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 창왕
제26대충선왕(忠宣王, 1308~1313)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장(璋).초명은 원, 몽고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자는 중앙(仲昻)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295년 8월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다가 원나라로 가서 이듬해 11월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였다. 혼인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1297년 5월 병사하자 7월 문상하러 온 세자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를 빙자, 세력을 떨 치던 궁인 무비(無比)와 그 당류 최세연(崔世延)·도성기(陶成器)등 40여 명을 공주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씌워 참살, 유배하는 대숙청을 단행하고 이듬해 정월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충선왕은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심지어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전지정치를 하였으며, 이로인해 고려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었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되었다. |
충선왕의 휘는 장이오 자는 중앙이며 고휘는 원이오 몽고의 휘는 익지례보화이니 충렬왕의 장자요 모는 제국대장공주이다 충렬왕 원년 을해 9월 정유에 탄생하여 3년 1월에 왕을 책하여 세자를 삼았다 9년 2월에 충렬왕이 장차 충청도에 사냥코자 할새 때에 왕의 나이 9세인데 홀연히 눈물을 흘리는지라 유모가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 백성이 곤궁하고 또 동작의1) 때를멀리 당하였는데 부왕이 어찌하여 사냥하시느냐”하거늘 조의순이 써 고하였던 바 충렬이 이르기를 “소아가 괴이하도다 엽기가 이미 정해졌으니 능히 청종할 수 없다.”고 하더니 얼마 안되어 공주가 병을 얻으매 충렬이 가지를 못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떨어진 베 적삼을 입고 땔나무를 지고 궁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물으니 대답하기를 “장작서(궁중의 토목 건축을 장리하는 곳)의 기인2)이다”하거늘 왕이 가로되 “나는 의복이 아름다운데 백성이 이와 같으니 마음에 편하겠는가” 하였고 또 궁노가 동네 아이들의 지연을 취하여 바치거늘 (왕이) 묻기를 “네가 어디서 이것을 얻었느냐”하니 사실대로 대답하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을 사람에게서 취하여 나에게 바침은 무슨 짓이냐”하고 곧 명하여 돌려 보냈다.
항상 행리별감 위선에게 말하기를 “기괴하고 요망한 것은 모두 취할 것이 되지 못하니 다만 가히 전세에 수덕한 현인(전수)3)의 일만을 나에게 고하라”하였고 염승익이 일찍이 상보는 사람(상사) 천일을 진알시키니 천일이 왕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인자한 눈은 매와 개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지라 박의가 곁에 있거늘 왕이 돌아보고 가로되 “매양 응견으로써 우리 임금을 추석거리(종유)는 자는 이 로구라”하니 (박)의가 부끄러워서 물러갔다.
13년 9월에 충렬왕이 연경에 있을제 왕을 불러 입조케 하였다. 10월에 전라도 왕지별감 권의가 은 40근, 호피 20령을 왕에게 바쳐 행리의 비용을 보조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이 물품은 모두 백성을 긁어 원망을 산 것이니 나의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40년 9월에 성절이므로 대전에서 잔치하는데 송인이 희(연기)를 부리(작)거늘 충렬왕이 왕을 불러 구경하라 하니 왕은 사양하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때에 왕의 나이 14세이었다 일찌기 내료 원혁의 무릎위에 걸터 앉아 조용히 서로 말할제 혁이 왕에게 이르기를 “인주는 마땅히 총찰치 않아야 하는데 전하는 총명이 너무 지나치니 마땅히 조금 관용하여야 할 것입니다”하니 왕이 안색을 가다듬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로 하여금 어리석고 어둡게 하여 손바닥의 흙을 주물럭거려 연한 떡과 같이 하려는냐”고 하매 혁이 두려워하였다. 15년 5월 임오에 왕이 전박사 강후의 죽음을 듣고 좌우에게 묻기를 “이 사람이 연두 연비4)하여 왕의 병을 구한 자가 아니냐”하니 그렇다 대답하매 왕이 말하기를 “무릇인신이 임금을 섬기는 도는 충근하여 절의를 다함에 있거든 연두 연비는 이 곧 불도의 일이오 군자의 할 바가 아니어늘 후가 이에 상께 아첨하여 감히 비례를 행하엿으니 비록 죽은들 무엇이 애석하리오”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17년 9월에 제가 왕에게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를 제수하고 금인을 사하였다. 18년 7월 병술에 원에 갔다. 9월에 제가 자단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본국의 일을 물으니 왕이 주대하기를 상명히 하였다. 10월에 제가 왕을 침전에 불러들여 무슨 글을 읽었느냐 물으매 통감을 읽었다고 주하니 제가 말하되 “역대제왕에는 누가 현명하더냐”하매 대답하기를 한의 고조와 당의 태종이라 하니 제가 또
묻기를 “한고조와 당태종은 과인과 어떠한고”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년소하니 어찌 족히 써 이를 아오리까”하니 제가 그렇다 하고 재상에게 물어오라고 하였다. 21년 8월에 원으로부터 이르니 제가 책하여 의동삼사 상주국 고려국왕세자 령도첨의사사를 삼고 양대의 은인을 사하였는데 그 고에 가로되 “어려서 의방5)을 받이 일찍일찌기 령기로6)표출되었도다 우리집으로부터 낳아 번보에서 모두 담앙(구담)함이 되었도다 선황을 섬김에 미쳐서 공근이 갖추어 나타나고 서의를 참예하여 들음(예문)에 성예가 더욱 높도다 이에 은총은 의장에 빛나게 하고 잉하여 높이 명질에 오르도다 그 로를 서하고 그 구를 조하매 의척의 특우가 마땅하고 자는 오직 효하고 신은 오직 충할지니 바라건대 성규를 각수하여 소리7) 에 어긋남이 없게하고 성하게 영광에 대하라”고 하였다. 9월 갑신에 도첨의사에서 일을 처리하였다. 12월 계묘에 원에 갔다.
22년 11월 임진에 왕이 백마 81필을 제에게 바쳐 납폐(약혼예물)하고 드디어 진왕 감마자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계사에 또 백마 81필로써 태후에게 드리니 태후가 양 700두와 주 500옹으로써 왕을 향연할새 제와 태후가 림헌하고 제왕과 백관이 시연하였다. 갑오에 백마 81필을 진왕에게 바치고 인하여 주 300옹과 양 400두로써 잔치하였다. 24년 1월 갑진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책하여 국왕을 삼고 충렬로 일수왕을 삼았다. 병오에 내선8)을 받아아 아 강안전에서 즉위하였다. 무신에 교하기를 “옛날 아태조께서 3한을 통일하여 홍호를 무궁에 빛나게 하매 당구9)를 서로 이음이 지금에 381년이로다.
