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28대 충혜왕(忠惠王,1330~1332.복위1339~1344 재위6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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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충혜왕(忠惠王,1330~1332.복위1339~1344 재위6년)

 

   충혜왕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이다. 1328년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에 정치의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충혜왕은 즉위하자마자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즉위 후 성격마자 포악하여 실정이 계속되자 원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였고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옹립하려는 조적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 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갔고 원나라 순제는 충혜왕을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그는 게양으로 가던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1344년 정월 30세의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서문출처:
미르나라


  충혜헌효대왕의 휘는 정이요 몽고휘는 보탑실리이니 충숙왕의 장자요 모는 명덕태후 홍씨이다 충숙왕 2년 을묘 정월 정묘에 생하여 15년 2월에 세자로써 원에 가서 숙위하더니 16년 10월에 충숙왕이 전위할 것을 주청하매 17년 2월 임오 삭에 제가 전서원사 아노위 두만태와 객성태사 구주에 명하여 왕을 책하여 이르기를 「대대로 충정이 돈독하니 족히 인민의 기탁을 맡을만 하고 집이 인양으로 일어나니 마땅히 작사의 전함을 받을 것이다 등용에 그 사람이 아니면 어찌 능히 나라를 세우리오 아아 그대 고려국세자 왕정은 일찌기 황실의 외척(의척)으로 말미암아 큰 이름을 세웠도다 혁혁한 세대가 서로 이으매 성교를 받들어 더욱 삼가하고 해를 지냄이 정점 오래되매 신절을 지켜 이지러짐(휴)이 없었도다 이에 그 아버지의 한가로움(한)을 구함으로 인하여 이에 정계의 속한 바를 잇(승)게 하노라 아아 이 종사를 보위(번)하여 그대 선대의 충을 잊지말고 산하가 대려
123)토록 길이 우리 대방의 경사를 굳게 할 것이니 힘써 영덕을 닦아 크게 많은 복을 모을(집)지어다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을 특수하는 것이다」하고 드디어 객성부사 70견을 보내와 국왕인을 거두(취)었다. 계사에 왕이 매(응)를 평칙문 밖에서 방(렵)하기를 무릇 6일동안 하였다. 서하군 임자송 만호 권겸 등이 70견을 따라 국인을 싸가지고 원에 갔다 정미에 제가 규장각에 거동하여 왕에게 국인을 주니 왕이 정승으로 치사한 김태현에게 명하여 정동행성사를 권섭케 하였다. 무신에 왕이 지인방124)을 두고 3사우윤 윤지현 기거주 이담 도관정랑 이군#해 전#첨 김한룡으로 그 임무에 충당케 하였다. 기유에 왕이 우승상 연첩목아로 더불어 응을 유림에서 방(렵)하였다. 3월에 왕이 기무를 폐신(총신)배전 주주 등에게 맡기고 날로 내수(소신)로 더불어 각력#희(씨름)를 하니 상하의 예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가 배척을 당하여 직언이 나오지 못하게 되매 기거주 이담이 왕께 사뢰기를 「임금의 거동은 가히 삼가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니 일동일정을 좌우에서 이를 기록하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쓰는 자는 누구냐」하매 담이 말하기를 「사신의 직분이외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의 과실을 쓰는 자는 모두 서생이로다」하였다 왕이 본래 유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더욱 미워하였다. 정사에 대호군 최성 등이 백저포 호표피를 싸가지고 원에 가 왕에게 바쳤다. 무인에 왕이 관서왕 초입의 장녀에게 장가드니(상) 이가 덕녕공주이다 선휘원이 왕과 공주를 연첩목아의 집에서 향연하였다. 하 4월 임오 삭에 호군 조득규가 원에 가서 왕께 사뢰기를 「상왕이 권성(권정동행성사) 김태현과 윤석 원충 등을 가두고 정방길로 행성사를 권섭케 하였읍니다」라고 하였다. 경인에 금심으로 도첨의중찬을 삼고 임자송 원충 전언으로 찬성사를 삼고 이능간 이규로 첨의참리를 삼고 이제현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전영보 한악으로 삼사사를 삼고 윤혁으로 밀직사를 삼고 권겸 김문귀 김지경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전신으로 감찰대부를 삼고 한종유로 지신사를 삼고 이담 윤안비로 우좌대언을 삼고 이군#해로 우부대언을 삼았다. 갑오에 왕이 백마 81필을 바치니 제가 흥성전에 거동하여 제왕과 부마를 모아 주연을 베푸는데 왕에게 칙하여 친속의 서렬로 앉게 하였다. 무술에 왕이 관서왕을 향연하였다. 상왕이 장항을 원에 보내어 태의를 청하고 인하여 글로써 왕에게 타이르기를 「듣건대 속유로서 함부로 진출하는 자가 있다 하니 왕은 그것을 쓰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계묘에 왕이 우승상 연첩목아를 그 집에서 향연할새 술이 반쯤 되매 승상이 일어나서 춤을 추니 왕도 또한 일어나 춤을 추며 헌수하여 크게 마시었다. 5월 기미에 제가 왕에게 명하여 나라에 가도록 하였다. 임술에 대언 이군#해 전장령 안목 성균승 정? 도관좌랑 정세충으로 전주125)를 맡게 하고 종신에게 작을 사하니 폐신(총신)으로서 모람(가모람수)한 자가 자못 많았다. 을축에 제가 대명전에 거동하여 존호를 받고 지순이라 개원하고 천하에 대사하는데 왕이 부마의 반열에 나아가 하례하니 한림학사 활활#알가 왕에게 옥대를 바쳤다. 을해에 제가 상도에 행차하는데 병자에 왕이 따라 용호대에 이르러 배사하니 제가 의복을 사하고 위유하였다. 6월 병신에 감찰사가 양광도안렴 마이량경상도안렴 조방#인의 탐오하고 불법함을 론하여 섬에 류배하였다. 정미에 충선왕을 침원126)에 #부(합제)하고 충정공 홍자번 문#정공 정가신으로써 배향하였으며 인종의 신주를 옮기고 강종의 신주는 동협실에 림시로 봉안하였다. 추 7월 정사에 원이 명종태자 타#환첩목이를 우리 대청도에 류배시기니 나이 11세였다. 계해에 광양군 최성지가 졸하였다. 윤월 무자에 낭장 김천우가 원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조정에서(원) 전정동행성 좌우사 낭중 만인(남인) 장백상의 서장에 의하여 동국에 장차 행성 두기를 의논한다」하거늘 경인에 왕이 글을 태사 우승상에게 부쳐 가로되 「정은 오로지 홍조127)를 입어 공주에게 장가들고(상주) 봉을 받아 지금 이미 나라에 왔으니 천지 부모같은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까 가만히 들으니 전행성 좌우사 랑중 장백상이 도당(상서성)에 상고하여 소방에 성을 세우고 관을 두어 국속을 변경코자 한다 하니 상하가 경황하지 아니함이 없거든 하물며 내가 동에 와서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하지도 않아서 별안간 이와같은 일을 들으니 어찌 두려움이 없으리까 간절히 생각컨대 소방은 성조에 신복하여 해마다 직공을 닦음이 백유여년에 일찍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나이다 무인년(고종5년)에 태조성무황제가 하늘에 응하여 #탈거한 처음에 망료의 유종인 금산왕자가 있어 중원을 평정하고 동토에 도량하여 조금도 귀순할 뜻이 없고 망녕되게 부흥할 꾀를 가지는지라 조정에서 합진과 찰척에게 명하여 그 죄를 치매 날씨(천)가 차고 눈이 쌓여(심) 량도가 계속되지 못하거늘 우리 5대조 충헌왕(고종)이 조충 김취려를 보내어 군사를 도우고 병량을 대이며 협력하여 공파하매 이에 두 원사가 조정에 문주하여 충 등으로 더불어 형제의 맹을 맺어 세세자손이 금일을 잊지말자고 하였고 기미년에 세조황제가 강남에서 회군할 때 우리 4대조 충경왕(원종)이 군신을 거느리고 6천여리를 발섭하여 량초의 땅에서 배영하니 세조께서 크게 포상을 가하고 즉시 성훈을 내리어 국속을 고치지 말고 의구희 #관령케 하였고 중통 원년에 안남국을 조유하는데 말씀하기를 「본국 풍속은 한결 같이 구제에 의할 것이요 반드시 고칠 것이 없도다 하물며 고려는 요사이 사신을 보내와 청함으로써 이미 조를 내렸으니 모두 차례에 의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지원 3년에 일본국에 사한 글월에도 「짐이 즉위하던 초에 고려의 무고한 백성이 오래동안 봉적(병란)에 피곤하므로 곧 파병케하여 그 강성을 돌려주고 그 #모예(로인과 소#아)를 돌렸으므로 고려가 감대하여 내조하니 의는 비록 군신이나 #환은 부자와 같으니 계료컨대 왕의 군신도 또한 이미 이를 알 것이다. 