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1351~1374)

오늘의 쉼터 2009. 7. 30. 16:58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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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제31대 공민왕(恭愍王,1351~1374)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勿).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

(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

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폴髮) ·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

(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

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

다. 내정에서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

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해졌다.

특히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륜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작품에《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노국대장공주진(眞)》《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을사 십사년 춘 정월 무신에 밀직부사 김유를 원에 보내어 덕흥군을 잡아 보내도록 청할새 유가 요양에 이르니 지추밀원사 흑려가 유에게 이르기를 「제가 신에게 칙명하사 탑사첩목아를 곤장쳐서 그 본국으로 돌려 보내라는데 이제 바야흐로 등창을 앓고 있으니 그 낫기를 기다려 곤장쳐서 돌려 보내리라」고 하거늘 유가 이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병자에 밀직 정사도로 경상도순문사를 삼고 첨의평리 이금강으로 전라도순문사를 삼고 지첨의 홍순으로 서북면순문사를 삼고 좌상시 이성림으로 서해도순문사를 삼고 판전교사사 신익지로 양광도순문사를 삼았다.

 기묘에 지진이 있었다.

이월 정유에 공주가 임신하여 만삭(미월)이므로 이죄 이하를 사하였다.

 갑신에 공주가 병이 심하거늘 또 일죄(사죄)까지 사하였다.

 이날 공주가 붕어하매 왕이 태후를 받들어 덕녕공주전에 이어하고 삼일간 조회를 그쳤으며 백관은 현관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

 계축에 황원군 최백 좌부대언 금정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병신에 밀직부사 이자송을 보내어 요양에 가서 흑려에게 백금 및 안장(안)을 주었다.

 삼월 경신에 왜가 교동 강화에 침구하거늘 동서강도지휘사 찬성사 최영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동강에

 출진케 하였다.

 임술에 밀직부사 양백연을 원에 보내어 공주의 상을 고하였다.

 무신에 여진의 소음산 소응가 아두자 등이 항복을 청하거늘 삭방에 살게 하였다.

 기사에 원이 이부시랑 왕타례독 이부주차 호천석을 보내와 왕을 책하여 태위를 삼고 인하여 주를 사하였으며

또 임인(년)의 홍적평정의 공으로써 한방신에게 비서감승을 안우경에게 광문감승을 황상에게 경정감승을

이구수에게 태복사승을 이여경에게 숭문감승을 선수하니 모두 관급(계)이 봉훈대부이었다.

 왕이 행성에서 맞이하고 인하여 사신을 향연하였다.

 왜가 창릉에 들어와 세조의 진영을 취하여 써 돌아가거늘 금속명으로 동서강도지휘사를 삼았다.

 기묘에 령도첨의 이공수에게 명하여 창릉에 나아가서 다시 세조의 위판을 봉안케 하였다.

 경신에 류탁으로 도첨의시중을 삼고 경천흥으로 수시중을 삼고 이수산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이인복 송경 안우경 최영 이구수로 찬성사를 삼고 이인임 금속명으로 삼사우좌사를 삼고 이순 안우상으로 판개성부사를 삼고 우제 한휘 금귀 이금강 양백익으로 첨의평리를 삼고 홍순으로 지도첨의를 삼고 원송수로 정당문학을 삼고 박춘으로 판밀직사사를 삼고 지용수 송인속으로 밀직사를 삼고 류연 양백연으로 지밀직사사를 삼고 이색으로 첨서밀직사사를 삼고 왕중귀 김원명 조희고로 동지밀직사사를 삼고 변안열 한공의 이자송 김유 염지범 홍사범으로 밀직부사로 삼고 최맹손으로 밀직제학을 삼고 한방신으로 서원군을 삼고 류숙으로 서녕군을 삼고 불화첩목아로 고성군을 삼았다.

 무자에 밀직부사 홍사범을 원에 보내어 책명을 사하니 표에 이르기를 「선조의 유업(서)을 천수하매 빛나게 천리의 봉함을 받았고 상심(천자의 마음)에 뽑히게(적간)되매 또한 삼공의 대명을 주시었(석)나이다 뜻하지 못한 은혜에 감격은 부끄럼과 함께 하였나이다

 신은 두소의 천열한 재질에 번국의 후예로서 유시부터 궁중에 들어가 천자(예)의 권애를 맏아써 입신양명(입양)을 이룩하였으니 비록 촌심에 항시 어리석은 정성(충)을 품었으나 보공을 펴지 못하다가 우연히 시사의 이르름을 만나 조금 견마(자신의 겸사)의 성을 바쳤나이다 그러나 파리3)가 울타리에 앉으니(승지번) 마침내 무구의 화를 만났고 물고기가 그물을 벗어난 것 같음은 실로 보전의 은혜(사)를 입었나이다

 겨우 경생함을 얻었으니 절대로 타망은 없아온데 갑자기 칙사의 수레가 내림하매 새서(옥새찍은 책명)가 이에 있음을 놀랐나이다 사양코자한즉 이름얻고자 함에 가까운(근명)고로 억지로(민면언)직에 나아가게 되니 멀리

지족 부끄러워 하며 깊이 만영(차면 기운다는 것)을 경계하나이다 황제폐하께서는 중흥의 운을 맞이하여 일시

동인하심으로 드디어 성혜(무악)를 반포하여써 원방을 총애하시니 신이 삼가 가문의 명성을 보존하여 더욱 성화를 나타내겠나이다 구소(구중 궁궐을 뜻함)가 비록 멀지마는 보불의 빛을 보는 것 같고 사경이 대개 편안하니

오직 여강여릉의 수를 비나이다」라고 하였다.

 하 사월 신묘에 오왕 장사성이 사자를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임진에 공주를 정릉에 장사하였다.

 무술에 평성부원군 김일봉이 졸하였다.

 기해에 왜가 교동 강화에 침구하여 동서강에 이르거늘 찬성사 안우경 이구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려 이를

방어케 하였다.

 신축에 가뭄으로 우제하였다.

 양백연으로 서북면도순위사를 삼고 전한양윤 김달상으로 양광도도순문사를 삼았다.

 감찰대부 전록생 환자 부원군 방절을 원에 보내어 예물을 황태자에게 드리고 또 곽확첩목아 및 심왕 등에게도 증여하였다.

 최백 양백연 홍사범 등이 원의 소란으로 길이 막혀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인에 전리판서 김선치로 동북면도순문사를 삼고 례의판서 이수로 서북면도병마사를 삼았다.

 갑진에 전록생으로 밀직제학을 삼고 김선치로 밀직부사를 삼고 김광조로 부천군을 삼고 김달상으로 화의군을 삼고 이자송으로 공천군을 삼고 김한귀로 감찰대부를 삼았다.

 병오에 지평주(평산)사 이수가 탐오하므로 백칠을 곤장쳐서 제명하였다.

 오월에 요승 편조로 사부를 삼고 국정을 자문하였다. 을축에 지진이 있었다.

 경오에 김보 이춘부로 도첨의찬성사를 삼고 임군보 김란 박희로 밀직부사를 삼고 탁광무로 내서사인을 삼고

허소유로 감찰장령을 삼고 이인복으로 흥안부원군 조희고로 동천군을 삼고 홍사범으로 남양군을 삼고

최맹손으로 철원군을 삼고 찬성사 최영을 좌천(폄)시켜 계림윤을 삼았다.

 갑술에 오랫동안 가물어서 형인추정도감을 두어 원왕하고 억울한 일을 조사하여 씻어 주게(설)하였다.

 기묘에 강중서로 보녕군을 삼고 김군정 좌대언를 삼고 김정 왕복명으로 우좌부대언을 삼았다.

 사도감 십삼색의 관리 및 무릇 공주상에 참여한 자에게 다 관을 제수하였다.

 경진에 찬성사 이구수를 회원(마산)에 류배하고 평리 양백익을 춘주(춘천)에 류배하고 판밀직사사 박춘을 광양에 류배하고 예성군 석문성을 장암(서천지방)에 류배하고 환자 진원부원군 김수만을 이천에 류배하고 부원군

 이녕을 옥주(옥천)에 류배하여 모두 그 집을 적몰하고 류탁 이인임에게 명하여 도당(양부합좌기관)에서 서정을 맡게 하고 김란 임군보 목인길에게는 궁중에서 서무를 맡게 하였다.

 이달에 경기에 황재가 있었다.

 육월 경인에 이공축로 익산부원군을 삼고 경천흥으로 청원부원군을 삼고 이수산으로 수춘부원군을 삼고

송경으로 연안부원군을 삼고 한공의로 청성군을 삼고 박희로 춘성군을 삼고 김보로 수도첨의시중을 삼고

이인복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이인임으로 첨의찬성사를 삼고 권적 목인길로 첨의평리를 삼고 박원경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홍영통으로 감찰대부를 삼고 최원우로 감찰집의를 삼고 김구수 류원으로 감찰지평을 삼았다. 왕중귀 원송수가 파면되었다.

 신묘에 왕이 불복장에서 활을 쏘고 군동의 척초희를 관람하였다.

 갑오에 양천군 허유를 청주에 류배하고 전전공판서 변광수를 삼척에 류배하고 판서 홍인계를 순흥에 류배하였다.

 경술에 첨의평리 김귀를 김주(김해)에 류배하고 춘성군 박희를 춘주(춘천)에 류배하고 전리판서 허서를 곤장쳐서 유배하였다.

 추 칠월에 최영 이구수 양백익 석문성 박춘의 삼품 이상의 작를 깎고 김수만을 제명하고 아울러 그 전 민을 적몰하였다.

 계유에 감찰장령 허소유를 찬축하여 전라술졸을 삼았다

 처음 감찰사가 전호군 우선좌의 살인상을 국문하매 선좌가 도망하므로 선좌의 고인인 오계남의 가노를 잡아서 이(계남)를 찾게 하거늘 왕이 「계남은 바야흐로 최영 등을 국문하고 있으므로 묻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소유가 교지를 받들지 아니하거늘 왕이 노하여 이를  찬축하니 소유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신의 죄는 마땅히 주할 것인데 오군이 성명하시도다」고 하니 듣는 자가 이를 슬퍼하였다

 첨의사가 궐에 나아가 소유의 유면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소유의 죄는 경 등의 알지 못하는 바다」고 하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소유의 부 옹은 강폭하여 세인의 미워한 바 되었더니 소유는 참으로 그 아들이로다」고 하였다.

 경진에 전록생으로 계림윤을 삼고 이방으로 한양윤을 삼고 김한귀로 개성윤을 삼고 이자송으로 평양윤을 삼고 이성림으로 군부판서를 삼고 성준득으로 판도판서를 삼고 허전 김안리로 모두 전법판서를 삼고 임현 박중미로 우좌사의대부를 삼고 오승비로 감찰장령을 삼고 허시로 좌헌납을 삼고 이득천 이존오로 우좌정언을 삼았다.

 신사에 왕이 친히 문수회를 설하였다.

 계미에 편조를 봉하여 진평후를 삼았다.

 팔월 경인에 명주(중국)의 사도 방국진이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경자에 서녕군 류숙이 고향(전리)에 돌아가기를 원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구월 을축에 황태자가 첨원 성대용을 보내어 령지(명령)를 선포하고 왕에게 의 주를 사하였다.

 경오에 권적으로 첨의찬성사를 삼고 목인길 김속명으로 첨의평리를 삼고 지용수로 지도첨의를 삼고 김원명으로 삼사좌사를 삼고 김유로 동지밀직사사를 삼고 안원숭 김한귀로 밀직부사를 삼고 성대용으로 우대언을 삼고 왕복명 권중화로 우좌부대언을 삼고 한홍도로 감찰특평을 삼고 김광조로 동산군을 삼고 박원으로 예성군을 삼았다.

 도첨의시중 김보가 파면되었다. 을해에 칠원부원군 윤환으로 동서북면도통사를 삼고 평리 우제로 도원수를 삼고 지도첨의 지용수로 상원수를 삼고 전동지밀직사사 조희고로 부원수를 삼았다.

 동 십월 계사에 방국진이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윤월 정사에 전보문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최백으로 밀직사상의를 삼았다.

계해에 밀직사상의 최백을 원에 보내어 천추절을 축하하였다. 갑자에 윤소종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원이 대부소감 안승을 보내와 조하기를 「황태자가 역적 패라첩목아를 토평하엿다」고 하였다. 십일월 계사에 원이 직도사인 아돈야해를 보내와 조하기를 「백살리로 태사 우승상을 삼고 곽확첩목아로 태부 좌승상을 삼았다.」고 하였다.

 십이월 정축에 신돈으로 수정리순 논도섭리 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를 삼으니 돈은 즉 편조이다.

 

병오 십오년 춘 삼월 경자에 친히 문수회를 궁중에 설하였다. 밀직제학 전록생을 보내어 천하총병관 하남왕 곽확첩목아를 빙문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황태자의 평란(정난)환도를 하하니 전에 이르기를 「용기(천자의 기)의 지향하는 곳에 엄숙한 천자의 위엄를 가졌고 학가(태자의 수레)가 돌아오니 크게 도인의 소망을 위로하였으며 마침 이를 포고함에 모두가 기뻐하였나이다 황태자전하는 위량이 깊고 영모(유)가 과단하오니 정력을 가다듬어 덕화를 넓히매 문덕을 크게 펴는데 협찬하였고 명(천자의 명)을 받아 행군을 하매 군사를 능히 문죄(힐)하는데 (위엄을) 올렸나이다 다만 병위를 떨쳐 빛나게 할뿐만 아니라 오직 덕화로 어루만져 편안케 하였나이다 요구가 정중의 어와 같으니 응당일찍 항복을 빌지 않았음을 뉘우칠 것이요 역신이 사서가 되었더니 바야흐로 순을 범하면 반드시 베일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창궐(형세의 왕성)을 족히 걱정하오리까 대개 지휘가 정해져 있었나이다

풍정이 동 하니 어찌 사기의 머물음(유)을 용납하며 일월이 청명하니 드디어 부운의 가리움을 끊었나이다

이것은 모두 예산이 위로 신충(천자의 어심)에 협화함이요 일에 만전이 있으니 신으로 더불어 꾀하며 중(민중)으로 더불어 함께 하였고 마음에 이적(이심을 가짐)이 없나이다 자가 되어서는 효하고 신이 되어서는 충하니 이는 마땅히 나가서는 국보의 어려움을 펴고 들어와서는 천안(천자의 어안)의 기쁨을 받들 것입니다

성명이 널리 중외에 덮히고 공업이 고금에 으뜸되나이다 무릇 보고 들음에 있어 누구가 뛰며 춤추지(도무)아니하오리까 신이 자취는 확굴10)에 부그러우나 마음은 응양을 생각하나이다 만기가 래조하매 멀리 개가(승전의 가)의 아룀을 생각케 되고 사방이 칭경하매 배나 호고11)(장수)의 경사(휴)를 비나이다」고 하였다

하 사월 임자에 상장군 조린이 궁녀를 간통하여 임신하였으므로 왕이 린을 사면하고 궁녀를 내쳤다.

계축에 감찰집의 최원우를 좌천(폄)하여 정해(해미)감무를 삼았다. 을묘에 시의 북가에 구거를 팠다.

무오에 왕이 호기동희12)를 전정에서 관람하고 포 백필을 사하였다.

경신에 하정부사 임대광이 원으로부터 돌아올새 대광이 요양에 이르러 군도에게 포위 당한 바 되어 가진 바 왕에게 사하는 의 주 및 황태자의 령지를 보이니 도적이 이르기를 「이 물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고려왕을 위함이다」하고 놓아 주었다.

임술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갑자에 좌사의대부 정추 우정언 이존오가 상소하여 신돈을 논하거늘 왕이 대노하여 추를 좌천시켜 동래현령을 삼고 존오를 장사(무장)감무로 삼았다.

병인에 탁광무로 좌사의대부를 삼고 김남득으로 감찰집의를 삼고 기중수 박흥양으로 감찰지평을 삼고 서균형으로 우정언을 삼았다. 신미에 하정사 판삼사사 전보문이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한림시강학사 지제고 동수국사를 제수하였다 보문이 눈으로 글을알지 못하는 터인지라 국인이 크게 놀랐으니 원의 말년에 관작의 람발이 이와 같았다. 을해에 첨의평리 목인길을 전주에 서축하고 판밀직사사 임군보를 려흥(여주)에 서축하였다.

무인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륜사에 행차하여 사리(불골)를 보고 황금 채백을 시주하고 승에게 포 팔백필을 사하였다. 오월 임오삭에 익산부원군 이공수가 졸하였다. 왜가 심악현에(교하)에 침구하였다. 을유에 정원비를 보내어 하남왕 곽확첩목아를 빙문하였다. 병술에 왕이 시어궁의 동강에 나가 격구를 관람하였다.

정해에 (왕의) 탄생일이므로 승 칠백을 내전에서 공양하고 포 천여필을 사하였다. 임진에 시중 류탁이 병을 사하고 물러가기를 빌었다. 계사에 정릉역에 크게 덕릉(충선왕릉)의 수목을 벌채하여 거의 다하고 써 재실을 영조하되 릉직이가 감히 금치 못하였다 또 크게 공주의 영전을 왕륜사의 동남에 일으키고 백관으로 하여금 질록에 따라 역부를 내게 하여 목석을 끌어들이는데 수백인이 일목을 당기되 오히려 능히 행진하지 못하여 호야의 소리가 천지를 움직여 주야로 끊이지 않았으며 소(우) 죽은 것이 길에 서로 잇닿았다.

갑오에 백관이 신돈의 집에 모이니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경자에 판삼사사 전보문이 졸하니 익를 안경이라 하였다.

을사에 왜가 교동을 무찌르고 유둔하여 가지 아니하니 경성이 크게 진동하는지라 왕이 찬성사 안우경 평리 지용수 판개성부사 이순 등에게 명하여 삼십삼병마사를 영솔하고 동 서강과 승천부에 출둔케 하였다 때에 영전의 역사와 정릉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 백사의 일삼는 바가 토목에 벗어나지 못하므로 모든 일이 폐이하고 창고가 허갈하고 숙위가 단약하며 군정이 다스려지지 아니하여 가질만한 병기가 없고 줄만한 갑주가 없는데까지 이르렀으므로 제군이 색연하여(의기가 저상한 모습) 적을 바라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육월 신유에 구재14)를 수리하였다.

임술에 전록생은 하남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서상관 김재안은 사명을 달코자 연경에 머물었다.

을축에 신돈의 당인 상호군 이득림으로 전라도 안염사를 삼으니 헌사가 탄핵하기를 「득림이 일찍이 광주의 공바치는 명주를 도둑질하였다」하거늘 왕이 명하여 치죄하지 말게 하고 독촉하여 임지에 가게 하였다.

병자에 전정당문학 원송수가 졸하였다. 추 칠월 신사 삭에 일식하였는데 개기식하였다.

기유에 왕이 도보로 불복장에 이르러 승 천희를 방문하였다. 팔월 병진에 태백(성)이 낮게 나타나 경천하여 구월에까지 이르렀다.

병인에 이구수를 머리깎아 송광사에 두고 김귀를 노산사에 두고 박춘을 열암사에 두었더니 신돈이 뒤이어 사람을 보내어 이들을 죽였다.

정묘에 심왕15) 독타불화가 사자를 보내왔다.

임신에 왕이 이름을 전이라 고치고 사자를 원에 보내어 표청하기를 「물은 류로써 명명하는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혐피함만 같지 못하며 이름이 조정에 올랐으매 감히 록유없이 갑자기 고치(개)오리까 그러므로 진주함에 당하여 깊이 황공(릉긍)함이 간절하나이다 간절히 생각건대 소국의 풍속이 오히려 그 옛 것에 의거하게 되었음은 대개 세황(세조황제)의 조에 그 처음 것을 변개치 말라 하신데에서 유래하였나이다

신이 기라 이름하고 봉을 이어 귀국함으로부터 크게는 관사의 서류(안독)와 적게는 리항의 서사에 이르기까지 무릇 글짜됨이 시를 붙이고 기를 붙인(종시종기)것으로서 성음이 서로 같거나 서로 가까운 것은 모두 피휘하기를 청함이 이것이 고래의 상례였나이다

신이 오랜(구)뒤에야 이에 일이 많이 구애가 잇음을 알았음으로 여러 사람의 뜻을 빼앗을 수가 없고 오직 스스로 고치는 것이 편리케 되겠나이다

신의 증조 충렬왕이 휘 심을 거라 고치고 조 충선왕이 휘 원을 장이라 고친 것도 그 까닭을 생각 컨대 여기(구애많은 점)에 있지 않음이 없나이다 신이 이제 또한 전자로 이름코자 하오니 만약 청을 겹쳐 들어주시와 천경(자기의 생각대로 고침)을 특허(곡대)하여 주시면 삼가 마땅히 일관한 절조로 동방을 다스려 끝까지 립신양명을 기할 것이며 공북(천자를 섬김)에 전심하여 생성의 덕에 보답함을 맹서하겠나이다」고 하였다. 문수회를 궁중에 설하기 무릇 칠월간이었다.