우리 광문선덕태상왕(충렬왕)이 잠저에 있을 때에 미쳐 백성(려서)을 편케하기 위하여 스스로 마음을 결단하고 제정에 입시하여 왕희(공주)를 배필로 맞게 되어 전일의 소원(전녕)11)을 빛나게 이었고 큰 역수(운)를 이어 행하기(사대역복)12) 25년이니 승평의 업이 이에 성하도다 아-황천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우리 모후 정민장민장선인명태후로 하여금 문득 빈천(승하의 뜻)케 하시매 상의 마음이 울울하여 청정에 게으르(권)사 군국의 번기13)로서 유충(자신을 가리킴)에 돌리시니 재삼 굳이 사양하여도 유명(허락)을 얻지 못하여 새로 왕위에 나아가게 되었도다 오직 나(여 소자)는 다행히 선제의 외생이오 또 황제와 황태후의 권애를 받들어 아름답게도 공주와 더불어 드디어 여기에 오게 되었도다 만약에(상) 적루의 공을 힘입어 길이 사직의 크고 큰 기업을 보존하게 되면 마땅히 수은으로써 원근에 널리 미치게 할 것이니 1월 21일 매상(새벽)이전으로부터 2죄 이하를 다 사제하라 1은 합단이 란입할 때에 주군이 바람결에 (망풍) 맞아 항복하는데 오직 원주만이 고성으로 적의 칼날을 꺾었어도 다 그런 뒤에야 제성이 이를 본받아 적의 무리를 소탕하여 3한의 재안을 이루고 선제의 한노를 갚았으니 그 공은 만세에 잊기가 어렵도다 그 방호별감판서로 치사한 복규와 전사중랑장 원충신과 그 읍의 수졸(군수)와 장리로 공을 이룬 자는 비록 이미 포상하였으나 오히려 미치한 바가 있으니 마땅히 탁용을 가하여 후인을 권려한 것이며 그 고을의 통상적인 요역과 잡공도 마땅히 3년간 면제할 것이다 1은 3한벽상공신과 3한후의 대대벽상공신과 배정공신과 정전에 진몰하여 사망한 공신의 자손 등으로 천기로써 공 상 장 악에 떨어져 있는 자와 무릇 공과 은으로써 이미 량반에 속하고 부모도 흔구가 없는 자는 마땅히 추명하여 벼슬 길에 통하게 할 것이며 그 공신의 전토로서 만일 손자가 있는데 외인이 점취한 것은 년한을 물론하고 손자에게 환급할 것이며 동종 가운데 공신의 전토로서 만약 1호가 모아가진 자는 그 족정과 반정14)을 구별하여 고르게 나누어 줄 것이며 공신자손으로 남반15)에 속한 자는 동반으로 고쳐 줄 것이다 1은 문 무 량반과 정 잡로의 모든 유직자는 차제 동정직을 가하고 전은을 입지 못한 자는 함께 금은을 입도록 허할 것이며 전에 향직을 가진 자는 차제 향직을 가하고 관에 만기가 된 자는 향직의 계급을 가하여 줄 것이다 1은 제사의 인리의 동정16)은 률로 허한 차례로 허할 것이며 리 병부에 입사한 자는 각각 50인을 허하고 근시 다방 원리는 초등하여 직을 가하고 급사는 초입사를 허하고 남반의 속은 년한을 막론하고 동반으로 고칠 것이다 1은 속담에 말하기를 승에 비직이 많으면 나라가 망하고 집이 패한다 하였는데 지금 비직의 수가 과다하니 유사로 하여금 포폄하여 신문케 하되 금후로는 법덕과 특수한 직분이 있는 자에게만 바야흐로 법호를 가할 것이다. 1은 전에 류배한 자로서 국가를 모란하고 불충 불효와 살인강도와 모고겁살과 삽면18)으로 상호에 충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입도한 자는 여향에 출륙케 하고 여향자(여향에 량이한 자)는 조견에 통케하고 조견에 통한 자는 량용하고 공사잡죄자는 그 직전을 돌려 주고 종신불서한 자로 정직되어 산계(무임소의 직)에 속한 자는 량용할 것이다 1은 일본 호송사 부지밀직사사로 치사한 금유성과 공역령 곽린 일행의 원장의 자손은 록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유에 수녕궁에 이어하였는데 왕은 문한학사 승지 최참 학사 박전지 시독학사 오한경 이진이 유지를 수찬하였으므로 릉 견 주저를 각각 15필 씩 사하였다. 경술에 왕이 덕자궁에 나아가 일수왕(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왕의 구(인장) 진왕이 평장 찰자첩목아를 보내와 공주상을 조하고 인하여 치제하였다. 임자에 중방이 왕을 향연하였다. 계축에 불은사에 행차하여 궁지을 땅을 살펴보고 덕자궁을 두었다. 을묘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덕자궁에 나아가 전을 받들어 존호를 올려 태상왕이라 하였다.
왕은 자포(자색도포)를 입고 태상왕은 황포를 입고 하례를 받지 않으니 때에 3한의 희유한 성사라 하였다. 평양후 현과 대장군 금정이 왕과 일수왕의 사표를 가지고 원에 갔다. 병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덕자궁에 나아가 태상왕을 모시고 수녕궁에서 잔치하니 이는 공주의 탄일인 까닭이었다. 그 다음날 또 태상왕과 정화궁주를 봉영하여 왕궁에서 잔치하였다. 2월 무오 삭에 왕이 처음으로 정동성의 일을 주관(서)할새 재추와 행성좌우사 관리들이 알견하는데 원조의 예를 썼(용)다. 경신에 아목한 태자와 옹길자알 승상이 돌아가거늘 왕이 금교에서 전송하였다. 갑자에 왕이 태상왕을 정화궁에서 조알하고 왕이 명하되 “장목왕후에게 마땅히 태후의 호를 가할 것이니 유사는 그를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정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인후의 집에 이어하였다. 기사에 명하여 첨의밀직사로 왕궁을 삼으니 대개 옛 언창궁의 기지이었다. 처음에 왕이 차신의 집을 궁으로 삼으려 하여 이미 공역을 일으켰는데 땅을 상보는 자가 불길하다 하므로 써 드디어 이에 복정하고 크게 공역을 일으켰다. 경오에 관등으로 왕이 공주로 더불어 태상왕을 모시고 강안전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문한학사 최참 박전지 오한경 이진에게 상승의 안마를 사하고 다음날 대회에 군신이 수를 축할새(상수) 차례가 4학사에 이르니 왕이 앞에 오게 하여 #주를 사하고 이르기를“오직 그대 제학사들이 직언하여 숨김이 없었다.”하였다. 갑술에 총랑 강용정으로 경상도안렴사를 삼고 정랑 유겸으로 부사를 삼았으며 국학사예 허유전으로 전라도안렴사를 삼고 직강 정형으로 부사를 삼았으며 총랑 이원으로 충청도안렴사를 삼고 랑장 백응용으로 부사를 삼았다.정축에 감찰사가 교서랑 조진성의 처 조씨를 가두니 정랑 칭의 딸로 그 형 지렬과 통하거늘 그 모가 알고 금지하매 지렬이 어머니를 구타하고 매를 숨김으로 그 모가 그것을 송사하였다. (왕이) 친히 소재도장을 강안전에서 설하였다. 갑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의 생일을 덕자궁에서 하례하였다. 왕이 글월을 내려 전사간 이승휴를 불렀다. 이달에 왕이 흉년에 백성이 굶주림으로 상선을 감하고 내주에 명하여 상실(도토리)을 바치게 하여 맛보았다. 3월 무자에 친히 3계23)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중찬 정가신이 글을 올려 퇴관하기를 빌거늘 윤허치 않았다. 임진에 왕이 태상왕을 정화궁에서 조알하였다. 계사에 왕이 제도의 안렴을 불러 치민하는 일로서 유시하고 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주를 사하고 보내었다. 을미에 방신우 이숙으로 벽상삼한정광을 삼고 오인영으로 부지밀직사사를 삼고 공선으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정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진왕 생일이므로 태상왕을 모시고 수녕궁에서 잔치하였다. 경자에 왕이 왕륜 건성 2사에 행차하였다. 장양공 지가 송덕시를 바치거늘 미 30석을 사하였다. 임자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강안전에서 설하였다. 왕이 재신 최충소와 한림4학사로 더불어 3교의(유 불 선도)업을 논하였다. 계축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였다. 을묘에 고당왕 활리길사가 사신을 보내와 안평공주의 부의를 보냈다. 태상왕이 비 금씨의 노비를 위하여 내전24)을 왕에게 구하니 왕이 말하기를 “신이 즉위하는 날에 백성을 위하여 명을 하늘에 청하여 숙폐를 혁신하려 하였는데 내전도 그(숙폐) 1이므로 신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고 하였다. 하 4월 무오에 우박이 내렸다. 학사 최참 등 4인과 승지 김승에게 명하여 전선(선관과 선사)을 맡게 하였다. 경신에 친히 인왕도장을 강안전에서 설하였다. 신유에 왕이 명하여 외리(지방관)로서 재경한 자를 발환시키고 별장 이하는 본역에 륵환시켰다. 갑자에 태사국이 말하기를 “성중에 무격의 #사가 날로 성하니 청컨대 성 밖으로 옮기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을축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덕자궁에 수를 축하였다. 병인에 왕이 사신 허유전 조간과 치사한 김효신 최#(탕)에게 명하여 시사를 직언케 하되 모든 허물과 어김이 있거던 즉시 글로써 아뢰라 하였다. 무진에 왕이 상화연을 수녕궁에서 베풀었다. 경오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고 임신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을해에 전밀직사사 안전이 졸하였다. 신사에 우박이 내렸다. 첨의사가 왕의 혐명26)인 원 원 원 원 원 #(원) #(원) #(원) #(원) 원 등자 피하기를 청하거늘 이를 좇고 인하여 아울러 원자까지 피휘하기를 명하였다. 5월 병술에 공주가 조비를 투기하매 공주의 유모가 무뢰한 무리로 더불어 공주가 실애한 것으로써 활활불화 활활알와 대장군 금정 오정규 등을 원에 보내어 태후에게 고할 것을 음모하였다. 경인에 서번의 팔합사 등 19인이 왔는데 왕이 부른 것이다. 