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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동물 목록

오늘의 쉼터 2009. 4. 12. 20:20

 

상상의 동물 목록

 

삼족오

백호

주작

현무

봉황

기린

꽝철

맥이

해태

 

귀신잡는 개

불가사리

이무기

사불상

잡상

붕새

구미호

비익조

상양

주둥이닷발꽁지닷발

 

 

사방신의 청룡은 청룡이 아닌 황룡이다.

 

 


 (사불상 벽화-의성 등운산 고운사) 

 

 

 

     

비익조 (比翼鳥) ,
중국에서 암수 한쌍이 한몸이 되어 난다는 전설상의 새. 봉선(封禪)이 행해질 때는 동해에서
비목어(比目魚)가, 서해에서 비익조가 온다고 하는 한편,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숭오산(崇吾山)의
만만(蠻蠻)이라는 비익조가 홍수를 몰고 온다고 하여 길조(吉鳥)이기도 한 반면 흉조이기도 하다.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하늘에 있거든 바라건대 비익조가 되소서> 하고 노래한
 것 처럼 남녀의 깊은 인연의 예로도 이용되며, <비익총(比翼塚)>은 이것에 근거한다.

 

 


붕새
 

붕새가 만리를 날아감. 즉, 머나먼 여로나 앞길이 양양한 장래를 뜻하는 말이다.

또는 범인으로서는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원대한 꿈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 ‘소요유’편에서 시작된 말이다.

 

붕자를 사전에서 보면 ‘큰 새’, ‘상상속의 새’ 등으로 쓰여져 있다.

전국시대 도가의 대표자 장자는 <소요유>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북해의 끝에는 곤이라는 이름의 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른다. 그 곤이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붕의 등도 몇 천리의 길이인지 모른다. 이 새가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구름처럼

하늘을 덮어버리고, 바다가 출렁거릴 큰 바람이 일어나는데 단번에 북해 끝에서

남해의 끝까지 날아간다.

 

제해라는 이 세상의 불가사의를 잘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붕새는 바닷물을 차 올리는데

 3천리나 되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며 9만리를 여섯달 동안 쉬지 않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날개를 한번 접고 쉰다고 한다.


한번에 9만리를 나는 대붕을 보고 작을 새가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대관절 저것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기껏해야 대여섯 자 숲 위를 날뿐인데 은근히 재미가 나는데.”
이는 평범한 사람은 위대한 뜻을 품은 이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장자는 자연속에 묻혀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꿈꾸던 인물이다.

그가 이 엄청난 새를 이야기한 것은 세속의 상식을 뛰어넘어 무한한 자유의 세계에 거니는

 위대한 자의 풍모를 말하려던 것이다.


여기서 유래되어 ‘붕곤’ 또는 ‘곤붕’이라 하면 상상 할수 없을 만큼 큰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붕도’, ‘붕정’은 웅대한 계획이나 포부를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청운의 꿈을 품은 젊은이에게 ‘앞길이 구만리 같다’라고 말한다.

 ‘붕정만리’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속뜻은 평범한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은 심오하고 원대한 목적을 의미한다.

 


안중식
이 자료는 몇년 전 덕수궁미술관 개관기념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에 있었던 자료입니다.



만화가 '김덕호'님이 그린 '만화 장자'의 '붕새 이미지'입니다.




붕새 구름

 

 

 

불가사리(불가살이)
 
불가사리는 쇠, 구리, 대나무 뿌리를 먹고 살며 악귀를 쫓는다는 전설 속의 동물로 생김새는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 쇠톱같은 이빨, 황소의 꼬리를 가졌으며 온몸에는 바늘 같은 털이 나 있고 암컷에만 줄무늬가 나있어 이것으로 암수가 구별된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에서 조선초, 나라가 어수선할때 나타났다고 합니다. 쇠란 쇠는 모두 먹어버리며,  아무리 활과 창으로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었는데, 한 현자가 불로 죽이면 된다고 알려줘서 죽일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죽일 수 없다고 하여 불가사리(不可殺-불가살), 불로 죽일 수 있다고 하여 불가사리(火可殺-화가살)이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악몽을 물리치고 사기를 쫓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굴뚝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밑부분에도 이 불가사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 역시 굴뚝을 통해 사된 것이 침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뜻이 담겨져있다고 합니다.