병자 야에 왕이 미행(잠행)하여 영전을 가보았다.

무인에 봉선사에 행차하여 성상도(천문도)를 관람하였다.

기묘에 요양평장 고가노가 요를 바치거늘 왕이 이것을 놓아주었다 왕의 성이 자애하여 차마 물을 해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개가 우는 것을 보고 급히 말하기를 「이것이 반드시 배가 아픈 것이다」하고 명하여 내약(내고의약)을 내어오라 하고 약이 아직 이르지아니하니 왕이 서서 기다렸다 위에 있은지 기(일기가 십이년임)가 넘었지만 일찌기 한번도 유렵를 즐기지 아니하였다.

구월 신사에 서방에서 류성이 낮에 떨어졌다. 무자에 낙산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왜가 양천현(김포군)에 침구하여 조선(운조선)을 노략질 하였다.

동 십월 계축에 지진하고 병진에 또 지진이 있었다. 전라도도순문사 김유가 병사를 모집하여 (병선) 백소를 얻어 제주를 치다가 패하였다.

경오에 회(중국)왕이 사자를 보내어 양 백이십두를 바쳤다.

정축에 판방암에 행차하여 종실(왕족) 덕풍군 왕의의 딸과 우상시 안극인의 딸을 들이어 비를 삼았다.

십일월 경진에 재추가 왕을 판방암에서 향연하였다.

임진에 검교중랑장 김일을 일본에 보내어 해적 금하기를 청하였다.

경자에 북제천병호국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신축에 하남(중국)왕이 중서검교를 곽영석을 보내어 김제안과 함께 와서 (지난번) 빙문에 보답하였다 십이월 무신 삭에 곽영석이 문묘에 알현하였다

신해에 곽영석이 백금으로 왕에게 향연하니 하남왕의 명을 받음이었다 술이 반취되매 영석이 시신에게 연구(차례로 한 구씩 짓는 것)를 청하니 좌우는 모두 무인인지라 서로 돌아보고 낯 빛을 잃거늘 왕이 심히 부끄러워 하였다.

계축에 왕이 곽영석을 향연하고 습의 김대 안마를 증하니 받지 않았다.

갑인에 왕씨를 봉책하여 익비를 삼아 성을 한씨로 사하고 안씨로 정비를 삼았다.

기미에 곽영석이 돌아가다가 평양부에 이르러 기자묘에서 시를 지으니 이르기를 「무삼일로 거짓 미쳐 머리털을 흐트렸는고 장차 은나라의 국조를 홀로 부지코자 함이로다 버리고 감은 다만 몸을 길이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요 간하다가 죽은들 누구가 나라의 이미 위태함을 슬퍼하리오 노사의 한 구릉에 송백이 있으니 충혼은 만고에 귀신이 알리로다 만래에 말을 조선의 길에 세우니 어렴풋이(방불) 맥수의 시를 듣는듯 하도다」고 하였다.

계유에 요양성동지 고가노가 사자를 보내와 렵견(전견)을 바쳤다. (십이월인데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정미 십육년 춘 정월 정해에 원이 전요양 리문 홀도첩목아를 보내어 영릉(충혜왕)을 추석(사)하여 「터성선충 숭인병덕 협공인 량공신에 익를 충혜」라 하고 명릉(충목왕)을 「협성보리 연덕선혜 봉화보경공신에 익을 충목」이라 하고 총릉(충정왕)을 「수성리정 좌리익순 보의적경공신에 익를 충정」이라 하고 충숙왕비 백안홀도공주를 「숙공휘녕공주」라 하고 왕비 보탑실리공주를 「노국휘익대장공주」라 하고 영릉비 역련진반공주를 책봉하여 정순숙의공주라 하였다. 무술에 혜성이 나타나 땅에 드리웠다. 병오에 공주의 혼전에 행차하여 석(사)명을 고하고 인하여 큰 제향을 설하였는데 교방17)이 신찬한 악장을 주하니 왕이 공주의 진영에 마주 앉아 음식을 권하되 예가 평생시와 같았다 종실 재추가 시연하였는데 신돈이 왕과 함께 전상에 마주 앉았다.

이월 경술에 황태자가 대부경 대도려를 보내어 왕에게 의 주를 사하거늘 왕이 의 일습으로써 공주혼전의 환자 윤충좌에게 사하고 숙위로 하여금 충좌를 향하여 세 번 절하게 하였다. 임자에 왕이 대도려를 향연하였다.

계해에 원사 고대비가 제주로부터 왔는데 제가 왕에게 채백 금견 오백오십필을 사하고 재추에게도 또한 차등있게 사하였다 때에 제가 제주에 피란코자하여 어부의 금백을 수송하고 이에 조하여 제주를 다시 고려에 부속시켰다 때에 목호(목우에 종사하는 몽고인)가 자주 국가(고려)의 보낸 바 목사 만호를 살해하고 써 배반하다가 김유의 토벌에 미쳐 목호가 원에 호소하여 만호부 두기를 청하거늘 왕이 주하기를 「김유는 실상 제주를 토벌한 것이 아니라 포왜로 인하여 쫓아 주경에 이르러 초소하는데 목호가 망녕되게 의혹을 내어 드디어 더불어 서로 싸웠을 뿐이오니 청컨데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사를 만호를 보내어 목호의 기른 바 말을 가려 써 바치기를 옛 사례와 같이 하게 하옵소서」하니 제가 이를 청종하였다.

경오에 원이 신돈으로 집현전대학사를 삼고 의 주를 사하였다.

삼월 경진에 전법판서 백한룡을 원에 보내어 은을 사하고 전동지밀직사사 왕중귀는 성절을 축하하였다.

기축에 왜가 강화부를 노략하였다. 신묘에 연복사에 행차하여 크게 문수회를 설하고 왕이 손수 김로를 받들어 승을 따라 분향를 행하는데 조금도 권태한 모습이 없었다.

계묘에 요양평장 홍보보 지요양연해행추밀원사 어산첩목아가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하 사월 갑인에 노복이 그 주인을 배반하고 영안군 사제에게 의탁한 자가 있거늘 도관좌랑 견사제가 처결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보냈더니 왕이 이르기를 「영안군이 우리 영전(노국공주의 영전)의 역사를 감독하니 비록 소위가 실로 예가 아닐지라도 마땅히 신고하여 들릴(문)것이어늘 갑자기 처결하여 저(주)에게 주니 어찌 신자의 도리일까」하고 곧 (견)사제를 옥에 내렸다. 을묘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신돈에게 명하여 평양에 택지를 상보게 하였다.

경신에 전교령 임박을 보내어 제주를 선무케 하였다. 임술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갑자에 왕이 도보로 봉선사 송강에 이르러 격구를 관람하였다. 병인에 명하여 영전의 역부를 놓아보내고 다만 공장 및 승도만을 남겨두었다 때에 육도의 정부를 징발하여 역사의 감독이 심히 급하므로 도망하는 자가 서로 잇닿았는데 오랜 가뭄으로 그들을 놓아보내니 이에 비가 내렸다.

오월 무인에 장자온을 보내어 하남왕의 빙문에 보답하였다.

경진에 왕이 익비 정비로 더불어 고라리에 행차하여 격구희를 관람하고 크게 여러 가지 유희를 베풀매 백관이 다 따랐는데 첨의평리 한휘가 배우(기)와 마주서서 춤추니 왕이 돌아보며 이르기를 「한재신은 그렇게 즐거운가」고 하였다.

갑신에 왕이 태후전에 나아가 수를 올렸다. 병술에 명하여 국학을 중수(영)하였다.

갑진에 크게 비가 내려 백성들이 비로소 파종하였다. 을사에 원의 중서성이 직성사인 걸철을 보내어 첩하기를 「왜적이 입구할 때에는 반드시 고려를 경유할터이니 (고려에서) 마땅히 병사를 내어 이를 잡을 것이다」고 하였다.

추 칠월 병자에 이강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염흥방으로 밀직지신사를 삼고 이운목으로 전리판서를 삼았다.

임진에 전록생으로 경상도도순문사를 삼고 김한귀로 전라도도순문사를 삼고 지용수로 서북면도순문사를 삼고 이성림으로 동북면도순문사를 삼았다.

병신에 지진이 있었다.

계묘에 계림부원군 이제현이 졸하였다.

팔월 병자에 왕이 문묘에 알현하고 또 왕륜사에 행차하여 영전을 보았다.

을묘에 원이 직성사인 산탑실리를 보내와 고하기를 「완자첩목아로 좌승상을 삼았다」고 하였다.

기미에 재상들이 운암사에 모여 큰 주연을 설하고 기악을 베풀어 정릉에 제하니 궁인이 다 모였다.

임술에 안화사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 영전에 이르러 크게 역도들을 먹였다.

구월 정축에 원이 장추사소경 독령첩목아를 보내와 고하기를 「곽확첩목아의 총병관을 파하고 황태자에게 명하여 천하의 병마를 총할케 하였다」고 하였다. 갑신에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낙산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왕이 백관을 인솔하고 길상사에 행차하여 드디어 박연에서 삼일간 놀고 이에 돌아왔다. 동 십월 기미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어 락성하였다. 납합출이 사자를 보내와 마를 바쳤다.

신유에 신돈의 별실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전시중 경천흥 지도첨의 오인택 전평리 목인길 삼사우사 안우경 삼사좌사 김원명 전밀직부사 조희고를 남변에 장류하고 (가족을) 거두어 관노를 삼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십일월 무인에 평리 한휘 판개성부사 이순 상호군 조린 윤승순 류인재 강원보 대호군 한덕경을 외지에 류배하였다. 정유에 지진이 있었다. 좌사의 신덕린 헌납 박진손 이정언 정리 안면을 파면시켰다.

십이월 계묘 삭에 일식하였는데 음천이어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갑진에 김속명으로 평양도도순문사를 삼았다.

을사에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판개성부사 이색으로 성균관대사성을 겸하게 하고 환자 신소봉으로 도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를 삼았다.

무신 십칠년 춘 정월 임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술에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일본국이 승 범  범류를 김일과 함께 보내와 빙문에 보답하였다. 요양성 평장 홍보보 합자불화 등이 객성대사 복안첩목아를 보내와 이르기를 「대명의 병세가 심히 성하니 청컨대 마음을 다하여 비어하라」고 하였다.

이월 정미에 법왕 왕륜 이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영전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혜성이 서방에 나타나니 길이가 장여나 되었다.

을축에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삼월 신미 삭에 왕이 현릉 의릉 선릉에 알현하였다가 드디어 정릉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경인에 혜성이 태릉(성)과 적시(성)의 사이에 나타났다.

신묘에 혜성이 대릉(성)과 권설(성)의 사이에 나타났다.

갑오에 왕이 충숙왕의 기진으로 묘련사에 행차하여 분향례를 행하였다.

을미에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혜성이 권설(성)의 위에 나타났다.

기해에 혜성이 태릉(성) 위에 나타났다. 하 사월 신축 삭에 혜성이 나타났다.

경술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연등화산을 관람하였다.

임자에 구재에 행차하여 이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오에 연복사에 행차하여 문수회를 무릇 구일간 설하였다.

경신에 밀직제학 이강이 졸하였다.

오월 을해에 탄일이므로 승 삼천을 왕륜사에서 공양하였다.

신사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임진에 왕이 왕륜사의 영전 불자가 협소하여 승 삼천을 용납하지 못하므로 고쳐 영선코자 복원궁에 행차하여 상을 보았다. 갑오에 마암에 경영하니 (백성의) 원차가 크게 일어났다.

육월 신축에 서울 방리의 정장 및 사십이도부를 모두 징발하여 마암에 구거를 팠다.

갑진에 왕이 미행으로 마암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정비궁에 행차하니 유모가 왕께 아뢰기를 「이제 바야흐로 농절에 가뭄이 심하니 원컨데 영전의 역사를 정지하소서」하거늘 왕이 노하여 이를 내쳤다.

기미에 정비궁에 행차하여 이운목으로 더불어 바둑을 두어 주연내기를 하였다.

경신에 가뭄이 심하므로 도(재)우를 금하고 원옥을 다스려 이죄(월교)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추 칠월 을해에 일본이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기묘에 대마도 만호가 사자를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무자에 요양성 어산첩목아가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갑오에 왕륜사의 영전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마암에 행차하였다. 윤월에 가뭄으로 영전의 역도를 놓아보냈다.

 강구사 이하생을 대마도에 보냈다. 임인에 비가 내리니 국인이 서로 이르기를 「영전의 역사가 조금 풀어지매 하늘이 조금 비를 내리니 만약 역사를 파하면 하늘이 반드시 크게 비를 내릴 것이다」고 하였다.

을사에 봉선사에 행차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임술에 서리가 내려 콩을 살상하였다.

팔월 경오에 도첨의시중 류탁 첨서밀직 정사도를 순군에 내리고 이춘부로 도첨의시중을 삼았다.

을미에 왕이 대명의 군사가 황성을 포위함이 심히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좌상시 조민수로 의주 정주(의주지방)등지의 안위사를 삼고 전전리판서 임견미로 안주순무사를 삼았다.

구월에 요양성평장 홍보보가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신축에 이성림으로 양광도 도순문사를 삼고 이금강으로 전라도 도순문사를 삼았다.

무신에 마암의 영전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비로소 정릉 광암사에 쌀을 매월 삼십석씩 사하고 또 비들기를 궁중에 수백마리나 기르매 조롱을 만드는데 쓰이는 포가 일천여필이요 먹이는 곡식이 매월 십이곡이였다.

을묘에 본국인 김지수가 원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대명의 주사 만여소가 통주에 정박하고 경성(연경)에 들어오니 원제가 황후로 더불어 상도(개평)에 달아나고 태자가 전패하여 도 상도에 달아났다」고 하였다.

병진에 류숙을 홍주에 장배(장)하고 김달상을 청주에 장배하였더니 신돈이 뒤이어 사람을 보내어 이들을 죽였다. 정사에 백관으로 하여금 사절을 대명에 통할 것을 의논케 하였다.

비로소 신돈의 첩 반약에게 매월에 살 삼천석씩 사하였다.

동 십월 계유에 판종부사사 문천식을 원에 보내어 천추절을 하케 하였는데 천식이 요양에 이르러 길이 막히어 돌아오거늘 곤장쳐서 다시 보냈다.

갑술에 김란으로 서북면도체찰사를 삼았다.

십일월 병오에 대마도 만호 숭종경 사자를 보내와 조견하거늘 종경에게 미 일천석을 사하였다.

정미에 례의판서 장자온을 보내어 오왕20)에게 빙문하니 오왕이 예로 접대하기를 심히 후하게하여 육부 어사대로 하여금 연위케 하였는데 대연일에 이르러 음악을 베푸는데 대부가 자온에게 이르기를 「대연에 일찌기 음악을 사용치 아니하였는데 금일의 악은 사신을 위함이라」하거늘 자온이 이르기를 「악이란 화로써 주를 삼는 것인데 제공은 이미 화기로써 서로 접하거늘 어찌 반드시 악을 행하리오 부자 이르기를 악21)이라 이르며 악이라 이름은 종고를 이름인가 예라 이르며 예라 이름은 옥백을 이름인가」하였다 하니 대부 이르기를 「상서가 이미 예악의 근본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악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이에 (음악을) 그치니 오왕이 이말을 듣고 후례를 더하여 써 보내주었다. 기유에 강안전에 행차하여 음악을 관람하였다. 병진에 원이 이용감태경 만자한을 보내와 조하기를 「제장에게 나누어 명하여 써 회복을 도모하라」고 하거늘 왕이 행성에서 맞이하였다. 기미에 왕이 원사를 시어궁에서 향연하였다. 갑자에 찬성사 이성서를 원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갑신에 이춘부로 도첨의우시중을 삼고 이인임으로 좌시중을 삼았다.

기유 십팔년 춘 정월 신축에 요양성의 납합출 및 평장 홍보보가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임인에 왕이 친히 공주의 혼전에 제할새 기악을 진하여 극히 환악하기를 평생과 같이 하니 덕녕공주 및 신돈이 시연하였는데 밤이 되어 이에 파하였다.

이월 정묘에 친히 정릉에 제하였다. 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원이 중서성우승 두리한을 보내어 왕에게 의 주를 사하거늘 왕이 두리한에게 의복 금대를 증하매 받지 아니하였다. 삼월 계묘에 원이 사자를 보내어 왕을 승진하여 우승상을 삼았다. 갑인에 동지밀직사사 왕중귀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또 은을 사하니 표에 이르기를 「성지(명륜)를 펴어 알리니 바야흐로 경성함이 깊고 높은 급위에 등용하시니 진공함이 두루 사무치나이다 거듭 분사22)로써 하시니 더욱 전운23)함을 알겠나이다

 그윽히 생각컨대 봉토를 나누어 우두머리를  세움은 비컨대 복심이 고굉을 힘입음과 같고 적개심으로 왕사에 근면함은 수족이 두목을 방어함과 같나니 이는 고금에 함께 말미암는 대체이며 실로 상하가 서로 어울리는 지정이로소이다 신과 같은 자는 본래 관생24)의 출신으로 은은 습작을 외람되게 하였읍니다 천과(천자의 과봉)가 남토에서 월첩25)하는 때를 당하여 조금(분호)도 보답 못한 것을 한하고 용어(천자의 차가)가 상도(개봉)에 동순할 때를 만나니 진실로 미분(미신분골)을 사양치 않겠나이다 방 소26)의 주실의 중흥을 생각하고 곽 이27)의 당가 재조를 생각할 때에 표28)를 올리고 출사함은 감히 뒤지지 않겠으나 비추만속29)은 그 오직 어려운 것입니다

 때는 가기 쉽고 공은 이루지 못하매 뜻만 한갓 부지런할 뿐이요 힘은 미치지 못하더니 어찌 성려가 멀리 우충을 살피어 온언을 앞서 주시어 이미 먼저 장유하시고 뒤에 우규(우승상)로 올리며 다시 이어서 포숭하여 주실줄이야 생각하였으리까 이는 다 세상에 드문 지극한 영광이어늘 하물며 일순에 연거퍼 술은 투하30)의 음을 인도하고 옷은 협광31)의 정을 일으킴을 아울러 얻었음에오리까 총은을 입사오니 더욱 우책(우공하여 책임을 느낌)만 증가케 되나이다 황제폐하께서는 생지(나면서 도를 암)의 성도를 지니시고 교태(천지음양이 조화하여 만물이 안태함)의 시운을 누리사 공묵함이 깊으시매(연충) 진퇴 존기의 연고를 통찰하시고 작흥을 진기하시어 여탈폐치의 권세를 수교하셨나이다 뭇 계책을 굴복시킴에 잡시(섞어 가르쳐 줌)로써  하고 뭇 마음을 감동시켜 가지런히 분발케 하나이다 신명이 협찬하매 단석에 (비조칙석) 즉시 삭평(평정)되리이다 상은 먼 것을 버리지 아니하니 모두 하여금 극(천자)에 돌아오게 하였나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신의 다다익변32)이 아니고 대개 신의 단단무타(전일하여 타심이 없음)로 인함이니 신이 감히 절의를 금석같이 굳게 하여 시종유일함을 맹서하고 강릉의 장수를 빌매(축) 보통에 만배나 펴(신)지 아니하오리까」라고 하였는데 중귀는 길이 막히어 도달치 못하고 돌아옸다. 재추에게 명하여 수도 옮기는 것을 의론케 하였다. 하 사월 정묘에 신돈이 문수회를 연복사에 설하거늘 왕이 행차하여 이를 관람하고 승에게 포 오천오백필을 사하였다. 신미에 영전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공주의 혼전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계유에 왕이 화산희를 관람하였다. 갑신에 경창대군 유가 졸하였다.

