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24. 천무천황 부여풍장과 백제 부흥운동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35

 

 

◈ 천무천황 부여풍장과 백제 부흥운동

 

 

 

1. 천무천황의 부흥운동          

2. 천무천황기

 

 

 

 

1. 천무천황의 부흥운동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류성은 복신굴 등이 남아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 울금산성이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무대왕의 조카인 복신(福信)이 본래 백제 서부 달솔이었다.
경기도 개성 북쪽의 대흥산성에 있던 임존성(
任存城)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서 버티고,

백제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도도기류산(都都岐流山):(황해도 토산군)에서 농성하였다.
임존성은 대흥성이라고 했는데 개성시 북쪽 천마산 위에 대흥성이 있다. 

천마산은 금마산이 어원으로 보이고 뒤에 대동강 한성에서 쫓겨온 

후고구려의 안승이 들어가서 보덕국왕을 한 곳이다. 

여자진의 도도기류산은 백제 서방성인 도선성(刀先城)으로 고려된다.

도(刀)를 일본말로 쯔루기라고 읽는다.

 이 도선성이 황해도 토산군(兎山郡)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660년 9월, 복신(福信)이 구주백제의 부여풍장에게 본토백제의 참상을 전하고서 백제본토로 들어와서

부흥군의 구심점으로서 백제대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또 태후인 황극천황에게 부탁하니,

황극천황은 즉시 부여풍장을 백제대왕으로 즉위시키고 왜국 군대로 호위하여 백제로 보냈다.
복신의 사자는 대화조정에도 이르러서 역시 의자대왕비였던 제명천황과 중대형황자(천지천황)에게도

참상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천지천황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부여풍장이 백제로 출전하여

자리를 비운 큐슈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점령하였다.

당시일본의 동요에 파리떼가 서쪽으로 갔다고도 하고, 말꼬리에 쥐가 새끼를 낳았다고도 하였으니,

천지천황의 비열함을 노래한 것이었다.
천지천황은 큐슈의 축자로 건너가서 춘일시의 장진궁(
長津宮)에 행궁을 마련하여 군대를 통솔하였다.
이때 황극천황은 축자에서 남쪽으로 산을 넘어서 조창군(朝倉郡)의 귤광정궁(橘廣庭宮)에 있었다.

천지천황은 황극천황을 추격하여 조창궁에 불을 지르니, 황극천황이 서거한다.

조창궁에서 관을 만들어서 장례를 시작할 때에 귀신이 큰 갓을 쓰고 장례 행사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당시 민심이 무도한 천지천황을 겁주는 것이었다.

천지천황은 황극천황의 관을 배에 실어서 대화로 보냈다.

 

백제땅의 전장에서 이 소식을 들은 부여풍장은 애도의 시를 지었다.

 

“모천황께서는 늙어 쇠하셔도 보물(枳?羅=다카라=寶皇)이셨다.

어른(姑)이 자꾸 늙어가니 위력도 약해져서 이런가?

(?矩野)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무모(武謀=천무천황)를 슬프게 하는구나 모천황의 은혜를 갚으리라.

 

枳?我梅能 姑衰之枳?羅? 婆底底威底 ?矩野 姑悲武謀 枳?我梅弘報梨
애도시의 마지막 귀절 지미아마홍보리(枳?我梅弘報梨)로 보아서 지미아마(枳?我梅)는 경칭이다.

 

[수서]에서 왜왕호는 아바이계미(阿輩?彌),왕비는 계미(?彌)라고 불렀다.

 왜왕은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이미 스스로 해뜨는 곳의 천자라고 적었다.

따라서 계미는 황(皇)이고, 아배계미(阿輩?彌)는 부황(父皇) 혹은 어버이천황(天皇)이라는 뜻이다.

싯귀의 지미아매(枳?我梅)는 아바이계미(阿輩?彌)를 뒤집었다.