얼른 보면 코끼리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코끼리와는 다른 여러가지 신격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한다. 목조 건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재인바, 경회루의 돌난간에 이 불가사리를 세워 불길의 접근을 막았다.

 6.25때 포탄파편이 난비한 중에서도 경회루가 무사하였음은 불가사리 덕일까? 불가사리는 파편에 맞아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가있다. <경복궁-설화당>

 
관련전설
고려말 숭유억불정책이 한창이던 시절, 어느 촌부의 집에 중이 하나 나타났다. 그  여자의 남편은 중을 관가에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그 여자의 오라비였다. 여자는 오라비를 벽장에 숨겨놓고 남편에게 중을 하나 잡 아놓았다고 하였다. 벽장을 열어보고 자신의 처남인 것을 안 남편은 혈족을 팔려는 아내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아내를 유인한 남편은 아내를 우물에 빠뜨려 버리고,

한편,  처남집 다락방에 몇날 몇일 숨어지내다 심심하고 무료해져서 먹다 남은 밥알 찌꺼기를 뭉쳐 괴물모양의 인형을 만들 게 된다. 그런 데 이 괴물모양의 밥알인형이 처음에는 바늘을 먹더니 점점 못,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는 집 안의 모든 쇠붙이를 다 먹게되고, 먹을 때마다 이 괴물의 덩치는 커져만 간다.

급기야 이 괴물은 승려가 숨어있던 집안을 나가 전국을 돌며 모든 쇠붙이를 먹었고 그 때마다 이 괴물을 잡기위해 병사들이 출동하지만 이 괴물은 피부가 쇠로 이루어 진지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병사들이 던지는 창, 칼 등의 무기들까지 먹으면서 덩치를 계속 키워나간다. 이 때문에 이 괴물에 '불가사리'라는 이름이 붙게된다.


승려는 처남집을 나가면서 문제가 있을때 펴 보라며 종이쪽지를 처남에게 주었고 불가사리가 나타나 사람들이 공포에 떨자 왕이 명을 내려 불가사리를 없애는 자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한다. 처남은 그 소문을 듣고 매형인 승려가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는데 거기에는 '불가살이(즉, 불로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가 적혀 있었다. 결국 처남은 불가사리를 유인해 불을 지펴 쇠로 이루어진 불가살이의 몸을 녹여 없애 벼슬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경회루 불가사리



악몽을 물리치고 사기를 쫓는다고 하여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밑부분의 불가사리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경북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하단의 불가사리


북한의 SF영화 불가사리 한장면


 

 

 


      봉황(鳳凰)


 

봉황은 신성시 되었던 상상의 새로써 기린, 거북, 용과 함께 四靈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봉황은  태양조로써 태양과 번영, 그리고 영원을 상징한다. 또한 수컷인 봉은 陽이며, 태양을. 암컷인 凰은 陰이며, 달에 속한다.
후세에 들어서 이 봉황은 용과 대치되어 용은 황제를, 봉황은 황비를 뜻하기도 한다.봉황 한마리가 우주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머리는 태양, 등은 초승달, 두날개는 바람, 꼬리는 나무와 꽃, 다리는 대지에 해당한다.
봉황의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사슴 또는 뱀 목에 물고기 꼬리, 황새 이마에 원앙새 뺨, 제비 턱에 닭 부리, 올빼미 귀, 용 무늬에 거북 몸통을 갖췄다고 한다. 깃털빛은 빨강,파랑, 노랑, 흰색, 검정의 5색이다.봉황은 원래 상고시절의 한 민족을 일컫는 동이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다. 태평성대가 되면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새로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배가 고파도 쪼아먹지도 않는다는 영물로 묘사되었으니 지고의 염치와 도덕을 갖춘 새로 각되었던 것이다.하늘을 한번 날면 구천리를 난다는 전설속의 영수로,군왕이 갖출 모든 조건을 상징적으로 갖추었다하여 군왕인 천자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다.오늘날에는 대통령의 휘장으로 한 쌍의 봉황이 사용된다.  


대한민국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봉황문양




                             금동  봉황형 장식(고구려)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 1호분



만봉스님의탱화 '봉황도'



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제일위에 봉황이 있다.)



백옥 봉황 향로

 

 

 .

 

 

      상양[商羊]

중국 농민들은 용 이외에도 상양이라는 비를 부르는 새가 있다고 믿었다.

