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초고대왕의 함흥 거점 일본 진출

오늘의 쉼터 2009. 2. 12. 17:47

 

 

초고대왕의 함흥 거점 일본 진출(肖古大王 咸興 據點 日本 進出)              


백제 개루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에 진출하였고

함흥에 쇠를 다스리는 수시리성을 두어 초고왕자가 지켰다.

160년 초고왕자는 함흥에서 일본 이즈모에 건너가서 일본 전역을

굴복시키고 일본 천조대신 히미코, 즉 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팔중성에 가두고 8명의 자손을 낳았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큐슈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알알이이며, 알알이가 큐슈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백제 6대 초고대왕肖古大王(재위166~214)이 일본의 건국신인 스사노오須佐之男이니,

일본이 최초 천황으로 모신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의 증조부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당시 동해안의 정세를 보면 108년에 강원도 삼척三陟

신라 파사왕婆娑王신라 땅으로 통합되었다.

125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백제 기루대왕己婁大王(재위 77~128년)은 백제의 다섯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백제가 동해안에 영토가 없었으므로 말갈은 백제를 거치지 않고 신라를 친 것이다.

그러나 말갈과 백제가 전투를 한 곳은 동해안이었다.

이후 155년, 백제 개루대왕(재위 128~166년) 때에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백제로 망명하였다.

이때 신라는 백제를 쳤으나 백제는 여러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에 신라인 길선이 동해안 함흥, 원산 등의 여러 성을 가지고 귀순하여 백제에 받침으로

백제가 동해안에 진출하고, 신라의 탈환 공격을 방어한 것이다.

백제는 수도가 하북 위례성, 즉 평성시 청룡산성인 때에, 백제 동부 주양走壤에서 문천시 서쪽

마식령馬息領(고대 마수령馬樹嶺이다)을 통해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진출한 것이다.  

 

             그림 18) 초고대왕의 속고성과 일본 진출도


이 무렵에 원산시元山市 북쪽 문천시文川市에 속고봉速高峰,

 속고산速高山(722m, = 신증동국여지승람 ; 所依達山, 즉 쇠달산) 같은

백제 초고대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딴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대령草高臺嶺도 생겨났다.

 즉 개루대왕 생전에 초고대왕인 속고왕은 원산-함흥 지역에 봉토를 받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후 214년 신라가 사현성沙峴城을 수복했는데,

이는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문천군에 속고산速高山(722m)이 있다. 문천군 천불산에도 속고봉이 있다.

문천군에 매홀석성妹屹石城이 있었고,

이는 문주文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개로대왕을 이은 문주대왕汶洲大王이 고구려로부터

이 지역을 탈환하여 지키고 있었던 곳으로 고려된다.

개로대왕의 참살 때에 문주대왕은 함흥으로부터 신라로 내려가서 구원병 1만을 얻어올 수 있었다.

함흥 동쪽 퇴조만의 퇴조고성退朝古城(석축 4917척)이 백제 고성으로 고려된다.

서쪽에 초고대령草高臺嶺 동북에 초막산草幕山, 제봉산鵜峰山이 있다.

초고대령은 초고대왕령이었을 것이다.

초막산 북쪽에 가장 높은 우두산牛頭山(814m, 현재 봉화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함관령이 있다.

백제 초기에 공격하던 함흥 낙랑의 우두산성이다.

그 서북쪽에 덕산동 초원고성草原古城이 있는데 토성으로서, 1147척의 호위성이다.


함흥 서쪽 6511척의 한당고성閑堂古城이 토성인데,

동해안까지 확장된 백제 동부의 부도성으로 유력하다.

그 위치는 함흥시와 백운산석성의 중간인 상조양면의 중평리다.

북쪽에는 자고성慈姑城이 있는데 이는 평양의 자모산성처럼 북쪽 호위성이다.

한당고성은 백제 초기 등장하는 낙랑 지역이었으며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였다.


백제 개루대왕蓋婁大王 때에 개루대왕의 왕자 초고왕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바다를 건너서

일본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에 진출하였고, 160년에 일본의 여왕 히미코(~247)를 정복하였다.

이는 히미코 여왕의 여사제女師弟인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가 초고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해가

그녀의 고분에서 160년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는 효고현兵庫縣 서궁시西宮市 증암정甑岩町에 있는 월목암신사越木岩神社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일본에 간 최초의 백제인 초고대왕肖古大王은 일본에서 속고왕速古王,

또는 속고대왕速古大王으로 표기한다.

