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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량(道場)<2>

오늘의 쉼터 2009. 6. 29. 00:20

 

  8. 도량(道場).<2>

 

 피리가 분명히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없다.

 세상에서는 그를 번개라고도 부르고 또 원효가 부르는 모양으로 피리라고도 부른다.

 그를 번개라 하는 까닭은 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되 번쩍할 뿐이요

 자취를 찾을 수 없단 말이다.

 세상에서는 그가 둔갑장신을 한다고 믿고 있고,

 어떤 이는 그가 사람과 귀신과의 사이에 난 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사람의 모양을 나토아서 눈에띄고, 또 어떤 때에는 귀신이 되어서

 사람이 보지 못하게 다닌다고까지 한다.

 피리는 대두목 바람의 책사다.

 이를테면 제갈 양이다.

 전 신라 수만 명 도적의 떼를 지휘하는 두령이 곧 바람과 번개다.

 바람은 벌써 육십이 가까운 늙은 사람이지만 아무도 그의 모양을 본 이가 없다.

 그의 하는 일은 뚜렷이 보이는데 몸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바람과 같다고 하여서

 바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피리는 젊은 사람도 되고 늙은 사람도 되고 여러 가지로 변형을 하였고,

 목소리까지도 변하는 재주가 있었다. 게다가 몸이 날래기 제비와 같다는 것이다.

 몸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꾀로도 일찍 누구에게 져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큰 고을을 습격하거나 하는 일은 다 피리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이번에 원효를 유인해 온 것도 피리의 꾀였다.

 수없이 관군의 토벌을 당하였으되 언제나 꾀로 관군을 이기어 깜쪽같이 면하는 것이었다.

 그러하던 피리가 오늘 밥 먹는 동안에 원효의 손에 공기 놀 듯이 놀리운 것이다.

 꾀를 내려도 베풀 곳이 없고, 일어나 싸우려도 원효는 그러한 틈을 주지 아니하였다.

 원효는 마치 발붙일 수 없는 석벽인 것 같았다.

 원효가 하도 만만하게 끌려온다 생각하였기 때문에 피리의 타격은 더욱 큰 것이었다.

 '과연 거물이로구나.'

 피리는 속으로 원효를 탄복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원효기로니이 소굴에 잡혀온  뒤에야 제 무슨 재주로 빠져나가랴,

 이러한 생각도 있었다.

 이때 밖에서,

 "군사 안전 軍師案前에 아뢰오."하는 소리가 있었다.

 원효는 군사란 말에 빙긋 웃었다.

 "오오. 무슨 일이냐."

 피리는 창을 열며 점잖은 소리로 대답하였다.

 "장군마마께옵서 손님 인도하시고 듭시라 하읍시오."

 붉은 방아라에 벙거지를 쓴 자는 이렇게 아뢰었다.

 원효는 이 무리가 영작자문을 만들어 가지고 관에서 하는 모양대로 흉내내는 것을 알았다.

 "오오. 지금 곧 갑니다고 아뢰어라."

 피리는 이렇게 말하여서 사자를 돌려보내고 원효에게,

 "자, 일어나시오." 하고 재촉하였다.

 "어디로 가는 게요?" 원효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 장군 계신 데로 가는 게요." 피리는 위엄을 보이려 한다.

 "당신네 장군이라니 바람이란 이요?"

 "그렇소. 세상에서 바람이라고 일컫는 이요. 천하에 아니 가는 데가 없으되,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보여도 바람의 몸은 아니 보이듯이 우리 장군으로말하면

 자취는 보여도 몸은 못 본다 하여서 천하의 바람이라고 일컫소."

 원효는 피리를 따라서 나섰다.

 그 동네에서 나와서 작은 시내를 끼고 얼마를 올라가면 조그마한 고개가 있고

 그 고개를 넘으면 늙은 소나무와 새로 나불나불 잎이 피는 느티나무,들매나무,

 홰나무들이 있는 커다란 집이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여러 백 년 된 고가인 것 같았다.

 "저 집이오."하고 피리가 원효에게 말하였다.

 "어, 대단히 고가로군." 원효는 고개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가고 말고. 우리 신라 나라보다 더 오랜 집이오. 상아가나[辰韓] 적부터 있는 집이니까."

 피리는 자랑하는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상아가나 적부터?" 원효는 놀랐다.

 "그렇소. 도적 나라의 내력을 말할 테니 들어 보시오."

   피리는 바위 하나를 골라서 원효더러 앉으라 하였다.

 

 도적 나라의 내력이란 말에 원효는 빙그레 웃었다.

 피리는 설명을 시작한다.

 "세상에 도적이 있는 것이 마치 세상에 중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첫말이었다.

 "그건 또 웬 소리요?" 원효는 정말 놀래서 물었다.

 "원효대사도 그까지는 모르시는군." 피리는 한번 이겼다 하는 듯이 웃는다.

 "도적이 중과 같다?" 원효는 한번 더 외워 본다.

 "들어 보실라오. 세상 사람이란 중간이 많은 거야. 도적도 싫고, 중도 싫고,

 그러나 유시호 도적질할 생각도 내 보고, 중 노릇 할 생각도 내 보고,

 그러면서도 중도 못 되고 도적도 못 되고 일생을 보내는 것이 중간치기란 말요.

 세상이란 그러한 중간치기들로 되어 있습니다."

 피리는 원효가 찬성하나 반대하나 눈치를 본다.

 "그렇지. 당신 말이 옳소."

 원효는 찬성하는 뜻을 표하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적질을 먼저 하면 도적이 되고, 중질을 먼저 하면 중이 되는 것이야.

 한번 도적질을 하면 생전 도적이 된단 말요. 도적질을 하니 죄인이 되어,

 죄인이 되니 달아나, 달아나니 도적질을 할 수밖에. 중도 그렇지 않소?

 원효대사도 요석공주헌테 장가를 드시고는 거사 행세를 하나 봅디다마는 세상이야 어디

 그런가, 여전히 원효대사지. 그러니까 도적과 중이 마찬가지란 말요. 하하하하 안 그렇소.

 대사?"

 여기 대해서 원효는 찬성하는 뜻은 표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화두를 돌렸다.

 "그런데 도적 나라의 역사가 신라 나라보다 오래다는 것은 무슨 소리요?"

 "아따, 그것도 모르시오. 벌에도 도적 벌이 있고, 개미에도 도적 개미가 있지 아니합디까.

 이 세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도적도 있기 시작했단 말요.

 마한, 진한, 변한이 생길 때에 벌써 도적의 나라가 생겼단 말요.

 우리 신라 나라에 도적의 첫 두목으로 말하면 망난이란 사람이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시조 박혁거세와 같은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였답디다.

 그러다가 박혁거세가 임금이 되니, 망난이는 산으로 들어가서 도적의 두목이 되고 만 것이오.

 시조께서 나와서 나라를 다스리자 하시니까 망난이가 대답하기를

 그대는 착한 백성이나 다스리소, 나는 악한 백성을 다스림세, 하고 아니 나갔다 하오.

 딴은 그렇기도 하단 말요.

 그 많은 도적을 다스리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가 서 갈 수가 있나. 안 그렇소. 대사?"

 피리는 또 말을 끊고 원효의 눈치를 본다.

 "도적을 다스리다니 어떻게 다스린단 말요? 도적에게도 법이 있고 도가 있소?"

 "허, 원효대사만한 이가 그런 말을 해서 쓰겠소?

 당신네 중들도 왕법의 다스림은 안 받더라도 불법의 다스림은 받지 않소?

 도적도 마찬가지요.

 도적에도 도적의 도가 있고, 도적의 법이 있길래 무고한 백성이 살아가고

 또 도적의 나라가 천추만세에 누려 가는 것이 아니오?" 하고 피리는 뽐낸다.

 "어디 그 도적의 도라는 것을 좀 들어 봅시다." 원효는 재미있는 듯이 눈썹을 쫑긋하였다.

 "도적의 도를 내 말할게 들어 보시오. 첫째로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지 말지어다."

 "그래서." 원효는 유심히 듣느라고 눈을 감는다.

 "둘째로는 나라 것을 건드리지 말지어다."

 "옳지, 충이렸다."

 원효는 눈을 감은 채 대꾸를 한다.

 "셋째로 바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흥, 의렸다."

 "넷째로 잠든 사람의 것을 빼앗지 말지어다."

 "그건 또 무엇인다." 원효는 눈을 떴다.

 "잠든 짐승을 죽이지 말라고 안 했소."

 "흥, 살생유택이라."

 "그렇지. 당신네 중들이 이른바 자비심도 되겠지마는 우리네는 그것을 좀도적이라고

  아주 천하게 여기는 거요." 피리는 정말 좀도적을 멸시하는 정을 낯에 보인다.

 "또."하고 원효는 다음을 재촉한다.

 "다섯째는 혼자서 지고 가는 짐을 빼앗지 말 것."

 "또."

 "유부녀를 겁탈하지 말 것. 수절과부를 겁탈하지 말 것."

 "그렇게 여섯 가지만이오?"

 원효는 눈을 떴다. 노송 가지에서 까치가 지저귄다.

 "어떻소? 우리 도적 나라의 법이 어지간하지요. 이것이 몇 천 년 내려온 법이오."

  피리는 이렇게 말하고 수염을 내려쓴다.

 "그러면 어떤 물건을 빼앗아 오오?"

 원효는 피리의 눈을 본다. 대단히 빛나는 눈이다.

 "백성의 원망을 듣는 관원, 백성의 원망을 듣는 부자, 그리고 원체 많이 가져서

  좀 떼어내어도 괜찮을 사람의 것, 우리는 이런 것을 노리지요.

  한번 우리가 노린 다음에는 면하지 못하지요." 피리는 위엄을 보인다.

 "인명도 살해하오?"

 "우리가 한번 하려고 한 일을 방해하는 자면 기어코 죽이고야 말지요.

  그러나 무고한 인명은 살해하는 일이 없고 도리어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는 구제하는 일도 많지요."

 "도적질해다가 구제한다?" 원효가 웃는다.

 "그렇지요. 우리는 부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니까.

  있는 자의 것을 갖다가 없는 자를 먹여 살리자는 것이니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 피리의 갓에 앉는다.

 "법을 어기는 자는 어떻게 하오."

 원효는 이런 말을 묻는다.

 "경하면 책망하고, 중하면 볼기를 때리고, 더 중하면 내어쫓고

  사발통문을 돌려서 아무데도 접촉을 못하게 하고, 대단히 중하면 죽여 버리고

  이를테면 나라의 법과 같지요. 만일 우리 속을 관에 밀고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의 집안을 온통 도륙을 해 버리지요.

  그러나 관에 잡혀가서도 불지를 아니하고저 혼자만 벌을 받으면 우리는

  그 처자를 잘 살리지요.

  그러니까 원효대사도 한번 여기를 다녀 나가면 우리 편이 되어야망정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어디를 따라가서라도 기어이 복수를 하고야 말지요.

  장군령이 한번 내리면 면할 길은 없습니다." 피리는 위협하는 눈으로 원효를 노려본다. 