  임진에 대명황제가 부보랑 설사를 보내어 새서(천자의 어인을 찍은 문서) 및 사라 가서 념 사십필을 사하거늘 왕이 백관을 인솔하고 숭인문외에 출영하였다 그 서에 이르기를 「대명황제는 글을 고려국왕에게 보내노라 송이 국가의 통어(어)를 잃음으로부터 하늘이 그 제사를 끊었도다 원은 우리 족류가 아닌데 천이 명하여 중국에 입생케 한지 백유여년에 천이 그 혼음함을 미워하여 또한 써 그 명(천명)을 떨어뜨려 끊으매 중화와 이적이 요란한지 십유팔년인지라 군웅이 처음 일어날 때를 당하여 짐이 회우의 평민(포의)이었는데 문득 난폭한 병사들이 창졸이 이르므로 그릇 그 가운데 들어갔으나 그 성공의 가망이 없음을 보고 우구하여 편안하지 못하더니 천의 신령으로 문무(문무의 대권)의 수여를 받았도다 동으로 강좌(강남)에 건너가 양민의 도를 익힌지 십유사년인데 그동안 서로 한주 진우량을 토평하고 동으로 강좌 오왕33)(장사성)을 고소에서 결박하고 남으로 민월을 평정하여 팔번을 평정하고 북으로 호군(원의 순제)을 축출하여 중화를 숙청하고 우리 중국의 옛 강토를 회복하였도다 금년 정월에 신민의 추대로 황제의 위에 나아가 천하를 누린 칭호(국호)를 정하여 대명이라 하고 년호를 세워 홍무라 하였도다 오직 사이에게 아직 보지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글을 닦아 사신을 보내어 해양을 건너 고려에 들어가 왕에게 보하여 이를 알게 하노라 옛날 우리 중국의 군주가 고려와 더불어 땅을 서로 접하니 그 왕이 혹은 신이 되고 혹은 빈이 되었나니 대개 중국의 풍을 사모하여 인민(생령)을 편안케 하기 위할 따름이로다 하늘이 그 덕을 내려다 보시고 어찌 길이 고려에 왕노릇하게 하지 아니하리오 짐이 비록 덕이 중국의 선철왕에 미쳐 사이로 하여금 회복시키지는 못하나 그러나 가히 천하로 하여금 두루 알게 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설) 사가 거년 십일월로써 김릉을 출발하였는데 해로의 난관으로 이때에 이르러 여기에 래도케 되었다 사는 즉 손의 제이였다.

 우제를 보내어 회왕에게 빙문하였다. 가물었다.

 오월 갑오 삭에 일식이 있었다. 을미에 설사가 두 양으로써 왕께 향연하고 정유에 사가 돌아가매 왕이 안마 의복을 주되 받지 아니하고 재추가 인삼 약물을 주되 또한 받지 아니하거늘 왕이 문신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증여하였다. 무술에 고려리에 행차하여 격구를 관람하였다. 기해에 탄일이므로 승 삼천을 영전에서 공양하였다. 신축에 지정의 년호를 정지하였다.

 갑진에 예부상서 홍상재 감문위 상호군 이하생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김릉에 가서 등극을 하하고 인하여 사은케 하니 그 표에 이르기를 「록36)을 잡고 도에 응하여 다시 중국 황왕의 정통을 회복 원37)을 체하여 정에 거하매 만방에 신첩의 마음을 동일케 하였으며 천의 대명(경명)이돌아오니 만민이 기뻐하는 소리가 사방에 퍼지나이다 황제폐하께서 문명은 제순에 미치고 용지는 탕왕에 이르렀나이다 우뢰가 매섭고 바람이 날치매 큰 공훈을 평란에서 이룩하고 정신38)(경신)으로 옛것이 고쳐지매 큰 칭호가 창수(창업수통)로써 빛나나이다 전장 문물이 찬연히 빛나니 화하 만맥이 서로 이끌고 봉사(솔비)하나이다 신이 멀리 동우(표)에 처하여 공손히 북진(천자를 가리킴)을 바라보나이다 비록 칭하의 반열에는 참여하지 못하나 원컨데 항제 기경의 간성을 바치겠나이다」고 하였다.

 육월 병인에 황제가 환자 김려연을 보내어 치서하기를 「거년 동에 사신을 특별히 보내어 바다를 건너서 중국의 안정한 사유를 상세히 진술하였으니 전달됨이 이미 오랜줄 량찰하거니와 이어 또 진기지방(산서지방)을 평정하여 써 진롱지방(섬서지방)까지 미쳤으니 생민이 거의 휴식의 시기를 누릴 것이다 요사이 유연지방(하북지방)의 인민을 옮겨 남으로 와서 취식케 하였는데 그 중에 고려민 백육십오인이 있으니 어찌 향리 골육의 생각이 없으랴 짐이 심히 민망히 여기어 곧 유사에게 명하여 배를 준비하고 사자를 보내 호송하여 동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데 마침 내사감승 김려연이 곁에 있는 바 려연이 역시 고려인으로 일찌기 말하기를 집에 노모가 있는데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기로 짐이 그 정경을 생각하여 그 사행에 나가게 하고 아울러 성친의 원을 이루게 하노라 인하여 사라 각 육필을 선사로 싸보내니 이르거든 령수할지어다」고 하였다.

 기사에 관제를 고쳤다. 경진에 왕이 미행으로 영전에 행차하고 신사에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임오에 왕이 행신인 상장군 노숙이 환관(엄인)의 처를 간통하였으므로 좌우로 하여금 팔백을 곤봉치고 도 행신인 대호군 정희계에게 이르기를 「너도 또한 행실이 노숙과 같으니 벌치 않으면 어찌 징계하리오」하고 사백을 곤봉쳐서 헌부에 명하여 국문케 하니 삼인이 거의 죽게 되므로 다시 신문치 못하더니 숙는 이윽고 죽었다.

 계미에 유백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칠월 무술에 왕이 의심하기를 노숙이 거짓 죽었나 하여 그 무덤을 파 그 머리를 베어 효시하고 그 부 정 및 처를 동경에 류배하고 헌부가 능히 숙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였다하여 어사잡단 민수생을 여흥에 류배하였다.

 신축에 거제 남해현에 투화하였던 왜가 반하여 그 나라에 돌아갔다. 갑진에 불은사에 행차하고 또 흥국 법왕 이사에 행차하여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께서 매양 사중의 해(년은 월의 오)를 당하면 삼소41)에 순주(순행주가)하였으니 나도 또한 장차 평양에 거동하여 금강산을 돌아서 충주에 차가를 멈추리라」고 하였다. 팔월 을축에 만호와 천호를 서경 의주 정주(의주지방) 니성(창성) 강계 등처에 두었다.

 때에 삼소 순주의 하교로 말미암아 백성을 징발하여 도로를 다스리니 많이 화곡을 손상하고 도 평양 충주에 모두 리궁 및 공주의 혼전을 지으매 곡식을 저비하고 음식을 공급하므로 백성이 심히 이를 괴롭게 여겼다 병인에 판사천감사 진영서가 말하기를 「요사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년사가 도한 흉황하니 정하면 길하고 동하면 흉하리이다」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어찌 늦게 아뢰는가 하고 곧 순주의 명을 거두었다. 무진에 총부상서 성회득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대장군 김갑우는 황태자의 천추절을 하하고 공부상서 장자온은 신정을 하하고 인하여 본국조하의 의주42)를 사하도록 청하였다. 계유에 공덕천도장을 강안전에서 설하였다. 병술에 북원의 중서성 및 태위승상 기평장이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구월 기해에 북원 오왕 회왕 쌍합달왕이 모두 사자를 보내어 빙문을 보답하고 마 사십여필을 바쳤다 때에 오왕 등이 먼저 우리를 빙문하거늘 우리가 우제를 보내어 회사하니 오왕이 우리에게 청혼하였고 회왕은 우제를 대접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고 또 그 딸로써 우리에게 보내고자하여 그 딸을 선보이기를 청하거늘 제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명을 받아 빙례를 닦을 뿐이요 청혼같은 것은 신의 알 바 아닙니다」고 하되 회왕이 굳이 딸을 보게 하였다. 경신에 사자를 보내어 경기의 전지를 측정(도)하였다.

 신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천병신중도장을 칠일간 설하고 이에 돌아와 왕이 손수 소를 쓰고 승에게 포 일천오백필을 사하니 신돈도 또한 천오백필을 시주하였다.

 이 달에 초석(공주혼전의 초석)을 숭인문외에서 깨어 (벌) 마암까지 끌어보낼새 (돌의) 크기 가 집채같은 진동하며 울리는 소리가 소(우)울음과 같았다 또 정부를 주현에 징발하여 용재를 수운하는데 혹은 압사하고 혹은 익사하는 자가 무수하였으며 중외가 곤폐하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왕이 원조의 재인(목수) 원세를 제주에서 불러올려 영전을 경영케 하니 원세 등 십일인이 솔가하여 왔다 (원)세가 재보에게 이르기를 「원의 황제가 토목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써 민심을 잃고 스스로 능히 마침내 사해를 보존하지 못할 줄을 알고 이에 우리들에게 조하여 궁전을 탐라에 경영케 하고 피란의 계책을 삼고자 하더니 준공을 보지 못하고 원이 망하였나이다

 우리들이 의식을 잃었다가 이제 부름을 입어 다시 의식을 하게 되니 진실로 만행이나 그러나 원은 천하의 대를 가지고도 인민을 괴롭게 함으로써 멸망하였으니 고려가 비록 크다하나 그 능히 민심을 잃지아니한다하리까 원컨대 제상(여러 재상)은 왕에게 주계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재보들이 감히 써 문주치 못하였다. 제주가 항복하거늘 박윤청으로 목사를 삼았다. 동 십월 갑자에 왕이 왕륜사에 계시며 회왕 오왕의 사자를 향연하니 두 사자가 각각 황금불 일구씩 바쳤다 때에 왕이 바야흐로 부처(부도)에 혹하였으므로 그 좋아하는 바를 따라 폐백(지)을 삼은 것이었다. 정묘에 영전에 행차하여 역도를 먹였다. 을유에 참지문하대장군 최백 류운을 보내어 시중 김일봉의 달을 오왕에게 보내고 또 회왕의 딸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최)백이 도중에서 졸하였으므로 회왕은 딸을 보내지 못하였다. 병술에 왕이 미행으로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다.

 십일월 임진 삭에 아주(아산)가 왜선 삼소를 포획하여 부로의 머리 이급을 바쳤다.

 무오에 납합출이 사자를 보내와 마를 바쳤다. 왜가 녕주(천안지방) 온수(온양) 예산 면주(당진지방)의 운수선을 노략질하였다 처음 왜인이 거제에 거주하여 영구히 화친 맺기를 원하거늘 국가가 믿고 이르 허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입구한 것이다. 경오에 우리 태조(이성계)로 동북면원수 지문하성사를 삼고 지용수로 서북면원수 겸평양윤을 삼았다. 신미에 전시중 유탁을 하옥하였다가 뒤이어 석방하였다. 서원군 노은이 원의 조서를 받들고 황주에 이르거늘 왕이 대장군 송광미를 보내어 이를 죽였다.

 수문하시중 이인임으로 서북면도통사를 삼고 대독(기)을 주어 보내었다 왕이 일찌기 서경에 순어하였을때 대독을 만들어 관아에 두고 수위하여 때때로 치제케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이)인임에게 주어 출진케 할새 대청관에서 마제(행군의 제)하고 떠남(행)에 미쳐 오군위로 하여금 황교에서 보내 주게 하고 또 밀직부사 양백안으로 부원수를 삼았다

 가을로부터 동 서 북면의 요해지에 많이 만호 천호를 두고 또 원수를 보내어 장차 동녕부43)를 쳐 써 북원을 끊으려 하였다.

 

 신해 이십년 춘 정월 을유 삭에 왕이 친히 공주 혼전에 제하였다.

 기축에 또 영전에 행차하여 승팔백인을 공양하였다. 경인에 혼전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연복사에 행차하여 담선회를 설하였다. 이월 기미에 혼전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갑자에 한천으로 경상도도순문사를 삼고 양백안으로 전라도도순문사를 삼았다.

 기사에 왕이 로국공주의 기일이므로 왕륜사에 행차하여 승 천여인을 공양하였다. 갑술에 여진 천호 이두란첩목아가 백호 보개를 보내어 일백호로써 래투하였다. 삼월 정해에 운암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고 정릉(노국공주릉)에 제하였다. 왜인이 해주에 들어와 관해를 불사르고 목사의 처와 딸을 사로잡아 갔다.

 경자에 왕이 보평청에 출어하여 일을 보고 간관에게 이르기를 「애초에 한달에 두 번 청정하도록 되었으나 만약 유고하면 한달에 일을 보지 못할 수도 반드시 있을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큰 일은 보평에서의 시사를 기다리지 말고 상주할 것이며 또 헌부의 직은 규탄을 관장하는 것이니 그릇 판단된 것을 호소하는 자가 있거던 마땅히 헌부로 하여금 청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축에 왕이 대비를 알견하고 문병하였다 왕이 오래 정성을 궐하궐하더니 이에 이르러 대비가 병이 있으매 가서 문안(성)한 것이다. 무신에 왕이 충숙왕의 기일이므로 보국사에 행차하였다. 윤월 병진에 간관이 사미의 풍속 금하기를 청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기미에 연복사에 행차하였다가 또 영전에 행차하였다.

 북원의 료양성평장 유익 왕우승(왕합자불화)등이 대명에 귀부하고자 하나 주민을 (다른 곳으로) 옮길가 걱정하여 료양은 본래 우리 땅임으로 만약 우리 나라에서 명에 청명하면 가히 옮겨짐을 면할가 하여 사인을 보내와 고하였다. 경오에 장단에 행차하여 정릉에 배알하고 대장군 이화에게 명하여 공인을 거느리고 중류에 배를 타고 기악을 주하게하여 왕이 보고 즐겨하니 상장군 김흥경이 시측하였다가 말하기를 「청컨데 상감께서 친히 배에 거등하소서」 하매 왕이 이르기를 「내 비록 이를 즐기나 이것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임신에 왕이 배를 타고 여악을 베풀어 석벽을 유관하였다. 계유에 헌릉에 배알하고 룡둔야에 가를 멈추어 사술을 관람하고 이옥 김용초가 활을 잘 쏘매 각기 안마를 사하였다. 갑술에 경릉에 배알하였다. 하 사월 계미 삭에 우박이 내리니 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위엄을 동함은 책임이 법사가 옥사를 결단함에 공평하지 않음에 있다」고 하고 이에 옥수를 놓아 주었다. 무술에 중서성이 자고하기를 ‘전원의 료양행성평장 유익이 금 복 개 해주등지로써 귀순하매 제가 본위(료양)의 지휘로 삼았다’고 하였다.

 연복사에 행차하여 문수회를 설하였다. 경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전에 행차하여 상량(량)함을 보고 인하여 자은사에 행차하였다.

 오월 계축에 유평장 왕우승 화상원사가 사람을 보내와 탄신을 축하하였다.

 정사에 탄신일임으로 혼전에 행차하여 승 팔백인을 공양하는데 홀지(호위병)한 사람이 있어 작지희롱(롱장)을 잘하므로 내승마를 사하였다.

 임술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왕이 오래 비가 와서 영전 역사를 방해하므로 순천사에서 날 개이기를 빌었다.

 계유에 감춘추관사 이인복과 지춘추관사 이색등에게 명하여 본조의 금경록46)을 증수하라 하였다.

 갑술에 전장사감무 이존오가 졸하였다. 을해에 오왕(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육월 계사에 강중상으로 판개성부사를 삼고 정사도로 지밀직사사를 삼고 홍중원으로 총부상서를 삼았다.

 임인에 좌사간 민수생과 우사간 기숙륜과 우정언 이첨과 사헌잡단 김효선을 폄하여 외방에 보임하였다.

 정미에 김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칠월 계축에 왜인이 예성강에 침구하여 병선 사십여소를 불태우므로 병마사 김립견을 안산에 장류하고 아태조(이성계)로 서강도지휘사를 삼고 양백연으로 동강도지휘사를 삼았다. 고가노 왕우승(왕합자불화)이 사인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병진에 선부의랑 이인이 익명서를 올려 신돈의 모역함을 고하거늘 그 당인 기현 최사원 정구한 진윤검 기중수등을 국문하여 베(주)였다.

 기미에 신돈을 수원에 류배하였다.

 경신에 전시중 경천흥 전찬성사 안우상 전평리 이순 상장군 윤승순을 폄소에서 소환하였다.

 신유에 신돈이 복주되매 그 당인 대호군 이백수를 베(주)고 성여완 조사겸 유준을 류배하였다.

 병인에 윤환으로 문하시중을 삼고 한방신으로 찬성사를 삼고 이색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아태조(이성계)로 지문하부사를 삼았다. 정묘에 왕이 전시중 유탁이 돈에게 당여하였으므로 장차 죽이려고 하는데 태후가 환자 사안불화를 시켜 용서하기를 청하거늘 왕이 노하여 사안불화를 가두고 드디어 탁을 죽였으며 또 신돈의 당 백현 손연 김두달 김원만을 죽이고 송란 석란 손주 김안 김중원 박천우를 장유하였다.

 무신에 모니노를 소환하여 태후전에 두게 하였다. 기사에 대사헌 손용을 유배하고 전록생으로써 대신하였다.

 을해에 판개성부사 강중상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지밀직사사 정사도는 하정하고 총부상서 홍중원은 천추절을 축하하였다.

 병자에 신돈의 당 이춘부 김란 이운목을 베(주)고 그 아들을 편배하였으며 신돈의 두살나는 아들과 기현의 아들 중평을 참하고 김진과 대호군 김정을 장유하였다.

 정축에 교하기를 「태조가 창업하여 수통하시고 열성이 상승하여 전차가 나에게 있도다 숙야로 경척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민사에 부지런하더니 때마침 간난이 많은지라 보필을 책성하였더니 뜻밖에도 신돈이 위복을 마음대로 행하고 분아닌 것을 넘어다 보는데 춘부 김란이 그 복심이 되었고 뒤에 고인기에 이르러서는 망녕되게 큰 말(대언)을 내어 양으로는 먼저 고하는체 하고 음으로는 실로 덮어주어 인기로 하여금 삼년동안 형을 벽하도록 하고 기현 최사원이 일이 발각되어 복주하여도 춘부 김란은 아직 돈에 당여하였으므로 곧 주륙을 가하지 못하였도다 오히려 천지 조종의 령을 힘입어 내 마음으로부터 단안을 내려 신돈을 유찬하였더니 정신과 헌사가 번갈아 상장하여 죽이기를 청하므로 곧 극형에 처하고 춘부 김란도 정장이 나타나 일이 명백하므로 또한 그 죄를 받았으며 정구한 진윤검 한을송 기중수 류탁 리운목 이백수 백현 손연 김원만 임인무와 요승 철관 천정은 모두 전형을 바르게 하고 그 밖의 연루인들은 다 가벼운 편으로 형을 결정하였도다 이 정란의 처음을 당하여 은혜를 베푸는 특전을 선시하나니 홍무 사년 칠월 이십칠일 매상으로부터 이전의 모반 대역죄와 조부모 부모를 죽인 죄와 처첩이 남편을 죽인 죄와 노비가 주인을 죽인 죄와 살의를 가지고 모고살인한 죄와 고독염매죄와 특수강도를 제하고 그 나머지 죄범은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라」고 하였다.