 상양은 한쪽 다리밖에는 없는데, 옛날에는 상양이 뛰어 다니는 것을 보아서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오래전에 아이들이 눈썹을 찌푸리고 한쪽 다리로

뛰어다니며 "천둥이 치고 비가 올거야. 상양이 여기에 다시 왔으니까"라고 노래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상양은 강물을 입에 머금고 날아와서 그것을 메마른 대지에 비처럼 뿌린다는 것이다.
한 고대의 현인은 그 새를 집에서 길렀다. 그는 때로는 소맷부리에 새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이 상양이 한번은 제나라 세자의 옥좌 앞을 날개를 흔들며 깡충깡충 걸어갔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놀란 세자는 신하를 노나라 궁전에 있는 공자에게 보내어 자문을 구하였다. 공자는 상양이

그 지방 인근에 홍수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따라서 운하와 제방을 만들어서 홍수에 대비하라고 충고하였다.

 세자는 공자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커다란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무기

 이무기는 용과 뱀의 중간자적 존재로서, 민간전설에서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도 보입니다.
요즘도 시골에 계신 어른들은 집안에 있는 구렁이를 그 집의 수호신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민간 꼭두각시놀음에서 이무기는 이시미, 꽝철이(깡철이), 영노 등으로 불리며 못된 양반을 골탕먹이거나
잡아먹는 역할로 나옵니다.

이무기는 1000년을 묵어야 용이 되는데, 용이 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무기로 남아 있으면 그 원한이
쌓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나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민간 전설에 생기다 만 여의주를 뺏으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1000년이란 시간은 아마도,
여의주가 완성되는 시간으로 보여집니다. 여의주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수 있다고 하죠. 마치 손오공의
여의봉처럼요....

삼국유사에는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이 나오는데, 이 이목이 바로 이무기를 한자로 쓴 말이라고 합니다.
 또 앞서 이야기한 용의 아홉 아들 또한 아직 완전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귀신 잡는 개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에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있는 벽사용 네눈박이 개의 모습이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비바람이 몰아쳐도 멀리서 오는 도둑이나 귀신의 소리까지도 듣고 보아야 하므로,
 벽사용 개나 호랑이는 두눈으로는 모자라 네눈, 네귀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해태

해채(解채(해태 채)) : 
고요가 기르던 산양. 푸른 털이 나있고 몸은 거대한 곰처럼 생겼다. 
여름에는 늪가에 살고 겨울에는 소나무숲에 살았으며 성품이 충직하고 정직했다.
시비(是非)·선악(善惡)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 해치라고도 한다.
 사자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머리 가운데 뿔이 하나 있다. 

해태는 중국 요(堯)임금대에 태어났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옛 부터 신선사상이 발달한 중국에는 현실에 없는 환상적인 짐승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
 이런 성스러운 환수(幻獸)가운데 하나가 해태이다.
중국 문헌 《이물지(異物誌)》에
<동북 변방에 사는 짐승이며, 뿔이 하나 있고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유신지(庾信誌), 후한서여복지(後漢書與服誌), 회남자(淮南子)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상의 동물인 만큼 이름도 여러가지로 불려겼다.
해치, 해타(海駝), 개호, 신양(神羊), 식죄(識罪 : 죄가 있고 없음을 잘식별함)둥 다양한 이름이 그것이다.
 일반에서 흔히 부르고 있는 해태라는 말은 오히려 그 어원이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정의를 수호하는 동물로 믿어져 고대중국에서는 법을 심판하는 사람에게 해치관이라
 하여 해태가 새겨진 관모를 쓰도록 하였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 무늬로 장식되었다.
또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 석상을 만들어 궁전 등 건축물 좌우에 세우기도 하였다.

해태의 특징과 성격
해태의 특징과 성격에 대해 및 문헌에서는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개호라는 짐승이 있는데, 이 짐승은
 뿔이 하나밖에 없으며 죄지은 사람을 찾아내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고 한다. 고도(皐陶)라는 사람이 순임금 때 법관으로 있었는데 누군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때는 이 짐승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받게 하였다. 죄가 있는 사람이면 뿔로 받고 죄가 없는 사람이면 받지 않았다. " <논형(論衡) 시응편(是應篇)>
 