 "글쎄. 도적의 무리가 다 들러붙기로 원효의 장삼 소매 하나를 건드릴 수가 있을까.  하핫하핫."

  원효는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서 웃는다.

 원효의 이 말에 피리의 낯색이 변한다. 그의 입술이 푸르르 떨린다.

 "큰소리 하지 마오. 원효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한답디다마는 우리 눈에는

 거렁뱅이 중 한 마리로밖에 아니 보이지.

 제발 살려 줍소사고 빈다면 몰라도 까딱 잘못하면 이 고개를 살아서는 못 넘으리다.

 칼로 선뜻 목을 자르는 것쯤은 경한 벌이오.

 산 채로 땅에 묻어 버릴 수도 있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뜰 수도 있고,

 대사의 몸이 큼직하고 살이 많으니 통으로 장작불에 구워서 술 안주를 할 수도 있고,

 그보다 심하면 당신의 처자를 당신의 눈앞에서."

 하다가 피리는 말을 뚝 끊는다.

 피리가 이런 소리를 하는 동안 원효는 물끄러미 피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피리가 말을 끊자 원효는 어이없는 듯이 웃으며,

 "글쎄 그렇게 만만히 될까."

 하고 손을 들어서 피리의 옆구리를 꾹 찌른다.

 피리는 흠칫 놀라서 몸을 비틀며 원효를 노려본다.

 "왜 사람을 찌르오."

 "하도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길래 귀여워서 그러오."

 하고 원효는 이번에는 피리의 턱주가리를 손바닥으로 쳐든다.

 피리는 원효의 손을 따라서 고개를 뒤로 젖힌다.

 피리는 원효의 손의 힘에 저항할 수 없음을 느낄 때 일종 공포심이 일어났다.

 무엇인지 모르게 갈수록 제 몸은 졸아들고 원효의 몸은 커져서 그 하늘에 닿은 듯한

 큰 몸이 저를 덮어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피리는 호락호락하게 원효에게 항복하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톡톡히 원효를 곯리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피리는 원효의 손을 턱에서 물리치려 하였으나 원효의 팔은 쇠뭉치와 같아서

 피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으응. 점잖지 못하게."하고 피리는 원효를 노려보았다.

 "도적질을 그만두라고. 세상에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자네만한 위인이 왜 도적놈의

  졸도 노릇을 한담. 지금이라도 도적질을 그만둔다면 내가 대접을 해 주지.

  그렇지만 여전히 고치지 아니하면 이번에는 크게 경을 치고야 말 걸."

 이렇게 말하고 원효는 피리를 바로 앉혀 주었다.

 피리는 겨우 원효의 손에서 벗어나서 위엄을 갖추고 수염을 내리쓸면서,

 "그 큰소리 말어. 여기까지 와서야 생사가 내 손에 달렸지. 제가 어찌할 테야.

 지금 무엇이 원효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어? 그 중 하나만 보아도 벌벌 떨 걸 웬 큰소리야."

 피리는 이렇게 뽐낸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나, 어디 말 좀 하게."

 원효는 싱글싱글 웃는다.

 "첫째는 창검이 별 겯듯한 위의고."

 "또."

 "그 다음에는 볼기 때리고 형문 치고 주리 트는 형틀이고."

 "또 그 다음에는?"

 "지네와 뱀이 우글우글하는 토굴이고."

 "허허, 거 참 별것이 있군. 또 없나."

 "물이 펄펄 끓는 큰 가마,"

 "옳지, 사람을 삶는 거라."

 "그 가마에 건방진 중이 몇 놈이나 삶겼는지 모르지."

 "그러렸다. 그 담엔 또 무엇이 있나?"

 "원효대사는 이름 높은 중이니까 장작더미에 올려 앉힐 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중들은 불에 타기를 좋아하지 않나.

  원효대사는 도가 높으니까 화장을 하면 사리가 많이 나올 거야."

 "옳지 나를 태우고는 내 사리를 도적질한다. 하하하하."

  원효가 배를 끌어안고 웃는다.

 "웃긴 왜 웃어? 제 아무리 원효기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을 지르면 탔지 별수 있나?"

  피리는 원통한 듯이 입맛을 다신다.

 "글쎄. 누가 탈는지 보아야 알지. 하늘이 늙었으면 원효가 탈 것이고,

 하늘이 아직도 제정신대로 있으면 도적의 무리가 경을 칠 것이고. 어쨋거나 가세.

 자네네 두목을 만나서 말을 해야지, 자네 따위 졸도와 아무리 승강이를 하기로 쓸데 있나."

 하고 원효가 먼저 일어나서 두목의 집을 향하고 고개를 내려간다.

 피리는 싱거운 듯이 뒤를 따른다.

 "체, 대체 세상에 뱃심 좋은 놈 다 보겠네."

 하고 피리는 원효의 귀에 들려라 하고 중얼거린다.

 물 소리와 새 소리가 요란하다.

 "이 좋은 경치 속에서 그래 도적질할 궁리들을 하고 있담. 도를 닦을 생각은 못하고."

 원효는 피리를 돌아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큰 우물이 있었다.

 우물을 쌓은 돌에는 돌옷이 곱게 입혀서 여러 백 년 된 우물임을 보였다.

 "어 고약한 샘이로군. 도적의 마음이 나게 하는 샘이람."

 하고 원효가 지팡이로 우물 둑을 두들겼다.

 우물 속에서 웅웅하는 소리가 일어나며 우물이 끓어올랐다.

 "이 물을 먹은 중생이 마음을 고쳐서 불도에 들기까지 다시 샘을 내지 말아라."

 하고 원효가 또 한번 지팡이 끝으로 물을 치니

 불꽃이 번쩍 일고는 우물이 말라 버리고 말았다.

 피리는 어안이 벙벙하여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멀거니 섰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내가 왔다고 거래를 하오."

 원효는 불이 펄펄 붙은 지팡이로 피리를 가리켰다.

 피리는 그 지팡이를 두려워하는 듯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물을 지나니 수십 필 준마를 매어 놓은 마구가 있고, 그리고는 높다란 대문이 있었다.

 이 대문을 활짝 열어놓지 못한 것은 도적의 집인 때문이라고 원효는 생각하였다.

 집은 무척 오랜 집이어서 어떤 기둥은 그루가 썩은 것도 있었다.

 피리가 들어간 지 얼마 아니하여서 협문이 열렸다.

 "이리 들어오시오."

 하는 것은 피리가 아니요 처음 보는 작자였다.

 푸른 옷을 입은 것이 통인 따위인 모양이었다.

 원효는 푸른 옷을 보고 호령하였다.

 "손을 협문으로 맞는 법이 있느냐. 대문을 열라 하여라."

 하는 소리가 온 동천을 쩡쩡 울렸다.

 후원 별당에 감금되어 있는 요석공주와 아사가가 원효의 음성을 들었다.

 "공주마마, 스님이시오!"

 아사가는 이렇게 외쳤다.

 "그렇구나. 스님이시로구나."

 공주와 아사가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수상한 이 모양에 설총이 으아 하고 울었다.

 설총이 우는 소리가 원효의 귀에도 들렸다. 아사가의 오라비도 달려와서,

 "스님이 오셨소."하고 외쳐다.

 "오시기는 오셨지만 이 도적의 소굴에서 스님 혼자서 어떻게 벗어나실까."

 공주는 일변 반가우면서도 염려가 되었다.

 "공주마마, 염려마셔요. 스님은 비범하신 어른이시니 반드시 이기시리라고 믿습니다."

 아사가는 눈물을 씻으며 이렇게 공주를 위로하였다.

 "그야 대사께서는 비범하신 어른이시지마는 너와 나를 내놓으라고 해서 스님이 거절하시면

 필시 그놈들이 스님을 해할 것 아니냐. 지금 장작더미를 만들어 놓고 기름 가마를 끓이고

 토굴에는 독사를 잡아다 넣고 그런다는데."

 공주는 이런 말을 하였다.

 "그래도 스님은 하늘이 아시는 어른이시오, 불보살이 옹호하시는 어른이신데."

 아사가는 이런 말로 공주보다도 자기를 위로하려 하였다.

 "만일 우리 두 사람 때문에 스님이 해를 받으시게 되면 아사가는 어찌할래?"

 공주는 이런 소리를 물었다.

 "결단코 스님이 이기십니다."

 아사가는 자신 있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믿나?"

 공주는 마음 놓이지 못하는 양을 보였다.

 아사가는 수삽한 듯이 잠깐 고개를 숙이더니,

 "사람이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이 남녀의 정이라 하옵는데, 앙아당에서 세 날 세 밤

  스님과 저와 단둘이 있었건만 스님은 터럭끝만치도 마음이 아니 움직이셨고,

  마지막으로는 이 몸이ㅡ

  이 몸이 스님께 매어달려서 아들을 하나 낳게 해 달라고 하였건만 까딱 없으시고,

  너는 이 불세계의 어머니가 되어라 하셨으니 이러한 어른이야말로

  불에도 아니 타고 물에도 아니 빠지실 어른이 아니십니까."

 하고 또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정말야? 아사가, 그랬어?"

 공주는 비로소 모든 의혹이 풀리는 듯이 웃는 낯으로 아사가를 보았다.

 까치와 까마귀가 몹시 지저귀었다.

 

 대문이 열리고 원효는 대문으로 들어갔다.

 과연 넓은 뜰에는 수십 명 군사가 창검을 빼어들고 늘어섰다.

 원효는 지팡이를 끌고 군사들의 창검 틈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지팡이 끝에서는 아직도 불길이 펄펄 붙고 연기가 났다. 그 연기에 군사들은 눈을 감았다.

 바람이 남전복 도홍띠, 금파 갓끈에 호피로 싼 칼을 넌지시 차고 계하에 내려와 원효를

 맞았다.

 허연 수염을 늘이고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웃음을 띠어서 아주 점잖은 장군이었다.

 다만 두 눈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살기다.

 결코 우락부락한 무장의 모습은 아니요 귀인다왔다.

 '이 사람은 무엇에 쓸데가 있을까 보자.'

 원효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였다. 피리는 바람의 곁에 세우니 빛이 없었다.

 "대사께서 원로에 이런 누추한 벽지에 왕림하시니 산천이 다 빛을 발하오."

 바람은 이렇게 첫인사를 하였다.

 원효는 바람을 바라보며,

 "이 좋은 산천이 도인의 도량이 되지 못하고 도적의 소굴이 된 것을 유감으로 여겼더니,

 이제 장군을 대하니 저 좋은 풍신이 나라에 충성된 명장이 되지 못하고 도적의 두목이

 된 것이 더 가여운 일이오."

 이렇게 대답하였다.

 바람은 마루에 한 발을 올려 짚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여보시오. 그러기로 초면에 남의 집에 와서 그런 말씀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하고 원효를 노려본다.

 원효도 마루에 올려놓은 발을 다시 내려놓으며,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는 도적질 말라,

 거짓말 말라 하고 가르치셨기로 내 입이 거짓말할 줄을 잊었소."

 하고 정색하였다.

 "그래도 예라는 것이 있지 않소?"

 바람은 한번 더 항의하였다.