고려는 짐의 동번이로다」라고 하였고 그 후에 우리 3대조 충렬왕이 천자의 련하에 입시하매 제의 딸을 리강(하가)하여 대대로 생구의 친을 외람히 누렸나이다 그 제처에 행성을 세울 때를 당하여서도 홀로 소방에는 설치하지 않았고 후에 일본정벌로 인하여 비록 명액(명칭)은 있었으나 상선(상수)에 구애치않았나이다 대덕 말에 아조 태위왕(충선왕)이 인종황제를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나아가 앙골(지명)에 이르러 무종황제를 영입하매 정책(천자를 세우는 일)1등공신이 되었나이다 때에 요양인 중희가 소방에 성 세우기를 청하니 천심이 혁노하여 중희를 곤장때려 원방에 류배하였는데 지금 백상이 원한을 끼고 말을 꾸미어 우리 종국을 전복코자 꾀하여 누조의 성훈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 조정이 만약 그 말을 좇으면 소방이 먼저 귀복하여 해마다 직공을 닦은 바는 감히 스스로 그 공을 삼는 것은 아니나 그 루조의 존휼하는 뜻을 어찌할 만할 것이며 그 일본 안남에 준 조를 어찌하리까 또 생각컨대 소방은 흑지128)의 땅으로 산천 임수에 토석이 척박하여 땅에 세받고 백성에 부역하는 것이 용에 통합(주)치 못하고 땅이 멀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언어진퇴(#추사)와 혼인풍속이 중국과 같지 않으니 만약 이 말을 드으면 반드시 모두 황구할 것이외다 복망컨대 대승상각하는 교언을 듣지 말고 천의를 계도하여 토풍을 고치지 않게 허락하여 조업으로 하여금 서로 편안케 하면 어찌 오직 산택의 백성만이 다 성덕을 생각하리오 또한 조상(종#조)의 귀도 더욱 지인을 느끼리다」라고 하니 드디어 입성의 의가 파케 되었다. 상왕이 장차 원에 행차하는데 황주에 이르니 왕이 도상에서 호#궤로 맞아 뵈옵거늘 상왕이 말하기를 「너희 부모는 모두 고려사람인데 어찌 나를 보는데 호예를 행하며 또 의관이 너무 사치하니 어찌 사람에게 보이리요 속히 옷을 고쳐입으라」하여 훈계가 엄속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갔다. 병오에 왕과 공주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연경궁에 입어하였는데 제가 한림학사 아탑#알 호부랑중 독련 선사 맹사태를 보내어 호행하여 왔다. 8월 병진에 왕이 강안전에서 즉위하였다. 무오에 사하였다. 신유에 상호군 주주를 원에 보내어 존호를 가상한 것을 하하였다. 9월 기묘에 왕륜 건성 2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왕이 견주에 행차하여 덕비를 알견하였다. 동 10월 계축에 검교정승 김태현이 졸하였다. 신유에 송천봉 등에게 급제를 사하고 지공거 안문개에게 옥대를 동지공거 이담에게 홍#정을 급제 제2인인 홍언박에게 마를 제3인인 이달존에게 #정대를 사하였다. 갑자에 첨의평리 이준간을 원에 보내어 개원을 하하고 공주의 리강129)을 사하였다. 영안궁에 이어하였다. 무진에 왕이 해안에서 사냥하였다. 갑술에 독적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마 6필을 바쳤다. 11월 병술에 지진하였다. 12월 기유에 한종유로 밀직제학을 삼고 이조년으로 장령을 삼았다. 을묘에 상호군주주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갑자에 왕이 견주에 행차하여 덕비를 알견하였다. 계유에 견주로부터 남경을 순행하고 이에 돌아왔다.

신미 원년 춘 정월 을유에 원이 낭중 마합모#쇄남을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정해에 왕이 원사를 향연하였다. 임진에 왕이 강음에서 사냥하였다. 신축에 지진하였다. 2월 경술에 한악으로 중찬을 삼고 최안도로 감찰대부를 삼았다. 계축에 강안전에 이어하였다. 갑인에 왕이 서교에서 사냥하였다. 무오에 공주의 생일이므로 연경궁에서 잔치하였다. 기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술에 승 내원으로 왕사를 삼았다. 을축에 왕이 해주에서 사냥하였다. 3월 임인에 왕이 강음에서 사냥하였다. 하 4월 신유에 왕이 교에서 사냥하였다. 계미에 왕이 행신을 거느리고 연복정에 행차하여 수#희와 격구를 관람하였다. 무자에 주#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인에 5도의 인민이 쌍성(영흥) 여진 요양 번양 등처에 유입함으로써 표문으로 쇄환을 청하여 가로되 「하늘은 본래 사가 없어서 비록 높으나 곧 들음(청)으로 사람이 만일 고함이 있으면 하고자 함을 반드시 듣는 고로 비정을 다하여 대도를 돌리기를 바라나이다 삼가 생각컨대 세조가 특히 아방을 사랑하사 고조 증조가 계속하여 친조하였으며 마침 1천년130)에 제회하여 부자가 따라서 입근함이 우금에 70세가 넘었나이다 그 당시에 모든 주진한 바는 선대로부터 모두 윤허되었는 바 세조황제가 앞서 내린 성지를 흠몽컨대 기미년 2월 이후로 포로되고 도망해온 사람들은 무릇 유사들이 그 수를 쓸어모아 모두 귀국케하라 하였고 지원 21년에 이르러 또 전과 같은 성지를 내리셨나이다 본국은 이로써 누차 관리를 차유하여 요양 번양 등처에 나아가 분별하여 가리고자 하였더니 그곳에 있는 관사는 군호라고 람칭하며 혹은 농#민이라고 칭하여 막아 쇄환치 못한지가 오래되었고 또 근년사이에 본국주현의 역에 해당하는 인민과 관사 사노비가 요양 번양 쌍성 여진 등처에 도망해 가서 차역을 도피하고 흩어져 살고 있는 바 혹 사람을 보내어 나아가 추쇄코자 하나 소할하는 관사와 및 두목인들이 자의로 끼고 돌며 가로막고 내주지 아니하니 심히 불편합니다 더욱 이제 특히 성지를 내리어 「원래 적책에 올라있는 인민과 수토(지방)에 문빙이 있는 사람들과 근저에 있는 노비를 갈라놓지 아니하면 누가 분쟁을 가라앉히리요」하였는 바 전후의 제#칙이 한결같이 모두 이와 같으나 그곳 사람들이 오래 연수131)가 되어 인하여 막기를 요하므로 다시 누차 내린 명문에 의하여 분간을 행코자 하나 다만 그 고집을 고치지 않고 발환시키지 않을가 두려워 하오니 복망컨대 황제폐하는 신의 익대한 세공을 기하고 저들이 끼고 있는 호계를 살피사 사절을 달리어 민편(백성으로서 편호하는 것)을 쇄복케 하시면 신은 삼가 마땅히 즐겨 모든 백성들과 같이 더욱 포황132)하는 덕에 배를 불리고 힘써 #폐부를 바쳐 길이 자소133)의 은을 갚으오리다」라고 하였다. 신축에 왕이 행신을 거느리고 연복정에 행차하여 수#희를 관람하였다. 6월 기미에 광덕사에 행차하여 수#희를 관람하였다. 신유에 폐인(폐신) 중랑장 한불화가 어지를 고쳐 죄수를 석방하거늘 전법사가 그 죄를 다스르기를 청하였으나 보하지 아니하였다. 추 7월 병자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대녕부원군 최유#엄이 졸하였다. 8월 병진에 윤석으로 중찬을 삼고 송서로 감찰대부를 삼고 박연으로 또한 전리판서를 제수(배)하였다 연이 모상에 있으면서 처를 취하고 매양 들어와서 뵈와도 왕이 허물치 않으니 일찌기 어떤 승이 왕께 아뢰기를 「관사의 노가 혹 고관대직에 배한 자가 있어도 가히 사족으로 다루어서는 안될 것이외다」하니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박연을 사랑함으로써 그러느냐」고 하였다 연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타일에 어찌 오등의 공을 생각하리까」하니 왕이 술을 사하고 위유하였다. 병인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정묘에 원이 환자 홍대불화를 보내와 동녀를 구하였다. 9월에 서북보새인이 사신을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원이 문백안불화를 보내와 사를 반포하거늘 왕이 출영하였다. 병신에 명하여 충경왕(원종) 실록을 편수케하였다. 동 10월 계해에 왕이 서교에서 사냥하였다. 병인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11월 임신 삭에 일식하였다. 신축에 찬성사 원충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2월 갑인에 원이 추밀원사 윤수곤 중승 궐간 등을 보내어 타#환첩목이태자를 소환하거늘 왕이 호군 조익청을 보내어 대청도에서 봉영하였다.

