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병법서

吳起(오기)의 생애에 대하여

오늘의 쉼터 2009. 7. 23. 14:09
 吳起(오기)의 생애에 대하여
 
끈질긴 아이...
 
吳起(오기)는 본래 衛(위)나라 사람이다. 좌씨골이란 마을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말이나 행동거지가 나이보다 조숙한가 하면,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포기하는 법이 없고, 남에게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등 유별난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솔력이 있어 항상 대장노릇을 하며 동네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
이러한 오기의 면모를 눈여겨 본 그의 아버지는 여러 공부를 시키고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새로 이사온 같은 또래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덩치가 유난히 크고 성격도 거칠었다.
이런 녀석이 오기의 대장자리를 노리는 것은 당연했고, 결국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덩치가 차이가 나니 결과는 뻔했다. 오기는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이에 동네 아이들은 모두 대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기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다음날 오기는 녀석의 집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녀석은 다시 오기를 때려눕혔고,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오기는 나타났고, 그 다음날도 나타났다.
이렇게 닷새가 지나자 녀석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오기의 끈기에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열흘째 되던 날 녀석은 더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오기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魯(노)나라로...
 
자신을 비난하는 삼십여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재상이 되겠다고 맹세를 한 후 오기는 魯(노)나라로 피신한다.
 孔子(공자)의 나라인 그 곳에서 오기는 曾申(증신)1)의 문하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증신은 재능이 비범하고 뜻이 큰 오기를 무척이나 총애하였다.
오기가 齊(제)나라의 대부인 田居(전거)의 딸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도 曾申(증신)의 적극적인 추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후 오기의 과거 전력이 드러나면서 결국 파문당하고 만다.
 
이후 오기는 노나라 변방의 군영의 幕僚(막료)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노나라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던 도중 齊(제)나라가 쳐들어오고,
오기는 승리를 확신하며 자신을 장수로 삼아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중신들은 오기의 아내가 齊(제)나라 사람이라 하여 반대하고,
오기가 자신의 아내를 죽여 결백을 증명하려 하였던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하여 오기는 아내의 목과 바꾸어 대장군의 자리에 오른다.
 
齊(제)군의 대장군은 田和(전화)로 병법에는 능하지만 매우 교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밀정이 노군을 살피고 돌아와 오기가 병사들과 나란히 밥을 먹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장수가 존엄해야 사졸이 두려워하고, 사졸이 두려워해야 힘써 싸우는 법이다.
 오기의 행동이 그렇게 경박하다면 걱정할 것 없다."
 전화는 그 후에도 사신을 보내 노군 진영을 탐색하도록 했다.
오기는 정예병들을 모두 숨기고 허약한 병사들만을 눈에 띠게 하고는 공손하게 사신을 맞았다.
그리고는 은근히 화평을 맺을 뜻을 보였다. 이에 사신은 안심하고 제나라 진영으로 돌아갔다.
 오기는 그 사신의 뒤를 정예병들을 이끌고 뒤쫓았다. 잠시 매복을 하고 있자니,
 전화가 보고를 받고는 안심을 했는지 제나라 군사들은 방비태세를 풀어버렸다.
이에 오기는 순식간에 제나라 군영을 급습했고, 결과는 노나라 군대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노나라에서도 오기는 모함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孫子吳起列傳(손자오기열전)에서 살펴본 바 있다.
 
 
魏(위)나라에서...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오기는 魏文侯(위문후)를 만나게 된다.
위문후는 오기를 西河(서하)의 태수로 임명하였다.
서하는 전국시대 온 중원을 겁에 떨게 했던 '虎狼之國(호랑지국)' 秦(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수비는 위나라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用兵(용병)의 귀재로 소문이 자자한 吳起(오기)가 새로운 태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서하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얼마나 위풍당당하며 기골이 장대한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오기는 평범한 용모에 초라한 행색으로 어느 한 군데도 대장군의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새로 부임했으면서도 부대사열은 하지 않고 이따금씩 주위를 둘러보는게 전부였다.
관례대로라면 새로 부임한 지휘관은 부대를 사열하고, 잔치를 열어 병사들을 격려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에 휘하의 한 장수가 참다못해 오기를 찾아갔다.
 "장군께서는 왜 저희에게 아무런 令(영)도 내리지 않으십니까?
모두가 장군께서 부대를 사열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오기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그것이 궁금했던가? 부대사열은 이미 했다네.
내가 도착하던 날 轅門(원문)을 지키는 한 병사를 유심히 지켜보았네.
그 병사는 눈빛이 살아 있고, 동작이 민첩하였으며, 창끝이 예리하더군.
한 사람의 병사를 보면 그 군대를 알 수 있는 법이네.
 그래서 나는 요즘 이 곳의 물자를 점검하고, 이 곳의 지형을 살펴보고 있었다네."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장수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후 오기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 대낮에 갑자기 적의 침입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성안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오기가 바라보니 秦軍(진군)이 함성을 지르며 도강을 하고 있는데,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속도도 더디었다.
이는 공격할 의도가 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휘하 장병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오기가 말했다.
 "저것은 우리를 떠보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벌건 대낮에 소규모의 부대가 저렇게 느린 속도로 공격해 올 수 있겠느냐?"
 잠시 후 진나라 군사들은 오기의 말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오기는 즉시 장수들을 소집하여 호되게 꾸짖었다.
 "장수는 어떠한 경우라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장수가 불안해 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장수는 항상 침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판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오늘 그대들은 이 두 가지 면에서 장수답지 못하였다.
반드시 명심하여 오늘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이다!"
 이에 장수들은 무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秦(진)나라에서 한 때 惠公(혜공)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던 때가 있었다.
오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은밀히 병사를 진군시켜 小梁城(소량성)과 繁城(번성), 龐城(방성)을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落陰(낙음)과 합양 두 성을 더 손에 넣었다.
이 때까지 한 번도 남의 나라의 침공을 받은 적이 없는 秦(진)나라였기에 그 충격은 엄청났다.
이후 진나라는 수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탈환에 나서지만, 오기가 위나라에 있는 동안은 성들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나 오기를 믿고 뒤를 봐주었던 文侯(문후)가 죽고,
 武侯(무후)가 즉위한 후에는 오기는 여러 방면에서 모함을 받고 결국 위나라를 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武侯(무후)와 吳起(오기)의 갈등에 대해서도 孫子吳起列傳(손자오기열전)에서 살펴본 바 있다).
 