 "직심시불直心是佛이라 곧은 것이 예요."

 원효는 대답하였다.

 바람은 곧 웃는 낯을 지으며,

 "대사는 과연 도인이시오. 직심시불이라, 직심시불이라."

 하고 탄복하는 빛을 보인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입술은 그의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바람은 평생에 이렇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웃는 낯을 짓고 주인의 체면을 보전하는 것이 그의 오래 닦여서 능함이었다.

 대청에는 정면에 거울이 놓이고 동서로 주객의 자리가 베풀어 있었다.

 "대사 앉으시오."하고 바람은 비단 방석을 가리켰다.

 국법에 서민은 비단 옷도 못 입는 것이다.

 하물며 비단 방석이랴. 도적의 무리는 국법 밖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국법을 반항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중이 어디 비단 방석을 까오?"

 하고 원효가 방석을 밀어놓고 마룻바닥에 앉는다.

 "미인의 무릎을 깔면서 비단 방석을 못 깔 것 무어 있소?"

 바람은 웃었다.

 "맞았소."

 하고 원효는 무안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파계승이 된 것이오."

 하좌에 앉았던 피리는 모든 원수를 다 갚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원효대사도 항복할 때가 있구려."

 하고 빈정대었다.

 "불이인폐언不以人廢言이라 비록 도적의 말이라도 옳은 말에야 항복 아니할 수 있소?"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한번 지은 허물이 몸에 그림자 모양으로 어디까지나

 따라서 몸의 빛을 가리우고 힘을 줄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이윽고 차가 나왔다. 자주 옷을 입은 어여쁜 계집 하인 둘이 주선하고 있었다.

 찻종은 푸른빛 나는 금오산 옥이었다.

 원효는 권하는 대로 차를 마셨다. 향기가 은근하였다.

 "대단히 좋은 차요."

 원효는 찻종을 놓으면서 치사하였다.

 건시와 생률이 놓여 있었다. 계집 하인이 집어 권하는 대로 원효는 하나씩 받아 먹었다.

 바람이 문득 이런 소리를 물었다.

 "예가 도적의 소굴인 줄 아시는 바에 우리가 대접하는 음식을 그렇게 마음놓고 자시오?"

 원효는 손에 묻은 시설을 혀로 핥아 먹으면서,

 "불제자를 한번 공양하는 공덕으로 지옥고를 면한다 하오.

  죄 많은 중생이 모처럼 받드는 공양을 물리칠 수가 있소?"

 하고 입술에 묻은 시설까지 혀로 핥았다.

 "그러다가 독약이 들었으면 어찌하오?"

 바람의 얼굴에서는 빈정거리는 빛이 사라졌다.

 "보살이 중생을 대할 때에 최애일자지最愛一子地로 하는 것이오.

 사랑하는 외아들이 받드는 공양을 의심할 줄 있겠소."

 "내가 대사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은 대사를 죽이고 대사의 처첩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거든

 그래도 마음을 놓고 무슨 음식이나 자시겠소?"

 바람은 시치미떼고 이런 소리를 하였다.

 "보살은 중생을 의심하지 아니하거니와 설사 중생이 독약을 받들더라도

 그 독이 보살을 상하지 못하오."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바람은 계집 하인에게,

 

 "네 그 항아리 내오너라."하고 명하였다.

 두 계집 하인이 각각 항아리 하나씩을 들고 나왔다.

 "대사 이 항아리를 보시오."

 하고 바람은 젓가락으로 그 항아리 속에서 사람의 귀 하나를 집어서 원효에게 보였다.

 "이것은 이르는 말 아니 듣는 놈들의 귀요. 이 중에는 중의 귀도 여럿이 있소.

 아마 원효대사도 내 말을 아니 들으시면 그 큼직한 귀는 이 항아리에 담겨야겠소."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피리가 옆에서 좋아라 하고 웃었다.

 원효는 바람과 피리의 귀를 둘러보더니,

 "보살의 옳은 가르침을 아니 듣는 귀는 어찌할까. 귓바퀴를 베어서 젓을 담그는 것쯤은

 경한 일일 걸. 세세생생에 귀 없는 귀신이 되고, 귀 없는 짐승이 되다가 아승지겁고를

 치르고 나서 사람의 몸을 타고 나더라도 귀 없는 사람이 될 걸."하고 쩟쩟 혀를 찼다.

 바람과 피리는 깜짝 놀라는 듯이 눈을 둥글게 뜨고 귀를 쫑긋 하였다.

 바람의 손에 들었던 귀가 항아리에 도로 떨어진다.

 "글세, 그건 지내보아야 하겠고."

 하고 바람은 되살아나면서 둘째 항아리에서 사람의 입술을 도려 낸 것을 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것은 거짓말하거나 우리 일을 관가에 일러바친 자들의 입이오.

  아마 원효대사의 입도 이 항아리에 들어갈는지 모를 걸. 염라대왕은 피할 수 있어도

  우리 손은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천 리 만 리를 가더라도 그 입은 찾고야 말 거야.

  이중에는 허황한 소리를 하여서 혹세무민하는 중의 입도 많이 있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젓가락을 원효의 눈앞에 내어댄다.

 원효는 빙그레 웃으며,

 "입으로 짓는 죄가 네 가지라 하오. 망어忘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요.

  입으로 지은 죄가 경하면 입술이 검푸르고 이빨이 가지런치 못하고 입에서 구린내가

  나지만, 좀더 중하면 어음이 분명치 못하고 음식 맛을 몰라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입맛이 없고,만일 더 중하면 벙어리가 되고, 더 중하면 지옥, 아귀, 축생보를 받거니와

  입으로 짓는 죄 중에 가장 중하고 무서운 것은 인과를 없다 하고 불도를 훼방하는 것이오.

  그러한 입을 도려내어서 젓이나 담그는 것은 참으로 경한 일이오.

  당신네 입도 똥을 먹는 개 입이 되었더면 다행이었을 것을 하고 원통하게 뉘우칠 날이

  아니 오게 하시오."

 바람은 원효의 이 말에 낯빛이 파랗게 질리고 손이 떨려서 들었던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피리는 일어나 벽에 걸린 검을 내려서 서리 같은 날을 빼어 들었다.

 바람의 명령만 있으면 원효를  치자는 것이었다.

 "아서, 아서."

 하고 바람은 다시 태연한 태도로 변하며 손을 들어서 피리를 말렸다.

 피리는 원효를 한번 노려보고 칼을 집에 도로 꽂으며,

 "원효의 모가지에는 칼이 안 들어갈까."

 하고 뽐내었다.

 "그 칼로 원효의 목이 베어질까."

 하고 원효는 우스운 듯이 웃었다.

 피리는 반쯤 칼집에 꽂았던 칼을 다시 빼어들더니 원효를 향하고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어느덧 피리의 팔목이 원효의 손에 잡히고 칼은 벌써 원효의 손에 들렸다.

 원효는 피리의 팔목을 놓으며,

 "맨손으로 앉은 사람을 그렇게 불의에 치는 법이 있나."

 하고 칼을 피리에게 도로 주었다.

 "응, 사내답지 못하게."

 하고 바람이 피리를 책망한다.

 "칼을 도로 걸라니까."

 피리는 원효에게서 칼을 받아 들고 쩔쩔매었다. 또 한번 원효를 친댔자

 또 한번 망신할 뿐인 것 같았다. 그는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벌벌 떨었다.

 원효는 바람의 눈치를 보았으나 바람은 태연하였다. 원효는 피리에게 칼을 들리면서

 슬쩍 바람을 겨누어 보았으나 바람은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였다.

 바람은 피리에 비길 인물은 아니라고 원효는 생각하였다.

 피리는 칼을 집에 꽂아서 벽에 걸었다.

 피리도 스스로 칼쓰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였던 것이다.

 그러기로 그다지도 만만하게 원효에게 패할 줄이 있으랴 하고 원통하였다.

 정말 원효의 곁에는 눈에 안 보이는 금강역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도 생각되었다.

 

 천 년도 더 묵었다는 우물이 담박에 끓어오르고 불길이 나고 말라 버리는 것도 놀라웠으나,

그것은 요술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피리가 전심력을 다하여서 내리치는 칼을 원효가 맨손으로 막아내는 것은

막아낼 뿐 아니라 언제 빼앗긴지 모르게 제 손에 들렸던 칼이 원효의 손에 옮아간 것은

사람의 일 같지 아니하였다. 칼이 원효의 손에 건너가 있음을 볼 때 피리는 정신이 아뜩하여서

두 손으로 제 목을 가리었다.

원효의 손에 들린 칼이 반드시 제 목에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효가 잡았던 팔목을 놓고, 또 칼을 도로 줄 때에는 피리는 목이 떨어지는

것보다도 더 무서웠다. 어찌하면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그러한 뱃심이 어찌하면 생길까. 피리는 어리둥절하였다.

 바람은 다시 차를 내오라고 명하였다.

 뜻밖의 큰 풍파에 한편 구석에 떨고 섰던 계집 하인들이 비로소 살아난 듯이

다시 김 오르는 차를 나외었다.

이번에는 차 안주로 깨다식, 송화다식을 내왔다. 더욱 독약인가 의심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바람은 손수 봉지 하나를 펴서 원효의 차에 하얀 가루를 탔다. 그러고는,

 "비상가루요. 먹고 죽지만 아니하면 보약이 된다 하오."

 이런 소리를 하였다.

 원효는 여전히 심상하게 그 차를 들이마셨다.

 바람은 그것을 보고 한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중도 여러 사람 시험하였으나,

이렇게 태연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바람은 속으로 은근히 원효를 존경하는 생각이 났다.

 '나로서는 못 당할 사람이다.'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바람은 얼른 그 생각을 쓸어 버렸다.

그것은 너무나 저를 지르밟는 것 같았다. 스스로 왕과 같은 자존심을 가지고

육십 평생을 살아온 그다. 벽력이 머리에 떨어져도 까딱 아니한다고 자신할 만한 수련도 하였다.

백 번 천 번 연단한 그 몸과 마음은 무엇에나 동하지 아니할 만한 자신도 있었다.

그러한 자신을 일조에 버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바람에게는 큰 목적이 있다.

그것은 요석공주와 아사가를 제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유부녀를 범하지 말라.'

하는 도적 나라의 법을 바람 자신이 범할 수는 없었다.

 비록 도적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신앙하는 신이 있었다. 그것은 아신, 또는 앙아신이었다.

아신은 천지창조 전의 허공신이다. 아신은 어두움의 신이다.

허공이건만 그 속에서는 만물이 다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아신의 성격이 도적의 욕심에 맞는 것이었다.

 도적이 앙아신을 신앙하는 것은 그 밖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 것은 허공이기 때문에 칼로 베일 수도 없고 불로 태울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도적들이 칼에도 안 상하고 불에도 아니 타기를 바라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방아 도인이 도적에게 앙아신의 계명을 준 것이다.

만일 이 계명을 범하면 반드시 앙아신의 큰 버력이 내려서 앙아신의 사자인

범에게 먹힌다 하는 것이다. 피리가 원효에게 설명한 것이 이 법이다.

