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23대고종( 高宗,1213~1259)

오늘의 쉼터 2009. 7. 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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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고종( 高宗,1213~1259)

 

고종은 강종의 맏아들이자 원덕왕후 유시 소생으로 1192년 정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철. 초명은 진. 자는 대명(大命)이다. 그는 부왕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안악현에 유배되었으며, 강종 즉위 이듬해인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때의 그의 나이 22세였다.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하였다. 고종이 즉위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몽고가 일어나 금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갔던 거란을 다시 동쪽으로 내몰았다. 이 바람에 금은 변방지역에 밀려든 거란족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선무포선 만고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을 차지하고 천황을 자칭하며 진을 세울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1218년, 당시의 최고실력자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하려고 하자 궤장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죽자, 그의 아들 우(瑀)가 실권을 잡고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를 살해 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 왔다. 그리고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1235년 경주의 황룡사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고와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고에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고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었다.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 《명종 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능은 홍릉(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 이 증시되었다. 
 

출처: 미르나라

 

  고종 안효대왕의 휘는 철이오 자는 대명이며 일자는 천우이다. 구휘는 진인데 또 질로도 고쳤다.

강종의 원자로 모는 원덕태후 유씨이다. 명종 이십이년 정월 임술에 탄생하여 강종 원년 칠월에 태자로 책봉되고 이년 팔월 정축에 강종이 붕어하니 무인에 유조를 받아 강안전에서 즉위하였다. 구월 병오에 강종을 후릉에 장사하였다. 이 달에 금의 승왕 순이 황제위에 나아가 정우라 개원하고 사신을 보내어 래고하거늘 윤월에 랑장 노육부를 금에 보내어 금온주를 진봉하고 고애하였다.

갑술 원년 춘 정월에 왕의 생일로 경운절을 삼았다. 하 오월 병인에 김신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묘에 혼당에 행차하여 사우제를 행하였다. 추 구월 임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을해 이년 춘 이월에 참지정사 정극온이 졸하였다. 하 사월 신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오월 기미에 염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오에 병부상서로 치사한 현덕수가 졸하였다. 추 칠월에 어떤 사람이 중방에 말하기를 「상약국이 대궐의 서편에 있어 항상 방아를 찧으니 산서의 왕기를 손상할까 두려워한다」라고 하니 이에 마음대로 상약국 상의국 예빈성 등 무릇 사십여동을 헐어 이축하고 중방은 또 신로를 천령전옆에 열어 써 왕래를 통하게 하였다. 팔월 기해에 최충헌이 전왕(희종)을 교동현으로 옮겼다. 신축에 지문하성사 정언진이 졸하였다. 기유에 강종의 신어를 경령전에 봉안할새 왕이 의봉문외에 나와 배영하니 군신이 혹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는 자가 있으며 도인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왕(강종)은 일찍 태자가 되었을 적에 도서에 옮아가 궁하게 계신지 십여년(유기)에 사직과 신민이 모두 타의 소유가 되었더니 어찌 마침내 보위를 받으리라」고 기약하였으리오 비록 향국(재위)한지 일천하나 능히 성사를 전하고 유궁한 후에 사친전에 입안케 됨은 진실로 대명이라」고 하였다. 구월 무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강종을 대묘에 부제하고 문종의 신주를 내어 경릉에 갈맜다. 경오에 왕이 태후를 받들고 청주동궁에 이어하였다. 임신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임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창릉에 배알하였다. 동 십월 신묘에 후릉에 배알하였다. 을미에 친히 대묘에 협제하고 옥책을 받들어 존호를 추상하였다. 제일태조실에는 책하기를 「한조의 삼척검을 드니 우리의 무가 오직 드날렸고 은탕의 구유사를 통솔하니 그 일어남이 성하였도다 밝고 밝아서 가히 더할 수 없고 넓고 넓어서 능히 이름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고 제이혜종실에는 책하기를「몸소 갑주를 둘르고 왕업의 간난을 도와 이루니 덕망이 운소에 극하여 민심의 경부 솔치하였도다」라고 하였고 제삼현종실에는 책하기를「왕실란리의 즈음에 당하여 능히8) 그 공을 정하고(감정궐공) 방인의 요박한 풍속을 개혁하여 같이 다스림에 돌아가게 하였다. 밖으로는 주목의 구제를 정하고 안으로는 사직의 신도를 세웠도다 적국의 백만병을 소탕하여 패연히 막아낼 수 없게 하였으며 변성을 쌓은 것이 십팔읍으로 그 불??를 방비하여 마침내 태평의 기를 이루었음으로 중흥의 주라고 이름하도다」라고 하였고 제사선종실에는 책하기를 부형의 업을 잇고 군국의 권을 잡았도다 사자가 일찌기 양위하매 비록 후미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여열이 홀로 많음으로 첫째로 목위에 서하도다」라고 하였고 제오숙종실에는 책하기를 「문제 구횡의 조를 복하여 한가를 재조하였고 원황 용화의 요에 응하여 진실을 중흥하였도다」라고 하였고 제오예  종실에는 책하기를「선왕 삼오(십오)대를 지나서 조업의 연면(과면)을 이으고 보위 이구(십팔)년 동안에 백성(??원)이(부모처럼)애모하게끔 무육하였도다 남과 서로 순수하여 풍교를 베풀고 북벌동정하여 무를 쉬고 문을 닦았도다 학궁에 행차하여 써 인재를 기루고 의약을 베풀어서 써 민병을 구하였고다」라고 하였고 제칠인종실에는 책하기를「내궐을 수즙하여 써 중위를 보이고 서도를 쳐써 오속을 새롭게 하였도다 친히제적을 갈아 백성에게 가색을 권하여 써 생을 후케 하고 현궐에 거동하여 옛 훈모를 론하여 교화를 돈독케 하였도다」라고 하였고 제팔신종실에는 책하기를 「일찌기 예철한 자질을 타고 나서 오래 공후의 법도를 지켰도다 성덕을 가히 가리울 수 없으매 락수가 부에 응하고 신기가 진실로 돌아감이 있음네 함지에 해가 떴도다 고조의 권근한 뜻을 생각하여 임금에 락이 없고 주왕의 유대간난을 생각하여 이에 위를 선양하였도다」라고 하였고 제구강종실에는 책하기를「본래 용비의 의표가 있음에 홍거의 자를 기다릴 것 없었고 역수가 몸에 있음에 장차 일월(중명)로써 이어 비치리로다 국가가 다난함에 확평이 번민 없이 잠장하였도다 그러나 하늘이 주시고 신이 부호함으로 성인이 작흥하매 만물(만물의 정)이 보이도다(성작이물도) 황극에 엄림하고 면구를 대통하였다가 드디어 신기(제왕의 위)를 후사(동)에 전하여 크게 유풍을 선조에게 나타내었다」라고 하였다. 예를 마치고 고달판에 이르니 최충헌이 채붕을 맺아 영하하거늘 왕이 참승39)을 명하여 의봉루에 환어하고 사하였다.
 

병자 삼년 춘 정월 신미에 지진이 있었다. 정축에 친히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신사에 창락공주가 졸하니 임오에 제왕과 재추 상참관 이상이 대궐에 나아가 진위하였다. 이월 갑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기축에 일본국 승이 와서 불법을 구하였다. 정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무진에 비로소 건성사에 행차하여 제석재를 행하고 또 장경회를 선경전에 설하였다. 신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하 사월 계사에 우설이 내렸다. 가물었다. 오월 갑인에 유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축에 비를 여러 신사에서 빌었다. 육월 계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도 주국 선이 졸하였다. 계묘에 비를 빌었다. 추 칠월 신유에 대우가 내렸다. 윤월 갑신에 제도에 찰방사를 분견하여 백성들의 병고를 존문하고 관리들의 청탁을 살피게 하였다. 병술에 북계병마사가 주하기를「금의 동경총관부에서 성지를 받들어 이첩하여 왔사온데 대략 이르기를「전날에 달단족이 흉세를 믿고 입경함이 있었으나 이미 대군과 더불어 년전에 강호하고 가버린 뒤에 거란이 (무리를) 불러모아 변방을 좀먹듯 침해하여 우리 생령을 살륙하였고 우리 창름을 불태워 황천이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되고 여러 사람의 원망(원)이 모여 한데로 돌아가게 되었도다. ??종하던 자는 창을 거꾸로 돌려치고 동모하던 자도 군사를 기울려 항복하니 이미 인심이 옛 것을 봉대하여 료해가 처음과 같이 보전케 되었는데 다만 반적(포선)만노가 일방의  중한 위임을 버리고 황국의 대은을 망각하니 용심이 착하지 못하여 하늘이 돕지않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륭안부행성의 이랄을 받아 온전히 대군을 들어 정토하니 삼개월이 다 못되어 응당 도적이 모조리 살멸될 것이오 비록 잔령의 여당이 도망하여 산림에 있다 하여도 망함이 얼마 남지 않으리이다 이미 이 적도들이 실패하였으니 귀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나이까 저윽이 두려워하건대 교묘한 말과 속이는 꾀로 량국에 간첩하여 곁달아 침요가 일어날가 하나이다. 만약 혹 국경을 지나는 자가 있거든 엄중히 설비하여 근심을 제거할 것이며 편리에 따라 나포되는대로 첩송전래케 하소서 근자에 거란의 여적이 서로 도하코자 하나 달단이 본조 대군과 모아 협공 엄살하기를 약속하였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갈 곳이 없음을 알고 분파와 같이 도거하여 가만히 파속의 경역을 침범하였나이다 이로부터 이미 대군을 파견하여 처리하는 외에 여러 갈래로 심력과 능한 재간 있는 관리를 보내어 제도의 대군과 회합하여 불일간(지일) 래도할 것이나 일행의 군수가 호대하므로 저윽이 량식에 차질이 생기거나 아울러 마군이 자주 싸워 마필이 수약할까 두려움으로 그래서 지금 이첩하여 보내어 량식을 빌리고 마필을 예비코자 하는 것이니 귀국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 기송전래케 하소서 환난을 서로 구하고 우락을 서로 같이하는데 설사 안위가 있더라도 피차를 가르기(분) 어려운 것이니 원컨대 먼 앞일을 생각하여 써 신종하고 회첩이 속히 도달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때에 금의 선무 포선만노는 요동에 웅거하여 천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진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금이 재첩하여 미곡 팔기를 빌거늘 국가에서는 변관으로 하여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거년으로부터 금인은 병란과 물자고갈로 인하여 다투어 진보를 가지고 의주 정주 관외에 납관하여 미곡을 매매(호시)하는데 은일정에 쌀 사오석을 바꾸게 됨으로 상인들이 다투어 후리를 노려 국가에서 비록 엄형을 하고 물화를 몰수하여도 그래도 오히려 탐욕과 부정을 꺼리지 않고 가만히 숩어서 매매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금의 장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관에 와서 책하기를 「어찌하여 구호를 버리고 출곡의 청을 들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고 이에 십여인을 사로잡아 갔으나 중도에서 탈환하였다. 무자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설하였다. 팔월 임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거란의 유종인 금산 금시의 이왕자가 그 장수 아아 걸노 이인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녕 삭 정융의 경계를 침노하였다. 기사에 상장군 로원순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상장군 오응부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대장군 김취려로 후군병마사를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신미에 북계에서 변보가 다시 왔는데「단병이 이미 녕덕성을 도륙하고 나아가 안 의 구 삼주를 포위하였으며 또 군사들이 린 룡 양주의 경계로부터 와서 철 선 이주를 공격한다」라고 하였다. 을해에 삭주분도장군 로인유와 창주분도장군 차덕위는 능히 단병을 막지 못하였으므로 삭직하고 중랑장 리희주와 김공석을 모두 차장군으로 하여 보내었다. 거란병이 글을 달려 보내어(치서) 보하기를 「대요는 개국한지 이백여년 중간에 여진에게 침범된지 또한 장차 백년이 되었도다 그 여진에게 함락된 제읍은 모두 수복되었으나 오직 파속로일성만 뽑지 못하였으므로 루차 정토하여 바야흐로 항복을 받고 관리들은 여전히 임용하고 있으며 백성들도 또한 여전히 생업에 안정되어 있으니 네가 만약 항부하지 않으면 곧 대군을 보내어 살륙하고 조금도 가벼히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월 임오에 대장군 이보로 서해도방호사를 삼고 대장군 최유공으로 동계 겸춘주도방호사를 삼았다. 조양진에서 주하기를 「거란병이 진에 이르므로 갑장별감 동대비원록사 류성장과 부장 이순로 등이 이십구인을 쳐서 죽이고 기치와 정고(징과 북)를 빼앗았나이다」라고 하므로 이에 성장을 사재주부로 순로를 대비원록사로 제배하였다. 무자에 금의 래원군이 녕덕성에 이첩하여 함께 거란병을 협공하자고 약속하고 인하여 병마와 추(마초)량(병량)을 삭구하였다. 임진에 창주분도장군 김공석이 단병으로 더불어 창주에서 적수 사십이급을 베고 연주랑장 현장 등도 여러번 싸워 칠십여급을 참살하고 우마 팔십을 로획하였으며 운주부사 설득유가 다시 싸워 오십여급을 죽였다. 기해에 서경병이 거란과 조양풍단역에서 싸워 일백육십여급을 베니 강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을묘에 서경병이 성주의 구천에 이르러 단병 이천여인과 만나 교전끝에 죽이고 로획한 것이 모두 일백십오인이었다. 동 십일월 경인에 금이 이첩하기를「달단병이 대부영을 래공하여 틈을 타 입성하였으나 그러나 이미 모두 죽였다 아직 그 여당이 귀국에 도입할까 두려우니 조회하여 막아 엄살하기를 번거롭게 청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십이월 병인에 단병이 황주를 도륙하였다.

 

정축 사년 춘 정월 경진에 초인들이 대묘의 송수를 잘라 거의 적지가 되었으므로 이에 군사를 명하여 금하였으나 또한 능히 그치제 하지 못하였다. 갑신에 금의 래원성에서 영덕성에 이첩하기를「반적 만노는 본래 거란과 동심이니 만약 합군하여 귀방을 왕침하면 그 환이 불소할 것이오 또한 귀방에서 격퇴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도망쳐 돌아올 것이니 진실로 귀방을 침범하거던 마땅히 급히 보하소서 우리는 곧 군사를 내어 엄격할 것입니다」라고 하거늘 녕덕성에서 회첩하기를 「단병이 일찌기 우리 국경으로 들어와서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약 만노가 계속하여 오면 우리 군력이 분산되어 단구들이 다시 그 세력을 떨칠까 두려우며 만약 상국을 침범한다면 일이 경각에 생겨 미쳐 보지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미리 병마를 설치하여 만노를 가로막아 폐읍(아국이라는 말의 겸칭)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면 폐읍도 또한 거란병을 막아 상국에 이르지 못하도록할 것이라」고 하였다. 경인에 전라초군별감 홍보가 치보하기를「전주의 군마를 년전 십이월 이십육일에 재촉하여 출발케 하였는데 떠나간지 오일만에 주로 돌아와 란을 일으켜 장리를 살축하고 인하여 류주하매 이로 말미암아 라주방면(라계)의 군도 또한 출발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계사에 대장군 오수기를 파견하여 보졸 수천으로 동계를 방수케 하고 겸하여 그 방면의 제군을 통솔케 하였다. 갑오에 염주인이 단병을 격주시키고 포로 수십인을 바쳤다. 병신에 우부승선 김중구를 보내어 남도군마로써 가서 단병을 치게 하였다. 정유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서 삼일간 설하였다. 안서도호부가 거란병과 싸워 백여급을 참수하여 와서 바쳤다. 경자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장군 기윤위를 보내어 본령의 군졸 및 신기 이반을 거느리고 충청안찰사와 함께 남적을 추포케 하였다. 이월 무오에 정주분도장군 박유가 치보하기를「단병 삼만명 가량이 래구하여 성책을 불살랐나이다」라고 하였다. 삼월 병술에 동면도감판관 이당필을 보내어 대묘신주를 대상부에 옮겼다. 장군 기윤위를 보내어 현릉에 나아가 태조의 재궁을 봉은사에 봉천케 하였다. 단적 육인이 국청사에 침입하므로 중이 일인을 잡아 죽이니 남어지는 모두 도망하였다. 또 첩자 삼인이 선의문에 들어옴으로 문졸들이 잡아 물으니 이는 곧 양수척과 및 우리의 항졸이었다. 단병 오육인이 또 와서 문졸 삼인을 죽이고 문외에 사는 량가의 녀자일명을 잡아갔다. 무자에 장군 신선주를 보내어 창릉 재궁을 봉은사에 봉천하고 또 후릉을 개장하는 도감을 세웠다가 곧 파하였다. 기축에 단병이 우봉현에 침구하였다가 드디어 림강 장단으로 향하여 갔다. 현화사의 안 현 강 삼종의 신어를 숭교사로 봉천하였다. 경인에 장군 신선주 기윤위 최준문 등에게 명하여 각기 그 군사를 거느리고 단병을 숭인 홍인의 이문 밖에서 방비케 하였다. 단병이 백령역에 이르렀다. 도적이 순릉을 발굴하였다. 계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여 장군 최효문 김양여 신선주 등에 명하여 군사를 합하여 비어케 하였더니 병신에 선주 등 오장군이 싸우지 않고 도망쳐 돌아왔다.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하 사월 기유에 죽판관에 이어하였는데 이는 충헌의 지은 것이다. 이 때에 술사가 말하기를「송산은 왕기가 다 되어 가니 마땅히 별궁으로 거동하여 써 이를 가시(양)옵소서」라고 하매 이를 청하였다. 경술에 단병 오천여인이 김교역에 이르렀다. 임자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무오에 다시 오군을 사열하고 상장군 오응부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상장군 최원세로 전군병마사를 삼고 차장군 공천원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차장군 오인영으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상장군 류돈식으로 후군병마사를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숭인문을 나가 적을 막게 하였다. 기미에 김의 만노의 군사가 와서 대부영을 격파하였다. 신유에 구실신주를 공부청으로 제릉신주를 고공청으로 봉천하였다. 무진에 김병 구십여인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들어오거늘 분도장군 정공수가 군사를 내어 이를 막으니 호두김패를 찬 관인이 무기를 버리고 꿇어앉아 말하기를「나는 원사 우가하인데 밤에 황기자군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도망쳐 왔으니 원컨대 장군은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하였다. 계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문두루도장을 설하였다. 오월 경진에 단병이 동주를 함락하였다. 오응부를 파면하고 전군병마사 최원세로 대체시키며 상장군 김취려로 전군병마사를 삼았다. 임오에 단병 수십기가 성동의 적전리에 침구하였다. 계미에 단병이 도원역을 침략하였는데 역리가 그 문첩을 득견하니 대략 이르기를「량국이 서로 싸우면 한갖 무고한 백성만 죽이게 되니 마땅히 신실한 대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귀복(귀관)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대장군 지윤심으로 양 광 충 청도방어사를 삼아 도내병과 및 승군을 거느리고 써 단적을 막게 하였다.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계사에 단병이 원주에 들어오매 주인들이 력전하여 물리치니 단병이 후퇴하여 횡주에 주둔하였다. 을미에 중군병마사 최원세로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을 삼고 후군병마사 류돈식으로 감문위상장군을 삼고 좌군병마사 공천원으로 항급하여 대경을 삼고 정유린으로 이를 대체케 하였다.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여 써 단병을 가시었다. 내시를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가서 군중을 위로케 하고 각기 의일령과 은병이구를 사하였다. 기해에 단병이 원주를 함락하였다. 육월 정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형부랑중 김주정을 보내어 서경을 안무하였따. 병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임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청새진에서 단인왕후렬을 잡아 오거늘 곧 이를 참하였다. 추 칠월 병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정축에 서북면병마사가 주하기를「거란 이백여인이 청새진에 침구하거늘 판관 주효엄과 경장 한초가 출전하여 남녀 이인과 마 십필 철갑 주기 은패 등을 노획하였나이다」라고 하므로 왕이 효엄으로 흥왕도감판관을 삼고 한초로 랑장을 삼았다. 전추밀원사 조충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경진에 최원세와 김취려가 단병을 충 원 이주간으로 추격하여 맥곡에서 싸우고 박달현으로 쫓아가서 그를 대패케 하니 적이 대관령을 넘어 도망하였따. 신사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무자에 다시 조충으로 추밀원사 리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계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왕이 질라고 개명하였다. 계묘에 가발병마사 임보가 병이 들므로 대장군 기윤위로 대체케 하였다. 갑진에 불은사에 행차하였다. 팔월 병오 삭에 숭교사의 강종 신어를 왕륜사에 봉천하였다. 사관에 선반43)하는 것을 회복하였다. 이보다 먼저 모왕이 사신의 기사를 보고자 하여 몰래 사관에 이르렀던 바 직관이 미리 알고 숨고 나타나지 않으니 왕이 노하여「직관이 숙직하지 않는다」라고 사식을 정지시켰더니 이에 이르러 최충헌이 주하기를「금내관은 모두 사식하면서 오직 사관에만 홀로 없음은 리에 합당치 못하나이다」라고 하니 명하여 이를 회복시켰다. 무신에 사죄 십오인을 사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임자에 교주방호병마사 오수기가 단병과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계해 최충헌이 주하기를「후군병마사 류돈식은 적을 만나 머무적거리고 싸우지 않으니 청컨대 돈식과 및 그 군내의 제장군의 직을 파하고 종신토록 서용치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이를 청종하였으나 돈식은 충헌의 외생으로 이를 사하였다. 경오에 본궐에 환어하였다. 구월 신사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여진의 황기자군이 파속부(구연성)로부터 압록강을 건너와서 고의주성에 와서 둔주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신묘에 려정궁에 벼락쳤다. 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단병이 의 정 린 삼주와 및 녕덕성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무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단병이 이첩하여 식량을 청하였다. 신축에 오수기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동 십월 을사 삭에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경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경신에 조충이 황기자군과 린주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였다. 병인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사신을 안동 경주 진합주 상주 령암 라주 전주 양광주 청주 충주 등 십도에 보내어 제주의 토공을 독려하고 또 군사들 가운데는 동복을 취한다고 하여 귀향할 것을 청고하고 오래도록 번상치 않는 자가 있으므로 이를 독려하여 부경케 하였다. 십일월 병자에 단병이 다시 모아 고주(고원) 화주(영흥)에 침구하므로 상장군 문한경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대장군 류돈식으로 후장군병마사를 삼고 대장군 기윤위로 가발병마사를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병신에 단병이 녕인진을 함락하였다. 기해에 장평진을 함락하였다. 경자에 삭주분도장군 백윤이 단병 이십여인을 유인하여 술을 마시우고 그들이 취한 틈을 타서 모두 죽여버렸다. 임인에 문한경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공천원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이무공으로 우군병마사를 삼았다. 단병이 예주(정평)를 함락하였다. 십이월 정미에 최충헌이 술인 이지식의 말을 믿고 건원사를 헐어 써 북병을 가시었다. 성종의 신어를 개국사에 옮겼다. 무신에 제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경술에 비로소 신궐을 백악에 지으니 이는 이지식의 말을 좇은 것이다. 경신에 친히 사천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임술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문두루도장을 설하였다. 무진에 선주방수장군 조돈 박유 등이 성을 버리고 돌아오거늘 섬에 류배시켰다. 임신에 현성사에 이첩하였는데 이는 대개 술자의 설을 믿고 써 기업을 연장코자 함이었다.

