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 639년 창건 밝혀져
설화에서 역사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백제 최대의 사찰인 전북 익산 미륵사의 창건 과정이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을 통해 소상히 밝혀졌다.
이번 발굴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1400년 전의 타임캡슐을 꺼낸 것과 같다.
▲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리장엄. 사리장엄은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 내역을 밝힌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나온 것을 비롯해 사리를 넣은
병과 머리장식용 액세서리, 장식용 칼과 유리구슬 등 505점의 유물이 대량으로 한꺼번에 발굴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건 소장이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유물들"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발굴된 유물들 1400년전 모습 완벽하게 간직
미륵사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무왕(武王)이 재위 35년에 왕흥사(王興寺)를 준공하고, 궁 남쪽에 못을 팠다는 등의
역사(役事) 기록은 있지만 초대형 사찰인 미륵사에 관한 기록은 없다.
※ 왕흥사(王興寺)
왕흥사(王興寺)는 백제부여에 있던 사찰로 577년에 세워졌으나,
660년 백제 멸망 후에 폐허가 되어 현재는 절 터만 남아 있다.
[창건]
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李枚葬時 神化爲三'
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실]
삼국사기에 660년 11월 5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계탄(灘, 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발굴 조사]
1934년충남부여군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왕흥명 기와와 석조불 좌상,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왕흥사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백제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부여 왕흥사지(사적 제427호)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제5차 발굴조사를 마치면서,
2004년6월 15일 "왕흥사는 탑지와 금당지가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며
이는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 구조인 것으로 확인됐다" 라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 국립부여박물관은 2007년10월 10일 왕흥사지터에서, 백제시대 사리 장엄구를 발견하여
같은 해 10월 24일 일반에 공개했다
▲ 왕흥사 발굴 현장도
《삼국유사》에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미륵사 창건설화가 간략히 소개돼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석탑을 두고도 서기 7~8세기경으로 건립연대를 막연히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준 것이 가로 15.5㎝, 세로 10.5㎝짜리 금판에 쓰여진 한자 194자(字)인 것이다.
적어도 서탑(西塔)의 경우 건립된 때가 서기 639년이라는 점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 미륵사지 석탑의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 사리봉안기 원문과 해석
塔양식·금속공예사 연구에 기준 마련해줄 듯
이 때문에 이번 발굴은 건축사, 금속공예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뚜렷한 기준을
마련해준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경우,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전형적인 유물이다.
이번 해체발굴과정을 통해 당시 탑 건축 방식을 알게 됐을 뿐 아니라
앞으로 삼국시대 말기와 통일신라 시대의 탑 양식 연구에 기준을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은 "보통 목탑에서는 심초석(心礎石) 주변에
사리기(舍利器)를 안치하는데 이번엔 심초석까지 내려가기도 전, 1층 심주석(心柱石)에서
사리기가 나왔다"며 미륵사지 석탑의 특징을 설명했다.
▲ 약 1400년 전의 유물 505점이 발굴된 현장.
다양한 문양이 표면에 새겨진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은제관식(銀製冠飾) 등은
서기 7세기 전반, 절정에 이르렀던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척도가 될 전망이다.
▲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호. 높이 13cm 어깨폭 7.7cm로
아담 한 크기에 전체적으로 황 금빛이 감돈다.
뚜껑과 목, 바닥 은 연꽃 잎을, 몸체는 인동 당초를 형상화했다.
우아하면서도 정밀한 세공기법을 자랑하는 이 사리호는
찬란했던 백제 후기 문화를 보여주는 국보급 유물이다.
게재 된 사진의 높이는 17cm.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발굴된 금속유물들이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 자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은으로 만든 원형 사리합(盒).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 나온 유물의 의미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다.
특히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백제왕후좌평사택적덕녀'라는 구절은
'백제 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정확한 해석이 나오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배 단장은 말했다.
김봉건 소장도 "보존처리를 마치고 문헌기록과 비교검토 후 관련 학계와
심화연구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익산=허윤희 기자, 김한수 기자]
※ 무왕(武王)
무왕(武王)은 백제 말기 왕권을 강화한 국왕으로 평가된다.
그에 앞선 혜왕과 법왕이 즉위 이듬해 사망한 것과 달리 무왕은 41년에 이르는 재위기간 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하고 이를 통해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 역사(役事)도 일으켰다.
서기 630년 사비궁(宮)을 중수(重修)하고 634년에는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인공섬을 만들고,
선대인 법왕 때 착공했던 왕흥사(王興寺)도 완공했다.
또 재위 후반기에는 현재의 익산지역을 중시해 왕궁평성(王宮坪城)을 건설하는 등
장차 도읍을 옮길 움직임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발굴로 익산지역에 총면적 1338만4699㎡(약 404만8870평)에 이르는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한 것도 무왕 재위중의 일이었음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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