 그러므로 요석공주와 아사가를 제 것으로 만들려면 원효가 허락을 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원효가 죽어서 요석공주와 아사가가 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사가가 원효의 애첩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원효의 허락ㅡ 처첩을 바람에게 준다는 허락을 받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원효를 죽여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큰일이었다.

 

 바람이 요석공주를 처음 본 것은 공주가 원효를 찾아오는 길에 낙동강 나루를 건널 적이었다.

평생의 대부분을 산속에 있어서 귀한 집 여자를 대할 길이 적던 사람,

나이 이미 육십이 되어서 앞날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다는 적막감이 있는 바람에게는

요석공주의 아름다움이 견딜 수 없는 매력이었다.

공주는 이미 삼십이 넘었건만 그 필대로 핀 모양이 더욱 바람의 마음을 끌었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리라.'

 낙동강의 흐르는 물을 보고 바람은 이렇게 맹세하였다.

 그가 공주인 것과 원효의 아내인 것은 곧 알 수가 있었다.

 그때에도 바람은 피리와 동행이었다.

 "여보. 내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소."

하고 바람은 피리에게 말하였다. 기실은 피리도 공주에게 반한 것이었다.

어느 남자나 요석공주의 아름다움을 보면 정히 황홀하지만 생활력이 왕성하기가 맹수와 같고

또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면 목숨을 내걸고라도 하고야 마는 생활을 하여 온 그들에게는

마음에 일어나는 욕심을 억제하여 본 일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것을

도적하는 것은 항다반이다.

 "공주요."

 피리는 바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공주면 안 될 것 있나. 공주니까 더 탐이 나는구려."

 바람은 이런 소리를 하였다. 상긋한 여름옷을 입은 공주가 눈에 박혀서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럼 어떡허실라오?"

 피리는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계교를 내어보시오. 어떻게 하여서라도 공주가 내 집 안방에 들어올 계교를 써 주시오."

 바람은 이렇게 피리에게 명하였다.

 피리에게 이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왜 그런고 하면, 피리는 바람과 더불어 공주를 다툴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피리는 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바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를 써야만 하게 되었다.

싱겁고도 기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바람의 신하가 된 피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쎄요. 이 일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소."

하고 피리는 바람에게 말하였다.

 "무얼?"

 "첫째로는 공주를 건드리면 관군의 토벌을 받을 것이오."

 "또 한 가지는?"

 "둘째로는 요석공주가 원효의 아내니까 유부녀를 건드리면 천벌을 받을 것이오."

하고 피리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될 수 있으면 그가 단념하여 주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바람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피리는 이 기회를 타서 단념을 시키려고 더욱 어려운

까닭을 말하였다.

 "관군은 피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천벌은 피할 수가 있소?"

바람은 또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바람도 본래부터 도적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진평왕의 외아들이었다.

진평왕이 늙으시도록 아들이 없으셨고 오직 따님(선덕여왕)뿐이었다.

그런데 바람은 진평왕과 농부 가람의 딸 나나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었다.

그런 연유는 이러하다.

 진평왕이 신하 몇을 거느리시고 토함산 동쪽 기슭에서 사냥을 하셨다. 때는 첫가을.

왕은 백마를 타시고 흰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사슴 한 쌍을 따라 달리셨다.

 사슴은 살과 창에 몰려서 바다 쪽으로 향하고 달렸다.

 왕의 말이 어떤 시냇가에 다다랐을 때에 삼을 벗겨서 물에 씻고 있는 처녀를 발견하였다.

그는 굵은 베옷을 입고 발을 벗은 마을 처녀였으나 그 얼굴과 몸의 아름다움이 왕의 마음을 끌었다.

 나나는 왕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걷었던 소매를 내리고 땅바닥에 왼편 무릎을 꿇고

고개를 고부슴하게 숙였다.

 왕은 배종하는 신하에게 명하시어 그 처녀의 집이 어딘가를 묻고,

그 집으로 인도하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나나는 잠깐 눈을 들어서 왕을 우러러보았다.

 '저 눈!'하고 왕은 속으로 결심하셨다.

슬픈 듯, 부끄러운 듯한 그 눈이 왕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었다.

 왕은 열정가시지만 나나를 사랑하신 것은 열정만으로는 아니었다.

아드님이 없으심을 한탄하여서,

혹시나 이런 청정한 처녀의 몸에서 아드님이 나지 아니할까 하는 희망도 가지셨다.

 처녀는 물에 씻던 삼을 천천히 짜고 있었다.

 "상감마마 분부신데 언제까지 그런 일을 하고 있느냐. 내버려 두고 앞서라."

하고 시신이 재촉하는 말에 처녀는 서슴지 않고,

 "방아님 주신 삼 나라님께 바칠 삼이온데."

하고 다 짜서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앞을 섰다.

 왕은 나나의 하는 말을 듣고 하는 양을 보시고 더욱 그리운 마음을 누르실 수 없었다.

 처녀의 집은 묏 기슭 시냇가에 있었다.

 왕의 오심을 보고 나나의 아버지 가람은 황망하여 그 아내와 아들들과 더불어

뜰을 쓸고 방을 치우고 새옷을 갈아입었다.

 "상감마마 듭실 자리가 못 되어 황송하오."하고 가람은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그날 밤을 가람의 집에서 주무셨다.

 나나는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새옷을 입고 왕의 자리에 모셨다.

그러나 나나의 얼굴에는 수심 기운이 있고 기쁜 빛이 없었다. 왕은 그것이 슬펐다.

 "나나야."

 "예."

 "나는 너를 만나서 이렇게 기쁜데 너는 어찌하여 기뻐하지 아니하느냐."

 "황송하오."하고 나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네 마음에 정들인 다른 남자가 있느냐."

 "산간에서 자라 외간 남자를 대한 일이 없사오니 어찌 정들인 남자가 있사오리까."

 "그러면 이 몸이 늙어서 네가 기뻐하지 아니하느냐."

하시고 왕은 당신의 백발을 생각하시고 추연하셨다.

저런 젊은 처녀는 젊은 총각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늙은이가 꺾는 것은

죄스러운 일인 것같이 생각되셨다.

 나나는 수그린 얼굴에서 눈물을 떨구었다.

그 눈물을 감추려고 나나는 얼른 소매로 낯을 가리웠다.

 "나나야. 바로 말하여라.

두려워 말고 네 속에 있는 대로 말하여라.

이 몸이 임금이 되어서 죄 없는 한 백성의 뜻을 빼앗겠느냐.

나나야,

네 눈물을 보니 이 몸이 비감하다.

그러지 말고 네 속을 말하렸다."

 왕의 말씀은 은근하였다.

 

나라의 주인이시면서도 한 계집애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셨다.

 "무엄하게 눈물을 보시게 하여 죽을 죄로 잘못하였나이다.

천한 몸이 지존을 모시오니 한 시각을 우러러만 뵈와도 이만 황감한 일이 없사오거든,

하물며 그처럼 어여삐 여기시오니 하도 천은이 망극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러하오나 지존을 모시옵기도 이 밤뿐일 것을 생각하오니 자연 눈물이 솟나이다."

 이러한 나나의 대답은 왕을 놀라시게 하였다.

산간 초부의 딸이 이러할 수 있을까.

과연 신라는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시고 법흥, 진흥, 두 분 성왕께옵서

나라를 잘 다스리시어 백성이 신명과 불보살을 신앙하고

글을 잘 배운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진평왕이 즉위 이래로 선왕의 뜻을 이어 문화의 발달에

힘을 쓰신 보람도 되는 것이라고 내심 만족하셨다.

 

 그러나 '모시옵기도 이 밤뿐일 것을' 하는

나나의 말에는 왕도 마음이 찔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옛날 같으면야 임금으로서는 후궁을 몇 사람 두어도 좋았으나,

법흥왕 이래로 불도를 숭상하여 그러하기가 어려웠다.

나나를 사랑하더라도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양심대로 말하면 왕은 나나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옳았으나

왕의 정욕은 그러하기를 허하지 아니 하였다.

 "하룻밤만이 될 리가 있느냐. 네가 아들을 낳으면 태자를 삼으리라."

 이러한 약속을 나나에게 하셨다.

 "황송하오나 무슨 표적을 주시옵소서."

 왕은 선뜻 일어나시어 벽에 걸었던 검을 내리어 나나에게 주셨다.

오동집에 금으로 박꽃과 박을 아로새긴 보검이었다.

 "이것은 이 몸이 평생에 사랑하여 몸에 지니던 보검이다. 이것을 신표로 주마."

 왕이 손수 주시는 검을 나나는 꿇어앉아 받아서 제 머리 위에 받들었다가

날을 빼어서 촛불에 비추어 보았다.

거울과 같이 맑은 날! 나나는 칼을 다시 꽂아서 벽에 걸고,

 "상감마마. 이 몸이 세세생생에 상감마마를 모시오리다."하고 몸을 허락하였다.

 그날 밤 왕의 즐거움은 비길 데가 없었다.

나라의 절반을 떼어 주어도 아깝지 아니할 것 같았다.

 첫가을 밤은 얼마 길지 아니하였다. 왕은 눈을 붙이실 사이도 없이 닭이 울었다.

 이튿날 아침에 왕은 나나의 집을 떠나셨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나나를 궁중으로 맞아들이리라는 약속을 하신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바람이 난 것이다. 그는 분명히 진평왕의 아들이다.

그러나 왕으로부터는 다시 소식이 없었다. 나나는 혼자서 바람을 길렀다.

 진평왕이 돌아가시고 선덕여왕이 즉위하셨다.

 나나는 바람에게 일절 그가 임금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네 아버지는 어떤 사냥꾼이었더니라고만 일러 왔었다.

그러다가 진평왕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

나나는 바람을 불러서 왕이 신표로 주신 칼을 보이고 사실을 말하였다.

 그리고는 그날 밤 나나는 왕의 칼로 목을 찌르고 죽었다.

 "임이 주신 칼로 이 목숨을 끊어 생전에 못 모신 임을 혼이 되어 따르리이다."

하는 노래를 적어 머리맡에 놓았다.

 바람은 죽은 어머니를 장사하고 그 보검을 싸서 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에는 벌써 선덕여왕이 등극하셨다.

 바람은 평생에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안 때에는 그 아버지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뿐더러 어머니의 원수요,

자기의 원수인 것 같았다.

피를 받은 아버지를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바람의 슬픔은 비길 데가 없었다.

 바람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대궐을 저주하고, 그리고 도적의 굴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 지가 벌써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그는 신라의 왕이 될 몸으로서 도적 나라의 왕이 된 것이었다.

바람은 아직 한번도 제 내력을 누구에게 말한 일이 없었다.

생전에 제 몸의 비밀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라의 도적이 지금처럼 잘 통일이 된 것은 바람이 장군이 된 이후였다.

그는 왕자의 통어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불교 하나를 내어놓고 모든 수련을 다 해보았다.

칼쓰기, 활쏘기, 머시기, 거시기 아니한 수련이 없었다.

그는 도덕경, 남화경을 좋아하였고 열자列子, 손자孫子도 애독하였다.