또 다른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중국 동북 지방의 거친 곳에 사는 짐승으로 해치라는 이름의 짐승이 있다.
 깊은 수풀이나 산속에 사는 짐승으로 신선(神仙)이 먹는다는 멱구슬나무 열매만 먹기에 해치주위에는
 파리 한 마리 꾀지 못하는 성스런 짐승이다.
 뿔이 하나에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들이 논란을 벌이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어뜯는다. "
<이물지(異物誌)> 애자잡설(艾子雜說)이란 저서에 실린 다음의 대화를 통해서도 해태란 동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劑)나라 선왕(宣王)이 애자(艾子)를 불러 물었다.
 "옛날에 해태란 짐승이 있었다던데 그것이 어떤 짐승인가?
" 애자가 답하기를 "요순(堯舜)시대의 신수(神獸)이온데 조정안에 살면서 신하들 가운데 사악한 행위를
하거나 사특한 마음을 먹은 자가 있으면 대어들어 잡아먹어 버린답니다.
" 애자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그 짐승이 있다면 따로이 먹이를 줄 필요가 없을 것이옵니다.
" 고 부패했던 당시 조정을 풍자하고 있다. <애자잡설(艾子雜說)>
 

이런 각종 문헌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해치라는 짐승의 모습은 뿔을 하나 가진 동물로서 기린 얼굴에
발톱을 가진 형상으로 푸른 비늘이 돋치고 두툼한 꼬리가 달린 환상적인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설(一說)에는 해태의 얼굴이 기린이 아닌 소를 닮았다는 우수마면(牛首馬面)의 모습을 띄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힘이 어찌나 억센지 백수(百獸)가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전반적인 외양에 이 짐승의 속성은 충(忠)하고 곡직(曲直)하여 옳고 그름을 능히 판별하며
구덕(九德)을 고루 갖추었다고 한다.
특히 대단히 영물스럽고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덤비어 받아넘기는 정의의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궐에 살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 성군(聖君)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음을 느껴볼 수 있다.

해태가 정의의 상징이란 속성은 중국이나 한국 등 동양의 문화에 다양하게 이용 반영되었다.
우선 중국 고대의 묘족은 분쟁이 생겼을 때 신의 뜻을 물어서 행하는 신의재판(神意裁判), 해태결송(決訟)
이란 말이 있는데 이때는 해태라는 동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재판관 앞에 두 당사자를 세우고 뿐 하나 가진 해태라는 짐승을 데려오면 해태는 그 본성대로 반드시
죄지은 자에게로 가서 그 하나인 뿔로 떠받는다는 고사가 있다.
또한 초(楚)나라에서는 해태를 법수(法獸)로 사법(司法)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하는 말이 전한다.
따라서 임금님을 비롯 법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은 이 해태 모습을 한 관(冠)을 쓰도록 했다.
 이를 해치관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이 해치관을 혜문관(惠文冠)이라 부르기도 했다.
 

초나라 임금이 금관 대신 해태관을 쓰고 국사(國事)를 다스린 것이 본이 되어 그 후부터 법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이나 어사(御使)들의 관복으로 이해태관과 해태를 흉배에 수놓은 옷을 입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한(漢)나라 때부터는 궁(宮)이나 관아(官衙)앞에 해태상을 놓아 드나드는 사람들이 부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특한 마음을 씻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해태라는 짐승이 등장하는 기록은 신라시대부터이다. 신라시대의 관직에 해치부가 있다.
또한 중국의 경우처럼 오늘날의 사법부라 할 수 있는 대사헌의 법모나 흉배에 가식(加飾)되기도 함으로써
 정의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해치관에 담 긴 뜻을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릇 관리의 공적과 과오를 기록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것이니, 헌부(憲府)에 있어서는 관계가 더욱
 중한 것이다.
 지금부터 계속하여 해치관을 높이 쓰고 백필(白筆 사 관이 가지는 붓으로 항상 사모에 비녀처럼 꽂았다)을
 꽂고 앉아 누구는 어질었고, 누구는 충성하였고, 누구는 아첨하였고, 누구는 간사하였다고 해서 착한 법을
삼고 악한 것을 경계한다면 나라는 맑게 될 것이다.
 