임신 2년 이후는 충숙왕 후원년에 입함 춘 정월 경진에 요양성이 사람을 보내와 주첩목아 조고이를 색출하였는데 이에 앞서 두 사람이 제에게 속여 참소하기를 「요양이 고려로 더불어 모의하고 타#환태자를 받들어 반하고자 한다」하고 얼마 후에 내분하였다. 을유에 도둑이 두 사람을 거리에서 죽였다. 병술 야에 왕이 폐인 양선 송명리 등을 거느리고 미행하였다. 2월 정미에 왕이 서해도에서 사냥하였다. 도둑이 고능을 발굴하였다. 경신에 왕이 사냥으로부터 돌아왔다. 갑자에 원이 유수보수 전리문랑중 장백상 등을 보내오거늘 왕이 교에서 맞이하니 백상이 성지를 전하며 말하기를 「이미 정월 3일에 상왕을 복위토록 명하였다」하니 왕 및 좌우가 모두 실색하였다. 백상이 국새를 거두고 모든 창고를 봉#쇄하니 왕이 드디어 원에 가게 되었다 처음에 왕이 세자로서 입조하니 승상 연첩목아가 보고 크게 기뻐하여 보기를 제 아들과 같이 하였다 충숙왕이 사위함으로 인하여 제에게 주하여 왕명을 주었더니 이때에 태보 백안이 첩목아의 전권을 미워하여 왕을 대우하기를 예대로 하지 않았다 충숙왕이 복위함에 미쳐 연첩목아는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백안이 왕을 대우함이 더욱 박하였다 왕이 연첩목아의 자제와 회골(#규회) 소년배로 더불어 술을 마시며 #희학하다가 인하여 한 회골(#규회)의 부인을 사랑하여 혹 숙위에 오르지 아니하니 백안이 더욱 미워하여 지목하여 발피(무뢰한)라 하고 제에게 주하기를 「왕정은 본래 행실이 나빠 숙#위에 누가 될가 두려우니 마땅히 그 부소에 보내 의력134)으로 가르치게 하소서」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충숙왕 후5년에 제가 왕을 보내어 환국케 하였고 8년 3월 계미에 충숙왕이 훙하였다 충숙왕이 항상 왕을 발피라 부르며 대우하기를 은혜가 적게 하였으나 습위할 것을 유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행성좌우사가 중서성에 전달하고 왕도 또한 전평리 이규 등을 보내어 습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백안이 태사가 되어 중지시키고 주치 아니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왕도(충숙왕)는 본시 호인이 아니오 또 병이 있으니 마땅히 죽을 것이다 발피(충혜왕을 가리킨것)는 비록 적장이나 또한 반드시 다시 왕을 삼을 것이 아니며 오직 고가 왕이 됨직하다」하니 (이)규 등이 백계로 청하였으나 뜻을 얻지 못하였다. 하 4월 무오에 왕이 삼사좌윤 김영후를 원에 보내어 화불을 바쳤다. 5월 기미 삭에 왕이 사사로 보흥고를 설치하였다. 신유에 지진하였다. 을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만호 인승단의 집에 이어하였다. 병인에 왕이 그 구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를 #순행하였다. 경오에 왕이 서모 수비 권씨를 증135)하였다. 신미에 왕이 환자 유성의 처 인씨의 아름다움을 듣고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성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라 하니 이윽고 성이 왕께 말하기를 「전하가 명일이면 응당 복위할 것이니 마땅히 백성을 존무하고 상뢰를 아끼지 말것이외다」하였다. 왕의 뜻은 그 처를 꾀여내는데(도) 있거늘 성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왕의 마음이 진실로 나를 사랑(권)한다 생각하고 진퇴를 오직 삼가히 하니 좌우가 몰래 웃었다. 임신야에 순군만호 전영보가 왕을 맞아 그 집에서 향연하였다. 병자에 왕이 대호군 손수경 전윤장을 보내어 김은과 대정아136)를 가지고 원에 가서 집사자에게 뇌물로 주고 복위를 구하였다 대정아는 곧 인종황제가 덕능(충선왕)에게 사한 것이었다. 무인에 왕이 경화공주를 영안궁에서 향연하였다 계미 야에 황씨가 왕을 맞아 그 집에서 잔치하니 왕이 의승 복산에게 명하여 황씨의 임질을 치료하게 하였다 왕이 항상 열약을 먹는 고로 사애하는 부인들은 많이 이 병이 있었다. 병술에 왕이 조익청을 낮추어 제주안무사를 삼고 윤환을 칠원군에 내치고 오자순을 장형하여 해주에 내치고 홍서를 장형하여 섬에 류배하고 전 대호군 김경을 잡아 꾸짖어 말하기를 「이놈(차노)이 무슨 연고로 전에 홍서 등으로 더불어 동모하였느냐」하고 드디어 철골타로써 쳤다. 대호군 한불화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이규의 말을 전하기를 「승상의 고집이 처음과 같으매 다른 성의 관원이 비록 신복코자 하나 진실로 가히 빌려(가)써 말을 할 거리가 없으니 본국의 기노들이 상소하여 진정함이있으면 거의 가히 인하여 도모할 수가 있겠다」하거늘 왕이 기노와 재추에게 명하여 회의하게 하였다. 6월 임진에 기노 권부 등이 행성에 상서하기를 「번한(병번)의 기탁을 오래 비우기 어렵고 추#요(천민)의 말도 혹 취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일이 안위에 매있으니(계) 사리를 마땅히 자세히 살필 것입니다. 