그는 양생술을 연구하여서 흡기吸氣, 조식調息, 취정取精 등의 불로장생법도 하였다.

그의 낙은 몸을 건강히 하고 식색食色의 욕을 마음껏 채우고,

그리고는 미운 놈을 철저히 응징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보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귀공명욕도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제가 임금의 지위를 찾을까 하는

야심도 있었으나 차차 그것도 다 귀찮은 생각이 났다.

그는 늙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백발이 왔다.

그는 아버지 진평왕 모양으로 수염이 나고 또 조백하였다.

아무리 양생법을 하여도 나이 오십 고개를 넘으면 모든 것이 쇠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안정도 줄고 모든 기운이 줄었다.

오직 줄지 않고 갈수록 왕성한 것은 정욕이었다.

요석공주와 아사가가 이 눈에 뜨인 것이다.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두 계집은 제 품에 넣고 싶은 것이었다.

지나간 반년에 바람이 궁리한 것은 오직 이 일뿐이었다.

 "관군은 피할 수가 있더라도 천벌이야 피할 수가 있소?"

하는 피리의 말은 바람을 괴롭게 하였다.

바람은 허공신을 믿고 일월신을 믿었다.

허공신은 바람이 되어서 언제나 제 몸을 살폈다.

숨이 되어 몸속으로 들락날락하여 뱃속까지도 살폈다.

낮에는 해가 되고 밤에는 달과 별이 되어서 이 몸을 살폈다.

모기와 파리도 허공신의 사자요 화신이었다.

신의 눈이 안 비치는 데가 없고 그 손이 아니 가는 데가 없었다.

바람은 이것을 믿었다.

바람은 사람이 하는 일이면 모든 힘에 반항하고 싶었고,

또 반항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신의 힘에만은 반항할 수 없음을 갈수록 느꼈다.

그는 그의 머리와 수염에 센 터럭이 나고 모든 기력이 쇠하는 것을 볼 때 허공신의

법이 어떻게 엄하고 힘 있어서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한 치 한 푼도 어기지 못하고

반항할 수 없음을 믿는다.

 '제 마음에 하고 싶은 일은 못하는 것이 없어도 신의 뜻만은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바람의 슬픔이요 단념이요, 또 신념이었다.

실상 바람에게는 하나도 어려운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신같이 알았다.

허공신이 산신과 용신을 보내어서 언제나 그를 옹호하기 때문에

그의 몸에는 살도 아니 들고 칼도 아니 든다고 믿었다.

그가 명령을 내려서 일찍 그대로 안 된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부하에게 심히 엄한 대신에 심히 인정이 깊었다.

재물을 도적한 것도 저는 저 쓸 것 이외에 아니 가지고 다 부하에게 나눠 주고,

그리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가 누구를 구제할 때에는 구제받는 자가 모르게 하였다.

누가 밥을 굶는다 하면 밤에 몰래 그 집에 양식을 던졌고,

어느 동네가 기근으로 곤경에 빠졌다면 그는 밤중에 몇십 석의 쌀을 동네 앞에 갖다 놓고,

 "골고루 나눠 먹어라. 앙웅."하고 소리를 지르게 하였다.

앙웅이란 허공신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바람의 일인 줄을 안다.

 질병이 많은 동네가 있으면 바람은 의원과 약을 보낸다.

지나가던 의원 모양으로 며칠이고 병 치료를 하고 떠난다.

만일 백성의 원망을 듣는 자가 있으면 밤중에 꿩의 깃을 단 화살을 그 집에 들여쏜다.

 "푸르르."

하고 화살이 날아 들어오면 그 집 식구는 벌벌 떤다.

 그래도 그 사람이 속죄하는 일ㅡ

가령 재물을 빼앗았으면 그것을 돌려보내는 등ㅡ

을 아니 하면 또 살 한 개가 날아 들어온다.

살 두 개가 들어오면 대개는 속죄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만일 그래도 아니 듣고 있으면 반드시 그 집에 불을 놓거나 죄의 경중을 따라서

식구 중 하나, 혹은 둘이 언제 죽는지 모르게 죽는다.

이러한 경우 그 집의 젊은 계집과 재물은 몽땅 빼앗아온다.

이렇게 빼앗아온 재물과 계집은 부하에게 나눈다.

만일 화살 둘을 받고 집을 떠나서 다른 데로 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설사 서울 한복판에 들어가서 안팎을 군사로 지키더라도 바람의 벌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네의 특색은 일을 저지른 자의 집에 혹은 벽에나, 혹은 문에나 먹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허공신의 기호다.

 '검은 동그라미.'

 이것은 극히 무서운 것이었다.

'욕지아수 문어효사 欲知我誰 問於曉師(내가 누구인 줄 알려거든 효사에게 물어라.).'

라는 것도 검은 동그라미 속에 씌인 글발이었다.

그 동그라미 속에 대개는 죄목罪目 을 적는 것이었다.

 바람은 사람을 죽일 때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였다.

죽은 뒤에도 생명이 있는 것을 믿지 아니하는 바람은 제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벌할 때에는 그가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제가 남에게 준 것만한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믿었고, 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경계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속으로 잡아 올리기도 하였다. 바람은 이것이 죄라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이리하는 것이 체천행도替天行道라고 믿었다.

이리함으로 그가 마땅히 되었어야 할 임금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자는 잡혀와서 바람에게 인의仁義를 설하였다. 그러면 바람은 손가락으로 벽상을 가리켰다.

거기에는,'대도불폐大道不廢(큰 도는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액이 붙어 있었다.

 이것은 노자老子의 '대도폐이유인의大道廢而有仁義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생겼다)'

라는 말을 뒤집은 것이다.

 "대도가 폐할 리가 있나. 너희가 말하는 인의는 너희에게 편하게 만든 것이지 천지의 대도가 아니다."

하고 꾸짖었다.

 중을 잡아오면 바람은,

 "이놈들, 불경부직不耕不織하고 고루거각에서 호의호식하니 멀쩡한 도적놈이 아니냐."

하고 도리어 도적이라고 족쳤다.

 선비나 중이나 무릇 놀고 먹는 자를 잡아오면 바람은 이 모양으로 시험을 하여서 별로 취할 점이 없으면,

 "이놈들, 세상에 하나 쓸데 없는 놈들."

하고 힘드는 일을 시키거나 죽여 버리거나 하였다.

 "이놈들아, 마소는 짐을 나르고 개는 집을 보고 고양이는 쥐를 잡지. 도야지면 잡아먹기라도 하지.

 너희 같은 놈들은 아무짝에 쓸데없고 양식과 옷감만 축을 내니 죽어 마땅하다."

고 판결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 능히 대답하는 중이나 선비가 드물었다.

 한번은 대안대사가 붙들려온 일이 있었다.

 바람은 으레로,

 "이 멀쩡한 도적놈."하고 을렀다.

 "하핫하핫."하고 대안대사는 웃었다.

 "왜 웃어?"바람은 분노하였다.

 "내 무엇을 도적하겠노? 내어버리는 누더기를 입고 뜨물 찌꺼기를 먹고 굴 속에서 사니

내 무엇을 도적하겠노?"

 대인대사의 이 대답에 바람은 일어나 절하였다.

 대안대사는 바람의 절을 받고 거꾸로 서서 다리를 허공에 버둥버둥하였다.

 "대사, 그것은 무어라는 것이오?"

하고 바람이 공손하게 물었다.

 "값 없이 받는 자네 절이 빚이 될까 보아서 도루 돌리는 것일세."

 바람은 기가 막혀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도란 무엇이오?"

 바람은 대안에게 도를 물었다.

 대안은 물끄러미 바람을 바라보더니,

 "이크."

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고 달아나고 말았다.

부하가 그를 따르려 하는 것을 바람은 말렸다. 그리고,

 "진개 도인이다."

하고 탄복하였다. 그러나 대안이 달아난 뜻이 무엇인지를 바람은 몰랐다.

또 그리 깊이 알려고도 아니하였다.

 이번 원효를 유인해 올 때에도 바람은 일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원효 하나쯤 껍질을 벗기거나 사지를 자르거나 또 끓는 물에 튀기거나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거조를 내기 전에 원효를 이리저리 시험하여서 재미로운 소일거리를 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보기에 원효는 제가 다루기에는 숨이 벅차는 것 같았다.

바람은 이 때문에 약간 초조하였다.

바람은 원효에게 더 눌리기 전에 요석공주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보아하니 대사는 신선한 대장부시니, 에, 둘러 말할 것 없이 똑바로 말하겠소."

 바람은 이렇게 화두를 돌렸다.

 "무슨 말이오? 해보시오."

 원효는 입술에 묻은 시설을 다 핥아먹고 입맛을 다시었다. 그 감이 매우 달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무슨 말이나 들어 볼 테니 나에게 감을 좀더 주시오. 그 감이 장히 맛이 좋소."

하고 원효는 침을 삼켰다.

 "얘, 감 더 내다 드려라."

 바람은 이렇게 시녀에게 명하였다.

 "그래 무슨 말이오?"

 이번에는 원효가 재촉하였다. 바람이 한다는 말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말씀 아니해도 짐작하실 것 같소마는 요석공주와 아사가를 나에게 주시오."

 바람은 이렇게 말을 끊었다.

 "거 못하겠는데."

 원효는 서슴지 않고 거절하였다.

 바람의 낯색이 별안간 변하였다.

 "어째서 못한단 말요?"

 얼마 후에야 바람이 입을 열었다.

 "내가 금생을 최후생으로 하려다가 성불하기를 물리고까지 세세생생에 부부가 되자 하고 맺은

언약을 변할 수가 있나? 거 안될 말이지. 그렇지 않소?"

 "안 돼요?"

 "안 되지."

 원효는 새로 나온 감을 집어서 맛나게 먹는다.

 "대사가 죽으면 과부가 되지?"

 바람은 이렇게 물었다.

 "남편이 죽으면 과부지."

 원효는 감씨를 뱉는다.

 "그러면 내가 원효를 죽여 볼까?"

 바람은 빙그레 웃는다. 그 웃음에 무서운 의지력이 보였다.전신이 한번 비틀리는 것과 같았다.

바람의 속에 있던 살벌하고 잔인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이녁이 나를 죽이더라도 공주와 아사가는 이녁의 것은 안 될 걸."

 원효는 또 감 한 개를 들었다.

 "어째서?"

 바람은 눈을 흡떠서 원효를 노렸다.

 "손이 안 닿으니까."

 원효는 일변 감을 씹고, 일변 씨를 뱉어서 손에 모은다.

 피리는 원효가 저 감씨로 또 무슨 무서운 조화를 부리지나 않나 하고 겁을 집어먹는다.

 "손이 안 닿아?"

 바람은 고개를 쑥 뽑고 몸을 뒤로 젖힌다.

 "안 닿지."

 "어째서?"

 "한편은 너무 높고, 한편은 너무 낮으니까."

 "누가 높고, 누가 낮단 말야?"

 바람의 어성이 커진다.

 "공주와 아사가는 하늘 위에 있고, 이녁은 저 지옥 밑에 있는 아귀니까.