 

무인 오년 하 사월 을묘에 희종의 딸을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병인에 중군병마사가 보하기를 단병이 대거하여 이른 것을 보하거늘 정묘에 좌간의대부 김군유로 조충에 대체하여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오월 임신에 이죄(참교) 이하를 사하였다. 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광릉공 면가 졸하였다. 기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육월 신축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북계분도장군 정공수가 보하기를「여진반적인 황기자 가유가 대부영에 래둔하여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므로 압록강빈관으로 요치하여 연위하다가 그가 취한 틈을 타서 유 등 칠인을 사로잡고 또 그의 마하 이십여인을 죽였읍니다」라고 하였다. 금의 원사 우가하는 가유가 피금되었단 말을 듣고 친히 공수에게 나아가 감사하고 화친을 맺고자 하고 인하여 량식과 마필을 청하므로 공수가 드디어 조정에 알리고 미 삼백휘(석)을 주었다. 추 칠월 경오 삭에 일식이 있었다. 경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수사공 조충으로 서북면원사를 삼고 김취려로 병마사를 삼았다. 팔월 무신에 전몰고아에게 작을 사하였다. 경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해에 단병이 양주에 침구하였다. 기사에 서해도방수군이 단병으로 더불어 곡주에서 싸워 삼백여급을 참수하였다. 구월 계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왕이 내노의 요대 라삼 융의 자삼을 신사에 시사하여 써 단병을 가시었다. 계사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십월 기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십일월 계유에 왕의 고비께 시호를 가상하였다. 갑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기해 삭에 몽고의 원사 합진 및 찰자가 군사 일만명을 거느리고 동진의 만노가 보낸 완안자연의 군사 이만과 함께 단적을 친다고 성언하고 화(영흥) 맹(맹산) 순(순천) 덕(덕천)의 사성을 공격하여 이를 파하고 곧 강동성으로 향하였다. 갑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묘 육년 춘 정월 신사에 조충 김취려가 합진 자연 등으로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강동성을 포위하니 적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경인에 합진이 포리대완 등 십인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강화를 청하므로 왕이 시어사 박시윤을 보내어 이를 맞게 하고 문무관에게 명하여 관대를 갖추고 선의문으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좌우에 분립하게 되었는데 포리대완 등이 관외에 이르러 지체하며 들어오지 않고 말하기를「모름지기 국왕이 출영하라」고 하거늘 이에 역관으로 하여금 재삼 힐난하니 드디어 말을 타고 관문으로 들어왔다 신묘에 왕이 대관전에서 인견하니 모두 모의관에 궁시를 차고 바로 전으로 올라와 회중에서 서장을 내며 왕의 손을 잡고 이것을 주려 하므로 왕이 이에 변색하니 좌우가 모두 당황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시신 최선단이 울면서 말하기를「어찌 가히 추로로 하여금 지존에 가까이 하게 하랴 설사 형가의 변과 같은 것이 일어나도 반드시 미쳐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나가기를 청하니 포리대완 등이 우리 나라 의관을 갈아입고 입전하여 사례를 행하면서 다만 읍례만 하고 배례치 않았다. 그들이 돌아감에 미쳐 김은기 주포 수달피 등을 증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이월 기미에 합진 등이 돌아갈새 동진의 관인과 시종자 사십일인으로 써 의주에 머물게 하고 말하기를「너희들은 고려어를 배우고 내가 다시 올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삼월 정묘 삭에 랑중 이세분을 파견하여 전왕을 교동현에서 봉영하였다. 을유에 왕자 전이 탄생하였다. 하 오월 병신에 김중룡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달에 가물음으로 비를 여러 신사에 빌었다. 신유에 대우가 내렸다. 육월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는데 십사일만에야 사라졌다. 추 칠월에 호부시랑 최정분 등 팔인을 보내어 북계 흥화도 제성을 나누어 순시하고 병기와 저장한 군자를 검열케 하며 여러 소성을 대성에 입보케 하니 때에 모자의 말에 몽고가 가을을 타(승)고 다시 온다 한 바가 있으므로 이에 대비한 것이다. 팔월 경오에 지진이 있었다. 임오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임진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몽고가 동진국과 함께 군사를 보내어 진명(덕원)성외에 내둔하고 세공 바치기를 독촉한다」라고 하였다. 구월 신축에 몽고사신 십일인과 동진국의 구인이 왔다. 임자에 최충헌이 죽었다. 기미에 죄인을 석방하였다. 동 십월 계해에 서북면병마사 김군유가 주하기를「의주별장 한순 랑장 다지가 수장을 죽이고 써 반하였나이다」라고 하므로 장군 조렴경 등을 보내어 초무케하고 또 상장군 오수기로 대신 병마사를 삼았다. 신사에 북계제성이 많이 의주적에게 함락되었으나 오직 안북도호부와 구주 연주 성주는 성벽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주리에게 참직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추밀원부사 리극서로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이적유로 안북도호부를 공격하거늘 성중장사들이 출전하여 적 박소 등 팔십여급을 참하였다.

 

경진 칠년 춘 정월 을미에 정방보를 강등하여 안동부사를 삼고 문유필로 안서부사를 삼으니 이에 부정으로 독화의 풍습이 조금 멈추어졌다. 이월 신미에 이극서를 불러 평장사를 삼고 김취려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오수기로 좌군병마사를 삼았다.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한순 다지 등이 김의 원사 우가하에게 투항하니 우가하가 유인하여 이를 베어 서울로 함에 넣어 보내었다. 삼월 병신에 은존 은반 은우 각일 은잔이 세저 세주포 각오십필 광평포 오백필 미일천석을 우가하에게 보내어 써 그 공을 갚았다. 병오에 단병이 평로진에 침입하였다. 도적이 남원에서 일어났다가 곧 자궤하였다. 경술에 친히 선경전에서 삼계를 초제하였다. 하 사월 임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오월 병오에 의주에 제치한 병마후군 중군이 돌아왔다. 육월 경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을축에 박승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유에 왕이 보살계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무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고 추 팔월 갑자에도 이와 같았다. 갑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구월 기축에 평장사 조충이 졸하였다. 정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동 십월 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녕인후 진이 졸하였다. 십일월 신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신사 팔년 춘 이월 기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의주역적 윤장 등 삼인을 체포하여 시장에 칼을 씌어 두었다가 신축에 이를 참하였다.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하 사월 을묘 삭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오월 갑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육월 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신사에 추밀원사 이경이 졸하였다. 추 칠월 갑진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팔월 갑인에 평장사 류광식이 졸하였다. 기미에 몽고사 저고여 등 십삼인과 동진 팔인 및 부녀 일인이 왔다. 갑자에 왕이 조서를 대관전에서 맞이하였는데 몽고와 동진 이십일인이 모두 전에 올라와서 명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상사 일인만 전에 올라옴을 허하고자 하여(말이)오고 가 결정되지 못한 채 날이 장차 저물어짐으로 이에 팔인의 승전을 허하니 몽고의 황태제의 균지를 전하고 수달피 일만령 세주 삼천필 세저 이천필 면자 일만근(근) 룡단묵 일천정 필 이백관 지십만장 자초오근 홍화 람순 주홍 각오십근 자황 광칠 동유 각십근을 요구하였다. 저고여 등은 전지를 마치고 장차 전에서 내려갈 때에 각각 회중물을 내어 왕전에 던지니 이는 모두 년전에 주었던 추주포였다 (이들은) 드디어 연회에도 나오지 않고 또 원사 찰자와 포흑대의 서 각일통을 내놓으니 모두 수달피 면주 면자 등물을 징구한 것이었다. 구월 임오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또 몽고사저가 등이 온다고 하였다. 정해에 왕이 군신 사품 이상을 대관전에 소집하고 몽고의 후사에 대한 영접의 가부를 물으면서 왕은 군비를 갖추어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려 하니 군신이 모두 말하기를「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만약 영접치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래침할 것이니 어찌 가히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하며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당적하리까」라고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았다. 신묘에 의주분도장군이 치보하기를「병 육칠천명이 파속로 석성 곁에 내둔하였다」라고 하였다. 계사에 몽고의 사신 저가 등 이십삼인과 부녀 일인이 와서 국신물(폐물)을 독촉하였다. 갑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십월 갑인에 송상 정문거 등 일백십오인이 왔다. 을묘에 몽고사신 희속불화 등 칠인이 왔다. 무오에 리현에 있는 최우의 집에 이어하였다. 경신에 왕이 몽고사신을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사에 왕이 견룡(군)등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기묘에 의봉루에 거동하여 계간46)을 세워 사하고 조충의 자 서와 진몰군사의 자손에게 작을 사하고 또 최충헌과 우의 질서에게도 작을 사하였다. 십일월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이궁에 이어하였다. 십이월 임진에 몽고사신 삼인과 동진십칠인이 왔다. 갑오에 이연수로 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리부사를 삼고 김의원으로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최우로 참지정사 리병부상서 판어사대사를 삼고 사홍기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 판공부사를 삼고 문유필로 수사공 좌복사로 삼고 김취려로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를 삼고 정통보로 지추밀원사 례부상서를 삼고 한광연으로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를 삼고 이적으로 추밀원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공천원으로 우복사를 삼았다.

 

임오 구년 춘 정월 갑자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이월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무진에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하 사월 기묘 삭에 외원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량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유에 친히 선경전에서 태일을 초제하였다. 육월 무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칠월 임신에 혜성이 삼태성의 가운데 나타났는데 꼬리가 서쪽을 가리켰고 장이 삼척 가량 되었다. 을해에 혜성이 서북방에 나타나니 장이 삼척 가량이었고 팔월 정축에는 건방에 나타나니 장이 이십척 가량이었고 무인에는 낮에 나타났으며 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갑신에 혜성이 나타나므로 써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을유에 려수하였다. 임진에 왕태후 왕씨가 훙하였다. 계사에 몽고의 사신 삼십일인이 왔다. 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동 십이월 정유에 이연수로 수태보 주국을 삼고 최보순으로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사홍기로 참지정사를 삼고 김취려로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삼고 문유필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정통보 한광연으로 모두 추밀원사를 삼고 송신경으로 지추밀원사 리부상서를 삼고 이적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이적유로 좌산기상시 판삼사사를 삼고 공천원으로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오수기로 추밀원부사 공부상서를 삼고 류택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김중구로 병부상서 추밀원지주사를 삼고 최보연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문한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류언침으로 형부상서 판각문사를 삼고 함수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공노로 추밀원우부승선을 삼았다.

 

계미 십년 춘 정월 기사에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이월 정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정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기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하 사월 임오에 담론법석을 내전에 설하였다. 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오월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평로진에 한 녀인이 있어 구자를 생하였는데 모두 문무의 재질이 있다」라고 하거늘 그곳 관에 명하여 매년에 조 이십석을 종신토록 주게 하였다. 갑자에 왜가 금주에 침구하였다. 동진국이 소신 아전 혼원 등 팔인을 보내왔다. 육월 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유승단으로 례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조진경으로 전중승을 삼았다. 병신에 조균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칠월에 황재가 있었다. 팔월 갑신에 서경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고 을유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갑오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구월 경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무신에 선지가 있었는데「양계 오도의 진병법석의 공비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갹출하니 이는 부처님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무슨 복이 있으리오」라고 하고 이에 중사를 보내어 내고에 있는 은병을 삼백구를 내어 제도에 나누어 부쳤는데 경상도에 이백구 전라도에 육십구 충청도에 사십구였다.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동 십월 병자에 황태후를 높여 태황태후로 삼고 대사하였다. 임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묘통사에 행차하니 국자제주 이충민이 제생을 거느리고 길 좌측에서 배알하거늘 왕이 어차를 멈추고 주과를 사하였다. 정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십일월 계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십이월 무자에 이연수로 수태보를 삼고 최보순으로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를 삼고 정통보로 판추밀원사를 삼고 한광연으로 보문각대학사를 삼고 송신경 이적으로 모두 지추밀원사를 삼고 이적유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공천원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김중구로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류택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갑신 십일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오에 몽고의 사신인 찰고야 등 십인이 왔다. 무신에 동진국이 사신을 보내어 이(통)의 이첩을 가지고 왔는데 그 일에는「몽고의 성길사(한)는 군사가 먼 지역에서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 그 존재한 바를 알 수가 없으며 화적흔은 탐욕하여 어질지 못하므로 이미 (몽고와의) 구호를 끊었다」라고 하고 그 일에는「본국은 청주(함남북청)에서 귀국은 정주(정평)에서 각각 각장(호시장)을 설치하여 이전대로 매매하자」고 하였다. 계축에 재추가 최우의 집에 모여 몽고 동진 량국의 사신접대하는 례를 의논하였다. 몽고의 사신이 국신예물을 가지고 돌아가니 왕이 직문하성 마희원에게 명하여 서경에까지 전송케 하였는데 그 사신이 압록강에 이르러 세포 등물은 버리고 다만 달피만 가지고 갔다. 경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월 기사에 친히 불정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계유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계묘에 동진국의 사신이 왔다. 기유에 친히 백고좌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우가하가 사로잡아간 정주인 이백여구가 돌아왔다. 임술에 손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하 사월 기사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옥리가 옥중이 비었음을 아뢰었다. 임오에 친히 삼계를 초제하였다. 계사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갑오에 문하평장사 김의원이 졸하였다. 오월 갑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육월 정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왕이 보살계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추 칠월 정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팔월 기축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윤월 무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권지비서교서랑 이백분가 자신문에 나아가 상언하기를「선왕의 세에는 매양 재초의 사소(축사)를 첨압(결재)할 때에는 반드시 재(재계)숙하고 새벽(매상)에 전에 앉으면 교서랑은 어서를 함에 받들고 류원관은 필연을 받들어 전 아래에 서면 상께서는 궤에 나아가 하압을 하시었는데 지금은 사소가 궐내에 들어가면 비서랑이 공복으로 문하에서 서 있기 여러날이 되어도 하압하지 않으시니 그윽히 폐하를 위하여 취할 바가 아닌가 하나이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권지교서랑은 미관인데 직언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구월 정해에 참지정사 오응부가 졸하였다. 동 십월 기해에 국노 서로 효자 순손 의부 절부를 향연하였다. 경자에 환과고독 독폐질자를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는데 검교장군 위초는 다리의 살을 베어서 그 모의 병을 고쳤으므로 특별히 물을 더 사하였다.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경술에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기미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십일월 을해에 몽고사신 저고여 등 십인이 함신진(의주)에 이르렀다.

 

을유 십이년 춘 정월 기사에 연등 팔관회에 유밀과상을 복구하였다. 계미에 몽고의 사자가 서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갈새 다만 국신인 달피만 가지고 그 남어지 주포 등물은 모두 들에 버리고 가다가 중도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몽고에서는 도리어 우리를 의심하므로 드디어 통교가 끊기게 되었다. 기축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이월 무오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무진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내전을 수즙하므로 장군 김약선의 집에 이어하였다. 병술에 림장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왕이 강화에 있을 때에 현인 위원과 감반49)의 구교가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왕이 내정으로 불러드려 림시로 내시에 속하게 하고 의대 금은 안마 주과를 사하였다. 하 사월 무술에 내외의 흥작(토목공사)을 금하여 농시를 빼앗지 말게 하였다. 왜선 이소가 경상도연해주현에 침구하므로 군사를 발하여 이를 모조리 사로잡았다. 임자에 왕이 무사들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오월 무진에 우박이 내렸다. 육월 신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동진인 주한이 서창진에 투항하여 왔는데 주한은 소자문서를 해득하므로 그를 서울로 불러드려 사람으로 하여금 전습케 하니 소자의 학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사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추 칠월 무진에 판사재사 이윤함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대호군 금휘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랑장 최종조로 경상도안찰부사를 삼고 시랑 김득순으로 양광도안찰사를 삼고 랑장 황수로 전라도안찰부사를 삼고 시어사 류유로 서해도안찰부사를 삼고 기거사인 백돈분로 교주도안찰부사를 삼았다. 팔월 신묘에 동진병 백여명이 삭주에 침구하였다. 정유에 강종의 기일이므로 승 이백을 내전에서 공양하였다. 강종의 진전은 현화사에 있어 기일에는 절에 가서 행향하는 것이 상례이었으나 경진년부터는 국가에 사고 많으므로 왕이 친히 갈 수가 없었다. 신축에 변장 최량이 우가하의 막관(부하)인 초주마 등 수인을 사로잡아 바치거늘 주마를 대운도에 류배시켰다. 갑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정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구월 기미에 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건원사가 락성되었다. 경진에 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 이적유가 졸하였다. 임오에 법왕사에 행차할제 왕이 앞에가는 유마장교의 안마 의복이 선명한 것을 보고 대희하여 내노의 포물을 사하였다. 계미에 추밀원사 어사대부 이적이 졸하였다. 갑신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병술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동 십월 병오에 승 삼만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정미에 저상 봉원 목친 사원 사전에 화재가 나서 금성의 랑무(행랑)일백삼십칠간이 연소되었다. 무신에 내시장군 송서에게 홍정(혁대류)를 사하여 이를 띠게 허하였다. 계축에 대창에 지하창고를 쌓아서 화재를 방비하게 하니 가히 이십여만휘(석)을 넣을 수 있었다. 십일월 신사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십이월 신해에 정통보로 판추밀원사 리부상서를 삼고 최정분으로 첨서추밀원사 어사대부를 삼았다.


병술 십삼년 춘 정월 정축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지진이 있었다. 왜가 경상도연해주도에 침구하거늘 거제현령 진룡갑이 주사(수군)로 써 사도에서 싸워 이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이월 신묘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병인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정방보가 졸하였다. 하 사월 기축에 흉년으로 일체의 토목 역사를 파하였다. 계축에 오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오월 경신에 서경인 조영유가 석준과 김대지 김광영 등으로 더불어 사도령과 랑장 황승룡 동방림을 죽이고 그 병을 탈취하여 장차 경성을 침범하려고 꾀하더니 전대정 김국인이 그 음모를 알고 써 고하매 류수 진식이 곧 군사를 발하여 모두 잡아 죽이고 그 족속을 주멸하니 국인을 제배하여 교위로 삼았다. 육월 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왜가 금주(금해)에 침구하였다. 이 달에 가물었다. 추 팔월 경자에 추밀원사 문한경이 졸하였다. 무신에 평봉궁에 이어하였따. 동 십월 기축에 지진하니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떨어졌다. 을미에 또 지진이 있었다. 무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십일월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계묘에 공천원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류언침으로 동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를 삼고 최종준 최정분으로 모두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정공수로 추밀원부사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정해 십사년 춘 정월 무오에 태자부를 세우고 문하시중 이연수 참지정사 김취려를 보내어 봉책과 인을 사하였다. 경진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이월 경인에 크게 지진하고 계묘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삼월 을묘에 최우가 전왕을 교동에 옮겼다. 하 사월 경진 삭에 친히 금경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여 써 천변을 가시었다. 기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왜가 금주(금해)를 침구하거늘 방호별감 로단이 군사를 발하여 적선 이소를 포착하고 삼십여급을 베고 또 노획한 병장을 바쳤다. 오월 경술에 왜가 웅신(웅천)현에 침구하거늘 별장 정금억 등이 산간에 잠복하였다가 뛰어나와 칠급을 참살하니 적이 도망하였다. 을유에 우박이 내렸다. 일본국이 글을 보내어 적선이 변방에 침구한 죄를 사과하고 인하여 수호하고 교역(호시)하기를 청하였다. 윤월 기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육월 무신 삭에 일관이 주하기를 일식이 있다 하였으나 비가 내려 보이지 않았다. 추 칠월 계미에 참지정사 사홍기가 졸하매 삼일간 철조하였다. 임인에 태백(성)이 경천하더니 루순만에 이에 멸하였다. 병인에 태자라 려정궁에 나아가 시학공자 급사를 시선하니 육운시에는 유순 등 사인 사운시에는 정위 등 사인 절구에는 이소 등 사인을 취하였다. 기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설하여 써 천변을 가시었다. 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구월 경진에 감수국사 평장사 최보순 수찬관 김량경 임경숙 유승단 등이 명종실록을 찬하여 사관에 장치하고 또 일본으로써 해인사에 장치하였다. 임오에 동계병마사가 동진이 정(정평) 장(동상) 이주에 침구함을 아뢰매 우군병마사 상장군 조렴경 지병마사 대장군 김승준 중군병마사 추밀원사 정공수 지병마사 김량경 후군병마사 상장군 정순우 지병마사 대장군 김지성을 보내어 삼군을 거느리고 이를 방어케 하였다. 을유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신축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여 써 병란을 압승하였다. 동 십월 경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고 재추에게 명하여 천황당에 초제를 설하여 써 병첩하기를 빌었다. 계축에 또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기미에 삼군이 안변부로부터 적의 둔소인 의주(덕원)로 곧장 향하여 가더니 갑자에 적의 도전에 아군이 패하였다. 십일월 기축에 랑장 금리생으로 자문지유를 삼았다. 리생은 일찌기 북계병을 거느리고 밤에 화주(영흥)성에 들어가서 성중인과 힘을 합하여 굳게 지키고 또 기병을 내어 적을 참하기 무려 천백이었던 바 공으로 써 이 직을 받은 것이다. 계사에 전추밀원사 김중구로 서경류수를 삼았다. 중구는 공충절검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으므로 명이 내리매 조야가 모두 기뻐하였다. 정공수를 폄하여 남경류수를 삼고 조렴경으로 명주부사를 삼고 정순우를 백령도에 류배시켰는데 능히 적을 막지 못한 까닭이다. 십이월 을축에 어사대에서 항간에 발합(비둘기류)과 응전(매종류)을 기르는 것을 금하니 이는 유직자는 공무를 폐하고 무직자는 쟁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미에 문유필로 참지정사 판례부사를 삼고 공천원으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를 삼고 류언침으로 추밀원사 례부상서를 삼고 최종준으로 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를 삼고 최정분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최정화로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를 삼고 리원함 기저 김지성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진식으로 우복사 한림학사를 삼고 사광보로 병부상서를 삼고 김숙룡으로 추밀원좌승선 공부상서 지리부사를 삼고 정문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중민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최종번으로 추밀원좌부승선을 삼고 이정으로 우승선을 삼고 이규보로 판위위사 지제고를 삼고 유경현으로 상서우승 지어사대사를 삼고 백돈분으로 시비서감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을해에 문하시중 이연수가 졸하였다. 이 해에 급제 박인을 보내어 일본에 통문(빙)하였다. 때에 왜적이 주현을 침략하므로 국가가 이를 근심하여 인을 보내어 첩문을 가지고 가서 력세의 화호에 래침이 불가하다는 것으로써 타일르니 일본에서도 적왜를 추검하여 베매 침략이 조금 쉬었다.


