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백제가 대동강 평양에 건국했던 증거 17개

오늘의 쉼터 2009. 2. 12. 16:32

 

 백제가 대동강 평양에 건국했던 증거 17개

 

백제 온조대왕이 배를 타고 만주를 떠나와 한반도로 들어와서

처음 건국한 곳은 평안남도 대동강의 서쪽가지 보통강 평성시 청룡산성이며 대산한성,

하북 위례성이라 불렀고, 이후에 대동강 동쪽가지 비류강 성천군에 하남위례성을 세웠다.

동서 2성인 것이다. 대동강 하류 평양에 있던 기준의 마한을 병탄하여,

백제가 북으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태백산맥, 남쪽으로는 금강에 이르렀다.

 

 백제의 대륙 진출도

 

고구려 국모였던 소서노召西努가 비류沸流왕자와 온조溫祚왕자를 데리고 바닷가로 와서

소금장사를 하여 마침내 어하라於瑕羅를 세운 곳은 고대 어니하於泥河가 흐르던 만주

대석교시大石橋市 진미산성鎭迷山城으로 고려된다. 진미산은 발해 진주辰州가 있었고

그 이름의 유래는 진한辰韓이다. 이를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대왕이 물려받았다.


소서노의 차자인 온조왕자가 비류대왕으로부터 독립하여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와서

처음 상륙한 곳은 미추홀彌鄒忽이라 전하는데, 이는 평안남도 서해안의 영유현永柔縣

미두산米豆山이다. 미추의 변음變音이 미두인 것이다. 미추는 용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온조대왕이 오른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은 평안남도 평성시 자모산慈母山이다.

자모산성이 남아있다. 성둘레는 5000m이고, 위례성을 호위하는 5방성 중의 북방성이 된다.

온조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은좌봉殷坐峰이 그 서남에 있다.

평성시 동남쪽 백족산百足山도 온(溫=百)조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모산성 남쪽에는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있는데 첫번째 한산 수도 하북 위례성이다.

성둘레는 약 5000m다. 그곳을 상차리上次里, 또는 오리동이라고도 하는데,

위례성慰禮城의 지명이 아직 남은 것이다.


다음으로 온조대왕이 한수漢水(=平壤 大同江)로 보호된 도읍지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을 세워

 한성漢城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홀골산성忽骨山城이다.

성천은 위례성천이 어원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비류강沸流江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의 소조산小祖山도 온조산에서 유래된 것이 된다.

 

온조대왕이 처음 쌓은 마수성馬首城

압록강鴨綠江 남쪽의 의주義州 서남쪽의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모수성牟水城이다.

 낙랑이 마수성 축성을 반대하니 독산禿山, 구천狗川두 성을 쌓아 낙랑의 통로를 막았는데

이는 청천강淸川江의 북안 독산면獨山面과 개천군价川郡의 두 성이다.

온조대왕이 다시 한강漢江(=渾江) 서북쪽에 성을 세우니,

이는 압록강의 동북방인 중국 환인현의 혼강渾江에 위치한 오녀산성烏女山城이다.

백제는 환성丸城이라 했고, 지금은 환인桓仁이라 하는데, 청나라 때는 오이고성烏爾古城이라 했었다.

백제계 일본성씨인 화니和邇=丸씨, 우리말로 아이阿爾씨의 고향이다. 신공황후의 성씨가 환씨이니

그 조상들의 원향이다.

온조대왕은 평양 위치에 있던 기씨마한箕氏馬韓을 병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을 합친 백제의 남계는 황해도와 경기도를 지나 충청남도 금강錦江에 이르러서

공주公州 대두산성大豆山城, 다른 말로 콩산성公山城을 쌓게 된다.

당시 백제의 북계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패하는 고대에 파사수婆娑水,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했던 지금의 압록강일 것이다.

초기 백제 동계는 주양走壤이라고 했는데,

대동강 동계인 곡산천谷山川의 달해산達海山 달보산성達寶山城으로 고려된다. 


개루대왕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는데, 개천군价川郡 조양진성朝陽鎭城으로 고려된다.

토축이며 15000척이다. 부근에 있는 장환성長桓城일 수도 있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대왕의 한산성은 대성산 남쪽 안학궁지로 고려된다.

고구려가 훗날 한성을 쌓았는데 지금의 평양성이다.

 

[] 백제의 초기 수도가 대동강 지역인 것은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1)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明日香 기토라고분에서 나타난 벽화의 별자리가

    평양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증거된다. 백제인의 하늘은 평양 하늘이었다.