공주나 아사가의 발 앞에 꿇어 엎디어 살려 줍소서 하고 빌어야지. 필경은 그렇게 될 거야.

공주와 아사가의 무량한 자비심이 지금도 가련한 탐욕중생 바람을 불 속에 뛰어들려는

어린 자식 모양으로 불쌍히 여길 터이니까. 옆에 저를 건져내려는 은인이 있는 줄을 모르고

되지도 아니할 악한 계략을 생각하고 있으니 가련한 일이지.

이녁은 나를 유인한 줄로 아는 모양이 오마는 내가 이녁에게 유인받을 사람인가.

지옥에 들어가는 도적의 무리를 건지러 온 불보살의 사자인 줄을 알아야 해."

 원효의 말이 끝나자 바람은,

 "이봐라."

하고 호령하였다.

 "네 그 기름 가마가 끓느냐. 이 허황한 소리 하는 중놈을 기름 가마에 통으로 삶아라.

뼈다귀가 물씬물씬하도록 삶아라. 세상에 흰소리, 거짓말하는 놈이 많아서 백성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만일 끓는 기름 가마에 들어가 앉아서도 여전히 허황한 소리를 하나 보자."

 이 말에 문 밖에 지켜 섰던 창검 든 군사들이 대들었다.

그러나 감히 원효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머뭇하였다.

 "네 이 중놈을 기름 가마로 끌어가지 못하느냐."

하는 바람은 발을 구르며 호령하였다.

 "어서 일어나!"

하고 한 군사가 덤벼들어서 원효의 팔을 잡아끌었다.

 원효는 군사가 팔을 끄는 대로 끌려 일어나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그 우렁찬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흥. 어디 네 관세음보살이 기름 가마에 얼음을 얼리나 보자. 기름 가마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오면 나도 네 제자가 되마."

하고 바람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이봐라. 네, 요석공주 불러라. 원효대사를 기름 가마에 삶으니 나와 보라고 일러라.

그 평생에 잊지 못하는 원효대사가 기름 가마에 볶이는 냄새라도 실컷 맡으라고 일러라.

어디 부처가 이기나 앙아사마가 이기나 한번 겨루어 보자."

 바람은 이렇게 말하며 후원에 있는 앙아당으로 갔다.

몸종 한 계집아이가 바람의 뒤를 따르고 한 계집아이는 요석공주 처소로 갔다.

 바람은 앙아당 문을 열었다. 문에는 푸른 칠을 하고 기둥은 붉고 서까래에는 물결 무늬로

단청을 하고 벽과 천정에는 모두 그림이 그려 있었다. 동편 벽에는 푸른 용(미리),

서편 벽에는 흰 범, 천정 북쪽에는 검은 거북, 남쪽에는 붉은 방아(새)를 그리고

북벽에는 물동이를 앞에 놓은 아름다운 여신의 탱이 걸렸다. 이이가 아신, 즉 허공신이다.

신의 곁에는 맑은 샘이 솟는 우물이 있었다.

 여신은 천지만물을 낳는다는 뜻이요, 샘은 여신의 덕을 상징한 것으로 역시 끝없이

물이 나와서 만물을 먹여살린다는 뜻이요, 동이는 그 둥글한 것이 만물이 나기 전의

허공을 가리키고 그 속에 가득 담은 물은 신의 작용을 표한 것이다.

 바람을 모시는 몸종은 소반에 정화수를 떠올렸다.

 바람은 손수 물그릇을 신의 앞에 놓고 세 번 절하였다.

 "이기게 하소서. 원효를 이기고 부처를 이기게 하소서. 이기고 나면 옹근 소를 잡아 통으로

제물로 바치오리다. 그러하오나 만일 오늘 원효를 이기지 못하오면 신당을 불사르오리다."

 이런 축원을 하면서 바람은 손바닥이 뜨겁도록 빌었다.

 바람은 부시를 쳤다. 반달 모양으로 생긴 부시가 부싯돌에 맞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홍빛 불꽃을 날렸다. 그러나 웬일인지 부싯깃에 불이 잘 댕기지를 아니하였다.

부싯깃은 깊은 산에 나는 수리취라는 풀잎을 말려서 비벼서 보드라운 솜 모양으로

만든 것에다가 수릿날 정오에 뜯은 약쑥 노란 연한 잎을 비벼서 섞은 것이다.

 불꽃만 튀고 부싯깃에 불이 댕기지 아니하는 것을 바람은 초조하게 생각하였다.

부싯깃에 불이 잘 댕기고, 그 불이 기름에 결은 종이 심지에 옮겨붙고 다시 그 불이

닭 개소리 아니 듣고 늙은 소나무의 관솔에 옮겨붙어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점치는 것이다.

 '부싯깃이 누구를 채었나.'

 바람은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바람의 등골이 오싹오싹하였다.

머리카락이 소끗소끗하였다.

 '웬일일까.'

 하고 바람은 여신상을 바라보았다.

 여신은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두 손을 읍하는 듯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머리에 칼이 입하더라도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던 바람이다.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던 바람이 아니냐. 미운 사람을 죽일 때에는 술을 마셔 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형도 하던 바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오싹오싹 몸에 소름이 끼칠까.

 요석공주와 아사가를 볼 때에도 바람은 이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정욕에 못 이기어서 끼치던 소름이었다. 그러나 지금것은 무서움의 소름이었다.

 바람의 부시를 치는 손이 떨려서 말을 잘 듣지 아니 하였다.

부시가 날카로운 뿌중다리에 잘 바로 맞지를 아니하였다.

 “ 어, 이거 웬일일까.”

 바람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바람의 눈앞에는 기름 가마에 들어앉은 원효가 보였다. 원효는 끓는 기름속에 태연히 앉아서,

 “ 어, 이거 차서 쓰겠느냐. 어서 통장작을 더 집어넣어라.”

하고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 그럴 수야 있나. 제 아무리 도승이기로 기름 가마에 들어가기만 하면야 담박에 데치는 낙지

모양으로 익어 버리고야 말 것이다. 아니다, 기름 가마 앞에 서면 항복을 하고야 말 것이다.’

 바람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부시를 쳤다.

 찍 하고 수없는 불꽃이 튀었다.

 부싯깃에 불이 붙었다. 약쑥의 노란 연기가 향기와 함께 올랐다.

 ‘ 됐다!’

 바람의 얼굴에는 기쁨이 잠시 돌았다.

 바람은 기름종지 심지를 부싯깃 불에 대고 불었다. 노르스름한 불이 일어났다.

바람은 관솔개비를 들어 심지의 불을 옮겼다. 관솔이 향기를 발하며 불이 댕겼다.

무엇에 갇혔다가 놓여난 나비 모양으로 관솔불이 춤을 추었다.

 바람은 기뻤다.

그러나 불길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종이심지 불이 손에서 무릎으로 떨어져서 바람의 옷이

타오른 것이다. 그것을 끄려다가 한 손에 들었던 관솔불에 바람의 수염이 탔다.

누린내가 났다.

 “ 응 응.”

하고 바람은 관솔불을 내던졌다. 불은 꺼지고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것이 무서웠다.

 바람은 당에서 뛰어나왔다.

 “ 틀렸다. 틀렸다.”

하고 바람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시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펄썩 당에 주저앉았다.

 “ 왜 주저앉아?”

하고 바람은 시녀의 옆구리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다.

 바람의 발길에 채인 시녀는 고꾸라져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바람은 개미 하나를 발로 밟은 것과 같이 그런 것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고 기름 가마 있는

곳으로 걸었다.

 바람의 마음은 폭풍우를 만난 바다와 같이 설레었다. 부싯불이 말을 안 듣던 것이나,

옷이 타고 수염이 탄 것이나 모두 불길하고 불쾌하였다. 앙아신이 저를 버린 것인가.

제 명수命數가 진한 것인가. 이러한 흉한 생각이 어두움 속에 번개 모양으로 번득번득 떠돌았다.

 ‘ 그러기로 내가.’

하고 바람은 이를 갈아 본다.

 ‘ 신이 나를 버려? 버리겠거든 버려. 내가 내 힘으로 해볼 걸. 내 힘으로 원효를 처치해 버릴 걸.

기름 가마에서 아니 죽거든 독사 굴에 넣지. 독사에게 물려서 몸이 깍짓동같이 부어서 뒈지게.

독사 굴에서도 안 죽거든 불로 태워 버리지. 장작더미에 올려 앉히고 불을 질러 놓은면 그래도

안 죽을까. 그래도 안 죽거든 내칼로, 한칼로-.’

 바람은 허둥지둥 걸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생각이 모두 일순간이다.

날은 흐렸다. 늦은 봄 첫여름의 졸릴 듯한 날씨다.

 늙은 홰나무에서 까마귀가 짖었다. 이 홰나무는 몇백 년이 묵은 지 모르는 나무로

그 빈 속에는 큰 구렁이가 들어 있다고 한다. 나무에는 왼새끼를 늘이고

서리화(종이를 어석어석 벤 것)를 달고 신으로 위하는 나무다.

옛날에 이 나무가 벼락을 맞아서 한편은 부러지고 그 부러진 자국은 꺼멓게 탄 대로 있다.

 이 홰나무에서 우는 까마귀는 거기 붙은 신의 사자라고 믿는다. 바람은 그 까마귀 소리를 세어 보았다.

 “ 셋, 셋, 넷.”

 “ 넷, 셋, 넷.”

 바람은 늘 하던 모양으로 발은 잠깐 멈추고 까마귀 소리 수효로 점을 쳐보았다.

그러나 정신이 산란하여서 괘卦가 잘 서지 아니하였다.

 ‘ 하늘과 땅은 관곽이 되고, 해와 달은 등불이 되고, 까막 까치는 조객이 되고,

파리와 구더기가 상두군이 되어-. ’

 바람은 만화경 말을 생각하였다.

 ‘ 으응, 또 불길한 생각.’

하고 바람은 발을 구르며 걸었다. 이것도 일순간이었다.

 이때 요석공주와 아사가와 사사마 세 사람이 시녀에게 끌려서 걸어오고 있었다.

 “ 원효대사를 기름 가마에 삶으니 와 보라 하시오.”

하는 시녀의 말을 들은 요석공주와 아사가는 처음에는 까무라칠 듯이 놀랐다. 그러나 사사마는,

 “ 염려마시오. 원효대사가 도적의 손에 죽을 어른이 아니오!”

하고 힘있게 하는 말에 두 여자는 정신을 수습하여서 일이 어떻게 되나 하고 시녀를 따라 나섰다.

 “ 아기는 네게 맡긴다.”

 공주는 이렇게 설총을 유모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다시 설총을 만나보지 못할 줄로 마음에 정한 것이었다.

 요석공주는 만일 원효가 죽는 양을 보면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였다.

칼은 다 빼앗기고 없으나 공주는 칼 없이 목숨을 끊는 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아사가는 아사가대로 만일 제 몸을 희생하여서 원효대사를 건질 길이 있으면 건지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원효대사의 뒤를 따르리라고 결심하였다.

 사사마도 또 사사마대로 원효를 건져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손에 장기는 없으나 몸에 있는 힘과 재주를 다하여 보고 그래도 원효를 못 건지면 바람을 죽여

원효의 원수를 갚으리라고 결심하였다.