 기묘에 라주목사 이진수가 상소하기를 「내재추는 불가불 제거하여야 하겠나이다 재신과 추밀이 도당에 회의함은 음양을 섭리하고 인물을 품제함이니 만약 의정한 일이 있으면 모두 자문에 나아가 품명하여 발표하는 것이어늘 어찌 비시에 입견하여 나와서는 위복을 오로지 하여 동열로 하여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게 하오리까 조야가 모두 그 문에 모여드니 참월한 마음이 이에서 일어나는 것이외다 국제에 지신사 일인 승선 사인은 위가 삼품에 불과한 것으로 날로 교대하여 입직하고 예를 집행하고 평리를 보고하며 왕명을 출납하되 한마디 말(편언)도 감히 자의로 할 수 없으니 이러므로 용후라 이르고 또 내상이라고 하는 것이외다 전에 이르기를 선왕의 법을 좇아서 허물될 것은 없다고 하였으니 군신이 서로 편안하게 되는 요체는 내재추를 제거하는 일거에 있나이다」고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판전교사사를 제수하였다. 팔월 정해에 승 혜근으로 왕사를 삼았다. 신묘에 돈의 당인 신순 신귀 임희재 기숙륜 기중제 최진을 주하고 홍영통 김횡 허완 오중화 성준덕 오일악및 이춘부의 동생 광부 원부를 류배하였다. 계묘에 왜가 봉주(봉산)에 침구하였다. 을사에 황상 안우경 최영으로 문하찬성사를 삼고 이순으로 삼사좌사를 삼고 무관시중 윤환으로 감춘추관사를 삼았다. 구월 신해에 서경도만호 안우경과 안주상만호 이순을 보내어 가서 오로(올자)산성을 정복케 하였다.

 계축에 동평왕이 사인을 보내 왔다. 을해에 염제신으로 서북면도통사를 삼았다.

 동 십월 병술에 판사 황용성이 와서 보고하기를 ‘아군이 오로산성에서 이겨 원의 추밀원부사 합자불화를 포로하였다」 하므로 왕이 용성에게 안마를 사하였다.

 경인에 전라도도순문사가 왜선 일소를 포획하였다.

 을미에 친히 대묘에 제향하여 군신의 하를 받고 숭인문내에 환차할새 성균학관이 생원(성균관학생)과 십이도(사학십이도)생도를 거느리고 가요를 올리며 말하기를 「신등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숙닉54)을 제거하여 형정이 수거되어 이에 좋은 날을 가려 친히 종묘에 고하는 예를 행하시매 전장과 문물이 한결 고초를 딸케 되었나이다

 신이 이 때에 있어 다행히 성은을 힘입어 학관에 있게 되오매 유학 생원 등을 거느리고 도좌(길동쪽)에 엎드려 송구를 올리나이다」라고 하였다 송에 이르기를 「황조께서 나라를 이룩하사 거의 오백년에 우리 임금이 이어받아 게으르지 않고 더 경건하시와 묘사에 기숙 하고 상천에 경공하시나이다

 승평이 이미 극함에 화가 권간에서 일어나니 상이 이르기를 슬프다 대통은 나에게 전하였는데 나는 종사가 이미 추전됨을 두려워 하여 숙야로 긍척하매 춘빙을 밟는 듯 하였도다 조종의 영을 자뢰하여 대대을 극청하니 신이인역에 조야가 써 편안하도다 너희 정신들아 경계하여 제명하라 나는 묘실에 들어가 강신(라)하여 향사하리라 하시고 이른 아침 일찌기 목욕제계하고 법복을 엄숙히 하여 묘정에 올라가서 동동 속속히 당우를 바라보니 성용이 유척하시도다 조두를 받으니 필분서직과 금슬 축어에 음악이 이미 갖추어 시작되니 폐백을 바치고 잔을 올리며 배하고 부하고 항하고 척함에 집사는 각근하고 좌우는 분주하여 례의가 법도를 이루매 회구함이 없으며 공축이 치고하되 순복을 주소서하니 순복이 무엇이뇨 황구미수에 자손이 천억으로 궐후에 창성함이외다

 예가 이미 이룩되매 군신의 하례를 받으니 높고 큰 뜰에 유각기정은 관면이 외아하도다 묘문을 다시 닫고 어가를 돌이키니 날은 아직 포시(신시이니 하오 사시경)가 못되었도다 기상 정#은 패패여여한데 노유 사녀는 용약환호하여 추은을 경상하고 무격은 노래하며 사관은 서하도다 신은 배하고 계수하오니 군왕이 지인하사 모후를 봉양하고 족친에 화목하도다 신은 배하고 계수하오니 군왕은 신성하사 오직 군자를 등용하고 섬인을 멀리하도다 천만세에 사민의 부모되소서」라고 하였고 교방도 또한 가요를 올렸다. 가주 합자장동지가 와서 알견하였다. 무신에 군신을 태비전에서 향연하는데 초야에 이르러 화살이 뜰에 떨어짐이 있는지라 상하가 놀래어 궁성을 계엄하였다.

 십일월 경술 삭에 태후가 환자 김수만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왕을 대접하니 왕이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거늘 수만이 말하기를 「늙은 종이 항상 성체 안녕을 빌고 있아오니 청컨대 량에 맞추어 절음하소서」라고 하였다 때에 왕이 주기로 여러번 좌우를 매질하였으므로 환자가 왕을 이취시켜 정신차리지 못하게 하고저 서로 다투어 술을 권하니 왕이 심히 취하여 공주를 생각하고 울었다. 임술에 팔관소회를 설하매 안강전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사헌부가 상소하여 청하기를 「‘경연을 열고 병기를 수선하고 사졸을 훈련하며 사를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무진에 다시 응방을 두고 왕이 이르기를 내가 「매(응)를 기름은 사냥하기를 위함이 아니라 그 맹준함을 사랑함이라」고 하였다. 갑술에 현 경 선 고 덕 오릉에 배알하였다. 을해에 정릉(노국공주릉)에 제하였다. 중서성(명)에 자하기를 「본년 팔월에 동지밀직사사 정사도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경사에 나아가 명년 정삭을 하하고자 하였으나 교동도에 이르러 배가 얕은데 걸리고 구멍이 뚫려 물이 새어들므로 나아갈 수가 없었고 또 본년 구월에 다시 밀직부사 한방언을 보내어 하정코자 하였으나 배가 출발하자 문득 폭풍을 맞나 침몰하였읍니다. 소방은 경사와 상거함이 바다를 격하여 매우 멀며 날씨는 춥고 어름은 얼어 배로 떠나기 어려우므로 진하할 기일을 어길가 두려워 하나이다

 금 복 등 주는 바다 건늠이 약간 가까웁고 역로에 통할 수 있으니 요동을 경유하면 기일내에 당도할 수 있을가 하여 이제 한방언을 보내어 요동도사에 나아가 경사에 부하며 진하케 하오니 청컨대 개주하여 시행토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정축에 곡성백 염제신의 딸을 맞이하여 신비를 삼았다. 십이월 신사에 이부가 상언하기를 「한의 문제가 준마를 물리치고 당의 태종이 새매(요자)를 소매속에 넣음은 지금도 칭송하여 마지않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과거에 응방을 두어 중외를 소요케 하니 백성이 심히 이를 괴로워하므로 선왕이 깊이 폐를 진념하사 이에 명하여 파거하시니 그 생각하심(려)이 멀다(원)하겠읍니다

 지금 변경에 근심이 많아 군여의 일이 바야흐로 성하(은)게 되는데 이것을 도모하지 아니하고 다시 응방을 설치하니 위가 행하면 아래가 본받음이 영향보다 빠를 것이외다 신 등은 뭇사람들(군하)이 이에 화하여 유전에 탐닉하여 직사를 버리고 곡식(화가)을 짓밟아 우리 생민을 병들게 할가 두려워 하나이다 이는 전일의 폐가 다시 금일에 생김이니 청컨대 파하소서」하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을미에 왕이 정사를 보고 백관이 각기 그 직(소관사무)으로 입계하는데 간관이 청하기를 ‘무비를 엄수하여 왜구를 막고 상벌을 중히하여 사지를 장려하소서」라고 하였다.

 기해에 교하기를 「내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홍업을 이어받아 신민의 위에 의탁하니 책임은 크고 지키는 것은 무거워 숙야로 감히 편안하지 못하고 편히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대한지 이제 이십일년이로다 전번에 역신이 모란하여 화가 불측함에 있더니 다행히 천지 조종의 령을 힘입어 즉시로 평정하고 종사가 안정되어 이미 삼가 예폐를 갖추어 사람을 시켜 상하에 고케 하였으며 태실(태묘의 실)을 수즙하여 몸소 곤면을 착복하고 예로써 증상하였으며 세조 태조 이하 선왕 선후에게 가익하니 비록 의물에 불급함이 있으나 오히려 정성은 가히 감동케 하였도다 오직 성선께서는 일국의 모의로 덕이 나이(년)로 더불어 높은데 존칭이 아직 궐하였으니 마땅히 좋은 날을 가려서 친히 책예를 행할 것이며 또 정사에 미거한 바가 있는가 민생에 미안한 바가 있는가를 염려하나니 널리 여러사람의 말을 채택하여 중외에 포고할 것이며 의부 절부 효자 순손은 풍속의 매인 바이라 모두 정표를 행할 것이며 교사 종묘는 제사의 대사이니 바라건대 도평의사가 품의하여 그 일을 총리하고 대상사는 대묘서 제릉서 도제고 태악서를 관령하여 의식대로 검찰하되 힘써 풍결함을 다 할 것이며 환구 자전 사직단직을 보거하고 제릉전직을 선간하여 그 축사에 보충하고 제랑 및 장가 무인 악공 등은 습학하여 재를 이루도록 하고 사농사는 그 적전 곡구를 거느리고 제미와 주례와 희생을 갖추어 실오함이 없도록 하고 그 법대로 하지않는 자가 있거던 사헌부는 엄하게 규리할 것이며 국내의 명산 대천으로 축전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덕호를 가하여 조촐하게 치제하고 태묘 구실의 배향공신은 유풍여열을 영세토록 잊기 어려우니 해부 관사를 명하여 모두 추증을 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축에 환자 이강달이 사사로 도당에 나아가 총을 믿고 거만하거늘 제상이 노하여 궐에 나아가 아뢰니 왕이 강달을 옥에 내렸으나 이튿날 석방하였다. 계묘에 친향한 때의 집사한 관원에게 작 1급을 사하였다. 정미에 해양만호 궁대 및 진변원수 달마대가 사인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임자 이십일년 춘 정월 계축에 궁중에서 승을 공양하였다. 을묘에 왕이 친히 혼전에 제하였다. 무오에 재추에게 명하여 합자장동지를 향연하고 대장군 작을 사하였다. 을축에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태후전에 나아가 존호를 올려 숭경왕태후라 하고 문예부를 고쳐 숭경부라 하고 이죄(참교)이하를 사하였다. 갑술에 어산불화 납합출 고가노 고제두 왕조승 등이 니성(창성) 강계 등처에 래침하였다. 병자에 지윤으로 서북면원사를 삼았다.

 이월 경진에 간관이 「전라도의 조운이 항상 왜의 략탈을 입음으로 청컨데 육지로 운반케 하소서」라고 하였다. 임오에 왜가 백주 금곡역에 침구하였다. 병술에 사헌규정 임태달 김맹 허온과 군기주부 임헌을 류배하였다. 처음 규정등이 대장 유원 안경 김존성 최사정을 속여 규정의 방벽에 글을 쓰기를 「존성은 무성하고 사정은 부정하고 유원은 원숭이(원)와 같고 안경은 진짜 개(견)다」하니 대사헌 권호와 지사헌부사 최을의 등이 왕에게 계문하여 방주 임태달 유사 허온을 순위부에 내려 누구가 벽서하였느냐고 고문하니 온이 방략62)을 참지 못하여 자복하기를 ‘전규정 임헌이 썼다」고 하니 모두 류배한 것이다.

 을미에 왕이 공주의 기일이므로 왕륜사에 행차하여 설법을 듣고 승에게 포 삼백여필을 사하였다. 기해에 공주의 생신이므로 명하여 혼전에 설연하였다.

 경자에 합자장동지가 가주에 돌아가니 주인이 호송관 및 #종인 통사를 살해하였다.

 신축에 호발도 장해마 등이 니성 강계 등처에 래침하거늘 니성만호가 삼급을 참수하여 바쳤다.

 계묘에 혼전에 행차하여 관음전의 제도가 협소하다고 명하여 개창토록 하였다. 갑진에 판사 조인벽을 보내어 가주를 쳐서 도륙하였다. 삼월 경술에 정료위에 이자하여 말하기를 「전원의 기황후 형제가 세력을 빙적하고 백가지로 해를 끼쳤는데 그 형 기철은 인하여 불궤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주하니 기씨가 원수(마음)를 품고 본국을 침릉하여 하지못할 일이 없으며 기철의 아들 평장 새인첩목아는 악이 오래 쌓기를 마지 아니하여 요양로와 및 동녕부의 관속과 결탁하여 자주 변환을 일으킴으로 이르므로써 다시 병마를 징발하여(조) 두 곳 성지를 공파하니 그 새인첩목아는 몸을 빼어 도주하거늘 잡지못하고 돌아왔도다 왜적들이 근경을 어지럽게 하여 그 세가 더욱 횡포하므로 인하여 재차 추포하지 못하였더니 홍무 오년 정월에 동녕부의 여당 호발도 등이 파아구자에 잠입하여 수어관 김천기 등을 죽이고 인구를 로략하여 갔으며 2월에 이르러 또 돌연히 산양회구자에 들어왔으므로 수어관 장원려 등이 쳐서 쫓았더니 또 이달에 첨원 조가아와 만호 고철두 등이 있어 군사를 이끌고 가만히 음동구자에 들어왔으므로 수어관 김광부 등이 또 쳐서 쫓아 강을 건너 거의 다 함몰시켰다 가만히 상고하건대 동녕과 요양은 일찍이 조정에 귀부한 바가 없는만큼 곧 이는 경화한 사람들인지라 하물며 우리와 더불어 틈이 생겼으니 마땅히 방비하여야 하겠기에 이미 요해지를 파수하여 변을 기다려 초포케 하였으니 혹 기새첩목아를 잡거든 먼저 보내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갑인에 지밀직사사 홍사범을 경사에 보내어 촉을 평정한 것을 하하니 표에 이르기를 「크게 중도를 세워(황극) 구유를 무뇌하고 중방(중국)에 엄택하여 군사는 기률로써 만전토록 나오니 끝내 군추를 섬멸하고 첩보(음)가 멀리 전(파)하니 기쁜 기운이 번갈아 솟구치나이다 황제폐하는 요순의 신성한 천자로 은 주의 정벌을 거행함을 당하여 강회에서 일어나 초월에 뻐치니 향하는 곳에 앞가로막음이(무전)없어 제 노를 평정하고 연 운을 소탕하니 가는 곳마다 서로 경하하여 큰 훈공이 이에 모였고 염오한 민속이 새로워져서 남자는 실을 가지고 녀자는 가를 가져 모두 다 안도하며 서는 동문이요 차는 동궤라 뉘 감히 래정하지 않으오리까 오직 저 촉지방은 명자를 도칭하여 험조을 의지하고 명령을 거역하니 대저 어찌 당랑의 팔(비)로 수레바퀴를 도모함과 같음을 알리오 죄를 성토하고 주를 가하매 홍모가 불에 타는 것과같을뿐이 아니오리까 검각이 탄도에 ?여(수)도 안류하니 이는 천운이 바야흐로 도래함에 말미암음이라 하겠으나 실로 성모의 독단에서 나옴이니 혼일의 빠름이 전고에 드문 바입니다

 신이 다행히 좋은 때를 만나 개선 아룀을 들을 수 있게되니 제봉에 수직하여 감히 재조의 사를 잊을수 있으리까 호배양휴하여 공손히 만년의 축수를 올리나이다」라고 하고 또 자제를 보내어 입학을 청하는 표문에는「이론을 잡고 덕을 좋아함은 고금과 지우의 다름이 없고 중하로써 만이를 변화시킴에는 시서예악의 익힘에 있나이다 만약 루하므로 인하여 나아감이 적다면 어찌 업을 닦아서 때에 미칠수 있겠나이가 그러므로 우리 동인은 일찍 염한72)으로부터 자제를 보내어 협을 두드리고 입학하여 당송을 거쳐 서를 연하여 가히 상고하게 되나니 어찌 한갖 중국을 존숭하는 마음뿐이리오 또한 족히 태평을 분식하는 도구가 되었나이다 황제폐하는 신무로 천하를 정하시고 문덕으로 원인을 오게 하시니 성경과 사서를 반포하사 학규가 이에 나타났고 법복과 겸하여 아악을 사하시니 사사가 일신하였나이다

 그런데 습속이 요리하므로 인하여 깊이 유풍이 떨어질가 염려되며 사조의 부화한 지말도 그 공정를 보기가 드무니 성현의 의리의 종지를 누구가 그 바른 것을 알으리까 만약 로의 변함을 기할진대 반드시 먼저 관주에 힘 쓸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향화하는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사람을 육성하려는 미덕을 양찰하시와 특히 밝은 조칙을 내리시고 유음을 환발하사 하다가 호향의 동몽을 용납하셔서 우상의 주신에 동류(치)됨을 얻게하시면 신이 삼가 성교를 봉양하여 길이 기자의 구봉을 편하게 할 것이요 충성을 다하여 더욱 화인의 축을 올리겠나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서성에 자하기를 「근자에 병란으로 인하여 아악이 산실되어 조정에서 내려주신 악기를 종묘에 사용하는 외에 사직 경자(자전의 작경) 문묘의 종경이 모두 없는지라 이제 전화와 물품을 가지고 나아가 매수하도록 합니다」라고 하였다.

 예부상서 오계남을 보내어 마를 바치게 할새 비서감 유경원으로 유지별감 겸간선어마사를 삼아 계남과 함께 탐라에 가게 하였다. 계해에 왜가 순천 장흥 탐진 도강군에 침구하였다.

 경오에 왕이 손수 성산군 이포의 진영을 그려(사) 그 아들 수시중 인임에게 사하였다.

 신미에 왕이 충숙왕의 기일이므로 광제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왕륜사에 행차하여 영전의 공역을 순시하였다. 하 사월 기묘에 탐라가 유경원 및 목사 겸만호 이용장을 죽이고 반하매 오계남이 섬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에 돌아왔다. 갑신에 납합출이 사신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

 신묘에 한발로 비를 빌었다. 경인에 전평리 안우경이 졸하였다.

 임진에 우인열로 제주체복사를 삼았다. 왜가 진명창을 략탈하였다.

 임인에 민부상서 장자온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탐라를 토벌하기를 청하니 표에 이르기를 「해방이 비록 누추하나 오직 상국을 섬기는 마음을 아는데 도이가 공손하지 못하여 감히 조천의 길을 막으므로 이에 어리석은 간성을 다하여 우러러 총문을 모독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이 나라를 해(위)가는 방법에 어두어 일찍이 경정의 청을 하여 이르기를 탐라의 안업을 위하여서는 달단인(몽고인)을 이거시키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고 하였던 바 이어 조서를 받드니 팽선의 훈81)을 보여주었으므로 조약을 흠준하여 그 안도한 생활을 이룩하도록 하였나이다

 그런데 공헌의 시기가 늦어진 것은 진고한 본의가 아니외다 본년 삼월에 부신 예부상서 오계남을 보내어 탐라에 나아가 마필을 싣고 서울(명경)에 나아가 바치도록 하고 왜적이 해상에 있으므로 궁병 사백이십오인을 보내어 방송하였더니 뜻밖에도 달단의 목자들이 먼저 보낸 비서감 유경원과 제주목사 이용장 판관 문서봉 권만호 안방언 등을 잡아 모두 죽이고 계남이 도착하자 또 먼저 상륙한 궁병 삼백여명을 잡아 또한 다 죽이니 이로써 계남은 나아가지를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와같은 변고이매 의리상 마땅히 가서 그 사유를 신문할 것이나 아직 주진하지 못하였음으로 예에 마음대로 흥병하는 도리가 아님으로 다만 괴난이 더할뿐으로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멀리 일월의 명을 내려 흥도의 넓음을 일시(동인)하시고 신의 효충하는 실적을 밝히 하시고 신의 포굴하는 정을 련민히 여기사 굽어 덕음을 반포하여 이 일을 구처하여 주시면 신의 감대함이 뼈를 갈아선들 어찌 잊으오리까」라고 하였다.