" <신동국여지승람> 또한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복 사령관 앞에 해태를 붙인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양 관의 앞에 해태상을 붙여 법관으로 인식하였던 것을 미루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문헌에는
 해태를 법의 수호자이며 정의의 심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어사(御使) 가 이런 해치관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따로 이를 어사관(御使冠)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어사가 좌기(坐起)할 때 썼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행의 규정권(糾正權)이 있는 암행어사를 해태의 의미가 전사된 치사라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종 8년에 개정된 흉배표시 제도를 보면 당상관 이상인 문관의 것은 쌍학(?鶴)으로 하고 무관은 쌍호(?虎)로 하였으며 당하관인 문관은 단학(單鶴), 무관은 단호(單虎)의 흉배로 통일하였으나 대사헌의 흉배만은 해태를 가식케 함으로써 암행어사에게 해태관 을 쓰게 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圖說 寒國美術五千年) 근년까지 우리나라 법관이 중국의 해태관을 변형시킨 변모와 해태문양의 검은 법복을 입었던 것은 바로 초나라 이래의 전통이었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런 정의의 상징으로서 해태의 이용은 조선시대 임금님이 근무하던 근정전 앞에 해태상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세시풍속에 호랑이 그림은 대문에,
개는 광문, 닭은 중문, 해태는 부엌에 붙여 벽사용 그림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는 일반적으로 호랑이처럼 무서운것이 특징인데 가정집에서 사용되었던 민화의 해태는 친숙한 모습이다. 


해태는 선과 악을 간파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덕분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서 악한 사람은 뿔로 받아 응징한다고 한다. 이 같은 속성 때문에 해태는 재판과 관계지어졌으며, 후세에는 해태의 모습이 재판관의 옷에 그려졌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해태를 새겼다. 또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 앞에 해태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해태처럼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경계하며,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로 인해 다른 전설상의 동물들은 훌륭한 왕이나 성인이 태어나거나 크게 활약을 할 때 나타났지만, 해태는 왕의 재판이 공정하게 행해지는 시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잦은 화재로 공사가 지연되자 남쪽의 관악산이 휴화산인 이유로 그 불기가 빌미가 된다는 지관의 주장에 따라 광화문의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하여 화재를 막고 길운을 빌었다고 한다.

해태가 이런 화마(火魔)를 제압하는 영물로서의 의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놓여있는 일명 '광화문 해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인즉 서울 성내의 공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서울의 안산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이라는 풍수설이 널리 퍼지면서 풍수의 설에 따라 관악산 상봉에 샘을 파고 구리로 용을 만들어 그 샘에 넣었으며 또 광화문 앞 좌우에 해태상 한쌍을 세워 관악산을 보게 앉히어 화기를 진압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실제 현재 해태의 부릅뜬 두 눈이 응시하는 곳은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풍수지리상 서울의 조산(祖山)으로 능선이 활활 타오른 형상을 한 불기운의 산이다. 그러기에 궁궐의 화재는 그 근원이 관악산의 화기에 있다고 믿었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놓아 끝없이 감시하고 진압하게 했던 것이다.
 

광화문 앞 해태가 서울의 방화풍수 때문에 건조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박제형(朴濟炯) 의 조선근세정감(朝鮮近世政鑑)에 적혀있다.

이 기록에는 "대원군이 음양 풍수설을 믿어서 새 궁궐이 예부터 자주 화재를 당하는 것은 모두 불형체인 관악산이 안산으로 된 데에 연유한다. 이에 흰 돌로써 물짐승 형상을 새겨서 궁문 앞 양쪽에다 두었다. 또 관악산 제일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하였다." 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해태가 물에 사는 수성(水性)의 짐승이라는 이야기와 따라서 수제화(水制火)의 오행설에 맞추어 관악과 바라보게 했다는 이야기다.

 



경북궁앞 해태상



   광화문앞 해태상

▲ 현재의 광화문앞 해태상광화문앞 해태석상은 1923년 일제가 광화문을 해체할 시 근정전 서측에 위치하였다가 1929년 광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옮겨졌다.

 해태는 정의의 수호자나 최고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 외에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불을 눌러 이긴다' 는 방화신수(防火神獸)로서 해태의 상징성이다. 이때 해태는 화재를 예방해 준다고 하여 그 의미는 화기(火氣)를 제압하는 영물(靈物)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해태가 불을 누르는 짐승으로 말해지면서 해태를 물과 연결, 바다 해(海)자를 써서 해타(海駝), 해태(海苔)라고 적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경해태 흉배 행주산성에서 공을세운 포도대장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선무공신 풍양군에 책봉된   조경(1541~1609년) 의 흉배



        해태제과 해태상                                                                

해치(동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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