소방은 개국 이래로 422년에 왕씨의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이 백성을 기른(목)지 28대입니다 태조 성무황제가 천에 응하여 떨쳐 일어나매 우리 충헌왕(고종)이 제일 먼저 내부하여 그 직공을 닦고 무인(년)에 계단의 유종인 김산왕자란 자가 있어서 망녕되게 흥복할 것을 도모하여 육량(도량)하며 독을 사하여 인민을 구략하여 동으로 해도에 들어가매 태조께서 합진과 찰랍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는데 그때에 바야흐로 비와 눈이 내려 량도가 계속치 못하므로 충헌왕께서 조충 김취려등에게 명하여 병량을 운반하고 군사를 도와 좌로 이끌고 우로 붙들어 마침내 사로잡아 멸하니 양원사가 조충 등으로 더불어 천일을 가르치며 동맹하고 포로를 나누어 신을 삼았으니 이는 곳 소방이 태조에게 힘을 다한 것이오 헌종 황제가 남정하다가 안가137)하고 아리#패가가 삭방(북방)에서 환을 일으키매 세조황제가 군사를 양양에 돌릴 때에 우리 충경왕(원종)께서 산천을 넘고 건너 상로를 무릅쓰고 양초의 교에서 배알하니 이에 천하가 원인의 자복함을 보고 천명의 돌아감을 알았으니 이는 곧 소방이 세조께 진력한 것입니다 세조가 정성을 느끼고 공을 생각하여 조를 내려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릴진대 마땅히 편의에 따라 좇을 것이니 마땅히 짐의 마음을 받들어 체득하여 백성(유중)을 편안케 하라」고 하였고 그 안남국을 타이르는 조에는 말하기를 「본국의 의관풍속은 모두 본국구예에 의할 것임은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청함으로써 이미 조를 내렸으니 모두 이 예에 의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일본국에 사한 서에는 말하기를 「처음에 고려의 무고한 백성이 오랫동안 봉적(병무)에 시달림(#췌)으로써 즉시 군사를 파케 하여 그 강성을 돌려주고 그 #모예138)를 돌려보내니 고려군신이 감대하여 내조하매 의는 비록 군신이나 기쁨은 부자와 같도다 생각컨대 왕의 군신도 또한 이미 알 것이다」하여 소방을 포장하여 제국에 과시하니 광총이 지극하였고 계속하여 제녀인 제국대장공주를 충렬왕에게 시집보내어 일자를 낳으니 즉 태위왕이라 나이 16세에 천정에 입시하매 책하여 세자를 삼고 조하기를 「사에는 오직 네가 적자요 친함은 이 나의 생이니 대대로 번보가 되라」하였읍니다 전왕 정(충혜왕)은 즉 태위왕의 적손으로 소방의 사람은 마음이 (그에게) 돌아가 촉망하는 터이며 선왕 도(충숙왕)가 본년 3월에 불행히 세상을 떠날 때에 유서하기를 「마땅히 장자인 전왕 정으로 주문하여 습위케 하라」하여 이미 성부에서 조정에 신고함을 입었으나 날을 헤아려도 아직 명시(명강)가 더디니 산택의 무항한 민풍(속)은 가히 그 마음을 매게(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며 해왜의 굴복치 아니하는 이웃은 가히 그 변을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도다 3(개)월139)만 임금이 없어도 황황(불안)하여진다는 성현의 훈계가 어찌 도연함이리오 부 등이 황원의 은택을 얻어입어서 백수의 년에 이르렀는 바 정에 품은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은인하리오 마음으로는 궐정에 달려가서 사체를 앙진코자 하나 나이(치) 쇠하고 힘이 엷어(박) 스스로 이룰 수가 없으니 복망컨대 소방의 사대한 공을 생각하고 여노140)의 원충하는 뜻을 민망히 여겨 그 전체(역체)를 주어 하여금 부주케 하여 만일 여#발141)(조)의 유음을 펴 빨리 분모142)의 세업을 정케 하면 어찌 오직 소방의 경뢰뿐이리오 실로 또한 세조가 먼 곳을 편안케 하고 소국을 사랑하는 뜻이리라」하였는데 행성이 그 글로써 중서성에 전달하였다. 을미에 판삼사사 김원상이 졸하였다. 기유에 충숙왕을 의능에 장하였다. 을묘에 비를 빌었다. 추 7월 무오 삭에 비가 내렸다. 경신에 왕이 외고 김씨가 로병으로 죽게 되었으므로 전 대호군 김찬과 전 랑장 송명리를 보내어 토전 장획(노비)과 그 문권을 찾게 하였다. 갑자에 왕이 경화공주를 영안궁에서 향연하고 정묘에 또 향연하였다. 8월 정해 삭에 왕이 남씨로 노영서의 처를 삼아주었는데 남씨는 일찍 사인에게 시집갔다가 대행왕(갖 돌아간 왕)이 빼앗아 사애하였고 이에 이르러 왕이 또한 사통하다가 얼마 후에 영서에게 주고 또 자주 그 집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원이 사자를 보내어 탐라의 #수유를 구하였다. 갑오에 경화공주가 왕을 맞아 향연하는데 술이 파함에 미쳐 왕이 거짓 취하여 나가지 않고 저물매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증143)하였다. 경술 야에 조#적 등이 왕궁을 내습하거늘 위사가 이를 사살하여 순군의 남쪽다리 아래에 시(시#체를 중인에게 보이는 것)하였다. 신해에 전 대호군 유방세로 서북면존무사를 삼았다. 9월에 의 정 2주의 사람들이 국난을 듣고 강을 건너가는 자가 심히 많거늘 계해에 왕이 호군 강인을 보내어 이를 안무케 하였다. 정묘에 지진하였다. 정동성 원외 한첩목아불화 전 찬성사 김인연 전 낭장 노영서가 원에 가서 왕의 습위를 청하였다. 신사에 왕이 정승 강융의 집에 이어하였다. 동 11월 병진에 원이 중서성의 단서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보내오거늘 왕이 선의문외에서 맞이하니 두린 등이 먼저 경화공주궁에 이르러 어주를 올리고 드디어 왕저에 가서 전국인을 주니 왕이 배수하였다. 계해에 두린이 제명으로써 낙안군 김지겸 전 첨의평리 김자에게 국사를 권(림시)관케 하였다. 병인에 두린 등이 왕과 홍빈 한첩목아불화 조운경 황겸 백문거 왕백 주주 조영휘 이안 한승 장거재 배성경을 붙잡아 돌아가니 대개 (조)#적당의 고소에 인함이었다. 신미에 경화공주가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에 가두었다. 계미에 덕녕공주가 정천기를 석방하여 궁중에 숨겼다. 12월 무자에 경화공주가 김지겸에게 명하여 정동성을 서리(권)케하고 김자로 제조도첨의사사를 삼았다. 경인에 신백 김일봉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병신에 판밀직사사 신#천이 졸하였다.

