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 실리. 자는 의효(宜孝)이다.1298년(충렬왕 25)에 강릉군(江陵君) 승선사에 봉해졌고, 뒤에 강릉대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에 왕위를 전위(傳位)받아 돌아와서 연경궁(延慶宮)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이 고려의 왕위를 넘겨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또한 심양왕자리도 왕고에게 넘겨주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왕고와의 왕위 쟁탈전을 하게 된다. 이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1314년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워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고 또 민지(閔漬)·권보(權溥) 등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하였다. 그리고 강릉도존무사사(江陵道存撫使司)를 명주(溟州:지금의 江陵)에서 등주 (登州:지금의 安邊)로 옮겼으며,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양광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를 경상도, 교주도(交州道)를 회양도(淮陽道)로 고쳤다.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천(貴賤)의 복색(服色)을 정하고, 동당시(東堂試)를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1316년 상왕인 충선왕이 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조카인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어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되자, 고는 고려의 왕위를 넘보는 등 복잡한 관계를 자아내게 되었다. 1318년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또, 그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채무에 있어서 그 이자가 원본(元本)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안향(安珦)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 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심양왕 고는 왕위찬탈의 뜻을 품고 원나라에 무고를 하여 왕이 불려가 그곳에서 5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였으며, 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켜 다스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에게 넘겨주려 하다가 한종유(韓宗愈)등의 반대로 취소하고, 1330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1332년 충혜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하여 폐위되자 복위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가 지나치게 요구 하는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貢女)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심양왕과의 정권다툼에 시달리고, 원나라에서 5년 동안이나 체류하고 돌아온 뒤에는 조신(朝臣)을 접견하지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아니하였다. 성품은 엄숙하고 의지가 굳고 침착, 총명하며, 속문(屬文)을 잘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러한 그도 복위 8년만인 1339년 3월에 지병이 악화되어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의효(懿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능은 의릉(毅陵:開城 소재)이다. 서문출처: 미르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