무자 십오년 춘 정월 병자 삭에 지진이 있었다. 계미에 판장작감사 김변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대장군 태집성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무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선경전에서 삼청
51)을 초제하여 써 지진을 가시었다. 계묘에 소재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이월 무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갑술 삭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회음진 도령 희간이 서경에 모반한 자를 잡아와 고하거늘 채백 사십필과 구마 일필을 사하였다. 신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이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사월 임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오월 신축에 북계병마사가 치보하기를「국경상에 적변이 있고 또 농작물에 황해가 있나이다」라고 하므로 왕이 내시를 분도하여 중외의 신사에 기도케 하고 또 반야도장을 선경전에서 이칠일간(십사일) 설하였다. 육월 임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친히 수문전에서 원진(성)을 초제하였다. 임자에 동진의 모극왕52) 노비와 사력 고린 간란가가 내투하였다. 임술에 친히 인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여 써 적병을 가시었다. 무진에 장생서의 인도중에 한 녀인이 있어 그 자색이 아름다우므로 서리가 당직하는 밤에 이를 간통하려 하였으나 그 녀가 굳게 거절하며 말하기를「나도 또한 대정의 처라 어찌 타인에게 좇으리요」라고 아니 서리가 이를 겁박하여 돼지 우리에 가두니 뭇 돼지가 다투어 깨물므로 그 녀가 부르짖기를 심히 급하게 하였으나 서리는 거짓이라 하여 버려 두고 구하지 아니하였더니 밝을 무렵에 보니 다만 뼈만 남아 있었다. 추 칠월 을미에 연경궁에 이어하였다. 경자에 동북면병마사가 동진병 천여인이 장평진에 래둔함을 보하거늘 삼군을 보내어 이를 막으려 의논하였더니 뒤이어 적이 퇴거하였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행하지 않았다. 팔월 병진에 조하기를「동진이 가만히 근지에 웅거하여 자주 변경을 침구하므로 군사를 내어 진토하면 곧 문득 도망하고 군사가 돌아오면 다시 들어와서 틈을 엿보니 이를 방어할 방술이 어디 있는가 서경에 이르기를 모의는 경사에게까지 미치게 하라 하였으니 마땅히 너희들 문무 사품 대성 육품 이상은 각각 좋은 계책을 조목으로 올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연경궁에 설하였다. 구월 임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기축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청새진의 호장이 망녕되히 동요를 지어 룡주와 더불어 모반코자 하므로 병마사 채송년이 조사하여 이를 주하였다. 동 십월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신유에 승 삼만을 공양하였다. 기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경천하였다. 십일월 신미 삭에 지진이 있었다. 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지문하성사 문유필이 졸하거늘 삼일동안 철조하였다. 을미에 본궐에 환어하였다. 십이월 경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계묘에 평장사 왕규가 졸하였다. 갑자에 추밀원부사 이윤함에게 명하여 어의대를 받들어 백악의 가궐에 이안케 하였다. 무진에 최보순으로 수태사를 가직하여 판리부사를 삼고 김취려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공천원 최정분으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최종준으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를 삼고 김중구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기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진식으로 추밀원부사 어사대부를 삼고 사광보 유승단으로 모두 추밀원부사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홍사윤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최정화로 추밀원사를 삼아 인하여 치사케 하고 박세통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조렴경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김숙룡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고 김량경으로 형부상서 한림학사를 삼고 김승준으로 시호부상서를 삼고 최종번으로 좌승선을 삼고 이정으로 좌부승선을 삼고 최림수로 시비서감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기축 십육년 춘 정월 신미에 평장사 최보순이 졸하였다. 신묘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이월 병오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임자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동진인이 함주(함흥)에 와서 화친을 청하나이다」라고 하매 친히 식목록사 로연을 보내어 가서 약속을 듣게 하였다. 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송상 도강 김인미 등 이인이 제주의 표풍민 량용재 등 이십팔인과 함께 왔다. 삼월 경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경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하 사월 신해에 가뭄(한)으로 우제하였다. 오월 갑술에 노연이 동북면으로부터 돌아왔다. 때에 동계부방장군 김중온이 소하기를「로연이 겁유하여 동진으로 더불어 약속을 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니 최우가 노하여 로연을 가구소
53)에 가두고 전거제현령 진룡갑으로 장평진장을 삼아 동진과 약속하게 하였다. 조하기를「농사가 바야흐로 성기에 이르렀는데 교양(가뭄)이 재해가 되니 진실로 형정이 잘못된 데에 연유한 것으로 짐은 심히 두려워하노라 그 이죄(참교) 이하의 류배인은 양이하고 인도는 모두 사유하여 주라」고 하였다. 무인에 동진이 화주에 침구하여 우마와 인구를 약탈하므로 진룡갑이 사람을 보내어 이를 설유하니 모두 버리고 갔다. 무자에 비를 빌었다. 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기우하였다. 육월 무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북변인전별장 예작은 반복다사한 자로 죄를 범하여 일찌기 화주에 류배되었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동진의 도로의 이(평탄)험과 원근을 안다 하므로 동북면병마사 최종재가 이를 믿고 작 등 삼인을 보내어 동진국에 들어가 소식을 청탐케 하였더니 작은 동진에게 말하기를「우리 나라에서 화호하고자 한다」라고 하니 동진도 또한 그 말을 믿고 작의 일행인을 돌려 보내고 회보를 기다렸으나 우리 나라에서 유예미결하여 회보치 않으니 동진은 작이 거짓말을 하였다 하여 이를 참하였다. 추 칠월 임진에 양부가 최우의 집에 모여 동진을 비어할 방책을 의논하였다. 팔월 갑진에 상서좌복사로 치사한 유자량이 졸하였다. 경술에 유사가 최종재가 제마음대로 예작을 동진에 보내어 변방의 틈이 생기게 되었음을 탄핵하거늘 량주부사로 좌천시켰다.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해에 동진 사십인이 온적한을 추격한다 탁언하고 화주에 이르렀다. 갑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구월 무진에 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윤이 졸하거늘 삼일간 철조하였다. 병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십일월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인 십칠년 춘 정월 경오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갑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차주로 추밀원부사 어사대부를 삼았다. 경인에 문하시랑평장사 금의가 졸하였다.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큰 기근으로 길에 아사한 자가 서로 바라볼만큼 많았다. 이월 병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윤월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기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삼월 기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정사에 전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사월 임술 삭에 일식이 있었다. 갑술에 성변으로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고 이를 가시었다. 오월 갑인에 도적이 대묘구실의 루세로 올린 바 옥책의 가장 자리에 장식한 백금을 절취하였따. 을묘에 가뭄으로 다시 우제하였다. 육월 임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구월 무신에 묘통사에 행차할새 왕가가 절 문 밖에 이르러 말이 놀래어 땅에 떨어지니 지어사대사 왕유가 견룡 행수를 호가에 불근하였다 하여 하옥하였더니 어사대부 차주는 다만 견룡 이인만을 핵파하였다.

 

