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고구려 국내성

오늘의 쉼터 2009. 2. 12. 15:58

 

 

 

 

고구려 국내성

 

 

고구려 3경의 하나로서 국내성을 찾기 위해선 고대 강물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 고구려의 강물


현도군에서 마자수가 서북으로 흐르다가 염난수와 만나고 압록강이 되어 국내성 서쪽으로 흐른다.

현도군에서는 마자수압록강 이외에 세 물이 발원한다.

색외로 나가는 남소수가 첫째고, 대요수와 합치는 소요수가 둘째고, 대요수가 세째인데

 대요수는 대릉하와 방현에서 만나서 안시현 서쪽에서 바다로 나간다.

이렇게 동일하게 현도군에서 발원하면서 대릉하와 가까운 곳에서 바다로 나가는 압록강과 대요수,

소요수 등은 위에 보이는 강물 지도와 같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릉하라는 물길이 남아 있어 대릉하와 대요수가 만난 것이 증명된다.

이 두 물의 최종 출해구가 안시 서쪽인데 압록강도 역시 <신당서> 기록에 의하면 안시 서쪽에서 출해했다.

 망평은 의무려산 동쪽에 있던 항구이며, 안시는 망평 남쪽에 이웃하였다.

당태종이 말하기를 대릉하를 건너 현도에 가겠다고 했는데 이 역시도 현재 제시된 강물이 맞는 것이다.

패수는 고대 낙랑군의 패수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패수가 다르다.

고대 낙랑군의 패수에는 왕검성이었던 고구려 구도성(九都城)이 있고, 동천왕이 평양성을 세웠었다.

그러나 북위시대 씌어진 <수경지>에서 이 고대 패수와 장수왕이 새로 만든 요양시 태자하 평양성의 패수를 혼동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명나라 시대에는 고구려 멸망 때 잠시 파천했던 고구려 한성(漢城), 즉 대동강 평양성을 낙랑군 패수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들은 중국인의 낙랑군과 낙랑군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이 한반도 대동강까지 있었으니,

북한 정권이 흔들리면 중국군이 진입하여서 그들의 고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세울 것이데

그 역사적 증거가 아주 오래전부터 조작된 것이다.

대동강 평양성벽에 고구려인이 한성이라고 새겨넣은 돌비석이 남아 있고,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 비문에 의하면 한성에서 망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보장왕의 손자가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어 돌아와서, 700년경에 독립하여 세운

후고구려국의 수도가 대동강 평양인데 820년에 발해에게 멸망했다.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어 국내성을 지나는 곳은 지도에 나타난 부신시 사가자진 신개하 남변이다.

 신개하 북쪽에 고려도(庫力圖)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서쪽에는 구하자(拘河子)라는 지명이 있다.

▲ 국내성상세지도


위성으로 보여진 국내성은 동서가 5km에 달하고, 성내 마을은 팔루자라고 하는데,

8개의 성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히 10만의 장병을 둘 곳이다.

서남쪽 성벽에는 성문루를 지은 토대와 보호벽을 만들어놓은 이중의 성문이 보인다.

▲ 국내성성곽도


▲ 국내성서남벽정문


고구려말에 불열말갈(拂涅靺鞨)인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이주해와서 598년부터 용맹한 말갈병으로서

고구려 지휘로 수나라, 당나라와 용병으로 싸웠다.

연남생이 동생들에게 쫓겨나 이 국내성에서 은거했고 이때 휘하의 말갈병들까지 데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발해 건국 때에 이들은 말갈추장 걸사비우의 지휘를 받았고, 발해 때에 불열국(拂涅國)이라는 속국을

이 곳에 세워 발해 동평부를 담당하였다.

요나라는 이 곳에 휘주(徽州)를 두었으며 그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요나라가 금나라와의 휘주 전투에서 패퇴하니 신주(新州)까지 약탈된다.

신주가 바로 고구려 서변의 요지 신성(新城)이다.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 비문에는 동생들에게 배신당한 천남생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공격하러 가다가 오골성에서 중지하고 군대를 뒤로 돌려서 도망한 곳이 해북(海北)의 현도성(玄菟城)이라 되어있다. 해북은 대릉하 하구 금주시에 있다.

현도성에서 당나라에 그의 아들 천헌성(泉獻誠)을 보내 항복을 알린다.

천남생 묘지 비문에서는 그들이 점거한 곳이 국내고도성(國內故都城)이라고 했으며,

천남생은 “국내성 등 6성”의 백성을 당나라에 바친다며 항복했다.

당나라는 그에게 현도군개국남(玄菟郡開國男)이라는 작호를 주었다.

즉, 국내성은 현도의 중심이다.

천헌성은, 그의 묘지문에서 국내고도성에 들어가, 서쪽으로 당나라 병사를 끌어들이고,

동쪽으로 요침을 막았다고 하였다.(西引漢兵, 東掃遼侵)

국내성에서 동쪽의 고구려 요침을 막았다면,

그 국내성은 당연히 요서(遼西)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천헌성은 본래 소수맥구려(小水麥句麗)에서 태어나 요우(遼右)에서 이름을 날렸으니

원래가 요서 출신이었다.