지미(皇) 다음에 아바이(我梅)를 붙였는데, 역시 어버이의 의미가 된다. 역시 어버이천황이나,

이 때는 어머니천황, 즉 모황(母皇)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황극천황이 천무천황의 친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래서 집안의 여자 어른을 의미하는 고(姑)자가 사용되었다.
즉. 큐슈에서는 백성들이 천황을 부황 또는 모황이라 높혀 부른 것이며 천무천황도 역시

그렇게 불렀지만 개인적으로는 친척 여자 어른을 뜻하는 고(姑)라고 기록한 것이다. 

천무천황의 친모는 천지천황이 받들고 있던 제명천황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황극천황 손에서 자란 천무천황은 황극천황에게 더 정이 깊었다.

황극천황은 [능비(陵碑)]에서 다카라천황(寶王天皇)이라 하였으므로 보물(枳?羅)는 다카라(寶)로 본다.

계미왕을 다미왕이라고도 했고 다카라왕이라고도 했었다.

가구야?(矩野)는 이럴까? 하는 감탄사로 본다.

무모(武謀)는 천무천황을 가리킨다.

홍보리(弘報梨)는 큰 은혜를 주셨으니 결국 은혜를 갚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천지천황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현재 [일본서기]에서는 이 싯귀를 천지천황이 자기 어머니 제명천황의 죽음을

애도하며 붙인 시로 소개하고 있는데 고(姑)자로서 부정된다.

친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고(姑)라고 하지 않는다.

 

천지천황은 스스로 큐슈의 왕을 칭하고서 백제왕 풍장에게 물품과 군사들을 보내었다.

그래서 쥐가 말꼬리에서 출산을 하게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제 본토로 건너온 부여풍장이 백제를 부흥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복신이 장수인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병사들을 빼앗아 전권을 휘두르고 부여풍장에게는 제사만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복신이 부여풍장의 암살 계획을 세우니 부여풍장이 먼저 복신을 잡아 죽였다.

이때 복신은 천지천황의 밀지를 받았었는지 복신의 후예에게 천지천황이 후대하였다.
한편, 의자대왕의 왕자인 부여융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살아돌아와서 당나라 병참을 책임지는

당나라 장수가 되었는데, 부여풍장이 부하장수 복신을 죽인 일을 악용하여 백제 각 곳의 다른 의병들에게

복신처럼 억울하게 죽지말고 부여풍장을 배반하여 자기처럼 잘 살라고 선무하였다.

 

662년 가을에 부여풍장은 백강 즉 금강 앞바다에서 당나라와 일전을 겨루기로 하였다.

왜국에서 일만의 병사가 오기로 되었는데 배로 400척이었다.
그런데 왜군은 전투를 급하게 서두르다가 170척의 당나라 수군에게 백촌강의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왜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왜군은 보급품이 너무 적어서 전투를 서둘렀을 수도 있다.
결국 부여풍장의 백제 부흥은 실패하였다.

부여풍장은 조용히 배를 타고 전장을 떠났고 뒤에 남아있던 주류성은 항복을 하게 되었다.
부여풍장이 패전 후에 고구려로 갔다는 기록이 오로지 [일본서기]에 한 줄 첨가되어 기록되었고

이를 [삼국사기]도 기록하였다.

그러나 부여풍장의 패배가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된 [중국기록]에는 원래 이런 대목이 없다.
그가 일본에 돌아가 다시 천무천황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의 사가가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삼국사기]를 본다.

660년,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응하자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仁願)을 도성(都城; 사비성)에서 포위하였다.

신라기에 의하면 661년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했다.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훌)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 품일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서 군영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생각지도 않게 치니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이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사비성은 고사부리현이라고 했던 고부군으로 고려되고,

두량이성은 그 동쪽의 두승산 산성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고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는데,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여 물러났다.


빈골양은 전라북도 태인이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 명을 목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 진흠(眞欽),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가시혜진은 경상북도 고령이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5월 9일<또는 11일이라고도 하였다.>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 왔다.