백제에서는 별칭이 소고왕素古王이었다.

그후 초고대왕의 여러 아들들이 일본에 진출하였고,

그리하여 일본에는 백제 속고대왕速古大王의 후손으로서

여러 씨족 가문인 금부련錦部連, 삼선숙녜三善宿禰등 직계 후예를 남겼는데

이는 일본의 고대 기록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남아있다.

특히 여느 백제왕들과 달리 ‘속고대왕速古大王’이라고 [신찬성씨록]에 표기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든 왕 중에 유일하게 백제 속고왕만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반도에서보다 일본에서 초고대왕이 더 추앙받는 현실이다.

그외 속고대왕의 후손이 일본 고대 역사에 많이 기록된 것은

 속고대왕 때에 일본 진출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였던 스사노오須佐之男

일본에서 建速須佐男, 速佐男, 素佐能雄, 素盞嗚, 素佐能雄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건속建速은 속을 건국했다는 뜻이니,

한반도 동해안 원산 지방인 속국速古國을 처음으로 차지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속고왕이라는 일본 이름도 생겨난 것이다.

일본에도 역시 속고를 건설했는데,

시마네현嶋根縣에 처음 팔중궁을 세웠던 수가須賀가 바로 일본의 속고 땅이다.


여기서 스사노오須佐之男의 뜻은 쇠코 왕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백제기>의 소고(素古)왕이나 초고왕(肖古王)이나 

[신찬성씨록]의 속고대왕(速古大王)이나 다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코"의 우리말 고어가 "고"이다.  

[일본서기]에서 소산오素盞嗚라고도 표기하는데 스사노, 소산오의 뒤부분 산오,

또는 사노 sano가 바로 코를 의미한다.

이는 아프로아시아 언어Afroasiatic etymology 에서 코를 의미하여 남아 있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 여러 언어에 남아있다.

현생 인류가 6만년전에 아프리카 아담Y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의 출생은 이자나기의 코에서 탄생한다.

사노가 코를 의미하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앞의 소가 지금 우리말 소이다.

이는 어찌해서 알 수 있는가?

656년에 세워진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기원에 그 의미가 있다.

신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명천황 2년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올 때에 부사인 이리노사주가

신라땅 우두산에서 제사지내는 스사노오신을 야사카에 모셔와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社伝によれば、斉明天皇2年(656年)、高句麗より来日した調進副使・伊利之使主(いりしおみ)が、

新羅の牛頭山に祀られる素戔嗚尊を山城国愛宕郡八坂郷に祀り「八坂造」の姓を賜ったのに始まるという。他にも各種の記録がある。

함흥은 신라 진흥왕 이후 신라 영토이고 고구려 사자가 통과한 곳이 된다. 

그런데 백제 온조왕 초기에 우수주가 바로 함흥이다. 또한 소시모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야사카신사는 본래 우두천왕을 제사지냈는데 명치유신 이후에 소사노오로 이름을 바꾸어 제사지낸다.

이후 일본은 우두천왕과 스사노오를 동일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 사자가 백제 초고왕을 모셔왔을 가능성은 적고 본래의 소시모리,

즉 우두천왕을 모셔왔을 가능성도 높다.

백제 초고왕이 그 땅 우수주를 다스릴 때에 쇠코왕이라고 하였던 것이고,

초고왕의 신사가 신라 우수주 우두산에 남아 있었을 때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결론은 소사노오는 쇠코왕의 당시 일본말이고 백제에서는 쇠코왕, 즉 소고왕, 초고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함경남도 문천시 속고산速高山이 쇠코산의 의미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대 쇠달산所依達山이라고도 했는데 속을 소의所依로 풀어쓴 것이니 역시 쇠를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쇠달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신라 우두산이라고 고려된다.


스사노오의 딸을 수세리공주須勢理毗賣라고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에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400m토성)이 남아있다.

수세須勢도 중국어 발음기호표기식인 반절半切로 보면 “쉐(shu-e)”발음인데 “쇠”의 우리말 고어다.

정평의 수시리고성은 금이강金伊江이 감싸고 있는데,

금이金伊도 “쇠+l”의 이두吏讀 기록이고 금이강이 쇳물이다.