경진 후원년 춘 정월 계해에 순천군 채홍철이 졸하였다. 신미에 원이 왕을 형부에 가두고 또 김인연 김윤 한종유 홍빈 이몽가 이엄 노영서 안천길 손수경 윤원우 남궁신을 옥에 가두고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 한임원 종정부에 명하여 잡문케 하였다. 2월 병술에 원이 #패란해대왕을 탐라에 류배하였다. 경술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 대징(성)좌로 들어갔다가 갑인에 또 동방에 나타났다. 3월 갑자에 채하중이 원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탈탈대부가 제에게 주하여 왕을 석방하고 복위케 하였다」고 하였다. 병인에 원이 환자 보현을 보내와 불경을 구하고 성지(제지)로써 원사 양안길 소부윤 조흥문을 불러 왜인을 압송하여 원에 가게 하였다. 무인에 기철 권적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였다. 하 4월 을유에 수비가 졸하였다. 왕이 원에 있으면서 한악으로 우정승을 삼고 윤석으로 좌정승을 삼았다. 계미에 원이 도부경력 홀도를 보내와 백안을 양춘현에 안치하고 마찰아태로 승상을 삼아 천하에 사한다고 고하였다. 왕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원이 기씨를 봉하여 제2황후를 삼았다. 이조년으로 정당문학을 삼았다. 신해에 조하기를 「홍유컨대 태조황제가 천에 응하여 운을 열고 세조황제가 통일하여 법을 끼치매 열성이 계승하여 통서가 정함이 있었다 우리 황조 무종황제가 이어 대보(위)에 올랐다가 승하(붕어)한 후에 조모 태황태후가 간악에 미혹하여 황고 명종황제로 하여금 운남에 출봉케 하고 영황이 해를 만나니 정통이 점점 비틀어지거늘 우리 황고는 무황의 적자로 멀리 북방 사막의 땅에 있었는데 종왕과 대신이 동심으로 추대하여 처음 대사를 일으켰다 이때에 지역이 가까움으로써 먼저 문종을 맞아 잠간 기무를 총관케 하였다가 이어 천리와 인륜의 당연한 것을 알고 양위란 이름을 빌려 기천의 실을 품고 보새를 가지고 와서 올리거늘 황고가 성을 미루어 의심치 않고 곧 황태자보를 주었더니 문종은 악에 쌓여 개전치 못하고 몸소 맞이할 즈음에 당하여 곧 그 신인 월노불화 야리아명리동아 등으로 더불어 불궤(모반)를 꾀하여 나의 황고로 하여금 한을 먹음고 세상을 떠나게(상빈)하고 돌아와서 재차 진극(제위)에 나아가 스스로 천하에 해명코자 생각하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수일동안에 궁차(제차)가 가(출어)치 않느냐」고 하니 해내가 이 말을 듣고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또 사사로히 아들에게 전할 것을 도모하여 이에 사언을 꾸며 화를 팔불사황후에게 전가하여 말하기를 「짐이 명종의 아들이 아니라」하고 드디어 먼 벽지에 나가 있게 하매 조종의 대업이 거의 잇지 못하게 되니 안으로 괴겸을 품고 곧 야리아를 죽여서 입을 막았도다 상천이 도우지 않으매 운벌(사벌)이 따라 내리었느데 숙#심(숙모)인 포탑실리가 그 세도를 믿고 명(명종)고의 총사를 세우지 않고 유치(어린)한 제인 역련진반을 세웠더니 문득 다시 죽었도다(불년) 제왕과 대신들이 현으로서나 장으로서 짐을 추대하여 위를 밟게 하였으나 나라의 큰 정사가 매양 스스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어찌 능히 매거하리오 매양 생각컨대 다스림은 반드시 효를 다함에 근본하고 일은 명분을 바로 하는 것보다 앞섬(선)이 없도다 천의 영을 힘입어 권간을 물리쳤으니 효를 다하고 명분을 바르게 함을 어찌 다시 늦추리오 길이 국육한 망극의 은을 생각하매 차마 불공대천144)의 의를 잊으리오 기왕의 죄는 차마 베지 못할 것이 있으니 태상사에 명하여 탈탈첩목아의 묘에 있는 신주를 철훼케 하고 포탑실리는 본래 짐의 #심(숙모)인데 이에 가만히 간신과 결구하여 짐의 뜻을 체득치 못하고 참람히 태황태후의 호를 응수하여 그 규문에 화를 인도(계)하여 골육을 이간한 것을 추어보면 죄악이 더욱 무거웁도다 대의를 헤아려 큰 이름(홍명 즉 태황태후)을 깎아버리고 동안주에 옮겨 안치케 하고 연첩고사석은 비록 어리나 사리에 동처하기 어렵도다 짐은 끝까지 복철(전인의 실정)을 밟아 오로지 잔#곡에 힘쓰지 않을 것이니 오직 이(연첩고사석)를 고려에 추방하고 그때 적신으로 이미 죽은 월노불화 야리아를 제외하고 명리 동아 등은 밝게 전형을 바르게 하고 인하여 유사로 하여금 곧 황고 홀도독황제의 존호를 의정하여 날을 가려서 의례를 갖추어 짐이 장차 몸소 태묘에 제사하여 조금이라도 보본의 예를 다하리라 아아 길이 효를 생각하매 부천에 갚지 못함을 슬퍼하고 황극145)을 건용하매 민덕이 순박함을 바라노라 크게 다방(천하제후)에 고하여 나의 슬프고 쓰라림을 믿어 알게 하라」고 하였다 연첩고사석이 오가다 심양에 이르러 폭사하였다.

신사 2년 춘 2월 경인에 원이 지정이라 개원하였으므로 사신을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갑오에 환자가 고룡보로 삼중대광 완산군을 삼았다. 무술에 왕이 원사를 향연하였다. 3월 무신 삭에 왕이 예천군 권한공의 2실인 강씨의 아름다움을 듣고 호군 박이자적을 시켜 관중에 들이게 하였는데 이자적이 먼저 간통하여 일이 발각되매 왕이 노하여 모두 박살하였다. 하 5월 기미에 비를 빌었다. 계유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제 강능대군 기를 불러 입조케 하거늘 정승 채하중 전 첨의평리 손기 박인간 등 30여인이 수종하였다. 윤월 갑오에 현도효가 왕을 #짐(살)146)코자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주되었다. 기해에 전 찬성사 오계유를 행성에 가두었는데 김언구가 살인죄에 걸려 옥에 갇혔을 때 계유가 그의 옥대를 받고 지(교지)하여 이를 놓아준것이었다. 추 7월 병자에 대도상인이 와서 말하기를 「해적 30여#소가 청 황의를 입고 징(#라)을 울리고 북을 치면서 바다를 넘어와서 인물을 살략하였다」고 하였다. 8월 계해에 원이 사신을 보내와 해적의 일을 묻고 인하여 본국으로 하여금 군수(군수)를 준비케 하였다. 정묘에 왕이 동교에서 사냥하였다 왕이 날마다 유렵으로 일을 삼으니 종자가 괴로워하였다. 9월 병술에 이능간으로 정승을 삼았다. 신축에 안원룡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동 10월 을사 삭에 왕이 동교에서 사냥하다가 드디어 정천기의 집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왕이 원사를 향연하였다. 11월 무인에 지일(동지)임에도 제도의 하전이 이르지 않았다. 기축에 내시 전자유의 집에 행차하여 그 처 이씨를 덥쳐서 이를 강간하였다. 계사에 왕이 폐인 호첩목아를 곤장 쳐 그 혀를 불태우고 또 그 음부를 불태워 섬에 류배하였는데 청교역에 이르매 길가는 사람들이 다 기뻐하더니 곧 명하여 소환하고 의사를 보내어 치료케 하니 사람들이 오히려 죽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을미 밤에 박수명의 집에 행차하였다. 무술 밤에 고 호군 박이자적의 처의 집에 행차하였다. 12월 계축에 성산군 이조년이 벼술에서 물러가기를 빌(걸)었다. 전 첨의평리 이나해가 졸하였다. 을묘에 서해의 곡식을 북전에 수송하는데 수레가 길에 연결되어 사람들이 능히 통행치 못하였다. 병인에 왕이 강음에서 사냥하였다. 임오에 정당문학 박원이 졸하였다.