신묘에 교하기를 “선왕이 관을 설하고 직을 분함은 대개 사람을 얻어 함께 모든 직무를 도모하고자 함이로다 내가 어렸을 때에 천정(원의 제소를 가리킴)에 입시하여 몸소 선제(세조)의 훈언을 받고 눈으로 대도의 제도 보기를 이미 상세히 하였노라 중기를 외람되게 받음에 미쳐 모든 시폐를 한결같이 모두 감파하였으나 오직 재집(재상)의 수가 고제에 배나 되어 공가의 론의에 다소의 이동이 있어 일마다 지체가 되니 마땅히 감생할 것이다 또 근자에 상조의 제도를 피하므로 인하여 백관의 명호를 일찍이 고쳤으나 그러나 혹 같은 것이 있으되 고치지 않은 것이 있고 같지 아니하여도 고친 것이 있으며 고친 호가 또한 고제를 법받지 아니하여 혹 맞지(칭) 아니함이 있도다 나(고)는 즉위의 초에 당하여 거연히 성규를 고치면 물의에 어긋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떄를 따라 고치는 것은 옛적에도 또한 있었으니 곧 력대의 관직을 참고하여 상조의 관호에 걸리지 아니한 것이라도 바꾸어 두고 혹 급하지 않은 관사를 파하여 1국에 합하면 거의 관이 줄고(성) 일은 처리하기 쉬울 것이다”하였다. 이날에 조인규로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를 삼고 홍자번으로 좌복사 참지광정원사를 삼고 홍규로 수사도 령경영궁사를 삼고 정가신으로 사공 우복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참지광정원사를 삼고 인후로 광정사 참지기무를 삼고 김혼으로 검교 수사도 령봉상사사를 삼고 차신 이지저로 함께 검교사도 자정원사를 삼고 김지숙으로 동지광정원사 참지기무를 삼고 안향으로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전대학사 잡림부윤을 삼고 유비로 광정부사 겸 권참지기무를 삼고 최유엄으로 검교사공 사헌대부를 삼고 이혼으로 검교사공 서경유수 평양부윤을 삼고 정해로 남경유수 광릉부윤을 삼고 최충소로 동지자정원사 행중경유수 개원부윤 과의군도지휘사를 삼고 박의로 동지자정원사를 삼고 민지로 집현전대학사첨광정원사를 삼고 원경을 중경유수 과의군도지휘사를 삼고 민종유로 전조상서 숭복관사를 삼고 허평으로 민조상서를 삼고 윤보로 홍문관학사 의조상서를 삼고 최참으로 사림학사 승지형조상서를 삼고 전승으로 숭문관학사 병조상서를 삼고 유욱로 병조상서 응양군 상장군을 삼고 오한경으로 사림학사 시좌산기상시를 삼고 이진으로 사림학사 시우산기상시를 삼고 홍자한으로 금오위 섭상장군 겸 사헌중승을 삼고 장석으로 광정도승지 봉상경을 삼고 김순으로 광정부사승지 성균제주를 삼고 조단로 광정승지 전객경을 삼고 이승휴로 사림시독학사 시비서람 좌간의대부를 삼고 침봉길로 사헌중승을 삼고 권영으로 사림시강학사 시위위경을 삼고 조간으로 형조시랑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계축에 교하기를 “승인은 이미 출가한지라 진실로 마땅히 위로는 군왕에게 절하지 않고 아래로는 부모에게도 절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이)리요 지금부터 승과 속이 서로 절하는 자는 중하게 논하기를 법과 같이 할 것이다. 비록 집에 거하는 용승이라도 관역으로 차출치 말라”고 하였다. 갑오에 왕자 의충으로 영가군승선사를 삼고 의효로 강릉군승선사를 삼고 종실 현으로 평양군공을 삼고 유로 함녕공을 삼고 미로 광릉군후를 삼고 원으로 한산군후를 삼고 지으로 통의군관찰사를 삼고 화로 단양군관찰사를 삼고 관으로 계양군관찰사를 삼고 상으로 림해군관찰사를 삼고 구로 한남군관찰사를 삼고 빈으로 순정군관찰사로 삼고 헌으로 정평군관찰사를 삼고 형으로 시여군관찰사를 삼고 수으로 정산군관찰사를 삼고 마로 녕해군관찰사를 삼고 광으로 강음군관찰사를 삼고 온으로 진강군관찰사를 삼고 기로 보녕군관찰사를 삼고 허경으로 한양군관찰사 천우위상장군을 삼았다. 갑진에 공주가 철리를 보내어 원에 가게 하였다. 왕이 안평공주의 소상이므로 선효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병오에 덕자궁에 문후(예)하였다. 을사에 왕이 사람을 시켜 공주에게 청하여 철리를 머무르게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임자에 도첨의참리 유승이 졸하였다. 을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계를 번(서번) 승에게 받았다. 신궁 짓는 일을 파하였다. 교하기를 “이제부터 백료는 무릇 대소공사에 모두 장신(상신)하지 말고 재추를 좇아 상의하여 처결한 뒤에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6월 병진 삭에 태상왕 및 국왕과 공주가 번승에게 계를 받았다. 철리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정사에 원이 우승 아리회 홍중희 중서좌승 양염룡을 보내 왔는데 무릇 전(역마)을 탄(승) 자가 100여명이었다. 조인규를 문초하고 드디어 원경으로 더불어 감찰사에 가서 새로 정한 관제를 거두었다. 무오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고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기미에 다시 철리를 보내어 원에 가게 하였다. 첨의중찬 정가신이 졸하였다. 계해에 다시 승지방28)을 두고 전 승지 장석 홍선 전승으로 이(승지)를 삼았다. 갑자에 양염룡이 생성고를 봉쇄하였는데 이것이 곧 왕부의 진보를 갊는 곳이었다. 을축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였다. 마팔국 왕자 패합리가 사신을 보내와 은사모와 금수수박 침향 5근 13량 토포 2필을 바쳤다. 이에 앞서 왕이 채인규의 딸을 승상 상가에게 보내었더니 상가가 주살되매 제가 채씨를 패합리에게 사하였다. 패합리가 그 국왕과 틈이 생겨 원에 와서 천주에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채씨의 록고로써 사신을 보내어 통하게 되었다. 무진에 태후가 첨추밀원사 홍군상과 첩목아불화를 보내왔다. 임신에 수녕궁에 행차하여 번승을 공양하고 주저를 불제하였다. 갑술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였다. 을해에 왕이 보살계를 받았다. 왕이 공주로 더불어 태상왕을 모시고 원사를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정축에 양염룡이 돌아가거늘 왕이 선의문외에서 전송하였다. 계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안평공주 탄일이므로 태상왕을 모시고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갑신에 천변이 자주 나타나므로 경죄는 석방하고 중죄는 1등을 감하였다. 7월 정해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덕자궁에 조알하였다. 철리가 원으로 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국왕과 공주를 8월에 입조하라고 명하였다. 신묘에 홍군상이 왕을 대내에서 향연하였다. 임진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고 익일에 공주와 함께 또 조알하니 홍군상이 설연하였다. 무술에 다시 관제를 고쳐 홍자번으로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조사를 삼고 인후로 중대광 첨의시랑 찬성사 판병조감찰사사를 삼고 금혼으로 첨의시랑찬성사 판민조사를 삼고 한희유로 수사공 중경유수 개성부윤 상의도첨의회의도감사를 삼고 차신으로 첨의찬성사 판의조사를 삼고 김지숙으로 첨의첨리 판공조사를 삼고 안향으로 첨의첨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를 삼고 이지저로 자정원사 지도첨의사를 삼고 최유엄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이혼으로 밀직사사 전조판서 집현전대학사 수국사를 삼고 정해로 지밀직사사 병조판서 보문각대학사를 삼고 유비로 지밀직사사 좌상시를 삼고 민지로 동지밀직사사 감찰대부 사림학사 승지를 삼고 원후으로 동지자정원사 민조판서를 삼고 원경으로 동지밀직사사 공조판서를 삼고 김변으로 동지자정원사 의조판서 동수국사를 삼고 허평으로 동지밀직사사 판봉상사사를 삼고 오인영으로 밀직부사 판위위사사를 삼고 민종유로 밀직부사 형조판서를 삼고 윤보로 밀직부사 성균대사성 수문전학사를 삼고 유복화로 밀직부사 판례빈사사를 삼고 벽경성으로 자정원부사 판대복사사를 삼고 김부윤으로 자정원부사 판사진사사를 삼아 다 상호군을 겸하게 하고 최참으로 자정원부사 우상시 사림학사 승지를 삼고 장석으로 자정원부사 중경유수 판외부사사 집현전학사를 삼고 유욱로 자정원부사 판내부사사를 삼고 박전지로 삼사좌사 사림학사 승지를 삼고 오한경으로 삼사우사 사림학사를 삼고 홍선으로 밀직사지신사 병조판서 지전조사를 삼고 홍자한으로 지감찰사사를 삼고 전승으로 좌부승지 판비서사사 보문각직학사를 삼고 이승휴로 판비서사사 숭문관학사를 삼고 금순으로 우승지 성균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를 삼고 이진으로 좌승지 비서윤 지병조사 사림학사를 삼고 권영으로 밀직사우승지 례빈윤 지공조사 사림시독학사를 삼았다. 기해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신효사에 행차하여 우란분재29)를 설하였다 계묘에 홍군상이 돌아갔다. 을사에 삼대장소에 행차하여 명하여 오대부경을 쓰게(사)하였다. 병오에 왕이 공주와 같이 안국사에 행차하여 수희를 관람하였다 경술에 왕이 공주와 같이 덕자궁에 조알하였다 계축에 왕이 덕자궁에 조알하였다. 