 이 모양으로 세 사람은 저마다 제 결심을 가지고 시녀의 뒤를 따르던 것이다.

 “ 아, 요석공주.”

 바람은 요석공주의 앞을 막아섰다. 요석공주는 대답은 없이 정색하고 바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불이 뿜는 것 같았다.

 바람은 또 등줄기가 오싹함을 느꼈다. 바람은 억지로 태연한 태도를 수습하여서,

 “ 흥, 오늘은 요석공주가 과부가 되는 날이오. 그 키 큰 중놈을 기름 가마에 졸일 터이니

냄새나 맡으라고 불렀소.”

하고 조롱하는 웃음을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요석공주는 바람의 독을 뿜는 눈에 몸서리를 쳤다.

 “ 지내 보아야 아오.”

 사사마가 공주와 아사가의 앞에 나서며 소리쳤다.

 이 말에 걸음을 옮기던 바람이 우뚝 섰다.

 ‘ 무엇을 지내 보아야 알아?’

 ‘ 악이 이기나 선이 이기나. ’하고 사사마는 바람을 노려보았다.

사사마는 제가 아직 이 도적을 누를 힘이 없는 것이 슬프고 분하였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는 바람의 멱살을 물고 늘어져서라도 원효대사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바람의 모가지를 바라보았다.

 “ 어린 놈이 어른을 몰라보고.”

 바람은 사사마를 향하여 눈을 흘기며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대었다.

 “ 이 놈. 한마디만 더 버릇없는 주둥이를 놀려 보아라. 한칼에 네 놈을 두 쪽을 낼 터이니.”

 사사마는 바람의 위협에 굴하지 아니하였다.

 “ 칼을 빼려거든 내 칼을 내게 주오. 커다란 어른이 칼을 가지고 맨주먹 밖에 없는 어린아이와

   싸운대서야 모양이 숭없지 않소?”

 “ 그래, 네 칼을 주면 나하고 겨루어 볼 테냐.”바람은 빙그레 웃었다.

 “ 내 칼을 주오. 내 칼은 충신의 칼이라 강한 적을 죽일지언정 한낱 도적의 더러운 피를 바르기는

아깝지만 겨룰 테면 한번 겨루어 봅시다.”

 사사마의 침착하고도 담대한 이 말에 바람의 눈썹이 씰룩하고 위로 올랐다.

 “ 허, 고놈 맹랑하다.”하고 바람은 걷기를 시작한다.

 “ 왜 가오? 여보, 왜 가오?” 사사마는 바람을 불렀다.

 그래도 바람은 못 들은 체하였다. 바람은 속으로는 사사마 같은 아이를 처음 본다고 하였다.

원효나 사사마나 다 세상에 드문 사람이라고 바람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바람의 부하에도 천하 호걸이 많이 있으나 원효나 사사마나 아사가까지도 그러한 호걸과는

유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람은 제가 잘난 사람인 것을 자신한다.

왕의 아들이라는 자랑이 있을뿐더러 누구나 제 앞에 오면 다 심복하거나

그렇게 아니하면 무서워서 떨었다. 극히 담대한 자면 발악을 하였다.

그러나 원효의 무리는 심복도 아니하고 떨지도 아니하고, 또는 발악도 아니하고,

도리어 저를 낮추어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한 태도가 바람을 못 견디게 하였다.

높은데서 내려다 보는 듯한 그 눈들이 싫고 무섭기까지 하였다.

 “ 내가 왕의 아들인데, 왕이 될 사람인데.”하면 더욱 불쾌하였다.

 그렇게 사사마의 눈이 무서웠다.

 만일 사사마에게 그 칼을 주고 겨룬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이 바람은 압기가 됨을 느꼈다.

 “ 그것이 무슨 힘일까. 어린 사사마까지도 계집애 아사가에게 까지 범치 못할 기품을 주는 것이

   무슨 힘일까?”

 바람은 그 힘이 무서웠다.

 바람은 그 힘을 제 힘으로 눌러 보려 하였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요석공주를 잡아온 뒤로 여러 가지로 달래어도 보고 을러도 보고 하였으나 도무지 흔들림이 없었다.

 원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았으나 원망조차 없었다. 그런 것이 바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바람으로 하여금 제 힘에 대한 자신을 잃게 한 것이었다.

 ‘ 오늘은 끝장을 내는 날이다. 내가 지나 제가 지나 끝을 보는 날이다.’

 바람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힘있게 발을 옮겨놓았다.

 이때 피리가 마주왔다.

 “ 어찌 되었나?”바람은 피리에게 물었다.

 “ 원효가 아주 말을 잘 듣소.”

 피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뒤에 오는 요석공주 일행을 힐끗 보았다.

 아사가를 보자 피리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 어떻게 말을 잘 들어? 항복을 한대?” 바람은 눈을 크게 떴다.

 “ 항복이요? 원효가 누구에게 항복할 사람이오?”

 피리는 바람의 불탄 옷과 한편 귀퉁이가 타 없어진 수염을 보고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저 수염이 웬일이시오?” 피리는 소리를 쳤다.

 수염 한편이 이지러지니 얼굴이 온통 찌그러진 것 같았다.

 “ 아, 또 저 옷도.”

 하고 피리는 구멍이 뚫어진 바람의 웃옷 앞자락을 보았다.

 피리는 바람의 꼴이 창피함을 보고 슬펐다.

 “ 아니, 항복이 아니면 무엇으로 원효가 말을 잘 듣는단 말인가?”

 바람은 수염이나 옷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모양을 보였다.

 “ 결박을 지라니까 결박을 지고요.”

 피리는 한숨을 쉬었다.

 “ 결박을 지라? 아니, 달려들어서 결박을 지우지 못하고 본인에게 빌어서 결박을 지운단 말야?”

 바람은 피리를 노려보았다.

 피리는 기막힌 듯이 코를 울리며,

 “ 말 맙시오. 제가 지려 들지 아니하면 원효 결박 지을 사람이 어디 있는 줄 아시오?

 군사들이 덤비어들다가 원효의 지팡이에서 불이 펄펄 일어나니까 다 뒤로 물러서고 말았소.”

 하고 웃는다.

 요석공주 일행이 서너 걸음 뒤에 따른다.

 “ 그놈의 지팡이를 못 분질러 버려?”

 바람은 숨이 씨근거린다.

 “ 우물을 치면 물이 불이 되는 지팡이오. 누가 그 지팡이를 건드린단 말요?”

 “ 허, 끝날야끝날. 그래 원효가 지금 어디 있어?”

 바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원효를 기름 가마에 넣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쥔다.

 “ 기름 가마 곁에 가 섰소.”

 “ 날치지 못하게 꼭 결박을 지웠지?”

 “ 손발을 꼭 비끌어 매었소.”

 “ 사람들은 다 모았나?”

 “ 두목들은 다 모았소.”

 바람은 고개를 돌려서 요석공주 일행을 한번 힐끗 보고,

 “ 냉큼 들어서 기름 가마에 집어넣지. 제 아무리 원효기로 몸뚱이가 쇠나 돌이 아닌 연에

 끓는 기름 가마에 들어가면 죽지 별 수 있나.”하고 빨리 걷는다.

 “ 글쎄, 뜻대로 될지 모르겠소.”

 피리는 바람의 뒤를 따른다.

 “ 무엇이 뜻대로 안 되어? 이 사람아.”

 바람이 피리를 돌아본다.

 “ 하도 원효가 태연하니까 말씀이오. 나도 원효가 어떻게 하나 하고 바라보고 있다가

 하도 원효가 까딱도 아니하니까 무시무시 해서 나왔소.”

 “ 에익. 묶어 놓은 사람이 무서워?”

 “ 가 보시오마는 모두들 무르팍 마디를 떡떡 마주치고 있소. 무슨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그 불 붙는 지팡이가 공중으로 날아와서 무슨 큰 변괴를 낼 것만 같아서. 암만 불이 붙어도

    제 몸은 타지 않고 고대로 있는 지팡이오.”

 하고 피리는 몸이 오싹하는 모양을 보인다.

 바람도 그 말이 듣기가 싫었다. 부싯불이 안 일어나던 것, 옷과 수염이 탄 것, 홰나무 위에서

 울던 까마귀 - 이런 것이 모두 바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그러나 바람은 한번 이를 갈았다.

 ‘ 제가 죽나 내가 죽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서쪽 일각문을 나간다.

  기름 가마가 있는 곳은 서편 수풀 속에 있는 큰 집이다.

 창고와 방앗간을 겸하고 그 한편 끝에 큰 가마가 하나 걸려 있다.

 이것은 소 한 마리를 잡아서 통으로 삶는 큰 가마다. 큰 아궁이에는 통장작이 활활 타서

 침침한 속에 그림자가 어른어른하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십 명 구실(두목)이 모두 칼을 차고 둘러서고 졸개들이 손발을 묶인 원효를 에워싸고 서 있었다.

 바람이 오는 것을 보고 두목들은 일제히 칼을 빼서 칼 끝으로 땅을 가리켜 경의를 표한다.

 바람은 칼끝으로 하늘을 가리켜서 이에 대답한다. 나는 너희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바람의 눈은 기름 가마에서 서너걸음 떨어져서 손을 뒷짐을 지고 두 발목을

 베 헝겊으로 얽매여서 군사 네 사람이 지키고 섰는 원효에게로 간다.

 원효는 거의 무표정에 가까웁도록 침착하게 서 있었다. 그 눈은 바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은 원효의 눈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 눈은 견딜 수 없는 힘으로 내려 눌렀다.

 바람은 그 눈에지지 아니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눈은 서리 맞은 나뭇잎 모양으로 풀이 없었다.

 바람은 그것을 감추려고 한번 껄걸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고요한 수풀 속에 울릴 때

 바람은 제 소리가 제 소리 같지 아니하여서 몸에 소름이 끼쳤다.

 “ 까욱 까욱 까욱.”하고 또 까마귀가 짖었다.

 구름이 터지며 햇빛이 흘렀다. 모두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 그래, 원효대사. 이래도 항복을 아니할 터이야?”

 바람은 기운을 내려고 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의 한편 이지러진 수염이 움직였다.

 원효의 얼굴에는 웃음이 뜨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곧 사라지고 말은 없었다.

 “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만 하면 살려 줄 테다.

   요석공주와 아사가를 내게 준다고 다짐만 쓰면 살려 줄 테야.”

 바람은 칼끝으로 원효를 가리켰다.

 그래도 원효는 대답이 없었다.

 이때 요석공주와 아사가와 사사마가 왔다. 요석공주가 앞서고 다음에 아사가가 서고

사사마가 뒤를 따랐다. 사사마의 눈에는 정기가 가득하였다. 죽기를 결심한 눈이었다.

비록 이 자리에 번뜩이는 칼들이 모두 내 몸에 모여들더라도 반드시 스승의 원수를 갚고야 만다는

결심이었다.