 갑진에 이무방에게 명하여 강안전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병오에 제주가 반하므로 예부상서 오계남을 보내어 본국마 육필을 경사(명경)에 바쳤다.

 오월 무신에 진변원사 달마대와 여진만호 궁대가 사인을 보내어 탄진을 축하하였다.

 임자에 김흥경이 사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태후 탄일에 가히 사할 것이요 나의 탄일에는 사할 수 없다」하고 오직 김용휘만을 사하였다.

 계축에 한발로 신돈당인의 처첩으로서 관비로 몰입된 자를 방면하였으나 오직 신돈의 처첩은 사하지 않았다.

 신유에 영전의 정문이 낙성하였으나 왕이 장려하지 못하다 하여 철훼할 것을 명하였다.

 계해에 제가 환자 전원의 원사 연달마실리 및 손내시를 보내와 왕에게 채단과 사라 사십팔필을 사하거늘 왕이 영빈관에 출영하였다 중서성이 이자하기를 「성지를 흠봉하건대 저 고려국왕은 저 곳에 전년으로부터 석비를 세우고 산천을 제사하기 위하여 각처의 첩음을 비보하고 및 법복을 보내기 위하여 사자가 거듭하였으니 왕은 이러한 일들을 위하여 심히 분망하였다 내가 생각컨대 (고려는) 산으로 한계되고 바다로 격리되어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국토이며 그 왕들은 인정으로 관무하여 태평성대를 즐기는데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신이 왕래함은 이와 같이 왕의 몸을 동노시킴이라 내가 일년 이래 일찌기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제 너희 중서성은 사라와 단자 48필을 살펴 꾸려서 원조의 구일 노원사를 보내어 가져가게 하되 해선 1척을 가려 완전 무장를 한 군인으로 선상에서 방비하게 하고 저 진황제의 가족과 하황제의 가족을 태워 보내어 왕경에 가서 군에도 편입시키지 말고 민에도 편입시키지 말아 한가하게 자활하도록 할 것인바 왕이 그곳에 머물어 두기를 원할 것인지? 만약 원하지 않을 때에는 도로 태우고 돌아오도록 하라 너희 중서성은 문서로써 잘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우승상 왕광양이 또 글월을 보내어 말하기를 「낭자의 원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매(부강) 군웅이 함께 일어나 각기 병중을 옹유하고 강토를 분거할새 우리 성상이 때를 타고 운을 열어 회우에서 분흥하여 강좌에 기업을 시작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사방을 정벌하고 군웅을 삭평하니 진우량은 호상에 절거하여 망녕되히 대한을 칭하고 명정(승)은 천촉(사천지방)을 거유하여 참월하게 대하라 이름하니 이러므로 성상이 육사를 통어하여 친히 호광에 다다르니 그 진씨는 세가 궁하고 힘이 굴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고 거년 봄에 중산후 영천후 등에게 명하여 사려를 통솔하고 수륙으로 함께 나아가 바로 천촉을 치니 명씨가 지탱할 수 없어 구슬82)을 머금고 청명하여 (함벽청명) 옴으로 모두 이미 성은을 흠몽하고 특히 사유를 가하여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리로 따져보면(그들로)하여금 오래 경사에 살도록 함이 불가하므로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각기 가속을 데리고 왕국으로 가서 한가하게 살도록 하고자 하는데 만약 가능하면 머물게 하고 불가하면 인하여 돌아오도록 할 것이니 그저 재량하시기 바라나이다」 라고 하였다.

 을축에 진리(한황제) 명승(하황제)등 남부 공 이십칠인이 입경하였다 이와 승이 궐에 나아가매 왕이 보평청에 출어하였다 리와 승이 계상에서 배하니 왕은 앉아서 받았다 예가 필하매 사신의 아래에 앉았는데 승의 나이는 십팔세이고 리의 나이는 이십이세 였다.

 계유에 손내시가 불은사 소나무에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갑술에 크게 비가 오니 왕이 영전에 비가 샐가 걱정하여 친히 가서 보았다. 정당문학 한중례가 란계산 적의 배(선)를 샀더니(매) 제가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재상으로 적선을 사는 것이 온당치 못하니 마땅히 빨리 돌릴 것이다」하였는데 배는 이미 파괴된지라 육월 정축에 중례를 순군옥에 내리고 독촉하여 수리하도록 하였다. 무인에 크게 비가 오니 왕이 영전의 역사를 위하여 비개이기를 빌었다.

 신사에 진리와 명승에게 저포 구필을 사하였다. 왜가 강릉부 및 영덕 덕원 이현에 침구하였다. 명하여 수릉을 정릉의 곁에 일으키고(기) 백관에게 질품을 따라 역부를 내어 돌(석)을 운반케 하였다. 을유에 관제를 고쳤다. 왜가 안변 함주(함흥)에 침구하니 안변부사 장백안이 능히 막지못한지라 장 팔십칠을 쳤다.

 무술에 제주인이 반적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이용장이 죽을 때에 판관 문서봉은 도망하여 면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모두 서봉을 추대하여 권지목사를 삼고 사람을 보내어 청명하고 마를 바치거늘 이하생으로 안무사를 삼았다. 기해에 아 태조로 화녕부윤을 삼고 인하여 원수를 삼아 왜적을 막게 하였다.

 신축에 왜가 동계의 안변등처에 침구하여 부녀를 사로잡고 창미 만여석을 략탈하였으므로 존무사 이자송의 관을 면하여 전리에 방귀시켰다.

 임인에 왜가 또 함주 북청주에 침구하거늘 만호 조인벽이 복병하였다가 크게 파하여 칠십여급을 참수하니 봉익대부를 제수하였다. 계묘에 왜이 홍주에 침구하였다.

 추 칠월 무신에 영전의 종루가 락성되었으나 왕이 아직 고대하지 못하다하여 곧 다시 지으라고 명하였다.

 기미에 왜가 양광도에 침구하였다. 계해에 대후의 탄일이므로 죄수를 방면하였다.

 신미에 동지밀직사사 김서를 경사(명경)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동지밀직사사 성원규는 성절을 하하고 판도판사 임완은 천추(절)를 축하하였다.

 팔월 갑신에 왕이 미행하여 영전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영전의 취두가 이룩되니 그 장식에 황금 육백오십양 백은 팔백양이 들었다.

 임인에 찬성사 강인#를 경사(명경)에 보내어 채필을 사한 것을 사하니 표에 이르기를 ‘사신(사화)이 문득 이르러 천황(황제의 사물)이 특히 더하니 분수(분)을 헤아리건대 한계(애)에 넘쳐 몸둘 곳이 없나이다 신은 지혜가 족히 치리를 도모하지 못하고 재질이 족히 몸을 문채롭게 하지못하여 스스로 황소하여 겨우 기구의 업83)을 보존함을 부끄러워 하는데 어찌 쇄말한 일로 주광84)의 총명을 번거롭게함을 생각하였아오리까 이에 귀부한 이래로부터 외람되히 총은을 받아 예복과 악기는 장래(방래)에 화제(중화의 제도)를 보일 것이요 경적와 사서는 오래 우매하였던 량심을 계발케 하나이다 더구나 반사함이 우악하여 이미 극히 풍성함을 입어 감부키 어려운데 또 이에 가사(필채)를 배수하니 더욱 감척함을 더하게 되나이다

 황제폐하는 하우를 사하여 미휴를 이루고 문왕을 법하여 강녕에 나아갔으며 명복85)은 광주리에 이를 딸케하고 어장에는 해의86)를 더욱 급히 하셨나이다 드디어 폭원의 넓음으로 하여금 모두 경륜가운데 들어가게 하여 신과같은 미천한 것도 사물받음이 또한 후하니 감히 호현하는 미의를 미루어 폐단은 또한 고치고 축수의 비성을 다하여 복응하되 싫어함이 없도록 하지 않으오리까」하고 하였다.

 구월 무신에 왕이 승을 시켜 무상가를 창하게하여 밤이 늦도록 들었다. 신해에 윤환이 파직됨에 경복흥으로 좌시중을 삼았다. 갑인에 왕이 미행하여 영전에 행차하여 취두를 보았다.

 경신에 양광도순문사 조천보가 왜로 더불어 용성에서 싸워 패사하니 명하여 추증하였다.

 임술에 장자온 오계남이 돌아오매 제가 왕에게 약재를 사하고 친히 자온등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전년에 너희 나라에서 탐라목자의 일로 표문을 보내왔는데 내가 생각컨데 그 탐라의 목자는 원조의 달달인(몽고인)으로 본래 목축을 업으로 삼고 농업을 알지못하며 또 겸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탐라에서 생장하여 (이곳을) 악토로 삼아 생활하여 온 무리들이라 하였는데 이무리들이 다시 종전에 너희 나라가 보낸 윤재상을 죽였단 말인가 그 무리들을 장차 딴 곳으로 옮겨 살게하려 한다하나 그 무리는 국왕의 호의를 알지못하고 의혹하여 딴 일을 저지를까 두려워하여 오지 못하게 한 것인데 이번에 그 무리들이 또 이와 같은 난을 일으켰단 말인이 내가 지금 국왕 앞으로 칙서를 보내니 네가 돌아가거던 국왕에게 그를 경홀히 하지말고 크게 군마를 일으켜 모조리 토멸하도록 하라고 자세히 말하라 내 듣건대 너희 땅에 왜적이 마음대로 겁약하여 빈해 주민이 피난하여 숨고 능히 막아내지 못하여 이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와 노략질하게 한다하니 전자에 내가 이곳에서 연해의 수어관에게 엄명하여 왜적선 십삼척을 포획하였다 만약에 탐라 목자들이 이들 왜적과 서로 합세하게 된다면 토벌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이다

 또 듣건대 녀진인들이 너의 땅 동북에 있어 그들은 자고로 호걸이며 자기의 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네가 가거던 국왕에게 알려 조심하여 방어하도록 하라 또 너희 국가에는 의혹이 많다고 들었는데 자고로 천하에는 중국과 외국이 있어 고려는 이 해외의 나라라 옛적부터 중국과 서로 통하여 사대의 예를 잃지 않고 분을 잘 지켜왔는데 하물며 지금 조빙의 예가 일찍이 궐한바 없으니 무슨 의혹할 바가 있으랴 옛날 속이기를 좋아한 군주 수 양제와 같은 이는 토지를 넓히고자하여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김은 내 마음속에 가장 싫어하는 바이다

 나의 이렇게 하는 말을 네가 가서 국왕에게 명백히 말하라」하고 또 수조하여 말하되 「칠월 이십오일 장자온이 이르러 표문에 말하기를 탐라(제주)의 목자가 무례(무상)하여 관리와 군병이 비명에 죽었다고 하니 깊이 한노할 바이로다 춘추의 법으론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목자가 이와 같을진대 마땅히 주토할 바이나 그러나 나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봉채의 독이 있는지라 비록 저들을 다 멸한다 하드라도 이쪽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상하는 바 있을 것이라 대저 기왕의 과실은 소사로 인하여 대화를 얽음이니 애석한 일이로다

 그 국정을 처리함에 시급한 일(팽선지급이 아닐진대 정에 지극히 심한 일은 기피함이 어떠할고 일이 이미 이와 같을진대 왕은 우물 쭈물 모욕만 당할 수 없는 터이라 빨리 군사를 내어 칠 것이로되 그러나 일의 완급은 왕이 잘 살펴서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 십월 갑술 삭에 자제위를 두어 년소한 미모자를 뽑아 이에 예속시키고 대언 김흥경으로 총관하게하니 이에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로선 등이 모두 총행으로 항상 와내에 시종하였다

 왕의 천성이 색을 즐겨하지 않았고 또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주 생시에도 어행함이 심히 드물더니

(공주가) 훙함에 미쳐 비록 제비를 맞이하여 이를 별궁에 두었으나 능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일야로 슬피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심질을 이루어 항상 스스로 화장(분대)하여 부인의 모양을 하고 먼저 내비의 년소한 자를 방중에 드려 복로 그 얼굴을 덮고는 흥경 및 륜의 무리를 불러 란행하게 하며 왕은 옆 방에서 구멍으로 드려다보다가 마음이 은근히 동하게 되면 곧 윤 등을 데리고 와내로 들어가 왕에게 음행하게 하기를 남녀간에 하듯이하여 번갈아 수십인을 치루고야 이에 그치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늦게(일안) 일어나고 그 혹 뜻에 맞으면 상사가 헤아릴 수 없었다 왕이 후사 없음을 걱정하여 인하여 륜 안 등으로 하여금 제비를 강욕케 하고 그 낳은 아들로 자기의 아들을 삼고자 하니 정 혜 신 삼비는 죽음으로 항거하여 좇지않으매 뒤에 익비궁에 행차하여 흥경 윤 안 등로 통(간)하게 하였으나 비가 항거하므로 왕이 칼을 뽑아 비를 치고자 하니 두려워하여 좇는지라 이로부터 교지하여 자주 왕래하였다. 을해에 왕이 창릉에 배알하였다. 정축에 왕이 정릉에 제하고 제이 끝나매 영성을 순시하여 배회하며 슬퍼하고 정자각에 거둥하여 공주의 진을 대하자 잔치를 베풀고 호악을 주하며 헌수하기를 생시와 같이 하였다.

 기묘에 양릉을 배알하였는데 도상에서 잡희를 연주케하고 환궁하였다.

 환자 김사행이 공역을 잘 감독하였다하여 안마를 사하였다.

 신사에 왜선 이십칠소가 양천에 들어와 3일간을 류하는데 제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아군은 모두 성중애마라 수전을 익히지 못하였던 고로 크게 패하였다 적이 원수의 기고를 빼앗아 강화에 이르러 읍인에게 주고 갔다 왕이 각사의 성중애마 및 오부방리인을 오군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경인에 친히 오군을 거느리고 승천부에 출차하였다가 신묘에 백마산에 행차하였고 임진에 망포봉에 행차하였는데 판사 홍사조가 갑옷(갑)을 입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구타를 명하고 개성 참군 김신검은 교량을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또 곤장(장)치고 계사에 안국사봉에 행차하였다가 갑오에 인월#(천)에 행차하여 화전을 쏘고 을미에 경포봉에 올라가 선척을 바라보고 드디어 룡천사봉에 행차하였는데 숙위가 엄하지 않으므로 제제조관을 곤장(장)치고 찬성사 안사기에게 이르기를 「나의 이번 걸음은 만유를 좋아함이 아니라 행사가 어떠한가를 보고자 함이다 경자 신축의 홍적을 가히 막지못할 것이 아니며 경인 이래의 왜적도 가히 대적하지 못할 것이 아닌데 백성이 노략 당하고 나라가 파월함에 이르게 된 것은 용병에 규율이 없고 호령이 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친히 와도 오히려 명령을 좇지않는 자가 있거늘 하물며 제장이 대행함에 있어서랴 경은 그 나의 지의를 체하여 중인을 효유하여 지금으로부터는 군령을 혹시나 삼가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고 하고 병신에 증산봉에 행차하여 종야토록 화산나의를 설하여 관람하고 정유에 도상에서 나의를 설하고 환궁하였다. 십일월 기유에 왕이 친히 (공주) 혼전에 제하였다. 갑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판밀직사사로진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약재와 약방을 사한 것을 사하였는데 표에 이르기를 「멀리 묘약을 반사하시고 밝게 비방을 보이시더니 우러러 받은 이후로 감명이 어찌(미)다 하오리까 신의 품자가 이미 열약하고 섭양함이 많이 어긋나 드디어 보리의 어려움이 이루어 움직임이 례식에 어긋나는데 외람되히 번유의 중임에 처하여 항상 근심 걱정을 하고 있나이다.

 총석이 거듭 오니 두려움과 영광스러움이 아울러 모이나이다 황제폐하는 천지 생성을 대를 체하시고 성정 측은의 단을 미루어 신의 고질이 낫기 어려움을 어여삐 여기시와 신에게 효험있는 좋은 약제를 주시니 감히 삼가 직을 닦아서 보답하기를 도모하고 더욱 충성을 다하여 축희하지 아니하오리까」하고 하였다.

 임신에 대호군 김갑우를 (명에) 보내어 탐라마 오십필을 바쳤다.

 판서 장자온을 보내어 요동에 빙문하였다. 갑술에 친히 현 경 의 선 고 숙 덕 제릉에 제하였다.

 을해에 친히 정릉에 제하였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축계 이십이년 춘 정월 계묘 삭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갑신에 왕이 태후전에 나아가 수91)를 올렸(상수)다. 임자에 혼전에 행차하여 승 삼백을 공양하였다. 계해에 해안 제군은 능히 무자92)되지 못함으로써 안집별감을 나누어 보내었다.

 을축에 인희전직 사인을 두니 (인희전은) 곧 혼전이다. 제목93)이 내렸는데 두리속고적 및 자제위는 모두 초등하여 천배되었다.

 향대부의 자제로 년소미장자를 택하여 항상 금중에 시어케하고 이름을 두리속고적과 자제위라 하니 모두 총애함이 있었다.

 무진에 양백연으로 서북면도순찰사를 삼고 이성림으로 서해도도순찰사를 삼았다.

 이월 을해에 북원이 파도첩목아 및 어산불화를 보내와 조하기를 「근자에 병란으로 인하여 북으로 파천하여 이제 확확첩목아로 재상을 삼아 거의 중흥하였으니 왕도 또한 세조의 손인지라 마땅히 조력하여 다시 천하를 바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처음 두 사람이 경내에 들어왔을 때 왕은 사람을 보내어 죽이고자 하였으나 군신이 모두 불가하다하므로 이에 구류하느냐 방환시키느냐 경사에 집송하느냐의 삼책으로 물으니 군신이 모두 방환함이 좋다 하였다.

 무인에 왕이 밤에 원사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안질이 있어 해만 보면 더욱 심하므로 밤에 접대한다」하니 대저 조정(명)이 알까 두려워 함이었다. 을유에 원사가 돌아가매 저포를 부쳐 바치게 하였다.

 정해에 공주의 기진이므로 왕륜사에 행차하여 승 삼백을 공양하고 이죄 이하를 사하였다.

 경인에 판서 장자온을 보내어 정요위96)에 이자하기를 「전에 정비를 보내어 경사(경명)에 가서 마를 바치도록 하였는데 정요성에 도착하니 수문관이 입성을 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앞서 정비를 보내어 경사에 나아가 마를 바치게 하였던 바 정요성에 이르렀더니 수문관이 있어 입성을 허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지금 성지를 받들었는데 산동지방이 새로 귀부하여 백성이 곤난할 것이니 고려사신은 그길로 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하므로 이로써 (정)비의 진헌사행이 되돌아오고 말았도다 지금 구언만 들었을 뿐이요 따로히 관신명문이 없어 허실을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만일 과연 성지라면 청컨대 전문을 초록하여 회시하라」하였다.

 자온이 정요위에 이르니 총병관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성지에 고려사신은 다만 해도로만 조경케 하라 하였으므로 지금 가져온 자문은 성지가 두려워 감히 떼어보지 못하겠다」하므로 자온이 문빙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묘에 명승이 총랑 윤희종의 딸에게 장가가니 왕이 미 사십석과 포 일천필을 사하였다.

 기해에 왜인이 구산현(창원지방)에 침구하거늘 경상도도순문사 홍사우가 수백급을 참수하고 로획한 바 기장물을 바쳤다. 납합출이 문합자불화를 보내 오거늘 강계만호 강영이 종자 십여인을 죽이고 그 재물을 략탈하니 합자불화가 수기로 도망하여 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초환하여 강영을 순위부에 가두고 속죄로 장 백칠을 쳤다. 삼월 계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문묘의 삭망제(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를 회복하였다.

 경술에 왜인이 하동군에 침구하였다. 계축에 문합자불화로 판전객사사를 삼으니 (그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신유에 곡식이 귀하므로 술을 금하였다.

 병인 밀직부사 도흥으로 전라도순문사를 삼았다. 하 사월 경진에 묘사와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유에 서리가 내려 풀을 죽였다.

 신묘에 한발로 저자(시)를 옮겼다. 인왕도장을 강안전에서 칠일간 설하여 천변을 가시었다.

 갑오에 전라도도순문사 도흥이 왜인 포로 및 노획한 병장을 바쳤다. 정유에 검교시중 이포가 졸하였다.