술천성은 한탄강으로 고려된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으로 옮겨가 공격하는데, 포차(抛車)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니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城主) 대사 동타천(冬陀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 마소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막았다.
이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왕이 동타천을 칭찬하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로 올려주었다.


북한산성은 현재의 서울 북한산성이다.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 (檢校帶方州刺史)로 기용(起用)하고,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便道로 신라 군사를 일으켜 인원(仁願)을 구하게 하였다.
인궤가 기뻐서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고는 당나라의 책력(冊曆)과

묘휘(廟諱)를 요청하여 가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내가 동이(東夷)를 평정하여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해외에 반포하고자 한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고 정연하게 통솔하고 싸우면서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熊津江) 어구에

두 목책을 세우고 막았다.


즉 유인궤가 임진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백제부흥군이 막은 것이다.


인궤가 신라 군사와 합쳐 이를 치니 우리 군사는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달려 들어왔는데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져 죽거나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신라기]에서 복신 등은 이에 도성(都城)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와 임존성(任存城)을

보전하였고, 신라 사람도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용삭(龍朔) 원년(661) 3월이었다.


이는 사비성에 고립된 유인원의 포위를 풀은 것이다.

백제 부흥군의 분산된 군사를 황해도로 모은 것이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무리들을 불러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떨쳤다.

 

사람을 보내 웅진도독부 도독 유인궤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듣건대 당나라(大唐)가 신라와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


유인궤가 글월을 지어 화복(禍福)을 자세히 말하고 사자를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객관(外館)에 두고

업신여기면서 대답하였다. “사자의 관등이 낮다. 나는 바로 일국의 대장이니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

도침은 서한에 답하지 않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유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인원과 군사를 합쳐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고종에게 표를 올려 신라와 세력을

합하여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유인원의 군사는 부여 사비성에 있었는데, 사비성의 포위가 풀렸으므로 웅진강에 올라와서 합류한

것이다.


 

신라 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유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유인궤와 유인원 등은 웅진강에서 다시 고립된 것이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이기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로부터

도망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치 못하였다.
신라는 임진강 입구에서 유인궤를 맞이한 적이 있는데 이때 양식이 다하여 환군하였다. 

김흠의 군대는 비열홀주 즉 강원도 안변에서 들어간 군대로 고려된다. 


고사성은 황해도 안협 고마성으로 고려되고, 김흠이 패퇴하여 다시 강원도 안변으로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과 강원도의 경계가 갈현(葛峴)이다. 

 

얼마 아니하여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풍(豊)은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
복신 등은 인원(仁願) 등이 고립된 성에서 원병이 없으므로 사자를 보내 위로하여 말하였다.
“대사(大使)들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 전별하여 보내겠노라.


 

661년 7월에 유인궤는 웅진의 지라성진현성을 함락하였다. 


[신당서] 二年七月,仁願等破之熊津,拔支羅城,夜薄眞峴,比明入之,斬首八百級,新羅餉道乃開。


[신라기]에서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신라기]나 [신당서]는 진도성(眞都城)의 이름을 진현성(眞峴城)으로 바꾸어 적었다.
웅진부 지라성
(支羅城)은 진도성의 서쪽 호위성으로 고려된다.  
이때까지 당나라 군사는 개성 남쪽에 상륙하여서 웅진강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장단군 임강현이나 

임진현 부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라성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8월에 신라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

사자(使者)가 와서 아뢰기를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甕山城)을 차지하여

길을 막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라하였다.

 

 대왕이 우선 사람을 보내 타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9월 19일에 대왕이 웅현정(熊峴停)에 나아가 여러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놓고 몸소 가서 서약케 하였다.

25일에 진군하여 옹산성을 에워쌌다.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베어 죽이고 드디어 항복시켰다.


웅현정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이고 옹산은 연천군 우정리 산성이다.