 요석공주는 칼을 빼어 들고 둘러선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듯이 천천히 걸어오다가

원효의 모양이 보이는 곳에서 우뚝 섰다. 공주는 몸이 공중에 솟을 듯하다가 푹 쓰러질 듯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곧 진정하여서 원효를 바라보았다.

 원효가 죽는 것을 보면 다음 순간에 저도 따라 죽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아사가는 공주와 달라서 원효를 보자 곧 무릎을 꿇고 합장하였다.

그러고는 일어나기를 잊어버린 듯이 그대로 눈으로 원효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사마도 아사가와 같이 하였다. 사사마는 곧 뛰어가서 원효를 묶은 숙마바를 이빨로

물어 끊고 싶었으나 원효의 부드러운 눈이 - 빙그레 웃음까지 띤 눈이 제게 향한 것을 볼 때에는

사사마의 단단히 맺혔던 독한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 가만히 스님을 따르오리라.’

하는 생각이 났다.

 “ 자, 마지막이야.”

하고 바람은 원효와 요석공주를 돌아보며,

 “ 원효대사, 이것이 마지막이야. 항복을 하면 살고, 아니하면 죽는 거란 말이다.

  신라왕의 말씀은 다시 거두어들일 법이 있더라도 내 말은 한번 떨어지면 하늘의 힘으로도

 돌릴 수 없단 말이다. 요석공주와 아사가를 내게 바치겠느냐 아니 하겠느냐, 다짐을 쓰란 말이다.

 이봐라, 네 지필묵 가져오고 원효대사 결박 끌러서 이리 끌어내어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원효의 결박이 끌러졌다.

 서안과 지필묵이 나왔다. 군사가 서안 위에 종이를 펴고 붓을 원효에게 주었다.

 모든 사람의 눈은 원효의 손으로 옮았다. 공주와 아사가는 침을 삼키고 있었다.

 원효는 붓을 들어 벼루에 이리 굴려 저리 굴려 먹을 흠씬 먹였다.

 원효는 붓을 들어 선 채로 종이에 임하다가 다시 붓을 놓으며,

  “ 자리를 가져오너라.”하였다.

  “ 자리를 가져오너라.”

 바람이 원효의 청대로 명하였다. 졸개가 돗자리를 갖다가 땅에 깔았다.

  “ 방석을 가져 오너라.”

 원효는 다시 명하였다. 원효의 명대로 방석을 가져왔다.

  “ 양치 물과 손 씻을 물을 올려라.”

 원효는 다시 명하였다. 명대로 물이 왔다. 원효는 양치하고 손을 씻었다.

 양치하고 손을 씻은 후에 원효는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바람과 일동은 원효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원효는 다시 눈을 떴다.

 “ 향과 향로를 올려라.”

 하고 원효는 누구에게 명하는지 모르게 명하였다.

 말이 떨어지자 난데없는 청자 향로와 향합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서안에 놓였다.

 바람과 일동은 실색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 나무관세음보살. ”

 하는 소리가 올랐다. 요석공주와 아사가가 감격하여서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차차 높아져 골에 차고 온 공중에 차는 것 같았다.

 원효는 손을 들어 향합을 열고 말향을 집어 향로에 넣었다. 푸른 향연이 용 모양으로 올랐다.

 원효는 입을 크게 벌려,

 “ 아 -. ”

 하고 소리를 내었다. ‘ 제법본불생 諸法本不生 ’의 ‘ 지 地’ 자 진언이다.

 마음에 있는 모든 번뇌를 뱉어버리는 진언이다.

 나고 살고 죽는 것이 모두 허깨비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법문에 들어가는 진언이다.

 다음에 원효는,

  “ 비 - .”

 하고 불렀다. ‘ 수水’자 진언이다. ‘ 본성이언설 本性離言說 ’이다

 땅에 있으면 물이 되어 샘이 되고 내가 되고 바다가 되고, 하늘에 오르면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고, 다시 그것이 이슬이 되고 비가되고 서리와 눈과 우박이 되어 내리고,

 더우면 눈에 안 보이는 김이 되고, 추우면 단단한 얼음이 되어 어느 것이 그 본성인지

 알수 없으니 사람도 그와 같아서

 아침에 선인이 되고 저녁에 악인이 되고 금세 기뻐하고 웃다가 또 금세 슬퍼하고 울고,

 중생의 목숨을 끊는 손이 곧 신명 앞에 분향하는 손이 되는 것이다.

 같은 마음이 자비심이 되고 탐욕도 되고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된다는 것을 아는 법문에 드는

 진언이다.

 원효는 다음에,

 “ 라 -.”를 불렀다.

 그 소리는 맑고도 힘이 있었다.

 이것은 ‘ 화火’ 자 진언이다.

 ‘청정무렴구淸淨無染垢(맑고 깨끗하여 더럽혀지지 않음).’ 의 진언이다.

 천지는 본래 청정한 것이다.

 중생의 마음도 본래 청정한 것이다. 불이 깨끗함과 같이 깨끗한 것이다.

 본래 청정한 법계가 더러워짐은 중생의 무명無明의 때가 묻기 때문이다.

 악업의 때다. 어리석어서 하는 망녕이다. 허망이란 것이다.

 다음에 원효는 심히 우렁찬 소리로,

  “ 훔.”

 을 불렀다. ‘ 풍風’ 자 진언이다.

  ‘ 인업등허공因業等虛空(인과업보는 모두 공허한 것).’ 이란 진언이다.

 중생이 하는 일이 다 허공에 그린 그림과 같으나 그러면서도 인과응보는 어그러짐이 없다는

 것을 아는 법문이다.

 원효는 마음이 편하였다. 땅과 같이 든든하고 물과 같이 거칠 데 가 없었다.

 원효는 평생에 처음 경험하는 청정한 경지를 보았다.

 ‘ 생사열반 유여영몽 生死涅槃 猶如映夢 (생사와 열반이 헛된 꿈과 같다).’의 경지요.

 ‘ 해탈청정보전 解脫淸淨寶殿 (해탈을 얻어 맑고 깨끗한 경지).’에 오른 경지다.

 원효는 죽음을 앞에 놓고서야 비로소 이러한 경지를 경험한 것이다.

 원효는 지금 자기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 것도 다 잊었다.

 오직 법계에 가득한 불법을 볼 따름이었다. 원효는 저도 모르게,

  “ 시방삼세일체제불 제존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十方三世一切諸佛 諸尊菩薩摩訶薩 摩訶般若波羅蜜.“

 하고 합장하였다.

 ‘ 모두 불언이다.’

 원효는 부처님의 은혜를 뼛속까지 깊이깊이 느꼈다.

 무상도 無上道의 고마움을 속속들이 맛보았다.

 원효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법열法悅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원효는 제불보살도 모두 공화空華의 난기난멸難起難滅임을 보았다.

 ‘ 공공적적空空寂寂이다. 적멸寂滅이다.’

 공간과 시간이 일시에 다 타버리고 말았다. 오직 환할 뿐이다.

 억지로 이름을 지으면 각원명覺圓明이다

 원효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떠돌았다.

 적멸의 경계에서 다시 중생 세계로 돌아나오는 것이었다.

 원효는 눈앞에 바람과 여러 도적들과 요석공주와 아사가와 나무들과 이런 것을 보았다.

 그것들이 모두 갓난아기와 같이 불완전하면서도 귀여움을 느꼈다.

 최애일자지最愛一子地의 자비심이다.

 원효는 청정보전에서 나와서 중생 속에 들어가 중생과 같이 고생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충동을

 느낀다.

 모든 중생을 위로하고 그들과 동무가 되고 그들의 의지가 되고 그들의 빛이 되고 길이 되어야

 할 것을 느낀다.

 모든 중생을 다 건져서 하나도 남김이 없이 되기 전에는 성불 아니하리라던

 법장비구法藏比丘의 맹세의 심경을 맛본다.

 원효는 붓을 들었다.

 “ 보살변화 시현세간 비애위본 단이자비 영피사애 가제탐욕 이입생사.

    菩薩變化 示現世間 非愛爲本 但以慈悲 令彼捨愛 假諸貪慾 而入生死.”

 보살이 사람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애욕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비심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애욕을 버리게 하려고 모든 탐욕의 모양을 빌어

 나고 죽는 중생이 됨이니라.

 이렇게 쓰고 원효가 붓을 던질때 향합에 남은 향이 저절로 타서 향기가 법계에 차고

 원효의 몸에서는 환하게 빛을 발하였다.

 바람은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점점 숙이더니 원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느껴 운다.

 다른 도적들도 일제히 칼을 던지고 무릎을 꿇는다.

 요석공주도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울었다. 아사가도 사사마도 그러하였다.

 오직 피리만이 영문을 모르는 듯 눈을 휘휘 두르고 서 있었다.

 이럭저럭 타던 기름 가마의 불이 꺼지고 고붓이 나며 끓던 기름 가마가 조용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신라 서울에는 원효대사가 도적의 두목 바람을 제자로 만들어 가지고 들어온다는 소문이 났다.

 마침 사월 파일, 온 장안이 관불회로 집집에 등을 달고 아이 어른이 모두 새옷을 입고

 거리에 가득 찬 날, 원효가 서울 거리에 나타났다.

 바람과 오십 명의 도적 두목과 요석공주, 아사가, 사사마 등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유모에게 업힌 설총과 아사가를 데리고 앞을 서고 사사마가 칼을 차고

 바람 이하 오십 명 도적의 두목을 숙마바로 손과 허리를 묶어서 그 끈을 사사마가 잡고 끌었다.

 수백 명 거지 떼가 의명의 인솔을 받아서 원효를 맞아 모두 절하고 뒤를 따랐다.

 대각간 유신이 부인 지소공주와 함께 나와 원효를 맞고 수없는 백성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길가에 도열하였다.

 유신은 원효의 앞에 와서 말을 내리고 지소공주도 가마에서 내려서 언니 요석공주와 만났다.

 원효는 길에 무릎을 꿇은 바람과 오십 명 도적 두목을 가리켜,

  “ 이 사람들이 전날 죄를 뉘우치고 나라 법대로 벌을 받는다고 자진하여 결박을 지고 왔소.”

 하고 또 사사마와 아사가가 충신 장춘랑의 후손인 것을 말하였다.

 유신은 바람과 오십 명 두목을 향하여,

  “ 너의 죄 만 번 죽어 마땅하거니와 원효대사의 제도를 받았다는 뜻 들으시고

    상감마마 분부하시기를 이로부터 나라에 충성하기를 맹세할진댄 모든 죄를 용서하실뿐더러

    각각 재주에 따라 나라 일에 씁신다 하셨으니 그리 알아라.”하고 어명을 전달하였다.

 바람과 일동은 머리를 조아렸다.

 

 바람은 왕자의 대우를 받아 서당장군誓幢將軍이 되고 다른 두목들도 각각 군직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몇 해 뒤에 신라가 백제를 칠 때 황산黃山 싸움에 용감히 싸운 장수들이 이들이요,

 또 죽기를 무릅쓰고 백제와 고구려의 국정을 염탐한 것이 거지 떼들이었다.

 원효는 산간에 숨어서 도를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요석공주와 아사가는

 평생 원효를 따르는 비구니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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