8월 을묘 삭에 지밀직사사 정해를 보내니 행성에서도 또한 석말야선첩목아를 보내어 원에 가 성절을 하케 하였다 경신에 태상왕이 장군 최중경의 집에 이어하였다. 갑자에 원이 패로올 등을 보내와 왕과 공주의 입조를 재촉하였다. 유비로 판밀직사사를 삼고 박전지로 밀직부사 중경유수를 삼고 금순으로 삼사좌사를 삼고 허평으로 동지자정원사를 삼고 유복화로 밀직부사를 삼고 이승휴로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 승지를 삼아 잉하여 치사케 하였다. 무진에 안평공주를 추존하여 인명태후를 삼았다. 신미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원에 갈새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임신에 태상왕이 금교에서 전송할새 술이 취하매 사신 패로올이 제명으로써 국왕인을 취하여 일수왕에게 주니 이에 태상왕이 복위하고 왕은 원에 가서 숙위하기 무릇 10년이었다. 무종 인종이 룡잠30)하였을 때에 왕과 기와를 같이하여 밤 낮으로 서로 떠나지 않았다. 충렬왕 33년에 황질 애육려발력팔달태자와 우승상 답자한과 원사별불화가 왕으로 더불어 대책(임금을 세우는 일)을 정하여 회녕왕 해산을 맞아 세우려 할새 좌승상 아홀태와 평장 팔도마신 등이 안서왕 아난달을 받들어 난짓기를 꾀하거늘 태자가 그 꾀를 알고 하루 먼저 아홀태 등을 잡아서 대왕도자 원사별불화 및 왕으로 하여금 안죄하여 이를 베게하고 5월에 황전 회녕왕이 황제위에 나아가니 이를 무종이라 하였다. 34년 5월 무인에 원이 정책한 공으로써 심양왕을 봉하고 제하기를 “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부마 왕장은 세조의 외손이요 선조의 귀서로서 짐이 찬승하던 처음에 당하여 실로 익찬의 공에 참여하였도다. 선을 상하고 악을 벌하는 지공으로써 부에 효하고 군에 충하는 대절을 보전케 할 것이니 가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를 특수하고 심양왕을 진봉할 것이다.”하였고 또 중서성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케하고 김호부 옥대 칠보대 벽전금대 및 황금 500량 은 5000량을 사하였으며 황후 황태자도 또한 총대하여 사한 바 진보금기는 가히 이루다 헤아리지 못할만큼 되었다. 7월 기사에 충렬왕이 훙하였다. 신미에 첨의평리 김리용을 원에 보내어 상을 고하였다. 8월 을미에 시가의 장랑이 이룩되었다. 왕이 명하여 근시 다방을 파하였다. 임자에 왕이 원으로부터 와서 분상하는데 도상에서 밤길 걷기를(성행) 10여일만에 이에 이르렀다 먼저 빈전에 나아가서 입곡하고 전을 설하니 백관은 현관 소복으로써 시립하였다. 다음에 인명태후전에 나아가 제를 설하였다. 계축에 왕이 수녕궁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즉위의 의를 예습하였다. 정승 최유엄에게 옥대를 박경량 권한공 김지겸 최성지 이언충 등에게 정대를 사하였다. 갑인에 왕이 자포를 입고 관항도장을 강안전에 설하고 경령전에 나아가서 사위함을 고하고 드디어 승여를 타고 수녕궁에 이르러 즉위하고 군신의 조하를 받으니 반열의 차례는 우를 높여 문관은 서편 무관은 동편으로 하였다. 예가 끝나기 전에 하늘에서 큰 뇌전 우박이 내렸다. 이미 개이매 첨의사가 왕을 향연할제 제군 재신과 군관 홀적이 모두 백마를 바쳤다. 9월 병진에 수녕궁에 행차하니 첨의사가 왕을 향연하였다. 을축에 얼부의랑인 한중희를 궁문에서 매를 치니 사람들이 그 죄를 아지 못하였는데 이윽고 중희를 불러 위무하였다. 경오에 왕이 빈전에서 제하고 또 인명전에서 제하고 드디어 신효사에 행차하여 제를 위하여 축복하였다. 무인에 신효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왕륜사에 행차하니 주지 인조가 다를 올리고 뒤이어 육선을 올렸다. 기묘에 예문사백 오형 등에게 명하여 제궁과 내료궁의 명칭을 고치게 하고 또 궁주를 고쳐 옹주라 하였다. 임오에 룡화지에 행차하니 중호 김심이 왕을 향연하였다. 계미에 승니 2200여인을 수녕궁에서 공양하였다. 갑신에 백관이 왕의 탄일을 하할새 각각 다과를 바쳤는데 전의사는 미치지 못하였고 서운관은 리 1기 뿐이거늘 전의겸관 이언충과 서운제점 최성지에게 모두 은 1근을 징수하엿다 10월 정해에 또 승니를 수녕궁에서 공양하였다. 무자에 선부의 전주가 착오됨이 많으므로 전서에서 산랑까지 봉미를 추징하고 비로서 첨의재신으로 하여금 선부와 같이 정사를 의논케 하였다. 기축에 방을 부치기를 “왕륜사 주지 인조 룡암사 주지 용선 선암사 주지 약굉 및 최단 권한공 김지겸 김사원 최성지 환이 오현양 강방언 이진 강융 조통 조적 조석 최현 정자우 최중공 문점 이백겸을 제외한 남은 사람은 특소가 아니면 들어오지 못한다.”하고 또 승을 수녕궁에서 공양하였다. 고릉에 배알하고 복지가 불길하므로 땅을 상본 자(상지자)와 밀직부사로 치사한 강헌과 고찬성사 오윤부의 서 강미 및 외손 2인을 순군에 가두고 드디어 신릉에 행차하여 호작관과 공도들에게 주를 사하고 위로하였다. 비로소 5부로 하여금 호구를 점검케 하였다. 경인에 락랑군 김혼이 왕을 맞아 남산서재에서 향연하니 이에 재추승도가 날마다 진선하는데 다투어 호치를 극히 하였다. 신묘에 왕이 빈전에 제하고 드디어 수녕궁에 행차하니 심양로 사람들이 왕을 향연하였다. 계사에 왕이 빈전에 제하고 드디어 김문연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로 더불어 상대하기를 시간이 넘게 하였다. 비는 문연의 누이였다. 갑오에 대행왕(붕어한 충렬왕)의 수용(진영)이 원으로부터 오거늘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출영하여 빈전에 봉안하고 익일에 왕이 빈전에 제하고 대감할제 세 번 림곡하며 슬픔을 다하니 백관은 모두 호소(흰옷)를 입고 조시는 정파되었다. 이날에 정안군 허종의 집에 유숙하였다. 병신에 유사가 대행왕의 익을 올리기로 의논하니 왕이 불가타하여 말하기를 “상국이 있으니 내가 또한 청하겠노라 죽책과 옥책이 또한 예에 합당한 것인가”라고 하니 이에 다만 호를 올려 순성수정상승대왕이라 하였다. 정유에 경릉에 장례할새 령구가 처음 출발하매 왕은 쇠마질로 손에 향로를 받들고 보행으로 십천교에 이르러 이에 견여(가마)를 타고 산릉에 이르러 장례를 마치고 크게 림곡하고 이에 돌아왔는 바 선세에 일찍 행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드디어 석복도장을 서보통에서 설하고 수용(진영)을 혼전에 봉안하고 호를 령진전이라 하였다. 무술에 왕이 정사를 보았(시)다. 기해에 원의 황태자가 사신을 보내 즉위를 하하였다. 경자에 왕이 묘련사에 행차하여 인명태후의 진영에 배알하였다. 제도 무농사 이후 륙희지 최백륜 등을 불러 효유하기를 “내가 전농사를 둔 것은 한의 상평창을 본받아 백성으로 더불어 곡물을 출납(조적)하여 그 급한 것을 구조코자 함이요 사를 위함은 아니로다 또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않은 것이니 만약 완급(위급)이 있을 때에 창졸히 백성에게 색출케 되면 백성의 원망이 없이 일을 이루고자 한들 될 수 있으리오 무릇 백성이 호강한 집에 숨어 있는 자는 날로 더욱 부일하고 외토리로 남아 있는 백성만 부감에 곤궁케 되니 이는 오로지 봉사자들이 사정에 끌려 공을 배반한 소치인 것이다. 내가 이를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이니 너희들은 각각 나의 뜻을 체득하여 그 폐단을 통절히 개혁하되 그 좇지 아니하는 자가 있거던 그 범한 바에 따라 처결한 연후에 첨의부에 신보토록 하라”고 하였다. 신축에 친히 소염도장을 외원에서 설하였다. 갑진에 재신 원관이 왕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병오에 정안군 허종의 집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이날에 고 평양공 현의 처 허씨를 불러들(납)였다. 정미에 왕이 신효사에 행차하여 대행왕의 백일재를 설하였다. 기유에 김문연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를 증(음통)하고 얼마 안되어 숙비로 진봉하였다. 신해에 원이 사신을 보내와 조하기를 “너희 동번은 대대로 신직을 지켜 아들이 부작을 이음은 전제에 구존되어 있도다. 근자에 고려왕 왕거의 유주에도 그 아들 왕장으로 습직케 하여지이다고 하였으니 짐이 생각건대 왕장은 친으론 성조의 생(외손)이요 의척으론 종희의 서(부)인지라 좋은 꾀와 훌륭한 공적은 모두 칭찬함직하도다 오랫동안 궐정에 시종하여 충력을 고루 다하였도다 특히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국왕을 제수하고 개부의동삼사 태자태사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은 의전케 하노니 이제부터 시작하여 더욱 외천의 경계를 삼가고 사상의 정성을 힘써 닦을 것이며 군관(공)과 서직은 각각 상규를 지키고 사서와 승려 도사(치황)는 그 업을 잃음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제 및 태후가 사신을 보내와 왕을 향연하고 을묘에 황태자가 보낸 사신이 또 왕을 향연하였다. 11월 기미에 원의 사신을 향연하고 은병 100구 저포 200필 릉 100여필을 사하였다. 갑자에 명하여 팔관회를 정지시켰다. 신미에 왕이 김문연의 집에 있으니 백관이 리현신궁에 모였는지라 왕이 하교하기를 “처음 조왕이 삼한을 통합함으로부터 신복하여 술직한 것이 오래도다. 우리 부왕에 미쳐 상국의 대우가 전과 매우 달라 리강함을 얻어 받들고 총광을 후히 입었으며 나(고)역시 입시하여 이어(계) 부마가 되어 삼조(세조․무종․성종)를 겪어 모심(역위)이 지금 10유 9년이로다.