 무술에 왜적이 가까운 섬에 있으므로 평리 류연에게 명하여 동강에 나가 진치게 하였다.

 을해에 내전에서 비를 빌었다. 류원정에게 명하여 대보잠을 강하게 하고 손수 그(류원정)의 초상(진)을 그려 이름과 자를 써서 사하였다.

 전라 경상도가 기근임으로 사신을 보내어 진휼하였다.

 오월 정미에 탄신임으로 승을 인희전에서 공양하고 이죄 이하를 사하였다.

 무신에 비가 내렸다. 을유에 기우도장을 강안전에 설하였다.

 병진에 도총도감을 두어 방리군을 점검하였다. 정묘에 효사관을 고쳐 경명전이라 하였다.

 육월 정축에 기우도장을 강안전에 설하였다. 신묘에 전계림윤 김유를 경사(명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밀직부사 정원비는 하정하고 다시 공마하였다.

 병신에 왜선이 동 서강에 모여 양천(고양지방)에 침구하더니 드디어 한양부에 이르러 노사를 불태우고 인민을 살략하매 수백리가 소연하니 경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 달에 화원을 만들어 니현에 이층 팔각전을 짓고 주위에 화목을 심어 써 연유에 비케 하였다.

 추 칠월 갑진에 판선공사사 주영찬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천추절을 하하고 아울러 제주 목호(호인목자) 초홀독불화가 바친 바 마 십구필과 려 이필을 바쳤다 영찬의 딸은 일찍 원에 들어갔다가 대명병에 사로잡힌 바 되었다가 뽑혀 궁인이 되어 제의 총애를 누렸었다.

 을사에 모니노의 이름을 우라 사하고 봉하여 강영부원대군을 삼으니 백관이 축하하였다.

 정당문학 백문보 전록생과 대사성 정추 등에게 명하여 사전가 되게 하였다.

 강화만호 하을지와 한양윤신렴이 능히 왜구를 막지 못한지라 왕이 내부부령 이걸생으로 체복사를 삼아 봉졸(봉수군졸)로 장배하였다.

 임자에 찬성사 강인유 동지밀직사사 김서 성원규 판도판서 임완 및 홍사범 서상관 정몽주 등이 명의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강인유 등은 홍무 오년 십이월 초칠일에 본국에서 왜임파유한 일로 절강성에 있었는 바 명의 중서성이 착유한 예부주사 왕본도가 태창에 도래해서 성지를 받들고 전해줌을 받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그대들 여러 관원과 그들을 따라 수행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조정으로 오게 해서 나의 선유를 직접 듣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초팔일에 태창위가 쾌선 이척을 급부하고 진무 주성례를 차송하였다.

 이십일 조조에는 (명경의) 봉천문 아래에서 선유를 직접 들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내가 전자에 그대들 여러 관원들이 태창으로 갔을 때 명춘이 되면 예부의 관이 거기가서 음식제범의 일을 돌보아 주도록 지시했었다

 그리고 노원사(즉 연달 마실리)와 두사람의 내시가 내가 보기에는 아직 안돌아오니 아마도 그들의 선박이 풍랑에 몰려 어디론가 흘러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더니 그후에 겨우 돌아왔는데 손이라는 성의 내시는 죽었다 한다 들리는 말로는 그가 병사했다고도 하고 스스로 목매었다고도 한다 말이 이렇게 들리니 나는 그 연유를 분명히 묻는 바이다 그대 국왕은 칼 찬 사람들로 하여금(내시들의 숙소의) 창밖에서 감시하고 순행하며 단속을 심하게 하니 그 내시가 말하기를 나는 본국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 단속을 하는가라고 말했더니 박이라는 성의 재상이 말도 듣지않고 한바탕 때리게 하고서 다시 독약을 주어서 죽게하였다 그리고서 문으로는 감히 가지고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뒷담위로 끌고 나갔다 특히 모자를 가지고 높이 나무위에 걸고 시체는 나무아래 매어달았으며 독약으로 죽인 것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입안에서 구더기가 생길 때를 기다려서야 백성으로 하여금 래보토록 하였다 또 배타고 간 군인들에게도 여러사람으로 하여금 단속 간수케 하였다 그대들의 국왕에게 말하여라 일년에 삼~ 사차례나 사람을 파유해오고 허다한 전량을 진공해오니 나로서도 어찌 다소간의 호우를 하지않을 수 있으리오

 그래서 노경사와 두 사람의 내시로 하여금 약간의 사라 단필을 답례로 가져가라 하였으니 이를 받으면 선당

그사람들을 곧 돌려보낼 것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은 일개의 조그만한 내시를 죽였으니 그것이 무슨 생광이 되겠는가 한사람이라 할 것이 아니라 설사 열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아무 몸달 것 없다 이 내시는 그대 나라에서 보내 온 사람도 아니고 또 그대 나라의 차역을 회피해서 도망온 사람도 아니다 그는 우리가 원조에서 찾아내온 사람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긴 생각을 못하였으며 긴 생각 못함이 심하도다 내가 지금 그대들을 잡아서 선박위에 던져놓고 상륙을 못하게 한다면 그대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그대들은 파유되어 온 사인들이니 그대들의 일에는 간여하지 않겠다 그대들의 국왕에게 말하여라 즉 이렇게 나를 의심한다면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쌓고 활 화살 포 군마를 준비하여 곧 감연히 우리에 상적토록 할 것이지 그대들 사행인들로 하여금 정탐이나 하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그대 나라에서는 하나의 허물어지고 옹색한 성채도 방치된 채로 있지않음이 없고 또 그대 나라에서는 군량을 비축함에 있어서 민력을 많이 괴롭혀서 백성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일이 없고 왜인들이 항시 침입해온다고 한다 그러니 그대들은 곧 삼백 내지 오백의 선척을 준비하여 군인들로 하여금 잡게 한다면 그것이 곧 가장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대들에 비해서 바다가 더 멀리 격해 있지마는 왜인이 오면 나는 사람을 보내어서 나#하는데 그 때에 잡지못한 놈들은 명주위의 대지휘 태창위의 서지휘의 두 사람 휘하에서 살멸하며 또 어지휘를 보내어서 나포케 한다 왜인 젊은놈을 입을 찌르고 또 불알을 깠더니 해상도 잠잠해졌다 지난해의 신년축하사신인 한이라는 자가 사개월이 걸려서 도래하였는데 너는 어째서 그렇게 늦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풍변이 좋지못하여 못왔다고 하기에 우리의 지휘가 그에게 물으니 중국어를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고려인들을 잡아서 손과 발을 묶고 물속에 던졌더니니 그대들의 그 재상은 바빠서 물을 두 세 번 뱉아내더니 놀라웁게도 어찌된 셈인지 중국어를 알아듣게 되었다 이것은 도시 견식이 앝은 탓이다 이로 인해서 륙로로 와서는 해로로 돌아가려고 하는 데 나는 일찌기 이를 하지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본 뜻은 산동 일대에서의 선척과 군마의 동정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금년의 신년축하사신은 4개월 전에 도래하였는데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와서는 정탐에 종사하였다 전에는 일척의 배가 칠일이면 도래하였다 나의 이 용강(남경을 말함)에서의 일은 모두 이렇다 이라는 성의 내시는 달달 회회등 여러 종족인과 더불어 모두와서 교역과 정탐에 종사하고 있다 이내시로 말하면 여기 온지가 두 세번 되었는데 달달인을 만나면 달달어로 이야기하고 보통 내시들을 만나면 고려어로 말하고 중국인을 만나면 중국어를 말하며 이렇게 해서 정탐을 하니 우리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만약에 억지로 그대들이 정탐을 보내온다면 우리는 여기 두 세군데에서 사~오만의 군마들 쪼개어 낼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창립한 중앙의 성과 대의 관직에는 모두 결원이 있다 그러니 그대의 곳에서 청렴하고 능력있고 식자있는 사람 이~삼백명을 보내오도록 그대 국왕에게 가서 말하여라

 그러면 나는 그들을 성과 대및 육부와 각위에 배치해서 관리로 임명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이 사람을 보내와서 교역과 정탐에 종사케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삼년에 한번씩 진공해 오도록 말해왔던 것인데 그대 국왕은 성실치 못하여 의심을 많이 한다 이렇게 의심이 많으니 그로 하여금 의구하지 말도록하라 그러니 그대들은 지금은 운삼년동안 종전과 같이 해마다 보내온 후에는 삼년마다 한번씩 진공해도 좋다 아까 말한 이~삼백명의 관원을 려비를 주어서 보내고 그들의 래왕시에 소식을 들으면 그대들이 정탐을 보내는 소견식보다 낫지 않은가 조그만한 일 한가지가 있는데 주라는 성의 녀자 아이를 원조정에서 찾아가지고 데리고 와서 그에게 물었더니 자기 성이 주라고 한다 나로서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명 태조의 성도 주임) 그의 아버지의 성을 물었더니 주가라고 한다

 내가 지금 그를 붙들어 두고 있다 그대도 생각해 보라 십삼세의 어린 아이는 어머니 젖먹을 나이다 그러니 그대는 빨리 그 아이를 자모의 정을 잃은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어라 그의 아버지도 딸이 한번 간 후에는 소식을 못들었을 것이니 부자의 정을 잃었을거다 그런데 그대는 그 아버지를 멀리 류배하였다

 그대들이 하는 짓이란 소견 없는 짓만 한다 좀더 멀리 멀리 생각해서 하라 당년에 그대 국왕이 문서들 바쳐왔는데 자기의 질녀들 잃었다 하여서 나는 곧 사신으로 하여금 도처에 가서 찾게하여 데리고 와서 보내주었다 그런데 김가라는 내시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분명치 않다하여 그를 죽였으니 또한 소견없는 짓이다 지성으로만 한다면 그대의 왕씨성 가진 자손들이 수백년동안 실권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좋을 것이다 나로서는 나의 두 사람 죽었다는 사실의 리해관계로 해서 그대 나라를 정벌한다 안한다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대들은 이처럼 성실함이 없으니 이는 소견없는 짓이다 후에 가서 다른 사람이 그대 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면 나는 일반에 대해서 신을 잃는 것이 된다

 그러니 나는 지금 그대를 정벌한다 안한다를 감히 말할 수 없고 만약 그대가 종래와 같이 행동해 온다면 부득불 그대로 (정벌)하는 것이고 그대가 그렇게 안한다면 그만두게 된다 내가 만약 그대를 원정한다면 명주에서 해선 오백척 온주에서 오백척을 만들고 천주태창 광동 사천에서 삼개월 내에 칠~팔천척의 배를 수조해서 정정당당하게 원정나갈 것이다 나는 그대의 엉터리(파피는 발피 즉 개구장이)왕과 달라서 내시 용복(고룡보를 위)으로 하여금 역마위에 잡아서 데려오게 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으며 이는 그의 부마인데 그렇기때문에 그를 잡아데리고 갔던 것이니 나도 그렇게 못할 리 있겠는가 나를 의심하지 말라 나는 이십사세 때부터 홍군속에 들어가 거기서 삼년 사는 동안에 스스로 약간의 군마를 마련하고 성 하나를 수축하였고 바다에서는 일만척의 배를 만들어냈다 그후 각처의 성곽을 모두 수획하였다 또 대원도 북쪽으로 몰아냈다 나는 지금 호인도 아직 멀리 몰아내지 못하였는데 어찌 그대들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다음날에 달달들을 잡을 놈은 잡고 쫓을 놈은 쫓아서 천하가 평온하게 된 후에 뽕과 삼이 동산에 가득차고 사방이 부귀하게 된다면 그때까지는 어찌 외국의 죄를 논할 겨를이 있겠는가 이른바 중국의 난은 제후의 복인 것이다

 나는 일개의 농민으로서 중원의 주인이 된 사람이고 그대는 기자의 나라이고 신라와 낙랑군이 서로 적대해서 백성들을 잡아갔는데 지금은 이 모든 사람들이 그대의 노비가 되었다 일찌기 전에는 당의 태종이 그대를 정벌해서 실패하였는데 그들은 원정을 할줄 몰랐던 것이다 그후 당의 고종은 그대 나라를 모조리 멸망시켜버렸다 후에 관선생(홍두적)이 남녀를 잡아가고 법도를 지키지 않고 오직 탐음을 일삼았으니 이로써 그도 또한 멸망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그대들이 방비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나인들 그와 같이 정면으로 정벌해 들어가지 못할거야 있겠는가 홍사범은 그대 나라에서는 상당한 대관이고 또 왕의 친척이지마는 물에 빠져 죽었다

 이는 모두 한 사람의 짓이다 전에 몇 사람들을 남겨 두었는데 만약 남겨두지 않았던들 우리의 여기 수비군관들이 그의 재물이 많은 것을 보고 그의 생명을 빼앗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대 국왕도 생각해보라 그대는 사람을 요동 등의 곳으로 보내어 오왕과 서로 연석을 함께하고 또 포 일백필을 주었는데 음식은 먹었지마는 포는 수회하지 않았다 가져다 준 것을 헤아려보면 매필의 포는 미 삼백담에 해당되니 통산하면 삼백담이 된다 이것 역시 재물이요 량곡이다 거기에서 연석을 베풀었다 하지마는 본 뜻은 정탐에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천여필의 말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고 또 납합출의 종자를 대동하고 와서 우리 병영의 내부사정을 살피고서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우가장의 십만마리의 말에 먹일 마양을 해치고 다시 삼천의 군마를 꺾어 버렸다 그대들은 바쳐온 상표 속에서 말하기를 자자손손이 세세로 칭신한다고 해놓고서 하는 일은 이 모양이니 소견없는 짓이다 또 서총병과 연석을 베풀었으니 진의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북평부의 군관들의 사정을 들어보자는 것이었으니 그대는 그토록 소견이 적어서 어떻게 할 셈이냐 이소사대라는 것은 옛날부터의 예인데 어째서 이토록 지성이 적으냐 제주의 마필은 오늘 가져오겠다 내일 가져오겠다 하고 떠들석하기가 일년이 되었는데 가져온 것이라고는 말 사필밖에 없다 이것은 도시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매매하러오는 장사꾼들은 긴절히 필요하지도 않은 포와 자리는 가져오면서도 마는 한 마리도 팔려고 가지고 오는 일이 없다 이런 짓은 도시 그대들의 소견이 얕은 짓이다 사람 일신에 비긴다면 한 조그만한 종기가 나서 잘 간호하지 않으면 의사도 고치기 어려운 큰 병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대들은 태창으로 가서 삼월안으로 풍변이 좋거든 돌아가라

 그래서 국왕 앞에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즉 다시는 소인들의 말을 듣지 말고 그리고 박이라는 성의 재상과 주라는 성의 계집아이의 아버지와 친족을 보내도록하고 또 국왕 앞에서 시중들고 있는 내시 사~오명을 보내라고 하고 그대들 몇사람 관인들의 성은 무엇인가 거년에 홍이라는 사람이 해상에서 탄 배가 파괴되었는데 현재 해상을 지나기는 어렵고 허다한 난관이 있다 그러니 그대에게 선척과 선부를 공여해줄 것이니 그대 관인들은 등주로 가서 바다를 건너라 사흘이면 바다를 건너게 될 것이다 금후은 해로로 올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바다를 소탕하는 중이다 만약 해로로 온다면 나는 그대들을 접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해상으로 오는 자가 청렴하고 유능한 과거합격자및 리원들이라면 조그만 배로 태워서 보내어라

 그러면 나는 그들을 접해 줄 것이다 탐욕한 자는 보내올 필요가 없다 금후에는 그밖의 사람은 해로로 보낼 필요가 없다 그대 국왕에게 가서 말하라 그대 곳에서는 정말 지성을 가지고 오라 그러나 지성이 과하면 도리어 의심이 많아진다 그대도 이렇게 의구한다면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가 된다 내가 종전에 차유한 사람에 관해서는 그대들 나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사람을 보낼 때에는 한인을 보내지 않고 모두 그대 나라 출신인을 보내는데 이들은 그대가 우리의 여기서의 사체 동정을 물으면 대답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중국의)국토를 아우른지가 삼년 내지 오년이 되지마는 이 내시들을 거느린 것은 일~이년밖에 안된다 이 내시들은 나와 더불어 십이~삼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아마 그를 죽였을 것이다 달마실리 원사로 말하면 원조의 내시인데 나에게 왔으나 나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구성속에서 한가하게 살도록 하였는데 들으니 그가 아주 정밀자세하다 하기에 그로 하여금 궁중에서 살게 하고 그를 그대 나라로 차유하였던 것인데 그가 어찌 우리 이곳의 동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 있겠는가 우리의 중국사신을 그대 곳으로 보내면 타살하니 나는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겠다 그대가 올 마음이 있으면 오고 올마음 없으면 오지 말라 내가 전에 배 한척을 보내었더니 그대는 허다한 군마로써 접대하니 어디에 그런 례절이 있겠는가 배 한척이 아니라 십척이 가더라도 무엇이 두려울 것 있겠는가 내가 듣기로는 왜적이 이~삼백리나 내지로 침입해 들어가도 다스리지 않고 다 허물어진 성채도 내버려두고 성지도 수축않는다고 하는데 우리를 의심하는 것은 무슨 짓인가 나는 정벌을 나간다면 정정당당히 정벌한다 호인들을 멀리 몰아낸다면 오년내에 (그대들을) 정벌하지 못하면 십년내에라도 정벌할 것이다

 그대는 올 마음이 있거던 오고 올 마음 없으면 오지말라 이렇게 그대 국왕에게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중서성에서 보내온 자문에 이르기를 「홍무오년 십월 이십이일에 배신인 밀직사동지 김서 등이 홍무 육년 정조를 진하하는 표문과 공헌해 온 방물을 받았고 또 배신 찬성사 강인유 등이 바쳐온 사은의 표문과 공헌한 방물인 마필을 받았다 그달 이십삼일에는 예부관이 황제에 주문하여 고려의 내사를 봉천전에서 인견토록 하였는데 그것이 끝나고나서 황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다 즉 고려국왕 있는 곳에는 이미 전부터 이곳 사신들이 연거퍼 갔기때문에 국왕은 영접에 고생을 하고 한때는 더위까지 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근일에는 연답리마실리로 하여금 명승 등의 가족을 데리고 가게하였을 때 너희 중서성으로 하여금 나의 이런 뜻을 고려국왕께 적어보내어 알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국왕은 도리어 매년 수차 사람을 보내어 김 은 기혈등의 물건을 가져다 바치니 이런 예물은 백성들을 괴롭히게 함에 틀림없고 더구나 사신의 왕래는 해양을 여러번 건너야 하니 심히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게된다 그런데 근일에 홍사범같은 이는 회로에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선척이 양손되어 그도 물에 빠져 죽었다 다행히도 몇사람이 살아남아서 그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지마는 만약 한 사람도 안 살아남았다면 어찌 여러갈래의 말썽이 없었을 것이냐 내 생각으로는 고래로 중국의 제후들은 천자에게 매년 한번의 소빙을 하고 삼년에 한번 대빙을 하며 구주 밖에 있는 번국과 원국들에 이르러서는 단지 매세(삼십년)에 조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바치는 물건으로서는 약간의 예물를 바쳐서 성의를 표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이제 고려는 중국과 퍽 가깝고 문물과 예락이 서로 통하며 경과 사가 중국과 상사하여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외의 번국들은 삼년에 한번 조빙하는 외에 의거하게 하고 혹 매세에 한번 조빙하기를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 너희 중서성은 나의 이런 말을 문서로 써서 고려국왕에게 보내어서 알게하라 즉 금후에 가져오는 방물은 단지 토산의 포 삼~오건만으로 해서 성의만 표시하면 되고 그밖의 물품은 도시 가져오지 못하게 하라        

그밖의 번국과 원국가운데 점성 안남 서양쇄리 과와 발니 삼불재 섬라곡 진랍 등의 새로 부용하게된 나라들도 빈번히 사람을 보내오는데 이는 또한 그곳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니 그사신이 올 때에는 그에게 말해서 단지 고인의 예에 의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중서성의 자문에는 이르기를 「삼가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거기에 이르기를 현재 천하의 모든 관서들은 나의 생일 정조동지를 맞이하게 되면 모두 표문을 올려 오니 퍽 예가 번잡스럽다 동지는 옛날에도 하례가 없었는데 단지 당의 현종으로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