그후 웅진도독부성을 새로 쌓는 것을 도왔다.


熊津若其道斷 留鎭漢兵 卽入賊手 劉摠管遂共某相隨 先打甕山城 旣拔甕山 仍於熊津造城

 

2년(662) 봄 정월에 신라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인문(仁問)과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함께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이는 철원군의 궁예성터 위치일 것이다. 

풍천원이라고 하였다.


얼음이 얼어 미끄럽고 또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의 등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蒜壤)에 이르렀다.


경기도 적성에서 임진강을 건넌 것이다. 


귀당 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군을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2월 1일에 유신 등은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평양으로부터 3만 6천 보(步) 떨어진 곳이다.


장새는 수안군의 북쪽에 있다. 대동여지도에 나온다.


 먼저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 등 15인을 당나라의 군영으로 보냈다.  

6일에 양오(楊오)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이켜 맞싸워 1만여 명을 목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1만여 개를 획득하였다.


탐라국(耽羅國) 우두머리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또는 진(津)으로도 썼다.>이 항복해왔다.

탐라는 무덕(武德) 이래로 백제에 예속해 있었기 때문에 좌평을 관직 호칭으로 삼았는데,

이때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유인원이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아뢰어 청하자 고종은 조서를 내려 치주(淄州)· 청주(靑州)· 내주(萊州)·

해주(海州)의 군사 7천 명을 일으키게 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유인원의 군사를 증원케 하였다.


당나라 치주(淄州)· 청주(靑州)· 내주(萊州)· 해주(海州)의 군사는 7천이 아니라 최소 4만 이상일 것이다.

[신라기]는 무려 40만이라고 하였다.


용삭 2년(662) 7월에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여기서 웅진 동쪽의 윤성은 황해도 이천군(伊川郡)으로 고려된다.

사정책은 예성강 서부로 고려된다.

 

이후 662년의 백제 부흥군의 역사는 [일본서기]에 보인다.


12월에 백제왕 부여풍장은 주유성에서 벽성으로 수도를 옮긴다.

주유성은 변산반도 울금산성이고 벽성은 지금의 김제인데 벽성이 농경지이기 때문이다.


冬十二月,丙戌朔, 百濟王?璋,其臣佐平福信等,與狹井連.闕名、朴市田來津議曰:「此州柔者遠隔田畝,土地??,

非農商之地,是拒戰之場.此焉久處,民可飢饉.今可遷於避城.避城者,西北帶以古連旦涇之水,東南據深泥巨堰之防.

?以周田,決渠降雨.華實之毛則三韓之上?焉.衣食之源則二儀之?區矣.雖曰地卑,豈不遷歟?」

於是,朴市田來津獨進而諫曰:「避城與敵所在之間,一夜可行,相近?甚!若有不虞,其悔難及者矣.夫飢者後也,

亡者先也.今敵所以不妄來者,州柔設置山險,盡?防禦,山峻高而谿隘,守易而攻難之故也.若處卑地,

何以固居而不搖動及今日乎!」遂不聽諫,而都避城.
是歲,?救百濟,修繕兵甲,備具船舶,儲設軍糧.是年也,太歲壬戌.


663년 2월에 백제는 왜국 천지천황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二年春二月,乙酉朔丙戌,百濟遣達率-金受等進調.


이때 신라가 안덕을 병합하고 남반 4주를 불태웠다.

그래서 벽성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주유성으로 되돌아왔다.


新羅人燒燔百濟南畔四州, ?取安德等要地.
於是,避城去賊近,故勢不能居.乃還居於州柔.如田來津之所計.


[신라기]에 의하면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00여 명을 목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070명을 목베었다.

거열성은 경상남도 진주다. 거물성은 남원으로 고려된다.

사평성은 순천시로 고려된다. 
덕안성은 장수군으로 고려된다.

덕안원이 있었다.

663년 6월에 사모야군이 신라 사비성과 기강성 2성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제왕 부여풍장이 복신을 죽였다..