묘신 18년 하 4월에 가물(한)었다. 5월 병수삭에 오랜 가뭄으로 중외의 죄수를 사하였다. 무자에 다시 우제하였다. 6월 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8월 병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몽고원사 살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를 무찔렀다. 9월 을유에 재상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3군을 내어 써 몽고병을 방어할 것을 의논하고 대장군 채송년으로 북계병마사를 삼고 또 제도병을 징집하였다. 병수에 몽병이 구주성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임신에 3군이 발정하였다. 계사에 몽병이 서경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정유에 몽병이 황주 봉주에 이르니 2주의 주수가 백성을 거느리고 철도에 입보하였다. 계묘에 북계가 치보하기를 「몽병이 용주(천용)를 포위하니 성중이 항복을 청하고 부사 위소가 사로잡혔다」라고 하였다. 임자에 몽병이 선 곽 2주를 함락하였다. 동 10월 계축 삭에 몽고의 2인이 첩문을 가지고 평주에 이르거늘 주에서 곧 이들을 잡아 가두고 알리므로 조의가 분운하여 혹은 죽이는 것이 옳다 하고 혹은 마땅히 그 사유를 물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전중시어사 김효인을 보내어 가서 묻게 하였더니 첩문에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함신진에 이르렀을 때 영항한 자는 모두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 나라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돌아 가지 않을 것이요 항복하면 마땅히 동진으로 향하여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수에 지진 하였다. 임신에 랑장 지의심이 평주에 가두어 두었던 몽고인 2명을 압송하여 서울에 이르니 한 사람은 몽고인이고 한 사람은 여진인이었다. 이로부터 국가에서는 비로소 몽고병임을 믿게 되었다. 몽병이 구주를 공격하여 성곽 200여한을 파괴하였으나 주인들이 따라 곧 수축하여 써 지켰다. 계유에 몽병이 제성의 항졸을 거느리고 성을 포위하여 포를 신서문요해처에 28개소나 셰우고 공격하여 또 성랑 50한을 파훼하고 넘어 들어와 교전하니 주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대패시켰다. 이 날에 3군이 안북성에 주둔하니 몽병이 성하에 이르러 도전하거늘 3군이 나가 싸우지 않으려 하였으나 후군진주 태집성이 싸울 것을 강요하므로 3군이 성외에 출진하였으나 진주 지병마 등은 모두 나오지않고 성에 올라가서 바라만 보니 집성도 또한 성으로 들어왔다. 3군이 이에 적과 싸웠는데 몽병은 모두 하마하여 대를 나눠열을 짓고 기병은 우리 우군을 돌격하여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지매 우군이 어지러워지는지라 중군이 이를 구원하다가 또한 어지러워져 다투어 성으로 들어오니 몽병은 이김(승)을 타 쫓으라니 살상이 반이 넘었으며 장군 이언문 정웅과 우군판관 채식 등이 전사 하였다. 갑수에 친히 승3만을 3일간 공양하였다. 신사에 동계 화주가 치보하기를 동진병이 화주에 침구하여 선덕도령을 사로잡아갔다고 하였다. 11월 정해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항이 졸하였다. 계사에 북계분대어사 민희가 환주하기를 「희가 병마판관 원외랑 최계년과 같이 3군의 지휘를 받고 가서 몽병을  호괴(호)하니 한 원사가 있어 자칭 권황제라 하고 이름은 살례탑이라 하였습니다. 전려(모피의천막)에 앉아 금수로 장식하고 부인을 좌우에 나열시키고 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능히 고수하려면 고수하고 능히 투배하려면 투배하고 능히 대전하려면 대전하도록 속히 결정할 것이다. 너의 관직은 무엇인가 함으로 대답하기를 분대관인이라 하였더니 너는 이 소관인인지라 대관인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고 말하더이다.」라고 하였다. 갑신에 오군병마를 가발하여 써 몽병을 막게 하였다. 몽병이 평주에서 그 특첩자를 가뒀으므로 먼저 이를 멸코자하여 경수 야 미명에 성중에 돌입하여 주관을 죽이고 그 성을 무찌르고 인호를 모두 불태우니 계견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신해에 몽병이 평주로부터 선의문외에 래둔 하고 포도원사는 금교에 둔하였으며 적거원사는 오산에 둔치고 당고원사는 포리에 둔쳤는데 전봉군이 례성강에 도달하여 려사를 불지르고 인민을 살략함이 가히 헤아릴 수 없으므로 경성에서는 놀라 소동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12월 임자 삭에 몽병이 경성 4문외에 나누어 둔치고 또 흥왕사를 치거늘 어사 민희를 보내어 호괴(호)하고 화친을 맺었다. 그 다음 날에 희가 또 몽고병의 둔소에 가서 몽사 2인과 하절 20인과 함께 오니 지각문사 최공에게 명하여 접반사를 삼고 의장를 갖추어 선의문외에 출영하여 선은관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 때에 살례탑은 안북도호부에 주둔하면서 역시 사자 3인을 보내와 강화할 것을 일깨웠다. 그 다음 날에 궁궐에 나오거늘 왕이 태관전 뜰에 내려가 북면하고 맞이하니 몽사 가 이를 말림(지)으로 왕이 이에 남면하고 배례를 마쳤다. 몽사가 털 의관을 쓰고 궁검을 차고 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자라삼와 속대를 주어 고쳐 입게 하였으나 몽사가 좇지 않고 다만 겉으로만 걸쳤다. 왕이 연위하매 몽사가 왕에게 문첩 1통을 받치니 그 첩에 말하기를 「하늘의 기력을 가진 하느님이 내려 보낸 말씀이시니라.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잡았는데 이들은 눈이 먼 자가 있고 손이 떨어져나간 자가 있고 다리가 썩은 자가 있었다. 그래서 성지가 내려서 살리타화리적54)의 군을 가게하여 너희에게 묻기를 투항을 기다리고 있느냐 맞아 죽기를 기다리고 있느냐 하였다. 쥐해54)(서아년)에 흑거란이 너희들 고려국으로 토벌해 들어갔을 때에 너희들은 번갈아 이에 당했으나 그들을 좇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찰자55) 하칭 두 사람을 보내어 군을 이끌고 흑거란을 잡아서 모조리 죽였다. 너희들이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왔던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흑거란을 처리해 주지 않았던들 너희들은 도시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 사신이 데리고 간 1녀에게는 투배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투항해 오는 것이 어떻겠는냐고 사신 과고여를 너희에게 보내고서는 토벌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과고여56)는 없어지고 다시 사신을 과고여를 찾기 위해 보냈는데 너희들은 궁시를 써서 찾으려온 사람을 쫓아 돌려 보냈는가 이런 것으로 보아 반드시 너희들이 과고여를 살해한 것이며 우리는 이를 문책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황제의 성지에는 말씀하기를 만약에 너희들이 전쟁을 바란다면 우리들은 함께 싸워서 끝까지 해볼 것이다. 또 만약에 투항해 온다면 전에 이미 투항해 온 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만약에 너희가 백성들을 사랑하고 이낀다면 전의 사람들과 같이 투항해 오라. 그러면 너희에게 나갔던 우리 사신들은 속히 곧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전쟁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다음 건을) 알아야 한다. 즉 (몽고) 황제의 대국토에서는 몽고인들은 사방 주위의 국토를 모두 수취 하였는데 투항해 오지 않는 나라들도 모두 수취 하였던 것이다.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면 이미 투항해 온 사람들도 함께 타멸해 버리겠다. 또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희들의 재물을 모조리 겁탈몰수해 버릴 것이다. 듣거라 너희들이여 고려국왕이 나오도록하라 너희들의 백성 가운데서 투항해 온 자는 여전히 안심하고 살게 하지마는 투항해 오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죽여버리기를 마치 범해57)(호아년)에 투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것과 같이 하겠다. 투항해 온다면 그 뒤에는 우리들은 단지 한 집안이 될뿐아니라 (그 이상으로 친밀해진다.) 그렇게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 보내는 사신의 이름은 아토이다」라고 하였다. 을묘에 금주기 대소잔반 각 일부 은병 수달피 의주 저포 등물로써 삼원수에게 주고 또 사자에게도 차등 있게 주었다. 병진에 회안공 정을 보내어 토물로써 살례탑에게 주었다. 정사에 몽병이 광 충 청주를 향하였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유에 몽사 8인이 와서 응요(매·새매)를 구하였다. 임수에 몽사를 내전에서 향연하고 정묘에 사람을 보내어 당고 적신 및 살례탑의 자에게 은 각 5근 가포 10필 마포 2000필 마안 마요 등물을 주었다. 갑수에 장군 조숙창이 살례탑이 보낸 몽사 9인과 함께 첩을 가지고 오니 그 첩에 말하기를 「몽고 대조국 황제의 성지로 오로지 살리타화아적에 명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국으로 나아가게하여 어째서 사신 저고여를 죽였느냐를 묻게하라 하였으니 삼가 이 성지를 받들었는바 우리가 역(초마)편으로 나가게 한 사신이 거기에 도착하면 그 사신에게 투배를 하고 령공58)이 진상하는 물건들은 모조리 이곳으로 송촌케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물건 가운데 찾아보이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포자와 내자59)일것이냐 우리가 요구한 좋은 금은 좋은 주자 수달피 #(1-583)람 및 좋은 의복을 너희들은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다만 그 말을 어기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금은 의복을 많을 경우에는 마땅히 20000필의 말에 실어 올 것이고 적을 경우에는 10000필의 말에 실어 오도록 하라. 우리 대군은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입고온 의복이 모두 해어졌다. 그러니 일백만 군인의 의복을 너희들이 짐작해서 보내라. 이러한 특별 진상품 이외에 또 진품의 자색 비단 10000필을 바쳐 오너라 너희들이 바쳐 왔던 수달피 230개는 좋은 물건이니 자색  비단을 보내올 때 이번에는 좋은 수달피 20000개를 보내오도록 할 것이며 너희들의 관용마 가운데서 10000필의 대마와 10000필의 소마를 골라내어 가져오도록 하라. 왕손 가운데의 사내아이와 그리고 1000명의 공주 대왕들의 군주를 황제에게 바치는 외에 또 대관인들의 딸들도 역시 보내라. 너희의 태자는 대왕들의 아들 및 대관인의 사내아이 1000명 그리고 역시 계집아이 1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황제에게 진정해서 인증을 받도록 하라. 너희들은 이런 공무를 재빨리 처리해야 한다. 너희들이 차후 빨리 이를 끝내면 너희들의 땅은 평온하고 쾌화할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곧 처리 안되면 너희들은 오랫동안 잠도 편안히 못자고 걱정이 쌓이리라. 이제 우리 사신을 역마편으로 보내니 우리가 요구한 물건들을 재빨리 보내오라. 이리하여 우리 군대도 곧 돌아 올 수 있게 하라. 물건들을 늦게 보내오면 우리 군마를 거기에 두어야 하니 돌아옴이 늦어질 것이요 (그러면)너희들 고려 백성들을 위해서 득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많고 적은 물건들은 백방으로 노력하면 군현의 지방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너희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기만 하면 우리가 거기서 금은 재물을 토취할 것이다. 너희는 말하기를 뼈를 깎고 살을 에이어서 힘을 기울인다 하였으니 이 말을 꿈에서라도 잊지 말라. 국왕이 잘 투항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사신을 보내어 우리 군대에게 말해서 너희 백성에게 살상을 가하지 말도록 일러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이 전일처럼 마음대로 길을 안전하게 왕래하도록 해준 것이다. 이상 사실을 알리어 보낸 사신인 오로토61)와 지빈목의 2인은 도호 3군 (진중)에 들어갈 것이니 (그러면) 진주는 권황제62)의 본영소에 투항 하라」고 하였다. 을해에 몽사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정축에 만루봉개주자 대잔 각 일부 세저포 2필 성마(적색마) 1필 은도금장안교자 만수첨을 당고원수에게 주었다. 경진에 몽사가 국진(국가선물) 황금 70근 백금 1300근 유의 1000령 마 170필을 가지고 돌아갔다. 장군 조시저를 보내어 황금 12근8량 여러 금주기 중7근 백은 29근 여러 은주식기 중 437근 은병 116구 사라금수의 16 자사오자 2 은도금요대 2급 주포유의 2000 달피 75령 금식안자구마 1필 산마 150필을 살례탑에게 주고 또 금49근5량 은 341근 은주기 중 1080근 은병 120구 세저포 300필 달피 164령 릉사 유의 안마 등물을 그 처자와 휘하장좌14관인에게 나눠주고 조숙창으로 대장군을 삼아 함께 가게 하고 몽사에게 부쳐 황제에게 올린 표문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일찍이 대방의 구위함을 입어 우리의 사직을 완보하였으므로 간절히 영세토록 화호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손자에 이르기까지 어찌 이심을 두어 감히 후혜를 저버리리까 하조를 복승하니 깊이 심중에 근심되나이다. 일이 혹 가히 진술할 것이면 정을 어찌 숨김이 있으오리까 그 저고여를 살해한 사실에 있어서는 린구의 저지른 비이니 성지로써 쉽사리 밝히실 줄로 생각하오며 그가 경유한 바로도 또한 증험할 수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온 사인에게 활을 쏘았다는 일은 이보다 앞서 가불애가 상국의 복양을 위작하고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매 변민이 오랜후에야 그 (상국인) 아님을 알았는데 금춘에 또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 바야흐로 이를 구수하였더니 이윽고 그 인물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버려둔 모의 백관 안마 등 물건을 주었는데 백관을 썼으므로 써 비록 그 거짓임은 알았으나 오히려 이를 의심하고 현관에게 장치케하여 장차 대국에서 오는 사람을 기다려 그 진위를 분별하고자 하였던 바 이제 이것을 모두 상국의 대군에게 부쳐 보냈은즉 다른 뜻이 없음은 여기에서도 가히 알 것입니다. 또 아토 등을 결전한 일은 처음에 결친한 대국이 이에 무고히 소방에 폭력을 가하리라고는 뜻하지 않고 구적의 래침으로 추측하여 군사를 내어 바야흐로 싸우려 하였는데 문득 2인이 아군에 돌입하므로 어리석은 군사들이 깊이 캐묻지 않고 평주로 포송하였는데 평주인은 그들이 도망할까 염려하여 약간 쇄뉴(칼)을 씌우고 조정에 알렸으므로 조정에서는 통역을 보내어 살펴보니 그 말이 자못 상국과 같은지라 그런 뒤에 형틀을 풀어 위문하고 겸하여 의물을 선사하고 통역을 딸려 보낸 것이니 처음에는 비록 불명한 소치라 하더라도 그 실상인즉 또한 용서함직한 것입니다. 또 가불애의 인호가 우리 나라의 성안에 들어와 사는 일은 이 사람들이 일찍 아국의 변민들과 서로 침벌하여 그 원수된지가 오랜지라 변민들이 비록 근심은 되나 어찌 원수와 함께 삶을 용허 하오리까. 사실이 점점 밝혀지리니 말을 가히 꾸며하리까. 그 투배의 일도 사전에 하칭(함진)과 찰자가 왔을 때에 이미 일찍 투배하였으며 지금 화사가 오므로 인하여 구년의 호를 거듭 강케 되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건곤63) 같이 복로하고 일월 같이 조임하여 실과 정을 물어 살펴 진실로 포황의 도를 넓히시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더욱 향상의 의를 닦을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임진 19년 춘 정월 임오에 몽사가 오거늘 계미에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임진에 몽병이 돌아갈새   회안공 정과 수재 김취려 대장군 기윤숙 등을 보내어 위송하였다. 병신에 법왕사에 행차 하였다. 충주의 관노들이 난을 일으키니 재추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발병할 것을 의논할제 주의 판관 유홍익이 사자를 보내어 무유할 것을 청하므로 곧 주서 박문수와 전봉어사 김공정을 내시에 가속시켜 안무별감을 삼아 써 보내었다. 기해에 대장군 박돈보러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우간의 류준공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최림수로 지서경유수를 삼았다. 계묘에 경성에 계엄을 해제 하였다. 정미에 안무별감 박문수는 충주로부터 돌아오고 김공정은 (충)주에 머물러 평정되기를 기다리더니 노군도령령사 지광수와 승 우본 등이 서울에 올라왔다. 2월 임자 삭에 364)군이 반사하고 3령군만 머물러 방수케 하였다. 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진에 회안공 정이 몽고사신 도단의 상하절66) 24인과 같이 왔다. 경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재추들이 전목사에 모아 이도를 의논하였다. 임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왕이 양시방별감궁으로 이어코자 하니 도단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고려국사를 도통하기 위하여 차사로 여기에 왔으니 장차 대내에 들어가 있겠다.」라고 하므로 조의가 이를 어렵게 여겨 광화문을 닫고 우승선 유경현에게 명하여 가서 타일러 이를 중지하도록 하고 드디어 맞아 잔치하려 하였는데 도단은 왕으로 더불어 연좌코자 하고 또 인하여 대내에 처하고자 하거늘 힐난하기 저녁에 이르러서야 연회에 나왔다가 객관으로 돌아갔다. 3월 갑신에 도단은 객관의 영송판관랑중 민회적이 능히 지급공대치 못한다하여 장살하였다. 병수에 도단이 또 관사가 료적함으로써 인가로 옮기고자 하매 금주기 일사와 저포 80필을 주니 이에 중지 하였다. 도단은 본시 거란인으로 성질이 심히 간점하여 전자에 몽병을 청하여 강동성에 와서 자기 나라 군사들를 멸하게 한 자이었다.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몽사 6인이 먼저 돌아가거늘 통사 지의심과 녹사 홍거원 등을 보내어 국신을 가지고 가 서를 살례탑에게 부쳐 말하기를 「매양 온 문자내에 언급한 제반사는 뒤이어 회보토록 하겠나이다. 또 회안공 정의 받은 서간을 보니 일컫기를 너희 나라에서 인호를 선택하여 개주관(만주봉황성의 성지방)과 선성산록에 가서 농사짓고 살게 하라고 하였는데 그윽히 생각건대 대국이 땅을 나누어 주는 까닭은 장차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갈아 먹게 함인즉 그 의리는 흔감하나 우리 나라 여러 곳의 인민과 우축 등이 물고(사망) 손실된 것이 심히 많은 고로 이 한 나라의 조그마한 땅도 오히려 다 갈아먹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궁색하여 풀이 우거지게 되었거늘(국위무초) 하물며 막원한 대국의 땅에 장차 어떤 인물을 보내어 경작하게 하리요 힘에 감당치 못할 바인지라 도리에 강면키 어려우니 오직 큰 도량으로 이를 양해하라」고 하였다. 서경도령 정응경과 전정주부사 박득분을 보내어 배 30소와 수수(수부) 3000인을 거느리고(압) 용주포에서 출발하여 몽고에 가게 하니 이는 그 청에 따른 것이었다. 몽고군 30여인이 다시 경내에 들어와서 선주창미 30석을 끄내어갔다. 하 4월 임수에 상장군 조숙창과 시어사 설신을 몽고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칭신하고 라견 릉주 각 10필과 제반의 금은주기와 화첨 화선 등물을 바치고 인하여 글을 살례탑에게 보내고 금은기명 필단 달피 화선 화첨을 주고 그 휘하 16관에 이르기까지 또한 차등 있게 주었다. 그 글월에 말하기를 「전자에 황제에게 바치라는 물건중에 수달피 1000령은 좋은 것으로 보내어 오라는 일은 우리 나라에 이러한 물건은 이전에 일찍이 잡은 것이 없었는데 귀국이 징구한 후로부터 비로소 백계로써 이를 잡았으나 또한 많이 얻을 수 없는 고로 매양 공부를 바치는데 준비하기 어려우며 금번 수삭(요구)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구하기 또한 어려움으로 응부에 감당치 못할 듯하나 사방에 널리 찾아서 달로 모으고 날로 쌓았으나 아직 그 수를 채울 수 없어 대략 977령을 바치니 오직 조량하기 바라며 또 일컫기를 국왕 제왕 공주 군주 대관의 동남 500명과 동녀 500명을 꼭 령률하여 보내라고 한 것은 전서에 소재한 바와 같이 아국의 법은 비록 위의 임금이 된 자라도 오직 1인의 적실을 짝(배)짓고 다시 잉첩(소실)이 없는 고로 왕족의 자손(지엽)이 대개 번성하지 못하며 또 나라가 협소한 까닭으로 신료로서 열에 있는 자도 또한 많지(사사) 못하여 소취가 일처에 지나지 않음으로 소산(자녀)이 혹은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며 있어도 많지않으니 만일 모두 상국에 보내면 누가 그 왕위와 및 조정 유사의 직을 이어받아 써 대국을 봉사 하리요 만약 귀국이 폐읍을 무존하고 만세에 통호케 하려면 청컨대 편방 작은 땅의 감당하지 못할 이같은 것들을 멸면하여 써 적은 것을 사랑하며 약자를 부뜰어 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심히 다행할 것이오 또 일컫기를 제반 공장을 보내라고 한 것은 우리 나라의 공장은 예로부터 흠소하며 또 기근과 질역으로 인하여 또한 많이 없어졌고(물고) 더구나 귀국의 병마가 대소의 성보를 거쳐 갔으므로 해를 입었거나 피구된 자가 불소하여 이로부터 사라지고 분산되어 정착하여 전업하는 자가 없는 고로 절차대로 압송하여 명에 응할 수 없게 되었거늘 하물며 자수하는 부인은 본래부터 없었음에랴 이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는 것이니 이 정상을 량지하여 가엾이 살펴 주기를 엎드려 바라며 또 조(숙창)병마처에 부탁한 바 의주민호를 조사하여 물색하라는 일은 이미 일찍 그 지방(의주)의 병마에게 령을 내려 조사케 하였더니 고하기를 성직이(성수)와 민호(백성) 등이 떼(부)를 타고 급히 도망하다가 바람으로 물에 빠졌으므로 곧 분명히 조사할 수가 없다고 하니 청컨대 이를 조실할 것이오 그 외 서한 속에서 언급한 바는 일일이 승품할 것이라 또 귀국이 회군할 때에 두고 간 척마는 각 처에서 찾아 모으니 무릇 15필임으로 곧 수관하여 양목케 하다가 이번의 행이(사자)에 함께 보내어 봉정케 한다」라고 하였다. 오월 정해에 가뭄으로 다시 우제하였다. 신축에 문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재추들이 선경전에 몽병의 방어를 의논하였다.  계묘에 사품이상의 관인들이 모여 또 회의할제 모두 성을 지켜 적을 막자 하는데 오직 재추 정무 태집성 등은 말하기를 도읍을 옮겨 피난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기유에 북계의 용강 선주에 몽고의 달로화적 4인이 왔다. 6월 경수 삭에 왕비 왕씨가 훙거하였다. 정사에 최우가 사람을 보내어 전왕을 자연도에서 맞아드리게 하였다. 신유에 왕후를 장사하였다. 갑자에 교위 송득창이 지의심의 사행으로부터 도망하여 와 말하기를 「의심이 살례탑의 처소에 이르니 살례탑이 노하여 말하기를 전에 보낸 문첩내의 사건들을 어찌 판출하여 보내오지 않느냐고 하면서 의심을 몽고 황제의 처소로 잡아 보내고 그외 사람은 모두 잡아 가뒀다」라고 하였다. 을축에 최우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에 천도하였다. 병인에 우가 이령군을 발하여 비로소 궁궐을 강화에 경영하였다. 추 7월 경진 삭에 몽고의 사신 구인이 오거늘 왕이 조를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니 (몽사는) 사일간 머물다가 돌아갔다. 지문하성사 김중구 지추밀원사 김인경을 명하여 왕경유수병마사로 삼아 팔령군으로써 진수케 하였다. 임오에 안남판관 곽득성이 백악 등처의 적괴 20여인을 초무하여 래투케 하였다. 내시 윤복창을 보내 북계제성에 가서 달로화적의 궁시를 탈취케 할새 복창이 선주에 이르니 달로화적이 이를 사살하였다. 을유에 왕이 개경을 발하여 승천부에 이르렀다. 병수에 강화객관에 입어하였다. 8월 기유 삭에 서경순무사 대장군 민희가 사녹 최자온으로 더불어 비밀히 장교들을 시켜 달로화적을 죽일 것을 꾀하니 서경인이 이를 듣고 말히기를「이와 같이 하면 우리 서울은 반드시 평주와같이 몽병의 멸할 바가 되리라」하고 드디어 반하여 임수에 최자온을 잡아 가두니 유수 최림수 및 판관 분대어사 육조원 등이 모두 저도에 도망해 숨었다. 병자에 참지정사 유승단이 졸하였다. 9월에 몽고관인에게 답하는 글에 말하기를 「막부가 멀리 천리를 답섭하여 폐경에 왕림하고 먼저 회음(교시) 줌을 엎드려 받으니 흔감흔감이 오나 다만 힐문한 몇가지 일은 실로 우리 나라의 본의가 아니므로 깊이 이로써 두려워하여 감히 복심을 펴오니 오직 바라건대 큰 도량으로 이를 가긍(긍)히 여기소서 그 말한 바 너희는 공교한 말로 우리를 설득하여 보낸 뒤에 문득 변개하여 해중(강화도)에 들어갔으며 불충실한 사람인 송입장 허공재 등 2인이 와서 황당한 말을 하였는데 너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맏은 것이니(해중에서) 돌아오라 한 일로 보면 아국이 상국과 통호한지 오래인데 근경에 송입장이란 자가 와서 말하기를 상국이 장차 대병을 들어 폐읍(아국의 겸칭사)을 래정한다 하므로 그 말을 가히 믿지 아니치 못할 것이 있어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 기운을 상실하여 과반이나 도망하므로 성읍이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대개 뢰정이 한 번 떨치면 천하가 함께 놀라게 되므로 나도 또한 능히 두려움이 없지 못하였으며 또 생각건대 적은 유민이나마 만약 일조에 휩쓸려 모두 도망가면 해마다 공부를 바치며 길이 대국을 섬길 수 없을 것이 염려되므로 인하여 많지 않은 남은 인구로 더불어 장독 비습한곳에 들어와서 겨우 삶을 구할 따름이니 어찌 타심이 있으리요 천신지지가 실로 이를 조감할 것이외다. 또 이르기를 달로화적을 죽이려거든 죽여봐라 이제 너희들은 달로화적을 포박했다지 라고 한 일로 보면 달로화적으로서 경읍에 있는 자에게는 접대를 매우 삼가히하여 조금도 뜻에 거스리지 않게 한 것을 대국이 어찌 듣지 못하였나이까 또 여러 성에 있어서도 특히 후대케 하였으나 그 사이에 혹시 나라에서 지시한 바와같이 아니하는 자가 있는 것은 나도 또한 일일이 이를 알지 못하노니 오직 상국은 이를 명찰하소서 그 토조의 사인을 나포한다는 것은 이러할 리치가 없으니 뒤에 조사하면 알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너희가 본심으로 투항한다면 나와서 우리를 맞을 것이오 본심으로 투항하지 않는다면 군마를 내어 우리와 서로 싸우자 라고 한 것을 보면 지금 대군이 원야에 포로되어 있다고 듣고 있으니 비록 대국이 이를 설유하지 않더라도 소국에 있어서는 례의상 마땅히 친히 나가서 몽고군을 영접하여 호괴(호)하여야 할 것이나 폐읍이 요심(심원)한 편지에 옮긴 것은 본래 상국의 시킨 바가 아니어서 진실로 구책이 없을 수가 없음으로 또한 황공하고 부끄러워 때로 전알치 못하였을 뿐이오 투항하는 마음은 하나이오니 어찌 이심이 있으리오 또한 소국은 비록 우매하나 이미 대국에 외복하는 의리를 알아 그 향응한지 오랜지라 어찌 금일에 있어서 이에 반역의 마음을 내리오리까 우러러 바라건대 명감하여 과실을 용서하고 소국을 사랑하여 외번을 무존함이 실로 나의 소망이외다.」라고 하였다. 동 11월에 몽고 사타관인에게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 「전자에 대국에서 왕이 출교(영접)하지 않거던 대관인을 보내라고 소국에게 말함은 전서에 기재한 바와 같음으로 비록 대국을 두려워하여 이곳에 들어와 있으나 근앙하는 마음은 더하여 마지않는 고로 감히 엄명을 어기지 않고 이미 대관인 모를 보내어 막  하에 나아가 바야흐로 응답을 기다리는데 다시 국왕이 출교하지 않거던 최령공71)을 출래케 하라는 일로써 언급하니 소유가 연달아 이르기를 이와 같이하매 폐읍이 장차 이를 어찌하리요 바라건대 막하는 이 궁박한 사정을 량찰하고 조금 너그러움을 보여써 귀향하는 희망에 맞도록 하면 제행심일가 하며 그 황제처에 보낸 국신물인 즉 비록 힘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여 준비에 부지런히 하였으나 마침 소국이 이사함에 당하여 많지 않은 인민으로 더불어 창졸히 해중에 들어왔으므로 운반한 재물이 또한 흠소한 고로 미박한 토물로써 애오라지 정성만을 표코자 하였으나이다. 지금 균지를 받으니 다시 소유한대로 다 바치라는 말이 비쳤음으로 전수에 조금 더 첨부하여 봉진하오니 참공참공이오며 조병마 송입장을 보내라는 일은 숙장이 상국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불행히 심복의 병을 만나 지금에도 오히려 안쾌치 못하므로 곧 발주치 못하며 소위 송입장이란 자는 우리 나라의 천도가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뒤에 우리 나라의 양차(양반) 사좌가 상국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입장의 말한 바는 본래 상국의 뜻이 아니므로 가히 적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 라고 하므로 이에 조정의 첨의는 이 사람은 특히 부설망언으로 중심을 동요시킬 뿐 아니라 만인으로 하여금 도망하게하여 일국으로 하여금 이곳에 천도케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하여 드디어 깊은 해도로 포송한지 오래였으나 지금 내명에 의하여 이미 사람을 그곳에 보내어 장차 붙들어 오게 하였으니 오직 조량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며 황제에게 올린 진정표에는 말하기를 「하국의 경수하는 정성은 교칠보다 더욱 굳사온데  상조가 견책의 위를 가하여 뢰정이 홀연히 진동하니 명령을 듣고 두려워하여 소리를 잃고 호소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용자로써 황복에 기탁되어 천림의 덕을 앙대하여 온 나라가 힘입어 살며 성공의 마음을 돈독히 달려서(독치) 풍화에 향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더니 어찌 힐책이 이와 같이 거듭하나이까 힘에 감당치 못할 바에 마땅히 정성으로 고할 것이오 말을 만일 반복할진대 마땅히 사실대로 진술할 것입니다. 그 조지에 소급한 바 군병을 첨조하여 만노를 정토하자는 일은 이 벽토에 있는 폐읍은 본시 소국이요 더욱이 대군이 거쳐 갔으므로 유민이 몇 사람이나 있으리까 살아 있는 자들도 오히려 상이한 남어지인데 더욱이 기근과 질역으로 인하여 죽은 까닭으로 천병(몽고)의 용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제명의 엄을 어기게 되었나이다 그 죄는 비록 도피할 수 없으나 정상은 또한 용서함직한 것입니다. 그 친히 몸소 조회하라는 일은 계통하심을 들은 때로부터 마땅히 진작 관광하였어야 할것이오며 더욱이 사신으로서 구천(제궁)에 친알함은 진실로 바라던 바이오나 번위(왕위)를 일일이라도 비우기 어려우니 이에 실로 황공한 일이외다. 그 인호를 들어내어 살례탑으로 하여금 수를 헤아리게 하라 한 일은 뜬말(유설-부언)의 전하는 바 대병이 장차 정토해 올 것이라 하매 우민은 미혹되기 쉬운지라 항산을 들어 많이 도망하니 이는 보든 무리가 다같이 하는 일리므로 형세가 진실로 금히기 어려운지라 돌아보건대 가호가 소연히 쓸어버린 듯 이에 도리어 무성한 풀밭이 될 것이니 만약 군신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면 포모의 공물도 바치지 못할가 두려워하오니 바라건대 잔구를 모아 길이 대방을 섬기겠나이다. 비록 강해의 사이에 잠겨 있으나 우히려 운소의 위에 몽매함은 실로 두려운 데에서 그리 된 것이니 성명이 의심치 않기를 바라나이다 마음이 시종에 전일하면 땅의 피차를 어찌 논하리까 복망컨대 봉애(풀쑥)의 생을 생각하시와 만약 일국을 온전히 허용하시면 산야의 부를 받드는데 반드시 제후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상(계)에 말하기를 「신이 한 두가지 소망하는 사건을 이미 표문을 갖추어 말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 #(1-598)힐한 바 있으되 다 진술치 못한 것을 표내에 갖추어 기재치 못하고 상(계)로써 진포하나이다. 폐읍은 본래 해외의 소방인 바 역대 이래로 반드시 사대의 례를 행한 후에야 능히 그 국가를 보전하였던 고로 전자에 일찍이 대금에 신사하였으나 금국이 망(정일)함에 이른 뒤에야 조공의 예가 비로소 폐하여지게 되었나이다. 지난 병자년에 거란이 크게 군사를 들어 우리 변경에 난입하여 횡행하며 폭학을 자행하였는데 기묘년에 이르러 우리 대국에서 장수 하칭(함진)찰랍(자)을 보내어 군사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여 그 무리를 일소하니 소국이 입은 은혜가 불소하므로 투배의 예를 강수하여 드디어 하늘을 향하여 맹고하고 만세에 화호할 것을 약속 하였으며 인하여 해마다 바치는 공부의 편리함을 청하였던 바 원수가 말하기를 도로가 심히 막히어 너의 나라에서는 반드시 래왕이 곤란할 것이라 매년 아국에서 사좌를 보내되 10인에 불과할 것이니 그 올 때에 가지고 가도록 할것이오 올 때에는 길을 반드시 포선만노의 지경을 취할 것이니 너희는 이것으로 써 조험하라고 하였나이다. 그 뒤로부터 사좌의 옴이 한결같이 약속대로 하였으며 매양 우리 나라에서는 꼭 국신예물을 부쳐 궐하에 바쳤는데 유독 갑신년에 사신 저고여가 만노의 지경을 통하지 않소 파속로로 좇아 왔으나 구예와 같이 대우하기를 삼가히 하고 또 국신물을 부쳐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그 뒤 사신으로 오는 자가 조금 희활하게 되므로 소국에서는 저윽히 그 까닭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더니 오래 있다가 들은즉 우가하는 중로에서 가로 막고 나와 상건의 사신을 죽인 소치라 하더이다. 이와같이 된 뒤로 우가하는 거짓 상국의 복장을 차리고 우리 북경에 침입하여 삼성을 잔악하게 파하였으며 만노(포선만노)도 또한 동비의 2성을 공파하니 그 복색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이로부터 뒤이어 들어와 침벌이 불절하였고 또 만노는 상국의 사좌로 아국에 오는 자에게 속여 말하기를 고려가 너의 나라를 배반하니 삼가 들어가지 말라 하였으나 사좌는 듣지 않고 또 그 진위를 알고자하여 드디어 오는데 (만노는) 먼저 그 휘하인을 보내어 거짓으로 우리 나라 복장과 및 궁전을 갖추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량국의 산곡간에 매복시켰다가 가만히 행인(사행)을 기다려 나와 활을 쏘고 나아가 엄포하며 인하여 반행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하기를 고려의 하는 짓이 이와같으니 배역이 분명합니다. 청컨대 앞으로 나아가기를 정지하시오 라고하여 굳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만노의 휘하로부터 도망하여 온 왕호비란 자가 있어 상세히 그 사유를 설명하므로 아국에서는 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아니되어 대병이 입경하였다는 말을 듣고 소국은 통호하였던 녹고로 써 별로 상국의 군사이리라고 생각지 않았는데 오래되어서야 이를 알았으나 행병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더니 수부의 살례탑 대관인이 이문하여 말하기를 너희의 나라에서 우리 사신 저고여를 죽이고 또 동로의 사신을 쏜 것은 무슨까닭이냐 이로써 군사를 행하여 죄를 묻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상세히 알았으므로 사실을 갖추어 대답하고 다시 투배의 예를 행하였더니 대국도 역시 이 양인의 거짓을 알고 활연히 크게 깨달아 드디어 군사 돌이킴을 허락하였나이다. 바야흐로 대군이 환국할 때에 뒤이어 양번(차)의 행이를 보내어 국신예물을 황제궐하에 봉진하고 군신이 이에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도로가 불통하여 조관을 닦는(수) 예가 막혀 종전부터 통호하던 본의에 크게 어긋났으므로 항상 이로써 염려되었더니 이제 이미 사자를 보내어  성의를 달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축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대국이 항상 우가하와 만노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므로 우리 나라는 자명할 길이 없어 타인을 대신하여 무도 받음을 두려워하였으나 대군의 친히와서 구명함에 의하여 상국의 의심으로 하여금 환연히 어름처럼 풀리게 하였으니 우리는 면케 되었음을 알고 비로소 가히 마음을 편안히하고 생각을 가라앉힐 수가 있게 되어 한결같이 상조에 봉사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문득 송입장이란 자가 지의심의 행이(사행)를 따라 상국에 가 있다가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 대국이 장차 대병을 들어 나오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다 라고 하니 백성들이 듣고 놀라 옆어지며 자빠지며 도망하는 자가 많았고 얼마 있다가 또 들려오기를 북계 일이성의 역민등이 망녕되게 그 성의 달로화적을 권유하여 평민을 살륙하고 또 신의 보내는 내신을 죽이니 이 내신은 상국의 사행을 기다려 만나면 이를 맞아 경사에 오게 하는 자인데 이를 죽이고 인하여 난을 일으켜 대국의 병마가 온다고 성언하였고 또 들려 오기를 상국의 사신이 의주에 도착하여 대선 1천척을 준비하고 군마의 건느길를 기다리게 하였다고 하니 이에 상하가 모두 떨고 놀라지 않는 자 없었으며 도망하는 자 또한 과반수였읍니다. 도망간 집과 잔파된 집이 역역히 잇달아 풀리 욱어지니 이것을 보매 능히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군신들이 그윽히 스스로 모의하기를 만약 유민들이 모두 분산되면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면 그 누구로 더불어 해마다 공부를 판출하여 써 상조를 섬기리요 차라리 이 때를 타서 잔민의 여중을 수합하여 산해의 사이로 입처하면 간략하나마 불전(조품)의 토물로써 상국에 봉사하여 번신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이 되는 것이라 하니 대개 마음 하는바 (심지소속)는 땅에 개계되는 것이 아니오매 (불관어지) 진실로 일심으로써 섬기면 생각컨대 상국도 어찌 반드시 이것으로써 허물을 삼으리오 라고 하고 이에 드디어 계책을 정하였나이다. 아국이 이곳에 천도한 것은 이 뜻에 불과함이니 어찌 타심이 있으리까 천지신명이 실로 조감할 것입니다. 뜻밖에도 대국이 부설의 전한 바로써 대병을 보내어 폐경에 임하여 지내는 곳마다 로약 부녀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용서가 없음으로 온 나라가 정을 잃고 기운을 잃어 전도하고 무서워하여 살 뜻이 없어질 것입니다. 또 군은 천이오 부모이니 바야흐로 심한 근심과 큰슬픔이 이와 같은데 하늘과 부모에 하지 아니하고 어디에 호소하오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는 천지와 부모의 자애심을 미루어 소방의 타의 없음을 량찰하사 대군으로 하여금 원패(차와기) 를 돌이킬 것을 칙령하여 길이 소국을 보호하면 신이 다시 노력하고 정성을 다하여 해마다 토물을 바치고 단심을 표하여 더욱 황제의 천만세의 수를 축할지니 이것이 신의 뜻이외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조금 가여워하는 마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였고 또 살례탑에게 답하는 서에 말하기를 「일깨워 준 바 황제처에 회답올릴 문자의일은 일일히 삼가 받아서 이미 표장을 갖추고 뒤이어 사신을 보내어 나아가게 하였으니 조실하기를 바라오며 우리 나라는 전서에 기재한 바와같이 비록 대군을 두려워하여 산해간에 입처하였으나 상조를 앙봉하는 바는 아직 한결같은 마음이외다. 이러므로 지금 대군이 입경하였다는 말을 듣고 즉시 사좌를 보내어 삼가 영문의 예를 행하였고 이어 굽혀 주신 ---를 받고 거듭 사인을 보내어 불전의 주과 예물을 가지고 좌우를 로문하였은즉 소국의 타의 없음은 또한 이에서 가히 알 것입니다. 진실로 일심으로 섬기는 것은 땅의 피차에 관한 것이 아니오니 바라건대 막부는 반드시 천사로써 허물치 말고 예와같이 대우하여 준다면 실로 소국의 만세의 복이 되겠읍니다. 황제처에 보내어가는 바 사인 일행은 먼저 막하에 가서 처분을 듣게 하였으니 그 사인의 진퇴행지와 화복생사는 막부의 장악에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간곡히 부호를 가하고 잘 지휘하며 겸하여 막하 사인도 차송하여 황제의 궐하에 도달케 하여 길이 소방을 보호하면 나도 또한 감히 감복하여 뼈에 새기지 않으리요 그 대관인이 나와서 투배하라는 일은 소국은 이미 두려워하여 이같은 깊은 곳에 들어왔은즉 비록 대관인이라도 심지가 정상하여 날로 더욱 졸하고 달로 더욱 순하여 급히 좌우에 가서 청명하지 못하니 두려고 전도되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오직 큰 도량으로 관용하소서」라고 하였다. 12월에 몽고대관인에 보낸 글에 말하기를 「금월 모일에 아국의 사자가 왔는데 수부가 새로 대군을 통솔하고 비로소 연막을 연 것을 복문 하였나이다. 순삭에 못되어 선성이 대진하니 모든 열국의 사람들이 눈을 닦고 고쳐 보지 않음이 없어 그 덕음을 입고자 바라는 자들은 다 이러할 것이어늘 하물며 구구한 폐읍으로서는 그 흔약하는 마음이 상류에 만배나 되나이다. 겸하여 균자를 입어 아국의 양반(차) 행이(사행)가 오래 엄유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지금 다 놓아보내니 이 또한 감명의 망극함은 말로다하지 못할 바입니다. 타이른 바 나와 최령공(최우)을 출래하라는 일은 전에 구수부에 서를 올려 진술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이미 대국을 두려워하여 산해간에 들어온 것인즉 그 나아가 뵈오는 것이 날로 겁이 나서 어렵게 된 바이나 경앙하는 마음은 한결같으니 어찌 타심이 있으리요 엎드려 생각컨대 각하는 정상을 량찰하여 관용 하소서 겸하여 타일은 바 조병마를 발견하라는 일은 그가 병으로 지금까지 아직 낫지 않으므로 곧 교시에 의하지 못함이니 그렇지 않다면 숙장은 상국에 왕래하는 것이 관열하였는데 어찌 이제와서 가는 것을 꺼리리까 송입장이란 자는 전에 이미 구수부의 언급을 받아 그 즉시로 사람을 보내어 류배된 해도로 가서 수나하여 오게 하였는데 기다린지 오래 되나 이 때 풍수가 심히 나빠 소식이 묘연하므로 곧 착견치 못하니 황공황공이오다. 앞서 대황제처에 보낸 바 아국의 사좌의 진퇴는 오로지 각하의 지휘에 달려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잘 말씀하여 황제궐하에 달케 하면 행심이겠나이다.」라고 하고 대관인에 답하는 서에 말하기를 「금월 모일에 문득 래교를 받들어 균후의 동지만순함을 자세히 알게 되니 흔희하기 상례에 배나 되나이다. 다만 말한 바 황제처에 회거할 문자의 일은 요사이 오래 황제의 성례가 어떠신지 살피지   못하니 도리에 마땅히 기거를 팽문할 것이어늘 하물며 다시 막부의 설유한 바가 이같음을 받자왔으나 나도 또한 어찌 천자의 휴명에 봉답할 것을 생각지  않으리까 그러나 년전에 대군이 폐경에 임하였을 때에 아국이 누차 보낸바 사좌와 그 짐바리 진(부담) 하졸들이 문득 균자를 입고 드디어 돌려보낸온 까닭에 사자의 왕래가 부절하여 조금도 마음에 의요가 없었으니 이것은  막부께서도 아시는바입니다. (그런데) 지금듣건대 전에 황제처에 보낸 바 양반(차) 사인이 총명을 입고 장차 돌아오다가 마침 대군이 폐경에 이를름을 만나 도리어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고 또 소국은 대군이 입경함을 듣고 곧 사자를 보내어 삼가 영호의 례를 행하였으되 그 사인과 예물을 질머진 인졸이 이제 이르도록 놓아 보내줌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내(우)가 듣건대 옛날에는 교전중에도 사자는 그 사이에 있었다 (왕래)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와다릅니다 그려 교전(병교)도 뜻(본의)하는 바가 아니외다 소국은 대병이 국경에 임한다는 말을 듣고도 오히려 감히 지체하지 않고 간략하나마 변변치 못한 량향으로 행이의 수고를 노문하였는데 도리어 구류를 당하였으니 그 국인들의 우감한 마음에 어찌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리까 그런즉 그 대관인을 보내어 황제의 궐하에 서를 바치라고 함은 더욱 의심하고 두려워할 바이니 엎드려 생각건대 이를 량찰하소서」라고 하였다. 살례탑이 처인성을 공격하니 한 승이 있어 병을 피하여 성중에 있다가 이를 사살하였다. 동진에 답하기를 서에 말하기를 「대저 이른바 몽고란 자는 시기와 잔인함이 막심하여 비록 화친하여도 족히 믿지 못하겠도다 아조에서 그와 화호함은 반드시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서에 통한 바와같이 지난 기묘년(고종6년)에 강동성에서 형세가 부득이하여 인하여 화호의 약속을 가졌고 이로써 년전에 그 군마가 왔을 때에 그들은 비록 맹약을 배반하고 신의를 저버려 행패하기를 이같이 하였으나 아조에서는 생각하기를 차라리 잘못됨은 그에게 있을지언정 그 과실을 본받고자 하지 아니한다 하여서 드디어 처음과 같이 접우하여 예로써 다루었던 것이다 지금 국조가 비록 도읍을 옮겼으나 그 군마가 오는데 당하여도 오히려 대우하기를 더욱 두터히 하였는데 그들은 오히려 이뜻을 조금도 돌어보지 않고 원근의 외경을 횡행하여 잔폭하게 구략함이 옛보다 더욱 심하니 이로 말미암아 사방주군이 성을 닫고 굳게 지키며 혹은 물(수)을 격하여 스스로 굳게하여 써 그 변을 관망하지 아니함이 없으되 그들은 더욱 병단할 뜻을 가지고 공취하기를 도모한다 그러므로 그 열군에 있어서 어찌 반드시 나라의 지휘에 구속되어 화심을 품은 사람과 더불어 어울려 스스로 범을 길러 먹히게 되는 환을 재촉하리요 이어서 특히 들어가 지킬 뿐만 아니라 혹은 가끔가끔 백성들의 참지 못함을 인하여 나가 그들과 싸워 그 관인과 사졸을 살획함이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금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수주(수원)의 속읍인 처인부곡의 소성에서는 바야흐로 (적과) 대전할제 괴수 살례탑을 쏘아 맞쳐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또한 많았으매 남은 무리는 궤산하였다 이로부터 기세를 상실하여 안정함을 얻지 못하여 이미 군사를 돌이켜 가는 것 같도다 그러나 일시에 모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혹은 먼저 가고 혹은 뒤에 가며 혹은 동으로혹은 북으로 가고자 하는 고로 가히 시일을 지정하지 못하겠으며 또 어느 곳으로 향하어 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청컨대 귀국은 비밀히 정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해에 세조와 태조의 두 자궁을 신도에 이장하였다.