임오 3년 춘 정월 정해에 왕이 총관 이수산으로 더불어 청교역에서 말(마)달리기를 겨루었는데 (교마보=마경)왕이 친히 말을 씻어 주었다. 병신에 왕이 나가 사냥하고 을해에도 또 이와 같이하였다 이로부터 날마다 유렵으로 일을 삼고 출입에 법도가 없었다. 2월에 평리 홍탁의 딸을 책하여 화비를 삼고 장차 이를 드리려(납)하니 임씨가 이를 질투하매 이에 은천옹주를 봉하여 그 뜻을 위로하였다. 정미에 왕이 나가 사냥하고 인하여 정천기의 집에서 잔치하였다. 경술에 #계림군공 왕후를 원에 보내어 대행왕(갖 돌아간 왕)의 익를 청하였다. 무오에 왕이 의성 덕천 보흥(창고)의 포 4만8천필을 내어 저자에 점포를 열었다. 계해에 왕이 강음현에서 사냥하니 시종하는 악소들이 매(응)를 먹인다 칭탁하고 다투어 동리의 #계견을 노략하나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3월 경진에 밀직상의 이대로 삼도순무사를 삼았다. 신사에 원이 대경 종골을 보내어 부차 15#초(저폐) 3천정 은자 백필을 가지고 오거늘 왕이 영빈관에 출영하였다. 임오에 연경궁에 행차하여 원사를 향연하였다. 신묘에 무인인 전 낭장 한용규로 전교부령을 삼았다. 정승 이능간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였다. 병신에 남궁신을 보내어 포 2만필과 김은#초를 가지고 유 연(연경지방)에서 호시하였다. 하 4월 무진에 왕이 숭인문외에서 격구할새 의#위를 버리고 다만 라장(고동부는사람)을 시켜 길을 열게 하였다. 5월 을해에 시전에 행차하여 격구를 관람하였다. 임오에 연경궁에 행차하여 화산147)을 관람하였다. 계미에 상춘정에 행차하여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병신에 록을 반사하는데 내수(내시)가 녹을 지급받지 못함으로 써 호소하거늘 왕이 호군 승신을 시켜 제조 곽지보 황화상을 묶어 궁문에서 장형하고 승신으로 대체하였다. 6월 경자 삭에 하교하기를 「적신조#적이 난을 꾸민 뒤에 과인이 도(원)에 가매 국가가 근심하고 의심했으며 간신의 잔당이 거짓말을 날조하여 난을 선동하기를 마지아니하되 시종하는 신하가 종시일절로 과인의 몸을 협보하였으니 그 공이 막대하여 영구히(대려)148) 잊기 어렵도다 해평부원군 윤석 정승 채하중 화평부원군 김석견 정승 이능간 이문 홍빈 상락부원군 김영돈 서하군 임자송 찬성사 김인연 언양군 김윤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삼사우사 김영후 좌사 이몽가 판밀직사사 이운 개성윤 윤신계 전 지밀직사사 이엄 전 동지밀직사사 윤환 박청 전 밀직부사 강윤충 안천길 노영서 원외랑 한의신 군#박판서 배전 최유 지신사 황석기 판종#박사사 손수경 판사복사사 윤원우 대호군 김첨수 김선장 호군 남궁신 임성 등 으로 1등공신을 삼아 벽상에 도형하고 부모 처에게는 3등을 뛰어 봉작하고 1자에게는 7품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질이나 생이나 여서를 대로 하여 8품을 제수하고 전 백결 노비 10구를 줄 것이며 영창군 김승택 학성군 박인수 전 군#박판서 안자유 상호군 김경 전윤장 전 판서운관사 손원 대호군 이광원 김장 호군 진교화 승신 이헌 손습중랑장 왕석 이충 이원용 이광계 낭장 전경 홍매노 등은 2등공신을 삼아 부모 처에게는 3등을 뛰어 봉작하고 1자에게는 8품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여#서를 대로 하여 9품을 제수하고 전 70결 노비 5구를 주라」고 하였다. 갑인에 신효사에 행차하였는데 등촉을 드는 무리들이 향도149)를 결성하여 축수제를 이 절에서 설하니 왕이 제연의 자리를 주관하였다. 병진에 왕이 귀산사에서 잔치하였다. 기미에 원이 고용보 첩목아불화 등을 보내와 기황후의 모 이씨를 맞이하거늘 왕이 용보 등을 교에서 맞이하였다. 신유에 홍법사에 행차하여 승 #학선을 보고 인하여 장생의 비결을 물으니 #학선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정한 분수가 있고 한계를 넘는 리치가 없는 것이니 다만 가히 악한 일을 하여써 재촉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왕이 술사의 말을 믿고 숭교사를 헐고자 하므로 #학선이 그 연고를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서운관이 이르기를 이 땅에 절이 있으면 역신이 반드시 난다하매 내가 조#적이 다시 생길가 두려워 하여 이를 헐려고 한다」고 하니 대답하기를 「목종때로부터 이미 이 절이 있었는데 그간에 역신이 몇이나 있었읍니까」라고 하였다. 무진에 왕이 고용보를 연경궁에서 향연하였다. 추 7월 경진에 화원에 행차하여 연꽃을 구경하고 드디어 밀직부사 원호의 집에 행차하는데 김선장 김예 등 수인을 수종케하였으나 왕이 스스로 일산(#산)을 들고 갔다. 계미에 이자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오에 왕이 첩목아불화를 화원에서 향연하였다. 8월 신축에 황후모 이씨의 집에 행차하여 전별연을 설하였다. 무술 밤에 송악이 우는(명)지라 왕이 괴이하게 여겨 이를 물으니 진무작금이 대답하기를 「근심할 것 없읍니다 고시에 숭악의 삼호150)가 전각에 메아리쳐(요전) 푸르렀다는 시구가 있나이다」하니 왕이 기뻐하여 포를 사하고 낭장을 제수하였다.

계미 4년 춘 2월 갑진에 왕이 용사를 거느리고 각#저#희를 관람하고 밤에 좌우사랑중 김영후와 더불어 북궁에서 음주하다가 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좌우로 하여금 붙들어 마에 오르게 하고 드디어 종자를 불러 말하기를 「이미 너의 낭중이 타던 말을 나에게 주었다」하니 영후가 그 이튿날 곧 이것을 바쳤다. 기유에 왕이 매(응)를 동교에서 방하고 화비궁에 돌아와 수박#희151)를 관람하였다. 병인에 폐신 임홍보의 집에 행차하니 홍보가 시비를 바쳤다. 3월 신미에 동교에 행차하여 탄환으로써 사람을 쏘아 히롱을 하니 행인이 모두 도망하였다. 왕이 부인 대호군 임회 전 호군 윤장 등 10여인을 불러 내고의 물화를 주어 원에 가서 판매케 하였다. 계유에 2일간 지진하였다. 갑술 밤에 왕이 폐인을 거느리고 민천사의 루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다가 실화하여 각을 태웠다. 을해에 내구를 지을새 인가 백여구를 헐어 넓게 담장을 쌓고 또 사람과 밭을 빼앗아 이에 속케 하고 호군 한범에게 명하여 그 조세를 거두어 차로 수송케 하니 날로 백양(량)씩 사용하였다. 병자에 습사장을 파하여 동서대비원에 속케 하고 성중의 병인을 모아 치료하고(구약) 의복을 주었다. 기묘 밤에 재신 배전의 집에 행차하여 그 처와 그 아우 김#오의 처를 간음하였는데 이 때에 (배)전은 원에 있었다. 익성군 홍탁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였다. 왕이 신궐을 삼현에 일으켰다. 하 4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경자에 왕이 승 #호선을 옥에 내렸는데 #호선은 거문고 그림 의술을 잘하고 또한 한어 몽어를 알므로 왕이 경중히 여겨 사전라 칭하매 전에 올라도 절을 하지 않으니 이 때에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더니 이에 이르러 왕지를 꾸며 죄수를 놓아주거늘 왕이 노하여 감찰사에게 명하여 문초하고 제주에 류배하였다. 갑진에 기황후의 모 이씨의 집에 행차하여 주안을 베풀었다. 병오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외얏(이)과 매실만 하였다. 