六月, 前將軍上毛野君-稚子等取 新羅沙鼻、岐奴江二城. 百濟王?璋,嫌福信有謀反心,

以革穿掌而縛.時難自決,不知所?.乃問諸臣:「福信之罪,?如此焉.可斬以不?」

於是達率-德執得曰:「此惡逆人,不合放捨!」福信?唾於執得,曰:「腐狗痴奴!」王勒健兒,斬而?首.


663년 8월 13일에 신라는 주류성을 치려고 하였고 백제는 일본으로부터

노원군신아는 장수와 일만여명의 병사가 구원군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秋八月, 壬午朔 甲午, 新羅以百濟王斬己良將, 謀直入國先取州柔. 於是百濟之賊所計, 謂諸將曰:

「今聞, 大日本國之救將 廬原君臣, 率健兒 万餘, 正當越海而至. 願將軍等 應預圖之! 我欲自往待饗白村.」

 

8월17일에 신라군이 주유성에 와서 불을 질렀다. 

당나라 군은 170척으로 백촌강에 도열하였다.


戊戌,賊將至於州柔,繞其王城. 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 陣烈於白村江.

 

8월 27일에 일본 수군과 당나라 수군이 만났는데 일본군이 후퇴하였다.


戊申,日本船師初至者與大唐船師合戰.日本不利而退,大唐堅陣而守.

 

8월28일 일본 수군과 당나라 수군이 결전을 치렀는데 일본군이 결국 패퇴하였다.

부여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9월 7일에 주유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己酉,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而相謂之曰:「我等爭先,彼應自退.」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

進打大唐堅陣之軍. 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須臾之際,官軍敗績.赴水逆死者?.??不得?旋.朴市田來津仰天而誓,

切齒而嗔,殺數十人,於焉戰死. 是時,百濟王-?璋與數人乘船逃去高麗. 九月,辛亥朔丁巳,百濟州柔城,始降於唐.

 

이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로지 하면서 부여풍(扶餘豊)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손인사(孫仁師)가 중도에서 이를 맞아 쳐서 깨뜨리고는 드디어 인원의 군사와 합치니 사기가 크게 떨쳤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향하여 갈 곳을 의논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가림성(加林城)은 수륙의 요충이니 이를 먼저 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였다.

“병법에는 ‘실(實)을 피하고 허(虛)를 치라.’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면 군사를 상하게 할 것이고, 지키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지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것을 쳐 이기면 여러 성들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仁師)와 인원(仁願) 및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그리고 유인궤 및 별장(別將) 두상(杜~)과 부여륭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

도중에 백강(白江) 어귀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다 물도 빨개졌다.

왕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 손인사가 제 땅의 수군병사 7천을 데리고 웅진도행군총관이 되어 건너왔다.
이때 신라는 40만명이라고 하였다.

 중국 기록의 7천은 건너온 당나라 선단의 수, 7천척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 8월 17일에 백촌강에 먼저 들어온 당나라 수군 170척은 당나라 선봉군일 것이다.
8월 28일, 일본수군과 결전을 치른 당나라 병선의 숫자는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신라기에는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신라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당나라 군사는 웅진강으로부터 백강, 즉 금강 하구로 가서 부여풍장과 일본 수군

400척을 공략하고 변산반도의 주류성을 취한다.
당나라 40만 군대와 신라 군대에 대항하기에는 일본 수군 400척이 중과부적이다.


仁願請濟師,詔右威衛將軍孫仁師 熊津道行軍總管,發齊兵七千往。仁願已得齊兵
士氣振,乃與新羅王金法敏率步騎,而遣劉仁軌率舟師,自熊津江偕進,趨周留城.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왕은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임존성은 충청남도 예산이 아니라 경기도 개성 북쪽 대흥산성이라서 신라군이 더 이상 임존성의 백제군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당나라군 40만은 신라에게도 커다란 위협이다.

