 총명하였다. 특히 글씨는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애책문(哀冊文)ㆍ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으며, 인보(印寶)를 전각(篆刻)하는 등 전각(篆刻)에도 뛰어났다. 그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식음을 전폐하고 14일만에 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달리했으며, 그 정려문(旌閭門)이 묘의 이웃에 있다. 시호는 정효(貞孝).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자리한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

한신(漢藎)이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柱ㆍ?~1797)를 양자로 삼았다. 이주(柱)는 영조 47년(1771년) 지평(持平)으로 있다가 이듬해 승지를 거쳐 1773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정조 8년(1784년) 독옥책관(讀玉冊官)으로 있으면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뒤 승진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1785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교체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을 지낸 뒤 계속 대사헌을 연임하였다. 1790년 행부사직(行副司直)ㆍ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죽은 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

 


▲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자리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생가. 충남기념물 제68호.

한구(漢耉ㆍ1723~1769)는 호조참의를 지낸 선경(選慶)의 아들이며, 호조참판을 지낸 한기(漢耆)가 형이다. 영조 35년(1759년) 그의 딸이 영조의 계비(繼妃)로 뽑혀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되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1763년에는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어, 주로 서울과 수도권 방위를 맡았다. 1764년 아들 구주(龜柱ㆍ1740~1786)가 왕과 친분이 있는 신하로서 당론에 관여하였다 하여 파직당할 때,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하여 함께 파직되었다. 그러나 1766년에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 복직되고 이듬해에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다. 그가 국구(國舅)가 됨으로써 아버지 선경(選慶)을 배향하고 있는 서산 성암서원(聖巖書院)이 훼철된 지 19년만인 1760년에 복구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


▲ 영조의 국구(國舅)인 충헌공(忠憲公) 김한구(金漢耉)의 묘.
 
월성위(月城尉) 한신(漢藎)의 손자인 노경(魯敬ㆍ1766∼1840)은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으로 서예가 정희(正喜)의 아버지다. 순조 5년(18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판서(判書)에 이르렀고, 사절로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했다.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1830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있을 때 삼사(三司)와 의정부(議政府)의 탄핵을 받아,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40년 사사(賜死)되었다. 사후 철종 9년(1858년) 관직이 복구되었으며, 필적이 뛰어나 아들 정희(正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금석으로 경주의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와 안변(安邊)의 ‘신의왕후탄강구기비(神懿王后誕降舊基碑)가 있다.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인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의 유묵.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영정과 유묵.

노경(魯敬)의 아들 정희(正喜ㆍ1786∼1856)는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제가(朴齊家)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ㆍ금석학(金石學)ㆍ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판독하여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18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ㆍ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840년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만에 풀려났고, 1851년에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관련되어 함경도 북청(北靑)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풀려났다. 이후 과천(果川) 관악산 및 선친의 묘역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경학ㆍ음운학ㆍ천산학ㆍ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祭日通儒)’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ㆍ서ㆍ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 전각(篆刻)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는데, 별호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 서화의 낙관에 사용하였고,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 두 부인인 한산 이씨ㆍ예안 이씨와 합장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묘.

노응(魯應ㆍ1757∼1824)은 자는 유일(唯一), 호는 일와(一窩)로 정조 10년(1786년) 진사에 합격하고, 헌릉참봉(獻陵參奉)을 거쳐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등을 지냈다.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로 있으면서, 순조 5년(180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郎)ㆍ정언(正言)ㆍ지평(持平) 등을 거쳐 1807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ㆍ부윤(府尹)ㆍ관찰사(觀察使)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형조판서ㆍ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고, 1822년 병조판서 겸 동지성균관사(兵曹判書兼同知成均館事)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학술도 매우 해박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


▲ 효헌공(孝憲공) 김도희(金道喜)의 간찰.
 
노응(魯應)의 아들 도희(道喜ㆍ1783∼1860)는 자는 사경(士經), 호는 주하(柱下)로 순조 13년(18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ㆍ설서(說書)ㆍ참의(參議)를 지냈다. 이조참판ㆍ경기도 관찰사ㆍ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고 헌종 4년(1838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에 올랐다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은퇴했다. 철종 2년(1851년)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이 되어 ‘헌종실록’을 편찬했다. 영진(營鎭) 소속의 평민을 능욕하는 영장(營將)의 폐단을 꺼려 영장의 혁파를 건의했고, 서원을 함부로 건립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사절들의 노자와 관련된 폐단을 개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시호는 효헌(孝憲).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에 자리한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金將有)와 배(配) 삼산 신씨 단소.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에 자리한 3세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김을식(金乙湜)의 묘.


▲ 1685년 판각된 충북 보은군 보은읍 북실을 근거로 하고 있는 판도판서공파 족보 판목.

 

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 파조인 장유(將有)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고려말에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내다가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충북 보은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종(中宗) 때의 학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는 정(淨)이다. 정(淨ㆍ1486∼1520)은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으로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이다. 성종 11년(150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순창군수(淳昌郡守)ㆍ부제학(副提學)ㆍ도승지(都承旨)ㆍ대사헌ㆍ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미신 타파, 향약(鄕約)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削除) 등을 주장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그 뒤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보은(報恩)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 충암(沖菴). 김정(金淨)의 유묵과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에 자리한 김정의 묘.

 

호장공파(戶長公派) 위영(魏英)을 파조(派祖)로 하고, 그의 손자 근(覲)이 문종 34년(1080년)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ㆍ예부시랑(禮部侍郎) 박인량(朴仁亮) 등을 따라 송(宋)나라에 다녀왔고, 선종 때 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으며, 국자좨주(國子祭酒)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렀다. 그의 시문은 송나라에서 절찬을 받았으며, 중국인에 의해 박인량의 작품과 합친 ‘소화집(小華集)’이 발간되었다.

그의 아들 부필(富弼)ㆍ부일(富佾)ㆍ부식(富軾)ㆍ부의(富義) 4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라 나라에 공헌했다. 첫째 부필(富弼)은 고려 선종(宣宗) 때 과거에 올라 예종(睿宗) 때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여진(女眞) 정벌 때 공을 세웠으며, 둘째 부일(富佾)은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를 거쳐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왕을 비롯하여 보문각 유신들게게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이름을 떨쳤다. 셋째 부식(富軾)은 현존하는 최초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편찬하고 이어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을 주재하는 등 이름난 문장가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아들 돈중(敦中)은 좌승선(左承宣), 돈시(敦時)는 상서우승(尙書右承)을 지냈다. 그러나 김부식의 후손은 전하지 않는다.


 ▲ 고려 인종 23(1145)년에 임금의 명으로 김부식이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역사를 적어 펴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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