더구나 년전에 황제 황태후 황태자를 우러러 의지하여 공을 일으키고(분용) 일 (황제의 사업)을 넓혀(분용희재)35) 사해를 숙청하였으며 본국에 이르러서도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또한 모두 소탕하여 내외가 안녕케 되었도다. 나(고)는 이에 부왕께 귀근코자 청하였더니 상천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조금 연명함을 얻지 못하고 극일로 분상하게 되니 어찌 애처로움이 미치리오. 황제께서 나(자 소자)를 불쌍히 여기사 이에 신종 계습할 명을 허하시고 뒤이어 사신을 보내어 이어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국왕을 제수하고 개부의동삼사 부마도위 심양왕은 전에 의케 되었도다. 아아 성은이 중대하니 왕위를 비우기 어려우며 선부의 유훈을 받들고 신민의 추대함에 못이겨 부덕으로써 위에 나아가게 되니 위태로워(긍긍업업) 감히 겨를이 없노라. 돌이켜 생각건대 조왕이 창업한 초기에는 법도가 모두 갖추어졌는데 내려와 후세에 미쳐서는 점점 쇠퇴(릉이)36)하게 되었고 더구나 또 근자에는 간신이 뜻을 얻어 국권을 우롱하고 강기를 떨어뜨려서 공사의 토지와 백성이 함께 탈취되어 인민은 먹기가 곤란하고 관의 창고는 비었(공허)으며 사문은 부가 넘치니 나(고)는 이를 심히 통탄하노라. 이로써 사인을 가려 보내어 민전을 점수하고 조부를 고르게 정하여 예전의 방식을 따르려 하노니 이것은 대개 1은 국용을 주비케 함이요, 1은 봉록을 넉넉히 주게 함이요, 1은 백성의 산업을 풍족케 함이로다. 하물며 사목37)의 처음인지라 마땅히 이택을 가할 것이니 지대 원년 10월 16일 려명으로부터 이전의 불충 불효와 고의로 살인 한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사할 것이다. 1은 조왕 이강으로 력대조선에게는 마땅히 덕호를 가상할 것이다. 1은 성황과 국내명산대천으로 사전에 기재된 것은 함께 마땅히 호를 가할 것이다. 1은 원구39) 적전40) 사직은 이 국가의 복을 구하는 곳이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재주를 세우고 제선의 설비를 마땅히 정결하게 할 것이다. 1은 침원(릉원)과 조종의 분묘는 힘써 숭경 하여야 할 것인데 근래에 유사가 태만하여 기울어지고 퇴훼된 것이 있으니 지금 전의사를 특설하고 오로지 이 임무를 맡겨 그 침원은 영구를 일신하게 하고 모든 분묘는 다시 완비를 가하고 아울러 간수하는 인호를 두어 초채와 방화를 금할 것이다. 1은 대성지성문선왕(공자)은 백대의 스승인지라 춘추의 석전과 삭망의 제향에 모든 선비들이 취회하여 마땅히 정결을 가할 것이다. 1은 효자 순손과 절부 열녀는 문려를 정표하고 분직을 가하도록 허할 것이다. 1은 지리국사인 도선과 유종인 홍유후 벽총 문창후 최치원에게는 함께 마땅히 호를 가할 것이다. 1은 모든 아문(관청)은 수시로 고쳐서 일체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어늘 하물며 본국은 관이 많이 허설되어 명목은 있으되 실지가 적으니 이제 시기의 편리를 참작하여 혹은 병합하고 혹은 생감하여 마땅히 근각을 더하여 각기 저의 직책을 봉행할 것이다. 1은 앞서 지원 12년에 세조황제가 아독인을 보내와 성지를 전함을 흠몽하였고 또 지원 28년에는 내가 정가신 유청신 등과 더불어 자단전 안에 나아가 친히 세조황제의 성지를 받들었는데 말씀하기를 “동성이 통혼할 수 없음은 천하의 통리어늘 하물며 너희 나라는 문자를 알고 부자(공자)의 도를 행하니 응당 동성을 요치 아니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수구가 유청신에게 말을 전하였고 또 정가신에게도 역언을 전하였으나 본국에서는 그대로 지내와 갑자기 개혁치 못하였도다. 이제로부터 만약 종친으로서 동성에 장가드는 자는 성지를 위배한 자로써 논단할 것이니 마땅히 누세재상의 딸을 취하여 실(실인)을 삼을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종세(왕족)의 딸과 혼인함을 청허할 것이다. 만약 가세가 비미하면 차한에 불재한다. 신라왕손 김혼의 일가는 또한 순경태후 숙백의 종이 되는 터이며 언양김씨 일종과 정안임태후 일종과 경원이태후와 안산김태후와 철원최씨 해주최씨 공암허씨 평강채씨 청주이씨 당성홍씨 황려민씨 횡천조씨 파평윤씨 평양조씨는 다 루대의 공신 재상의 종족이니 가히 대대로 혼인할 것이다. 남자는 종친의 딸에게 장가가고(상) 딸은 종비가 됨직하다. 문 무 량반의 집에서는 동성을 취하지 못하며 외가 사촌은 또한 구혼을 청허한다. 1은 지원 27년(충렬왕 16년)으로부터 대덕원년(충렬왕 23년)까지 대덕 2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종한 신료는 고로가 많았으니 그 공을 가히 상함직하니 마땅히 별록하여 서용할 것이다. 1은 대덕 3년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짓고자 하는데 만호 홀자알와 김흔 등이 먼저 그 꾀를 알고 능히 난을 바로잡은 바가 있으매 그 공을 가히 상함직하니 마땅히 별록하여 서용할 것이다. 1은 대덕 7년 춘에 간신과 아첨하는 소신이 행재소인 향수원에 이르러 나(고)에게 불리한 짓을 하려 꾀하거늘 평리 박경량 유복화 홍선 허유전 이연송 강융 이진 이#(유) 조통 등이 의를 떨쳐 생명을 잊고 힘써 간모를 막았으니 충근이 특이하도다. 박경량은 마땅히 별록하여 서용하고 그 친자와 당형제(사촌)자매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양민이 될 것이며 유복화 홍선 허유전 이연송 강융 이진 이#(유) 조통 등은 더욱 서용을 가하고 자손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1은 대덕 9년 동에 본국 재상 홍자심 최유엄 유청신 김심 김리용 등은 종묘 사직을 편안토록 도모하여 의를 중히 하고 몸은 가볍게 여겨 함께 조정에 나아가(부) 리해를 논열하여 나(고)를 위하여 돌아오기를 청하였으니 그 공이 특수한지라 마땅히 별록하여 서용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날에 비판을 내리니 검교의 직이 더욱 번다하였다. 또 전농사에 하지하기를 “1은 본사의 저축한 미곡은 다만 흉년에 대비할 따름인데 간혹 무식한 사람이 가탁으로 구하여(모구) 받아가려 하니 허비(비)됨이 적지 아니한지라 그 전후의 내린 바 사미의 균지를 다 봉해 두고 급여치 말라. 1은 사급할 전조가 이미(전농사에) 들어온 것은 비록 환급하라는 균지가 있더라도 들어(청)주지 말라 1은 호세한 집이 처음에 사급으로써 점적한 토지를 그대로 조업이라고 칭하는 자와 그 족정이 본수에 넘는 자는 각도의 무농사로 하여금 다 타산하여 본사에 납조토록 하라. 1은 경기8현의 록과(전)와 구분전외의 그 나머지 전조는 빨리 수축하라 1은 동서의 적창은 선군과 기인47) 각 100명 및 제색의 장인을 사용하여 편의에 따라 영조하라. 1은 농원창 동적창서적창은 오위 대정의 실직자 90명으로 하여금 날을 번갈아 수직케하고 민사가 있으면 마땅히 서용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신에 왕이 원에 가는데 제안대군 숙을 명하여 정동성사를 권서(서리)케 하였다. 윤월 임진에 원이 직성사인 첩가알를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12월 무오에 평리 조련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는데 왕의 명으로 세대편년절요와 김경록을 가지고 가 바쳤다. 계미에 혐명(왕의 명과 동음의 자)을 금하여 장주를 고쳐 련주로 하고 창선을 흥선으로하고 장덕을 흥덕으로 하고 장산을 경산으로 하고 장도를 녕원으로 하고 장항사를 홍제사로 하고 아울러 #(장) 장 2자를 금하였다.