신라는 군대를 아껴서 당나라에 대비하여야 했다.

 

이보다 앞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흩어진 무리(亡散)들을 불러모으니

10일 사이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흑치상지가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相如)와 함께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호응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仁軌)가 상지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게 하도록 하고는 곧 갑옷과 무기와 군량을 주었다.
인사(仁師)가 말하기를

그들의 야심(野心)은 믿기 어려운 데 만일 무기와 군량을 얻는다면 도적의 편의를 도와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지모가 있다.

기회를 타서 공을 세운다면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리요.”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仁師) 등이 군대의 위세를 떨치며 돌아가니 고종은 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썩지 않은 시체는 풀더미와 같았다.
인궤가 비로소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청의 장을 임명하고,

도로를 개통하고, 다리를 놓고 제언(堤堰)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진휼(賑恤)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고,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각기 제자리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고종(皇帝)이 부여륭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옛 원한을 풀고

유민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664년 3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산성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도독이 군사를 일으켜 쳐서 깨뜨렸다.

가을 7월에 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명하여 일선주(一善州)와 한산주(漢山州)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부성의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돌사성(突沙城)을 치게 하여 멸하였다.

665년 8월에 신라왕은 백제왕자 부여융과 웅진도독부 도독과 화의조약을 맺는다.
가을 8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 새로운 웅진도독 부여륭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

당 고종이 부여륭에게 조칙을 내려, 귀국하여 남은 무리를 무마하고 우리와 화친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르러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내와 골짜기 신에게

제사지낸 후 그 피를 마셨다.


麟德二年,與新羅王會 熊津城,刑白馬以盟。右威衛將軍魯城縣公仁願,親臨厥盟,有貳其德,

興兵動,明神監之,百殃是降,子孫不育,社稷無守,世世毋敢犯. 乃作金書鐵契,藏新羅廟中。


취리산은 연천군 미산면 분석산이다.

 두리산이라고도 한다.

 

인덕(麟德) 2년(665)에 융이 신라 왕과 더불어 웅진성에 모여 백마를 잡아 맹서하였는데

인궤가 맹서의 글을 지었다.

금가루(金泥)로 쓴 증표(金書鐵契)를 만들어서 신라의 종묘 속에 간직하였다.

맹서한 글은 신라본기에 보인다.

인원(仁願) 등이 돌아가니 융은 군사들이 흩어질까 두려워하여 역시 당나라 서울(京師)로 돌아갔다.

의봉(儀鳳) 연간에 융을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이는 안동도호부에 융의 웅진도독부를 임시로 설치했던 것을 의미한다.


무후(武后)가 그의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나라의 계통이 드디어 끊기고 말았다.


백제의 황해도 땅이 발해의 땅이 된 것이다.

 

 

2. 천무천황기

 

부여풍장은 패장이 되어 전장을 떠나서 쓸쓸하게 큐슈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구주백제왕 자리는 이미 천지천황이 차지한 뒤였다.

부여풍장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록은 [일본서기]의 왜곡된 기록이고 이를 [삼국사기]가

그대로 옮긴 것이며 중국의 당시 기록에는 없다.

이때 많은 백제인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부여풍장은 다시 일본에 돌아와 백제 유민들을 선무하였고 천지천황은 그 유민들을 전국에 분산 배치하였다.

663년에 천지천황은 눈에가시인 천무천황을 제쳐놓고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동생인 선광(善光)에게 주었으며,

 큐슈가 아닌 오사카에 살도록 하였다.

 

663년 6월에 제명천황이 죽고, 다음해 간인황녀도 죽으니 천지천황은 두 사람을 합장하였다.

나라현 다카시(奈良?高市郡)에 있는데 월지강상릉(越智崗上陵)이며 45m 직경을 가진 원구이다.

 

667년 천지천황은 교토(京都)로 천도하고 대진궁(大津宮)을 쌓았으며 제명천황 서거후에

미루어 두었던 천황의 즉위식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고인대형태자의 딸 왜희왕(倭姬王. 629~698)을 황후로 세웠다.