 

계사 20년 춘 3월에 사간 최린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금에 갔으나 길이 막혀 도달치 못하고 돌아왔다. 하 4월에 몽고가 조하기를 「거란적을 평정하고 찰자를 죽인 뒤로부터 일찍 한 번도 사자를 보내 궐하로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의 일이요 사신에 명하여 훈언과 성유를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문득 감히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이) 죄의 이요 이등이 저고여를 모해하고 이에 만노의민호가 이를 죽였다고 칭하니 (이것이) 죄의 삼이요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이어 너희 군신(여필)으로 하여금 입조케 하였는데 너희는 감히 항거하고 해도로 들어가 숨었으니 (이것이) 죄의 사요 너희들의 민호로서 구집되지 아니한 현재의 수를 감히 망주하였으니 (이것이) 죄의 오이다.」라고 하였다. 5월에 김경손으로 대장군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서경인 필현보 홍복원 등이 선유사 대장군 정의 박녹전을 죽이고 성을 들어 반하였다. 12월에 최우가 가병 3000명을 보내어 북계병마사 민희로 더불어 이를 쳐 필현보를 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제자(시)에서 요참하니 (홍)복원은 몽고로 도망하여 들어감으로 그 교 대순과 그 제 백수 및 그 녀자들을 사로잡고 그 여민은 모두 해도로 옮기니 서경은 드디어 구허가 되었다.

갑오 21년 춘 정월 계묘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을사에 함수로 좌복사를 삼고 박문성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경수에 서경을 정토한 군사들에게 상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임수에 병부시랑 홍균을 보내어 서경을 안무하였다. 계해에 제도의 민정을 징발하여 궁궐과 및 백사를 영조하였다. 2월 임신에 장군 김보정을 보내어 몽고군에 갔는데 이 날에 변방이 보하기를 「몽고병은 백여기만 동진에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라고 하였다. 계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고 참정 차척의 집으로 써 봉은사를 삼고 민가를 철거시켜 써 련로를 넓혔는데 때는 비록 천도의 초창기였으나 무릇 구정 궁전 사사의 호는 모두 송도를 모방하고 입궐 연등 행향도장은 한결같이 구식에 의하였다. 정해에 궁궐을 영조하므로 써 대장군 송서의 집에 이어하였다. 3월 갑진에 대장군 조숙창을 저자에서 참하였다. 하 5월 을사에 김연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미에 시중 김취려가 졸하였다.  6월 기사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7월 갑자에 내시 이백전을 보내어 어의를 남경의 가궐에 봉안하였는데 한 중이 참언에 의하여 말하기를 「부소(소)산으로부터 갈려 좌소기 된 것을 아사달이라 하니 이는 고 양주의 땅이다 만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거동하면 국조가 가히 800년은 연장될 것이다. 」고 하므로 이 명령이 있던 것이다. 8월 정묘에 일식 하였으나 구름이 짙어서 보이지 않았다. 9월 정유 삭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여 써 성변을 가시었다. 회안공 정이 졸하였다. 동 10월 경인에 최우를 책하여 진양후를 삼았다. 11월 병신에 태조의 신어를 개경의 수창궁에 봉안하였다. 갑자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여 써 성변을 가시였다.

을미 22년 춘 정월 갑인에 원자 전이 관례하매 책봉하여 태자를 삼았다. 2월 정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지풍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임오에 태조의 신어를 받들어 남경의 신궐에 이안하였다. 임자에 조하기를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어의를 남경 궁궐에 봉안하고 7월에서 10월까지는 구경 강안전에 이안하고 11월부터 명년 2월까지는 또 남경에 이안하여 한바퀴 돌면 다시 시작하라」고 하였다. 3월 갑진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임자에 조하기를 「의 정 이주에는 인물이 주잔하고 또 백성들이 해중으로 이입하여 경종할 수가 없으니 각각 관사를 두는 것은 마땅치 못한지라 그 정주부사로 써 의주를 겸리토록하라」고 하였다. 하 5월 을해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6월 계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지주사 김약선의 딸로 태자비를 삼고 조하여 국용이 넉넉지 못함으로 개복예물을 재량하여 멸케 하고 또 재추 이하에게 사연하는 것을 정지케 하였다. 추 윤7월 병자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병이 안변도호부에 침입하였다.」라고 하였다. 임오에 전후 좌우군의 진주와 지병마사에게 명하여 몰강을 방수케 하고 또 광주 남경을 강화에 합입케 하였다. 8월 임진에 일관이 주하기를 「백관으로 하여금 매일 진시로부터 오시에 이르기까지 일을 배하여 병난을 가시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신해에 최우의 도방 야별초도령 이유정이 스스로 적을 치겠다고 청하므로 군사160명을 주어 보냈다. 계축에 해주에서 치보하기를 「몽병이 용강 함종 삼등 등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 수령을 잡았다.」라고 하였다. 9월 계해에 제하기를 「국가가 이도하여 백성들이 바야흐로 질고에 빠져 있으며 또 적병의 침해를 거쳤으니 심히 린휼할 바이다. 그 중외의 이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케 하고 섬에 류배되어 귀향한 자는 량이하라」고 하였다. 신미에 안동인이 몽고병을 끌어 동경으로 향할 것을 꾀하므로 상장군 김이생을 명하여 동남도지휘사를 삼고 충 청주도안찰사 유석으로 부사를 삼았다. 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몽병이 동진병을 이끌고 용진진(덕

원)을 공함하였다. 무인에 동진병이 진안성(덕원)을 함락시켰다. 이유정 등이 몽병을 해평에서 치다가 패하여 일군이 다 함몰되었다. 동 10월 경인 삭에 동서북면병마사들이 모두 보하기를 「몽병이 또 많이 입경하였다.」고 하였다. 신축에 몽병이 동주성을 공파하였다. 신해에 야별초가 지평현인으로 밤에 몽병을 쳐서 살획이 심히 많고 마려를 취하여 와서 바쳤다. 11월 계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일관이 주하기를 「북궐에 따로히 옥을 짓고 염만덕가위노왕신기도장을 설하여 병화를 가시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병신 23년 춘 정월 정해에 대장군 이영장으로 동북면지병마사를 삼고 판소부감사 손습경으로 서북면지병마사를 삼았다. 2월 무자 삭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경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내시 유종경 최종경에게 명하여 화주를 진양부(최우의저)에 사하고 익일 대회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임인에 내전에서 소연(곡연)할제 승선 채송년이 주하기를 복사 송경인이 평소에 처용휘를 잘한다」라고 하니 (송)경인이 취함을 타서 휘무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계축에 태자비가 아들 심을 낳았다. 하 4월 기해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과같았다. 5월 임신에 수사공 태집성이 졸하였다. 병자에 장주방수소에서 치보하기를 「몽병 50여기가 관동에 침입하였다.」라고 하였다. 무인에 박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병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인에 몽고병이 의주강을 건너 조물지천에 둔치고 또 영삭진에 둔치고 계사에 유병이 가주에 래둔하고 을미에 안북부의 운암역에 둔치니 가 박 이주의 사이에 화기가 하늘에 연하고 또  선주 형제산의 들에 분둔함이 무릇 17개소나 되었고 병신에는 드디어 자 삭 구 곽 등주의 사이에 두루 둔쳤다. 정유에 제도에 산성방호별감을 분견하였다. 무수에 몽병의 선봉이 황주에 침입하고 경자에는 신 안 이주에 이르렀다. 추 7월 신유에 몽병이 개주에 이르거늘 경별초교위 희경과 개주중랑장 명준 등이 복병하였다가 협격하니 살상이 자못 많았고 안마 궁시 의복 등을 취하였다. 장주(정평)랑장 광대 등이 정주(정평)에 이르러 몽병 2인을 사로잡았다. 정묘에 최우의 외손인 내급사 김정으로 수사공 주국을 삼으니 우가 년소하여 알맞지 않다하여 고사하였다. 계유에 몽병 20여기가 자주(자산)의 동교에 침입하여 벼베는 농민 20여인을 사로잡이 모두 죽였다. 8월 정해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무자에 동녀진의 원병 100기가 요덕(영흥) 정변(영흥)으로부터 영흥창으로 향하였다. 갑오에 공덕천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정유에 몽병이 자주(자산)를 함락시키매 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은산)부사 김경희 등이 모두 살해되었다. 병오에 석도(농천)방호별감이 몽병 3인을 사로잡아 서울에 함송하였다. 정미에 몽병 100여인이 온수(온양)군으로부터 남하하여 차현현(공주)으로 향하였다. 무신에 몽병이 남경(지금의서울)평택 아주(아산) 하양창등지에 분둔하였다. 기유에 야별초지유 이림수 박인걸이 각각 100여인을 거느리고 손을 나누어 몽병의 둔소로 향하였다. 9월 정사에 몽병이 온수군(온양)을 포위하니 군리인 현려 등이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이급을 참수하니 시석에 맞아죽은 자가 200여명이며 노획한 병기도 심히 많았으므로 왕은 그 군의 성황신의 밀우한 공이 있다하여 신호를 가봉하고 (현)려로 써 군호장을 삼았다. 임수에 몽병이 죽주(죽산)에 이르러 투복하라고 타이르거늘 방호별감 송문위가 력전하여 이를 패주시켰다.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갑오에 전라도 지휘사 상장군 전보귀가 보하기를 「몽병이 전주 고읍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무수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계축에 부영(부안)별초 의업거인전공열이 고란사(부여)의 산로에 복병하였다가 몽병 20여기를 요격하여 2인을 죽이고 병기 및 마 20여필을 취하거늘 전공열에게 상을 주고 본업으로 입사할 것을 청허하였다. 11월 병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여 내시소부감 유석에게 명하여 주과를 진양부(최우의저)에 사하고 익일에도 또한 이와 같이하였다. 12월 무자에 야별초 박인걸 등이 몽병을 공주 효가동에서 만나 싸웠는데 전사자가 16명이었다. 계묘에 대흥의 관이 보하기를 「몽병이 와서 성을 수일동안 치므로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많은 병기를 뇌획하였다.」라고 하였다. 임자에 박문성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송경인 채송년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송윤 최종재로 좌우복사를 삼고 전보귀로 좌승선을 삼았다.

정유 24년 춘에 전라도 지휘사 김경손이 초적 이정년을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추 8월 무자에 전왕이 훙하였다. 동 10월 정유에 석릉에 장사하였다. 이 해에 강화외성을 쌓았다.

무수 25년 하 윤4월에 지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몽병이 동경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동 12월에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보내어 몽고에 가 표를 올리니 일으기를 「스스로 생각건대 벽루한 소방은 반드시 대국의 비호를 기다릴 것이어늘 더구나 우리의 시기에 응하신 성인이 바야흐로 관대함으로써 임어하시니 그 수토하는 신에 있어서는 감히 성복치 않으리까 거듭 양년의 강호로써 만세의 통화를 약속하여 투배한 이래로 살기가 보람이 있게 되었나이다 대개 옛 기묘 신묘 양년의 강화한 이후로 스스로 의뢰함이 더욱 굳건하다고하여 온 나라가 기뻐하였음은 오직 천지신명이 이를 알 것인데 어찌 일은 기필하기가 어렵고 신은 간혹 의심을 사게되어 도리어 군부의 견책을 번거롭게 하고 자주 군사를 내어 징힐할 줄을 뜻하였사오리까 백성은 땅에 정착함이 없고 농사는 때에 거두지 못하나이다 돌아보건대 이 풀이 우거진 마당에 무슨 소출이 있으리까 오직 이 포모의 공물도 바치지 못함에 어찌하오리까 진퇴가 량난하와 황공함이 망극하나이다 인하여 생각건대 그 일시적으로 어물어물하는 고식책 보다는 오히려 만사를 무릅쓰고 애호하는 것만 같지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척토의 산물을 다하여 간략하나마 미신의 정성을 바치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다만 병혁(무력)의 위를 가하지 말고 유속을 보전케 한다면 비록 불전한 해산의 공부나마 어찌 비우는 해가 있사오리까 이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영원토록 약속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기해 26년 하 4월에 몽고에서 보가 아즐 등 20인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친조할 것을 유시하매 왕이 조를 제포관에서 맞이하였다. 이 달에 몽병이 돌아갔다. 5월에 사하였다. 왕태후 유씨가 훙하였다. 6월에 기거사인 노연과 첨사부주박 김겸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몽고에 가게 하였다. 추 8월에 몽고가 보가 파하 등 137인을 보내와 다시 왕의 친조를 징소하였다. 동 12월에 신안공 전과 소경 송언기를 몽고에 보내었다.

경자 27년 춘 3월 노연 등이 몽고사 두만아즐 등 7인과 함께 왔다. 하 4월에 우간의 조수와 각문지후 김성보를 몽고에 보냈다. 5월에 장천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에 당후 김수정을 보내어 당고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추 9월에 신안공 전이 몽고의 다가 파하도 아즐 등 17인과 함께 조를 가지고 왔는데 다시 입조하러 것을 유시하였다. 동 12월에 예빈소경 송언기와 어사 권위 를 몽고에 보냈다.

신축 28년 하 4월에 족자 영영공 준을 왕자라 칭하고 의관자제 10인을 거느리고 몽고에 들어가는 독로화를 삼았는데 추밀원부사 최린 장군 김보정 좌사간 김겸을 반행하게 하였다. 독로화는 화언(중국어)에 질자를 말한 것이다. 당고가 이시 합자 아즐 등 4인을 보내왔다. 최종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8월에 당고가 다시 이시 합자 아즐 등 8인을 보내왔다. 9월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이규보가 졸하였다.

임인 29년 하 4월 병진에 곤릉에 배알하였다. 신유에 홍지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갑오에 시랑 송언기 중랑장 이양준을 몽고에 보냈다. 추 7월 경인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8월 임자에 오래 가물으므로 저자를 옮겼다. 계축에 리궁으로 이어하였다. 9월 신사에 조하기를 「근도의 주 현에 곡식(독곡)이 성열치 못하여 백성들이 수획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부검을 어찌하랴 마땅히 사인을 보내어 심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12월 을축에 몽고사 30인에 왔다. 무진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경오에 몽사가 돌아가거늘 금은피폐를 증하였다.

계묘 30년 춘 정월 경자에 추밀원부사 최린 비서소감 김지대를 몽고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2월신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수에 연등하고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무진에 제도에 순문사를 보냈는데 민희를 경상주도에 손습경을 전라주도에 송국첨을 충 청주도에 보냈다. 3월 정축 삭에 일식이 있었다.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하 5월 을유에 본궐로 천어하였다. 가뭄으로 써 중외의 이죄 이하를 사하고 운우도장을 내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6월 병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는데 가뭄으로 인하여 일산(산선)을 쓰지 않았다. 무신에 대우가 내렸다. 추 7월에 유경노와 정진을 몽고에 보냈다.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8월 경오에 중형자 16명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세조 태조를 강화의 개골동에 이장하였다. 윤월 정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9월 임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임신에 금주방어관이 보하기를 「일본국이 방물을 바치고 또 우리 표풍된 사람을 돌려 보냈다」라고 하였다. 동 10월 병자에 리궁으로 이어하였다. 계사에 몽고사의 이가대 아토 노거 등 24인이 왔다. 갑오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정유에 룡산별감 박익유가 백성들을 박탈하여 취검하므로 법사가 사용임을 고검하여 견 150필을 절가하여 징수하고 해도에 류배시켰다. 11월 갑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기유에 본궐로 환어하였다. 12월 갑신에 랑중 유경노를 몽고에 보내었다.

갑진 31년 춘 2월 계유에 유사가 해주 하기를 「전제주부사 노효정과 판관 이각이 재임시에 일본상선이 구풍을 만나 주경에서 파선하였는데 이효정 등이 릉견 은주 등물을 사취하였다」하므로 효정에게는 은 28근 이각에게는 20근을 징수하고 섬에 류배시켰다. 정축에 신안공전의 딸을 맞아드려 태자비를 삼으니 전비가 졸한 까닭이였다. 을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곡연(소연)하는데 최이(우)가 가면인 잡호를 드리거늘 은병을 사람마다 1개씩 주고 또 시녀들에게 릉(비단)을 각각 2필씩 사하였다. 3월 무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임진에 원외랑 임인수와 랑장 장익성을 몽고에 보내었다. 정유에 위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경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7월 을사에 몽고사 아토 등이 왔다. 병오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8월 경오 삭에 사수 9인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이달에 강안전을 고쳐 지었다.

을사 32년 춘 3월 갑자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을축 삭에 재추가 주하기를 「좌  우창 및 문적을 소장한 관해의 근방 50척(거리)에 있는 인가를 철거하여 써 화재에 대비하소서」라고 하였다. 기묘에 원외랑 박수와 랑장 최공진을 몽고에 보내었다. 경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6월 갑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공 기가 졸하였다. 무인에 왕이 보살계을 받았다. 추 7월 계사 삭에 일식이 개기식하였다. 8월 사죄 16인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을유에 태자가 시제로써 국자 제생을 시험하여 구인제생인 고계릉 등을 취하여 써 궁료에 보하였다. 동 10월 임오에 신안공 전과 대장군 황보기를 몽고에 보내었다.

병오 33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무수에 도둑이 내노의 옥대 보기를 훔쳐 갔다. 정미에 옥대를 찾았다. 하 4월 임오에 량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윤월 기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건성 복영 이사에 행차하였다. 5월 기사에 선원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수창궁에 이어 하였다. 갑신에 국학의 학유인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으로 위릉도안무사를 삼았다. 6월 무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가뭄으로 무당을 도성에 모아 비를 빌게 하였다. 추 8월 정유에 문하시중 최종준이 졸하였다. 동 11월 을축에 지진이 있었다.

정해 34년 3월에 동진국 천호가 첩하기를 「아국인으로 귀국에 도입한 50여인을 가히 모두 송환할 것이라」고 하거늘 회첩하기를 「귀국으로부터 우리 국토에 이르는데는 산이 길고 길이 험하여 광막한 무인경인지라 왕래하는 길이 두절되었는데 귀국이 망녕되게 도망한 사람을 찾는다 칭하고 혹은 산렵한다 칭하면서 국경을 넘어와 횡행하니 그 제지의 각각 편안히 토착하라는 뜻에 어떠하리오 지금으로부터 무고히 월경하는 것은 일절 모두 금단하라」고 하였다. 추 7월 에 몽고원수 아모간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주에 래둔하였다. 8월 을사에 희종비 함평궁주 임씨가 훙하였다. 이 달에 기거사인 김수정을 보내어 아모간을 호괴(호)하였다. 거년 겨울에 몽고인 400명이 북색의 제성에 들어와 수안현에까지 이르러 수달을 잡는다고 칭탁하고 모든 산천의 음벽처를 점지치 아니함이 없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화호하였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백성으로서 피익한 자가 모두 구략을 당하여 탈출한 자가 적었다.

무신 35년 춘 2월에 추밀원사 손변과 비서감 환공숙을 몽고에 보내었다. 3월에 북계병마사 노연에게 명하여 북계제성의 백성을 모두 옮겨 해도로 입보케 하였다. 김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최항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았다. 동 10월 정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서해도안찰사가 보하기를 「적인 40기가 수달을 잡는다고 칭하고 청천강을 건너 경내로 들오왔다」라고 함으로 이에 송도로 출배한 양반을 모두 강화로 돌아오게 하였다. 때에 량반을 보내어 윤번으로 송도에 출수케 하였던 것이다. 임진에 랑장 장준정과 지후 장위를 몽고에 보내었다.

기유 36년 춘 정월 무신에 북계병마사가 치보하기를 「몽고황제가 붕하였다」라고 하니 이가 정종이었다. 갑자에 최항이 왕을 향연하였다. 2월 병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윤월 계축에 용암궁에 이어하였다. 정사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신안공 전이 몽고로부터 돌아왔다. 병인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본궐에 환어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3월 기묘에 용암궁에 이어하였다.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하 4월 삭에 일식이 있었다. 경수에 랑장 김자진 교서랑 참수지를 몽고에 보내었다. 병진에 본궐에 환어하여 감역한 관료와 역사들을 향연하고 공장에게 은 20근과 포 200필을 사하였다. 6월 임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시랑 안전과 랑장 최공주를 몽고에 보내었다. 추 7월 계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8월 임자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경신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무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9월 기사 삭에 동진병이 동주(철원)경내에 침입하므로 별초병을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다.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지유 박천부가 별초병을 거느리고 동진과 고성 간성에서 싸워 모두 이를 파하였다. 갑오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가 려정궁으로 이어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친히 백좌도장을 설하였다. 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가 용암궁으로 이어하였다. 11월 임신에 최이가 사하거늘 최항으로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어사대부를 삼았다.