이 지역에 광산이 많이 있으니 수시리고성은 쇠를 다스리던 곳이기도 하다.

금이강 서북쪽 사수산泗水山(1747m)도 사수泗水가 곧 쇳물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즉 초고대왕)는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曾尸茂梨에서 (아들 구수대왕과)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出雲로 왔다고 하였다.

 

한편, 금이강 남쪽에 이웃한 금야강金野江은 고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도 이름했다.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은 백제의 속국速國,

내지 별국別國을 일본 본토 시마네현嶋根縣에 세운 일본신 스사노오建速須佐男, 즉 쇠코대왕이다.

초고대왕이 건너가 세운 일본 지명인 시마네현嶋根縣은 그 이름에서 일본 팔도八島의 뿌리가 되었고

일본의 뿌리인 것이다.


[고사기]에서 왜여왕 히미코卑彌呼(~247)

일본에 도래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아나세阿那勢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이를 동생이라고 풀이했으나 일본말 “아나”는 한자로 귀가 되므로,

귀세貴勢가 올바른 기록이며, 이는 존귀한 분을 가리키는 중국 고어다.

 

초고대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히가와斐伊川는 함경남도 문천시文川市 서쪽 배지이천配歧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천시에 매성妹城이라는 고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기린 것이라고 고려되고,

 히가와의 히도 여신을 의미한다.

문천시에 절문루節文樓가 전해오는데 스시노오의 부인 이름도 쿠시나다櫛名田姬다.

즉 쿠시나다가 문천시 배지천에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따라서 도일한 백제 본토 여인으로 고려된다.

한편 비이신사斐伊神社는 효소천황孝昭天皇 5년에 세웠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왔고 근국根國으로 돌아갔다.

실상은 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으로 갔고 다시 백제로 돌아가 초고대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야사카 신사에 모셔온 백제왕 스사노오의 혼령이 신라 땅에서 다시 건너왔을 뿐이다.  


(주) [삼국사기/지리4]의 고구려백제 지명중 “우수주牛首州”를 함흥에 비정하여

잃어버린 고구려, 백제 지명을 밝힌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성천강城川江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우수주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근평군斤平郡은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함흥 북쪽 신흥군新興郡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북청군이다. 양구근 저족현猪足縣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말로 풀어서 한자로 옮기면 압하천鴨坡河이 된다.

북청군의 북쪽 물 이름이며 그곳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왕기현王岐縣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되고,

삼현현三峴縣은 삼봉三峰 남쪽 숙신고도肅愼古都로 추정된다.

성천군狌川郡은 창덕성倉德城이 있던 단천군端川郡으로 고려된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 古斯麻縣이 있었는데, 고사마현은 무령대왕 이름이고,

청진 북쪽 수성천輸城川의 근원이 되는 부령군富寧郡이 본래 무령군에서 비롯되므로 고사마현이 된다.

매곡현은 청진시淸津市가 되는데 고말산高抹山이 있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 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狌川縣이 있었는데,

함경북도 도청이 있는 경성鏡城시 북쪽 수성천輸城川을 의미하므로 지금의 경성鏡城이다.

이벌지현은 경성시가 되고, 수성천현藪狌川縣은 청진시 수성천 남쪽이 되고,

 문현현文峴縣은 주을朱乙이 된다.

모성현母城郡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 어랑군漁郞郡이다.

객련군客連郡은 학성鶴城, 길주吉州 명천明川이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영흥永興이다.

박평博平이라고도 했으니 그 뜻이 천성과 같고, 영흥을 지나는 용흥강龍興江이

고대 비류수 沸流水였으니 당연히 비열홀 이름이 유래되는 것이다.

살한현薩寒縣은 전탄강箭灘江이 된다.

이제까지 비열홀은 안변군安邊郡이라고 알려졌는데 잘못이다.

 안변은 천성군의 남쪽 천정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의 국경군인 안변군이 발해의 공격으로 후퇴한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元山市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 지리 2의 해설은 당시 신라 지명만 맞고,

그 내력이 되는 고구려 이름은 거의 틀렸다.

김부식은 통일신라 때에 고구려 유민들이 옮겨온 고구려 지명을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주)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가 이즈모에서 팔지대사八枝大蛇를 잡아 죽인 것은,

초고대왕이 일본 천조대신의 12신녀 중에서 8신녀를 잡아 팔중원八重垣에 가두고

후비로 삼은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