통합을 내세워 반란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자신의 서자인 대우황자(大友皇子. 648~672)를 총애하여 천무천황의 딸인 십시황녀와

결혼시켜서 대우황자를 황태자급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부여풍장은 배반하지 못하도록 항상 가까이 두고 일을 부렸다.

천지천황은 일본 요지에 방어를 위한 축성을 하여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교토로 천도한 것도 당나라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671년, 천지천황은 병이 깊어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부여풍장을 시험하여 왕위를 이으라고 하였다.

왕위를 잇겠다는 욕심을 보이면 죽이려는 계산이었다.

부여풍장은 천지천황의 황후인 왜희왕을 천황으로 세우고 천지천황의 총명한 아들인 대우황자를

황태자로 세우라고 말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당장 출가하여 중이 되어 천지천황의

극락왕생을 빌어주겠다면서 사지를 빠져나왔다.

그날로 부여풍장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절이 많은 나라현으로 떠났다.

천지천황이 교토에서 죽었다. 고분은 교토(京都)에 있는데 서명천황과 같이 하방상원분이다.

상원의 변경은 45m 하방의 변의 길이는 76m

 

천지천황이 죽자,

 대우황자가 즉위하고 반년만에 부여풍장을 죽이려고 조여왔다.


부여풍장은 급히 산을 넘어 동쪽으로 피하였다가 점차 사방에서 모여드는 지원 군대를 모아서

거꾸로 도성으로 진격하였는데, 대우황자를 일거에 무찌르고 일본천황이 되었다.

유명한 임신란(壬申亂)이다.
이때 그를 직접 도운 장수들은 구주백제 출신들이 많았고, 또 당시 큐슈의 성주들은 대우황자의

동원령을 거부하고, 전장에 달려오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부여풍장을 도왔다.

대우황자는 궁지에 몰려서 자살하였다.

 

천무천황이 된 부여풍장은 다시 나라현으로 천도하였다.


그의 능비에는 대해인황자(大海人天皇)라 하였고,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누나카하라오키노마히도(天渟中原瀛眞人天皇)라고 하였다.
아메(
天)는 성이고 이름은 무(武)다. 대해인(大海人)은 바다를 주름잡았다는 뜻이다.
누나카하라(
渟中原)는 모정왕(茅渟王)이라고 했던 무대왕이 도성으로 삼으려던 익산(益山)

지방과 관련되는데 백제에서 그는 김제의 벽성(避城=碧城)에 도읍했다가 주류성으로 옮겼다.

누나(渟中)를 누나(農難)으로 발음하라고 720년에 기록한 것은 백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키노마히도(
瀛眞人)는 영(瀛)이 대해를 의미하고 특히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동영(東瀛)을 의미한다.
마히도(
眞人)는 마히도(間人)황녀처럼 어릴 때 왕자로서 붙인 이름이 된다.
천무천황의 황후는 천지천황의 딸인 지통천황(
持統天皇. 645~703)이다.

당나라 측천무후와 동시대 인물인데 천무천황의 후사로서 유력했던 오오쓰황자(大津皇子)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묶어두고서 스스로 천황이 되었다.

 

천무천황은 교토로부터 다시 나라현으로 천도하여 기요미하라궁(御原宮)에 살았다.
고분은 아스카(
明日香村)에 있다.

동서 58m, 남북 45m의 원형 고분이다.
그의 사후에 천지천황의 딸이자 천무천황의 비였던 지통천황이 통치하였다.

 

백제는 이렇게 초고대왕 이래 160년부터 의자대왕의 660년까지 500년간 일본을 통치하였다.
천무천황의 아들 사인친왕(
舍人親王)이 720년에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남겼다.
이때 역사를 조작하여 뿌리인 백제로부터 일본의 호적을 파내버렸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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