경술에 경성의 백성이 와언하기를 「왕이 민가의 소아 수십명을 붙들어 신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하니 집집이 놀래어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자가 있으매 악소배는 이 틈을 타 도둑질을(표절) 함부로 자행하였다. 갑인에 왕이 숭교사에서 잔치하고 기미밤에 또 상호군 송명리의 집에서 잔치하였는데 처음에 폐신 최원이 왕께 고하기를「진사정동에 처녀가 있는데 미염하다」하니 이날 밤에 왕이 그와 더불어 그 집에 이르러 이를 찾았던 바 주가의 노#구가 본시 딸이 없다고 사하니 왕은 노#구가 이를 숨켰나 의심하고 또 (최)원이 속였나 의심하여 모두 죽였다. 경신에 강윤성으로 찬성사를 삼았다. 임술에 밀직상의 이대가 졸하였다. 5월 을축 삭에 왕이 윤환의 처 유씨를 간통하였다. 무진에 산대암에 행차하여 격구하였다. 기사에 성산군 이조년이 졸하였다. 계유에 지진하고 정축 무인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임오에 원이 직성사인 실덕을 보내와 송 요 금 삼국의 사적을 구하였다. 계미에 연경궁에 행차하여 원사를 향연하였다. 을유에 왕이 신궁의 역도들을 풀어 먹일새 문무신료와 창고가 모두 주찬과 능백을 바쳐 그 비용을 도우니 옥이 주안을 베풀고 나#희를 관람하다가 기쁨이 심하여 일어나 춤추고 또 재상에게 명하여 춤을 추게 하매 재상들이 서로 번갈아 단판을 치며 춤을 추므로 왕이 은 백량을 내고 공주와 은천옹주도 또 각각 50량을 내어서 연폐를 삼았다 어떤 사람이 걸호#희를 하거늘 은 50량을 사하고 남어지는 다 거두어 드렸다 이로부터 군신에 명하여 주찬을 성하게 베풀어 날마다 먹이게하여 다투어 화미를 극히 하니 1식의 비용이 포 이 삼백필이나 누가케 되매 사람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더니 뒤이어 파하였다. 무자에 큰 우박이 내렸다. 신묘에 공주가 연경궁에 이어하니 왕이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에 각#저#희를 관람하였다. 6월 병신에 마암에 행차하여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기인법(기인제도)을 복구하였다. 계묘에 왕이 동교에 놀고 갑진에도 또한 그러하였다(시는 여의 동자임). 정미에 왕이 매(응)를 청교에서 방하였다. 기유에 왕이 탄현문 밖에 출유하였다. 임자에 화원에 행차하여 주연을 설하였다. 갑인에 왕이 미행하여 동교에서 참새를 잡았다. 정사에 관음방에 행차하여 폐신 김선장의 기일제를 설하는 까닭이었다. 무오에 남궁신의 집에 행차하였다. 왕이 4건의 노비를 구취하기를 심히 급히 하였는데 기상한 것과(바친것) 투속한 것과 선왕이 일찌기 사여한 것과 사람들이 서로 무역한 것이었다. 추 7월 경오에 정원용의 집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원의 사신 실덕이 길에서 조성도감의 방문을 보니 거기에 말하기를 「목석을 납부하되 기일에 불급하는 자는 포를 징수하고 섬에 류배한다」고 하였거늘 이에 방을 취하여 관에 돌아가 정승 채하중에게 일러 가로되 「인군된 자는 마땅히 백성부리기를 때로써 하여야 하는 것인데 이제 백성을 사역하여 농사를 방해하니 이나라 백성들이 그 어찌 써 살겠느냐 내가 장차 제에게 주하리다」하므로 하중이 써 고하니 왕이 대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반접인의 유치한 바이다」하니 하중이 대답하기를 「신이 원컨대 전하는 가볍게 노하지 마소서 인군은 가히 가볍게 하지 않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평일에 적은 일에도 곧 성위를 떨치니 진실로 인주의 마땅히 할 바가 아닙니다」고 하였다 왕이 하중 등을 시켜 (주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실덕이 듣지 않으므로 그 친한 이를 시켜 굳이 청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왕 께 아뢰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실덕에게 호소한 자는 전 판각 최대우라」하니 왕이 대내에 불러들여 뺨을 때려 피가 흐르게 하였다. 화비전에 행차하였다가 늦게 판사복사사 안의의 집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이#천으로 첨의평리상의를 삼았다. 무인에 화원에 행차하였다. 계미 밤에 승신의 집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어 심히 즐기더니 닭이 울매 왕이 가로되 닭이 주인의 뜻을 앎이라 하고 칼을 들어 #계두를 끊고 승신에게 이르기를 「네가 반드시 상심하리라」하매 대답하기를 「닭이 우는 것은 때가 있는 것인데 죄없이 죽임을 당하니 누가 감히 상심치 않으리까」하니 곧 포 백필을 사하였다. 무자에 만호 전찬이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였으므로 장형하여 귀양보냈다. 8월 병신에 묘련사에 행차하기 무릇 6일이었는데 이로부터 자주 행차하였다. 경자에 원의 사신 감승 오라고가 왕을 향연하기를 청하거늘 왕이 가로되 「금일에는 모름지기 묘련사에 가서 즐기자」하므로 오라고가 먼저 가서 기다리니 왕이 두 궁인을 거느리고 오후(#포)가 지나서야 이에 이르렀다 절 북봉에 올라 음악을 베풀매 천태종의 승 중조가 일어나 춤을 추니 왕이 기뻐하여 궁인으로 하여금 같이 춤추게 하고 왕도 또한 일어나 춤추며 또 좌우에 명하여 모두 춤추게 하고 혹은 처용#희152)를 하기도 하였다. 이운 조익청 기철 등이 원에 있으면서 중서성에 상서하여 왕의 탐음부도함을 극언하고 성을 세워 써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 (이)운의 형 엄이 승 #피가경으로 더불어 틈이 있더니 #피가경이 왕에게 참소하기를 「엄이 항상 신을 꾸짖어말하기를 너의 왕은 어떤 사람이냐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하였읍니다」고 하매 왕이 노하여 엄의 종(노)을 가두게 하였더니 엄이 왕을 뵙고 스스로 해명코자 하거늘 왕이 구타하니 엄이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왕이 어찌 나를 욕뵈이십니까 왕이 처음 즉위한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하였다 왕이 비록 #피가경에게 격노하였으나 실은 이운을 미워한 것이었다. 을사에 원이 태감 박첩목아불화를 보내와 동녀를 구하였다. 정미에 묘련사에 행차하였는데 사승이 잔치를 베풀고 행차를 청한 까닭이었다. 무신에 내탕(궁내고)의 5종포 100필을 내고 근신 좌우에 더 거두어 번갈아 가며 중추를 신궁루에서 잔치하는데 한 폐인이 있어 왕에게 아뢰기를 「사람의 실가를 아는 것은 맹인과 무녀같음이 없아오니 상께서 만약 미녀를 구하려면 마땅히 이 무리에게 물으소서」하니 왕이 곧 악소들에게 명하여 맹인과 무녀들을 침학케하였다. 신해에 왕이 미행하여 청교에 놀았다. 9월 정묘에 첨의평리 강윤충으로 양광 전라 경상도의 문민질고사를 삼고 찬성사 윤환으로 강릉교주도 도순문사를 삼고 우상시 전윤장으로 서해 평양도 순위사를 삼았다. 을해 밤에 왕이 단기로써 암화로에 유람하다가 야반에 환궁하였다. 병자에 왕이 동교에서 사냥하였다. 정축 밤에 왕이 미행으로 성중에 놀매 최안의의 가노가 꾸짖거늘 왕이 노하여 이를 매질하여 거의 죽게 하였다. 임오 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이 최안의를 시켜 낙타 3두를 사오게 하여 3금#몽과 주옥으로 장식하고 보#초를 실(재)었다. 병술 밤에 상가로써 내폐의 물건을 가지고 원에 가서 행판케 하고 아울러 장군 벼슬을 주었다. 기축에 윤환의 집에 행차하였다. 