 금후에는 나의 생일에는 표문을 올릴 필요가 없고 또 황태자의 생일에도 또한 필요가 없다 다만 정조는 일년의 맨처음이니 각처에서 올리는 표문을 분류해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다

 정몽주는 거년 사월에 홍사범과 함께 명의 서울에 도달하여 중서성의 자문 이통을 받았는 바 일통은 촉지방을 평정했다는 것과 고려자제를 입학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요 다른 일통은 아악의 종과 경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팔월에 회로에 해중의 허산까지 왔는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이 되고 홍사범은 익사하고 마침내 자문도 잃어 버렸다 정몽주는 다시 명의 서울로 가서 중서성에 이 사정을 고하였는데 종과 경에 관한 자문은 초본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중서성관이 초사를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평촉과 자제입학에 관한 회자문은 베껴서 왔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보내온 밀직사사동지 홍사범 등이 촉지방을 평정함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려왔는데 예부에서는 곧 황제께 진주하였더니 그 신하로서의 뜻이 전절하고 문리가 조리있고 순통하며 전고를 널리 인용하여 심히 잘되어 있음을 보고 황제께서는 극히 즐거워하였다 또 표문 일통은 자제를 입학시킴을 청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관하여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거기에 이르기를 고려국왕이 고려인 자제들을 명의 국학에 넣어 공부시키기를 원하고 있는데 나는 일찌기 들으니 당태종 때에도 고려국이 그 자제를 입학시켰다 한다 이는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또 생각컨대 이 자제들이 멀리 와서 공부를 하게되면 여기에서 혹은 반년 있고 혹은 일년 있고 혹은 일년반 있다가 돌아갈터인데 비록 회국하는것은 자기네 변선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지마는 단지 그 본국은 멀리 바다 동쪽에 처해 있어서 여기 서울로 오자면 해로로는 바다를 여러겹 건너야 하고 륙로로는 만여리가 된다 고향을 멀리 떨어져 있으니 부모된 자가 반드시 아들 생각에 잠길 것이고 그 아들도 인자이니 반드시 어버이 생각을 할 것인데 이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너희 중서성은 문서를 보내어 고려국왕으로 하여금 그 신하들과 잘 상의하도록 해서 만약 부모의 원이 그 자제를 입학시키는 것이고 또 아들도 부모의 명령을 즐거이 받아서 공부하러 오는 자는 고려국왕으로 하여금 사람을 시켜 잘 데려오도록 하게 하라 너희 중서성이 회답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이런 사연을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갑인에 왜가 교동을 함락시켰다. 팔월 병자에 강중상으로 경상도도순문사를 삼고 김횡으로 전라도도순문사를 삼았다. 의용좌우군을 설치하고 문하평리 유연과 밀직사 변안렬로 분총하게 하였다. 구월 신축에 왜가 해주에 침구하여 목사 엄익겸을 죽이거늘 명하여 리로서 구하지 않은 자를 베었다. 정사에 서해도만호 허자린이 능히 왜를 막지 못하였으므로 체복사 삼사좌윤 정단봉을 보내어 장형케 하였더니 단봉이 사감을 끼고 자린을 목을 졸라 죽이거늘 자린의 동생이 그 억울함을 호소하매 단봉이 도망하였다.

 임오에 이걸생이 경솔하게 하을지 등의 죄를 판결하였으므로 이를 죽였다. 계해에 주영찬으로 밀직부사를 삼았다. 왕륜사 영전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 화원에서 잔치하였다. 무진에 왕이 판사 윤호로 더불어 바둑을 두는데 약속 하기를 이기지 못한 자는 일을 써서(서사) 증할 것이라 하였는데 윤호가 이기지 못하매 시를 써 올렸는데 이르기를「어두운(암) 이를 속임은 늘 그리되는 것(속여지는 것)이 아니요 밝은(명)이를 속임은 마땅히 스스로를 죽이는 것인지라 한 사람의 손을 가지고 천하의 눈을 가리기 어렵도다」하고 하였다.

 동 십월 을해에 찬성사 최영으로 육도도순찰사를 삼아 장수와 수령을 출척하고 군호를 편적하며 전함을 만들고 죄있는 자는 모두 직단(#문하지 않고 처단하는 것)하게 하였다. 친히 정릉(노국공주릉)에 제하고 드디어 주연을 베풀어 풍류를 벌리고 늦게 릉하에서 잘제 백관은 융복으로 호종하고 자제위는 모두 홍의에 검은 포대기를 걸치고 말을 달려 전도하였다. 병자에 서강성에 머물다가 정축에 새로 건조한 전함을 보고 또 화전 화통을 시험하고 늦게 마장에 유숙하였다. 무인에 선점에 머물고 기묘에 동강성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증산에 머물었다. 경진에 천수사에 행차하여 충숙왕의 진(영정)을 배알하고 환궁하였다. 을유에 밀직부사 주영찬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하정하고 아울러 진정 사은의 표를 올리게 하고 판선공사사 우인렬은 마 이십사필 라자 이필을 바치는데 거자 김잠 송문중 조신이 종행하였다 진정표에 이르기를 「성훈을 크게 펴매 깊어 헤아리기 어려우며 천위가 가까우매 공구(진첩)하여 상도를 잃게 되나이다

  이에 비종을 피력하여 총청을 앙청하나이다 신은 우몽하여 배우지 못하고 고루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다행히 민이와 물칙이 같음으로 천명과 인심의 소재를 알아 인을 의지(의)하고 의를 사모하며 이미 위질98)하여 신이 되었으나 홀로 무슨 마음으로 사를 끼고 간을 품어 위(상)를 속이오리까 오직 소국은 황추99)에 치우쳐 있어 아득한 옛날부터 풍기에 국한되어 문사는 겨우 그 품은(온)바를 전달하고 언어는 반드시 번역하여야 이에 통하니 고협100) 승당에 일찌기 육~칠인의 동자를 보내려 하였거늘 명경 습률에 무엇을 인연하여 이~삼백의 유생을 얻을 수 있아오리까 하물며 규첨(첩보)의 밑천(자)이라 이르니 어찌 감히 초래의 명에 응할 수 있아오리까 그러므로 징소된 환자와 및 이미 허락된 생원(유학생을 가리킨것)까지도 장차 고유를 좇음에 있어 또한 혐의를 마땅히 피하여야 하겠으니 진퇴가 오직 궁하여(유곡) 재량할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뇌정의 위를 거두시고 천지와 같은 도량을 넓히사 신이 예를 다하려 하되 예되는 소이를 알지 못함을 가련하게 생각하시고 신이 충을 힘쓰되 충되는 소이를 알지 못함을 살피사 어려운 바를 책하지 마시고 그 원을 들어주시면 신은 더욱 번선의 기탁하심을 삼가히 하고 우럴어 성교의 점을 입어서 만년토록 성인의 수를 빌겠나이다」라고 하였고 사은표에는 이르기를「조유가 정령하고 회수하심이 두루 흡족하여 은위가 아울러 들어나니 감괴가 교병하나이다 그윽히 생각컨대 소방이 중국을 높일줄 앎이 마치 아이가 반드시 그 부모(호시)101)를 얻음과 같아 성인이 있으매 곧 귀의하였나이다 신같은 것은 전조(원조) #상102)의 여생으로 소대(대명) 분봉의 성명을 받으니 그 스스로 행복됨이 실로 금석에 드문 바로 비록 죽어도 달리하지 않을 것은 오직 신명이 이것을 믿을 것이외다 그러나 운이 막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면 문득 비방이 일어납니다 양 내시는 이미 자리(상)를 연하여 같이 보았는데(안) 어디로 좇아서 짐살할 것이오며 노원사는 함께 배를 같이하며(동주) 서로 미워하다가 마침내 화가 미치게 된 것이며 무위는 이에 나라의 상직인데 영조의 불공함이하고 보고 빈관에는 무기를 가질 리가 없는데 무함(무함)하여 전객(빈객을 응대하는 일)하는 자가(무)비가 있었다 하며 그 구조(원조)의 유신(유족또는 유얼자)과 납씨(납합출을 말함)의 유혼은 이미 모와 순의 서로 어울리지 않음과 같은데 오히려 보차의 서로 결부함이라 말하고 봉화(절강지방)에 친교를 취하고 북평에 수빙하과 조근으로 준분하는 것까지를 모두 첨하의 저사라고 말하여 의심을 따라 근사하게 꾸며대어 화를 옮기고 위를 도모하오니 오직 소명하신 성감은 군정의 전직을 동촉하시와 특히 예훈을 번거롭게 하사 신으로 하여금 자신하도록 하소서 또 무릇 미세한 부(진)주라도 모두 허락(윤유)하시는 후은을 사하시와 아악을 내려 정음으로으로 인도하시고 자제의 입학에는 곧 조치하심이 정심하시고 풍파로 배가 전복된즉 주심(석여)이 많고 거듭하와 인하여 천개(우리사신을 말함)를 륙로(탄도)롤 돌아오게 명(칙)하셨나이다

 황제폐하는 천지생물의 마음으로써 마음하시고 요순의 집중의 도로써 도를 삼아서 반드시 연비어약의 화를 이룩코자 하시고 반드시 봉지도출의 상이 오도록 하시니 뭇 간악(특)은 스스로 소멸되고 모든 바른 것(정)이 다 심어져 드디어는 고루한 이 몸(루질)으로 하여금 또한 경광을 입게 하시니 신은 삼가 마땅히 성모를 패복하고 홍조에 함유하여 바라건대 신절에 이지러짐이 없이 항상 위로 성수(황령)를 축하리라」라고 하였다. 최영이 양광도도순문사 이성림이 능히 왜를 막지못하므로 봉졸로 장배하고 그 도진무 지심을 참하였다. 십일월 임인에 주은찬 및 김잠 조신의 (탄)배가 영광의 자은도에서 패침하여 모두 익사하였는데 우인열과 송문중 등은 생환하였다. 병오에 밀직부사 성대용으로 양광도도순문사를 삼고 밀직 김선치로 삭방도도순문사를 삼았다. 계축에 왕륜사 영전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전라도도순문사 도흥이 능히 왜를 막지못하였으므로 파면하였다. 을축에 밀직부사 장자온이 주영찬에 대신하여 경사(명경)에 갔다. 이달에 중서성에 이자하여 화약 사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왜적이 란(모)을 일으켜 문득 갔다 문득 왔다 하기가 이십여년이 되었읍니다 자래로 본국의 연해 주군의 관방요새처에는 다만 군사를 배치하여 수어만하고 바다에 나가 추포하지 않았는데 근래 이래로 적세가 이미 치성하여 이제 바다에 나가 추포하여 써 백성들의 우환을 끊을가 하와 관원을 보내어 포왜선척을 만들게 하였으나 그 배 위에 써야할 기계 화약 류황 염초 등물은 판출할 길이 없아와 의논한 나머지 의당 조정(명정)에 신달케 되었아오니 그것을 반항하시와 용도를 거두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십이월 무술에 평양윤 전록생이 영릉(충혜왕)의 얼자라고 칭하는 석기란 자를 참하여 머리(수)를 서울(경)에 전하였다 석기는 사단(사#)이 아직 들어나지 않고 도당도 모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를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였다.

 계묘에 크게 사하고 교하기를 「석기는 서얼일뿐 아니라 또한 단양대군 가비의 소출에 속한 것이다 왕자에 손수경 등이 의지하여 변란을 꾀하다가 이미 그 죄에 복하였거니와 군신이 모두 말하기를 화의 근본을 마땅히 제거할 것이라 하였으나 내가 참아 곧 형벌할 수 없어 이안 정보 등에게 명하여 제주 수정사에 보내어 안치시키라 하였는데 (이)안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배 탈 때 스스로 물에 빠저 죽었다 하기로 이미 중외에 포고하였더니 이제 서북면도병마사 전록생이 은밀히 석기가 그 부내에 있어 흉도를 유인하여 모우고 가만히 불궤를 도모함을 알아차리고 서해도순문사 김유로 더불어 곧 가서 잡아 목을 (베어) 서울에 전해 왔도다 내가 처음 이 말을 듣고 그 거짓임을 의심하였으나 석기의 외조 임신을 체문하매 죽지않음이 명백함을 자세히 알게 되었도다 나의 보전하려는 데에 실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 스스로가 전복을 취한 것이다 이안과 정보는 살아있는 것을 죽었다하였으니 속이고 불충하였으며 임신은 그 망명함을 놓아주고 곧 먼저 고하지 않았으니 함께 전형을 바르게 할 것이며 그 흉도 김광수 김옥경 최흑려 이인은 모두 사하지 말 것이요 그 나머지 괘오된 자는 일체 면제하라」고 하였다.

 계축에 대호군 김갑우가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오매 제가 수조하여 이르기를 「옛날부터 천하의 임금은 중국에 있으며 사이를 다스려 계속하여 지금에 이르렀도다 그러나 리치를 따라 무궁한 복을 즐기는 자도 있고 멀고 음함을 믿어 비상한 화를 취하는 자도 있나니 지난 일을 볼때 선을 아름답게 여기고 우을 미워하지 않을가보냐 짐이 초래(초야와 같은 말)로부터 일어나 천명을 받아 환우를 통일하였으되 이에 부곡함이 많아 저의 내공함을 욕되게 하였으니 후히 보내지 못함을 생각하매 매우 부끄러운 바이다

 그런데 비록 해동에 은혜는 없으나 힘써 왕의 마음으로 써 마음코자 하노니 알지 못해라 그러한지 혹은 왕도 짐의 마음으로 써 마음하는지 또한 알지 못해라 그러한지 두 마음이 함께 드러나는데에 고인의 득실을 거울삼을 지니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왕은 그 택할 지어어다」라고 하였다. 갑자에 김의로 밀직부사를 삼았다.

갑인 이십삼년 춘 정월 신미에 인희전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계유에 안무사를 양광 전라도에 보내어 포왜만호를 함께 겸케 하였다. 정축에 연복사에 행차하여 담선회를 설하였다. 병술에 환자 김사신 윤가자발의 처를 봉하여 택주를 삼았다. 경인에 김횡으로 경상도도순문사를 삼고 강령부승 왕강 한상질과 주부 정목 렴치화로 대군의 시학을 삼았다. 이월 정유 삭에 일식이 있었다.

 무술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니 길이가 장여나 되었다. 신해에 공주의 기일이므로 왕륜사에 행차하여 소선으로 그 달을 마쳤다. 임자에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공주 생진제를 인희전과 정릉에 설하였다. 임술에 술을 금하였다. 갑자에 이무방으로 정당문학을 삼았다.

 밀직부사 정비와 판사 우인열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하정하고 륙로를 통하여 조공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방물을 본래(구)대로 할 것을 청하였으며 상호군 주의는 #서로 훈계한 것을 사하였는데 길(륙로)을 청하는 표에 이르기를「조정110)의 예가 중하니 제항을 뒤에 하기 어렵고 일에 부딪치는 일에 한욕(린)이 생기니 오직 비호(란익)함을 의지하여 황송한 간청을 부진하와 총문을 모독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이에 명(제명)을 받음으로부터 보리로 써 힘을 쓰고 전심으로 공#(조공)을 하였아온 바 그러므로 수륙에 막힘이 없고 세시에 틀림이 없었나이다 홍무 육년 육월 이십일 배신 지밀직사사 김유를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판전농사사 설장수는 나아가 천추를 하하고 밀직부사 정비는 홍무 칠년의 정조를 진하코자 하다가 왜적이 있음으로 인하여 아직 발선하지 못하더니 그 사이에 당년 칠월 십삼일 배신 찬성사 강인유 등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의유하신 성지를 흠봉하매 지금으로부터 삼년동안은 본래대로 자주 오되 그 뒤에는 삼년에 한번씩 진공할 것이다 거년에 성이 홍이라는 자가 바다에 빠졌으므로 너는 등주로 가서 바다를 건너갈 것이며 금후로는 해로로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나이다 한 것을 흠봉하였으며 또 중서성의 자에 준하면 성지를 흠봉하니 금후로는 나의 생일에 진표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 동궁 생일에도 또한 진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을 흠봉하였나이다 (이러한)흠준을 제한 외에 당년 칠월 이십오일에 다만 정비를 보내어 정요위를 경유하여 홍무 칠년 정조를 진하하였으며 또 판선공사사 주영찬을 보내어 제주마필을 진헌하였더니 간 뒤에 정비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정요위관이 성지가 없음을 추칭하고 억지로 돌아가게 하였다하오니 신이 진퇴에 의지할 바 없어 창황히 스스로 이르기를 진실로 미성이 반드시 통할 수가 있다면 비록 엄금을 간범하더라도 무엇을 사양(사)하리오 하고 십월 초이일에 정비가 병을 앓음으로 주영찬을 밀직부사로 올려 제배시켜 입하케 하고 또 판선공사사 우인열은 제주의 마필을 진헌케 하였더니 뜻밖에(부기) 십일월 초오일에 해상에서 풍파를 만나 배가 부서져 주영찬 및 서장관 조신 압마관 김천찬 통사 윤방길 강사덕 거인 김잠 등 삼십팔인이 빠져 죽고 진헌하는 예물과 제주 마필은 모두 #실되었나이다 그윽히 생각컨대 영찬은 몸소 선초를 받잡고 겸하여 양전을 수공하매 비록 사생은 명이 있어 가히 미리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돌이며 생각컨대 사려가 방도에 어그러진 것으로써 우럴어 성훈에 부끄럽습니다 전번에 정요위의 막음이 없었던들 어찌 오늘의 과(좌)위가 있아오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원(원방을 회유하는)의 인을 밀(추)고 포황(황복을 포섭)의 도를 넓히사 신의 충을 다하려 하다가 자칫(동) 낭발을 만남을 어여삐(련) 생각하시고 신의 직을 술하려다가 오히려 준분에 미함을 살피시어 무릇 주진한 바 있거니와 변도를 허락하시면 신이 삼가 더욱 건성을 번한에 다할 것이오며 항상 강릉의 수를 빌겠나이다」라고 하였고 방물을 본래대로 바치기를 청하는 표에 이르기를「삼양이 교태하니 이는 인정이 됨이요 만국이 한가지로 하는 바에 모두 방물을 바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소방은 이에 오계로부터 중원에 복사하여 불월전의 물을 보냄이 비록 때를 따라 혹은 다르다 하더라도 여러가지(다의)의 진헌향에 그 뜻을 나타냄에는 어찌 변함이 있아오리까 귀부한 이래로 더욱 건성하여 게으리함이 없었나이다」라고 하였다. 홍무육년의 하정사 배신 동지밀직사사 김서 등이 중서성의 자문을 싸가지고 돌아오니 (이르기를)「성지를 흠봉컨대 너희 중서성은 장차 나의 말을 문서로 만들어 고려국왕에게 주어 알리도록 하라 금후의 방물은 다만 토산의 포자를 삼-오대로 뜻을 표할 것이요 그 나머지는 모두 가져오지 말라 하셨으니 흠차하라」하였나이다

 그윽히 엎드려 생각컨대 적게(박)가져오라 함은 소국을 근심함에서이니 진실로 천지의 만물을 자육하는 홍은이오나 지를 잡는 것은 휴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서 또한 신자의 위를 섬기는 지의입니다 이에 비례를 닦아서 감히 엄위를 모독하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충성을 살피사 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원하는 바를 부종하시와 하여금 전규을 쓰게 하시면 신은 삼가 세시를 당하여 충정을 궐함이 없도록 숙야로 오직 천산에 부지런 하겠나이다」라고 하였고 #서를 사하는 표에 이르기를「륜음이 바야흐로 나리매 보훈이 오직 밝나이다 봉독한 이래로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그윽히 생각컨대 소방은 조선이 계토함으로부터 반드시 중하에 귀부하여 역대로 봉작을 받고 항상 후도를 각근(각근)하게 닦아 하늘을 두려워하며 대국을 섬기더니 다행히 성조를 만났나이다

 신은 학식이 용허하고 자성이 우루한데 도리어 번선의 기탁을 입(피)고 외람되히 석뢰의 영광을 받자와 처음엔 인신과 역서로써 하고 이어서 예복 악기로써 하니 사라 금가은 매양 사ㄴ명을 따라서 거듭 오고 경적 약재는 모두 하정의 비망인데에도 나오게 되었나이다 이미 의제는 본속에 따르기를 허하시고 또 부로는 그 본가로 돌아가도록 청허하셨으며 질녀의 유리함에 이르러 자송함이 더욱 두터우며 제주의 반측에는 처치를 적의하게 하였고 우리 사신(천개)의 배가 전복하였을 때 그 풍도를 면하게 하셨으며 참소하는 자가 틈을 엿보았으나 그 패금을 사라지게 하셨나이다 하물며 이제 특히 조유를 내려 또 간곡하게 회수를 주시니 황제폐하는 지는 고존에 있고 인은 자소(작은 것을 자애하는 것)에 돈독하여 신의 기미의 견식없음을 민망히 생각하사 신으로 하여금 화복의 단을 알게 하시니 신이 감히 더욱 상은에 감격하여 배로 충간을 다하지 아니하오리까 힘써 직공을 닦아 항상 강령을 봉축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을축에 임견미로 서북면도순문사를 삼았다. 삼월 계유에 전문하사인 박계양이 처모 홍씨를 범간(증)하여 일이 발각되매 도망하였는데 그 처모를 신문하니 이에 자복하는지라 장형하고 몰입하여 관비로 삼았다. 갑술에 양백연으로 서북면도순문사를 삼았다.