경수 37년 춘 정월 계사에 랑중 최장저를 몽고에 보내었다. 대장군 이세재 장군 진집평 등을 보내어 비로소 궁궐을 승천부 임해원의 구기에 영조하였다. 2월 갑진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200기가 입경하였다」라고 하였다. 신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추밀원부사 최자와 중서사인 홍진을 몽고에 보내었다. 경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3월 계미에 최장저가 몽고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북조에서 종친과 홍복원의 부를 불러 입조토록 하라」고 한다 하였다. 북계의 창주(창성)가 근지로 들어오기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여 안악현으로 옮겼는데 이보다 먼저 위주(희천)도 또한 은률현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북계주민들이 모두서경기내와 서해도(황해도)로 내사하였다. 임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하 4월 계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는데 근자에 국가에 사고가 많았던 고로 승여가 불비하여 혹은 승마로 혹은 견여로 행차하였다가 이제야 승련과 의물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기미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5월 계유에 김응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축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본궐에 설하여 써 비를 빌었다. 계미에 다시 우제하였다. 을유에 가뭄으로 저자를 옮겼다. 기축에 무당을 도성에 모아 3일간 비를 빌었다. 신묘에 또 우제하였다.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임진에 비가 내렸다. 6월 병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몽고사 다가 무노손 등 62인이 와서 출륙의 상황을 살피고 승천부관에 이르렀는데 왕을 강외로 출영토록 책구하였으나 왕은 나가지 않고 신안공 전을 보내어 강도로 영입하였다. 을사에 몽사를 수창궁에 향연하였다. 임수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본궐에서 설하였다. 추 9월 갑수에 궐서궁에 이어하였다. 병수에 천병신중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추밀원부사 권수평이 졸하였다. 좌사간 정난과 랑장 위공취를 몽고에 보내었다. 정해에 조계순으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이세재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8월 무수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적병이 고(고흥) 화(영흥)주의 고성에 침입하였다.」라고 하였다. 갑진에 추밀원부사 최춘명이 졸하였다. 기유에 사죄 10인을 용서하여 유인도로 류배시켰다. 신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경찬법석를 설하였다. 경신에 강도에 중성을 쌓았다. 9월 신미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기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12월 병오에 최항으로 문하시중을 삼았다. 병진에 몽고사 홍고이 등 48인이 와서 승천관에 머물면서 말하기를 「왕의 출영을 기다려서 들어갈 것이라 」라고 하므로 기미에 왕이 제포궁에서 맞이하였는데 이날에 바람이 크게 불고 추위가 심히여 백관이 모두 얼어 웅크리며 용태를 바로하지 못함으로 왕이 명하여 련상의 유장(막)을 걷게 하고 말하기를 「법종하는 백관들이 추위에 떨기를 이같이하는데 규만이 홀로 따뜻하게 하랴」고 하였다.       




세가권제24      고려사24


정헌대부공조판서집현전대제학지 경연춘추관사겸성균대사성신정린지봉 교수


고종3

신해 38년 춘 정월 임수 삭에 왕이 제포궁에 있으면서 홍고이를 향연하였는데 고이가 왕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북변이 잔파가 이미 심하여 집에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가히 다시 구경(개경)에 도읍할 수 있으리까 마땅히 강을 의거하여 써 스스로 굳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마땅히 돌아가면 황후께 주하여 동쪽을 요란케 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매 왕이 기뻐하여 더욱 후대하였다. 갑자에 왕이 수창궁에 돌아오니 몽사가 따라오다가 미치지 못하매 이에 말하기를 「왕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갔으니 나는 장차 돌아가겠다」고 하거늘 왕이 련을 멈추고 기다리니 몽사가 궁시를 차고 치돌하여 이르거늘 보는 자의 마음이 선뜻하였다. 부로들은 도문 밖에 나와 왕을 맞이하며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재배하고 만세를 불렀다. 정묘에 왕이 관반에게 명하여 몽사를 향연하니 몽사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이미 항복하고 출륙코자 하면서 어찌하여 성을 쌓는가」라고 하거늘 대답하기를 「송의 적선이 왕래하기 때문에 성을 쌓아 써 방비함이오 실로 타의는 없다.」라고 하였다. 경오에 몽사가 돌아갔다. 계유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바치거늘 왕이 제왕공후를 불러 같이 연회하고 파하니 대개(이는) 몽사가 화친하고 돌아감을 경하함이었다. 무인에 정안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설신 유소 조수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이인로 김기손으로 좌우복사를 삼았다. 갑신에 친히 천제석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2월 무수 본궐에 이어하였다. 갑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동지추밀원사 최경과 상장군 김보정을 몽고에 보내었다. 3월 을축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하 4월 기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병진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5월 병인에 수사공 좌복사 손변이 졸하였다. 갑수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6월 경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진에 천병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추밀원부사 설신이 졸하였다. 갑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을사에 인왕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이 달에 박훤의 집으로 정업원을 삼아 성내의 니승을 모아 살게 하고 외성을 쌓아 출입을 금하게 하니 이에 앞서 니승들이 려염에 잡처하여 추문이 있었던 것이다. 추 7월 정묘에 소경 임유식 랑장 조원기를 몽고에 보내었다. 8월 갑오에 선성의 진영(공자의 영)을 신창한 화산동의 국자감(대학)에 봉안하였다. 신해에 사죄 7인을 용서하여 유인도에 유배하였다. 9월 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성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하였는데 현종시의 판본이 임진의 몽고병란에 불타졌으므로 왕이 군신들과 더불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워 16년만에 공이 필하였다. 동 10월 무자 삭에 친히 내전에서 삼계에 초제하였다. 신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몽고사 장인 홍고이 등 40인이 와서 승천관에 이르거늘 무신에 왕이 제포에 출영하였는데 황제가 새로 즉위하여 국왕의 친조를 조하고 및 구경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경수에 장인 등이 강도에 들어왔다. 신해에 몽사를 수창궁에서 향연하였다. 병진에 왕이 재추와 문무관 4품 이상에 명하여 답조할 것을 의논하니 혹은 태자의 친조할 것을 말하고 혹은 왕이 노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고 말을 하였다가 다시 힐문을 기다려 태자를 보내어 친조케 하여도 늦지 않다고 말하였다. 윤월 기미에 문하평장사 이자성이 졸하였다. 정축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중서시랑평장사 채송년이 졸하였다. 11월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자 39년 춘 정월 병오에 추밀원부사 이현 시랑 이지위를 몽고에 보내었다. 2월 을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바치거늘 제왕을 불러 대내에서 향연하였다. 3월 정유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무수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고 갑진에 인왕도장을 설하고 기유에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하 4월 기미에 추밀원부사 장순량이 졸하였다. 정묘에 유성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가 금단동궁으로 이어 하였다. 을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고 경진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5월에 비로소 승천부의 성랑을 영조하였다. 병수에 비를 제신사에 빌었다.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또 비를 제신사에 빌고 경자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동계병마사가 동진병 2000명이 입경하였음을 치주하였다. 신축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6월 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계유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무인에 비가 내렸다. 최항이 왕에게 주찬을 바치거늘 제왕을 불러 향연하였다. 추 7월 임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무수에 몽고사 다가 아토 등 37인이 왔는데 제가 다가 등에게 밀칙하기를 「너가 저나라 (고려)의 이르거던 국왕이 육지에 나와 출영하면 비록 백성들은 나오지 않아도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너의 오는 것을 기다려 마땅히 군사를 발하여 토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다가 등이 이르매 왕이 신안공 전을 보내어 나와 맞이하고 몽사를 청하여 제포관에 들어오니 왕이 이에 나와 보았다. 잔치가 파하지 않았는데 다가 등은 왕이 제명을 좆지 않는다 하고 노하여 승천관으로 돌아갔다. 갑진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정미에 최항이 왕에게 선을 받쳤다. 이 달에 모든 산성에 방호별감을 분견하였다. 8월 갑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병자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9월 갑신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왕이 최항이 바친 바 새 련을 타고 왕륜사에 행차하여 대부의 은 30근을 내어 조련공장과 및 최항의 창두(사환)에게 사하고 이어 창두들에게 복두를 쓰게 허락하니 무릇 46인 이었다. 기해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경신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고 갑수에 인왕백좌도장을 설하였다. 11월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서궁에 이어 하였다.

계축 40년 춘 정월 경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에 최항으로 문하시중 판리부 어리대사를 삼았다. 왕이 대궐로 환어하였다. 경신에 안경후 간을 승진시켜 공으로 삼았다. 임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자기 왕이 불예(병) 하였다.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계병마사가 치보하기를「동진의 300기가 등주를 포위하였다.」라고 하였다. 갑오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무수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일관을 보내어 세 개의 돌을 동서 양계 요해처에 묻어 써 적병을 가시게 하였다. 하 4월 경수에 북계병마사가 보 하기를 「적병 30여인이 입구하였다.」라고 하였다. 계축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갑인에 원주민으로서 몽고에 포로 되었던 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아모간 홍원복이 제소에 가서 고려가 중성을 쌓고 출륙하여 귀의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니 제가 황제인 송주에게 명하여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동진국을 거쳐 동계로 침입케 하고 아모간 홍원복은 휘하병을 거느리고 북계로나와 모두 대이주에 둔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고 계해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무진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5월 병신에 몽고의 야굴 대왕이 아두 등 16인을 보내오거늘 왕이 제포궁에서 맞이하고 금은 포백을 증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해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6월 신해에 사하고 선왕 선비에게 존익을 가상하고 명산 대천에는 덕호를 가하고 문무 양반과 남반 잡노의 모든 유직자에게는 차제로 동정직을 가하고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에게는 더 작을 사하고 주 부 군 현사와 진 역의 잡척 장전 등에게도 무산계를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추 7월 기묘에 약사전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갑신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압록강을 건너왔다.」라고 하거늘 곧 오도안찰 및 삼도순문사에게 이첩하여 거민을 독령하여 산성과 해도로 입보케 하였다. 병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신묘에 몽병이 대동강 하마탄을 건너 고화주(영흥)로 향하였다. 을미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8월 무신에 갑관강에서 수전을 연습하였다. 신해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계축에 교위 대금취가 우봉별초 30여인을 거느리고 몽고병으로 더불어 금교 흥안 사이에서 싸워 머리 수급을 베고 마궁시 전구 등물을 노획하였다. 병진에 사죄 12인을 용서하여 유인도로 유배시켰다. 무오에 몽고원사 야굴이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조를 전하니 그 조에 육사로써 책하기를 「짐은 백일이 뜨는 곳으로부터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을 함께 안락케 하고자 하는데 너희들의 역명으로 인하여 황숙 야굴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으니 만약 명을 맞이하여 서관을 바치면(납관) 파병하여 돌아올 것이나 만약 명을 거역하면 짐은 반드시 용서함이 없으리라」고 하였다.몽고병이 서해도의 량산성을 함락하였다. 기미에 왕이 랑장 최동식을 보내어 서를 야굴의 둔소에 주었는데 이르기를「소방은 상국에 신사한 이래로 두 마음을 갖지 않고 힘을 내어 공직하며 비호를 입어 만세에 근심이 없기를 바랐더니 불의의 천병이 폐읍에 엄림하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거국이 두려워 하고 있으니 오직 대왕은 우리의 간절한 정성을 량찰하고 곡진히 애린을 사하시오.」라고 하였다. 때에 야굴은 토산(중화)에 있었는데 국서를 받고 사람을 시켜 동식에게 말하기를 「제가 국왕이 로병을 칭하고 조회에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진부를 알고자 함이니 왕의 래부를 6일의 기한으로 다시 와서 보하라.」고 하거늘 동식이 답하기를 「군병사이에 주상이 어찌 능히 속히 올 수 있으리까」라고 하니 야굴이 말하기를「너는 어찌 능히 왔느냐」라고 하였다. 경신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몽병 3천명이 고(고원) 화(영흥) 2주의 경계에 래둔하고 그 척후기 3백여가 황주에 이르러 로사를 분소하였다. 계해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경오에 재추가 모이어 동궁이나 혹은 안경공이 3품 1인을 거느리고 항복비는데 대한 가부를 논의 하였다. 계유에 몽고병이 동주(철원)산성을 함락하였다. 이 달에 몽고의 척후기병 3백여명이 전주성 남쪽의 반석역에 이르니 별초지유 이주가 과반수를 격살하고 마 2십필을 노획하였다. 9월 정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대장군 고열을 보내어 야굴대왕에게 서를 주어 말하기를「소방은 감히 성지를 어기지 않고 이미 승천부 백마산하에 성곽을 쌓고 궁실을 영조하였으나 다만 동북계의 수달 잡는 사람을 두려워 하여 영조를 마치고 출거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입경하니 국인이 놀래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터이라 오직 대왕은 긍휼히 여겨 군사를 돌이켜 우리 동민으로 하여금 모두 안도케 하면 마땅히 명년에 몸소 신료를 거느리고 제명을 출영할 것이니 그 허 실 같은 일이의 사자를 보내어 심찰하면 가히 알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금은주기와 라주 저포 달피 립대 등물을 주고 그 제장 아모간 등에게도 또한 모두 증유하였는데 야굴은 열과 최동식을 구류하고 이송무를 보내어 말하기를「너의 나라 제성의 항첩을 받아오라.」고 하매 재추가 회의하고 답하기를 「대군이 만약 귀환하면 군신이 출륙할 것이니 주현이 어디로 가리요.」라고 하였다. 갑신에 중양절(9월9일)이므로 경령전에 배알 하였다. 을유에 충주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복병을 설하였다가 몽병이 이르는 것을 기다려 급히 쳐 15급을 죽이고 그 병장과 포로되었던 남녀200여인을 뺴앗으니 그 공으로 대정을 제수하였다. 계사에 몽병 10여기가 갑관강 밖에서 표략하였다. 병신에 몽병이 춘주(춘천)성을 무찌렀다. 갑진에 고열이 돌아와 말하기를 「야굴이 이르되 국왕이 조와 같이 출항하면 곧 마땅히 회군할 것이나 불연이면 일전할 것이다.」고 한다 하였다. 동 10월 병오 삭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등주를 포위하였다가 해위하고 금양성으로 갔다고 하였다. 무신에 국내의 명산과 탐라의 신기에게 각각 제민의 호를 가하고 대묘 구실 및 19릉에도 아울러 존익을 가상하였다. 기유에 몽병이 양근성을 포위하니 방호별감 윤춘이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신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몽병이 천룡산성을 치니 황리현령 정신단과 방호별감 조방언이 출항하였다. 정사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몽병이 양주를 함락시켰다. 신미에 재추로 치사한 자와 문무 4품 이상자에 명하여 적병을 물리칠 방책을 의논케 하니 모두 말하기를 「태자가 출항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승선 이세재로 하여금 이를 힐문케 하여 말하기를 「태자를 보내면 가히 후환이 없을 것을 보장하겠는가. 이 의논이 누구로 부터 나온 것인가」라고 하므로 환자 민양선이 나와 말하기를 「최시중도 또한 그 의논이 가타 하더이다.」라고 하니 왕의 노함이 조금 풀려 말하기를 「재추들은 선도하라」고 하매 왕이 또 세재를 보내어 최항에게 가서 「누구를 몽군에 사신으로 보내면 가할가」라고 물으니 항이 주하기를 「이는 신이 결정할 바가 아니오 오직 상께서 절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달에 야굴 등이 충주를 포위 공격하니 전소경 정수가 이자를 거느리고 경산부로 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11월 무인에 영안백 희 와 복사 김보정을 보내어 야굴 아모간 열 왕만호 홍복원 등에게 치서하고 토물을 주었다.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때에 병란으로 인하여 제도에서 표를 올린 자는 다만 남경(지금서울)및 광 수(부천) 이주 뿐이었다. 경인에 병부상서 한림학사 김효인이 졸하였다. 야굴이 충주에서 병을 얻으니 복자가 말하기를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매 야굴은 아모간 홍복원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정기 1천명을 거느리고 북환하거늘 영안백 희 등이 구경의 보정문 밖에까지 쫓아가서 국신예물을 주고 또 퇴병할 것을 빌었더니 야굴이 책하기를 「국왕이 강외로 나와 우리 사자를 맞이하면 군사가 가히 물러갈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몽고대 등 10인을 보내왔다. 신묘에 왕이 강을 건너 승천신궐에서 맞이할제 야별초 80인이 갑옷을 속에 입고 따라갔다. 몽고대가 왕께 말하기를 「대군이 입경한 이래로 1일에 사망자가 기천만이나 되는데 왕은 어찌 일신만 아끼고 만민의 생명은 불고하나이까. 왕이 만약 빨리 출영하였으면 어찌 무고한 백성들이 참살(간뇌도지)되었을 것입니까. 야굴대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이요 나의 말은 곧 야굴대왕의 말이니 자금 이후로 만세에 화호하면 어찌 즐겁지 않으리까.」라고 하고 드디어 취하게 마시고 돌아가니 왕은 강도로 돌아왔다. 교동별초가 평주성외에 복병하였다가 밤에 로영에 들어가 격살함이 심히 많았으며 교위 장자방은 짧은 칼을 가지고 손수 둔장 20여인을 죽였다. 을미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정유에 야굴이 사람을 보내와 달로화적을 둘 것과 성(성자)을 헐어버릴 일을 말하였는데 그 관인 호화는 역시 금은 달피 저포 등물을 토삭하였다. 무수에 왕이 야굴에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전자에 복사 김보정이 돌아오매 대왕께서는 만약 능히 사자를 출영하면 곧 마땅히 군사를 돌이킬 것으로 써 말씀하고 드디어 몽고대 등 10인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그윽히 생각하면 사자를 출영하는 것은 근자에 그 예가 없었으며 더욱이 일기가 차고 바람이 거센 때를 당하여 로병의 몸으로써 어찌 감히 바다를 건느리오마는 대왕의 가르침을 감히 어기지 못하여 삼가 신료를 거느리고 사자를 출영한 것은 마음에 대왕이 구약을 어기지 않고 곧 군대를 돌릴줄만 여겼는데 지금 명교를 받으니 군사 1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달로화적을 두고자 하니 만약 과연 이러하면 어찌 그 환이 없기를 보장하고 구경에 복도하리까. 청컨대 그 일을 그만두어 써 동민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성(성자)을 허는 것같은 일은 소방은 원래 습속이 (성없이) 로거하지 않으며 또 해적이 무시로 략탈하니 이로써 곧 헐어버리지 못했으나 후에 마땅히 명령에 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호화관인에게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그 수요한 바 금은은 예로부터 소방에서는 산출되지 않아 그 납공하는데도 오히려 쉽게 판출하지 못하는 터이며 달피 저포는 군사(병)가 일어난 이래로 백성들이 다 놀라 도망하여 구판하기 어려우나 지금 간략한 신표로서 별지와 같이 갖추어 보내노라.」고 하였다. 계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12월 임자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아모간의 사좌를 인견하였다. 병진에 화엄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무오에 친히 북두(성)울 초제하였다. 임수에 충주에서 치보하기를 몽병이 포위를 풀었다고 하였다. 을축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임신에 안경공 창을 몽고에 보내었다. 이 달에 도둑이 후 예 이릉을 발굴하였다. 이 해에 경상주도 안찰부사 임주가 주현에 령하여 백마의 발굽을 모아 띠를 만들되 서(물소의 뿔)대를 모방케 하니 말을 죽이는 자까지 있게 되었으며 또 20승의 백저포를 거두게 하니 백성들이 백은 1근을 가지고 포 1필을 바꿔도 오히려 쉽게 구득치 못하매 남민들이 소란하였다.