 

2) 신라의 수만 개에 달하는 고분과 고구려의 수만 개 고분에 견줄 수 있는 백제 고분은

    서울에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약 80개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고구려식이다.

    대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수만 개 고분이 있는데 이 모두가 백제 귀족 고분이며

    이를 이제까지 유령국가 낙랑군의 고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

 

3) 6세기 공주 무녕왕릉 같은 형식의 벽돌塼室 고분의 선구가 만주로 부터 대동강에 산재해 있다.

   현재 서울 한강에는 벽돌 고분이 없다.

   고구려 장수대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죽인 뒤에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였고,

   황해도 전실고분도 공주로 직접 이어진 것이다.

 

4) 일본의 벽화 고분은 백제가 전수한 것이다. 그 벽화 고분의 선구가 역시 평양 지방이다.

   서울에는 벽화 고분이 하나도 없다. 벽화 고분은 만주의 요양시를 거쳐 평양시에 전해졌고,

   그 뒤에 고구려 집안과 신라로 전해졌다.

 

5) 또한 고구려고분으로 선전된 황해도 안학3호 고분의 복식과 관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왕의 복식과 관이다. 고구려왕의 복식과 관은 색이 전혀 다르다.

 

6) 황해도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는 낙랑의 대방태수묘가 아니라 백제의 대방태수묘다.

    471년 송나라에 개로대왕의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도 장무張茂였다.

    즉 장무의 부형이 장무이인 것이다.

 

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뺏은 첫번째 성이

    만주의 단동시丹東市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만주지리풍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즉 396년 이전에 백제 땅은 만주에도 퍼져 있었다.

8) 광개토대왕에게 패퇴한 5세기, 백제가 후퇴한 수도 한성은 예성강禮成江에 있었다.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부여면夫餘面 위라천位羅川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예성강은

    본래 위례성강慰禮城江이었던 것이다.

    그곳의 피난 수도였던 태백산성은 백제 말기 수도인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똑같은 형식이다.

 

9) 대동강 평양에서는 506년 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漢城 下 後部小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천남산묘지泉男山墓誌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곳은

    한성漢城으로 나와있다. 즉 지금 평양은 본래 백제 한산성,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泉男山墓誌]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396년 백제 한산성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았다.

   한편 [평양성벽각서]에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다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무녕왕 때다.

 

10) [삼국사기]에서 한성(평양)의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가 안장왕 대에 국경을 넘어

    백제로 쳐내려와서 전투한 곳은 황해도 한복판 오곡군五谷郡이었다. (앞 지도 참조)

    북한의 역사책은 이를 백제군의 북침을 유인해서 섬멸한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한다.

 

11) [일본서기] 550년조에서 백제가 평양平壤을 쳐서 6군을 수복했는데, 본래 백제 고지라고 했다.

 

12) [삼국사기 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13) [일본서기]에서 550년 백제는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錦峴城을

    빼앗았는데 서로 싸우다가 지친 틈에 신라 진흥왕의 이사부異斯夫가 습격하여 빼앗았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과 니미방尼彌方이라고 기록했는데

   신라 우두방이 있던 곳은 금천군金川郡으로서 지금 예성강의 동편이다.

   5세기 아신대왕의 위례성이 예성강 서편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에 있었다.

 

14) 번한왕 기준箕準이 요서에서 위만衛滿에게 밀려나서 피난나온 마한이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서 기준의 9세 후예인 기정箕貞이 기원전 17년에 백제 온조대왕에게

    망했는데, 이때 기씨마한의 세력이었던 선우鮮于씨는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

    (지도 참조)의 주인이 되았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전라도 익산 구석에서 기씨마한이 망했다는 주장은

    그 후손들의 분산 배치 결과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15)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아울러 이 백제가, 이 낙랑이 양자강 동쪽을 동진東晋 말부터 백년간 거느렸다.

 

16)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의 이름이 함흥에 남아있다. 이는 뒤에 자세하다.

 

17)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백제가 발해 동북에 위치해 있었으니 백제의 만주 소유가 기록된 것이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이렇게 많은 대동강 백제 평양의 증거가 무시되는 국사는 결코 진실된 역사가 아니다.

  제 조상 무덤을 호로새끼 무덤이라 하면서, 스스로 근본을 부인하고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은 사실 우리 국민들의 뜻이 아니다.

   고려 말기 이후로부터 썩은 지식을 대대로 후손에게 사기쳐서 팔아대며 살아가는

  소인배 양반 학자들의 만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