기유 원년 춘 정월 을유 삭에 왕이 원에 있었다. 무신에 검교평리 김원상을 원에 보내어 황태자의 탄일을 하하였다. 2월 을묘에 왕이 지를 전하여 각염법을 세웠다. 무인에 명하여 충헌왕49)의 실록을 찬케 하였다. 3월 계사에 검교중호 배정과 내부령 강융에게 명하여 강안 연경 2궁을 중수케 하는데 중외의 공사 옥재를 모두 궁에서 거두어 영구에 제공케 하니 조야가 원망하므로 뒤이어 강안궁의 역사만은 파하였으나 연경궁의 상량에 미쳐서는 상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백관이 모두 축하로서 은 견 저포로 폐백을 삼았으며 6품 이상을 향연하였다. 전우와 랑무가 무릇 410영인 바 이는 배정의 지화한 것이었다. 무술에 리현신궁을 헐었다. 갑진에 원의 선정원이 사람을 보내와 조선을 독촉하였는데 이때에 황태후가 불사를 짓고자 하므로 홍복원의 손자 중희와 중경 등이 주하기를 “백두산에는 좋은 재목이 많으니 만약 심양군 2000을 발하여 이를 베어 압록강에 떠내려보내고 고려로 하여금 배에 실어 수송케 하면 편리하리라.”하니 이에 료양성의 선사 유현 등을 보내와 본국으로 하여금 배 100소를 짓고 미 3000석을 수송케 하니 그 폐는 말할 수 없었다. 이때에 2궁의 역사가 한창 일어났고 조선하는 일이 또한 급하니 서해 교주 양광의 백성이 더욱 그 해를 받았다. 정미에 전지하기를 “유서(귀양)한 사람은 다 놓아보내되 오직 오연 양린 진변에 옮겨두라. 전자에 각 아문(관청)을 합하고 감할 때에 사대부가 무고히 실직하였으며 혹은 공로가 있으되 강등된 자가 많았도다. 내가 이를 생각하여 잊지 않노니 가히 전대로 일을 보게 할 것이며 또 신설한 아문 관리는 각각 그 직무에 성근하여 폐이함이 없도록 하고 또 전에 고친 바 근시다방과 3관 5군은 모두 회복케하라 ”고 하니 이때에 홍중희가 관호를 함부로 고쳤다하여 중서성에 호소(소)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무신에 대사헌 조서가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참리 김심으로 고려도원사를 삼고 (조)서로 부원사를 삼았다. 을유에 원이 존호를 받았음으로 써 환자 왕가노를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이달에 원태후가 오대산에 행차하매 왕이 호종하였다. 하 4월 갑자에 우군천호 김섬과 좌군천호 정기가 배 50소를 거느리고 예성강을 출발하였는데 선정원에서 보낸 바 사신을 감송함이었다. 기사에 원의 추밀원이 수군천호 상중신을 보내와 조선을 독려하였다. 신미에 최유엄으로 수첨의정승 감춘추관사 대녕군을 삼고 인후로 찬성사 평양군을 삼고 유청신 박의 김심으로 찬성사를 삼고 권영 김리용으로 평리를 삼고 김태현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김문연으로 판밀직사사를 삼고 원관으로 밀직사를 삼고 조서로 지밀직사사를 삼고 이호 조련 정지연으로 동지밀직사사를 삼고 김원상 권한공 이연송 이공보 박려로 밀직부사를 삼고 송영 조운경으로 삼사우좌사를 삼으니 이에서 밀직과 중방이 모두 복구되었다. 정축에 비를 원구에서 빌었다. 기묘에 오정규를 원에 보내어 존호받음을 하하고 정승 최유엄 등이 인하여 왕에게 전을 올려 환국하기를 청하여 이르기를 “명이 엄중하게 징조(조정에 불러들임)하매 일찍이 운룡의 제회에 왕부하였으며 직이 거수에 얽매이니 어수51)의 즐거움을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따라서 모심을 얻지 못하매 한갖 기다림만 더할 뿐입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군신의 중한 것은 고금이 같은 것이온 바 그 세를 보면 비록 당과 폐의 고비이오나 몸에 비하면 고굉처럼 좌우(좌우)함과 같사와 반드시 서로 휴척(고악)에 자뢰할 것이오 진실로 잠시(사수)라도 광폐하기가 어렵나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국왕전하는 인덕이 극히 너그럽고 신모가 과단하여 천(천정)을 모시기 10재(년)나 되는데 시종 일절로 근왕하였고 모든 살아있는(박지) 백성(군려)은 조석으로 마음을 한가지로하여 우리 임금을 기다리나이다(혜아) 마침 성세의 제우를 만나 큰 공을 확립하고 왕해의 륜음을 받들어 래소의 여망을 위로하니 사녕이 화하여 충정이 되어 옛 염오가 모두 새로워졌고 신음하던 것이 변하여 구가가 되어 삶(생)이 희망이 있나이다. 좌석이 아직 따뜻할 겨를도 없는데 조서가 문득 환가를 최촉하니 신등에게 탁부함이 가볍지 아니한데 논사가 무장하였나이다.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니 어찌 채중의 보합(#봉)을 알아차릴 수가 있으며 길이 4000(리)을 격하였으며 진신처럼 목어를 막아줄 수가 없나이다. 거의 피차에 도움이 없으니 다만 스스로 항상 부끄러워 하나이다. 하물며 이제 지응하는 것이 모두 번거로운데 또한 품승할 곳이 없으니 삼가 창생을 거느리고 첨앙하매 교일이 조림하는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국왕전하는 군위를 오래 비우지 못할 것을 아시고 민정이 어디던 앙대하여야 할 급한 형편을 량찰하시와 속히 행차를 돌리시와 갈월의 련모하는 마음을 수보(상)케 하사 더욱 예은을 입어 길이 선조의 사리를 보존하소서”하였다. 그때에 제와 및 황후 황태자가 왕을 심히 총우하므로 왕이 받아 들이지(납) 아니하였다. 신사에 원이 사신을 보내와 불경의 용지를 구하였다. 6월 무진에 첨의평리 조련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였다. 추 7월 신사에 상락공 김흔이 졸하였다. 기축에 랑장 송시가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명하여 배 만드는 것과 쌀 운반을 감하여 주었다. 임인에 왕이 내료랑장 신언경을 보내어 전지하기를 “상승왕(돌아가신 왕 즉 충렬왕)의 익를 청하는 글(표)을 밀직부사로 치사한 오량우를 시켜 짓게 하고 이제부터는 견관(재직의 관)의 봉급을 주어 표전을 제찬하는 것은 일체 이에 맡기라”고 하였다. 기유에 원이 환자 이삼진을 보내와 탐라의 우육 바치는 것을 파하였다. 8월 신해에 왕이 명하여 부인으로 하여금 선의문안에 있는 빈 땅에 나아가 길을 따라 와옥을 짓게 하고 또 명하여 5부의 민가는 모두 기와를 덮게 하고 사요(사영의 도와 가마)를 금하지 말게 하였다. 9월 을미에 얼부60)가 왕명으로 써 주군의 노비 25명과 무릇 사람이 서로 쟁탈하는 노비로서 양조가 부당하여 가히 한편에 돌리지 못할 자를 뽑아 모두 왕소에 보내었다. 경자에 려수하였다. 신축에 원이 백성을 편케 하는 조화(조례)으로서 천하에 조하였는데 행중서성을 고쳐 행상서성으로 하고 홀도답아 등을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갑진에 왕이 명하여 승 10000을 수녕궁에서 공양하게 하고 드디어 그 궁을 내놓아(사) 절을 삼고 모후의 복을 추기코자 액을 사하여 민천이라 하니 종신이 다 그뜻에 아첨하여 간하는 자가 없었다. 동 10월 임술에 대장군 윤길보를 원에 보내어 동녀와 엄인(환관)을 바쳤다. 신미에 원이 비로소 지대은초(지대는 원의 년호, 은초는 교초 즉 저화)를 씀으로써 천하에 조할새 행성랑중 흔두를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기묘에 도평의사가 왕명으로써 사헌규정 김성고와 도평의록사 김록을 경상도에 규정 최여와 록사 오석규를 전라도에 규정 려#(추)와 록사 이석린을 충청도에 규정 조일과 록사 안전을 교주도에 규정 김문정과 록사 송록송을 서해도에 분견하여 제찰과 수령들의 부정(간)과 탐리를 렴문(조사)케 하였다. 11월 무자에 원이 사신을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무신에 평리권부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2월 갑인에 사신을 원에 보내어 수유(유제의 유)를 바쳤다. 신유에 민적으로 평양윤을 삼고 김이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병인에 려수하였다. 무인에 원이 태조(성길사한)와 예종(시뢰)에게 존호를 가상하고 환자 강우를 보내와 조서를 반포하였다.