경인 밤에 악소배인 봉골 등 3인이 거짓 대가153)라 칭하고 왕#박 공보의 집에 들어가 그 처를 간통하니 행성이 이를 잡아 죽였다. 동 10월 계사 삭에 평리로 치사한 윤선좌가 졸하였다. 기해에 왕이 백안평에서 사냥하다가 3일만에 돌아왔다. 왕이 돌로써 강간한 죄수 3인을 압살하였다. 계축에 신궁이 이룩되었다. 갑인에 이어하니 정사에 백관이 모두 하례하는데 감찰대부신중전이 먼저 채단 2필을 바치니 사람들이 그 아첨함을 기롱하였다. 어느 사람이 내#주에 들어가 만두를 취하거늘 왕이 노하여 도둑이라 하고 곧 명하여 이를 죽였다. 임술에 원이 자정원사 고룡보와 대감 박첩목아불화를 보내어 왕에게 의와 주를 사하거늘 왕이 출영하였다. 11월 병인에 왕이 고룡보로 더불어 시가루에 거동하여 격구와 각#저#희(씨름)를 관람할새 용사에게 사한 포가 헤아릴 수 없었다. 무오에 원이 내주 등 8인을 보내와 안교를 구한다고 칭탁하였다. 갑신에 (원이) 고교(교에서 천지를 제함)로 사를 반포한다고 칭탁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인을 보내오거늘 왕이 병을 칭탁하고 맞이하지 않으려 하니 용보가 말하기를 「제가 항상 왕을 불경하다고 하시는데 만일 출영치 않으면 제의 의심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고 하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으로 교에서 맞이하고 조를 정동성에서 듣는데 타적 내주 등이 왕을 차고 묶으므로 왕이 급하여 고원사를 부르니 용보는 꾸짖고 사자는 모두 칼을 빼어 도종하는 군소배를 잡는지라 백관이 다 도망하여 숨었는데 좌우사랑중 김영후 만호 강호례 밀직부사 최안우 응양군 김선장 등은 #삭(창)에 맞고 지평 노준경 및 용사 2인은 피살되고 칼과 창에 맞은 자가 심히 많았다 신#예가 복병하여 밖을 막아 써 도우니 타적 등이 곧 왕을 끼고 한 말에 실어(재) 달려가는지라 왕이 조금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타적 등은 칼을 빼어 협박하였다 왕은 고민이 심하여 술을 찾으니 한 노#구가 이를 드렸다 만호 권겸 나영걸은 압령관(압송)이 되고 용보는 박첩목아불화 및 제군만호 이중민 김주경 김상기 등으로 더불어 궁검을 가지고 세가를 수색하였다 타적 등이 용보에게 명하여 국사를 정치케 하고 덕성부원군 기철 이문 홍빈 권정동성 용보가 사람을 보내어 왕의 시종인 군소배 박양연 임신 최안의 김선장 승신 등 10여인을 잡아 가두었는데 송명리 조성주 윤원우 한휘 강찬 등은 본래 용보와 더불어 친선하였던 까닭으로 #면하였다 용보는 (기)철과 (홍)빈과 채하중 등으로 더불어 내탕을 봉#쇄하였다. 정해에 은천옹주 등 궁인 126인을 놓아(방)주었다. 기축에 고룡보가 돌아갔다. 경인에 왕이 숙주에 이르러 금(이불)을 주수인 안균에게 구하니 균이 드리지 않고 타적 등에 고하기를 「왕이 탐음으로써 죄를 얻고 또 나의 이불을 빼았고자 하니 어찌하리까」하매 타적이 말하기를 「네가 이 고을(주)을 다스리는데 누구가 시키리오 너의 왕이 추위를 두려워하여 이불을 구하는데 네가 그것을 주지 않으니 그 인신의 의리에 어찌할 것이냐」하고 드디어 철척으로 쳐서 거의 죽게 하였다. 임진에 판밀직사사 박인간이 원에서 졸하였는데 인간은 이때에 원자의 사전이었다. 12월 을미에 한양군 한종유 판밀직사사 손수경을 원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묘에 전 대언 인#당이 함거(죄인 싣는 수레)로써 임신 박량연 임이도 남궁신 최안의 김첨수 민환 왕석 승신 등 9인을 싣고 원에 갔다. 정미에 재상 및 국로들이 회의하고 중서성에 상서하여 왕의 죄를 사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계축에 제가 함거로써 왕을 #갈양현(중국광동성조주지방)에 류배시키면서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 왕정은 남의 임금이 되어 백성을 박탈(박)함이 너무 심하였다 비록 너의 피로써 천하의 개를 먹여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짐은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럼으로써 너를 #갈양에 류배하노니 너는 나를 원망치 말고 갈지어다」라고 하였다 #갈양은 연경에서 2만여리이다 원자가 배전으로 하여금 옷 한 벌을 드리게 하니 전이 드리고는 곧 갔는지라 왕이 그를 부르게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한 사람도 따라가는 자가 없으니 왕이 손수 옷보따리를 가지고 갔다.

갑신 5년 춘 정월에 왕이 원에 있었다. 원이 유탁으로 합포만호를 삼으니 구 만호 첨의상의 양지수가 교대받기를 즐기지 않고 오래 있다가 이에 나가서 도내에 놀고 있었으나 (죄를) 묻는 자가 없었다. 무진에 재상이 백관 및 국로를 모아 성(중서성)에 올릴 국서에 서명코자 하였으나 국로가 많이 오지 않으므로써 일이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왕의 전(역전)차가 빨리 달리매 그 간난한 고초는 말할 수 없이 많았다(만장) #갈양에 이르지 못하고 병자에 악양현에서 훙하니 혹자는 말하기를 #짐독154)을 만났다 하고 혹자는 귤을 먹고 죽었다 하였다 국인이 듣고 슬퍼하는 자가 없었으며 소민들은 기뻐 날뛰면서 「다시 갱생의 날을 보게 되었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처음에 궁중과 도로에서 노래하기를 「아야마고지나155) 이제 가면 어느 때 오느냐」고 하더니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악양망고지난(악양에서 죽을 재난)에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느냐」라는 것이라 하였다 왕의 재위는 전후 6년이오 수는 30이었다 6월 계유에 상(령구의 뜻)이 도착(지)하여 8월 경신에 영능에 장하였다 공민왕 6년 윤 9월 계해에 존익를 올려 헌효대왕이라하였고 16년 정월 정해에 원이 익를 사하여 충혜라 하였다 왕의 성품이 유협하여 주색을 좋아하고 놀이와 사냥에 탐혹하여 황음하기 도가 없어서 사람의 처첩의 미를 들으면 친소와 귀천이 없이 모두 끌어들여 후궁이 거의 100여나 되었나 재리에는 사호를 분석하여 항상 경영하기를 일삼으니 군소들이 다투어 계획을 올려 사람의 토전과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에 속케하고 양마로 내#구를 채웠으며 포를 회회가(서역인)에게 주어 그 이를 취하여 소를 잡아 육을 날마다 15근을 바치게 하였다 신궁의 역에는 기를 벌여 세우며 북을 설하여 놓고 친히 담에 올라 독려하였으며 궁이 이룩되매 칠을 제도에 징수하고 단#확156)을 운반하되 기한에 뒤진 자에게는 포로 배#사157)를 징수하니 관리는 이로 인하여 간하게 되고 백성은 근심하고 원망하였다 군소는 뜻을 얻고 충직은 배척되어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베어죽이니 사람들이 죄받을까 두려워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사신이 찬하기를 「충혜왕은 영예한 재질로써 그것을 불선에 썼도다 악소들을 친근(#닐비)158)히하여 황음하고 방자하여 안으로는 부왕께 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어 몸이 #기수가 되어 도로에서 죽었으니 마땅한 일이로다 비록한 노신 이조년이 있어 말하기를 #개절히 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하리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