갑인 41년 춘 정월 을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정축에 안경공 창이 몽고병의 둔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벌려 군사들을 먹이니 아모간이 군사를 걷어 돌아갔다. 무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갑신에 경성에 계엄이 풀렸다. 소경 박여익가 랑장 정자여 등을 보내어 가서 몽병의 환거 여부를 탐지케 하고 겸하여 천룡 양근 이성을 안무케 하였다. 갑오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정유에 친히 북두(성)를 내전에서 초제하였다. 경자에 이현을 기시91)하였다. 2월 갑진 삭에 천룡성별감 조방언과 황리(리주)현령 정신단을 해도에 류배시켰다. 갑인에 정준 최평 임경필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정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병선 7소가 갈도에 침입하여 30호를 노략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오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3월 을해에 문하시랑 송순에게 수태위를 가하였다. 전라주도순문사 이순효가 졸하였다. 갑오에 참지정사 최공이 졸하거늘 3일간 철조하고 대장이라 익하였다. 정유에 어사 고평절 최탁 량신성 박유 봉공윤은 대창의 속을 산실한 일에 련좌되어 모두 면관되었는데 평절은 수량이 2000석에 이르렀으므로 특히 해도에 류배시킬새 사자가 문전에 도착하니 도주하여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 달에 비서소감 이수손 사문박사92) 김량영을 몽고에 보내었는데 3년간 구류를 당하다가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하 4월 계묘 삭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계해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병인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가물었다. 5월 임신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천병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병자에 단오절이므로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6월 임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윤정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병진에 왕이 보살계를 정전에서 받았다. 무오에 친히 공덕천 약사 이도장을 설하였다. 정묘에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이 달에 경성에 대역이 있었다. 윤월 기묘에 중서사인 김수정을 몽고에 보내었다. 추 7월 기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정사에 왕이 몽사 다가 등이 왔다는 말을 듣고 승천신궐로 이어하였다. 안경의 전첨 민인해가 몽고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차라대로 하여금 동국을 주관케 한다」라고 하였다. 무오에 몽고사 다가 등 50인이 문첩을 가지고 와서 효유하기를 「국왕은 비록 이미 출륙하였으나 시중 최항과 상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은 나오지않으니 이것이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냐」라고 하고 인하여 항복한 성의 관리를 (고려가) 주살한 것을 힐책하거늘 왕이 (항복한) 조방언 정신단을 불러 역마를 타고 입경케하여 다가에게 보이고 서 주살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임수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차라대 등이 군사 5000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고 하였다. 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다가가 돌아가거늘 표를 부쳐 일으기를 「왕인(사자)이 갑자기 와서 성훈을 상밀히 가하니 거국이 황공하여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여 진달하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뢰정의 위엄을 거두시고 일월의 밝음을 돌리사 래사의 친히 본 것을 자세히 물어보시고 참인의 망소를 짐작하시와 월경하여 바람 같이 달린 효기로 하여금 일시에 걷어 돌아가게 하시고 강을 건너 륙지로 옮아 않은 폐봉(폐방)으로 하여금 만세에 길이 보존케 하소서」라고 하였다. 때에 다가가 속여 말하기를 「내개 돌아가면 대병은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므로 나라에서 이를 믿고 주현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였는데 이에서 온 고을이 피략된 것이 심히 많았다. 이 날에 왕이 강도로 돌아왔다. 갑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몽병의 척후기병이 서해도(황해도)에 이르렀다. 무진에 몽고기병 30이 협계의 관산역에 래둔하였다. 8월 신미 삭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계유에 경상 전라 2도에서 각각 야별초94) 80인을 모내어 경성을 수위케 하였다. 갑수에 지진이 있었다. 몽고군이 서북변경에 침입하였다. 병자에 척후기병이 광주에 이르렀다. 중외의 사수 10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장류시켰다. 기축에 안경공 창이 몽고로부터 돌아오는데 몽사 10인이 함께 오거늘 왕이 제포에 행차하고 잔치하여 위로하니 몽사가 말하기를 「제가 신 등에게 칙명하여 공을 모시어 호행케 하였으므로 만리풍진에 편안치 못함이 있을가 두려워하였으나 금일에 다행히 아무 탈없이 환국하게 되니 우리들은 심히 기쁩니다」라고 하며 잉하여 술잔 드리기를 청하거늘 왕이 이를 허하였다. 경인에 몽병의 척후기가 회주(회산)성하에 둔치거늘 산원 장자방이 별초를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임진에 대장군 이장에게 명하여 몽병의 둔소인 보현원에 가서 차라대 여속 독보파대 등 원수와 및 영영공 순과 홍복원에게 금은주기와 피폐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이)장이 환주하기를 「차라대가 이르되 군신과 백성들이 출륙하면 모두 머리를 깎을(체)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데려갈 것이니 만일 한가지도 듣지 않으면 군사는 돌아갈 기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9월 경자 삭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이 또 많이입경하였다고 하였다. 계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기유에 어사 박인기를 보내어 차라대의 둔소에 가 주과와 폐백을 주게 하였다. 계축에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치니 풍우가 갑자기 크게 일른지라 성중인이 정예를 뽑아 이를 분격하니 적이 포위한 것을 풀고 드디어 남하하였다. 을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추밀원부사 최온이 주하기를 「비서성은 제초제향의 문서를 맡았음으로 매월 일인씩 입직하여 목욕제소하고 한달을 마쳐야 이에 나가는 것인데 만약 한림원 보문각 동문원 어서원이 륜번으로 번갈아 숙직하면 혹은 음주식육하고 혹은 예악한 일을 겪을 것으로서 비서성에 회숙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오니 청컨대 금하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기사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경오 삭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무자에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치거늘 황령사에 승 홍지가 제사관인을 사살하고 사졸의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매 드디어 포위를 풀고 퇴거하였다. 참지정사 최린을 보내어 차라대의 둔소에 가 파병하기를 청케 하였다. 최린으로 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재신에 명하여 대묘에 기고하기를 「홍유컨대 태조께서는 삼방의 정분(후삼국의 정립)에 당하여 백성의 고통(도고)를 불쌍하게 생각하사 의병을 지휘하시니 구름 모이듯이 향응하고 융의를 떨치매 번개처럼 빠르고 바람처럼 달렸나이다 어려운 초매기에 운둔95)을 소청하고 한토를 통합하여 일가를 만들어 왕민96)을 억년에 이르기까지 복사케 하였나이다 우리 태종대왕(혜종)께서는 견갑을 두르고 예검을 잡으며 비에 목욕하고 바람에 머리 빗으며 성조를 간과중에 따르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였나니다. 우리 세종대왕(현종)께서는 지용이겸비하신 자질로서 대란을 평정하시고 중흥반정의 공을 세워 영세불천지주로 부제하나이다. 우리의 선 숙 예대왕께서는 성성이 계체하사 영을 지하고 성을 수하니 백성(원원)은 인에 돌아가 배부르게 먹고 생업을 즐기게 되었나이다. 문이 이룩되고 리가 정하여 밝게 빛남이 있어 예가 제정되고 악이일어나니 높고 높아 이름하기 어렵나이다. 우리 인 신 강대왕께서는 영명한 자질이 뛰어나사 루적된 경휴를 이으시니 비록 간궤의 여러 흉변이 있었으나 문득 위(진)모로써 전제하고 또한 선정(선현)의 도움을 힘입어 마침내 국운의 청녕을 이루었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는 공이 있고 종은 덕이 있어 체제에는 제를 배하고 교사에는 천에 배하여 구묘중에 령을 쉬시사 우족97)의 도를 백세하에 드리웠나이다(수유백세지하) 엎드려 생각건대 량박한 자질로써 백성의 위에 처하니 들리는 것은 오직 추예한 것으로 (발문유성) 큰 재난이 연달아 이르었나이다 지난번 금묘세로부터 흑적인(몽고인) 이 준동하여 북으로부터 짓밟고 상해(란자)하여 남방에까지 음침하니 혁혁한 대도를버리고 구구한 해읍을 보존하기에 이르게끔 되어 굴강함이 서로 겨름을 얻지 못함으로 이에 조빙을 오직 부지런히 하고 말을 낮추어 신이라 칭하며 예를 후하게 하여 질자를 보내고 자제를 선택하여 입시케 하며 신료를 거느려 써 출영하게 되니 백성은 이미 피인하고 조검하여 써 이를 받드니 우리는 진실로 약하나이다 징령으로 써 핍박하니 유차가 비록 길에 잇달아도 궁기는 이에 연이어 우리 국토를 치니 문득 가고 문득 오면서 장구하여 깊이 들어오나이다. 하물며 도망하여 항복한 자들이 허실을 자세히 고하니 저 오랑캐는 계책을 얻고 우리 백성은 세가 궁하여 사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여 생자는 노예가되어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하나이다 더욱 근일 이래로는 건문(천문)이 변조를 보이어 항간에는 슬픈 부르짓음이 떠돌고 사람끼리 혐기함이 크게 심하오니 부앙함에 두려웁고 부끄러워 자나깨나 편안키 어렵나이다. 그윽히 생각컨대 삼한은 이에 선왕의 집이오 만성은 이 선왕의 백성이온대 어찌 차마 집이 무너지고 백성이 다 죽게 하오리까 이로써 마음을 앓고 머리를 조이며 담이 쪼개지고 간이 찢어지는 듯 하외다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좋은 날을 가려서 박전(제물)을 차려 신헌에 천케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위로는 왕업의 어려음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생민의 초췌함을 불쌍히 생각하사 기왕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지금의 형세를 가엾게 생각하사 상제께 청명하시와 선위하시기를 당년과 같이하여 반모가 저최되고 모든 지역이 선보되며 호병(몽병)이 스스로 무너져 랍월이 못되어 군사를 돌이키게 하시고 민력이 남음이 있어 봄이되거던 농사를 지어 옛날같이 안도하여 배부르게 먹고 모두 화락하여서 기강의 맥락이 다시 떨치고 종묘의 혈사가 뻗어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기미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12월 갑신에 산천신기를 신묘에 합사하고 고하기를 「대개 주국의 산천(의 일)이 사람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은 신의 도이온데 소우한 나라와 소의한 사람을 어찌 능히 애긍히 여겨 종시토록 보호하지 않으리까 본조는 옛 삼한으로부터 셋으로 갈려 서서 강토를 서로 다투어 만성이 도탄에 빠졌는데 우리 용조(태조)께서 시기에 응하여 일어나사 인망을 부어 하시와 의를 들어 한 번 부르시매 사방이 향응하여 자연히 귀순하였나이다 그러나 초매(초개)한 때를 당하여 혹 불궤한 무리가 있어 소취하여 봉기하였으나 척검으로써 삼국(삼토)을 소청하고 합하여 일가로 만든 뒤에 성성이 상계하고 대대로 상승하여 금일 이르기까지 300여년 동안에 시운(시수)이 그렇게 되어 재변이 여러번 일어났으나 곧 능히 감정한 것은 오로지 이것은 우리의 제신이 모든 힘으로 잠부하사 사직을 안보케 한 소치인 것입니다. 지난 신묘년 이래로 불행하게도 몽인의 침구한 바되어 국가의 화란은 가히 말로 다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아 슬프도다 우리는 보신을 다하여 해마다 두 번씩 공부를 각수하였으나 징책이 더욱 가하여지고 또 전년에 대거하여 와 동쪽 번병의 수성이 불일간 모두 도잔되매 이김을 타고 예봉을 풀어 곧 군사를 중원(충주)으로 옮겨 빗발같은 시석과 우뢰 같은 고비로 루월 동안 공격하니 남아 있는 외로운 성이 거의 위태하였나이다. 이 때를 당하여 만약 이 성이 함락되었던들 기타의 여러 성보는 미연히 석권됨은 필연적인 일이던 바 다행히도 월악대왕께서는 큰 위력을 나타내어 가만히 부호를 가함에 힘입어 이에 능히 수어하여 마침내 만세의 공을 이루었나이다. 그러나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막기 어려운 고로 그 화가 자심할까 두려워하여 바다를 건너 출영하고 또 왕자 안경공을 보내어 가서 친화를 청하였던 바 몇몇 소인들이 뒤를 이어 도거하여 교묘하게 참언을 퍼뜨려 금년에 거듭 대병을 가하여 남방까지 짓밟게 하기에 이를줄이야 이찌 뜻하였으리까 무릇 우리 나라의 병폐되는 바를 다 알고 우리 복심을 좀먹으나 우리의 형세가 이미 궁한지라 어찌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아아 근년 이래로 인축의 해를 입고 구략된 것은 이미 가히 다 말할 수 없거니와 이에 혈유에까지  이르러서도 또한 다 부자가 서로 구휼치 못하며 처자가 서로 보존치 못하게 되었나이다. 더욱이 지금 1년 사이에 아사한 자가 이미 려항에 찼으니 국가의 형세가 그 위태롭지 않으리까 호국신명의 위험을 금일에 천용치 않으시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오리까 그 차마 국업으로 하여금 땅에 떨어지게 하고 민명으로 하여금 다 죽게 하시렵니까 반드시 그렇지 않으리다 엎드려 바라건대 국가의 그릇되고 잘못된 죄과를 용서하시고 백성들의 죽다 남은 성명을 불쌍히 여기사 급히 신력을 돌려 비린내 나는 오랑캐(성전)를 꺽고 쫓아 국업을 다시 늘어나게 하고 백성의 생명을 다시 이어나가게 하면 어찌 삼한만이 신의 주는 것을 받음이 많을 뿐이오리까 또한 사사도 풍결하게 하여 마땅히 만세토록 폐유(#649)치 않을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정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갑오에 최린이 환주하기를 「신이 협(#649)주(협천)단계에 이르러 차라대를 만나니 그가 말하기를 최항이 왕을 모시고 륙지에 나오면 가히 군사를 파할 것이라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몽병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6,800여인이요 살륙된 자도 가히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지나가는 주군마다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병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 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을묘  42년 춘 정월 기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신축에 몽병 20여기가 갑관강밖에  이르렀는데 계묘에 사로잡혔던 대구의 백성이 도망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몽고제가 차라대에게 명하여 환사하기를 재촉하므로 북계에 주둔한 몽병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갔다」고 하였다. 을묘에 몽병 100여기가 승천성외에 이르거늘 대장군 최영에게 명하여 사(#649)유하게 하니 최영이 성상으로부터 주찬을 줄에 달아 내려보내 먹이매 몽병이 이에 물러갔다. 평장사 최린을 보내어 몽고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인하여 파병하기를 비니 표에 이르기를 「황위가 멀리 미치고 성훈이 자주 더하여 오니 몸 둘 곳이 없어 하늘에 사실대로 호소하나이다. 삼가 생각컨대 황제폐하는 천지같은 도량을 넓히사 패금같은 참소를 살피시와 속히 군사를 돌려 무리(중)들을 불쌍히 여기시면 모두 인화를 받들어 삶(생)을 얻어 (육지로) 출거하여 아름답게 후곤과 더불어 영세에 이르도록 공직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차라대가 구경 보안문외에 주둔하고 경신에 몽병 50여기가 승천성외에 래도하였다. 임수에 교하현인이 노획한 몽고마필을 양부의 재추에게 분사하였다. 계해에 신격전에 행차하였다. 2월 신미에 차라대가 아두 잉부 등 4명을 보내오거늘 갑수에 왕이 제포관에서 향연하였다. 몽병이 철령에 둔숙하거늘 등주별초가 협공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신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도제고판관 고정매로 황려 이주 천녕 양근 죽주 음죽 등지의 소복별감을 삼았는데 정매는 소복(소생회복)의 뜻을 생각지 않고 주색을 즐겨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사리를 취하였다. 갑신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올리니 태자와 제왕을 볼러 내전에서 향연하고 음악을 잡혀 밤새도록 놀다가 파하였다. 이 때에 백성들이 많이 아사하였는데도 왕은 권신에게 제--되어 부득이 이 연락을 설하였던 것이다. 계사에 최항으로 감수국사를 삼았다. 갑오에 경성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3월 병오에 제도군현에서 산성 해도 입보한 자를 모두 출륙케 하였는데 그 때 공산성에 합입된 군현으로 량식이 떨어지고 길이 먼 자는 아사가 심히 많았으며 노약은 (꺼꾸러져) 구렁을 메웠고 어린 아이를 나무에 매어 두고 가는 자가 있는데까지 이르렀다. 무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기미에 판사천사 안방열에게 명하여 지릉을 수공케 하였는데 몽고병에게 파양된 까닭이었다. 갑자에 친히 불정심도장을 설하였다. 하 4월 정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의 정주 지경에 주둔하였는데 형제산(의주)으로부터 대부성(압록강상의 도흥-예전의 대부영)에 이르기까지 원야에 가득 찼다」라고 하였다. 계사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이 달에 도로가 비로소 개통되었는데 병황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고 포로되었던 백성이 경성으로 도망하여오는 자들이 연락부절하므로 도병마사는 1일에 미 1승씩을 주어 이를 구제하였으나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5월 무수에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막는 대책을 올리게 하였다. 정미에 북계가 보하기를 「몽병300여기가 용강 함종 등현에 침구하여 농민의 우마를 략탈하여 갔다.」라고 하였다. 신해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100여기가 고(고원)화(영흥)주에 침입하였다고 하였다.갑인에 제도에 권농사를 분견하였다. 6월 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진에 곽왕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수에 시어사 김수강 랑장 유자필을 보내어 몽고에 가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을해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추 7월 임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8월 임진에 왕이 편전에 출어하여 재추와 더불어 중외의 중형을 결정하고 참교 2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유배시켰다. 계유에 비로소 대묘를 개창하고 신주를 제능서에 이안하였다. 을해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임오에 북계가 보하기를 몽병이 청천강내를 약탈하였다고 하였다. 최#(1-652)로 전중내급사를 삼았다. 무자에 몽병 20여기가 승천부에 이르니 경성이 계엄하였다. 임진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9월 을미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계묘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최린이 몽고사 6인과 같이 왔는데 객사를 승천관에 머물러 두고 먼저 들어와 주하기를 「차라대 영녕공이 대병을 거느리고 서경에 이르렀으며 척후기병은 이미 금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기유에 재추들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객사를 관대함이 비록 후하여도 유익함이 없다하니 최린이 말하기를 「만약 부득이하여 우리 사신을 제소에 보내게 되면 지금은 사자를 가히 나가 영접(빈(#652)접)치 않을 수 없다」라고 하므로 경수에 왕이 제포에서 출영하여 신해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이 달에 외선이 계속되지 못하고 내장이 고갈을 고하매 왕이 서선을 감하였다. 좌창별감 윤평은 북인이었는데 왕이 재삼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3일이 넘어서 이에 진배하거늘 왕이 노하기를 심히하여 집정으로 하여금 그 벼슬을 빼앗고자 하였으나 도리켜 탄식하기를 「오늘 내가 비록 탈직하여도 명일이면 반드시 복직될 것이니 무슨 징계가 되겠느냐」라고 하고 다만 명하여 책하기만 하였다. 동 10월 을축에 몽병이 대원령을 넘어 오거늘 충주에서 정예병을 내어 1000여인을 격살하였다. 계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임오에 승 300을 구정에서 3일간 공양하였다. 11월 정유에 대묘가 락성되거늘 신주를 환안하였다. 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친히 금경도장을 설하였다. 12월 무진에 금련 신희로 모두 시어사를 삼았다. 경인에 최항으로 중서령을 삼고 기윤숙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군경으로 지문하성사 조조로 정당문학을 삼아 치사케 하였다. 임진에 몽병이 배를 만들어 조도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 해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경성에 대역이 있었다.


병진 43년 춘 정월 계미 삭에 조하를 쉬었다. 무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임인에 추밀원부사 최평이 졸하였다. 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정사에 왕이 몽고병이 제도를 공격하려고 모의함을 듣고 장군 이광 송군비를 보내어 주사 3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2월 을축에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김창이 졸하였다. 병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몽병으로 인하여 육도선지사의 발견을 정지하고 별감을 쓰니 때에 봉사자가 백성들을 긁어 횡검(#654)하여 써 은총을 굳게 하니 백성들은 심히 고통스러워하여 도리어 몽병이 오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다. 3월 을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대장군신집평 등을 차라대의 둔소에 보내었다. 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갑인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몽병이 책(#654)양밖에  이르거늘 최항이 도방으로 하여금 요해(지)를 분수케 하였다. 기미에 이광 송군비가 령광으로 가 길을 나눠 칠 것을 약속하였는데 몽병이 알고 방비함이 있음으로 광은 섬으로 도로 들어가고 군비는 립암산성을 보수하고 있었으나 성중의 장정들이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오직 노유들만 남아 있었다. 하루는 군비가 거짓으로 약한 자 수인을 성외로 내보내어 써 보이니 몽병이 (성중에) 식량이 다 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성하에 이르거늘 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드리쳐 이를 격파하니 살상이 심히 많았고 관인 4명도 사로잡았다. 하 4월 병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매실과 같았다. 무진에 현풍현인 40여소(#655)가 난을 피하여 근현의 강가에 정박하였더니 몽병이 그를 추격하여 남녀와 재물을 획취하고 권농사 김종숙를 죽였다. 신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신집평이 몽병의 둔소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와 영녕공의 말이 만약 국왕이 사자를 출영하든지 왕태자가 제소에 친조하면 군사를 가히 그만두고 돌릴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로써 물러가라고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때에 차라대와 영녕공은 담양에 주둔하고 홍복원은 해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계유에 재추들이 퇴병의 책을 회의하였으나 아무 계책이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만약에 퇴병만 얻을 수 있다면 어찌 1자의 출영을 아끼리오」라고 하였다. 갑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다시 신집평을 차라대의 둔소에 보내어 서를 부쳐 이르기를 「대병이 돌아가면 오직 명하는대로 좇겠노라」고 하였다. 무인에 서북면병마사가 치보하기를 「별초 300명을 보내어 몽병 1000명을 의주에서 쳤다」라고 하였다. 경진에 대부도(남양)별초가 밤에 인주(인천)경성의 소래산하에 나가 몽병 100여인을 격주시켰다. 경인에 충주도순문사 한취가 아주(아산)의 해도에 있으면서 배 구소로 써 몽병을 치려 하였으나 몽병이 역격하여 이를 다 죽였다. 몽병이 충주에 들어와 주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을 치니 관리 노약들이 두려워 능히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월악신사에 올라갔더니 홀연히 운무가 끼고 풍우와 뇌박이 함께 드리치니 몽병이 신의 도움이라 생각하여 치지 못하고 물러갔다. 5월 임진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신집평이 라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가 노하여 만약 화친코자 한다면 너의 나라가 어찌 우리 군사를 많이 죽이느냐 죽은 자는 할 수 없거니와 사로잡힌 자는 돌려 보내라고 하고 인하여 30인으로 반행케하여 승천관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하니 갑진에 왕이 승천궐에 행차하여 객사를 향연하고 이어 금은 포백 주기 등물을 증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경수에 신양백 전이 졸하였다. 병진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등주(안변)성중에는 물이 없고 또 저장된 식량이 없어 백성들이 산거한다」라고 하매 이어 도내로 입보케 하였다. 6월 경신 삭에 장군 이천을 보내어 수군 200여인을 거느리고 몽병을 남도에서 막게 하였다. 신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임오에 장군 이천이 몽병으로 더불어 온수현(아산)에서 싸워 수십급을 베고 사로잡힌 남녀 100여인을 탈환하니 최항이 은 6근으로 써 사졸들을 상 주었다. 이 달에 차라대가 해양(광주)무등산정에 둔치고 군사 1000을 보내어 남으로 노략질하였다. 추 8월 을축에 신흥창 (곡식)을 발하여 최항의 가병을 진급하였다. 갑수에 사죄 3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유배시켰다. 경진에 장군 송길유를 보내어 청주백성들을 해도에 옮겼다. 신사에 차라대 영녕공 홍복원 등이 갑관강외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벌리고 전야에 목마하며 통진산에 올라 강도를 바라보고 수안현으로 퇴둔하였다. 9월 을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김수강이 몽고로부터 돌아왔는데 몽제가 서지를 보내와 반사(회군)를 명하였다. 신축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평장사 최린이 졸하였다. 무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경수에 차라대 등이 군사를 거둬 북으로 돌아갔다. 이 달에 도적이 강종능을 발굴하였다. 동 10월 경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몽병 60인에 애도에 침구하니 별초가 모두 잡아 베었다. 신미에 경성이 (#656)엄되니 을묘 8월부터 지금까지 무릇 15개월이 되어 파병하였다. 갑신에 차라대의 관하인 동경(#656)관 송산이 그 처와 겸(#656)종 5인을 거느리고 래투하거늘 최항이 관대하기를 심히 후히 하고 그가 온 이유를 물으니 송산이 말하기를 「몽고가 위망하고 그대 나라가 강성한 까닭이 아니라 내가 세가지 죄가 있는고로 온 것이다. 차라대가 남계로 들어가고 나로써 의주를 령수케 하였는데 능히 고수치 못한 것이 그 하나요 또 나로 하여금 농사를 권하고 량곡을 축적하게 하였는데 화가가 잘 되지 않아 창고가 허모케 된 것이 그 둘째요 고려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70인을 보내어 정탐케 하였더니 한 사람도 돌아온 자가 없게 된 것이 그 셋째이다」라고 하거늘 이에 집1구와 미곡 기물 포백과 노비 각각 3구를 사하였다. 을유에 최자로 중서평장사를 삼았다. 11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임오에 김기손으로 지문하성사를 이보 이세재 이장용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갑신에 도둑이 태자부에 들어와 옥책녹사 금은채백을 훔쳐갔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기아와 역질이 서로 잇달아 강시가 길을 덮었다 은 1근에 값이 쌀 2곡이었다.


정사 44년 춘 정월 정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진에 재추들이 의논하기를 몽고(몽국)가 해를 연하여 군사를 가하니 힘을 다하여 섬겨도 무익하다 하고 춘례의 진봉을 정지하였다. 2월 경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정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정사에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문하시랑평장사 기윤숙이 졸하였다. 임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원주적 안열 등이 고성에 웅거하여 반하거늘 장군 윤군정 랑장 권찬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케 하였다. 병자에 군정이 적 300여인으로 더불어 원흥창에서 싸워 크게 파하니 어떤 사람이 안열을 베고 출항하거늘 군정이 입성하여 그 거괴인 송비 돈정 당로 등 수인을 베고 협종자는 섬에 옮겨 두었다. 윤월 정해에 중서령 최항이 사하였다. 갑오에 최항의 죽음으로 써 과거를 정지하였다. 성중이 크게 굶주렸다. 동진이 동주(철원)계에 침구하였다. 신축에 2죄 이하를 사하였다. 5월 무오에 기거주 김수강 랑장 진세기를 보내어 몽고에 가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분사어사 안희가 영풍(금성?)산곡에 복병을 설하였다가 동진병을 협격하고 병장과 안마와 사로잡힌 남녀 우마 등물을 획취하였다.」라고 하였다. 을축에 서북면이 치보하기를 몽병 30여기가 청천강을 건너 용강 함종으로 행하였다고 하였다. 정묘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3000여기가 등주(안변)에 침입하였다고 하였다. 갑수에 제성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였다. 계미에 경성이 계엄하였다. 이 달에 몽병이 태주에 침입하여 부사 최제를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았으며 주인도 많이 피해되었다. 6월 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몽고의 척후병이 개경에 침입하거늘 장작감 이응를 보내어 이들을 호괴(호)하였다. 계사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태서가 졸하였다. 몽병이 남경에 이르매 이응를 보내어 퇴병하기를 청하니 보파대가 말하기를 「퇴거하고 유둔하는 것은 차라대의 처분에 있다.」라고 하였다. 을미에 몽병이 직산에 이르거늘 시어사 김식을 보내어 둔소에 가서 객사 3인을 청해 오게 하였다. 신해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군이 서경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임자에 김식이 객사와 동반하여 차라대의 둔소에 갔다. 추 7월 병진에 차라대의 사좌 18인이 승천관에 이르거늘 무오에 왕이 제포관에서 맞아 향연하였다. 경오에 최--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임신에 김식이 차라대의 둔소인 안북부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의 말에 왕이 만약 친히 오면 우리가 곧 회병할 것이오 또 왕자로 하여금 입조케 하면 길이 후환이 없을 것이라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계유에 상장군 조성을 해도에 유배시켰는데 성은 성질이 강폭하여 남의 전토를 많이 점유하고 국가의 분전제녹을 비방하므로 처형인 대정 신거룡 등이 화가 몸에 미칠가 두려워하여 가만히 그의 죄악을 기록하여 스스로 해명하기를 꾀하였더니 성이 이것을 도리어 거룡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므로 최--가 이를 신문하였던 바 거룡 등이 이에 기록한 바 글을 올리거늘 성을 섬에 유배시키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재추 등이 왕자를 보내어 몽고에 강화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듣지 않더이 최자 김보정 등이 강력히 요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재추들이 다시 아뢰어 먼저 종친을 보내어 동정(변)을 본 연후에 (왕자를) 보냄이 옳다 하니 이에 영안공 희를 보내어 차라대에게 은병 100과 주과 등물을 증하였다. 영안공 희가 차라대의 둔소로부터 돌아와 말하되 「차라대가 묻기를 왜 왔느냐 라고 함으로 대답하기를 대인이 남하한 군병을 소환하고 또 화곡의 침유를 금하므로 국왕이 심히 기뻐하여 신을 보내어 한 잔(일장)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니 차라대가 말하기를 「태자가오는 날로 마땅히 봉주(봉산)로 퇴둔하겠다고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무자에 재추들이 태자를 보내어 민명 살릴 것을 주청하였더니 왕이 주저하여 결정치 못하거늘 재추들이 또 김식을 보내어 차라대에게 고하기를 「대군의 회귀한느 것을 기다려 태자가 제소에 친조하겠다.」라고 하니 차라대가 이를 허하면서 말하기를 「회군후에 왕자는 송산 등과 함께 오라」고 하고 이에 승천부 갑관강외와 제도인민을 약탈하는 것을 금하였다. 때에 내외가 소연하여 계책을 짜낼 도리가 없어 다만 불우와 신사에 기도할 따름이었다. 임인에 다시 김식을 보내어 주과 은폐 달피 등물을 가지고 차라대의 둔소에 가서 전송하며 그 의사를 관찰하였다. 몽병이 신위도를 함락하매 맹주수 호수가 피살되었다. 별장 이성의 류거는 본래 몽고로부터 래투한 사람인데 송산을 꾀어 몽고로 돌아가다가 강을 건넘에 미쳐 목을 베어 저(몽고)에게 공을 요구하고자 하고 이에 송산을 속여 말하기를 「이 나라가 너를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니 이찌할 것인가」라고 하매 송산이 자못 두려워하는 빛이 있거늘 성의 등이 그 틈을 타서 함께 도망할 것을 약속하니 송산이 이를 쫓아 장차 같이 온 왕아랑가대 왕도 정옥 이양 등으로 더불어 함께갈 것을 도모하였던 바 이양이 교정소에 고발하니 성의와 유거를 잡아 베고 송산을 해도에 유배시켰다. 얼마 안되어 송산이 성의(의 간계)에 빠지게 된 것을 알고 곧 소환하여 위유하였다. 9월 정사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김식이 치보하기를 「차라대가 군사를 철수하여 감주로 퇴둔하고 또 남하한 보파대의 군마를 돌아오도록 독촉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유에 내시소경 선인열에게 홍정 일요를 사하였는데 (그는)최--의 심복이었다. 경성에 지진이 있었다. 기사에 서해도안찰사가 보하기를 「몽병 육선이 창인도(옹진)에 침입하였는데 옹진현령 이수송이 별초를 거느리고 이를 격퇴하였다.」라고 하거늘  수송에게 7품을 가하였다. 임신에 김수강이 몽고로부터 돌아왔는데 수강이 간절히 회군할 것을 애걸하니 제가 이를 허락하고 이어 사신을 보내어 수강과 더불어 함께 오게 하였다. 계유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몽사를 맞이하였다. 무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정해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외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11월 계축에 4품 이상으로 하여금 (왕자를 보내어) 입조하는 가부와 및 몽고를 비어하는 방책을 의논케 하였다.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임인에 정준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이세재로 어사대부를 삼고 박홍무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황보기로 좌업사를 삼았다. 안경공 창과 좌업사 최영을 보내어 몽고에 갔다.