 을해에 흥안부원군 이인복이 졸하였다. 왜가 안주에 침구하거늘 목사 박수경이 력전하여 물리쳤다. 병자에 지진이 있었다. 정축에 봉선사에 행차하였다. 병술에 왜가 안주에 침구하였다. 왜가 경상도에 침구하여 병선 사십소를 파하니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을미에 최영으로 경상 전라 양광도도순문사를 삼으니 헌사가 계하기를「영은 일찌기 도순찰사가 되어 육도가 소동하였으니 다시 보냄이 불가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김유로 서북면조선사를 삼고 찬성사 안사기를 보내어 술(주)을 사하여 위로하였다.

 하 사월 정유에 이인임을 파면하고 염제신으로 문하시중을 삼았다. 호군에게 명하여 도병을 거느리고 영전에 담을 쌓게 하고 송곳으로써 그 견고 여부를 시험하였다. 정미에 김자수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최영을 론난함으로써 대사헌 김속명을 파직하고 지평 최원유를 폄하여 연안부사를 삼고 문하평리 류연으로 겸대사헌을 삼고 개성부사 전록생으로 영에 대하여 경상도도순문사를 삼고 영에게 진충분의 선위좌명 정란공신의 호를 사하였다. 무신에 제가 예부주사 임밀과 자목대사 채빈을 보내 오니 중서성 자문에 이르기를 「성지를 흠봉하니 이전에 사막(몽고)을 정진할 때 길이 멀어 마필이 많이 손실되었고 이번에 대군이 또 정진하게 되니 내가 생각컨대 고려국은 먼저 원조 때 일찍 마필이 이~삼만이 탐나에 유재하여 목양된 바 자생이 매우 많으리라 중서성은 사람을 보내어 문서를 가지고 가서 고려국왕에게 주어 설득하여 알게 하고 그로 하여금 좋은 말 이천필을 가려 뽑아 보내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문하평리 한방언을 탐라에 보내어 마를 취하도록 하였다. 임자에 왜선 삼백오십소가 경상도 합포(마산)에 침구하여 군영의 병선을 소각하니 사졸의 죽은 자 오천여명이었다 조림을 보내어 도순문사 김횡을 주하여 지해(사지를 찢어 나누는 것)하여 제도에 돌렸다. 서해도만호 이성과 부사 한방도 최사정이 왜로 더불어 목미도에서 싸워 패사하였다. 계축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을묘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을미에 임밀 채빈이 문묘에 배알하였다. 갑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왜가 자연도에 침구하였다. 오월 병인 삭에 전시중 이인임으로 동서강도통사를 삼아 승천부에 출차케 하였다. 경오에 격구와 석전하는 장난을 금지하였다. 을유에 왜가 강릉에 침구하였다.

 기축에 왜가 경울 이주에 침구하였다. 임진에 판서 최공철로 강릉도만호를 삼았다.

 계사에 왜가 삼척 침구하였다. 육월 정유에 도당이 임밀 채빈을 향연하는데 기녀가 빈의 모자에 꽃을 꽂은 것이 바르지 못하매 빈이 크게 노하거늘 왕이 이 말을 듣고 시중 염제신을 광주에 류배하였는데 임인에 빈이 기녀가 그 뜻을 거슬림을 노하여 말을 달려 장차 돌아가려 하거늘 왕이 김흥경으로 하여금 금교역까지 추급하여 위유하여 데려왔다 때에 관대가 심히 융숭한지라 부고가 그 때문에 비게 되니 각사로 하여금 차례로 그 선위비를 판출케 함에 이르렀다 빈은 천성이 횡패하여 남을 잘 치고 욕함으로 시중 이하 제제상이 모두 릉욕을 당하였다. 영전이 폭우로 인하여 새(누)는 곳이 있는지라 왕이 크게 노하여 동역관인 찬성사 한방신과 평리 노진을 옥에 내리고 매(장)를 쳤다. 때에 영전의 역사가 오래 끌어 노비가 적지않으며 역부의 죽는 자가 길에 잇달았는데도 재집 언관으로 감히 논주함이 없었다. 계묘에 경복흥으로 문하시중을 삼고 이인임으로 수문하시중을 삼았다. 갑진에 왜가 양주에 침구하거늘 우리 군사가 더불어 싸워 백여급을 참수하였다. 경술에 왕이 남풍은 만국에 훈훈하고 호월은 천방에 가득하도다 (남풍훈만국호월만천방)이라는 (시) 일연을 짓고 근신에게 명하여 화진하도록 하였다. 임자에 정비 등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오니 제가 수조하여 이르기를「사자가 이르니 공진하는 그 예는 왕의 극정을 펼쳤도다 짐이 이미 듣건대 사대하는 마음이 두텁도다 표에 이르기를 후복을 동우에 받아 조선의 묘예를 조종으로 하여 이에 오계128)로부터 이미 중화를 섬겼다고 하니 말이 합당치않음이 없도다 그러나 짐이 상고의 군왕을 볼 때 전복129)과 완복 이외는 다스리지 않고 그 토인으로 하여금 주장(주)하게 하였다 대개 성인의 마음은 천도를 체하여 인을 행함으로써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할 뿐이요 일찌기 과장하고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 곳에서 온 물건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이민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니 성인의 마음은 넓은 것이다 이제 짐이 비록 부재하나 감히 왕의 신충을 보전하지 않고 정성으로 보내온 아름다운 공물을 도로 보내겠는가 한당의 저(피=고조선과 고구려)를 이멸함과 수군(수문제양제)의 동벌과 같은 것도 있지마는 짐의 오늘에 있어서는 나를 속이고 업신 여기지 아니할진대 어찌 감히 상제를 어기어 생민을 노요케 하리오 만약 혹 자기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망녕되게 사단을 일으킨다면 그 천재와 인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왕은 이것을 살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예물을) 엷게 하여 와도(박래) 정이 두터우면 가할 것이요 만약 (예물을) 두텁게 하여 와도 정이 엷으면 이것은 불가한 것이니 왕은 이것을 살필것이다」라고 하였고 중서성 자문에는 이르기를 「일찌기 들으니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 함이오 하늘을 두려워하는 참 뜻 (실)은 그 정성을 다함에 있는 것이다 근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 와 조공하고 성지를 흠봉하였거니와 요략(절해)컨대 고래로 중국의 제후는 천자에게 일년에 한번씩 소빙130)하고 삼년에 한번씩 대빙하며 구주 이외의 번방원국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다만 일세(일대)에 한번씩 조견하고 그 공헌하는 바도 지를 들여 성을 표할 뿐인 것이라 이제 고려는 중국과의 상거가 조금 가까우므로 삼년 일빙의 예에 의거하도록 할 것이며 가져오는 방물은 다만 토산의 포자 삼~오대를 넘지 않을 것으로 뜻만 표할 것이요

 그 나머지 물건은 모두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이것(성지)을 흠봉하고 이미 고려에 이첩한 바인데 이제 정비가 가지고 온 예물은 상공에 넘치니 아직 성지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도다 겸하여 물품 가운데 백저포 삼백필은 대부감에 보내는 것이라 하였으나 상항의 위문(즉 대부감)은 원조의 구명에 속하는 것이니 이국은 여러번 사신을 보내왔는데도 어찌 국가가 일찌기 대부감이란 관부를 설치 않았음을 알지 못하였는가 공물을 명목없이 내보냄은 진실로 사대에 성심으로써 하는 예가 아니요 하물며 우리 조정은 사해를 일가로 삼았으니 어찌 소방의 공물에 자뢰하리오 또 거년에 김갑우가 말(마) 오십필을 바쳤으나 말하기를 길에서 죽은 말이 두필이라 하고 이미 경사에 이르니 생존한 말이 사십구필인지라 말하는 바 모두 진상하는 수라고 하기에 태복사로써 시험케 하였더니 모두 탈만한 말이 아니며 그 중 일필은 갑우가 제 사유물인데 동궁에게 스스로 진상하고자 한다 하니 그 가운데의 허모와 궤사는 작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알지못해라 왕의 뜻에서 나옴인지 아니면 신하의 불성함에서 나옴인지 상위(황제)의 수조를 흠몽하여 왕을 일깨우노니 바라건대 왕은 스스로 써 처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조정은 일견동인하노니 이러므로 구구한 허물을 계교하지 않거니와 지금 왕이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멀리오니 어렵고 험난함이 없지않으나 공상한 물품중에서는 포 육대만 받고 여물은 온 사신에 부쳐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금후로는 마땅히 성지의 사의에 흠의하여 삼년에 일공할 것이며 공물도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지성에 있는 것이니 그 나머지의 김은 기명 채석 저마포 표달피 및 대부감에 보낸다는 백저포 삼백필은 모두 비에게 부쳐 돌려보낸다」라고 하였고 또한 자문에 이르기를 「홍무 칠년 오월 초사일에 포왜 선척을 제조하는데 사용할 기계 화약 류황 염초들의 물건을 나누어 내려주시기를 청한 자문을 받았다

 이를 받고 알아보니 고려국에서 만든 포왜선척은 과연 바다로 나가서 정진하기에 적절한가 여부를 아직 알지 못하겠고 더구나 중국에서 사용하는 화약 초황은 예비가 비록 많기는 하나 수요가 또한 넓다 그러니 어찌 중국에 있다하여 꼭 외방에게 주어야할 리가 있겠는가 홍무 칠년 오월 초팔일이에 중서성의 대도독부의 어사대의 관리가 봉천전에서 황제의 성지를 받들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고려에서 보내온 공문에 군기 화약 조선 포왜에 관한 것이 있는데 내가 보니 극히 즐겁다 이것은 전과같이 백성들의 고생을 그저 좌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바야흐로 백성을 구할 마음을 보여준 것이며 이런 방책은 중국과 같아진 것으로 보인다 왕전(공민왕의 성명)이 정말 나의 명령대로 따라할 의사가 있다면 이럴때에 그러한 명령들을 내려보내라

 그러면 그는 반드시 따를 것이니 조속히 문서를 발하여서 그로하여금 그 나라에서 오십만근의 초를 모으게 하고 십만근의 류황을 구해서 가져오게 하라 그러면 여기에서 거기에 섞어쓸 다른 약을 배합해서 그에게 주도록 할 것이다 너희 나라에서 새로 만든 포왜선척은 능력있는 장관으로하여금 조선군관들을 이끌고 타고 와서 나에게 보이게 하라 이를 잘 삼가 지키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서성의 어사대관이 곧 상주하기를 「두렵건대 아마 그나라에는 이런 물건들이 없을겁니다」하였더니 또 황제의 성지가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모두가 다 하늘을 같이 하고 해를 함께 하는데 어찌 여기에는 있고 거기에는 없을 리가 있겠는가 이러한 물품은 아무데나 다 있는 법이고 다만 거기에서는 배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너희 재상들은 그저 나의 이런 명령을 전달해 내보내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하고 또 자하기를 거인 송문중이 시기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만약에 천후를 기다리게 하면 실로 늦어질 것인 바 상주하여 성지를 받드는 표문중에 수재가 없다 하고 이제 한 사람의 수재가 있으나 또한 장래에 재시를 면할가 두려우니 본국에 돌아오게 하여 탁용할 것이며 또 성지를 흠봉하매 조공도로는 삼년에 한번씩 빙문하되 해도로 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기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왕륜사 영전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안화사동에서 잔치하였다.

 추 칠월 을해에 한방언이 제주에 이르니 합적 석질리 필사초고 독불화 관음보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세조황제의 방축한 말(마)로써 이것을 대명에 바치리요」하고 다만 마 삼백필만 보내었다.

 정해에 임밀 채빈의 말로써 관반 조민수 홍상재를 발탁하여 밀직을 삼고 또 빈의 기부를 제배하여 낭장을 삼았다. 무자에 임밀 등이 왕에게 백언하기를「제주마가 이천에 미달하면 제가 반드시 우리들을 죽일 것이니 청컨대 오늘 왕에게 죄를 받고자 하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할 말이 없어 드디어 제주를 토벌할 것을 론의하고 기축에 명하여 문하찬성사 최영으로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를 삼고 밀직제학 염흥방으로 도병마사를 삼고 삼사좌사 이필로 양광도상원사를 삼고 판밀직사사 변안렬로 부원사를 삼고 찬성사 목인길로 전라도상원사를 삼고 밀직 임견미로 부원사를 삼고 판숭경부사 지윤으로 경상도상원사를 삼고 동지밀직사사 라세로 부원사를 삼아 각기 그 도의 군사의 장이 되게 하고 지문하사 김유로 삼도조전원사 겸서해교주도도순문사를 삼아 가서 토벌케 하니 전함이 삼백십사소에 예졸이 이만오천육백오인이었다 교하기를 「탐라가 해중에 나라(국)하여 대대로 직공을 닦아오기 오백년에 이르렀다 근자에 목호 석질리 필사초고 독불화와 관음보 등이 우리 사신을 살륙하고 우리 백성을 노비로 삼아 죄악이 관영한지라 이제 너에게 절월을 주어 가서 제군을 독려하여 기필코 진참하도록 하노라」고 하고 또 문하평리 유연으로 양광도도순문사를 삼고 지밀직사사 홍사우로 전라도도순문사를 삼아 유진하여 써 불우에 대비케 하였다. 신묘에 김갑우 및 역어 오극충을 주하였다. 팔월 정유에 왜가 준양에 침구하였다. 임자에 명하여 종친 재추 대언 이상은 각기 마 일필을 내어 진헌하는데 보충하도록 하고 임밀 등이 제주 공마가 (정수에) 차지않는다 하여 한방언을 죽이기를 청함으로 이에 장유하였다.

 신유에 최영이 제군을 거느리고 탐라에 이르러 분격하여 크게 파하고 드디어 적괴 삼인을 목베어 머리(수)를 서울(경)에 전하니 탐라가 평정되었다.

 임술에 왕이 폐행을 거느리고 보행으로 봉선사의 송강에 이르러 유희하였다.

 계해에 사신을 궁중에서 향연하니 밀 등이 말하기를「우리들이 이곳에 이르러 왕의 후위를 받고 이제 상별하여야하니 어찌하리요」하고 인하여 눈물 지으니 왕이 좌우로 더불어 모두 울었다.

 구월 갑자에 임밀 채빈 등이 경사(명경)로 돌아가는데 밀직부사 김의를 보내어 마 삼백필을 이끌고 정요위까지 보내주도록 하고 또 동지밀직사사 장자온을 보내어 조공도로가 통케 된 것을 사하고 또 관복을 청하니 도로의 통함을 사하는 표에 이르기를「성모가 순지하니 권징을 밝히 보였고 대도로 포용하사 부주를 곡종하시니 은혜가 망외에 미쳐 감괴가 아울러 일어납니다 신을 학문이 황소하고 자재가 어리석고 순박하여 다만 소주에 충성 다함을 알고 항상 직공을 닦음(솔)에 부지런하여 다른 것이(마음) 없읍니다 길은 요동을 지나는데 조정131)의 길이 두번째 가로 막혔고 배를 해상에 띄우니 달게 금을 범하되 사양하지 않았나이다 인하여 번용한 사사를 가지고 감히 고명하신 성총을 모독하니 우충에 깊이 두려워 하였아오나 오직 예감은 밝게 그 정을 보심으로 긍서하신 마음을 밀어(추) 특히 정령하신 말씀을 내려 하늘과 사람이 가히 두려운 것임을 타이르시니 가르침은 몽매함을 계발함에 간절하여 한당을 루추하다 하여 거하지 않으시며 덕은 원인을 회유함에 돈독하여 이미 황화의 사신을 보내시고 또 조빙의 길을 열어주시니 배명한 이후로 몸을 어루만지기를(자기반성의 태도)마지 않나이다 황제폐하의 큰 지혜는 순과 같고 잘 관용하심은 탕에게 지나(매)나이다 천도를 체하여 인을 행하사 민생으로 하여금 안업케 하사 드디어 폐읍(자국의 겸칭)으로 하여금 홍은을 입게 하시니 감히 번선을 다하여 정성으로 후도를 좇고 억만년의 황수를 항상 축하하지 않으리까」라고 하였다. 경오에 왜적이 근경에 왔으므로 도성이 계엄하였다.

 계유에 왜가 안주에 침구하였다.

 정축에 고 궁인 한씨의 고(부) 준과 조 평과 증조 통을 면양부원대군으로 외조 한양을 면성부원대군으로 추증하니 왕이 강녕대군(우)을 한씨 소생으로 모칭하였기 때문이다.

 신사에 재추가 각도의 안렴사를 천거하는데 폐신 두리속고적과 정랑 민이도 또한 참예되었다 왕이 이가 외직에 전출하기를 구함을 노하여 입초록사 백규를 아울러 매질하였더니 이인은 이어 죽었다 호승이 있어 북원으로부터 와서 강순용에게 말하기를「원이 심왕의 손으로 고려왕을 삼으려 한다」고 하니 왕이 이말을 듣고 승과 순용을 가두고 (옥을) 다스리니 승이 말하기를「이 말을 모병사(갑)에게서 들었다」고 하므로 그 인물을 잡아 국문하니 말하기를「이는 전찬성사 우제의 가노가 북원에 행상(행판)할 때 들은 바이라」함으로 그 노를 신문코자 하였으나 도망하였으므로 승과 순용을 석방하고 임오에 제를 순위부에 가두었다.

 계미에 왕륜사 영전에 행차하여 화원에서 잔치하였다. 갑신에 왕이 갑자기 붕어하니 재위 이십삼년 수 사십오였다 왕은 천성이 본래 엄중하고 동용이 예에 맞더니 중만년에 시기 폭려 황혹함이 더욱 심하였다.

 십월에 정릉(노국공주릉)의 서편에 장하니 현릉이라 하였다 신우 이년구월 기유에 익하여 인문의무 용지명렬 경효대왕이라 하고 십일년 구월 병자에 대명이 익을 사하여 공민이라 하였다.

 사신이 찬하기를「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총명하고 인후하여 민망이 모두 돌아갔고 즉위함에 미쳐 정력을 가다듬어 나라 다스림을 도모하니 중외가 크게 기뻐하여 태평을 상망할 수 있었는데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뜻을 잃고 정사를 신돈에게 맡겨 훈현을 축살하고 크게 토목을 일으켜 민원을 샀으며 완동들과 압닐하여 써 음예한 짓을 함부로 하였고 무시로 주기를 부려 좌우를 구타하였으며 또 후사 없음을 걱정하여 이미 타인의 아들을 취하여 대군을 삼고 바깥 사람들이 믿지 않을가 염려하여 가만히 폐신으로 하여금 후궁을 오욕케 하고 그 임신함에 미쳐 그 사람을 죽여 그 입을 멸하려고 하니 패난함이 이와 같으매 면코자 한들 면할 수 있으랴」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