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꽃밭 ♥
드넓게 펼쳐진 보리밭, 차라리 고요한 바다 수면水面 이라 하자.
햇살에 물비늘이 남실거릴 뿐,
수면은 황금색으로 눈부시나 바람 한 점이 없다.
미세한 소리라도 있으면 튕겨 오를 것 같은 장력마저 느껴진다.
긴장이 고비를 넘어설 때, 어디선가 실바람이 실려와 수면위에
사붓대니 자디잔 물결이 일면서 물 주름이 하나 둘 수를 불린다.
물 주름은 수런수런 낮은 파도로 바뀌고,
모래톱에는 겹겹으로 파도주름이 잡혀나간다.
겹겹의 파도주름이 바람의 몸집을 키우면서 바다를 차고 일어나자,
미진이 일며 암울한 소리로 바다가 속울음을 토한다.
수면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른 속울음은 너울을 부추기고,
너울은 바다를 에둘러 산더미 파도를 일으키더니 마침내 청공靑空에
하얀 포말로 산화된다. 그것은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칠 바람과 바람 소리,
파도와 파도 소리의 절정을 예비하는 전조다.
때가 이르러 하늘을 가득 채웠던 햇살이 먹장구름으로 변하여 바다를
덮어버리자, 일진광풍은 휘모리장단으로 파도를 휘몰아간다.
물 위를 떠돌던 갈매기들이 화들짝 공중으로 퉁겨져 날아오르고,
황금빛 바다를 이룬 보릿대 군락이 비틀비틀 몸서리를 쳐댄다.
그렇게 시작된 휘몰이는 끝없는 반복으로 격정의
클라이맥스를 이끌어 나간다.
이윽고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으니 하늘과 바다는 하나 되어
우뚝 멈춰 선다. 모든 것이 정지된 시 공간視空間, 격정의 자리에
다시 들어선 것은 또 다른 고요, 적막이다!
적막이 몰고 온 긴장은 짧은 시간을 영원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 끝자락에서 가녀린 바람꽃이 홀연 피어나더니 휘몰이는 비로소
잦아들고 바다를 일으켜 세웠던 물기둥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물결은 황금색깔을 되찾고, 날파람은 바다로 스며들면서
보리밭에 결 고운 흔적을 남겨놓는다.
그 순간, 황금빛 물결을 이룬 보릿대들이 크고 작은
바이올린 활대로 바뀌고 있다.
150여 바이올린 활대가 일시에 한 움직임을 일으켜 큰 너울로
황금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손아귀에서 일시에 풀려난 마법 같은 소리의 울림이었다!
그래 그 울림은 가슴 가슴에 아름다운 소리꽃밭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꽃, 꽃꽃꽃.
‘꽃’이라는 글자의 모양새는 어찌 그리 꽃 같을까.
‘꽃꽃꽃’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처럼 더욱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평소에 주목을 덜 받는 들꽃이라도 군락을 이루어
모둠 꽃이 될 때면 한층 더 아름답다.
보름 달빛 아래 하얗게 만발한 메밀밭과 개망초 군락,
가을 산하를 노랗게 물들이는 소국의 무리가 그러하다.
비단 꽃뿐이 아니다. 산등성이를 뒤덮어 거대한 솜털 밭을 이루는
억새가, 떼 지어 하늘을 수놓는 철새들의 무량한 군무가,
바다 속 어족들의 일사불란한 유희가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2002년 유월, 전국을 붉은 도가니로 만들었던 붉은 악마들의 응원
물결이나 얼마 전 도심의 밤을 사위었던 무언의
촛불 물결은 군집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이렇듯 군집을 이루어 장관을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인간 감정의 굴곡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공명 악기 바이올린.
한 사람의 연주로도 수천 명의 청중들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는 현악기이다.
바이올린이 둘, 다섯, 열을 넘겨 합음을 이룰 때도 여전히
그 소리는 미감美感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백오십 명에 달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아름다운 소리의
군락을 지어 나의 청공간聽空間에 가득 채워들 때,
공명의 파고로 온몸은 전율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열정이 모여 소리꽃밭을
이룬 조화의 결정체였다. ‘김남윤’은 창조주가 아직 내보이지 않았던
조화의 틀을 150명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동원하여 보여주었던 것일까.
‘김남윤과 150인의 바이올리니스트’ 무대 위 소리꽃밭에 휘몰아쳤던
휘모리장단, 한 해를 보내는 끝자락 허허로운 소리만 난무했던 세밑에
그나마 따뜻한 위로의 한마당이었다.
<소설가, 수필가 박 종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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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리듬은 음악의 리듬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음악의 리듬에 따라 삶도 변화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인 중에 화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외국의 한 병원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실어증 환자가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차도를 보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랜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고향의 그림하나로 위안을
받고 마음을 열게 됨은 대단한 교감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마치 연주회에 와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감미로운
글을 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글을 드리며
메마른 가슴과 영혼의 단비를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가족 여러분…
악기는 다 눌 줄 몰라도 들을 수는 있습니다.
문화생활이 삶의 사치라는 생각을 잠시 접고
지하철 역사에서의 작은 음악회라도 귀를 기울이시며
바쁜 걸음 잠시 쉬었다 가심도 좋을 듯합니다.
내일을 위하여…
♣ 이 규 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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