 
다시 楚(초)나라에서...
 
오기가 초나라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楚棹王(초도왕)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오기는 도왕에게 초나라를 覇者(패자)로 만들 방법을 아뢰었고, 도왕은 크게 흡족해 하였다.
그리하여 도왕은 오기를 재상의 직책인 相國(상국)에 임명하였다.
 
오기는 즉각적인 개혁에 들어갔다. 먼저 국법을 엄격하게 정비하고 법 집행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남의 것을 훔친 자는 손목을 자르고, 거짓말을 한 자는 혀를 도려냈으며,
뇌물을 주고받은 자는 모두 군중 앞에서 매를 때렸다.
다음으로 국고를 넉넉히 하기 위해 낭비와 사치의 요인을 제거하였다.
꼭 필요하지 않은 관직은 모두 없애고, 관리의 숫자를 줄였으며,
 왕실의 먼 친척에게까지 지급하는 녹봉을 모두 없애 군사양성비로 전환하였다.
또한 병사들의 급료를 크게 늘렸으며, 병사들의 능력에 따라 계급과 급료를 재조정하였다.
초나라의 군사력이 다시 중원을 떨게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3년 동안 군비를 확장하고 병사들을 조련한 오기는 마침내 군대를 움직인다.
남으로 百越(백월)을 평정하고, 북으로 陳(진)과 蔡(채)를 합병하고, 三晉(삼진)을 물리쳤으며,
서쪽으로는 秦(진)을 쳐서 강대국 楚(초)의 이름을 사방에 떨쳤다.
 오기가 초나라로 들어간지 3년 만의 일이었다.
 
 
吳起(오기), 그 마지막 병법...
 
오기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왕의 총애는 깊기만 했다.
그러나 이듬해 여름 갑자기 도왕이 붕어하고 말았다.
마침 태자는 지방순시 중이라 왕의 시신을 지킬 사람은 오기 밖에 없었다.
오기는 즉시 태자에게 訃音(부음)을 전하게 하고, 군영에 알려 신속히 도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왕의 서거 소식을 듣고 오기로 인해 쫓겨났던 귀족들이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빨랐다.
 이들은 손에 칼과 창을 들고 오기를 찾았다.
오기는 도왕의 시신이 있는 殯殿(빈전)으로 피신하였다.
 귀족들은 오기와 대치하기는 하였으나 누구 하나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 삼십여명을 혼자서 몰살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무술과 병법의 대가를 상대로 서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멀리에서 활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오기는 마지막 기지를 발휘한다.
 그는 도왕의 시신 위로 엎드렸다.
오기의 몸은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혔고, 도왕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오기는 60년의 일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오기의 마지막 병법임은 아무도 몰랐다.
 國葬(국장)이 끝나고 새로 보위에 오른 태자, 肅王(숙왕)은
 부왕의 시신에 화살을 날린 폭도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극형에 처했다.
이때에 멸문당한 가문이 70여家에 이르고, 죽은 사람은 3,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吳起(오기), 無敗(무패)의 전략가...
 
吳起(오기)는 60여년의 생애 동안 76여회를 싸워 64회를 大勝(대승)하고 패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자신은 曾子(증자)에게 배운 儒學者(유학자)였으며, 현실에 있어서는 法家(법가)에 기초한 개혁주의자였다. 재상이 되겠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편법은 쓴 적이 없다.
 公(공)과 私(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자신의 아내의 목마저도 베어버릴 정도였다.
 '父子之兵(부자지병)'이라는 자신의 지론에 따라 병사들과 同苦同樂(동고동락)하여 모든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병법을 펼쳐 결국은 초나라의 불순세력을 없앤 인물,
그가 바로 孫武(손무)와 병칭되는 대전략가 吳起(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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