무오 45년 춘 정월 신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계축에 대장군 송길유를 추자도에 류배시켰다. 기사에 최영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2월 임오에 영가후 최전(#663)이 사하였다. 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지진이 있었다. 이 달에 몽병이 의주에 성을 쌓았다. 3월 갑자에 성건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대사성 유경 별장 김인준 등이 최--를 베고 정권을 왕에게 돌리니 경으로 추밀원우부승선을 삼고 박송비로 대장군을 삼고 인준으로 장군을 삼고 남어지 사람에게도 모두 작을 주되 차등 있게 하였다. 기묘에 왕이 강안전에 거동하니 백관들이 진하하기를 새로 즉위하는 것과같이하였다. 예가 끝나고 나오니 박송비 김인준은 시복(평상복)으로써 제공신과 좌우별초 신의군 도방 등을 거느리고 궁전 뜰에 들어와 나란히 절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최--의 가재를 발하여 분급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하 4월 경진 삭에 유경 김인준 박희실 이연소 박송비 김승준 임연 이공주 등에게 위사공신호를 사하고 그 가운데에 천례에 섭(간)한 자는 자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통108)케하고 일등에는 미 200석 채단 100필이요 그 다음에는 미 100석 채단 100필이며 갑제(대저택)와 전토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임오에 5군 신기 등에 은 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또 독폐질자에게도 사하였다. 을유에 친히 삼계에 초제하였다.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는데 각번도방 야별초 신의군 서방이 전후(전)에 왕가를 옹호하고 가니 보는 사람들이 감읍하였다. 정유에 별도로 야별초 신의군에게 한 사람에 미3곡 은1근 포3필씩을 사하였다. 신축에 몽병척후기 1000이 수안계에 침입하므로 야별초를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다. 기유에 왕이 차라대가 사자를 보내와 출륙의 상황을 엿본다는 말을 듣고 이날 문무백관을 승천부로 내보내며 시사(상점)를 옮기고 궁궐롸 관료의 가호를 수리케 하였다. 5월 갑인에 왕이 병위로써 바다를 건너 승천부궐에 거동하여 차라대의 객사 파양등 9인을 인견하였다. 임수에 제주에서 바친 말과 최--의 기르던 호마로써 문무관 4품 이상에게 분사하였다. 서해도안찰사 임목이 주색에 황미하므로 원외랑 이유신으로써 대체하였다. 경상주도안찰사 이홍정이 공공연하게 청알을 행하거늘 형부원외랑 김녹연으로써 대체하였는데 녹정의 부극109)은 홍정보다 배나 되었다. 박주인이 병란을 피하여 위도에 입보하거늘 국가에서는 도령랑장 최우 등을 보내어 별초를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으나 주인들은 도리어 우와 지유 윤겸과 감창 이승진을 보내어 죽이고 우의 거느리던 군사들은 모두 갈밭 사이에 도망하여 숨거늘 곧 뒤를 쫓아 모두 죽이고 드디어 몽고에 투항하였다 오직 교위 신보주만은 소주를 타고 도망하여 와 병마사에게 고하거늘 곧 군사를 보내어 이를 추격하여 부녀와 유약들을 취하여 돌아왔다. 정묘에 장군 박견 랑장 김군양을 보내어 위도인을 선유하였다. 경오에 안북별장 강지준이 위도로부터 래항하거늘 은 9근 미20곡을 사하고 이어 섭랑장을 주었다. 6월 경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몽고의 여수달 보파대 등이 각각 1000기를 거느리고 가(가산) 곽(곽산) 이주에 래둔하였다. 임진에 장한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북계제성의 호장 랑장들에게 각각 백은 1근 흉라 2필을 사하였다. 계사에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을미에 차라대가 파평지 등 6인을 보내왔다. 병신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파평지를 인견하니 차라대의 말을 전하여 가로되 「황제가 칙하기를 고려국이 만일 실로 출항하면 비록 계견이라도 하나도 죽이지 않도록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해도를 공파하라 하시었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에 나와 항복하면 곧 가히 회병할 것이다」라고 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가히 원행치 못하겠다.」라 하고 이에 영안공 희와 지중추원사 김보정을 보내어 차라대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경자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의 척후기병이 서경을 통과한다고 하거늘 경성이 계엄하였다. 계묘에 추밀원사 최온을 흑산도에 류배시켰다. 갑진에 몽병의 척후기병은 고(정안) 백(백천) 등주에 이르고 여수달은 평주 보산역에 둔병하였다. 김보정이 여수달의 보낸 객사 8인과 같이 왔다. 정미에 제포관에 행차하니 보정이 주하기를 「여수달이 신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고려의 일로써 나와 차라대에게 위촉한 것을 그대가 아느가 우리는 그대 나라가 항복하느냐의 여부로 가고 머무르는 것을 결정할 것이다 국왕이 비록 출영치 않더라도 만일 태자를 보내어 군전에 영항하면 즉일로 회군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놓아 남계로 침입할 것이라고 하므로 태자가 마땅히 래견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라고 하였다. 추 7월 임자에 다시 김보정을 보내어 여수달의 둔소에 가서 수기로써 와서 태자를 백마산에서 보도록 청케 하니 수달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태자를 보아야 하느냐 태자가 와서 나를 보아야 하느냐」라고 하며 묵묵히 말하지 아니하니 보정이 말하기를 「감히 대관인의 왕림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대병을 두려워할 뿐이라」라고 하니 여수달이 말하기를 「태자가 만일 나를 보고자 하면 묘관강변에서 (만나기를) 기약하자」라고 하였다. 을묘에 재추들은 여수달이 승천부와 떨어짐이 점점 먼데에서 태자를 불러보려 하므로 불측한 변이나 있을까 두려워하여 통역 강희를 보내어 주과를 가지고 가 위로하며 인하여 사태의 동정을 엿보게 하고 또 원외랑 이녹수 등을 보내어 여수달을 보고 말하기를 「태자가 병환이 있으므로 병환이 낫기를 기다려 가서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오에 여수달이 사자를 보내와 말하기를 「국왕이 비록 출영하지 않더라도 태자가 래견한다는 약속이 있었으므로 나는 군사를 돌리고자 하나 사자가 수사감 왕복하였으되 태자가 이르지 않으니 이는 나를 업수히여기는 것이다 지금 한 번 더 결정을 보고자하여 또 사자를 보내는 것이니 오직 국왕은 이(사자를) 살리던지 죽이던지 하라」고 하매 왕도 또한 출영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사사하였다. 경신에 이록수가 돌아와서 주하기를 「여수달이 말하되 이미 너의 나라의 거짓을 알았다 하고 이에 군사를 놓아 침략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을해에 도병마 재추소가 주하기를 「공신 유경 김인준 박희실 이연소 김승준 박송비 임연 이공주 등은 충의를 분거하여 왕가를 재조하고 삼한을 바로잡았으니 대려 난망 이외다 비록 작질을 초수하였으나 족히 써 (그 공에)수(#667)답치 못할지니 삼한벽상공신의 예에 의하여 유경 인준은 마땅히 그 아들에게 6품 벼슬을 주고 전 100결과 노비 각 15구를 급하며 희실 연소 승준 송비 임연 공주는 그 아들에게 7품 벼슬을 주고 전 50결과 노비 각 5구를 주며 무자한 자는 그 생질 여서 중 1인에게 벼슬을 주고 벽상에 도화하고 향관의 호를 각각 올리고 그 동력하여 보좌한 차송우 이하 19인에게도 또한 모두 관질(#668)을 높이고 1자에게 9품직을 허하소서 최충헌과 같은이는 죄악이 영임하였으며 최이는 전권 천명하였으니 마땅히 도화를 삭거할 것이며 묘정의 배향도 파할 것이외다」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8월 계미에 영안공 희가 차라대의 둔소로부터 돌아왔다. 경인에 차라대가 군사로써 구경에 래둔하니 유기(유격의 기병)는 승천부(풍덕) 교하(파주) 봉성(동상) 수안(통진) 동성(금포)에 산입하여 인민의 먹이는 양마를 약탈하였다. 계사에 일중에 흑자(점)가 크기 계란과 같았는데 그 다음 날에는 또 인형과 같았다. 을미에 사하였다. 병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무수에 차라대가 몽고대 등 50인을 보내왔다. 기해에 제포궁에 행차하여 객사를 인견하니 그가 말하기를 「태자가 나오면 군사가 가히 물러갈 것이외다」라고 하거늘 왕이 이르기를 「태자가 병이 있으니 어찌 능히 나갈 수가있느냐」라고 하였다. 을미에 몽병이 서해도(황해도)의 가수굴 양파혈을 치니 모두 항복하였다. 양파혈은 상중하의 3혈이 있었으므로 몽병은 산상으로부터 갑사를 상혈구에 줄을 매어 내려 보냈으나 창부(무기) 때문에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풀을 불태워 굴 속으로 투입함으로 수안현령 박림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방호별감 주윤은 별초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백성들은 궤주하고 윤은 유시에 맞아죽었으며 가수혈별감 노극창도 또한 피금되었다. 9월 신해에 친히 내전에서 초제하였다. 임자에 몽병 300여기가 갑관강외에 래둔하였다. 무오에 광복산성(이천)의 피난리민이 방호별감 유방재를 죽이고 몽병에게 항복하였다. 경신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몽병이 착양(수원)으로부터 갑관강외에 래둔하여 산야를 누비었다(롱락). 신미에 왕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수에 안경공 창이 몽사와 함께 승천관에 돌아왔다. 을해에 승천궐에 행차하여 몽사를 맞았다. 동 10월 을묘에 전광재를 보내어 차라대를 향연하고 퇴병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임인에 친히 백좌도장을 설하였다. 이 달에 충주별초가 박달현(제천)이 복병시켰다. 몽병을 저격하고 사로잡혔던 인물 우마와 병장을 탈환하였다. 11월 정미에 문무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몽병을 막을 계책을 진술케 하였다. 병진에 몽고 천호 류어개가 9인을 거느리고 래투하였다. 무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유에 김지대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유경으로 첨서추밀원사를 삼았다. 12월 병자 삭에 최윤개르 좌부승선을 삼았다. 동진국이 수군(주사)으로 써 고성현의 송도를 래위하고 전함을 분소하였다. 정축에 사망한 추밀원사 민희 김경손 형부상서 박훤은 모두 나라에 공이 있으므오 그 처자에게 각각 은 1근 미 3석을 사하였다. 기축에 몽고의 산길대왕 보지관인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옛 화주(영흥)의 땅에 래둔하였다. 룡진현(정평)인 조휘와 정주(정평)인 탁청이 화주 이북으로 써 몽고에 항부하니 몽고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휘로 총관을 삼고 청으로 천호를 삼았다. 무수에 달보성(곡산?)민이 방호별감 정기 등을 잡아가지고 몽고병에게 투항하였다. 제왕 재추 현관과 치사한 3품에게 조 각10곡 4품에게는 8곡 5품에게는 6곡 6품 및 합입한 외관참직원에 4곡를 사하였다. 임인에 최자로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김기손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정준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장용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이세재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조순으로 수사공을 삼고 김보정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김지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유경 황보기 손정열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김전 박성자로 좌우복사를 삼고 정세재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갑진에 장군 박희실 조문주 산원 박천식을 몽고에 보내어 달로화적에게 청하기를 「본국이 사대의 성을 다하지 못한 소이는 한갖 권신이 정사를 천단하여 내속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은 까닭이었는데 지금에는 최--가 이미 죽었으므로 곧 바다로부터 나와 육지에 나아가 상국의 명을 듣고자 하나 천병이 경성을 제압하고 있으니 비컨대 혈서가 고양이의 지키는 바처럼 되어 감히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제도의 화곡이 모두 몽병의 소획이 되었다.

기미 46년 춘 정월 기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정미에 몽고가 성주(성천)의 기암성을 공격사거늘 야별초가 성중인을 거느리고 싸워 크게 이를 패케 하였다. 동진이 금강성에 침구하거늘 별초 3000인을 보내어 이를 구하였다. 무오에 정지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김윤후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모든 사원의 승도와 강화임내(관할) 제현의 인민들에게 조를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정묘에 형부시랑 이응을 보내어 서경 왕만호 사거지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합입한 각관의 사민에게 조(벼)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2월 무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인에 제왕 재추들을 향연할제 왕이 두 번 손을 들어 군신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무릇 연회에 나온 자들은 박수하여 나의 락을 도우라」하고 술이 취해지매 왕은 오히려 즐거워하기를 심히하매 군신이 박수하고 뛰놀아 땀이 흘러 몸이 젖게 되더니 저물음에 으르러서야 파하였다. 갑오에 리궁을 마리(마니)산 남쭉에 창건하였다. 앞서 교서랑 경유가 청하기를 이 산에 궁궐을 지으면 가히 기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한 것이었다. 경자에 이응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만호의 말이 너희 국왕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윤춘 송산의 말을 듣고 나와 항복하지 아니하는가 항복하면 추호도 침범치 않으리라고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때에 왕만호는 군사 10령을 거느리고 서경의 고성을 수축하며 또 전함을 짓고 둔전을 개척하여 오래도록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계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서경과 황주의 백성을 덕적도에 옮겼다. 도둑이 후릉 예릉을 발굴하였다. 3월 을사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별장 박천식이 차라대의 사자 온양가대 등 9인과 함께 돌아와 주하되 「박희실 조문주가 차라대의 둔소에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다만 권신에게 제재되어 제명을 어긴지 여러 해가 되었지마는 지금은 이미 최--를 베고 장차 구도에 돌아가 태자를 보내어 조견코자 한다」라고 하니 차라대 등이 기쁜 낯으로 말하기를 「만약 태자가 오려면 모름지기 4월 초길에 맞추(급)도록 하라고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계축에 왕이 온양가대 등을 강안전에서 인견하였는데 온양가대가 태자의 입조할 시기를 묻거늘 왕이 5월로 써 답하니 온양가대가 노하여 가로되 「아병의 진퇴는 태자 행차의 지속에 달렸는데 만약 5월을 기다린다면 어찌 그리 늦느냐」라고 하매 왕이 부득이하여 4월 로 약속하고 이어 금은 포백을 주니 온양가대는 또 말하기를 「태자를 보고 면약코자 한다」라고 하였다. 병자에 태자가 나와 객사를 중방에서 향연하고 시기(입조)를 4월 27일로 하였다. 주현수령들로 하여금 피난민을 거느리고 출륙하여 농사 짓게 하였다. 북계의 애 갈 이도에 모여들어온 (합입) 각역인들이 경별초 7인을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였다. 신미에 왕이 불예하므로 중외의 이죄 이하의 죄수를 사하고 또 최영 허홍을 보내어 바다를 따라 생어를 노아주었다(방생). 하 4월 갑신에 왕이 병이 위독하매 근신을 분견하려 여러 신사와 도전에 기도케 하고 2죄 이하의 죄수를 사하고 또 방생하였다. 신묘에 금년의 동당감시(과거)를 정지하였다. 유경의 집에 이어하였다 갑오에 태자 전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몽고에 가게 하였는데 참지정사 이세재 추밀원부사 김보정 등 40인에 시종하였다. 백관들은 교에거 전송하였으며 문무 4품 이상은 은을 각각 1근씩 내고 5품 이하는 포를 차등있게 내어 그 비용에 충당케 하였으며 국신은 타마(물건을 실은말)가 300여필인데 말이 부족하여 길가는 사람들의 말을 억매하였다. 이 때문에 량반으로 승마한 자가 적었다. 표에 이르기를 「그윽히 생각건대 소방은 일찍 통병하는 권신이 있어 오랫동안 제병을 오로지 하였으며 국사에 있어서도 이 지휘 안에 떨어져서 자제하지 못하였음으로 응봉하는 사이에 있어 자못 어긴 것이 많았나이다. 황령을 다행이 힘입어 흉수(악인)를 쉽사리 제거하고 장차 만세로써 기약하게 되었으므로 일심을 다하여 진력하오리다 요사이 입찬(섬에 찬입하는) 한 유속으로 하여금 모두 서로 이끌고 구허로 나와 살게 되었나이다 아아 소신의 노병이 이미 깊은 것은 또한 황제도 아시는 바인지라 마침내 금일에 친조치 못하고 태자로 하여금 가차하게 가서 조관케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이 뜻을 조량하시와 그 말을 받아들이시고 다시 소국을 사랑하는 은을 가하여 수충의 직을 이룩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정유에 산원 민칭을 흑산도에 류배하였다. 명하여 가궐을 삼랑성과 신니동에 영조케 하였다. 사당동 민수의 집에 이어하였다. 5월 기사에 12공신에게 은병 각 5사와 미 20석을 사하고 그 나머지 공신에게도 또한 차등 있게 사하고 이름을 단오선사라 하였다. 병오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차라대가 폭사하니 제가 사람을 보내와 아두 잉부 삼미 등 3인을 잡아갔다.」라고 하였다. 경수에 친히 삼계에 초제하였다. 6월 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진에 몽고원수 여수달과 송길대왕이 보낸 주자 도고 등이 참지정사 이세재와 같이 왔다. 세재가 주하기를 5월 16일에 태자가 호천에 이르니 대우로 물이 창일하므로 종자들이 모두 유숙하여 물이 빠질 때를 기다리기를 청하였으나 태자가 듣지 않고 드디어 가 1일을 지나 동경에 이르니 동경인이 말하기를 「명일에 대병이 장차 고려로 향한다」라고 하므로 태자가 신과 김보정을 보내 각각 백은 50근 은존 1 은항(항아리)1 주과 등물로 원수 여수달 송길대왕에게 주었으며 19일에 태자가 송길을 보니 송길이 말하기를 「황제가 송국을 친정하고 오등에게 그대 나라를 칠 것을 맡겼으므로 벌써 군사를 발하였는데 그대는 어찌 왔느냐」라고 하므로 태자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오직 황제와 대왕의 덕을 힘입어 겨우 잔명을 보전하므로 장차 잔을 대왕과 모든 관인들에게 드린 후에 황제께 입관하려고 왔다」라고 하니 송길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이미 강도를 떠났는가」라고 하므로 태자가 가로되 「주현민들은 이미 출도하였으나 왕경은 황제의 처분을 기다려 도읍을 옮기려 한다」라고 하니 송길이 말하기를 「왕경이 아직 도중에 있으니 어찌 파병할 수 있는가」라고 하므로 태자가 이르기를 「대왕이 일찍이 태자가 입조하면 파병한다고 말하였으므로 지금 내가 온 것인데 군사가 만약 파하지않으면 우리 소민들은 두려워서 도찬할 것이니 그런 후에 비록 돈독한 유시가 있다한들 누가 다시 청종하리요 대왕의 말은 믿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하니 송길 등도 그렇겠다 하고 군사를 멈추고 출발시키지 않고 이에 주자 등을 보내왔으니 성곽을 헐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오에 왕이 객사를 시어궁에서 인견하니 주자 등이 성을 헐 것을 일깨워 말하였다. 계미에 비로소 강도의 내성을 헐게 하였는데 객사의 독역이 심히 급하므로 제령부병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울며 말하기를 「만약 이와같을 줄 알았으면 성을 쌓지 않는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을유에 성곽이 깨트러지매 그 소리가 빠른 우뢰와 같아서 려리를 진동하니 가동괴 항부가 모두 슬피 울었다. 기축에 경안공에게 명하여 객사를 전송케 하고 금은 포백을 줌이 심히 많았다. 경인에 객사가 외성은 헐지 않음을 듣고 말하기를 「외성이 아직 있으니 가히 성복하였다 하리오 모두 헐어야 이에 돌아가겠다」라고 하므로 국가에서는 중보를 뇌물로 주고 곧 도방으로 하여금 외성을 헐게 하니 때에 도인들이 말하기를 「내외성을 모두 허는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다.」라고하여 다투어 배를 사들이니 배 값이 폭등하였다. 임인에 왕이 유경의 제택에서 훙하니 대장군 김인준이 안경공을 받들어 사위케 하려 하매 양부가 의논하여 말하기를 「원자가 계위하는 것이 고금의 통의어던 하물며 지금 태자는 왕을 대신하여 입조하였는데 아우로 임금을 삼는 것이 옳으랴」라고 하고 드디어 유조를 반포하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나는 덕이 박하고 짐이 무거운데 병이 오래되었도다 오직 왕위는 오래 비우지 못할 것이며 더구나 나의 원자는 그 덕이 족히 위에까지 들리(문)므로 이에 위로써 명하나니 모든 너희 관사들은 각각 너희들의 일을 집행하고 사왕의 명령을 받으라 사왕이 봉사로 아직 돌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군국의 모든 사무는 태손에게 청종하고 산릉제도는 힘써 검약을 좇을 것이며 역월의 복으로 3일만 입고 제(복)하라」고 하였다. 왕은 재위가 46년이오 수가 68이다 익는 안효이요 묘호는 고종이며 릉은 홍릉이라 하였다. 충선왕 2년에 원이 충헌이라 증익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왕은 예전에 유승단에게 배웠는 바 재위(정국)하기를 거의 50년이었으니 대개 학문으로써 그 덕을 쌓고 외신으로써 그 위를 보전하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하늘이도왔도다」라고 하였고 사신은 이르기를 「고종의 세에는 안으로는 권신들이 서로 잇달아 국명을 단집하였고 밖으로는 여진 몽고가 있어 군사를 보내어 해마다 침노하니 당시의 국세는 급급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소심으로 법을 지켰으며 모든 착치를 견디고 참았으므로 보위를 온전하게하여 미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옴을 보게 되었으며 적이 이르면 성을 굳건히 하여 굳게 지키고 물러가면 사자를 보내어 통호하며 태자를 보내어 집지코 친조케 하기에 이르렀던 까닭에 마침내 사직으로 하여금 운락치 않게 하고 국조를 전함이 길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