경술 2년 춘 정월 기묘 삭에 왕이 원에 있었다. 무자에 얼부(형부)전서로 치사한 이행검이 졸하였다. 기축에 침원(릉침)에 일이(제사) 있었는데 유사가 생을 죽이지 않고자 하거늘 사헌규정 복기가 불가하다하여 말하기를 “대저 제는 기를 숭상(상)하는 것이므로 먼저 생(제물로 쓰는 가축)을 맞아 뜰에서 죽이는 것은 신을 내리게 하는 것이니 만약 산 생으로써 뢰(제물)를 하면 어찌 예에 합당하리오”하니 이에 잡아서 (재살) 천하였다. 이달에 왕이 세자에게 전위하고자하여 비밀히 사람으로 하여금 표를 양학사에게 짓게 하였더니 뒤이어 종신의 저지한 바 되어 이에 중지하였다.
2월 신해에 밀직 이공보를 원에 보내어 황태자의 탄일을 하하였다. 하 5월 갑신에 원의 승상 탈탈이 사신을 보내와 엄인(환자)과 동녀를 구하였다. 신묘에 제가 심양로의 관리에게 명하여 심양을 격월하여 주청하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을사에 왕이 세자감과 그 종자 김중의 등을 죽였다. 6월 무신에 원이 황후를 책봉함으로써 천하에 조하는데 팔찰 등을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임자에 원이 환자 방신우를 보내와 김자로 장경쓰는 것을 감독하는데 황태후가 김박(박) 60여정(편)을 보냈다. 계축에 대호군 문천좌를 원에 보내어 응을 바쳤다. 계해에 려수하였다. 정묘에 내료평리로 치사한 조원서를 보내어 성절을 하하였다. 추 7월 경진에 원이 보탑실련공주를 봉하여 한국장공주를 삼았다. 무자에 상승왕(충렬왕)의 수용을 명인전에 봉안하였다. 갑오에 경계(죄)를 놓아주었다. 을미에 원이 제를 내리어 왕의 3대를 추증하였는데 제에 이르기를 “옛날 우리 태조황제가 막북에서 분거할 때 동으로 서로 깃발을 날리고 남복을 분치하여 덕을 나타내고 위를 보이니 향하는 곳마다 신첩이 되었는데 그때에 삼한은 국경이 서로 연하여 천과(황군)가 한 번 다다르매 개부의동삼사 태자태사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 정동행상서성 우승상 고려국왕 왕장의 증조인 고려국왕 왕철(고종)이 깊이 기운을 살피고 나라를 들어 내향하니 사기의 옴(래)이 털끝만한 가극도 없었던 바(간불용발) 단의하고 명식과 원려를 지니지 아니하였던들 누가 능히 이와같이 하였으리오. 또 마침 료민의 여얼이 참월하게 도서에 절거하여 미친 듯이 함부로 군사를 희롱하여 날뛰며 빌려 살거늘 거듭 번거롭게 장수를 명하여 치게 하매 그때 빙설의 얼음추위(호한)에 군사의 궤향이 불통하였는데 철이 이에 능히 공급하여 실려보내니 군사들이 모두 배부르게 먹었으며 군사에 따른 기장을 자조하여 궐함이 없게하고 다시 군사를 가발(제사)하여 가서 잔구를 섬멸하였으니 그 기업을 창개함에 있어 왕실에 공을 세웠으며 백성을 보존하고 나라를 흥케하는데 더불어 비할 바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국토를 지키고 천년을 향수한 것이 거의 4기(12세가1기)나 되었으며 그 혜택이 후손에 미치고 경사가 길이 흘러 자와 손에 전하였으며 우리나라와 연척이 되었으니 그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이는 마땅히 상작에 추숭하고 인하여 가명64)을 바꿀것이라 혼이 알음이 있으면 이 이수(특별한 은총과 예우)를 받을 지니 가히 돈신명의 보절정량 제미익순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 익 충헌을 증하노라. 덕을 높이고 공을 갚으매 법은 추영하는 식전을 들(거)것이오. 나라를 나누고 벼슬(작)을 베풀매 은혜는 처(내)에 미치는 전장을 나누노니 나의 구훈을 갚아(수) 이 현호를 같이 하노라.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증조모 류씨는 전방의 령족으로 고문에 작배하여 마침 황조가 흥륭하매 명번과 함께 신부하였도다. 명현의 화한 바에 정신하여 기울어짐이 없으며 아들에게 전하여 손자에 이르기까지 부귀를 극히 하였도다. 삼한에 나라를 보전하여 위는 이성의 후왕과 같고 5 등의 분(#)봉에 이름은 과군의 종실에 버금(아)하도다. 드디어 수은을 새롭게하여 써 숙령을 위로할 것으로서 가히 고려왕비를 추봉할 것이다. 홍유컨대 우리 조상은 천이 지용을 주어 만방을 바르게 하였도다. 이에 그대의 집을 돌보아주니 대대로 충정을 돈독히하여 성적이 있었도다. 대개 뿌리가 깊으면 끝이 무성하고 그 덕이 후한 자는 빛이 흐르는 것이다.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조인 고 고려국왕 왕?은 조훈을 공경히하여 의방을 향하고 몸을 신측하여 순도의 길(적길)을 누렸도다. 우아한 문풍(유아)을 간직하여 재간과 모유(재유)를 떨쳐 가다듬었도다. 처음에 부명을 친승하여 토물(토의)로써 입공하더니 마침 환숙(원의 헌종의 익)이 서으로 천요(사천변지)에 순행하고 세황(원의 세조)이 남으로 강연(양자강변 즉 무창등지를 가리킴)를 진무할제 빨리 행리의 통함을 기하였으니 어찌 세월의 바뀜을 근심하리오. 길(도)이 어렵고 길매 내홍이 인하여 내환(가간)을 꾸며내고 호령(호환)이 펴지매 도로 들어가 뒤이어 주접에 응(수)케 되었도다. 중통(원세조의 년호)의 풍운이 이에 열려 삼한의 강우에 거듭 다달았도다. 종용함은 반드시 사기에 맞고 #(점)시도 (조차) 예헌을 잊지 아니하며 먼저 명정에 볼모(질)를 보냄은 총사의 량을 오게함이 있었다. 리강(공주의 하가)으로 친의를 펴매 은악을 보임이 타성에 특수하였고 복근하여 주를 높이매 정성바침이 더욱 중천에 공하였도다. 불혜(패역)를 치매 여러번 선도가 되었고 봉조하기를 부지런히 하며 상기를 잃지 아니하였도다. 손자가 이어 황희에 장가(상)가매 국가는 현량한 보필에 (석보) 자하였도다. 하염이 있고 지킴이 있으매 석일에 감제의 공이 많았고 말이 성하고 공하매 이에 필해의 망이 나타나도다. 어찌 옛 철인(구철)을 정표하여서 가칭을 빛내지 아니하리오. 대사가 원병이 되었으매 작으로써 그 귀를 구하고 군자가 복되매(군자여지) 제(주명)로써 그 현을 상하리로다. 왕훈을 따라 또한 정표의 전(휘이)을 들(거)것이니 아아 갚는 것이 아니라 길이 화호를 위함이로다. 은혜는 새서(란검)를 따라 겹쳐 통하니 오직(덕이) 있음으로 이어(사-사)지는 것으로(유유지시이사지) 세계는 압강(압록강)으로 더불어 함께 장원하리로다. 가히 단성봉화 보경량절 강제좌리공신 대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 익 충경을 증할 것이다. 령덕을 전인에 밝히매 작이 써 삼세에 높았고 큰 복을 왕모에 받았으매(수개복우왕모) 은이 특히 재전에 많았도다.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조모 김씨는 숙신이 그 용의요 유가를 본받아 동번에서 짝을 짓고 북궐(제실)에 인을 연하였도다. 잠규(의풍)를 떨어뜨리지 아니하매 공은 무공의 부자에 있고 친히 관궤를 받들매 예는 왕씨의 구고와 같도다 일방으론 #야의 근을 나타내고 일방으론 규문의 숙의를 보이었다. 사자가 귀서가 되었는데 하물며 현손까지 두었음에라 후습(순습)을 청하는 소가 들려(문)오니 혁혁한 미호와 법식(휘이)이 함께 거행되니 봉제의 란검이오. 적불의 어헌이로다. 아아 중한 것은 전가하는 것보다 더 중함이 없으매 함이의 훈이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은 석호(미호를 주는 것)하는 것보다 더 영화로운 것이 없으매 가서 가수의 장을 공경히 하라. 가히 고려왕비에 추봉할 것이다. 짐이 보건대 이제 천하에 민지(생민과 사직)를 두고 왕된 자는 오직 이 삼한인 바 조종에 미쳐 신속한 것이 거의 백세나 되었도다. 그 부가 개경하니 아들이 다시 긍파 하였도다. 나를 구라 하면 나는 생이라 이르(위)나니 이미 훈으로써 친하매 마땅히 귀하고 또 부할 것이다. 예는 능히 사대를 앞세워야 할 것이오. 전(식)은 가히 추숭을 따르게 할 것이다.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고인 순성수정 추충선력 정원보절공신 태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 왕거는 효를 옮겨 충을 하고 위를 바꾸어 혜로써 하였도다. 예악과 형정을 닦음으로 전장과 문물이 다 빛났도다. 오직 대유를 경기하여 소심으로써 도왔도다. 처음에 세자로서 이미 제녀가 리강(강가)되었고 곧 왕(위)을 사케 하니 공후의 자손이 그 처음을 회복한 것이(공손지복시) 아니랴. 때로 그 방물 바침(공)을 파하니 진실로 종친에게 세사함과 같도다. 집정(균병)하매 동정(일본정벌)으로써 책임지고 남면에 전침하기를 기하였도다. 반왕을 쫓아 료수에 연신하고 기병을 내어 태산으로 써 란을 누르듯 하니 싸우는 발꿈치(종)가 아직 돌려지지 아니한데 역적의 머리가 이미 바쳐졌도다. 위에 거한지 아직 3기(1기가 12년)가 차지 못하였으되 향년이 실로 칠순이 지냈으니 모두 금대에 희유한 중수라 일컫도다. 더욱 그 아들이 착함(선)을 닮았으니 (식곡지시사) 곧 이 사람은 죽어도 잊혀(망)지지 아니하리라. 관 계로 나아가니 사원에 까지 이르러 극하였도다. 대개 이미 현토의 묘에 봉하니 창발(발해)로써 옷깃(금) 삼음을 표하였도다. 어찌 반드시 백마를 죽여 써 맹세하리오. 황하가 띠와 같기(황하지여대)90)를 맹세하였도다. 바라건대 정혼은 휼장(휼예의 전장)을 누릴 것이 가히 순성수정 추충선력 정원보절 인량홍화 봉경공신 대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 익 충렬을 증할 것이다. 삼한으로 나라를 삼아 5리(5대)91)에 이미 왕하였으니 비록 동해의 가에 거하나 실로 남면(천자)의 받들음(봉)을 받았도다. 그 선왕이 태조에 유공함으로 말미암아 제실에 연인함을 허하였도다. 리녀(안평공주)가 세황께 총애를 받았으므로 공궁(공주의 궁)에 나아가서 초례토록 명하였도다. 바야흐로 청헌의 도리가 무르녹더니 별안간 백로가 겸가(갈대)에 잦아지(희)도다.(아희백로어겸가)길이 의친(지친)을 생각하여서 휼전을 륭성하게 하노라.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비인 황고 안평공주 고려왕비는 곤액(후궁)에 발상하여 천황(황족)으로 분파하였도다. 순비 등비의 소명으로 고공단부(주의 태왕)의 강녀가 되었도다. %덕(배우의 덕)에 착하여 차복을 그 부가에 자랑하지 않고 기쁘게 어진 아들을 낳아서 모토(봉토)는 이미 그의 부복(직)을 이었으니 가히 처도의 시종을 완전히 하였도다. 진실로 탕목인 안평(산동의 지명)을 따라 넓게 대봉에 승진치 아니하면 어찌 존속을 들추어내는 것이 되리오. 아아 그 나라로부터 북궐(제거)까지가 무릇(최) 길(도리)이 5000(리)인데 근전을 동진에 옮기니 모두 산하가 12로다. 명령이 가히 미치(작)거던 수보를 받을 것으로서 가히 황고제국대장공주 고려왕비를 추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국가에서는 비록 송 요 금의 정삭98)을 썼(용)으나 력대의 익호는 모두 종이라 칭하였더니 원을 섬긴 이래로 명분이 더욱 엄하여 옛 한의 제후가 다 한을 좇아 익를 얻었으므로 왕이 상승왕의 존호를 표청하고 또 고 원 2왕의 추익를 청하니 조하여 이를 청종하였다. 기해에 첨의찬성사로 치사한 민훤이 졸하였다. 계묘에 세자의 상이 원으로부터 왔다. 8월 무신에 찬성사 유청신으로 첨의정승을 삼았다. 병진에 여러 궁사와 주군의 호를 고쳤다. 기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진에 세자 감을 성남에 장사하였다. 9월 기묘에 원이 녕왕을 아국에 유배하였는데 녕왕은 세조의 서자로 모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그 가속 50여인과 더불어 함께 왔다. 을유에 숙으로 제안부원대군을 삼고 용으로 강양부원대군을 삼고 후로 단양부원대군을 삼고 유로 함녕부원대군을 삼아 모두 계를 삼중대광으로 올리고 훈으로 연덕군을 삼고 간으로 화의군을 삼고 림으로 익양군을 삼고 회로 통의군을 삼고 숙으로 순정군을 삼고 정으로 회인군을 삼고 규로 보녕군을 삼아 모두 계를 중대광으로 올리고 우 관 순 #(유) 리 거 구 구로 모두 원윤을 삼고 기 희 수 완택으로 정윤을 삼고 최유엄으로 수첨의정승대녕군을 삼고 김혼으로 판삼사사 계림군을 삼고 유청신을 내려(강) 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삼고 배정으로 찬성사 완산군을 삼고 김심으로 밀직사 북평군을 삼고 박의 권부 이호로 모두 찬성사를 삼고 홍선 김태현으로 삼사우좌사를 삼고 박경량 김문연으로 첨의평리를 삼고 조서 조련으로 지밀직사사를 삼고 채#(오) 이공보 권한공으로 동지밀직사사를 삼고 박려 권준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한악으로 우대언을 삼고 곽원진으로 좌대언을 삼고 홍수로 우부대언을 삼고 조위로 좌부대언을 삼고 홍규로 익성군을 삼고 허숭으로 양천군을 삼고 이대순으로 태안부원군을 삼고 전독만첩고사로 녕인군을 삼고 김역자올탑으로 악안군을 삼고 전철리로 함창군을 삼고 이숙으로 평창군을 삼고 방신우로 중모군을 삼고 박아불화로 계양군을 삼고 이백첩목아로 성산군을 삼고 유창록으로 효녕군을 삼고 최흔장으로 금성군을 삼고 정매철로 하동군을 삼고 이신으로 녕월군을 삼고 권고리로 봉화군을 삼고 임백안독고사로 비인군을 삼고 이삼진으로 회음군을 삼고 최단로 첨의정승 경원군 행계림윤을 삼고 김윤으로 검교평리충주목사를 삼고 송영으로 검교평리 제주목사를 삼고 장선으로 검교평리 광주목사를 삼으니 재상이 목사로 나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계묘에 왕의 탄일이므로 려수하였다. 동 10월 병오에 이공보로 지밀직사사를 삼고 박려로 동지밀직사사를 삼고 김이로 밀직부사를 삼고 유돈으로 좌부대언을 삼았다. 을묘에 왕이 전지하기를 “내외관사로 상국의 관명과 같은 것은 모두 다 고쳐버리게 하고 또 계림윤 최단에게 내고의 은 30근, 미 100석을 신(자노)으로 하고 역마 15필을 주어 보내게 하되 전연과 숙소의 공억(공대)은 창고에 맡겨 지판하라”고 하였다. 무진에 민보로 평양부윤 겸 존무사를 삼았는데 보는 회회(서역)인이었다. 11월 정해에 왕이 자담사의 은 100근으로써 제사에 분시하고 승을 공양하였다. 명하여 연경궁의 역졸들을 파하여 보내게 하였다. 경인에 원이 황태후의 존호를 가상하였으므로 천하에 사하고 사신들을 보내어 조를 반포하였다. 을미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김지숙이 졸하였다. 임인에 충렬왕의 진영을 경영전에 봉안하고 명종의 진영을 령통사에 이어하였다. 12월 무신에 왕이 전지하되 3년을 한하여 타위99)와 및 연음에 소 잡아쓰는 것을 금하였다. 갑인에 사신을 원에 보내어 해채 건어 건포 등물을 황태후께 바치고 찬성사 배정은 왕지로써 원에 가 화불을 바쳤다. 을묘에 려수하였다. 전지하기를 “인주는 근년에 조폐(쇠폐)가 더욱 심하니 마땅히 판관을 갈 것이오(혁) 또 전 찬성사 벽영임의 부자를 방출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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